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 * *
그린우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천 년 전의 역사가 나온다.
초대 가주 지안니 폰 그린우드는 자신의 검 아이기스로 세상을 바로잡고 제국을 강성하게 해 황제로 하여금 치국평천하를 이루게 했다.
어느 날 아이기스와 함께 자취를 감춘 지안니는 그날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가졌던 전설의 비보 아이기스는 아직도 그 행방이 묘연하다.
…는 것이 아이젠이 어릴 적 가문의 사저에서 읽은 내용이었다.
‘거기 나왔던 지안니가, 눈앞의 이 남자라고?’
그렇다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천 년 전부터 시작된 역사라면 눈앞에 보이는 지안니는 현실일 리가 없었다.
그때, 마치 아이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지안니가 말했다.
- 맞아. 난 실재하는 게 아니지.
“뭡니까, 그럼?”
- 글쎄, 표현하자면 사념(思念) 같은 거일까? 정확하진 않겠지만.
초대 가주치곤 말하는 게 영 매가리가 없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초대 가주가 맞는단 말이야?
초대 가주는 허리가 뻐근했는지, 왼손으로 턱받침을 하고 드러누웠다. 물론 바닥에 누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푸른 빛을 발하며 허공에 떠 있었다.
- 그래서, 네가 내 몇 대손이라고?
“…글쎄요. 계산이 안 돼서. 천 년이나 지났으니까 대충 100대손?”
- 뭔 계산 방식이 그러냐. 너 머리는 별로 좋은 편이 아니구나?
“저 머리 나쁜 데 보태 주신 거 있습니까?”
- 와, 그나저나 천 년? 벌써 세월이 그렇게 지났어? 시간 진짜 빠르네.
대손이라고는 표현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아이젠은 지안니의 직계 후손은 아닐 것이었다.
그린우드의 성씨에는 귀족 성이 있다. ‘폰’과 ‘반’. 폰은 직계이고, 반은 방계. 그러나 지금 아이젠이 폰이라는 귀족 성을 쓴다고 해서 지안니의 이름에 붙은 폰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오직 직계만이 폰의 이름을 가진다. 그리고 그 직계는 소가주전을 통해 방계와 위치가 역전되기도 한다. 즉 아이젠이 만약 이번 소가주전에서 패배한다면 테오발트 가주 사후 아이젠의 이름은 ‘아이젠 반 그린우드’가 되는 것이다.
- 요즘 그린우드 가문은 어때? 여전히 검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나?
“제가 바깥일은 잘 몰라서. 모르긴 몰라도 그런 편일걸요? 공작가니까.”
- 공작가? 그거 특이하네. 내가 있을 때까지만 해도 백작가였는데 말이지. 전쟁 공훈을 많이 세웠나 봐?
지안니는 오랜만에 만난 세상 공기가 반가운지 이것저것 떠들기 바빴다. 답답한 나머지 아이젠이 말했다.
“저기요.”
- 응?
“아니, 뭐, 나타나셨으면 왜 나타나셨는지도 말을 좀 해 주셔야 하지 않나? 저랑 떠들려고 등장하신 건 아니잖아요.”
- 무슨 소리야. 네가 날 깨웠잖아.
“제가요?”
- 그래. 저기.
지안니는 바닥에 부서져 있는 눈 골렘의 핵을 가리켰다. 핵이 갈라지며 자신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잠깐, 눈 골렘의 핵이 깨져서 나오셨다고? 저게 천 년 동안이나 안 부서지고 있었을 리도 없는데.”
- 안 부서지고 있었는데? 지난 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 공동을 찾아낸 건 네가 처음이야.
자신이 처음?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분명 지도에 의지해 동굴을 찾아낸 것인데, 어떻게 자신이 처음일 수가 있지? 산사태 때문에 동굴이 무너져 내린 덕분인가?
아이젠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지안니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렸다.
- 이 공동 안에서 눈 골렘의 핵이 파괴될 때 나는 깨어난다. 넌 그 조건을 만족했을 뿐이야.
“무슨…….”
- 시답잖은 얘기는 그만하자. 그나저나, 넌 그린우드라는 애가 왜 검도 안 들고 있어? 참철검은?
지안니가 동그란 눈으로 아이젠의 면면을 살폈다. 아이젠은 양팔을 들어 올려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었다.
“검은 쓰지 않습니다.”
- 뭐라고?
“전 이 두 주먹으로만 싸워서요. 권법을 쓰죠. 참철검술이 아니라.”
- 오……. 오호라…….
지안니는 생각이 많아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까딱였다.
- 그럼 넌 맨주먹으로 오크 녀석의 시련을 통과했나?
“오크? 아, 그 영물이요?”
- 영물이 아니야. 녀석은 마혼(魔魂). 마물이 진화한 형태지.
인간이 도를 닦으면 도사가 되는 것처럼, 마물이 긴 시간을 살며 어느 순간 대오를 각성하면 마혼이 된다. 영설산의 오크는 바로 그 마혼이었다.
- 녀석과 싸워 이긴 후 부탁을 하나 했거든. 이곳 영설산에서 아이들의 시험을 관장해 달라고.
“네, 잘하고 계시던데요. 저도 통과했고.”
- 그래? 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와의 약속을 지켜 주고 있었다니. 뚝심 있는 놈이네. 못 보고 가는 게 슬픈걸.
그러더니 지안니는 눈을 내리깔았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여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침내 지안니가 정신을 차렸다.
- 자, 그럼 여기까지 왔으니 상을 줘야겠군.
“상?”
- 그래. 날 처음으로 찾아낸 녀석에게는 상을 주기로 했거든. 천 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지만.
별안간 기연이라. 아이젠은 그저 동굴을 무너뜨리고 눈사태에 휘말려 공동 속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다. 다만 아이젠의 표정은 약간 뚱했다.
“별로 필요 없는데. 금은보화라도 주시나요? 그럼 좋고.”
- 넌 근데 왜 이렇게 말투가 싹수가 없냐? 난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 말하자면 네 뿌리나 다름없는데.
“요즘 그런 말을 자주 듣는 것 같네요. 싹수없다는 말.”
- 그래, 뭐, 말투야 그렇다 치고…….
지안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의 눈빛은 한층 예리해져 있었다.
- 상을 주마. 하지만 그 전에 자격이 있는지 확인부터 해 볼까?
자격?
아이젠이 대답하기 전, 지안니가 오른손을 들어 올려 입가에 갖다 댔다. 마치 ‘쉿’ 하고 조용히 하라는 것처럼. 그러더니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
공동이 진동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글자 그대로 이 공동 전체를 울리는 소리!
아이젠은 진앙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찾아낼 수 없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찾는 것이 무의미했다. 공동의 땅 전체가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으므로.
쿠구구구구!!
마침내 공동의 밑바닥이 갈라졌다.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뒤로 뛰어 균열을 피했다. 갈라진 땅 사이에서 나온 것들은 다름 아닌 눈 골렘.
“이게 다 몇 놈이야.”
그것도 수십 마리나 되는 눈 골렘이었다.
쿠궁!
마침내 진동이 멎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의 눈 골렘이, 아이젠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 그오오오.
- 그오오.
- 그오오오오.
눈 골렘들이 말하는 소리가 고막을 지겹도록 타격했다. 그것들의 목소리에, 아이젠은 온몸 근육이 저릿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굴 속 눈 골렘의 제작자는 다름 아닌 초대 가주 지안니였나.
“이게 다…….”
- 눈 골렘이다. 네가 위에서 상대했던.
눈 골렘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사신강림의 묘리를 다해야 했던 아이젠이었다. 그런데, 수십 마리? 어림잡아도 오십 마리는 넘을 것 같은 이 눈 골렘 군단을, 지금 아이젠더러 상대하라는 것인가?
지안니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 왜? 불가능해?
불가능하냐고? 그야 당연히 불가능하다. 단신으로 간신히 한 마리를 상대할 수 있는 게 고작인 아이젠이, 이 수십 마리의 눈 골렘 떼를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런데.
씨익.
어째서인지 아이젠의 입술도 덩달아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불가능하진 않겠죠.”
아이젠은 기쁨에 겨워하고 있었다. 이놈들은 모두……. 모두!
‘내 수련치로 써 주마!’
아이젠의 생사경을 향한 거름이 될 테니까!
눈 골렘들이 일거에 달려들기 직전, 아이젠은 두 다리를 땅에 딛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결자해지: 일수일도(一手一度)!’
결자해지 일수일도(一手一度)는 아이젠이 싸우는 도중에 결자해지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공. 즉, 싸우면 싸울수록 실시간으로 더더욱 강해지는 무공이었다.
콰아아아아!
아이젠의 몸에서 진기가 뿜어져 나왔다.
실시간으로 강해질 수 있지만, 일수일도에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결자해지로 받아들이는 수련치의 양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리고 가진 힘을 모조리 사용해야만 한다. 즉, 언제나 풀 파워 상태로 싸워야 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최소한 생명의 불씨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힘만은 남겨 놓고 싸우는 법. 그러나 아이젠은 그 작은 불씨에 담을 힘마저 모조리 결자해지 일수일도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모든 기운과 생명을 다해, 이 한 몸을 불사르도록!
- 호오, 그게 네가 말한 권법인가?
“네. 결사신권(抉死神拳)이라고 부릅니다.”
- 사신(死神)을 도려내는(抉) 권법이라. 네가 붙인 이름이냐?
아이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 스승님께서.”
- 그렇군.
지안니도 깨닫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침내 무릎을 펴고 일어섰다.
- 네 그 무리(武理)에 나도 보답해 볼까?
지안니는 다시 한번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 대더니 주문을 외었다. 그러자 또다시 땅이 갈라지며 좀 전과 거의 비슷한 숫자의 눈 골렘이 땅 위로 솟아올라 왔다.
이젠 공동에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지경. 오직 아이젠과 지안니를 구심점으로 작은 반원만큼의 공간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아이젠은 삐질 땀을 흘렸다. 그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친.”
- 두려우냐?
“두렵냐고요?”
아이젠은 훗 웃었다. 별 이상한 질문 다 받아 보겠다는 듯.
“설레서 그럽니다, 설레서!”
- 그래? 주저하지 말아 봐라.
파앙!
아이젠의 신형이 쏘아졌다. 그는 눈 골렘의 틈바구니로 파고들어, 그 작은 몸의 자취를 감추었다.
* * *
퍼억!
투쾅!
콰지지직!
퍽! 퍽! 퍽!
공동 안을 울리는 것은 소음이었다. 무언가를 부수고, 쪼개고, 이따금 완전히 파괴해 버리는 소음.
소리가 날 때마다 부서지고 쓰러지는 것들이 있었다. 바로 눈 골렘이었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콰아앙!
아이젠은 가장 가까이 있던 눈 골렘의 핵에 주먹을 박아 넣었다.
쩌적쩌적―
소리를 내며 갈라지던 핵이 파괴되고.
“후우!”
아이젠의 단전에 결자해지의 무공이 스며들어 왔다.
‘이제 조금 남았다.’
아이젠은 무혈신공 4성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마치 목구멍까지 차도록 배불리 먹은 것처럼.
아이젠은 있는 힘껏 체력을 끌어모았다.
이 이상 올라갈 수 없는가?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아이젠은 더욱 다리에 힘을 줬다. 누군가가 대둔근을 만지면 마치 바윗덩어리라고 착각할 만큼.
- 그오오오!
때마침 한 눈 골렘이 아이젠을 향해 달려들었고, 아이젠은 왼쪽 주먹에 모든 힘을 담아 녀석의 핵에.
‘권왕백무(拳王百舞)!’
권왕백무를 먹였다.
콰지지지직! 파창!
권왕백무를 맞은 녀석의 핵은 속절없이 깨져 바닥에 떨어져 흘렀다.
아이젠이 지금까지 부서뜨린 눈 골렘의 숫자가 몇이나 될까? 다섯? 열? 그 숫자가 스물을 넘기고서부터는, 아이젠은 더 이상 수를 헤아리지 않았다. 아니, 헤아리지 못했다. 정신이 혼미하고 수십 시간 잠을 못 잔 것처럼 몽롱한 기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눈 골렘의 숫자가 쉰은 더 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으…아아아아아!!”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