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초대 가주 지안니는 아이젠에게 말해 주었다. 그노시스에 오면 아이기스의 사용법을 알 수 있다고.
‘하지만 왔다고 해서 그냥 뿅 하고 사용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닐 테지.’
뭔가 방법이 있을 텐데, 그게 뭐려나.
아이젠은 그에 대한 고민도 할 겸 시장통에 온 것이었다.
“아무튼, 너무 마음 급해 하지 마, 제이슨. 넌 그저 나를 위해 일하기만 하면 돼.”
“…예, 공자님. 새겨듣겠습니다.”
“그나저나, 게오르크는 대체 왜 영설산에서 나를 수색할 조사대를 꾸렸지?”
“그 점이 의문입니다. 공자님께서 정말로 조난당하셨다고 생각했다면 굳이 조사대를 꾸릴 게 아니라 죽게 놔뒀으면 됐을 텐데.”
“흠……. 고민해 볼 문제네.”
“그렇습니다.”
“저기… 저도 듣고 있는데요.”
아이젠의 왼쪽에 제이슨이 서 있다면, 오른쪽에는 줄곧 모니카가 서 있었다. 아이젠의 시중 담당이었다.
“저 심장 떨려서 못 듣겠어요. 대체 무슨 말이에요? 게오르크 공자님을 치다니요?”
“모니카, 그냥 못 들은 척해. 그게 네 신상에 이로워.”
“속이 울렁거려요……. 체할 것 같아요.”
“과일 먹을래? 사과.”
“먹다 남은 걸 주신다구요?”
“응. 고맙지?”
아이젠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앞쪽에 있는 다른 과일 가게를 방문했다. 과일 상인이 해맑게 웃으며 아이젠 일행을 맞았다.
“어서 옵쇼―!”
“이건 얼맙니까?”
아이젠이 난생처음 보는 큼지막한 연두색 과일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과일 상인이 씨익 웃으며 과일을 가리켰다.
“멜론 말씀이시구나!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네. 이 큰 게 단돈 500골드! 그노시스에서는 보기 힘든 과일입죠.”
“윽, 비싸네. 용돈 얼마 안 받았는데.”
사실 그 용돈이라는 것도 사울 장로에게서 거의 삥 뜯듯 받아 온 것이었지만.
아이젠은 품에서 동전을 꺼내 과일 상인에게 내밀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우적우적― 그렇게 멜론 반절은 모니카에게 주고 나머지를 씹어 먹던 아이젠은.
“이봐! 뭔 개소리야, 그게!”
시장 안쪽, 멀리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이젠이 흥미를 품고 그쪽을 쳐다보자 모니카가 다가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도련님. 아직 몸도 불편하시잖아요.”
“여인의 말이 맞습니다. 시장 구경이나 좀 더 하시죠.”
“그런가? 그럼 그러……. 아야야야. 손 아파라. 누가 휘두른 단검 때문에 손바닥이 쓰리네.”
“…….”
아이젠이 장난스레 말하자 그의 손을 벤 장본인인 모니카는 한마디도 못 했다. 아이젠이 말했다.
“잠깐만 보고 오자. 무슨 일 있나.”
* * *
쌍둥이로 보이는 두 청년이 있었다. 둘 다 머리가 연노란색에다 생김새가 비슷해서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림짐작해 보건대 둘 다 나이가 20대 초반 정도. 그중 형 쪽의 이름은 베르너, 동생 쪽의 이름은 브루노였다. 베르너 반 그린우드와 브루노 반 그린우드. 둘 다 그린우드 4 방계의 아들이었다.
베르너가 외쳤다.
“음식값이 이게 말이 돼? 난 이 돈 못 내.”
“못 내.”
브루노는 소심하게 베르너의 말을 따라 했다. 그러나 미소 짓고 있는 것이 얼핏 즐기는 듯도 보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카페테리아의 주인은 난감하다는 얼굴을 지어 보였다.
“하, 하지만, 이미 다 드시고 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계산서도 주문 전에 미리 드렸는데!”
“그땐 내 눈이 삐었었나 보지. 가만있어 봐. 근데 이 양반이 지금 어디다 대고 큰소리를 내지?”
베르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185cm의 장신이었고, 덕분에 주인은 금세 사색이 되어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베르너가 위압적으로 말했다.
“누구 덕에 여기서 장사하는 줄 알고 언성을 높이는 거야? 응? 내가 누군 줄 알아?”
“그, 그것이……. 죄, 죄송합니다.”
“이곳 그노시스는 우리 그린우드가 천 년 전에 산 마을.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베르너의 말은 사실이었다. 천 년 전, 초대 가주 지안니 폰 그린우드는 이곳 그노시스를 거액을 주고 사들였다.
하지만 그린우드가 그노시스에서 따로 영주 행세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린우드에게 그노시스는 어디까지나 가문의 소가주전을 위한 장소에 불과했으므로.
때문에 마을 주민들도 딱히 그린우드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령 베르너처럼 고자세로 나오는 인물이 있으면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베르너 님.”
“공자님.”
“예?”
“베르너 ‘공자님’이라고 불러. 귀먹었어?”
공자라는 것은 직계에게만 허락되는 호칭이었다. 방계인 베르너를 공자라 부르는 것은 신분 질서에 어긋나는 일. 그렇기에 주인은 입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별말을 못 했다. 그것이 베르너의 자존심을 자극했는지.
“이 자식이 근데! 똑바로 말 안 해?!”
그가 참철검을 뽑아 들었다. 아니, 뽑아 들려는 찰나였다.
찰캉!
베르너의 오른손에 의해 뽑혀 나오던 참철검이 도로 검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베르너가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아이젠이 서 있었다. 뒤에 모니카와 제이슨을 대동한 채.
아이젠은 왼손으로 베르너의 칼집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
그 황당한 광경에, 베르너는 뭐라 항의하지도 못하고 잠시 멍을 때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뭐야, 이놈은!”
채앵!
몸을 비틀어 아이젠의 왼손을 떨쳐 냈다. 아이젠은 밀려나는 기색 없이 그 자세 그대로 자리에 섰다. 베르너가 씩씩거리며 말했다.
“감히 내 칼에 손을 대?”
“내가 손댄 건 칼집인데?”
“이건 그린우드의 참철검이다! 누군진 몰라도 네깟 검은 머리 놈이…….”
베르너는 점점 목소리를 줄였다. 그러다가 뭔가 눈치채고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 검은 머리? 설마 직계 놈이냐?”
검은 머리는 현 그린우드 직계의 특징.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방계 놈이시고?”
“이름은?”
“남의 이름을 물어볼 땐 자기 이름부터 밝히는 게 예의 아닌가.”
아이젠이 능청스레 말하자 베르너는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너 같은 놈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나는 내게 바가지를 씌운 이곳 주인에게 마땅한 벌을 주려는 것이니.”
“그런 것이니.”
베르너의 말을 브루노가 따라 했다. 별 희한한 한 짝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아이젠은 그의 말을 받았다.
“미안한데, 아까부터 대충 들었는데 그냥 네가 억지 부리는 거로밖에 안 들리던걸. 얼마예요?”
아이젠이 주인을 향해 넌지시 묻자 주인이 답했다.
“다, 다 해서 700골드입니다.”
“들었지? 700골드래. 내라.”
“그런 돈은 없어!”
“너도 용돈 조금 받았어?”
“뭣?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이딴 바가지요금을 낼 돈은 한 푼도 없다는 거다! 뭐야, 너 아까부터! 나보다 나이도 어린 듯한데 시비 거는 거냐, 지금?”
베르너가 목소리에 짜증을 듬뿍 담아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젠은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한스도 그렇고 이놈들도 그렇고. 이 가문은 나이를 거꾸로 먹는 거야, 뭐야?’
어째 연령대가 올라갈수록 진상 부리기 좋아하는 놈들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물론 게오르크와 바네사는 아니지만.
아이젠은 베르너와 브루노에게서 왠지 모르게 한스의 향기를 느꼈다.
스릉! 그때 베르너가 칼을 뽑았다. 그러자 브루노도 덩달아 같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난 베르너 반 그린우드! 아무리 직계라 해도 내 의지를 꺾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난 아이젠 폰 그린우드. 한판 하려고? 그런 건 또 내가 안 피하지.”
아이젠은 아까부터 팔짱을 낀 채 풀지도 않았다.
베르너는 어느새 참철검술을 쓸 자세까지 잡고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발 한쪽을 디딤돌 삼았다.
그런데도 아이젠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세등등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베르너와 브루노를 가만 내려다볼 뿐. 분명 키는 아이젠이 더 작지만, 그는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베르너가 기다리다가 말했다.
“뭐냐. 결투하자며? 너도 어서 검을 뽑……. 잠깐, 검이 없잖아?”
“난 검 안 써.”
“설마, 직계 중에 검을 안 쓰는 머저리가 있다더니 그게 사실이었나?”
머저리? 어째 자신을 표현하는 어휘가 점점 강해지는 듯하다고 느끼는 아이젠이었다.
“그래. 그 머저리가 바로 나야.”
“큭큭. 참철검가에서 검을 쓰지 않는다니. 별 희한한 놈 다 보겠군.”
그 말을 끝으로 아이젠과 베르너는 더 이상 말을 섞지 않았다.
모니카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제이슨도 자신이 나서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아이젠이 넓은 등으로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둘 다 나설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그럼…….”
그렇게 마침내 베르너가 검을.
부웅! 휘둘렀다.
베르너로서는 기습을 한 것이었다. 아이젠이 어떻게 자세를 잡기도 전에 검을 휘두른 것이었으니까. 실제로 공격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겁만 주려고 한 것일 뿐.
‘피를 조금 흘리고 나면 주먹으로 검을 상대하겠다는 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 깨닫게 되겠지!’
베르너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아이젠은 팔짱 낀 모습 그대로 발만을 움직였다.
‘유랑보(流浪步).’
아이젠의 신형이 베르너의 검을 관통하려는 그때.
“뭐 하는 짓들이냐!!”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베르너의 검이 허공에서 얼어 버린 것처럼 우뚝 굳었다.
베르너의 표정이 갑자기 사색이 되었다. 옆에 서 있던 브루노도 마찬가지.
쿵! 쿵! 쿵!
우람한 발소리를 내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이젠도 익히 아는 사람이었다.
그린우드의 4 방주, 콘라트 반 그린우드. 그러니까 아이젠의 눈앞에 있는 이 두 사람, 베르너와 브루노의 아버지였다.
“베르너. 브루노. 지금 검을 뽑은 거냐?”
“아,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콘라트의 얼굴색이 붉게 물들었다.
“거짓말 마라! 다 봤으니까! 감히 소가주전 본선이 열리기도 전부터 가문의 사람끼리 검을 휘두르려 들어?”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둘 다 썩 물러가거라!”
“예, 예, 아버지!”
“예, 아버지!”
와다다다―
베르너와 브루노는 원래부터 거기 없었다는 듯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그러자 멀뚱멀뚱 서 있던 아이젠을 향해 콘라트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거 우리 아이들이 실례했군. 두 놈 다 워낙 다혈질이라서 말이야. 돌아가면 정신머리 교육 좀 해야겠어.”
“…예, 뭐. 안녕하십니까, 4 방주님. 아이젠이라고 합니다.”
아이젠은 우선 양손을 모아 콘라트에게 인사를 했다. 콘라트는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날 아는군? 자넨 아마 테오발트의 넷째였지?”
“그렇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콘라트였지만, 아이젠은 그의 이명을 알고 있었다. 콘라트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검서(劍犀). 즉 검의 코뿔소. 그는 참철검술 7성의 검사였다. 이제 겨우 4성에 오른 아이젠으로서는, 비록 참철검술과 무혈신공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나 이길 수 없었다.
‘역시 방주들도 전부 온 건가.’
그린우드 가문의 큰 행사이니만큼, 소가주전 당사자인 자제들뿐만 아니라 방주들도 모두 그노시스에 와 있었다. 직계는 사울 장로가 가주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콘라트는 한껏 깔보는 시선으로 아이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테오발트도 자식 농사에 모두 성공한 건 아니군. 이딴 녀석이 소가주전에 나오다니.’
옷 위로도 드러나는 몸에서 제법 단련한 솜씨가 보이긴 한다만.
그래 봤자 검을 못 쓰는 팔푼이, 반편이에 불과하다.
한껏 비웃는 웃음을 지으며 콘라트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