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위험한 초대 】
블렌하임의 시체, 그리고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의 사체가 널브러져 있는 영설산의 중턱 어딘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는 이곳에 발을 디디는 누군가가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발걸음 소리는 최소 스무 개 이상. 그러나 앞서 걷는 것은 분명 세 명의 사람이었다.
사박― 사박―
가장 앞에서 눈을 밟는 것은 짧게 친 머리의 남자였다. 그는 키가 작았고 뿔이 세 개 달린 가면을 삐뚜름하게 쓰고 있었다.
“…….”
남자는 고개를 모로 꼬며 블렌하임의 시체를 내려다보더니 조용히 뒤에 대고 손짓했다.
“발터.”
“예, 요아힘 님.”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앞선 세 사람 중 다른 하나인 남자가 나왔다. 발터라 불린 남자였다.
발터는 키가 좀 컸는데, 머리를 단발로 기른 보통 체형의 남자였다. 그는 뿔이 두 개 달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요아힘이라 부른 남자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한결 예의를 차리며 블렌하임의 앞에 섰다. 그리고 블렌하임을 향해 오른쪽 손을 내밀었다.
“최후의 숨결.”
화아아아―
발터의 손에서 흉측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마치 세상의 모든 고통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외치는 듯 흉측한 기운이었다. 그 흉측한 기운은 서서히 내려가더니 블렌하임의 시체 위에 올라섰고.
“……!! ……!!”
다음 순간 블렌하임의 몸이 고동쳤다.
두근! 두근! 두근!
블렌하임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빠르기가 어느 정도인고 하니, 요아힘과 발터의 귀에까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두근!! 두근!! 두근!!
블렌하임의 머리는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파파 그런트가 그의 머리를 짓이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머리가 없다. 그런데도.
“끄어어어어어아아아아아아어아.”
블렌하임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요아힘과 발터를 위시한, 그 자리에 있는 이십여 명의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도 조금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
블렌하임은 분명 머리가 없었지만, 어쨌든 본디 머리였을 법한 흔적만은 남아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소리를 냈다.
“아파……. 아파……. 아파…….”
당연히 혓바닥도 망가져 제대로 된 발음을 내지 못하는 블렌하임은 아프다는 소리만 지껄이고 있었다.
발터가 블렌하임의 앞에 다가섰다.
“예의를 갖춰라, 블렌하임. 요아힘 님의 앞이다. 지금 네놈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
그러자 끔찍한 고통을 호소하던 블렌하임은, 잠시 망설이더니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당장 닥쳐 있는 고통보다 눈앞의 남자가 더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지금 ‘눈’이란 게 없었지만.
요아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 줄 말이 있을 텐데. 말해라. 기계적으로.”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자에겐 룬이 있습니다…….”
어눌한 발음이나마 블렌하임은 최선을 다해 말했다.
요아힘은 씨익 웃었다. 비록 그 미소가 가면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확실해?”
“그렇습니다…….”
“고생했다. 편히 죽어라.”
“감사합니다, 요아힘 님…….”
퍽!
발터가 들고 있던 손을 거둬들이자 거짓말처럼 블렌하임이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블렌하임은 조금 전 분명히 죽어 있었다. 하지만 발터의 힘으로 되살린 것이었다. 죽은 자조차도 되살리는 흑마법, ‘최후의 숨결’로. 그리고 다시 죽게 되었다. 최후의 숨결의 힘이 거둬졌기에.
그때, 같은 흑마법에 감응하는 자가 있었다.
“어둠의 사슬!”
그것은 바로 제리. 눈밭 위에 거꾸로 메다꽂혀 있던 제리는 흑마법에 감응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다만 블렌하임에게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었을 뿐.
요아힘 일행이 블렌하임에게만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제리는 몰래 어둠의 사슬을 시전했다.
차르륵! 차르륵! 캉!
사슬은 힘차게 헤엄치더니 요아힘의 온몸을 묶었다. 발터가 놀라 외쳤다.
“요아힘 님!”
“신경 쓰지 마라.”
요아힘은 사슬에 묶였음에도 태연했다.
그는 가면 안쪽 매섭게 빛나는 눈으로 제리를 노려보았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윽, 아윽……! 후, 후우. 웨, 웨, 웬 놈들인지 모르겠지만 나, 나를 산 밑으로 호송해. 다, 당장.”
제리는 요아힘 등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블렌하임의 밑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도깨비 가면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으니까.
요아힘이 눈짓하자 발터는 조심스럽게 요아힘에게서 몇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자 요아힘이 사슬에 묶인 상태임에도 앞으로 손을 쫙 뻗었다.
“슈트.”
쩔그럭! 쩔그럭! 끼기기기긱!!
귀를 후벼 파는 듯한 기분 나쁜 소음이 대기를 진동시켰다. 제리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곤 뒤로 물러섰다. 그러다가 놀랐다.
“뭐, 뭐, 뭐야?!”
요아힘의 팔뚝을 무언가가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아힘의 오른팔은 어느새 검보랏빛 연기로 휘감겨 있었고, 그 검보랏빛 연기는 마침내 건틀릿 같은 형상을 갖추었다. 제리는 본능적으로 그 건틀릿에서 위협을 느꼈다.
‘도, 도망쳐야 해!’
그러나 생각이 너무 늦었다.
끼기기기긱!
찰강!
요아힘은 건틀릿으로 가볍게 어둠의 사슬을 풀었다. 마치 아이젠이 그랬던 것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제리를 향해, 요아힘은 무미건조하게 걸어 다가갔다.
“뭐, 뭐, 뭐냐. 네놈… 대체 정체가!”
“그런 건 알 필요 없다.”
푸욱!
“……?!”
제리는 찰나 배에서 어마어마한 고통을 느꼈다. 직후 무언가가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푸헙!!”
그는 피를 토했다. 제리의 배엔 건틀릿에 의해 큰 구멍이 뚫려 있는 채였다.
“…….”
쑤욱. 요아힘이 손을 빼자.
털썩. 제리는 쓰러졌다. 이번에야말로 완벽하게 숨을 거둔 것.
요아힘이 제 오른손을 바라보고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해제.”
그러자 그의 손을 싸고 있던 검보랏빛 건틀릿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발터가 종종걸음으로 요아힘에게 붙어 섰다.
“역시……. 그것이 바로 ‘흑갑주’의 힘. 단편적임에도 대단한 위력이십니다, 소위님.”
“소위?”
요아힘의 눈이 번뜩였다. 그러자 발터가 흠칫 놀라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분명 경고했을 텐데.”
“시,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래 있던 곳으로 간다. 그노시스로.”
“크흠. 그, 아이젠이라는 그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들었잖아. 그놈의 몸에는 ‘룬’이 있다.”
요아힘은 발터 등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둘러보았다.
“놈의 심장을 뽑는다. 그분께서 좋아하실 거야. 기계적으로 처리하자.”
“예!!”
그날 영설산에 있던 자들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마치, 애초에 그곳에 찾아온 적도 없다는 듯.
* * *
아이젠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에게 찔린 엄니 자국이 아직 선명히 남아 있었다.
“아, 젠장. 흉터 오래가겠네, 이거.”
혹시 금창약이 남은 게 있으려나?
아이젠은 문득 모니카가 제대로 하산했을까 걱정됐다. 물론 그런트는 아이젠이 몽땅 해치워 버렸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어쨌든 날이 추우니까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가다가 얼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쓸데없이.’
아이젠은 걱정을 털었다. 그가 본 모니카는 그 정도로 나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스스로 내려가겠다고 했으니, 알아서 잘 갈 것이었다.
그는 다시 팔을 내려다보았다. 혈류가 제대로 흐르지 않는 건지 살짝 저린 감이 남아 있긴 했지만.
“돌아왔어.”
무혈신공의 묘리는 다시 원상 복구 되었다.
사신강림의 반동이 끝나 가는 시점이었다. 아이젠은 눈앞에 있는 눈 골렘을 바라보았다.
* * *
조금 전 두 존재는 주먹을 맞부딪쳤다. 눈 골렘은 아이젠의 결사신권에도 조금도 밀리지 않을 만큼 강력한 권기를 발했다.
- 그오오오.
제법 강한 녀석이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강하기로 따지자면 항상 논쟁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또 아이젠이었다.
아이젠은 목과 발목을 스트레칭했다. 본격적으로 싸워 보기 위함이었다.
“간다. 쉽게 쓰러지진 않길 바랄게.”
- 그오오오.
눈 골렘이 마치 ‘너야말로’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젠은 피식 웃고 바닥을 박찼다.
쉬익!
아이젠의 신형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그는 어느새 눈 골렘의 뒤로 이동해 있었다.
‘목롱보(目弄步)!’
직후 그는 왼손으로 박살편(撲殺鞭)을 만들어 눈 골렘의 목덜미를 잘라 낼 것처럼 뻗었다.
츠팟!
무언가가 베이긴 베였다. 그것은 눈 골렘의 오른손이었다. 눈 골렘이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뻗어 목에 날아드는 공격을 막아 낸 것이었다.
눈 골렘이 주춤 뒤로 물러날 때, 아이젠은 눈 골렘을 향해 손톱을 바짝 세웠다.
“교아(鮫牙)!”
결사신권 ‘교아’는 이름 그대로 상어의 이빨과 같다. 대상을 찢어발길 듯한 기세로 아이젠의 손에서 쏘아진 내공은 눈 골렘의 온몸을 스쳐 도륙 내었다.
눈 골렘의 관절 마디마디가 끊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휘오오오.
골렘의 가슴에 있는 시퍼런 핵을 중심으로 조각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면 눈 골렘은 어느새 원상 복구 되어 있었다. 조금 전에 박살편으로 잘렸던 오른팔까지 몽땅.
아이젠은 손을 풀었다.
“그래, 핵을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지?”
골렘의 약점은 가슴에 있는 핵. 얼핏 보면 대놓고 노출되어 있어 노리기 쉬운 약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만도 않았다. 인간도 머리와 가슴을 훤히 노출하고 있지만 쉽게 쓰러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드러나 있는 만큼, 골렘은 핵을 방어하며 싸운다. 더군다나.
쉬익!
이 눈 골렘은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눈 골렘이 왼쪽 주먹을 내뻗었다. 아이젠이 양팔을 교차해 그것을 막아 냈으나.
뻐억!
아이젠은 붕 뜬 채로 날아가 동굴 천장에 부딪쳤다.
쿠궁!
우르르르…….
고통은 없었다. 아이젠은 고작 이 정도에 아픔을 느낄 만큼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동굴이 흔들리는 것은 주의할 만했다.
‘자칫하면 무너지겠는데, 이거.’
동굴이 무너지면 그때부턴 고생길이 열린다. 당장 만년한철을 캐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일 터. 게다가, 이 정도 크기의 동굴이 무너진다면 필시 눈사태도 동반할 것이었다.
‘눈사태에 휘말린다고 해서 죽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귀찮잖아.’
눈사태에 떠밀려 내려가기라도 하면 아이젠이 영설산의 과제를 수행해 내는 것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아이젠은 눈 골렘과 최대한 조심스럽게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젠이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
철컥.
눈 골렘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응?”
아이젠은 눈 골렘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얼음 조각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눈 골렘의 온몸에 콩알만 한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수십 개가.
아이젠이 그 구멍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공중에 떠 있던 아이젠은 등을 튕겨 동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눈 골렘의 온몸에 난 구멍에서.
- 그오오오!
투다다다다다다다!!
거친 눈의 총알 세례가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