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룬의 이름은?”
사울 장로의 물음에.
“안 알려 드릴 건데요.”
아이젠은 조금 장난스레 답했다. 그러나 사울 장로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사울 장로는 물론 룬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관철의 룬. 자신의 뜻을 관철해 나갈 때마다 성장하는 룬. 그래서 사울 장로는 새어 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가주님, 가주님의 씨앗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사울 장로는 문득 클라우디아 부인을 떠올렸다. 아이젠의 친어머니 말이다.
‘클라우디아 부인…….’
그대가 아이젠의 이만한 성장을 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울 장로가 웃음 짓는 사이, 아이젠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변태같이.”
“어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럼 사과하겠습니다.”
“예. 받지요.”
“그럼 전 이만. 갈 데가 있어서.”
아이젠은 이번에야말로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사울 장로를 돌아보았다.
“사울 장로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하문하시지요.”
“오해하지는 마시구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이젠은 저 나름대로 신중히 단어를 골라 말했다.
“개화가 안 된 아티팩트의 사용법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서 아티팩트라도 얻으셨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니까요.”
“흐음.”
사울 장로의 시선이 문득 아이젠의 팔뚝으로 향하자 아이젠은 어색하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뒷짐을 졌다.
사울 장로가 말했다.
“글쎄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그노시스의 대장장이들이라면 뭔가 알지 않겠습니까?”
“대장장이들.”
그러고 보니 다른 그린우드들은 전부 대장장이를 찾고 있다고 했다. 자신들만의, 각자의 참철검을 제작하기 위해서.
그렇기 때문에 예선이 끝나고도 본선 전까지 사흘이나 시간이 주어진 것이었다. 사흘 안에 단단한 만년한철로 참철검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바로 그노시스의 대장장이들이었다.
“어디 있죠, 그 사람들?”
아이젠은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 * *
한편, 알브레히트 5 방주는 간신히 진정하고 자신의 막사로 돌아왔다.
“크응.”
그는 콧수염에 묻어 있는 눈물방울을 닦아 냈다. 그러고도 여전히 눈물이 계속 쏟아져 나왔기에, 그는 손수건을 몇 장이나 쓸 수밖에 없었다.
“룬잭.”
알브레히트가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막사 밖에 서 있던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5 방주님.”
그는 조금 전 알브레히트를 말리고 있던 그 하수인이었다.
룬잭도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참았을 뿐 그도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기에. 게다가 룬잭은 플로리안과 틸만을 모시던 하수인이기도 했다.
알브레히트가 말했다.
“의사로부터 플로리안과 틸만의 직접적인 사인이 뭔지 들었다. 플로리안과 틸만 둘 다 주먹에 의한 내장 파열 때문이라더군.”
콰아아앙!
블렌하임이 강하게 주먹을 내려치자, 플로리안의 배가 움푹 파였다. 플로리안은 우욱- 하고 구토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더 목소리를 잇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털썩!
플로리안이 땅 위에 떨어졌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말하자면 주먹에 맞아 죽은 거지. 불쌍한 내 아들……. 크흑.”
“…….”
“두 아이 다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 줄 거다. 그 어떤 귀족보다도 더 성대하게. 준비해 둬라. 그것 때문에 불렀다.”
알브레히트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슬퍼하는데, 룬잭의 표정이 좀 달라졌다. 그의 표정은 점점 심각해졌다. 알브레히트가 그의 달라진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
“왜 그러지?”
“…방주님, 이것은 그냥 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만… 혹시 그린우드 직계의 집쥐 공자에 대한 소문을 아십니까?”
“집쥐 공자?”
알브레히트는 가 외의 이야기엔 까막눈이기에 룬잭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다.
룬잭이 생각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직계의 넷째 아이젠은 검을 쓰지 않고 주먹을 쓴다. 그리고 그 넷째 역시 이번 소가주전에 참전했다. 그런 얘기들.
“…그 말은?”
“혹시 그 아이젠 직계의 소행이 아닌지……. 그는 망나니 기질이 워낙 심해서 자신을 모시는 하수인들에게도 함부로 손을 쓴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그노시스로 온 바네사가 블렌하임의 존재를 알리긴 했지만, 현시점에서 그 사실을 아는 자는 극히 소수였다. 사람들이 동요할 것을 걱정한 사울 장로가 그 사실을 잠시 비밀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사울 장로는 흑기사들더러 영설산을 면밀히 조사해 블렌하임이라는 자를 색출하라고 지시했고, 그동안 이 사실에 대해 함구할 것을 함께 명했다. 따라서 룬잭과 알브레히트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블렌하임의 존재 여부조차 알지 못했다.
알브레히트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올랐음을 룬잭은 알아챘다. 룬잭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무, 물론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사인이 주먹에 의한 내장 파열이라고 했으니까요.”
“이 시기에 영설산에 오르는 건 그린우드뿐이다. 다른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은?”
“물론 없지야 않겠지만… 한없이 낮을 겁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브레히트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가 슬퍼할 때보다 훨씬 더 농도 짙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룬잭, 알고 있나? 난… 이제 예전처럼 쉽게 흥분하지 않아. 이 불같은 성정 때문에 손해 본 일이 많으니까.”
“알지요.”
“그러니까 확인부터 해야겠다. 아이젠이라는 그 직계 놈, 그놈이 정말 주먹을 쓰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와라. 룬잭 네가 직접.”
룬잭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브레히트는 뒷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만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아이젠이 주먹을 쓰는 게 맞는다면.
‘그렇다면 그놈은 내 손으로 직접 찢어 죽일 것이다!’
알브레히트는 참철검술 6성의 달인. 그의 주먹이 희미한 연녹빛 오러로 빛났다.
* * *
그노시스의 스미스쏜즈 지역. 그노시스는 사막의 마을이지만 스미스쏜즈는 유독 모래바람이 덜 부는 지역이라 대장장이들이 일하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대장장이들이 군집해 모여 살고 있었는데.
“와, 많네.”
마치 시장통처럼, 대장간들이 양옆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아이젠은 그 모습을 보며 자못 감탄했다. 대장장이 마을이기도 하다더니,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어디 둘러볼까.”
“도련님!”
아이젠이 앞서 걸으려는데, 모니카가 그를 불러 세웠다. 멀리서 뛰어온 모니카가 숨을 헐떡이며 작은 꾸러미를 아이젠에게 내밀었다.
“사울 장로님께서, 헉, 이걸 가져다드리라고. 헉.”
“이게 뭔데?”
“저도 모르겠어요. 대장장이들 앞에서 풀어 보면 도움이 되실 거라던데요? 휴, 숨차.”
“그래?”
아이젠은 일단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였는데, 안에 뭔가가 들어 있는 듯했다.
우선 급한 건 아니니 그것을 안주머니에 넣어 놓고, 아이젠은 대장간에서 일하고 있는 대장장이들의 면면을 살폈다.
까앙! 까앙! 까앙!
드드드드드드드드.
화르륵. 화르륵.
철을 두드리는 소리,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 화로에 불이 들어가는 소리까지. 다양한 소음들이 뒤섞여 화음을 만들어 냈다. 아이젠은 전문적인 그 음들이 듣기 좋았다.
그런데 왠지 아이젠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대장장이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 탓에 아이젠은 앞으로 나서기 전 움찔하고 말았다.
“뭐야. 왜 저렇게들 보지?”
“도련님께서 검을 안 쓰신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퍼졌다나 봐요.”
“아, 그래?”
즉 대장장이들 입장에서는 아이젠이 아니꼬운 것이었다. 그들은 ‘참철검가’ 그린우드의 무기 제작을 도맡고 있었다. 그런데 참철검을 쓰지 않는 그린우드라니? 납득하기 힘들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저기요, 혹시…….”
“어허, 썩 꺼지지 못해! 너 같은 건 그린우드도 아니야!”
스미스쏜즈의 대장장이들은 그린우드를 모시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모든 그린우드를 상급자로 대우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겠나 싶겠지만, 대장장이들의 프라이드란 그만큼 대단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그 프라이드에 걸맞은 실력으로 제국 내에서 가장 질 좋은 무기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 바로 스미스쏜즈의 대장장이들이었다. 무인들에 한해서는, 설령 그린우드의 가주라 해도 그들에게 정중히 예의를 갖추는 게 보통이었다.
아이젠이 가까이 있는 대장간에 다가서자마자 안에 있던 뚱뚱한 대장장이가 대번에 면박을 줬다. 아이젠은 민망해져 곧장 발길을 다른 대장간으로 돌렸다.
“안녕하세요, 혹시…….”
“안 팔아!”
“아니, 아직 뭐 산다고도 안 했는데.”
“아무튼 자네한텐 안 팔아! 훠이! 훠이!”
다음 대장간에 있던 대장장이 역시 아이젠에게 손을 휘저었다. 마치 불결한 것을 쫓아내듯.
“흐음.”
아이젠은 도움을 청하려 이곳에 온 이상 나름대로 정중하게 나서려 했는데, 벌써 두 번이나 문전 박대를 당하니 다혈질인 그로서는 목에 핏대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 도련님, 흥분하지 마시구요…….”
그의 성격을 아는 모니카가 수차례 양손을 아래로 내려 보이며 아이젠을 진정시켰다. 아이젠은 목에 핏대를 세워 놓고도 웃음을 지었다.
“흥분이라니? 나 흥분 안 했는데? 하하.”
“저, 정말이죠?”
“그럼. 다음 대장간으로 가 볼까?”
그렇게 아이젠이 바로 다음 대장간에 발을 딛자마자.
“에에이! 불결하게 어디 발을 디밀어!”
촤아아악!
아이젠을 향해 물벼락이 쏟아졌다. 무혈신공을 운용하지 않고 있던 아이젠은 유랑보를 쓸 틈도 없이 정통으로 물벼락을 맞았다. 대장간의 대장장이가 양손에 큼지막한 대야를 들고 있었다.
“…….”
뚝. 뚝. 아이젠의 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모니카도 이건 좀 심하다 싶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이보세요! 뭐 하시는 거예요! 이분은 그린우드 공작가의 직계 자제이시라구요! 감히 귀족한테 손을 대다니!”
모니카가 신분의 격차를 내세우며 쏘아붙였지만 대장장이는 헹 웃기만 할 뿐 조금도 겁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귀족? 그래서 뭐 어쩌라고? 검도 안 쓰는 그린우드 놈한테 발을 대게 해 줄 곳은 없으니까 당장 꺼져!”
“이, 이 아저씨가 정말!”
그때까지도 아이젠은 아무 말 안 했다. 아이젠은 얼굴에 뚝뚝 흐르는 물을 닦아 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지만.
“모니카?”
“네? 네, 도련님?”
“나 좀 말려라. 안 그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패 죽일지도 모르니까.”
아이젠이 곧바로 무혈신공의 묘리를 운공하려는 듯하자 모니카가 질겁하며 아이젠을 말렸다. 그녀는 아이젠을 뒤에서 껴안고 뒷걸음쳤다.
“도, 도련님, 진정하세요! 진정!!”
“놓지 마. 안 그러면 이 지역은 그냥 다 초토화되는 거야. 놓지 마!”
“안 놔요, 안 놓을 거예요! 어, 얼른 가요, 도련님!”
“당신 운 좋은 줄 알아. 어?!”
모니카가 마침내 아이젠을 스미스쏜즈 지역 바깥으로까지 끌고 왔다. 모니카는 헉헉거리면서도 대장간들 쪽을 노려보았다.
“뭐 저런 사람들이 다 있어요?! 귀족, 그것도 공작가 자제한테 저렇게 무례한 태도라니!”
“후우…….”
아이젠은 참았다. 여기서 주먹을 휘둘러 봤자 자신한테 좋을 게 없으니까. 아니, 설마 그걸 알고 저렇게 막 나오는 건가, 저 대장장이들은?
그렇다면 더 열불이 터지는 아이젠이었지만, 그래도 참았다. 여기서 화내서 뭐 해.
‘아이젠. 넌 성숙한 놈이잖아. 전생까지 합치면 몇 년을 산 거야. 진정하자, 진정해. 어른답게 행동해.’
아이젠은 그렇게 자신을 진정시킨 뒤에야 간신히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휴우.”
그렇게 고개를 높이 쳐드는데, 문득 저 멀리 무언가가 보였다.
“…저긴 뭐지?”
스미스쏜즈 지역으로 향하는 길의 옆에 있는 샛길. 그 샛길 멀리 끝에, 대장간처럼 보이는 것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지 샛길에 풀이 자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길이라고 알기도 힘들었다.
모니카가 말했다.
“저기도 대장간이 있나 봐요.”
“가 보자.”
“네? 안 돼요. 또 무슨 험한 꼴을 당하시려고!”
“그래도 가 보자.”
아이젠은 홀로 동그마니 떨어져 있는 저 대장간에서 뭔가 묘한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앞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푸르스름하기만 할 뿐 예쁜 쓰레기에 불과한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을 팔뚝에 짊어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