83화
‘그 아이는 뭐였지?’
마테오 백작이 88년 평생 처음 보는 오러였다. 고고하기도, 진하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짜임새 없이 거칠기도 한… 그런 연분홍빛 오러. 유령 전쟁 당시 적국에서나 보았을 법한 특이한 오러.
‘그 아이에겐 검이 없었어.’
짧은 순간 보았을 뿐이지만, 마테오 백작은 아이젠의 허리춤에 참철검이 매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소문으로만 듣던 직계의 집쥐 공자가 바로 그 아이였던 모양이었다. 이름이 분명 아이젠이라고 했던가.
‘철이라. 강한 이름을 주었군.’
마테오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풋내기일 뿐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공자라 한들 마테오에게는 갓난아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만약 그 어린 갓난아기들 중에서 단 한 명의 우승자를 점쳐야만 한다면.
‘그게 누가 되었든, 포대기를 풀고 스스로 기어 나올 줄 아는 아기야말로 우승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직계와 방계를 막론하고 말이다.
사울 장로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한 얼굴로 잠자코 있었지만, 마테오 백작은 그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대답을 해 주기로 했다.
“다른 아이들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소. 하지만…….”
“하지만?”
파직!
마테오 백작의 손에서 잠깐 번개가 피어올랐다. 정작 그 자신이 놀라 흠칫 번개를 거두어들였지만 말이다.
‘이 나이에 나도 흥분이 되는군. 홀홀홀.’
마테오 백작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1차 본선에서 최소 절반이 사망할 것이오.”
그의 말은 받들어 모시는 귀족에게 하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조소였다.
* * *
아이젠의 온몸에 상처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 자식들, 얍삽하게 굴래?”
“캬샤샷. 멍청한 인간.”
“캬샷.”
“이것들이.”
아이젠이 프렘린들에게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
두 프렘린은 언제나 아이젠을 한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원거리에서 아이젠을 공격했다. 아이젠이 프렘린 하나에게 접근하려 하면 반대편에 있는 프렘린이 아이젠의 등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무엇으로 공격하느냐? 바로 이곳 피시 트랩 던전의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화살이었다.
“캬샷.”
“외공으로도 튕겨 낼 수 없다니, 대단하긴 한걸.”
두 프렘린은 각자의 손에 활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팔에는 나뭇가지를 마구잡이로 들고 있었다.
나뭇가지로 만든 화살이 예상외로 단단한 것과는 별개로, 두 프렘린은 상당히 체계적으로 아이젠을 공략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냥당하고 있는 것은 프렘린이 아니라.
“내가 먹이 쪽인가.”
아이젠인지도 몰랐다.
“후우.”
아이젠은 멈춰 서서 심호흡을 했다.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아이젠으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레드 스톤을 모아야 했으나, 두 프렘린도 어서 사람을 잡아 먹어 치우고 싶을 터. 아이젠이 다급해하지 않아도 프렘린들은 알아서 아이젠에게 덤벼 올 것이었다. 실제로 두 프렘린은 아까부터 연신 침을 흘려 대고 있었다.
“캬샤샷. 인간, 인간 고기가 이게 얼마 만이냐.”
“내가! 내가 먼저 먹을 거다.”
“내가 먼저야!”
“그렇다면 먼저 먹는 쪽이 임자다. 캬샤샷.”
“그거 좋지. 캬샤샤샷.”
저 자식들이. 당사자 협의도 없이 누가 먼저 먹느니 마느니 상의하는 꼴 좀 보게.
아이젠의 이마가 찡그려졌지만, 그는 다시 심호흡해 근육을 풀었다.
‘놈들은 상급 마물이야. 그런트를 대할 때처럼 상대하면 안 돼.’
그런트는 무리 지어 다니는 습성 탓에 위협적이었을 뿐, 그 정체는 하급 마물에 불과했다. 하급 마물은 조금 강한 짐승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급 마물부터는 얘기가 다르다. 중급 마물부터는 인간을 좀 더 체계적으로 사냥할 수 있게 되며, 상급 마물이 되면 인간 이상의 사냥 능력을 뽐낸다. 이렇게.
“캬샷!”
투웅!
아이젠의 뒤쪽에 서 있던 프렘린이 화살을 쏘았다. 아이젠이 움직이는 것을 기다리다 못해 선공을 가한 것이었다.
아이젠은 빠르게 뒤로 돌았다. 화살은 어찌나 빠른지 어느새 아이젠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낚아채!’
본능이 시키는 대로.
타악―! 아이젠은 화살을 낚아챘다.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도 화살이 날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잡을 수 없어.’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낚아챌 수 없다. 그것은 전에 만났던 길버트의 화살보다도 빠르고 억셌다.
‘피해!’
휘익!
츠팟!
“윽.”
아이젠의 다리가 살짝 베였다. 프렘린은 아이젠의 장딴지를 꿰뚫어 버릴 기세로 노린 것이었으나, 아이젠이 재빨리 발을 놀려 살갗을 조금 스치는 정도에 그쳤다.
“캬샤샷. 인간 따위가 제법이구나.”
못내 아쉽다는 어조로 말하는 프렘린의 목소리를 들으니 아이젠은 슬슬 열이 받았다.
“아, 나. 이 새끼들이 진짜.”
그러나 흥분하진 않기로 했다. 아이젠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무혈신공의 묘리를 호흡에 담았다.
후우우―
긴 한숨이 소리 없이 멎어 들고, 그는 눈을 감았다.
“캬샷?”
“뭐지, 인간?”
두 프렘린이 경계하는 소리가 들렸다.
활잡이를 앞에 두고 눈을 감다니.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자살당하고 싶어 환장한 것인가?
그러나 프렘린들은 상급 마물. 쉽게 경계심을 풀지는 않았다.
아이젠은 속으로 되뇌었다.
‘들어와라.’
가만히 선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청각에만 의지해 화살을 낚아채겠다는 둥, 그런 객기를 부리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몸만은 자세를 잡고 있어야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의도지?
“캬샤샷.”
“캬샷.”
프렘린들은 혼란을 느꼈고, 결국 앞에 있던 프렘린이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시위를 당겼다.
“캬샷! 죽고 싶다면 죽여 주지!”
“캬샷, 안 돼! 쏘지 마!”
“죽어랏!”
투웅!
프렘린이 동료의 말을 무시하고 시위를 놓자, 나뭇가지 화살이 아이젠을 향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쉬이이익!
공기를 가른다기보다는 ‘찢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만큼 그 소리는 매섭고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아이젠에게는 아니었다.
아이젠은 화살이 날아드는 위치를 계산하지 못했다. 그래서.
쿠욱!
허벅지에 화살이 꽂히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나뭇가지는 아이젠의 허벅지를 뚫고 뒤쪽 살갗을 찢어 반 정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아이젠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럴 틈이 없었으니까.
‘목롱보(目弄步)!’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쏜 프렘린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했고.
팟!
어느새 프렘린의 등 뒤로 이동해 있었다. 허벅지에 박힌 화살의 방향으로 프렘린의 화살이 날아든 방향을 완벽히 포착해 조금의 틈도 없이 창졸간에 놈의 등을 노린 것이었다.
“캿?”
프렘린이 놀라 뒤를 돌아볼 때.
“어딜 보냐.”
프렘린의 뒤에 아이젠은 없었다. 짧은 순간 벌써 프렘린의 앞으로 이동해 있었던 것.
“인간―!”
“죽어.”
아이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이었다.
‘결사신권, 권왕백무(拳王百舞)!’
아이젠도 상급 마물을 ‘박살’ 정도의 공격으로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다. 해서 아이젠은 곧바로 권왕백무를 내질렀고.
파파파파파팡!
프렘린의 몸을 터뜨려 버렸다.
촤악!
바닥에 피와 살점을 부채꼴 모양으로 퍼뜨리며 증발해 버린 프렘린의 모습을 보고.
“캬, 캬샤앗?”
뒤쪽에 서 있던 프렘린이 바짝 쪼그라들었다.
아이젠은 그를 돌아보았다.
“왜? 떫어?”
“캬. 캬샷! 인간 따위가!”
프렘린이 활과 화살을 집어 던졌다. 그러더니.
“캬아아아앗!!”
싸아아아아!!
온몸의 털을 바짝 곤두세워, 몸을 키웠다. 프렘린의 손목에서부터 발목까지를 잇는 거대한 피막이 나타나 프렘린의 몸집을 크게 불렸다. 마치 공작새나 목도리도마뱀이 상대를 위협하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평범한 짐승이라면 그 모습을 보자마자 냅다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프렘린에게는 애석하게도 아이젠은 평범한 짐승이 아니었다.
“뭐.”
“캬…앗?”
“겁먹어야 되는 거야?”
“왜, 왜 무서워하지 않지. 캿.”
“안 무서우니까?”
결사신권, 목롱보.
팟!
아이젠은 벌써 프렘린의 갈퀴 뒤로 이동해 있었다.
“헉!”
“동료가 있는 곳으로 보내 주마.”
결사신권, 권왕백무: 관(貫)!
퍼엉!!
포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나머지 프렘린마저 허공에 피와 살점을 흩뿌리며 사라졌다.
“휴우.”
떨그렁―
아이젠은 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레드 스톤. 프렘린의 심장이자 귀중한 보석이기도 한 물질. 자세히 보니 조금 전 죽였던 또 다른 프렘린도 발치에 레드 스톤을 남긴 채였다.
“이게 레드 스톤인가?”
아이젠은 두 레드 스톤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무게가 묵직했다. 아이젠은 던전 돌입 전 배부됐던 가방에 레드 스톤 두 개를 집어넣었다.
“하나에 대충 5kg씩은 하겠어. 두 개만 해도 벌써 10kg.”
만약 열 개를 모은다면 50kg, 스무 개를 모은다면 100kg이 된다. 그렇게 되면 웬만한 장정이라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움직이기는 버거울 터.
“레드 스톤을 많이 모아야 하지만, 많이 모을수록 몸은 무거워진다 이건가.”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아이젠은 이런 아이러니를 싫어하지 않았다.
“재밌겠어.”
아이젠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사아아.
아이젠은 기척을 느꼈다. 정확히는 살기에 가까웠다. 그를 날 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누군가가 근처에 있었다.
‘마물은 아닌데.’
마물에게서 풍기는 살기와는 조금 달랐다. 마물의 살기는 어디까지나 인간을 잡아먹기 위한 살기. 하지만 이 살기는, 그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는 악독한 의지가 가득 담긴 살기였다.
‘누구지?’
이 정도의 투기를 거름망도 없이 스멀스멀 뿜어 대는 자가 대체 누구인가.
“…….”
아이젠은 가방을 정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무와 수풀만이 그곳에 자리하고 있을 뿐, 살기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살기는 여전히 느껴지고 있었다.
‘흠.’
그것은 그린우드가 낼 수 있는 기운이 아니었다. 그린우드들은 모두 어딘가 고상한 척하는 기운을 내곤 하니까.
흑기사도 아니었다. 마테오 디 잔니니 백작은 던전 안에 흑기사들이 상주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흑기사들은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역할일 뿐. 그들은 기권하는 그린우드가 나오면 그들을 호송하기 위해 존재한다. 암살자로서가 아니라. 즉, 외부인이 있었다.
‘귀찮은데.’
아이젠은 외부인이 자신에게 살기를 보내오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벌써 피곤해지는 기분이었다.
귀찮다. 그렇다면 빨리 처리해야겠지. 그러기 위한 방법을 아이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벅― 저벅―
아이젠은 걸었다. 수풀을 지나 피시 트랩 던전의 끝이 나오는 지점까지 걸어가야 통과다. 레드 스톤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피시 트랩 던전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 아이젠은 목적지를 향해 걷는 척하며 기감을 펼친 것이었다. 그러다가.
‘함정.’
눈앞에 함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주변 풍경과 일체화된 흙바닥. 그 밑은 한 발 디디기만 해도 창살의 밭이 나오는 진창이었다.
아이젠은 함정을 꿰뚫어 보았다. 기감을 펼치지 않았더라면 아이젠도 함정에 당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그린우드라면 쉽게 당했을 것이었다. 가령 한스 같은.
‘날 노린 함정이냐?’
아이젠은 아직도 살기를 내뿜는 미지의 적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함정은 아이젠만을 위해 설치된 것. 그렇다면.
‘당해 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아이젠은 평범한 속도와 보폭으로 걸어 함정 위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쿠과과광!!
스스로 창살밭이 있는 함정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