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 * *
끄아아아아악!!
비명이 던전을 울렸다. 아이젠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멀지 않았다.
‘벌써 탈락자가 발생한 건가?’
생각하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려왔다.
- 2 방계의 하디 반 그린우드 님께서 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조금 전 들었던 마테오 디 잔니니 백작의 목소리였다. 마테오는 벽력 마법을 통해 마치 통신 장비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널리 퍼뜨릴 수 있다고 아이젠은 들었다.
“이게 그건가? 마치 전음입밀(傳音入密) 같구만. 전음입밀은 머릿속에서만 들리는 거고 이건 실제로 들리는 거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무공은 중원 무림에도 있었다.
“이것 참. 우는 여인은 정말로 흉내를 낸 것에 불과했잖아?”
잔니니 백작가. 그곳의 벽력 마법. 우는 여인이 흉내 낸 것과는 정말 차원이 다르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아이젠은 조금 전 들은 하디 반 그린우드라는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진 몰랐다. 다만 어쨌든 벌써부터 탈락자가 발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 가능성. 그린우드끼리 맞붙었다.’
1차 본선의 핵심은 프렘린을 사냥하고 그 부산물인 레드 스톤을 더 많이 모으는 쪽이 2차 본선에 진출하는 것. 하지만 규칙 어디에도 ‘그린우드끼리 싸워선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즉.
“직·방계끼리 혈투를 벌여도 된다는 얘기지.”
다음 대 가주를 뽑는 경합이었다. 서로의 참철검이 어디로 향하든 막을 자는 없을 터. 그것이 아이젠이 생각하는 첫 번째 가능성이었다. 하디라는 녀석은 돌입하자마자 근처에 있던 다른 그린우드에게 당해 탈락했다는 것.
하지만 아닐 수도 있었다. 아직 두 번째 가능성이 남아 있으니.
‘두 번째 가능성은…….’
사삭!
아이젠은 멀리 수풀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 그 소리는 아주 작았다. 아이젠 정도의 청력을 가진 게 아니라면 포착할 수 없을 만큼.
“…나와.”
아이젠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두 번째 가능성. 그것은.’
아이젠의 추리가 이어졌다. 피시 트랩 던전에 돌입하자마자 탈락한 것, 그 두 번째 가능성은 바로.
“캬샤샤샷.”
프렘린에게 습격을 당했을 경우.
“…….”
아이젠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프렘린을 마주 보았다. 키는 대충 2m 정도 될까? 어쨌든 사울 장로보다도 큰 키였다.
사람처럼 한 쌍씩 있는 팔다리는 얇고 길쭉길쭉하게 뻗어 있어 기괴한 느낌을 주었고, 결정적으로 피부가 다홍색인 데다 온몸에 털이 한 올도 없었다. 하늘로 곧게 뻗은 두 귀는 날카롭게 찌를 듯 끝이 뾰족해 공포감을 조성했다. 아이젠은 딱히 무섭지 않았지만.
“네가 프렘린이냐?”
“캬샤샷. 인간. 인간이다.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다.”
사람의 말을 할 줄 알다니.
‘역시 상급 마물인가.’
상급 마물은 무엇이 다른가? 상급 마물은 사람처럼 사회를 조성할 줄 알고 지능이 월등히 높다는 점이 다른 마물과 달랐다.
“캬샤샷!”
파사삭!
아이젠의 등 뒤에 있던 수풀이 좌우로 갈라지며 열리더니 그 속에서 또 다른 프렘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프렘린은 길게 뻗은 손톱으로 아이젠의 목덜미를 휘어잡을 듯 날아들어 왔다. 그러나.
‘결사신권.’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프렘린의 관성을 이용하기로 했다.
‘박살편(撲殺鞭)!’
아이젠의 손날이 채찍처럼 프렘린에게 덤벼들고, 아이젠에게 정면으로 날아들던 프렘린은 그 손날에 베여 두 동강이 나야 했으나…….
“캬샷!”
챙강!
프렘린이 손톱의 단단한 부위를 앞세워 아이젠의 손날을 막아 냈다.
뚜둑!
그 탓에 프렘린의 손톱이 부러져 잘리긴 했으나, 녀석의 목은 아직 건재하게 붙어 있었다. 만약 손톱으로 막지 않았다면 프렘린은 제 목을 잃었을 것이었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프렘린이 아이젠의 공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막아 낸 것.
“오.”
아이젠은 조금 놀랐다. 한낱 마물 따위가 촌각을 다투는 결투에서 이토록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니?
“캬샤샷.”
“캬샷.”
두 마리의 프렘린이 서로의 몸을 바짝 붙이고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아이젠은 주저하지 않고 온몸에 홍화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4성, 홍화의 경지.’
푸확!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린 터라 아이젠의 몸 밖으로 홍화가 솟구쳤다. 하지만 아이젠은 알았다. 여기서 평소처럼 천천히 무혈신공을 운용했다가는, 자신을 마주 보는 두 프렘린에게 순식간에 당하리라는 것을.
“쉽게는 안 당해 줄 건데.”
“캬샷. 인간. 오랜만에 보는 인간.”
“맛있겠다, 인간!”
새삼 생각해 보면 그린우드도 정상은 아니었다. 아직 미성년에 불과한 자제들에게까지도 이런 마물과 맞붙어 싸워 이기라는 것 아닌가.
‘제정신이 아니야.’
아이젠은 자신의 양 팔뚝에 있는 아이기스를 보며 생각했다. 이 물건의 원래 주인부터가 제정신이 아니란 거겠지. 물론 아이젠에게야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지만.
‘강자와 싸울수록 결자해지의 효과는 커지지.’
아이젠은 이 소가주전에서 5성을 달성하기로 했다. 본선이 끝나면 자신은 5성을 넘어 있으리라, 아이젠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프렘린은 그를 위한 발판이었다.
“덤벼.”
“캬샷.”
아이젠은 기뻐서 미소 지었다. 그의 양 주먹에 홍화가 스며들어 갔다. 아이젠은 땅을 단단히 딛고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안 오면 내가 가고.”
탓!
그의 신형이 쏜살같이 프렘린들에게 쏘아졌다.
* * *
피시 트랩 던전 깊숙한 곳. 지난 수십 년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던 깊은 공간. 그곳에는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군락이라 해 봐야 초목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막집이 대부분이었지만 말이다.
그중 한 막집 안에서.
“그르릉……. 그르릉…….”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코를 고는 이는 막집 바깥쪽으로 등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등은 진홍색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막집 안으로 벌컥 들어왔다.
“캬샷! 버디 님! 버디 님!”
그것은 프렘린. 코를 골던 버디는 소리를 멈추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버디의 키는 3m가 조금 넘었고, 그의 등은 다른 프렘린보다 두 배는 넓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방금 막집으로 들어온 프렘린이 버디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놈들이 왔습니다! 그린우드 인간 놈들이 왔습니다! 캬샤샷!”
“…드디어 왔나.”
버디가 고개를 돌렸다. 다른 프렘린들과 달리 피부가 진홍색인 그의 온몸은 피가 도는 게 보일 정도로 유독 진피층이 얇았다.
“예! 왔습니다! 40년 넘게 기다리신 보람이 있습니다! 캬샤샤샷!”
“그래……. 정확히 40년이지.”
실로 감개가 무량했다. 버디는 눈을 감고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았다.
그는 원래 야생 프렘린이었다. 인간들을 먹이로 삼아 사냥하고 다니던 흔하디흔한 프렘린 중 하나. 그러던 중 어느 날 그린우드 가문에 붙잡혀 이곳 던전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이곳 피시 트랩 던전은 야생 프렘린의 감옥 역할도 하기 때문이었다.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한순간도 그린우드 놈들에 대한 원한을 잊은 적이 없다!’
버디가 붙잡혀 오고 3년째 되는 해에 이 던전에 그린우드들이 대거 입성한 날이 있긴 했다. 그때 버디는 복수를 다짐했으나, 알브레히트라는 이름의 녀석에게 베여 죽을 뻔했다 간신히 살아 도망쳤다.
‘그때 놈에게 베인 어깨의 상처가 아직도 쑤셔.’
도망친 후 버디는 이곳 피시 트랩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때를 기다렸다. 다음번에 또다시 그린우드들이 대거 입성할 날을! 그날이 언제 찾아올지는 알 수 없었으나,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버디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37년 만에 다시 그날이 왔다.
“캬캬캬캬…….”
버디의 한 서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피시 트랩 던전에 들어온 지 30년이 조금 넘었을 때였나, 버디는 마혼으로 각성했다. 마물의 상위에 있는 마혼으로 말이다.
“잔니니 그 영감탱이한테 들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 캬캬캬!”
마혼으로 각성하고서도 버디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곳 피시 트랩 던전을 관장하는 잔니니 백작가에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숨을 죽인 채 살아왔다. 버디는 일전에 한번 마테오 백작의 벼락을 목격한 적이 있는데, 그때 하늘이 노한 것만 같은 충격을 받고는 감히 그에게 맞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버디가 깨어날 때였다.
“오늘! 그린우드 놈들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 캬캬캬캬캬!”
버디의 목적은 그린우드에 복수하는 것! 그 복수를 실현할 날이, 바로 오늘 찾아왔다.
버디의 웃음소리는 길게 뻗어 나갔으나, 애석하게도 그린우드의 핏줄들에게까지 들릴 만큼 널리 퍼지진 못했다. 그 웃음소리를 들었다면 필시 도망쳤을 텐데.
* * *
“…후우.”
한편, 아이젠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가운데 두고 앞뒤로 서 있는 두 마리의 프렘린을 흘겨보면서 말이다.
“흐음.”
아이젠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캬샤샷.”
“캬샷.”
반면 두 마리의 프렘린은 기세등등했다.
아이젠의 온몸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상처 부위에선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거 쉽지 않겠는데.”
아이젠의 입에서 처음으로 위기감이 담긴 말이 흘러나왔으나, 정작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완연했다.
“쉽지 않은 걸 즐기는 타입이지, 나는.”
* * *
“마테오 백작님.”
“음…….”
마테오 디 잔니니 백작은 임시 막사에 조촐하게 차려진 티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따뜻한 차를 대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울 장로였다.
“대접할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아니오. 고맙소.”
마테오는 맥없는, 그러나 진기가 담긴 목소리로 사울 장로가 건네는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렇게 다시 뵈니 영광입니다. 25년 만인가요?”
“벌써 그렇게 됐나. 허허, 늙은이가 죽지도 않고 또 그린우드 공작가를 위한 소가주전에 왔소.”
“죽다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백작님께선 제국의 영웅이십니다. 그린우드의 자제들도 모두 백작님을 우러러보고 있을 겁니다.”
사울 장로의 말은 단순한 사탕발림만은 아니었다. 마테오 디 잔니니는 25년 전 있었던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유령 전쟁에서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 전쟁 영웅. 이제는 다 늙어 머리도 몇 가닥 남아 있지 않았지만, 젊은 날에는 그에게도 호랑이 같은 면모가 있었다.
사울 장로가 감회가 새롭다는 듯 말했다.
“37년 전에도 백작님께서 소가주전을 관장하셨다지요?”
“그때 만난 어린 테오발트 공자님께서 지금은 가문을 이끄는 공작이 되셨소.”
“그렇습니다.”
마테오 백작은 지난번 그린우드 소가주전의 본선도 관장했다. 당시의 우승자는 테오발트 폰 그린우드. 지금의 현 가주.
이제 와 말이지만, 마테오는 그 당시 테오발트가 우승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신념을 엿보았으므로. 그 어린 청년의 눈빛에서 말이다.
“이번에는 어떤 재능 있는 아이들이 나와 줄지. 홀홀홀.”
“말이 나온 김에 우승자를 한번 점쳐 보시겠습니까?”
“내가 말이오?”
“짐작 가시는 바가 있다면.”
사울 장로가 궁금하다는 목소리로 묻자.
호로록―
마테오 백작은 다시 찻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기재가 있어 보이는 아이들이 꽤 자리해 있었소. 특히 직계의 장손인… 그 아이는 이름이 무엇이오?”
“게오르크 공자님 말씀이시군요. 말씀하신 대로 직계의 장남입니다.”
“그래, 그 아이가 참 대단해 보였소…….”
그러면서도 마테오 백작은 사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벽력 마법으로 텔레포트를 시전하기 전에, 마테오는 분명 보았다. 그린 오러를 품고 있는 그린우드 직·방계 사이에서 홀로 고고히 연분홍빛 오러를 내뿜는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