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콘라트는 눈썹을 치키고 아이젠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친 데가 없어서 다행이군? 아이젠 자네는 검술을 아예 못 쓴다고 들었어. 우리 아들들은 벌써 3성이나 되는 참철검술을 다루는데 말이야. 하하하하.”
콘라트의 목소리에는 아이젠을 잔뜩 무시하는 어조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별생각 없었다. 다만 이럴 땐 받아쳐 주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다.
“괜찮습니다. 소가주전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흥분하는 얼간이들보다는 낫죠.”
“…뭐야? 그거 설마 우리 아들들한테 하는 말인가?”
“아,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아이젠은 뒤쪽에 서 있던 카페테리아 주인을 가리켰다.
“두 아드님께서 무전취식을 하셨답니다. 700골드래요.”
* * *
베르너와 브루노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버지가 보이지 않을 때쯤까지 도망쳐 오자 베르너는 아까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그 자식, 분명 내 검을 피했어.”
베르너는 직계 중에서는 게오르크만이 자신의 유일한 적수이리라 생각했다. 게오르크를 제외한 나머지 직계 놈들은 전부 형편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저 아이젠이라는 놈도 꽤 하겠군 싶어졌다.
“브루노.”
“응, 형.”
“재밌어지겠어. 이 소가주전.”
“그러게 말이야, 형.”
* * *
“도련님, 부탁이 있는데요.”
상황이 일단락되고, 아이젠 일행은 막사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때 모니카가 문득 입을 열었다.
“응? 왜.”
“제발 사고 좀 안 치시면 안 될까요? 걸어 다니는 곳마다 사고를 치시는 것 같아요, 요즘.”
“아, 뭐. 오늘은 사고 안 쳤잖아.”
조금 전 있었던 일이야 잠깐의 해프닝 정도 아니겠는가?
잠깐이지만 아이젠은 베르너와 다툴 뻔했다. 베르너가 검을 휘둘렀을 때, 아이젠은 유랑보를 통해 유려하게 피했다. 그러나 그때, 베르너의 검은 분명 휘어지고 있었다. 아이젠을 향해서.
참철검은 만년한철로 만들었기에 단단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아이젠을 향해 그 단단한 철이 휘어졌다는 말이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응용인가.’
같은 참철검술이라 해도, 직계와 방계 사이에는 모종의 차이가 있을 것이었다. 방계일수록 기존의 참철검술에 일부 변형이 가해졌을 터.
아이젠은 그간 바네사와의 대련에서 베르너와 같이 검이 휘어지는 현상을 보지 못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4 방계 검술만의 특징일 것이었다.
‘만약 콘라트 4 방주가 멈추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아이젠은 베르너의 검에 베였을까?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아이젠이라면 유랑보를 한 번 더 사용해서 피했을 테니까.
하지만 추론일 뿐. 아이젠은 어쩐지 뭔가 재밌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즐거운데?’
방계는 1 방계부터 5 방계까지, 총 다섯 개의 가문이 있었다. 직계까지 포함하면 여섯 개의 가문. 그들 모두가 각자 다른 검술을 구사하는 것이라면.
“재밌겠어.”
싸움광 아이젠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모니카의 표정이 굳었다.
“재, 재밌겠다뇨, 도련님? 사고 치시는 게 재밌다는 말씀이세요? 그거 뒷수습하는 사람은 생각도 안 하시고!”
“아야야, 손 아파. 이 손을 누가 베었더라?”
“…죄, 죄송해요.”
“알면 그냥 조용히 좀 있어. 이거 나을 때까지 난 네 잔소리에 면역된 셈이니까.”
아이젠의 장난스러운 말투에도 모니카는 한마디도 못 했다.
“제이슨.”
“예!”
아이젠이 제이슨을 호출했다. 제이슨은 곧바로 그의 앞에 엎드려 부복했다.
“넌 이만 가 봐라. 다시 부를 때까지 나타나지 말고 있어. 다른 사람들이 보면 의심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러자면 사실 베르너와 브루노, 콘라트에게도 모습을 보이면 안 됐었지만, 뭐, 이미 들킨 마당에 별수 있나.
제이슨이 팟― 하고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순간이었다.
“우오오오오오!!”
어디선가 짐승이 우는 듯한 괴성이 들린 것은. 아이젠은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 * *
“우오오오오오!!”
얼핏 들으면 마물의 울음소리라고 해도 믿을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고성의 주인은 마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린우드 5 방계의 가주, 알브레히트 반 그린우드.
올해 쉰셋인 그의 몸은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우락부락한 근육들로 들어차 있었다. 그 몸에 어울리는 콧수염이 눈물에 젖어 드는 것도 모르고, 알브레히트는 펑펑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고성은 바로 알브레히트가 오열하는 소리였다.
“알브레히트 5 방주님, 이제 진정하십시오.”
알브레히트의 옆에서 그를 수행하던 하수인이 말했다. 하수인의 눈시울도 조금 붉어져 있었지만, 그는 알브레히트보다는 한결 마음을 가라앉힌 눈치였다.
지금 알브레히트가 오열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품에 안고 있는 두 구의 시체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대체 누가! 누가 내 아들들을!!”
알브레히트가 껴안은 것은 5 방계의 플로리안과 틸만이었다. 그러니까 알브레히트의 아들들이었다. 호기롭게 소가주전에 참전했으나, 그의 두 아들은 성과를 내기는커녕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알브레히트의 슬하에는 둘밖에 없었다. 즉 두 아들을 잃은 것으로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후대를 잃은 것이었다. 물론 알브레히트가 슬퍼하는 것은 가문의 핏줄이니 뭐니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두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었지만.
“가만둘 수 없다. 가만둘 수 없다!!”
영설산에서 눈사태가 나서 다행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플로리안과 틸만의 시체가 떠밀려 오는 일도 없었을 테니. 주검이라도 거둘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인 걸까.
알브레히트의 눈동자가 붉게 일그러졌다. 그 광경을 아이젠은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이젠은 알브레히트 5 방주의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었으나, 그에게 집중할 틈도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으니.
‘블렌하임의 짓인가.’
블렌하임은 귀족 사냥꾼. 그리고 애초에 그린우드의 씨를 말리기 위해 영설산에 온 터였다. 블렌하임이 저 둘을 죽인 것이었다.
플로리안과 틸만의 상태는 처참했다. 여기저기 잘린 데도 있고, 두들겨 맞은 흔적, 우수수 뽑혀 나간 어금니들까지.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다.
‘쯧. 안됐군.’
아이젠이 알브레히트를 보며 그렇게 생각하는데.
“훗. 잘됐군.”
뒤쪽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누군가가 아이젠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다름 아닌 한스였다.
아이젠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방금 뭐라고요?”
“잘됐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아이젠?”
“무슨 그런 말을.”
“흥. 이상하군. 너라면 나랑 같은 생각일 줄 알았는데.”
한스는 잠시 아이젠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알브레히트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저 둘은 경쟁자였다. 소가주전의 경쟁자. 그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경쟁자가 제거된 거다? 말이 너무 험하신데요.”
“그렇게 생각하나? 단어 선택이 다소 거칠지언정 틀린 말은 아닐걸.”
한스의 목소리가 진해졌다.
“놈들은 젠트리다. 언제든 우리 직계를 집어삼킬 생각만 품고 있는 놈들이야. 그린우드라고 다 같은 그린우드가 아니다. 잊지 마라, 아이젠.”
한스는 그 말을 끝으로 홱 돌아 가 버렸다.
아이젠은 한스의 말을 곱씹어 봤다. 그렇다. 사실 한스의 말에는 딱히 틀린 구석도 없었다. 소가주전에서는 누구라도 죽을 수 있다. 가주와 방주들도 그 사실을 알면서 소중한 자식들을 사지로 내몬 것 아니던가. 하지만.
‘그래도.’
아이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알브레히트의 두 아들이 소가주전 예선 도중 영설산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그들은 명예로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 둘을 죽인 것은 그린우드와는 하등 관계도 없는 외부인 블렌하임.
그리고 블렌하임에게는 아모스가 있었다. 그건 말하자면 반칙이었다. 반칙에 당해 죽은 두 사람의 억울함을 아이젠이 어찌 다 헤아릴까?
‘스승님.’
그의 스승 이화도의 죽음도 저 둘의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이젠의 목표는 생사경. 하지만 그 과정에서 헤쳐 나가야 하는 것이 있었다. 아모스의 중간 관리자를 거쳐 최종적으로는 총책을 없애는 것. 자신의 목표가 어디에 세워져 있는지, 아모스의 희생자들을 목격함으로써 그 나침반을 좀 더 확실히 할 수 있었던 아이젠이었다.
“…가자.”
“네, 도련님.”
모니카는 조용히 대답만 하고 돌아서는 아이젠을 수행했다. 모니카도 알 수 있었다. 아이젠이 지금 어떤 마음일지.
‘도련님, 도련님의 의지대로 행동하세요.’
모니카는 마음으로 아이젠을 응원하기로 했다. 물론, 사고는 안 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아서.
* * *
소가주전 본선이 열릴 때까지 남은 날은 사흘. 아이젠은 모니카를 물려 두었다. 잠시 혼자 있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 모니카는 규정상 완전히 물러나진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아이젠의 뒤를 따랐다. 언제든 수발을 들 수 있도록.
‘쯧. 역시 혼자 있기가 어려워, 이놈의 귀족 가문은.’
아이젠은 가만히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사흘 동안 무혈신공을 단련할 수도 있겠지만.’
무혈신공은 2성부터는 실전을 통해서만 강해지는 무공. 아이젠이 사흘 내내 가만히 앉아 무혈신공을 운공한다고 한들 실전에서 쌓는 수련치의 개미 눈물만큼도 효과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고 실전을 통해 무혈신공을 운용하자니, 소가주전 직전이라서 그를 상대해 줄 만한 사람이 없을 터.
“그럼 이 아이기스의 사용법을 좀 알아 놓는 게 좋겠는데.”
아이젠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데.
“아이기스?”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아이젠이 놀라 뒤돌아보니, 그곳에는 사울 장로가 서 있었다.
아이젠은 분명 무혈신공의 기감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사울 장로는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아이젠을 당황하게 했다.
“아니, 뭐 이렇게 숨죽이고 오세요.”
“놀래 드리려고요.”
“그게 장로님이 하실 말씀?”
“물론 농입니다. 그나저나, 아이기스라니요?”
사울 장로가 해명을 요구하는 말투로 묻자 아이젠은 뻔뻔하게 눈을 크게 떴다.
“아이기스가 뭔데요?”
“방금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그런 적 없는데. ‘아, 이길 수 있겠지?’라고 한 걸 잘못 들으신 거 아니에요?”
“아 이길 수?”
“소가주전에서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돼서요.”
아이젠의 해명은 터무니없는 말장난이었지만, 너무 뻔뻔하게 나오니 사울 장로도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엄……. 그야 물론 공자님 하시기에 달렸겠지요.”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공자님.”
아이젠이 돌아서려는데, 사울 장로가 그를 불러 세웠다. 아이젠이 고개를 들자 사울 장로가 말했다.
“가슴속의 ‘그것’은, 깨우치셨습니까?”
아이젠은 그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다. 관철의 룬을 말하는 것이었다.
아이젠은 잠시 사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울의 표정이 평온해졌다. 아이젠 공자가, 뜻을 깨우쳤음에 감격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