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 *
아이젠 폰 그린우드. 왜 이제야 생각났을까? 그것은 카론 자신이 지어 준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벌써 너무 오래전 일인지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 아이가……. 허허, 이제야 생각이 나다니.”
“네?”
카론의 중얼거림을 들었지만, 아이젠은 무슨 말인지 몰랐다.
카론은 여러 차례 실소했다. 그리고 신분 패를 바라보며 모니카에게 물었다.
“이 신분 패를 전달해 줬다는 사람 이름이 사울이라고 했남?”
“네? 네…….”
카론은 사울 장로라는 사람의 얼굴도 기억해 냈다. 분명 17년 전 찾아왔던 테오발트의 호위병과 동일 인물이 맞을 터였다. 즉, 사울이란 자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젠이 카론에게 찾아올 것을.
‘이 아이가 나에게까지 찾아올 줄 미리 짐작하고 신분 패를 준 것인가.’
그 신분 패를 본 카론이, 아이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사울의 안배가 있었던 것이다. 카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재밌구먼. 재밌구먼! 하하하.”
카론이 다시 중얼거렸다. 이어 그의 입이 귀에 걸릴 듯 찢어졌다. 유진이 불길하다는 얼굴로 카론을 쳐다보았다.
“안 돼, 영감. 그 얼굴 하지 마.”
“내가 뭘?”
“대장간 일 하려는 거잖아, 지금.”
바로 맞혔다는 듯 카론이 웃었다.
“맞아. 팔찌를 봐 주겠담. 이리 벗어 놔라, 아이젠.”
* * *
펄펄 끓는 대장간 화로. 카론은 양손에 보호 장비도 없이 화로에 성큼 손을 집어넣었다. 단지 얼굴에만 철로 된 단열 장비를 쓰고 있었을 뿐이었다.
끼이이이―
철판이 화로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그 철판 위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새빨갛게 달궈진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이었다.
조금 전 카론은 아이젠에게 물었다.
‘이 팔찌를 불에 넣어 봐도 되겠나?’
아이젠은 고민도 없이 답했다.
‘그럼요.’
아이젠은 생각했다. 고작 저 정도 불길에 녹아 버릴 정도라면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은 없느니만 못한 물건이리라고. 물론 ‘저 정도 불길’이라는 게 섭씨 2,000도의 초고열이라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이젠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불길의 열기로 뜨거워 땀이 조금 났을 뿐.
“읏차.”
카론이 철판 위에 놓인 아이기스를 살폈다. 이제 그는 단열 장비를 벗어 던지고 한쪽 눈에만 단안경을 끼워 아이기스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음…….”
알쏭달쏭한 음성.
마침내 화로의 불이 꺼지고, 카론은 아이기스를 철판째로 대장간 바깥까지 들고나왔다. 마당에서 찬물을 부어 열기를 식히니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아이기스의 색깔이 원래의 새파란 색으로 돌아왔다.
‘역시.’
아이젠의 추측대로, 아이기스는 조금의 열상도 입지 않았다. 오히려 뜨겁게 달군 덕에 더 단단해진 느낌이랄까.
물론 카론이 화로에 아이기스를 넣은 이유는 아이기스를 달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아이기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
카론이 말했다.
“물건 상태는 아주 훌륭하구먼. 상태를 살펴보건대 최소 천 년 전 아티팩트임에 틀림없엄.”
“그래요?”
아이젠이 시치미를 떼고 답했다.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원론적인 얘기들이 아니었다. 카론은 아이젠의 태도에서 그 의도를 눈치챘는지 다음 말을 이었다.
“다만… 사용법을 알고 싶다고 했지? 그걸 알려 줄 수는 없겠구먼.”
“그건 왜죠?”
“오러를 흘려 넣어 봤다고 했나?”
카론의 물음에 아이젠은 잠시 몇 시간 전 일을 생각했다.
유진이 대망치 레테논에 오러를 불어넣으면 레테논에 깃든 고유의 힘이 발동된다. 그것을 보고 아이젠도 응용 차원에서 아이기스에 오러를 흘려 봤으나 아이기스는 마치 차단막이 설치된 것처럼 아이젠의 오러가 들어가는 것을 원천 봉쇄 하고 있었다.
“네. 해 봤습니다.”
“이 팔찌의 사용법은 그게 맞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모든 아티팩트의 사용법이 그것이라고 해야겠짐. 오러를 흘려 넣어 물건의 정신을 깨우는 것, 그게 바로 아티팩트의 사용법이얌.”
“정신을 깨운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이 팔찌의 경우에는 천 년간 잠들어 있던 탓에 사람으로 치면 가사 상태에 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어.”
가사 상태라. 마치 사람이 생활 반응이 희박한 것을 가사 상태라 부르는 것처럼, 이 아이기스 역시 가사 상태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깨우면 될 일.
“어떻게 깨울 수 있죠?”
“큰 충격을 주면 되겠짐. 가사 상태의 인간을 어떻게 깨우나? 약을 놓거나, 아니면 심장이나 뇌에 큰 영향을 주면 깨어나잖아. 그것처럼 이 물건에도 충격을 주면 돼.”
“충격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글쎄. 그것까진 나야 모르짐.”
“흐음.”
여기서 막히나. 하긴, 아이젠도 당장에 아이기스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리란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딱히 크게 필요가 있는 건 아니기도 하고.’
아이젠에게는 두 손, 두 주먹, 그리고 홍화에 오른 무혈신공의 경지가 있었다.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무엇이 두려울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방법을 찾아봐야겠네요. 감사해요.”
“뭘. 결국 구체적인 해결 방안은 알려 주지 못해 내가 다 미안하구먼.”
아무리 카론이 대단한 대장장이라 할지라도 아이기스는 천 년 전, 그것도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 지안니의 물건이었다. 그런 기막힌 물건의 사용법을 한 번에 알아내는 것은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한눈에 풀이하는 것 같은 일일 터였다. 말이 안 된단 소리.
그래서 아이젠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체념하는 기분까진 아니었다.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그 팔찌, 도대체 이름이 뭔감?”
“이름이요?”
“내 생각엔 아마…….”
카론이 턱을 쓰다듬으며 묘한 미소를 짓는 찰나, 불청객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헹. 뭐야. 결국 해결 못 한 거냐?”
돌아보니 유진이 그곳에 서 있었다. 옆에는 문라이트가 입에 토끼를 문 채 멀뚱멀뚱 서 있었다.
“유진. 어딜 갔다 오는 게냠?”
“오늘 저녁거리. 밥도 안 먹었잖아, 영감.”
유진이 문라이트가 물어 온 토끼를 한 손에 들어 보였다. 아이젠의 뒤에 서 있던 모니카가 얼굴을 찡그리며 그의 등판으로 숨었다.
유진은 토끼를 덜렁덜렁 흔들며 아이젠에게 걸어왔다.
“거봐. 그 팔찌 그냥 나한테 넘기지 그래?”
“헛소리 좀 그만해. 입 냄새 나.”
“뭣……! 내가 무슨 입 냄새가 난다고!”
웃긴 놈일세. 유진은 거짓일지라도 핀잔 한 번이면 쉽게 흥분하는 가성비 좋은 놈이었다. 아이젠이 피식 웃었다.
“그게 저녁이냐?”
“어. 같이 먹을래?”
“고맙지만 됐어. 이만 가 봐야 하거든.”
“음, 그러냐?”
그러자 유진은 못내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유진이 대망치 레테논을 섬세하게 들어 올렸다.
“그래, 가라. 그리고 다신 오지 마. 여긴 이제 대장간이 아니니까.”
“또 올 건데.”
“오지 말라고.”
“다음에 보자.”
“이게 진짜. 또 한판 할래?”
유진의 경고를 아이젠은 한 귀로 흘렸다.
아이젠이 모니카를 돌아보았다.
“가자, 모니카.”
“네, 도련님.”
그렇게 두 사람이 등을 보이며 길을 떠나려는데.
“야!”
유진이 아이젠을 불러 세웠다. 아이젠이 뒤돌아보자.
쿵― 유진은 레테논을 바닥에 내려놓고 성큼성큼 아이젠에게 걸어왔다. 그러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통성명도 안 했네. 이미 알겠지만 난 유진 그레이번스. 카론 영감님의 손자.”
“…그래.”
아이젠은 그의 손을 맞잡았다. 유진의 손은 아이젠의 기억 속에 자리한 도유진의 손보다는 조금 컸다. 하긴,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당연히 더 클 테지.
“이전에도 말했지만, 난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래, 아이젠. 그나저나 아이젠이면 철이라는 뜻인데, 그냥 강철이라고 불러도 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젠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강철이라. 그것은 아이젠의 본디 이름이었다. 적어도 전생에서 아이젠은 그 이름을 썼다. 그리고 도유진은 강철을 그 이름으로 불렀더랬다.
아이젠이 피식 웃었다.
“그래. 강철이라고 불러.”
* * *
아이젠과 유진이 한바탕 싸움을 벌였던 산. 그 숲속 어딘가에, 룬잭이 숨어 있었다. 룬잭은 알브레히트의 하수인. 아이젠이 정말 주먹을 쓰는지 확인하고 오라는 명령을 들은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확실해.’
그리고 룬잭은 아이젠과 유진의 겨루기를 보면서, 아이젠이 플로리안과 틸만 공자님을 죽인 장본인이 맞으리라 확신했다. 그 주먹에 담긴 엄청난 내공이라면 분명 두 공자님을 죽였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런 힘을…….’
룬잭이 들은 직계 집쥐 공자의 소문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가진 거라곤 직계라는 이름뿐인 말라빠진 망나니가 하수인들한테 온갖 손찌검을 하고 다닌다더라. 대충 그런 얘기였을 텐데. 아이젠의 몸은 웬만한 기사들보다 빼어났고, 힘 역시 마찬가지로 뛰어났다.
꿀꺽―
룬잭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이젠의 강함을 직접 보고 나서야 그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깨달은 탓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확신했다.
‘플로리안 공자님, 틸만 공자님…….’
만에 하나의 경우가 있었다. 외부인이 영설산에 침입해 두 공자를 습격했을 경우. 하지만 그 가능성은 이제 지워졌다. 분명 아이젠이 저 강한 주먹으로 두 공자님을 박살 냈을 것이었다. 그들로 하여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게 만든 것이다.
룬잭은 그길로 곧장 알브레히트에게 향했다. 보고를 들은 알브레히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마침내 알브레히트의 입술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너무 강하게 깨문 탓이었다.
“아, 알브레히트 방주님!”
룬잭이 놀라 소리쳤으나, 알브레히트는 고통스러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입술이 터지고 피가 배어 나와도 알브레히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알브레히트가 입을 열었다.
“나 알브레히트 반 그린우드, 그린우드 5 방계의 가주는 선언한다. 들어라, 룬잭.”
“예? 예, 예! 드, 듣고 있습니다.”
그의 강인한 선언에 룬잭은 꿀꺽 침을 삼켰다.
알브레히트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가주전 본선에서… 설령 방계 자격 파면이 있을지라도, 내 이름을 걸고 그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
소가주전 본선은 깊은 숲의 던전에서 열린다. 그리고 그 던전에는, 당연히 소가주전에 참전하는 직·방계의 아이들만이 입성할 수 있었다. 알브레히트는 그 지엄한 규율을 깨고 소가주전 본선에서 아이젠을 죽이겠다 선언한 것이었다. 자신을 가장 믿고 따르는 부하 룬잭 앞에서!
룬잭이 고개를 조아렸다. 두려워서? 아니다. 기꺼워서였다. 플로리안과 틸만 공자님의 복수가 행해진다는 생각에 기뻐서.
“예! 알브레히트 방주님!”
아이젠에게는 곧 마땅한 인과응보가 닥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