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 * *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었다. 블렌하임 패거리는 어떻게 아이젠이 영설산에 온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간단한 풀이 문제야.’
아이젠은 판단했다. 블렌하임은 왜 길버트의 독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을까? 그럼으로써 모니카를 살릴 수 있도록. 물론 모니카의 팔을 그은 것은 그녀 본인이지만, 아이젠의 생각에 모니카는 독의 치명성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모니카는 피터의 첩자였으므로.
사실이 어떠한지는 아이젠도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고. 다만 아이젠은 모니카의 해명을 기다릴 뿐이었다.
“…….”
모니카는 아이젠과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녀는 아이젠에게 붙들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러나, 떨림은 곧 멎었다. 모니카는 체념한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얼마 안 됐어. 블렌하임과 만난 이후부터 의심했지.”
“그러…셨군요…….”
“넌?”
“네?”
“넌 언제부터 저들에게 정보를 넘겼지?”
아이젠의 물음에 모니카는 고개를 들어 아이젠과 눈을 맞췄다. 두 사람의 거리는 꼭 콧잔등이 닿을 만큼 가까웠으나 모니카가 느끼기에는 이 순간 아이젠이 저 멀리 닿을 수 없는 곳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아이젠을 밀어낸 것은 모니카 자신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했다.
“죄송해요, 도련님. 정말 죄송해요.”
모니카는 첩자였지만 블렌하임의 부하인 것은 아니었다. 모니카에게는 이유가 있었다. 그들을 도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 하지만 그걸 말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신은 배신자일 뿐인데.
“……!”
팟!
모니카가 아이젠의 손을 빠르게 뿌리쳤다. 아이젠은 무혈신공의 반동 탓에 팔이 저려 그녀의 손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고.
치잉!
모니카는 곧바로 등허리에 꽂아 둔 단검을 뽑았다. 단검의 길이는 꼬박 15cm 정도. 짧은 길이지만 누군가의 심장을 꿰뚫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모니카는 자신의 가슴팍에 단검을 휘둘렀다.
휘익!
단검이 모니카의 옷을 가르고 살갗을 꿰뚫는 순간.
주르륵…….
모니카의 가슴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피는 그녀의 옷을 적시는가 싶더니 미처 스며들지 못한 핏방울이 옷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도, 도련님.”
모니카는 자신의 심장을 찌르지 못했다. 모니카의 단검이 상처를 낸 것은 다름 아닌 아이젠의 오른손. 아이젠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모니카의 단검을 막은 것이었다.
아이젠의 오른손은 단검의 칼날을 부여잡고 있었다. 칼날이 아이젠의 손바닥을 예리하게 베고 피를 흘리게 했다.
“…끄응.”
“괘, 괜찮으세요, 도련님?”
모니카가 주춤 뒤로 물러섰다. 대체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거지? 자신은 자결을 하려 한 것인데 오히려 주인을 해치다니!
땡그랑― 하고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이젠은 고통스러워하는 얼굴로 손을 털었다. 무혈신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맨손으로 막은 것이었다.
“뭐 하는 짓이지, 모니카?”
“도, 도련님…….”
아이젠이 손을 뻗었다. 금세라도 모니카의 머리를 박살 낼 듯이.
하지만 아이젠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모니카를 와락 껴안았을 뿐.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넌 내 재산이다. 누가 주인의 재산에 함부로 손을 대지?”
“죄, 죄송해요. 죄송해요, 흑.”
모니카가 눈물을 흘렸다. 하염없는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사태가 진정되고, 모니카는 침대맡에 앉아 아이젠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피터가 그린우드에서 일했을 때, 저희는 친한 사이였어요. 피터는 제 양부모님이 어디 사는지까지도 알고 있었죠.”
“…그게 협박거리였나.”
“…네.”
알 만했다. 피터는 모니카의 양부모를 미끼로 공갈을 한 것이었다. 소가주전이 어디서 열리는지, 아이젠이 거기에 참가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으면 모니카의 양부모는 죽었겠지.
아이젠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의 턱에 두껍게 핏줄 자국이 불거졌다.
모니카는 계속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해요, 도련님. 정말 죄송해요…….”
“아니. 네가 죄송할 일 아니야.”
모니카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모니카가 아닌 그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을 테니.
‘나쁜 건 나와 모니카의 관계를 알면서도 가족을 빌미로 배신을 종용한, 바로 그놈들이다!’
블렌하임은 죽었다. 파파 그런트에 의해. 하나 아직 그 배후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이제야 아이젠은 자신의 앞길이 훤히 보이는 기분이었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하던 생사경의 활로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요아힘, 그리고 카인이 말했던 산발의 빼빼 마른 남자. 또 그 뒤에 누가 있든.
“모조리 박살 낼 거다.”
전부 없앤다.
“날 이렇게 열받게 만들었으면, 그만한 각오도 했겠지.”
어쩐지 입꼬리에 미소가 지어지는 아이젠이었다.
* * *
아이젠은 천막을 열고 나왔다. 요양이 좀 필요한 상태였지만, 아무래도 마음의 병은 모니카 쪽이 더 심한 듯했으니 잠시 그녀를 혼자 있게 해 주고 싶었다.
“자, 그럼…….”
날도 더운데 무얼 하며 본선까지 대기할까 고민하는데.
“어이, 아이젠!”
멀리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한스였다.
한스는 아이젠을 향해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자못 위엄 있는 모습으로, 하수인들까지 여럿 대동하고서.
저벅―
한스 일행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아이젠이 허리를 굽혔다.
“무탈하셨습니까, 한스 공자님.”
“뭐? 어, 어. 그래. 크흠.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영설산에서 그렇게 형편없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하하.”
하하하.
한스가 웃자 그의 하수인들이 따라 웃었다. 비웃음과 조롱이 한껏 담긴 웃음이었지만, 아이젠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네. 너무 춥더라구요.”
“여기선 또 너무 더우니 고생하겠는데? 그럴 바엔 그냥 예선 통과라는 어중간한 명성 따위 내려놓고 집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냐?”
“아이고, 돌아가긴요. 한스 공자님께서 잘 좀 봐주세요.”
그나저나 한스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분명 다른 그린우드들은 지금 참철검을 제작하고자 대장장이들을 찾아 떠난 상황일 텐데.
한스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다.
“아이젠.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러세요.”
“넌.”
한스는 지금 하려는 질문이 약간 자존심 상한다고 느끼는 건지 몇 번인가 말을 씹다가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오크의 시련을 통과했지?”
“오크의 시련?”
“영설산에 있던 그 하얀 오크 말이다.”
“아.”
질문을 받고 보니 오히려 아이젠이 더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한스는 대체 어떻게 통과한 걸까? 설마 그사이에 화이트 오크의 시련을 통과할 만큼 강해지기라도 한 걸까?
‘화이트 오크 그 양반, 의외로 통과 장벽이 낮은 거 아냐? 뭐, 내가 성장하면 다른 사람도 성장하게 마련이겠지만.’
아이젠은 한스 역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뤘나 보다 생각했다. 하긴, 이 녀석도 그린우드의 직계니까, 웬만한 수재 이상이겠지.
그리고 그것은 아이젠에겐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강한 상대가 생긴다는 건 좋으면 좋았지, 나쁠 일은 아니었으니까.
“안 알려 드릴 건데요.”
“뭐라고?”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안 그렇습니까, 게오르크 공자님?”
“뭣―”
아이젠이 왼쪽 위를 올려다보고 말하자 한스도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게오르크 첫째 공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한스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처, 첫째 공자님! 오셨습니까.”
“음, 그래. 아이젠, 아까는 경황이 없었구나. 몸은 좀 어떠냐?”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습니다. 여기저기 온몸이 쑤시는 걸 빼면.”
“보통 그러면 몸이 안 좋다고 하지.”
“전 좋은데요. 근육통이라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첫째 공자님.”
“하하. 넌 여전히 날 형이라고 부를 생각이 없는가 보구나. 이거 섭섭한데?”
“저, 저는 공자님을 형님이라 부를 생각이 만만입니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
한스가 끼어들자 게오르크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오, 그래? 어디 한번 불러 보렴.”
“게, 게오르크 형님!”
“그래. 듣기 좋군. 하하.”
그렇게 만담하는 두 사람에게서, 실은 아이젠은 눈을 떼고 있었다. 그는 지금 다른 것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한스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이젠은 한스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한스 뒤에 ‘있어야’ 할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언가는 한스의 뒤에 없었다. 아이젠 자신이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가 싶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윽고.
‘저깄었군.’
아이젠은 조금 전 나타난 게오르크의 등 뒤에서 그 무언가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란 바로 제이슨.
한때 다른 이를 모셨으나, 이젠 아이젠의 수하가 된 흑기사. 게오르크와 그의 수하들 사이에 있는 그림자 틈바구니에서, 아이젠은 흑기사 제이슨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제이슨은 고도의 흑마법으로 공기와 동화된 수준으로 숨어 있었다. 게오르크가 아무리 뛰어난 재기를 부린다고 해도 제이슨의 은신을 알아챌 순 없었다. 아이젠 역시도 제이슨이 신호를 보내고 있기에 알아차린 것일 뿐.
‘가문 내에선 장로들이나 테오발트 가주님 정도가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겠지.’
아이젠조차 의식하지 않으면 눈치챌 수 없을 정도의 잠행 능력! 아이젠은 첩보원 하나는 잘 심어 뒀다고 생각했다.
그 대단한 잠행 능력을 가진 제이슨. 그 제이슨의 그림자가 고개를 쳐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자가 저의 본디 주인입니다.’
아이젠은 그림자에서 게오르크의 눈동자로 시선을 옮겼다. 게오르크의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어딘지 모르게 탁하고 막이 쳐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자다. 게오르크 이자가 바로.
‘날 죽이려 했던 범인.’
아이젠이 감옥에 있을 때 그를 암살하려 했던 장본인이었다.
드디어 만났다는 생각에 아이젠은 가슴이 떨렸다.
* * *
아이젠은 시장으로 나왔다.
그노시스는 완벽하게 그린우드의 소가주전만을 위해 구성된 마을이었다. 마을 자체를 천 년 전 그린우드가에서 사 버렸으니까.
그러나 그런 사막 땅이라 해도 사람이 사는 이상 시장 정도는 당연히 있는 법. 비록 과일이나 작물의 상태가 좋지는 못했지만, 아이젠은 오랜만에 시장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제이슨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아이젠 공자님. 게오르크를 칠 생각이 없으신 겁니까?”
“그건 왜 묻는데?”
“제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렸는데도 별로 관심이 없으신 듯해 여쭙습니다.”
제이슨으로서는 생사를 걸고 숨어 있었던 것인데, 막상 아이젠의 반응이 미적지근하니 조급해진 모양이었다.
아이젠은 시장 상인에게서 사과를 하나 사더니 씹어 물었다.
와그작―
“왜 굳이 여기서 그 공자를 상대해야 하는데?”
“예?”
“난 지금 약한 몸이야. 승산 없는 싸움에 목을 걸 만큼 멍청하진 않아, 나도.”
아이젠은 물론 강자와의 싸움을 사랑한다. 실제로 눈 골렘 수십 마리와도 대적하지 않았나.
하지만 게오르크 정도로 강한 상대라면 말이 조금 달랐다. 사자는 호랑이와 싸울 때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상대가 호랑이가 아니라 용이라면?
‘지금은 한발 물러서서 힘을 길러야 할 때.’
좀 더 힘을 쌓아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했다. 물론 마음먹고 싸우려면 싸울 수야 있겠지만, 게오르크와 자신, 둘 다 최소 팔 한쪽씩은 내놔야 하겠지. 생각 없이 달려들고 나서 후회하는 멍청이로 남을 생각은 없는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이 힘을 쌓기 위해서는, 그노시스에 온 목적 중 하나를 이뤄야 했다.
‘아이기스의 사용법.’
그래. 그것은 바로 아이기스의 사용법을 알아내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