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투웅!
퍼억!
마마 그런트는 일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랐다. 그러나 곧 알아챘다.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이동한 아이젠이, 주먹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꿰뚫었음을.
“크르…르……!”
“마물들도 가족애라는 게 있나?”
“크르르……!”
“까고 있네. 죽어,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쑤욱!
아이젠이 주먹을 뽑자.
쿵!
마마 그런트는 더 이상의 신음을 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르릉!!”
그 광경을 지켜본 파파 그런트는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파파 그런트는 분노에 찬 광기의 얼굴로 아이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돌진이,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인 줄도 모르고.
‘유랑보.’
탓.
아이젠은 날아드는 파파 그런트의 몸통을 가볍게 피했다. 그리고 아직 허공에 떠 있는 파파 그런트의 머리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내뻗었다.
“권왕백무: 관(貫).”
퍽!
파파 그런트의 머리가 흩날렸다. 허공에서 터진 피가 땅바닥을 수놓았다.
움찔― 움찔―
파파 그런트는 땅 위에 내려앉아, 몇 발자국 앞으로 더 걷는가 싶더니.
쿵.
앞을 보고 엎어져 죽었다.
“…끄응!”
아이젠은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기쁨에 겨워했다. 황량한 눈 바닥 위에 제리, 블렌하임, 파파 그런트, 마마 그런트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 것은 아이젠뿐만이 아니었다.
“도련님……! 이게 다 무슨!”
어느새 정신을 차린 모니카가, 작은 걸음으로 사박사박 눈을 밟고 있었다.
“도, 도련님이 하신 거예요?”
“한 놈 빼고.”
“와, 와아…….”
모니카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아이젠이 모두를 이겨 낸 것이었다. 검을 쓰지 않는데, 강하다. 그린우드인데도.
그렇게 모니카가 감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결사신권, 결자해지(結者解之).’
아이젠은 결자해지를 사용했다.
화아악!
정기가 아이젠의 몸을 감쌌다. 아이젠의 몸은 분홍빛 오러에 불타는 것처럼 살라 먹혔다.
“……! 후우……!”
“도,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이젠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내공이 흘러드는 기쁜 감격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모니카를 조심스레 내려다보았다.
“모니카.”
“네, 도련님…….”
아이젠의 나지막한 말투에서, 모니카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넌 이만 산에서 내려가. 방해만 돼.”
아이젠이 차갑게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잠자코 그 말을 들은 모니카는, 실은 자신도 이미 알고 있었다. 도련님을 돕기 위해 소가주전에 동행했지만, 실상 자신은 그를 방해만 하고 있었다는 걸. 도련님이 저토록 매몰차게 말하는 것 역시, 사실은 자신을 배려하고자 일부러 그러는 것임을 모니카는 모르지 않았다.
모니카가 말했다.
“…도련님,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도련님께 했던 말 기억하세요?”
“가는 길도 험난한데, 굳이 굳이 나를 수행하겠다고 했지.”
“전… 정말 도련님께 방해만 되나 봐요.”
모니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한스러웠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아이젠 도련님은 벌써 수차례 자신의 생명마저 구해 줬음에도 불구하고.
‘난 도련님께 짐만 돼!’
모니카는 눈물을 훔치더니 벅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려갈게요, 도련님.”
아이젠은 하산할 수 없었다. 소가주전 예선, 영설산의 목표는 ‘만년한철을 캐내는 것’. 만년한철은 영설산의 정상에 있는 광(鑛)에서만 캘 수 있고, 아이젠은 아직 정상에 다다르지 못했다.
하지만 모니카는 하산할 수 있었다. 그런트만 주의한다면. 그나마 그 그런트도 아이젠이 씨를 말려 버렸으니 이제 이 추운 산에 모니카에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아마 없을 것이었다.
“혼자 갈 수 있겠어?”
아이젠이 자못 걱정을 담은 어조로 물었다. 자신이 내려가라고 했지만 그녀를 혼자서 보내자니 그래도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길버트의 독을 빼긴 했으나, 어쨌든 모니카가 피를 많이 흘려 몸이 온전치 않은 건 사실이니 말이다. 물론 미안한 마음은 아주 조금 드는 것뿐이지만.
모니카가 씩씩하게 답했다.
“그럼요. 저 이제 완전히 멀쩡해요.”
“그래? 그럼 가 봐.”
후욱!
그 말과 동시에 마침내 아이젠의 결자해지가 끝났다.
아이젠은 몸속에 흘러드는 정기 하나하나를 피부에 새기고자 호흡했다. 아쉽게도, 4성의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에 결자해지의 묘리가 힘을 다했다.
‘3성 최상위 상태인가.’
무공의 경지로 따지면 초절정의 상태. 아이젠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 정도 성장 속도도 예사는 아니니 마음을 차분히 하기로 했다.
한편 그사이 모니카는 잠시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밝은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네! 그노시스에서 뵐게요, 도련님.”
“오냐. 가.”
아이젠은 모니카를 배웅하지도 않고 뒤로 돌았다. 모니카는 착잡한 얼굴로 말 위에 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 아이젠의 등을 향해 크게 외쳤다.
“도련님!”
아이젠이 돌아보자, 모니카는 굳건하게 말했다.
“강해질게요, 저.”
그런 그녀에게 아이젠은 씨익 웃어 줄 따름이었다.
“그래. 강해져라.”
* * *
“괜히 내려보냈나?”
아이젠은 조금 후회가 되었다. 모니카가 옆에 없으니 허전해서? 으스스해서?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이젠이 지도를 살피는 데 서투르다는 것이었다.
“이 근처가 맞는데…….”
아이젠은 휘몰아치는 눈바람을 맞으며 손에 든 지도를 눈으로 훑었다. 어느새 그는 영설산 정상에 올라서 있었다. 생각보다 싱거운 여정이었다. 올라오는 길에 어떠한 적도 마주치지 않았으니.
‘직계뿐만 아니라 다른 그린우드도 있을 텐데. 다들 이미 하산한 건가?’
어쩌면 아이젠이 꼴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약간 억울했다. 그런트랑 블렌하임 등이 그의 영설산 등반을 계속 방해하고 있었으니까.
“어쩌겠어.”
한탄한다고 해결될 일도 없으니, 아이젠은 최대한 빨리 광을 찾기로 했다.
휘오오오오―
지도를 든 채 두리번거리던 아이젠은, 문득 눈발 사이로 멀리 보이는 구조물을 발견했다. 사박사박 가벼운 발걸음으로 구조물 가까이 다가서니.
“뭐야, 이건.”
그것은 커다란 동굴이었다. 입구의 높이만도 아이젠의 키의 수십 배는 됐고, 너비는 아이젠을 열 명은 눕혀야 하는 길이였다. 얼음 동굴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굴은 온통 얼어붙은 채로 산 정상에 자리하고 있었다.
꾸깃―
지도를 옷 안주머니에 쑤셔 넣은 아이젠은 동굴을 자세히 살폈다.
‘얼음 동굴이 아니야.’
자세히 보니 그것은 얼음 동굴이 아니었다. 그저 찬 날씨에 얼어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듯한 동굴이었다.
깎아 만들었다면, 누가, 무엇 때문에?
“…나야 모르지.”
아이젠은 피식 중얼거리곤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앞에서 서성인다고 만년한철이 똑 떨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저벅― 저벅―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금세 빛이 사라지고, 눈도 더 이상 쌓여 있지 않았다.
차가운 돌바닥을 밟던 아이젠은 잠시 눈을 감고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길 기다렸다.
‘됐다.’
그렇게 다시 눈을 뜨니 눈동자가 한결 칠흑에 적응해 주변을 보다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동굴은 깊었다. 그러나 아이젠은 주저 없이 평범한 속도와 보폭의 걸음으로 계속 안쪽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마침내.
화아아아.
스스로 하얀 빛을 내는 광물이 나타났다.
들여다보면 그것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동굴 안에 희미하게 있는 광원이 광물과 부딪치며 빛을 내는 게 분명했다.
그렇다, 광물. 아이젠이 마주한 광물은 다름 아닌 만년한철이었다.
“이게 만년한철이구나.”
만년한철(萬年寒鐵)은 그 이름처럼 만 년이란 세월의 흐름을 오롯이 안에 담고 있는 듯한 깨끗한 광물이었다. 감람석보다 정순하고, 금강석보다 단단한 철.
아이젠은 만년한철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문득 자연스레 드는 의문이 있었다.
“…이걸 어떻게 캐지?”
아이젠은 결사신권의 힘으로 만년한철도 부술 수 있었다. 실제로 조금 전 화이트 오크와의 만남에서 실행해 냈지. 하지만 이곳은 산 정상, 게다가 광산 한복판이었다.
“박살(撲殺)을 잘못 썼다간 내가 묻힐 텐데.”
광산이 무너지거나 눈사태라도 일어나면 아이젠으로서는 빠져나갈 방도가 없었다. 아무리 3성 최상위에 올랐다곤 하나 자연재해 앞에서는 무력할 뿐. 물론 4성의 경지에 올랐다면 얘기가 또 달랐겠지만.
“어떻게 한다…….”
그때였다.
- 그오오.
어디선가 괴성이 들렸다. 가까운 소리였다. 아이젠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는데, 그곳에는 마치 만년한철처럼 빛을 내는 웬 거구가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 거구는 정말로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는 점.
“……?!”
아이젠은 펄쩍 뒤로 뛰어 열 보 정도 물러났다.
‘뭐야.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조금의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아이젠이 방심이라도 했나? 아니, 그렇지는 않았다. 만년한철이 코앞에 있다 한들 쉽사리 평정심을 잃을 아이젠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대체……?
아이젠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거구의 형체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건?”
전에 본 적은 없지만, 그 정체에 대해서는 익히 짐작이 갔다. 가슴에는 청색의 핵이 박혀 있고, 얼어붙은 눈으로 사람의 형태처럼 꾸며 놓은 거체(巨體).
“골렘?”
그것은 골렘이었다.
- 그오오오…….
골렘이 소리를 냈다. 입이 없을 텐데 어디서 소리를 내는 거지?
골렘은 마물로 분류되긴 하지만 자연 상태에서 발생하는 마물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제작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마물. 마치 아이젠이 검은 뿔 기사 학교에서 맞서 싸웠던 우는 여인처럼 제작자가 따로 있는, 생명체가 아닌 ‘물건’이었다.
그러니 아이젠이 기척을 못 느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기척은 생명이 있는 것으로부터 발산되는 것. 물건이 어떻게 기척을 내겠나?
“뭐냐, 넌.”
- 그오오오.
“말을 해. 아니, 말을 못 하는 건가?”
돼지, 오크에 이어서 이번엔 골렘이냐?
아이젠은 이 ‘눈 골렘’이 어째서 이곳에 있는가를 생각해 봤다. 골렘은 일반적으로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 그리고 이 공간에 골렘이 지킬 만한 것이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만년한철을 지키는 놈인가.”
- 그오오오.
답을 맞혔다는 듯 골렘이 소음을 냈다. 마치 바위를 송곳으로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였다.
아이젠은 몸을 뚜둑뚜둑 풀었다.
“영설산에서는 참 싸울 일이 많구나.”
그렇게 불평을 중얼거리는 한편, 아이젠에게는 다른 기분 좋은 속내도 있었다.
‘4성에 오를 기회다.’
현재 아이젠의 무혈신공 경지는 3성 최상위. 이 눈 골렘과 혈전을 벌이면, 아마 4성에 오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눈 골렘이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는 이제부터 겨뤄 봐야 알겠지만.
“지키는 게 있겠지? 난 네가 지키는 걸 훔치러 왔다.”
- …그오오오!!
말을 알아듣는 것일까? 눈 골렘이 묘하게 흥분에 찬 음성으로 큰 소리를 냈다.
“생사경을 위한 초석이 되어 줘야겠어, 골렘.”
- 그오오!!
“덤벼. 이 돌덩어리 새끼야.”
마침내.
콰아아앙!
허공에서 아이젠의 주먹과 골렘의 주먹이 맞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