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푸욱!
아이젠이 본능적으로 막아 든 양팔에 엄니가 꽂혔다. 엄니만 해도 아이젠의 팔뚝의 0.5배는 되는 크기였다. 그리고 아이젠은 그 모습대로 밀려 뒤로 뻗어 나갔다.
투콰앙!
아이젠이 날아가 나무에 몸을 부딪치자 마치 총탄이 철에 박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잠시 먼지바람이 피어오르며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의 시야를 가렸다.
“크르르.”
“그릉.”
해치웠나? 끝났는가?
하지만 아이젠은 연기 속에서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퉷! 아이젠은 입에서 피를 뱉었다. 어디를 잘못 부딪쳤는지 아이젠의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피가 아이젠의 입가까지 흘러 입으로 스며들었다.
아이젠은 고통스러웠지만, 그런 한편 훗 하고 웃어 보였다.
“재밌는데. 더 할 거지?”
아이젠은 엄니에 찔린 탓에 양팔에서 흐르는 피를 바닥에 털어 냈다. 눈 바닥 위로 선혈이 흩뿌려졌다.
“크르르르.”
“그르르릉.”
분명 자신들보다 열등하고 약한 생명체임이 틀림없는 아이젠. 그 아이젠이 아직도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어 보이자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도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이젠은 그들의 미소를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어디, 계속해 보자고.”
* * *
그린우드의 가주 테오발트. 그는 골몰하는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작은 반상(盤床)을 노려보았다. 그는 체스를 두고 있었다. 그가 백을 쥐었다.
체스는 둘이서 두는 경기.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탄탈리스 제국의 최고 통치자, 황제 레오 베네딕토였다.
“고민이 길어지시는구려, 테오발트 공.”
“크흠.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한 수만 물려 주시겠습니까?”
“하하.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강경하십니다, 폐하.”
이 제국에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레오 황제와 독대할 수 있는 자는 몇 되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테오발트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대한 영예에도 불구, 딱히 긴장하는 기색 없이 백 나이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흑 킹을 노리고 자리를 옮겼다. 체크.
“체크입니다, 폐하.”
“허허. 이거 이제 보니 테오발트 공은 무서운 사람이었구려.”
“예?”
“왕의 앞길을 가로막다니. 이것은 그야말로 황제인 나를 욕보이려는 의도가 아니겠소?”
“무슨 그런 흉한 말씀을.”
“하하.”
살벌한 말이 오갔지만 테오발트는 레오 황제의 말이 농담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제국에서 레오 베네딕토를 부르는 다른 이름은 ‘인자한 황제’. 그 별명처럼 레오 황제는 어리석은 아이들을 굽어살피는 온건한 황제였다. 벌써 쉰을 넘긴 나이였지만 아직 정정했고, 슬하에 세 자녀가 있었지만 따로 후계를 정해 두진 않았다.
쿠궁― 쿠궁―
두 사람이 앉아 있는 건물 바깥에서 굉음이 들렸다. 그러나 레오 황제와 테오발트 둘 다 바깥 소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자, 킹을 옮겼소.”
“끄응. 이렇게 되면……. 거참, 제가 돌파하기 어려운 수만 두십니다, 폐하.”
“그러니 내가 황제이지.”
테오발트가 다시 반상으로 눈을 돌리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데, 레오 황제가 넌지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 가문에 중요한 행사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와 체스나 두고 있어도 되겠소?”
그렇다. 오늘 그린우드 가문에서는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단지 ‘중요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를.
그것은 다름 아닌 차기 가주를 선발하는 소가주전의 경기. 오늘부터 그 소가주전이 시작된다. 테오발트의 자제인 게오르크, 바네사, 한스, 그리고 아이젠도 그 소가주전에 참전한다. 다섯째인 에밀은 아직 열두 살 어린 나이라 소가주전에 참여하지 못했다.
게오르크와 한스, 아이젠까지는 소가주전에 참여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사울 장로로부터 바네사까지 소가주전에 나가고 싶어 한다고 전해 들었을 때, 테오발트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 조용하고 자기를 숨길 줄만 알던 아이가.’
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인지.
그즈음 테오발트는 아이젠이 검은 뿔 기사 학교에 찾아가 사울 장로에게 훈련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기사 학교에는 이미 바네사도 있었으니, 필시 두 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긴 했을 터.
훗― 테오발트는 웃었다.
“폐하, 말을 걸어 수 싸움을 방해하시면 어떡합니까.”
“그래도 되니 내가 황제인 것이지.”
“크흠. 자꾸 그렇게 질문하시면 저는 그냥 입을 다물겠습니다.”
“어허, 이제 하나 물어봤소. 그리고 입을 다물다니? 그것은 반역이오.”
“거참.”
테오발트는 다시 반상을 노려보다가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확실히 오늘 가문에 행사가 있긴 하지요. 하나 어디 국가 중대사에 비할 바 있겠습니까? 나라 걱정과 비교하면 소가주전 같은 건 걱정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소가주전에서 우승하는 아이가 다음 대의 가주가 된다. 즉, 테오발트 가주 대의 ‘폰 그린우드’는 몇 달 후에 나올 소가주전의 결과에 따라 직계라는 이름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다음 소가주가 즉위할 때, 그의 가문은 더 이상 직계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다. 방계 중에도 재주 있는 아이들이 많지만, 자신의 자제들 중 우승자가 나오리라는 모종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오 황제가 인자하게 말했다.
“제국을 생각하는 그대의 마음이 참으로 뜻깊소.”
“감사합니다, 폐하.”
“그래서, 그대는 누구를 우승자로 점치시오?”
끄응. 테오발트는 신음했다. 이제 막 좋은 수가 떠오를 뻔했는데.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레오 황제를 올려다보곤, 다시 시선을 내렸다.
“우선은… 장남인 게오르크는 그린우드의 핏줄 중에서도 보기 드문 천재입니다. 아마 그 아이가 우승자로 유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치 남의 아들 얘기하는 듯 말하오.”
“제가 그랬습니까?”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바네사, 장녀인 그 아이도 이번에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듯합니다. 우승까진 못 하더라도 아마 꽤 높은 위치까지 올라서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 끝이오?”
“그리고…….”
한스의 이름도 입에 올릴까 싶었지만, 테오발트는 말을 삼켰다. 한스는 질투심이 많고 쉽게 흥분했다. 소가주가 되기에는 아마 부족하지 않을까.
그 뒤로 생각나는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 아이젠. 기젤라가 아니라 클라우디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유일한 그의 아이.
“…넷째인 아이젠 역시, 뛰어난 아이입니다. 비록 검을 쓰진 않지만.”
“검을 쓰지 않는다? 허어, 그린우드 가문에서 검을 쓰지 않는 아이가 나오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오.”
“그렇습니까?”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가 남긴 말이 있지 않았소. 뭐라고 했더라…….”
그 말을 테오발트는 알고 있었다.
‘참철검은 가문을 지키기 위한 수단일 뿐, 검보다 뛰어난 무기가 있다면 검에만 치중하지 말라 하셨던 게 바로 초대 가주님의 말씀이었다.’
하지만 테오발트는 구태여 아이젠에게 잘해 보라는 둥 입에 발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이젠에게 정말 재능이 있다면, 스스로 그 재능을 깨우칠 테지.’
더군다나 아이젠에게는 어릴 적 테오발트가 심어 둔 것이 있지 않은가. 아이젠의 심장에 박혀 있는 그것의 이름은 관철의 룬. 아이젠이 제 뜻을 관철할 수만 있다면, 필시 우승자가 되고도 남을 것이었다.
“폐하.”
딸각― 테오발트는 아이젠을 생각하며 백 퀸을 옮겼다. 백 퀸은 흑 킹의 모든 활로를 가로막고 있었다.
“체크메이트입니다.”
“……!”
“제가 이겼습니다.”
레오 황제는 당황했는지 허리까지 굽혀 가며 반상을 살폈다. 어떻게 이런 수가 숨어 있었을까. 체스의 달인인 레오 황제조차도 생각해 내지 못한 신의 한 수였다.
“허허, 그대도 실력이 많이 좋아졌구려.”
“감사합니다.”
“한 수 무르도록 하시오.”
“저런? 제게는 안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황명이오.”
“하하.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그렇게 테오발트가 다시 수를 무르려는 그때였다.
“테오발트 총대장님!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전군!! 준비 완료!!”
창밖에서 테오발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수 없이 테오발트는 백 퀸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번 경기는 기권입니다, 폐하.”
“그대는 아직 내게 멀었구려. 그렇지 않소?”
“그러니 황제이시지요.”
“으하하.”
테오발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 쪽으로 가까이 걸어갔다.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광활하게 펼쳐진 땅. 그리고 그 위에 수놓인 피와 창칼, 인간의 살점들.
그렇다. 이곳은 황궁이 아닌 전장의 한복판. 레오 황제와 테오발트가 있던 곳은 황실이 아니라 임시 막사였다.
펄쩍!
테오발트가 창을 뛰어넘었다. 그리고 전장 한복판에 발을 디뎠다.
쿠웅!
땅에 내려선 그의 앞에 적군의 창칼을 굳건한 방패로 막고 있는 아군 병사들이 보였다.
“이 제국 잡졸들아, 부끄럽지도 않냐!”
“방어만 하고 있다니, 이 고자 새끼들!”
“창을 들고 맞서 싸우라고!”
맞은편 리타스나트 공화국 병졸들이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로서도 그들의 창칼이 제국 병사들의 살갗을 꿰뚫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마음에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던 제국 병사들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테오발트는 그들을 돌아다보며 소리쳤다.
“저런 말을 듣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제국의 병사가 아니다! 그렇지 않나!”
“예! 그렇습니다!!”
테오발트는 자신의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아티팩트 중 하나인, ‘태양의 검 에레디아’가 매끄럽게 뽑혀 나왔다.
에레디아 역시 영설산의 만년한철로 만든 참철검. 그러나 보통의 참철검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에레디아는 그린우드에서 3대째 대장장이를 하고 있는 카론의 제련을 받은 검이기 때문이다.
초대 가주의 비보라 불리는 ‘아이기스’만은 못하겠지만, 현존하는 무기 중 가장 강한 것을 꼽으라면 분명 에레디아가 후보로 포함될 것이었다.
부웅.
에레디아에 연풍의 오러가 둘렸다. 테오발트가 검을 높이 쳐들었다.
“전군, 진격하라!”
“진격! 진격!”
그날, 전투는 탄탈리스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대패한 리타스나트 공화국은 크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 * *
퍽!
아이젠의 뺨이 휘돌았다. 그는 반동으로 잠시 허공을 날았다. 바닥에 철퍼덕 넘어진 뒤에야 아이젠은 고통을 호소했다.
“아야야.”
방금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에게 맞은 뺨이 아픈 탓도 있지만, 실상은 허리부터 허벅지를 감싸는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유하자면 오버 트레이닝을 심하게 한 다음 날에도 근력 운동을 추가로 하는 듯한 기분.
아이젠은 격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다행인 점이 있다면 조금 전보다는 고통이 많이 가라앉았다는 것이었다.
“그르르릉.”
“크르르르!”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의 공격을 피해 다니기만 한 지도 벌써 한 시간째. 아이젠은 그 과정에서 여러 번 타격을 입었고, 덕분에 지금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 그것이 파파 그런트와 마마 그런트의 약을 바짝 오르게 했다.
“왜, 기분 나쁘냐? 내가 너희 주먹에 맞아도 멀쩡해서?”
“그르릉.”
“그러게 약해 빠진 주먹을 어딜 들이밀어.”
“크르르르!!”
마마 그런트가 발을 굴렀다. 녀석은 슝 하고 날아 아이젠의 명치를 향해 주먹을 올곧게 뻗었다. 아이젠은 마마 그런트의 오른손에 시선을 집중하고, 그 주먹이 마침내 자신의 배 위에 올라가는 순간.
‘유랑보!’
몸을 틀었다.
콰당!
마마 그런트는 벽으로 날아가 부딪쳤다. 물론 입은 피해는 크지 않았다. 아이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잘되는데.”
약 한 시간여 동안 연마한 끝에야, 드디어 유랑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휴우.”
아이젠은 심호흡을 했다. 어느덧 무혈신공의 힘도 슬슬 돌아와, 온전한 결사신권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몸 여기저기가 아직 쑤시긴 하지만.
“이 정도야 일상이지.”
근육통이라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아이젠은 몸을 풀었다. 굳어 있던 근육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부득부득 풀렸다.
“지금껏 상대해 주느라 고생들 많았다.”
“그르르릉?”
“크르르르!”
“이제 꺼져.”
후욱! 아이젠의 손에 진기가 모여들었다. 권왕백무의 묘리로 아이젠의 손이 분홍빛을 발했다.
“결사신권, 권왕백무: 관(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