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
유진이 조용해졌다.
아이젠은 사실 처음 들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카론 그레이번스라는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고? 유명하니까. 다름 아닌 테오발트 가주의 참철검, 태양의 검 에레디아를 만든 장본인으로 말이다.
‘대단한 물건이랬지.’
다른 무기들과 같이 일개 아티팩트라는 이름으로 분류될지언정 에레디아의 위용은 차원이 달랐다. 현재 제국에 존재하는 그 어떤 무기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하는 아티팩트가 바로 에레디아.
에레디아를 한 번 휘두르면 그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두 번 휘두르면 마을이 통째로 바다에 잠긴다. 물론 어느 정도 과장이 된 소리겠지만, 어쨌든 그 정도로 대단한 물건이라는 게 정설이었다.
‘테오발트는 바로 그 에레디아를 사용해 25년 전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어. 그 후에 전쟁 영웅으로 추대되었지.’
그 전까지는 후작이었던 그린우드의 신분도, 그날을 기점으로 공작 위에 오르게 되었다. 현 황제 레오 베네딕토로부터 전쟁 공훈을 인정받아 논공행상을 받았으므로.
…라고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직접 겪은 역사는 당연히 아니고 모두 어린 시절 가문 역사서에서 읽은 정보였다.
‘전부 진실은 아니겠지.’
역사는 원래 집필하는 자 마음인 법. 어느 정도는 걸러서 들을 필요가 있겠지만 단 한 가지, 어쨌든 에레디아가 엄청난 물건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런 에레디아를 만든 장본인의 손주가 바로 유진이었다. 설령 대장간 일에 별로 관심이 없더라도,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이 상당할 터. 실제로 유진이 들고 있는 대망치 레테논 역시 그 자신이 직접 제작한 것임을 아이젠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젠이 재차 물었다.
“네가 보기엔 그 물건이 어떻냐니까.”
그러자 말이 돌아왔다.
“훌륭한 물건이야.”
그야 그럴 것이었다. 에레디아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 되는 환상 속의 물건이니.
“그래서 너 같은 거한텐 아까운걸.”
“나 같은 게 뭔데?”
“얘기 다 들었어.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린우드의 이름을 가졌으면서 검 대신 주먹을 쓰는 놈이라지?”
대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거람.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야. 그래서 그게 검이 아니라 팔찌인 거고.”
“형편없는 놈이군.”
불쑥! 그때 아이젠의 왼편에서 문라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줄곧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개는 본능적으로 암약의 기술을 쓴다. 때문에 아이젠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고 아이젠을 향해 측면으로 기습할 수 있었다.
크르렁!
아이젠의 왼팔이 문라이트에게 물리려는 그 순간.
“너한텐 아까우니까 내가 받아 가마!”
파박! 이번에는 정면의 수풀을 헤치고 유진이 나타났다. 그는 양손으로 레테논의 손잡이를 꽉 쥔 채 뒤로 높이 젖혀 들고 있었다. 아이젠을 향해 금세라도 내려치겠다는 양.
“아깐 내가 오러를 쓰지 않았거든?”
“오러?”
“너희 귀족들만 오러를 쓸 수 있다고 착각하면 오산이지!”
콰아아아앙!
아이젠이 문라이트를 내치고 레테논을 막으려는데, 유진은 레테논을 아이젠을 향해 내려치지 않았다. 대신 아이젠의 앞발 코앞을 내려쳤다.
‘무슨 의도지?’
아이젠이 생각할 때, 유진이 말했다.
“아까랑은 좀 다를 거다!”
콰과과과과과!
“……?!”
아이젠의 발아래 땅이 무너졌다.
그는 순간 얼마 전 피터와의 싸움을 떠올렸다. 피터의 ‘그라운드 핵’은 땅을 무너뜨리는 위력을 보여 줬다. 그리고 레테논이라는 이 대망치의 힘은 그라운드 핵과는 차원이 달랐다. 분명 아티팩트였다.
“레테논에 담긴 힘은 ‘지진’! 좀 아플 거다, 이 자식아!”
쿠구구궁!
그렇게 아이젠이 딛고 서 있던 땅 밑이 무너졌다. 그러나.
턱!
아이젠은 양팔을 좌우로 길게 뻗어, 갈라지는 절벽을 지탱하고 버텨 섰다. 아이젠의 양팔에 힘줄이 곧게 섰다.
“미안하지만 비슷한 공격을 한 번 당해 봐서 말이야. 똑같은 거엔 안 당하지.”
“이, 이 자식이……!”
꾸우우욱!
아이젠이 팔에 힘을 주고 땅 위로 올라서자 유진이 소리를 질렀다.
“문라이트! 물어!”
컹컹!
그렇게 문라이트가 다시 한번 아이젠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자.
턱― 아이젠은 문라이트의 입을 잡아챘다.
깨갱?!
“아가리를 함부로 놀리면 쓰나, 개 녀석아.”
크르르릉!
“귀찮으니까 잠깐 기절해 있어라.”
퍽!
아이젠이 문라이트의 코를 때렸다. 그러자 문라이트의 표정이 몽롱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문라이트가 기절했다. 문라이트를 바닥에 대충 내려놓은 아이젠에게.
“감히 문라이트를!”
유진이 레테논을 휘둘렀다. 아이젠은 이젠 레테논의 힘을 얼추 알아챘으므로, 멍청하게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홍화.’
4성에 올라 연분홍빛 오러를 다시금 내뿜은 아이젠은.
‘결사신권, 천수관음(千手觀音)!’
텁!
천 개의 손으로 유진의 레테논을 붙잡았다.
“윽! 이게!”
유진이 힘을 줘서 잡아 빼려 해 봤지만.
움찔. 움찔.
아이젠은 지금 팔이 천 개가 된 상태였다. 유진의 힘 정도로는 레테논을 아무리 잡아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진의 힘이라? 글쎄 뭐 대단한 건 알겠는데… 망치를 못 움직이게 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
“쳇! 그러는 너야말로 사내대장부가 분홍색이 뭐냐?”
“야.”
“뭐?”
“너 전체적으로 말투가 너무 짜증 난다.”
아이젠은 유진 그레이번스의 말투에서 도유진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젠에게 몹시 불쾌한 경험이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도유진이 죽던 순간의 얼굴이.
‘존중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거야. 줄곧, 줄곧 네게 잘못된 걸 알려 준 것 같아 미안했어. 미안하다, 강철아.’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
아이젠은 천 개의 손을 뻗어 유진의 몸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의 뒷주머니에 숨겨져 있던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을 발견해 꺼내 왔다.
“영감님께서 도둑질 같은 거나 하라고 가르치시던?”
“감히 누굴 모욕하는……!”
“너. 너 모욕하는 건데.”
태연자약하게 양팔에 아이기스를 다시 장착한 아이젠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실상은 기분이 나빴지만 말이다.
“너 잠깐 입 좀 닥쳐.”
퍽!
아이젠의 홍화를 실은 공격 한 방에.
“커헉.”
유진은 자리에 쓰러져 기절했다.
* * *
할짝. 할짝.
크르릉. 컹컹.
“으음……. 뭐야…….”
뺨이 축축해 유진은 기분 나쁜 기색으로 일어났다. 문라이트가 해맑은 얼굴로 자신의 뺨을 핥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진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가까이 보이는 것은 문라이트, 그리고 멀리 보이는 것은 아이젠. 아이젠은 팔짱을 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진짜 맷집 좋네. 운공법 같은 걸 배운 적도 없을 텐데.”
“윽. 기절해 있었나.”
“한 10초 정도? 생각보다 훨씬 빨리 깨어났어.”
유진은 몸이 저릿저릿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젠의 주먹이 유진의 명치를 정확하게 타격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금 당장 아이젠 녀석에게 달려들고 싶어도,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었다.
아이젠은 유진이 쥐고 있던 대망치 레테논을 자신이 쥐고 있었다.
“이 자식, 그거 내놓지 못해…….”
유진이 힘없이 말했지만 아이젠은 레테논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무기 좋은 거 쓰네. 크기에 비해 생각보다 가벼워. 만년한철로 만든 건가?”
“…그렇다면 어쩔 건데.”
“만년한철은 영설산 정상에서만 구할 수 있는 광석. 그린우드 소속이 아니라면 허락되지 않았을 텐데?”
“흥. 그깟 규칙이 다 뭐라고? 내가 맘대로 쳐들어가서 가지고 왔다, 왜. 어디 제국 경찰에 신고라도 하게?”
“누가 그런대? 그냥 물어본 거야. 깡다구 좋네.”
그린우드의 아래에서 일하는 대장장이들의 특성상 그런 행동은 맨정신으론 할 수 없었을 텐데. 기개가 좋았다. 마치 도유진처럼.
아이젠이 레테논을 매만지며 말했다.
“지진의 힘을 담고 있댔나. 네 오러를 불어넣으면 지진의 힘을 쓸 수 있는 건가 보지?”
“…그래. 내가 만든 아티팩트거든.”
“음…….”
아이젠은 유진의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오러를 불어넣으면 능력이 발동되는 아티팩트, 레테논. 이런 아티팩트를 제 손으로 만들었다는 유진의 실력이 놀라운 한편, 아이젠은 자신도 아이기스에 오러를 불어넣으면 힘을 개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추리해 보았다.
‘시험해 볼까.’
거두절미하고, 아이젠은 레테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의 양팔을 앞으로 쭉 뻗었다. 아이기스가 잘 보이도록. 그리고 아이기스를 향해.
‘홍화(紅花).’
홍화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번쩍!
아이기스가 번쩍하고 빛나길 바랐으나…….
“흠.”
아이기스는 시퍼런 색 그대로의 형상을 유지하고 있을 뿐, 조금도 빛나지 않았다. 그것보다 아이젠의 홍화가 스며들어 가지도 않는 듯했다.
끼긱. 끼릭.
아이젠은 아이기스의 표면에 마치 보호막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가 자신의 홍화가 들어갈 수 없게 막아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약 같은 게 있는 건가.’
“어이. 내 망치 내놔.”
유진이 다소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레테논에 깃든 힘을 썼음에도 아이젠에게 상대도 안 되자 기운이 팍 상한 모양이었다.
아이젠은 다리를 굽혀 엎어져 있는 그의 손에 레테논의 손잡이를 쥐여 주었다.
“…고맙다.”
“난 너처럼 도둑질은 안 해.”
“도둑질이 아니라―”
“영감님이랑 나를 떼어 놓고 싶었던 거겠지?”
“뭐?”
아이젠이 다시 무릎을 일으켜 세웠다.
“넌 아까 대장간이 있던 곳에서는 레테논의 힘을 쓰지 않았어. 그렇게 되면 카론 영감님한테까지 피해가 갈 테니까. 그래서 날 떼어 놓으려고 이 산 깊숙이까지 들어온 거 아냐?”
“…….”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맞는 말인 듯했다. 아이젠이 말을 이었다.
“대장간을 폐업한 이유. 카론 영감님이 앓고 계신 병 때문이지?”
“……!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지.”
아이젠은 카론과 처음 만났던 때를 상기했다. 카론에게 뒤를 잡혔을 때, 아이젠은 그의 숨소리가 폐병 걸린 환자처럼 묘하게 일정치 않다는 걸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카론은 나이가 나이기도 하다 보니 병을 앓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정말 폐병을.
“폐병 환자에게 대장간 일은 치명적이지. 불똥이 튀거나 산화 철, 철 조각 같은 게 호흡기를 통해 몸속에 스며들면 건강에 치명적이니까.”
“…잘 아네.”
유진이 체념한 듯 말했다.
“우리 영감은… 좋은 무깃감을 발견하면 쉽게 흥분하는 스타일이거든. 그래서 몇 해 전부터는 일부러 외딴곳에다 모시고 있는 거야. 아무도 못 찾아오도록.”
“근데 내가 찾아왔구만.”
“실제로 다른 그린우드들은 거들떠도 안 보던데.”
“내가 특이한 놈이라서 그래. 아무튼, 착한 놈이네, 너.”
아이젠은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진이 그의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아이젠이 싱긋 미소 짓자 유진도 멋쩍게 웃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금세 표정을 지웠다.
“그래도 나한테 대든 건 잘못이지.”
“뭐?”
츠팟!
아이젠은 유진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고.
“어헉.”
쿵!
유진은 머리부터 바닥에 떨어져 또다시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