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 * *
어느덧 밤이 깊었다. 아이젠은 그노시스 도심에서 나와 사막으로 향했다.
사막의 땅이란 이름답게 그노시스 외곽은 완전히 모래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입자가 곱고 부드러운 모래였다. 손으로 움푹 퍼내면 손가락 사이사이로 흘러내릴 만큼.
아이젠은 그중 가장 높은 사구 위에 우뚝 섰다. 말이 사구지, 거의 산이나 진배없는 높이였다.
모니카는 대동하지 않았다. 지금 아이젠이 할 것은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서는 수행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도련님…….’
모니카는 사구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아득히 보이는 아이젠의 신형만을 눈에 담았다. 아이젠은 마치 점처럼 작게 보였다. 그건 아이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젠에게는 멀리 있는 모니카가 작은 콩알만 하게 보였다.
“후우.”
그는 심호흡을 했다. 밤이 깊긴 했지만, 아직도 소가주전 본선의 시작까지는 사흘이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여태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이젠은 웃음이 나왔다.
하루 만에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피스풀 지하 감옥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배후도 알아냈고, 시장에서 방계의 두 도련님과 싸우기도 했으며, 아이기스의 사용법을 알아내고자 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일은 유진 그레이번스를 만난 일이었다.
‘도유진.’
아이젠은 생각했다. 도유진, 너는 차원을 넘어 이곳에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거냐? 아니, 어쩌면 괴롭히는 게 아니라―
그만. 아이젠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그가 지금 할 일은 잡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무혈신공(武孑神功).”
아이젠은 홍화의 기운을 몸 곳곳에 흘려 넣었다. 혈관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르고, 혈액이 아이젠의 내공에 길을 비켜 주었다.
화아아아―
잠시 후 아이젠의 몸 밖으로 홍화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아이젠이 작게 읊조렸다.
“결사신권―”
아이젠은 홍화의 기운을 몸 밖 한 점에 담았다.
화아악!
그러자 아이젠의 눈앞에 홍화의 기운이 뭉텅이의 형태로 모여들었다.
화아아. 화아아.
뭉텅이는 모이고 모여 마침내 어떤 형상을 띠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아이젠의 형상. 아이젠의 눈앞에는 연분홍의 아이젠이 서 있었다. 아이젠과 같은 자세로.
“적도심경(敵道審憬)!”
이것이 결사신권 4성의 비기, 적도심경(敵道審憬). 홍화의 기운으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내는 것.
‘내 주먹에 맞설 상대는 나밖에 없어.’
아이젠의 결사신권은 아이젠만이 쓸 수 있었다. 그것은 비단 이 세계에서뿐만이 아니라 전생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승 이화도가 물려준 무혈신공을 바탕으로 아이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권법이 바로 결사신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이젠은 결사신권의 무공을 가진 다른 자와 겨뤄 본 적이 없었다. 하여 이와 같은 비기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무공을 쓰는 적(敵), 적도심경이라는 묘리를.
“…….”
물론 적도심경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아니었다. 아이젠이 내공으로 형성해 낸 분신에 불과하므로. 하지만, 이 순간 아이젠에게는 대련하는 데 가장 최적의 존재이기도 했다.
“어디 한번 해 볼까?”
- …….
아이젠은 남은 사흘을, 적도심경과의 대련에 쓰기로 마음먹었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콰아아앙!
비슷한 두 신형의 주먹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앞으로 적어도 사흘간은 울려 퍼질 폭음의 주인공들이었다.
* * *
끼익― 탁.
그레이번스 대장간. 유진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카론은 뒷방으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방 안에 우뚝 서서 조금 전까지 이곳에 함께 있었던 아이젠에 대해 곱씹어 보았다.
‘검을 쓰지 않는 그린우드라님. 허험.’
납득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지난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카론은 오직 참철검을 쓰는 그린우드만을 모시며 살아왔으니까. 테오발트 이전에도 두 명의 가주를 더 보아 온 카론으로서는 검이 아닌 주먹을 쓰겠다는 아이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 노인의 고집일 뿐이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슬퍼지는 카론이었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살아야 하는감.’
다만 그저 서글픈 마음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벌써 팔순을 코앞에 둔 나이이지만, 카론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이 나이에 가슴이 막 설렌다니. 그것은 비단 검을 쓰지 않는 그린우드를 만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 팔찌, 분명 말을 해 주진 않았지만…….’
카론도 나름 연륜이 있는 자였다. 그는 팔찌의 이름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넘겨짚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 그에게 있어서는 확신이었다.
‘아이기스.’
분명 아이기스, 그 물건일 터. 천 년 전에 초대 가주 지안니의 죽음과 함께 실전되었다는 그 참철검 말이다.
‘어째서 검이 아니라 팔찌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 아이기스였엄.’
게다가 대체 어떤 경로로 그 팔찌가 아이젠에게까지 흘러들어 갔는지? 그것은 아이젠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게 아닌 이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카론은 그에 대해 아이젠에게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그 아이에게 주어진 운명, 전달된 숙명이라면, 그 아이가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겠지.
‘기대돼.’
카론은 아이젠의 앞날이 기대되었다.
가만히 서서 여기까지 고민하기를 어느덧 10초. 방 안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그림자가 카론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왜 서 계세요, 카론 님?”
“아. 이거 실례했습니담, 부인.”
카론은 부인이라 부른 자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가 조금 걸어 가까이 다가가자 달빛을 받은 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바로 참철검가 그린우드 공작 가문의 정실, 기젤라 폰 그린우드 공작 부인이었다.
“괜찮아요. 어서 들어오세요.”
기젤라가 이곳에 방문한 것은 아이젠이 방문하기로부터 불과 1~2분 전쯤이었다. 그렇기에 카론도 그녀를 이곳 작은 방에만 모셔 놓고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시자마자 넷째 아드님께서 찾아오시는 바람에 물 한 잔도 대접을 못 했습니담. 용서해 주십시오.”
“괜찮다니까요. 제가 가서 그 아이를 맞이하시라고 한 거잖아요. 그렇게 고개 숙이시면 제가 너무 민망해요.”
카론은 기젤라의 앞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부복했다.
테오발트 같은 무인들에게야 거리낌 없이 편하게 말을 할 수 있다고 해도 일반적인 귀족들을 상대할 때는 경우가 달랐다. 기젤라는 공작 부인. 연배로는 카론이 훨씬 연상이지만 마주 앉는 것은 허락되지 않기에 이러는 것이었다. 정작 기젤라는 그런 카론의 태도가 불편한 듯 보였지만 말이다.
“저희가 본 지가 벌써 몇 년인데. 아직도 이렇게 정중하게 구시면 서글퍼요, 카론 님.”
“당연한 예의지요. 그나저나 ‘마력 열차’는 좀 편안하셨는짐?”
“편했어요. 조금 사치가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린우드 부지에서 이곳 그노시스까지 가장 빨리 오시려면 마력 열차만 한 게 없으니까요. 허험.”
세간에는 악처라고 소문난 것이 바로 기젤라였다. 아무래도 가문 행사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고 넷째인 아이젠을 미워한다는 괴소문이 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사실 기젤라는 누구보다도 자식들을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였다. 아이젠조차, 비록 친아들이 아님에도.
“찾아왔던 게 아이젠이죠? 아이젠은 좀 어떻던가요?”
“가문의 저택에서 자주 보셨을 텐뎀.”
“못 봐요……. 제가 그 아이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세간에서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만들어 내곤 하니까요.”
기젤라가 아무리 아이젠에게 친절히 대하려 해도,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비뚤어져 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도 마냥 틀린 것이라곤 볼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서자를 대하는 정실부인의 마음이란 그다지 곱지만은 않을 테니.
하지만, 기젤라는 정말로 아이젠을 귀히 여기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아이젠에게 다가설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요즘 많이 바뀌었다고 하더라구요. 정작 어미인 저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예, 확실히 그러신 것 같습니담. 전에는 어떠셨는지 모르겠지만요.”
“어땠는데요? 구체적으로 어떻던가요?”
기젤라는 아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몸을 카론 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카론은 부복한 채로 피식 웃을 따름이었다.
“부인, 오늘 찾아오신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시지 않습니깜?”
“아. 그, 그렇죠.”
기젤라가 괜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돌릴 때 카론이 말했다.
“소가주전… 때문이시지요?”
“그, 그걸 어떻게…….”
“척하면 척이지욤. 하하.”
기젤라는 궁금했다. 이번 소가주전에서 우승하는 것은 누구일까.
그녀가 아무리 아이젠을 친아들처럼 위한다고 해도 그녀 역시 사람이었다. 기왕이면 자기 배 아파 낳은 아이 중 한 명이 소가주전의 우승자였으면 좋겠는 것이다.
하지만 기젤라 본인의 판단으로는 누가 우승자가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조언을 구하고자 카론을 찾아온 것.
“카론 님은 잘 아시잖아요. 공작님의 친우이시기도 하니까.”
“허허, 제가 무슨요.”
“누가 우승할 것 같으세요? 카론 님의 시선에선 누구를 우승자로 점치시는지 궁금해요.”
카론은 엎드린 채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해 봤다. 사실 그로서도 다른 형제들은 아직 본 적이 없기에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아이젠.’
그 아이에 대해서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소가주전의 우승자는 어쩌면―
아니. 카론의 생각도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직계 중에서 우승자가 나온다면 그게 아이젠인 편이 카론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 아닐까 싶었다.
‘검을 쓰지 않는 그린우드. 그것이 실현된다면?’
세상이 바뀔 것이다. 정확히는, 좀 더 재밌어질 것이었다. 과연 다가올 미래는 어떨까.
“제가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깜? 자제분들 모두 열심히 하실 테니 좀 더 지켜보시지요.”
“역시 그런가요…….”
카론의 모호한 대답에 기젤라는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런 기젤라를 앞에 두고 카론은 바라고 있었다. 다가오는 세상의 변화를, 부디 자신도 몸성히 살아 목도할 수 있기를.
* * *
사흘 후. 소가주전 본선이 열리는 날.
그노시스의 광장에 그린우드의 직·방계가 모두 모였다. 직계부터 4 방계까지의 자제들이 줄 없이 여기저기 서 있었으며(5 방계는 참가자 전원이 사망해 없었다), 각 가문의 가주들이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거기에 더해 각 가문의 하수인들과 장로들까지 모두 모여 있으니 인파가 대단했다.
그런 와중에도 놀라운 점이 있다면.
“…….”
고요―
사위가 조용하다는 것이었다. 어느 한 사람 떠드는 일 없이 광장이 조용했다. 마치 그곳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그들 모두 긴장되었던 것이다. 한 사람만 빼고.
‘음.’
아이젠은 유독 자신을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시선을 알브레히트 5 방주로부터 느꼈으나, 그냥 아들들을 잃어 슬픈 마음에 저런 표정이겠거니, 하고 넘겼다.
아이젠은 지난 사흘간 적도심경과의 이미지 트레이닝을 통해 한 단계 더 성장했다. 물론 5성을 달성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와 비슷한 적을 상대하는 법을 대충 알겠어.’
아이젠은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었다. 그건 아이젠도 인정했다. 그리고 적도심경과의 결투에서, 아이젠은 자신처럼 쉽게 흥분하는 적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얼추 알아낼 수 있었다.
‘역시 수련이 답이다.’
그러나 이제는 실전이 필요한 시간. 오로지 실전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는 그이기에, 아이젠은 오늘 이 시간이 몹시 기대되었다.
‘어디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