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유랑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아이젠은 눈 골렘의 주먹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몸을 휘돌렸다.
- 그오?
눈 골렘이 당황하여 외칠 때, 아이젠은 주먹 뻗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박살 나라!”
결사신권, 박살(撲殺)!
콰아아앙!
마침내 아이젠의 주먹이 눈 골렘의 핵에 적중했다.
파앙! 와르르!
눈 골렘은 충격파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다만 허공에 떠 있는 핵만이 아이젠의 주먹과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었다.
으드득! 으드드득!
아이젠의 주먹이 핵을 파괴하려 나아갔지만, 핵은 실금조차 가는 일 없이 아이젠의 주먹을 마주 밀어냈다.
‘사신강림을 담은 박살로도 효과가 없다고?’
그렇다면, 더욱 강한 힘으로 밀어붙이면 될 일! 길이 막혔을 때 돌아가는 것은 아이젠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저 길을 새로 뚫어 버리면 그만!
‘사신강림(死神降臨)!’
아이젠은 허벅지에 사신강림의 힘을 불어넣었다. 어느새 남은 운용 시간은 1분 남짓. 이 이상 시간을 소비하면 아이젠의 몸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으리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여기서 힘을 거두는 건 자존심 상하지!’
넙다리 네 갈래근과 넙다리 빗근, 넙다리 두 갈래근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젠은 근육 곳곳에 힘을 불어넣어 하반신을 견고히 했다. 돌덩어리처럼 강고해진 아이젠의 다리가, 그가 뒤로 밀려나지 않도록 바닥을 딛고 버텼다.
키이이이잉!
눈 골렘의 핵이 서릿빛 빛을 발하며 아이젠에게 맞섰지만, 아이젠의 주먹은 이제 대들보를 뒤에 두고 있었다.
“결사신권, 권왕백무(拳王百舞)!”
으드드드득!
아이젠의 오른손이 다시 한번 작렬하고.
콰아아앙!
마침내 주먹이 쭉 뻗어져, 눈 골렘의 핵을 날려 버렸다. 눈 골렘의 핵은 날아가는 한편 실금이 가는가 싶더니.
쩌적! 쩌저저적!
마침내 끝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이젠은 그 모습을 보고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쪼개져라, 이 자식아!’
빠드득! 빠직!
마치 폭발 직전 갈라지는 행성처럼 눈 골렘의 핵은 전체에 균열을 일으키며 동굴 벽을 향해 날아갔고.
콰아아아앙!!
마침내 동굴에 들이박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핵은 그 상태로도 계속해서 동굴을 꿰뚫었으며.
콰과광! 콰과과과과광!
퍼엉!
마침내 동굴 한쪽 벽을 뚫어 버리고 말았다. 일직선으로 뚫린 동굴 벽을 통해, 아이젠은 환한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너머에서는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눈?
“어라.”
잠깐만.
우르르르.
아이젠의 설마 했던 생각이 현실이 됐다.
쿠구구구……!
동굴이 흔들리는 소리가 아이젠의 귓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이젠은 반사적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동굴이.
콰과과광!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미친!”
아이젠은 재빨리 사신강림의 분홍빛 오러를 온몸에 둘렀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동굴 천장 조각을.
퍼억!
몸으로 받았다.
퍽! 퍼억! 퍽! 퍽!
아이젠의 몸 위로 바위가 쏟아져 내리고, 마침내 바위들이 아이젠의 몸을 모두 가려 버리고 나서도.
쿠구구구구구구…….
충격의 여파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마침내 영설산 전체를 흔들었다. 영설산의 꼭대기에서부터 서리 바람이 몰아치고.
콰아아아아아!
마침내 눈사태가 일어났다.
* * *
“헉! 흐윽! 후윽!”
모니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온몸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나쁜 꿈을 꿨기 때문은 아니고, 단순히 이곳이 몹시 더웠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덥지?’
여긴 분명 영설산 인근일 텐데, 추운 건 고사하고 덥다니?
모니카는 제 몸을 살폈다. 얇은 옷 한 장을 걸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외투를 입고 입지 않았다.
다음으로 모니카는 주변을 살폈다. 그녀는 어딘가의 막사 안, 침대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윽!”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여긴 영설산이 아니었다. 여긴 분명…….
“아, 일어났어요?”
그때 막사 천막을 걷고 들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나이가 모니카와 비슷해 보이는, 피부가 다소 까무잡잡한 여인이었다.
모니카는 그녀의 이름을 몰랐지만 오며 가며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한스 공자의 하수인이었다.
“물 한 잔 해요. 많이 덥죠?”
하수인은 모니카에게 다가와 물을 한 컵 내밀었고, 모니카는 경계하면서도 꾸벅 감사 인사와 함께 물을 받아 마셨다.
벌컥벌컥― 물을 모두 들이켠 모니카는 그제야 해야 할 질문을 했다.
“여긴… 어딘가요?”
“본인 발로 찾아와 놓고 몰라요?”
“제, 제가요?”
“정신이 없었나 보네. 그노시스예요, 여기.”
모니카는 자신의 팔에 난 자상을 보았다. 아이젠 도련님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팔을 그은 자국이었다. 그 때문에 병이라도 났는지 모니카는 몸이 성치 않았다.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자신의 발로 이곳에 찾아온 것 같기는 했다.
‘아이젠 도련님에게 더 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아.’
모니카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한스의 하수인이 말했다.
“좀 쉬어요.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한 듯한데.”
“제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죠……?”
“글쎄요, 한 이틀? 내리 잠만 잤어요.”
“이, 이틀이나요?”
이틀이나 잠만 자고 있었다니.
꼬르륵― 배곯는 소리가 모니카의 귀를 파고들었다. 하수인이 픽 웃었다.
“훗, 배가 고픈가 보네요? 하긴. 좀만 기다려요. 아까 식사하고 남은 게 있을 테니까.”
“도련님은!”
“네?”
하수인이 돌아보자 모니카가 침을 삼키고 말했다.
“아, 아이젠 도련님은… 하산하셨나요?”
“아…….”
그때 하수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모니카는 보았다. 모니카는 대답 없는 그녀에게서 지독한 불안감을 느끼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갔다.
팍!
천막을 걷어 올리니 쨍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러나 모니카는 날이 뜨거운 것도 뒷전으로, 바로 앞 하수인들이 모여 있는 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혹시 아이젠 도련님은……!”
모니카가 그렇게 물으려는데, 하수인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방계 중에선 5 방계의 플로리안, 틸만 님 빼곤 전부 도착했대.”
“직계 중에선 아이젠 도련님만 남은 건가?”
“오늘 해가 저물기 전까진 돌아와야 합격인데.”
그 누군가의 말대로, 영설산의 예선은 오늘 오후 해가 지기 전까지였다. 제한 시간을 걸어 두지 않으면 편법을 쓰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기에 마감 시한이 있는 것이었다.
아이젠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들 저렇게 표정이 안 좋지?
그들의 말이 이어졌다.
“돌아올 수 있겠어? 그 눈 더미를 뚫고?”
“눈사태가 엄청 크게 났다더라.”
“산에 사는 짐승들도 모두 휘말려 죽었을걸.”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모니카는 반사적으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성큼 걸어가 그 사람들을 헤집었다.
“눈사태라뇨? 눈사태가 났어요?”
“소식 못 들었어? 영설산에 전례 없는 큰 눈사태가 났다잖아.”
“그, 그럼, 아이젠 도련님은……?”
“글쎄, 엄청 큰 눈사태였다고 하니까, 휘말려 죽었을 수도.”
지끈!
모니카는 온몸의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눈사태가 났다니? 아무리 아이젠 도련님이라도 그런 자연재해를 당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설마 아이젠 도련님은…….
풀썩.
모니카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변인들이 걱정스레 그녀를 부축했지만 모니카는 몸을 가눌 줄을 몰랐다.
그때,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 역시 마찬가지로 하수인의 복색이었다. 그는 설렘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들어온 소식인데! 그 망나니 도련님, 눈사태에 휘말려 죽은 것 같대!”
“오, 정말?”
“그래! 방금 조사대가 돌아왔는데 눈사태가 너무 크게 나서 산에 있던 고목들까지 흔적도 없이 쓸려 갔다더라. 캬~ 드디어 그 망나니 집쥐 공자가 세상 하직하는 꼴을 보는…….”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모니카가 그의 멱살을 붙들었으므로.
“헛소리하지 마!”
“뭐, 뭐야, 이년은?!”
“아이젠 도련님이 죽긴 왜 죽어! 아이젠 도련님 안 돌아가셨어! 안 돌아가셨다구…….”
“이거 안 놔? X발!”
털썩! 짜악!
모니카는 뺨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 기절했다. 그녀의 입만이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을 뿐이었다.
“도련님은 안 돌아가셨어…….”
* * *
후욱!
아이젠은 등을 튕기듯 일어나 앉았다. 그의 온몸에는 눈이 묻어 있고, 입 안까지 눈이 들어차 있었다.
“퉷.”
무슨 일이 있었지? 그래, 눈사태가 났다. 아이젠은 눈사태에 휘말렸다.
그는 곧바로 온몸부터 살폈다. 사신강림으로 보호하긴 했지만 눈의 압력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몸 어디가 떨어져 나가지는 않은 채였다.
‘어디지?’
그제야 아이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몹시 어두웠다. 그가 눈사태에 휘말리기 전까지만 해도 환했는데, 밤이 올 때까지 기절해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아이젠이 있는 곳은 눈 바닥 위가 아니라 천장이 있는 공간이었으니. 주변이 어두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아까 그 동굴은 아니야. 다른 공동이다.’
동굴은 분명 아이젠이 눈 골렘의 핵을 파괴할 때 함께 부서졌다. 이곳은 다른 공동. 그것도 아까의 동굴보다도 훨씬 큰 공동이었다.
아이젠은 자리에서 일어나 공동을 살폈다.
‘대체 어디지, 여긴? 영설산 한복판에 이런 공간이 있었을 줄이야.’
그때 아이젠은 멀리 바닥에 놓여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건 아이젠이 조금 전 파괴한 눈 골렘의 핵이었다. 이게 여기 있다는 것은.
“그렇군. 여긴 동굴의 아래층인가.”
무너진 동굴 아래에 지하 공동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마주하지 못했을 공간이었다.
아이젠이 들어 올린 눈 골렘의 핵은 실금이 많이 가 있었다. 그런데.
쩍. 쩌적.
아이젠이 핵을 가만 바라보려니 갑자기 쩌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핵이 조금씩 더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욱!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아이젠을 밀어냈다.
아이젠은 뒤로 두 발자국 물러서 핵을 바라보았다. 분명 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눈 골렘의 핵은 허공에 그대로 떠 있었다. 여전히 푸른 빛을 내면서.
후우웅! 후우우웅!
핵은 간헐적으로 점멸하며 시퍼런 빛을 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럴 때마다 조금씩 소리를 내며 서서히 더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와장창!
핵이 부서졌다.
그런데, 그 안에 있던 시퍼런 빛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허공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퍼런 빛은 조금씩 움직이며 형상을 갖추어 갔는데, 마침내 그 빛이 만들어 낸 것은.
“…누구시죠?”
아이젠의 입에서 절로 존댓말이 나오게 하는 존재였다.
아이젠은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눈을 감고 있는 자. 그의 몸에서는 조금 전 눈 골렘의 핵에서처럼 파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이는, 글쎄, 아이젠보다는 연상처럼 보였지만 가늠할 수 없었다. 20대 초반 같기도, 50대 후반 같기도 한 기이한 외모였다.
마침내 남자가 눈을 떴다.
- 내가 누구냐고?
남자와 눈을 맞춘 아이젠은 헉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서 근원을 알 수 없는 경외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 마치 스승님을 마주했을 때처럼.
아이젠은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통성명이나 합시다. 난 아이젠 폰 그린우드.”
- 그래, 반갑다.
남자가 말했다.
- 나는 지안니 폰 그린우드. 아이젠, 넌 나의 몇 대째 후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