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 * *
그노시스!
불리기를 사막의 땅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노시스를 지칭하는 별명은 하나가 더 있었다. 바로 대장장이의 낙원.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린우드 가문은 그노시스의 대장장이들과 협업해 왔다. 만년한철은 가공하기 힘든 광물. 그것으로 검을 제작하려면 상당한 실력의 대장장이가 필요한데, 이곳 그노시스에는 세계 어딜 가도 이름을 날릴 만한 대장장이들이 몰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노시스의 대장장이들은 지난 천 년간 그린우드 가문에 충성을 맹세하며 만년한철의 제련을 전문적으로 맡고 있었다.
소가주전의 예선전을 통과한 그린우드는, 이곳에서 자신만의 대장장이를 찾아 만년한철의 제련을 의뢰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검으로 본선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인 소가주전의 순서. 지난 천 년간 그 순서는 단 한 번도 뒤틀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이젠만은 자신만의 대장장이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난 검이 필요 없으니까…….’
영설산에서 만년한철을 손에 넣었지만, 구태여 검을 제작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 아이젠이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아이젠 자신이 검을 쓰지 않기 때문이고, 둘째는 그에게는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의 정체는 초대 가주 지안니 폰 그린우드의 ‘서리 검 아이기스’. 가문의 역사서에나 나오는 아티팩트.
“…숨기는 게 좋겠지?”
그것이 아이젠의 손에 들어왔다.
아이젠은 가문 내 본인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검도 쓰지 않는 망나니에다가, 서자. 그런 놈한테 아이기스가 들어왔다? 그를 독살하려 했던 그 누군가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표적이 될 게 안 봐도 뻔했다.
아이젠은 물론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려도 상관없었지만, 귀찮아지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아이기스 브레이슬릿의 정체를 숨기기로 했다.
“근데 어떻게 빼는 거야, 이거.”
아이젠이 팔찌를 만지작거릴 때.
“아이젠 공자님.”
뒤에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아이젠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사울 장로. 전보다 한결 가벼운 면 소재의 옷을 입은 사울 장로였다.
사울 장로는 아이젠에게 가벼운 예를 표했고, 아이젠도 사제의 예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아이젠은 은근슬쩍 뒷짐을 져 팔찌를 숨겼다.
“사울 장로. 와 계셨네요?”
“테오발트 가주님 대신입니다. 가주님께서는 오늘 이곳에 오지 못하셨으니까요. 대리인이지요.”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열리고 있음에도 테오발트 가주는 오지 않았다. 그 이유가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전쟁 때문임을 알고 있는 사울 장로였지만, 구태여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는 문득 아이젠이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못 보던 팔찌입니다?”
“네? 아.”
여기서 더 숨기면 오히려 오해를 살 것 같아 아이젠은 당당하게 팔을 보였다.
“시장에서 샀습니다. 장신구 용도로.”
“그런 데 흥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습니다.”
“흥미 없어요.”
“흠. 아무튼 공자님도 옷을 얇게 입으십시오. 그노시스는 날이 더워 탈수 증상이 금방 일어날 겁니다.”
“아, 네.”
“그나저나, 다른 분들께서는 이제 다들 대장장이를 찾으러 떠나셨는데… 도련님께서는 안 가십니까?”
그건 묻는 것이 아니었다. ‘어서 가라’고 종용하는 것. 그러나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였다.
“소가주전 규칙이 어떻게 되죠?”
“어떻냐니요? 그야…….”
“정해진 날짜에, 북해에 있는 영설산에서 광산을 찾아 꼭 자기가 쓸 만큼의 만년한철을 캐 온다.”
“…그리고 소가주전 본선이 열리는 땅 그노시스에 도달하시면 되지요. 바로 이곳에.”
사울 장로가 무슨 문제 있냐는 표정으로 말하자 아이젠은 바로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도 그 캐 온 만년한철로 참철검을 만들어야만 한다는 규정은 없네요.”
“…필요 없으시단 겁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검을 안 쓰는지라.”
그러더니 아이젠은 자신의 양손을 들어 보였다.
사울 장로는 말린 어깨를 쫙 펴고 생각했다.
‘호오…….’
소가주전 이전, 검은 뿔 기사 학교에서 아이젠을 가르친 것은 다름 아닌 사울 장로 본인이었다. 그래서 아이젠 공자의 성장세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이미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라니?’
아이젠은 지금 몸에서 내기를 발산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사울 장로는 아이젠에게서 모종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운의 이름이 ‘홍화’라는 것까지는 당연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영설산의 시련을 겪으며 아이젠이 한층 더 강해졌음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근육이 좀 더 붙으신 것 같군요, 공자님.”
“그래요? 살이 빠져서 그런가.”
“참철검을 안 만드시겠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아이젠 공자님.”
“예엡.”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울 장로는 그에게 인사를 한 뒤 그만 뒤로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뺨에 떠오른 미소를 애써 지우고자 했다.
‘어디까지 성장하실 것인가.’
그는 그것이 무척 기대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사울 장로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 소가주전에서도…….’
하지만 속단은 금물. 사울 장로는 멀리 발을 옮겼다.
혼자 남은 아이젠은, 하려던 일을 마저 했다. 그는 어딘가의 천막 앞에 서 있었다. 천막을 올려다본 아이젠은 자신보다 키가 서너 배는 큰 천막의 높이에 감탄했다.
“누가 설치한 거야, 이건.”
하수인들만 또 죽어 나갔겠구만.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젠은 천막의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침대가 있었다. 환자를 돌보는 침대. 그 침대 위에는 아이젠이 익히 아는 여자가 누워 있었다.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마른 수건으로 닦고 있던 하수인이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아, 아이젠 도련님.”
“잠깐 나갈래?”
“예?”
하수인은 아이젠과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허리를 움푹 숙이고 천막 밖으로 나갔다.
“…….”
둘만 남은 공간에서, 아이젠은 여자와 눈을 맞췄다. 여자의 이름은 바네사. 아이젠의 누나이자 그린우드의 직계 둘째 공자.
사위가 조용한 가운데, 마침내 바네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젠.”
“네.”
“숙녀를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실례지 않아?”
“안 봤는데요.”
아이젠은 사실 바네사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는 것은 바네사의 왼팔. 정확히는, 왼팔이 떨어져 나가고 없는 왼쪽 어깨의 절단면을 보고 있었다.
칼로 자른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억지로 잡아 뜯은 듯 흉측하게 일그러진 상처. 비록 피는 멎었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프셨겠어요.”
“…그랬지.”
바네사는 잠깐 회상하는 듯했으나, 이내 표정을 밝게 고쳤다.
“왜? 동정이라도 해 주려고 그러니?”
“그럴 셈으로 오긴 했는데.”
아이젠은 침대맡에 바네사를 등지고 앉았다.
“블렌하임은 제가 박살 냈습니다. 근데 좀 더 세게 짓밟아 놓을 걸 그랬네요.”
조금 후회가 되는 아이젠이었다. 아예 사지를 분해해 놨어야 했는데.
바네사가 피식 웃었다.
“그래. 복수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아이젠은 바네사를 돌아보았다.
“그만두실 겁니까? 소가주전, 외팔로는 힘드실 텐데요.”
“무슨 소리니? 난 오히려 불이 붙었는데.”
그 말대로였다. 바네사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침대보 속에 가려 보이지 않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더니.
휘익! 탁!
아이젠을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아이젠은 가볍게 그녀의 목검을 붙들어 막았다.
‘무겁다.’
확실한 것 하나는, 아이젠이 지금 잡고 있는 바네사의 목검이 전보다 무거워졌다는 것이었다. 단순히 무게가 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바네사가 가지고 있는 오러가, 그 힘이, 더욱 정순하고 더욱 진보했음을 뜻했다.
아이젠은 웃었다. 바네사도 따라 웃었다.
바네사가 말했다.
“계속할 거야. 빨리 나아서 대장장이부터 찾아봐야겠지. 만년한철은 나도 캐 왔거든.”
블렌하임에게 습격당해 죽어 가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잊지 않은 것이었다. 팔 한쪽이 없어도, 그녀의 집념만큼은 살아 있었다.
“네. 그러실 줄 알았어요.”
아이젠이 바네사를 걱정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걱정한 것은 어디까지나 바네사의 다친 팔일 뿐, 바네사의 의지를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알았다. 바네사는 고작 ‘이깟’ 일로 목표한 바를 포기할 만큼 어리숙하지 않다는 것을.
아이젠은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일어났다.
“치료 잘 받으세요. 약 잘 챙겨 드시고.”
“그래.”
아이젠이 돌아 나가려는데, 바네사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이젠, 오랜만에 오러 점 좀 봐 줄까?”
“영설산 오르기 전에도 봐 주셨으면서 오랜만은 무슨.”
“그냥.”
별수 없이 아이젠이 손을 내밀자, 바네사는 조심스레 아이젠의 손바닥을 살폈다.
“…아이젠. 난, 다시는 지지 않아. 그 누구한테도. 너한테도.”
“…저한테는 좀 힘드실 텐데.”
“지지 않아.”
바네사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아이젠은 그를 못 본 체했다.
“그래요.”
* * *
“아야야야야.”
아이젠이 앓는 소리를 했다. 사실 아이젠도 온몸이 망가져 있었다. 며칠은 요양을 하며 쉬는 게 상책이었고.
“아파도 좀 참으세요, 도련님.”
그를 모시는 것은 당연히 모니카였다. 모니카는 침대 위에 누운 아이젠의 온몸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외상보단 내상이 커서, 근육 안쪽을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모니카도 독화살을 맞았던 몸이니만큼 몸이 성치 않았으나, 그녀는 아이젠을 모시는 게 자신의 의무라 여겼다.
“너도 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모니카?”
“도련님만 하겠어요? 도련님 다 나으시는 거 보고 저도 좀 쉴 거예요.”
“그러냐? 그러든가. 아! 아프다고.”
아이젠은 모니카가 바른 약을 문지르며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나저나 어떻게 혼자 잘 왔네? 그노시스까지.”
“제가 왔나요. 말이 데려다준 거지.”
“그 말 잘 모셔. 보통 놈이 아니다.”
“네, 네. 이상한 데 신경 그만 쓰시고 푹 쉬기나 하세요.”
사실 아이젠은 할 말이 있었다. 모니카에게.
아이젠은 영설산에서 있었던 몇 가지 일 중 하나를 회상했다. 길버트와 메르헨이라는 암살자가 아이젠과 모니카를 습격했다. 아이젠은 길버트를 제압한 후 그를 고문해 정보를 캐냈었다.
[정보원으로부터 영설산에서 그린우드 공작 가문의 소가주전 예선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들었고, 블렌하임 대장은 그린우드 새싹들의 머리를 베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왔다.]
그때 길버트는 그러한 내용을 지도에 적어 주었다. 그러나 길버트는 그 정보원이라는 게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피터는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피터는 애초에 아이젠이 영설산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온 것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그 정보원은 누구인가. 아이젠은 이미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모니카.”
“네, 도련님?”
“손 떨린다.”
그 말을 들은 모니카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손을 붙들었다.
탁.
아이젠이 그녀의 손을 낚아챘다. 모니카의 왼팔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모니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아이젠은 가까이 몸을 붙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듯 속삭였다.
“모니카 너지? 피터에게 내가 소가주전에 나간다는 걸 알려 준, 그 정보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