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 *
“으헉!”
유진 그레이번스는 이상한 신음을 내며 일어났다. 깨어난 직후 그는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 알아챘다. 이 딱딱한 감촉, 그레이번스 대장간의 마루 위였다.
“뭐, 뭐였지?”
그에게는 무언가에 크게 얻어맞고 기절한 기억만 있었다.
“깼어? 이번엔 좀 오래 걸렸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이젠 폰 그린우드. 조금 전 유진과 박 터지게 싸웠던 남자였다.
그는 입에 사과를 하나 물고 있었다. 아삭― 하고 씹히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이 손가락질했다.
“그, 그거 우리 마당에 있는 사과잖아.”
“아, 그래? 카론 영감님이 주시던데.”
“내가 줬담.”
아이젠의 뒤에서 카론이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할짝―
“깜짝아.”
그때 문라이트가 침을 묻히며 그의 뺨을 핥았다. 유진은 문라이트를 한 번 보고는 아이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쳇. 완전히 처발렸네.”
대답한 것은 아이젠이 아니라 카론 쪽이었다.
“이놈아, 네 걱정 없이도 난 팔팔하다. 그걸 모르는감?”
카론의 말투는 다그칠 때의 그것이었지만 유진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에는 애정이 듬뿍 담겨 있다는 것을. 손자를 향한 애정 말이다.
유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했다.
“알아요, 영감. 팔팔하니까 걱정하는 거지.”
유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왜 팔팔하냐고. 폐병인데.”
잠시 사이를 두고, 아이젠은 다시금 아이기스를 풀어 헤쳐 카론에게 내밀었다.
“그래서, 봐 주실 거예요?”
그러자 카론이 유진을 돌아보더니 말했다.
“그래도 내 손주 놈이 할아비 걱정한다고 망치까지 휘둘러 대는데, 마냥 물건을 봐 주기도 좀 그렇구만.”
“그러시군요.”
“미안하지만 돌아가겜. 이 근방엔 다른 대장간도 많으니 그쪽에 보여 주면 되지 않겠는감? 물론 나만은 못하겠지만. 껄껄.”
자신의 실력을 믿기에 나오는 자부심의 미소였다. 아이젠도 더는 요구할 도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른 대장장이들은 영감님만큼 친절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죠, 뭐.”
그렇게 아이젠이 돌아가려는데, 좀 전부터 대화를 멀뚱멀뚱 듣고만 있던 모니카가 말했다.
“도련님. 그러고 보니 사울 장로님이 주신 거요.”
“사울 장로님? 아.”
아이젠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이전에 모니카가 아이젠에게 줬던 작은 꾸러미. 사울 장로가 준 것이라 했다. 도움이 될 거라면서.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지?’
아이젠은 아직 꾸러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해 보지 않은 상태였다. 해서 꾸러미를 풀고 뒤집어, 안에 든 물건을 밖으로 꺼내 보았다.
툭―
아이젠의 손바닥 위에 떨어진 것은.
“…신분 패네?”
“네?”
신분 패였다. 아이젠의. 뭐 다른 게 있는 건가 싶어 아이젠이 요모조모 살펴봤지만 그냥 신분 패였다.
“내 신분 패야. 이걸 왜 주셨지?”
“어어? 그, 그럴 리가요.”
“맞는다니까.”
작은 금색 바탕 위에 아이젠의 이름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기술자의 솜씨였다.
모니카는 그걸 받아 들더니 자기도 여기저기 훑어보았다.
“지, 진짜 그냥 신분 패네요? 이런 걸 사울 장로님이 왜 주셨을까요……?”
“글쎄. 뭐, 잘못 주신 거 아닐까? 헷갈려서.”
“그런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 듣던 카론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어 눈을 치켜떴다.
“음? 가만.”
카론은 반사적으로 모니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 좀 잠깐 줘 보겜.”
“네? 신분 패를……. 안 돼요.”
“잠깐이면 되넴.”
“그냥 드려 봐, 모니카.”
아이젠의 지시가 있고 나서야, 모니카는 망설이다가 카론에게 신분 패를 내밀었다.
신분 패를 양손에 든 카론은 바탕에 새겨진 내용을 살폈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테오발트 폰 그린우드와 클라우디아 파스빈더의 아들]
내용은 지극히 간결.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카론의 표정은 간결하지 않았다. 카론의 주름진 얼굴이 점점 굳어 가기 시작했다.
옆에 천하태평하게 누워서 사과를 먹던 유진이 카론에게서 보이는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일어났다.
“왜 그래, 영감.”
“이거…….”
카론이 더듬거리는 말투로 말하며 아이젠을 올려다보았다.
“자, 자네가 클라우디아 파스빈더의 아들인가?”
“네? 네, 그런데요.”
클라우디아 파스빈더는 아이젠의 친모, 클라우디아의 풀 네임이었다.
그녀는 귀족이 아니었다. 귀족과 젠트리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 그것이 바로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렇기에 한스도 서자니 뭐니 하며 아이젠을 욕보일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본인의 출신이 서자라는 것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적어도 전생을 깨달은 후의 아이젠은 말이다.
깨닫기 전에는… 어쩌면 그의 망나니짓의 발로는 그것이 원인이었을지도 모르긴 했다.
‘계속 반성하자, 아이젠.’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론의 말을 받았다.
“저희 모친이십니다. 왜요? 아는 사이세요?”
“아는 것은 아니지만…….”
카론의 표정이 알아볼 수 없게 변화했다. 그는 잠시 과거를 떠올리는 얼굴이었다.
* * *
그러니까 약 17년 전. 카론이 테오발트에게 ‘태양의 검 에레디아’를 만들어 준 지도 어느덧 20년이나 지났을 무렵. 마흔세 살의 어른으로 성장한 테오발트가 카론을 찾아왔다. 에레디아를 손에 들고 말이다.
카론은 테오발트에게 핀잔을 줬다.
“이놈아, 나도 내년이면 환갑이다. 에레디아 좀 그만 가져왐.”
17년 전에도 카론은 여전히 노인이었다. 테오발트는 그런 카론을 향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하하. 에레디아 이 아이를 가장 잘 봐 주시는 건 영감님이잖소. 그리고 첫 제작 이후로 딱 두 번째 가져오는 것인데, 뭘.”
“그것보다 더 자주 보지 말자는 뜻이짐. 이러면 일생의 역작을 만들었다는 내 자존심에 흠이 가잖암.”
카론이 에레디아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때 카론은 테오발트의 뒤에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민머리 청년을 보았다. 청년이라곤 해도 나이가 꽤 있어 보였지만 말이다.
“누군감?”
“아무래도 가문의 귀한 몸인지라 혼자 올 수가 없어서. 사울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호위병? 크크. 누가 자네를 ‘호위’할 수 있다고?”
“하하.”
카론은 실없는 소리를 하며 불길에 에레디아를 집어넣었다. 그러나 대장간 불길에 넣은 에레디아에는 조금의 흠결도 없었다. 카론도 실은 그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에레디아에 처음 흠집이 났던 것은 이때로부터도 8년 전 일이었다. 즉,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유령 전쟁’ 때 말이다.
테오발트는 8년 만에 다시 에레디아를 가지고 왔다. 하지만 에레디아에는 흠집도 없었다. 그럼 왜 찾아왔는가?
“…….”
카론이 은근한 눈빛을 담아 테오발트를 돌아보자 테오발트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어째, 검은 괜찮소?”
“검은 괜찮지. 넌 안 괜찮아 보이는뎀?”
“크흠흠……. 들켰소?”
테오발트가 얼굴을 붉혔다. 카론은 다년간 삶의 경험을 통해 테오발트에게 변화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결혼은 했고? 이제 마흔을 훌쩍 넘긴 나이인뎀.”
“…예. 그린우드에 득이 되는 가문의 여인과. 이미 자식도 셋이나 있소. 세 아이 다 귀여운 녀석들이오.”
“허, 참. 그 스물셋 풋내기가 애 딸린 아버지가 되다님.”
“언제 적 얘기를. 아이들의 이름은 게오르크와 바네사, 그리고 한스요. 기억해 주시오.”
“기억하겠넴.”
그러나 카론은 테오발트가 하고자 했던 말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카론은 더 이상 귀찮음을 참지 못하고 불길에서 에레디아를 빼내며 말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빨리 좀 햄.”
“음…….”
그러나 테오발트는 여전히 대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카론은 할 수 없이 이야기를 돌렸다.
“그나저나 가문에 득이 되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라? 희한한 일이군. 자네에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 않남? 이름이 뭐였더람…….”
“클라우디아.”
테오발트의 눈빛이 짙어졌다. 카론은 바로 그것이 대화의 화두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테오발트가 말했다.
“클라우디아 파스빈더. 내가 사랑했던 여인의 이름이오.”
“그 여인과는 잘 안됐나 보짐?”
“사실 그녀가 임신을 했소.”
“뭐?”
카론이 놀라서 반사적으로 테오발트를 쳐다봤다. 그러나 테오발트는 부끄러운 불륜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다기엔 그의 눈빛이 마치 유령 전쟁 때의 그것처럼 사납고 매서웠으니.
카론이 물었다.
“괜찮은 건감, 그거? 적자 셋이 이미 있는 상황에서 서자를 임신하다님.”
“안 괜찮지요. 그래서 그 아이의 심장에 선물을 하나 준비해 두었소.”
“선물?”
“그 얘기는 됐고……. 제가 부탁하고 싶은 건.”
설마.
카론이 설마 하는 눈빛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테오발트가 말을 이었다.
“아이의 이름을 좀 지어 주셨으면 하오.”
“뭐어어?”
카론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뭔 소리얌! 자기네 애 이름을 왜 나한테 떠넘겨?”
“대부가 되어 주시오. 카론 그대가.”
“뭔 말 같지도 않은! 첫째 둘째 셋째 애 이름 지을 땐 어쩌고 넷째 이름만 나더러 지으램?!”
“가문에 보는 눈이 많소. 강한 이름을 지어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클라우디아와 고민해 보아도 마땅한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으러 찾아오냐곰?”
“그 아이의 이름도, 카론이 지어 준 것이잖소.”
테오발트가 가리킨 ‘그 아이’란 에레디아였다. 태양의 검 에레디아, 카론이 혼신의 힘을 담아 탄생시킨 희대의 명기(名器). 그 이름을 지은 것은 당연히 대장장이인 카론 본인이었다.
그러나 무기의 이름은 잘 지어 봤어도 사람의 이름을 지어 본 적은 자주 없는 그였다. 기껏해야 자기 아들 이름 정도나 지어 봤을까.
“크흠.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맡기는 건…….”
“강한 이름을 선사해 주시오. 무엇이든 믿고 따르겠소.”
“그렇게 말하면 더 부담스러운뎀.”
그러나 어쩌다 보니 이제 카론이 이름을 지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카론은 고민했다. 강한 이름? 강한 이름이라…….
턱을 매만지던 카론이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아이젠(Eisen: 철)…….”
“뭐라고요?”
“아니, 그냥 해 본 말이얌.”
“아이젠? 아이젠이라고 했소?”
“그냥 해 본 말이라니깜. 애 이름이 철이 뭐야, 철이. 대장간에서만 일하다 보니까 그냥 반사적으로 나온 말이얌.”
“아니. 좋소. 훌륭한 이름인데…….”
“뭐? 아냐, 좀 더 고민해 볼게. 기다려 봠.”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것을 아이의 이름으로 하겠소.”
“야! 기다려 보라니깜?”
테오발트가 카론에게서 에레디아를 받아 들었다. 그는 에레디아를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 스르르 집어넣고는.
찰캉!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이름은 아이젠 폰 그린우드. 사내아이든 여자아이든, 아이젠으로 짓겠소.”
“아니, 정말… 진짜로?”
“고맙소, 카론.”
테오발트는 그렇게 자리를 떴다.
카론은 보았다. 테오발트의 뒷모습에서는 분명 표정 따위 보이지 않았지만.
“원, 녀석. 저렇게 시원하게 갈 일인감.”
그 등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