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아이젠은 마저 자세를 잡았다. 화살은 모두 떨어뜨렸지만 활잡이들은 아직 그대로였으니까.
“방금 무슨 일이었지?”
“화살이… 떨어졌다!”
“저, 저게 말이 돼?”
“어떡해야 해!”
“어떡하긴. 다시 화살 장전! 블렌하임 대장을 지켜라!”
“장전, 조준!”
끼이익―
다시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젠은 이번에는 화살을 쏘게 놔둘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온몸에 힘을 주고.
‘환교신권: 외공!’
환교신권을 발산했다.
투확!
아이젠의 기력에 턱을 맞은 수십 명의 궁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털썩.
그들이 일제히 쓰러지는 소리를 들은 블렌하임은 이제야말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내 힘은 아모스의 힘이다. ‘그분’께 사사한 힘이란 말이야…….”
으적.
별안간 블렌하임의 턱이 돌아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아이젠이 그의 머리통에 박살을 먹인 것이었다.
‘박살, 악지섬(顎之殲).’
“커헉……!”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 마치 누군가가 머리를 통째로 몸통과 분리해 놓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러나 블렌하임이 낼 수 있는 신음은 겨우 그 정도. 성대가 막혀 그는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블렌하임은 바닥에 쓰러진 채로 아이젠을 올려다봤다.
“내게 그런 짓을 해 놓고 넌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란, 그런 희망찬 생각을 품은 건 아니겠지?”
“꺼억…….”
블렌하임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그는 아모스에 담긴 힘을 마지막까지 끌어모아, 최후의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
그는 여전히 누운 자세 그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성대만은 뚫렸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네가, 네가 뭘 알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귀족 놈들은 영원히 악업을 반복할 거다! 죄 없는 노예들은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농민들은 척박한 삶을 살고, 평민들은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갈 거야! 귀족들을 모두 없애야 해! 이 나라에서 신분이란 걸 없애야 한단 말이다!!”
“음. 맞는 말이야.”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약간의 박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노예들한텐 미안하게 됐다. 나도 피터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잘한 건 하나도 없어.”
“…그렇다면!”
“근데.”
아이젠은 넘어져 있는 블렌하임의 이마에 약한 딱밤을 날렸다.
“선택지가 잘못됐어. 그게 죄 없는 다른 귀족들을 죽여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야. 바네사 누님께는 무슨 잘못이 있었나? 어떤 머저리 같은 귀족이 네 얼굴을 그 꼴로 만든 모양인데, 이래서야 그 귀족과 네가 다를 바가 뭐지?”
“…크크. 역시, 백 날 천 날 말해 봐야 귀족은 모른다. 난 그런 너희를 일벌백계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아니.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전생에는 노예였던 이강철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노예였던 신분으로도 정점의 자리에 올라, 투신이라 불리며 천마신교를 혈혈단신으로 무너뜨리기도 했다.
아이젠의 귀에 블렌하임의 말은 노력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자의 치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입으로는 다른 말을 했다.
“그래, 난 모른다. 서자이긴 해도 귀족이니까. 근데 내가 그걸 왜 알아야 하는데?”
아이젠은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핑계 대지 마라. 자기 얼굴을 다친 것을 핑계 삼아 무고한 귀족들에게 화살을 돌리지 말라고. 세상에 복수를 하고 싶거든 적어도 네놈 자신의 힘을 하든가. 나 역시 서자라는 이유로 온갖 무시를 받아 왔지만, 난 너처럼 아모스 같은 편법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강해졌다.”
“그래 봤자 귀족의 혈통으로 강해진 것이겠지!”
“아니. 혈통 같은 건 관계없어.”
관철이 그의 입을 통해 말로 표현되었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만큼 강해지는 거야.”
그 순간이었다.
화아아아―
아이젠의 몸이 푸른빛으로 빛난 것은. 그것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블렌하임이었다.
“네놈, 몸에서 빛이……!”
“응?”
은은하게 뿜어지는 푸른색의 기운. 그것은 한눈에 봐도 오러와는 확연히 생김새가 달랐다. 블렌하임은 그 푸른 기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너, 설마 룬을 품고 있는 건가……!”
그것은 바로 ‘룬’의 기운. 룬과 사용자가 상호 작용 할 때, 그것은 특정한 빛깔로 방출된다.
아이젠처럼 푸른색일 수도 있고, 사람마다 색색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 룬은 사용자가 감정적으로 성장했을 때 빛을 발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젠의 경우에는 방금 자신의 뜻을 관철했기에 룬이 빛을 발한 것이었다.
아이젠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렇군. 이게 룬인가?”
사울 장로가 넌지시 말해 줬던 ‘룬’의 힘. 그때 사울 장로는 아이젠의 몸에 깃든 룬의 이름을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젠은 이 순간 본능적으로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관철의 룬!’
룬의 이름은 관철의 룬. 자신의 의지를 관철할 때마다, 아이젠은 성장한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좋은데.”
처음엔 기분이 나빴다. 자신의 몸에 자신도 모르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다는 게. 하지만 푸른빛을 발하는 기운이 아이젠은 싫지 않았다.
빛깔은 좀 더 은은하게 빛나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블렌하임이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룬을… 몸에 품고 있었다니.”
그는 잠시 멍한 얼굴로 있는가 싶더니 이내 피식― 하고 웃어 버렸다. 그리고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의 눈에선 옅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뭐야. 재밌는 얘기 생각났어?”
“…아이젠, 폰 그린우드.”
“그래.”
“바네사는 살아 있다.”
“뭐?”
아이젠은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겨우 이깟 놈한테 바네사 누님이 당할 리가 없지!
“살아 있다. 미처 숨통을 끊어 놓기 전에 도망치더군. 지금은 그노시스에 있을 거다. 그리로 간다고 했으니까.”
“…그래? 다행이다.”
휴우. 아이젠은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그는 머리를 털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누님은 죽지 않았어.
아이젠은 정신을 차리고 블렌하임에게 물었다.
“요아힘이라는 녀석은 어딜 가면 만날 수 있지?”
그는 물어야 했던 것을 물었다.
아모스의 힘은 전국 각지에 퍼져 있을 것이었다. 그것 모두를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머리를 잘라 내야 했다.
“요아힘 님은…….”
그때였다.
“도련님!!”
뒤쪽에서 모니카의 음성이 들렸다. 아이젠이 돌아보니 모니카가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파리해져 있었다. 갑자기 뛰느라 몸에 독이 퍼진 탓일 터였다.
“모니카.”
“헉! 헉!”
모니카는 손에 나무 몽둥이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어디서 구했지?
그녀는 그 몽둥이로 블렌하임을 내려쳐 댔다. 다만 힘이 없어 픽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 자식! 이 자식! 도련님한테서 떨어져!”
“…….”
블렌하임은 이미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모니카는 그를 계속 때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아이젠이 그녀의 손에서 몽둥이를 낚아챘다.
“그만해, 모니카. 내가 이겼어.”
“허억. 그, 그렇구나. 도련님, 다행이에요…….”
털썩! 모니카가 쓰러졌다. 아이젠은 다급하게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모니카! 왜 그래!”
“허억, 허억…….”
“길버트의 독이다.”
블렌하임이 목소리를 내자 아이젠이 그를 돌아보았다. 블렌하임이 말을 이었다.
“길버트의 독은 해독제로도 완전히 해독할 수 없어. 효과를 늦추는 게 전부다. 복용자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언제까지나 그를 괴롭히지.”
“어떡해야 하지? 방법을 말해.”
“간단하다. 산에서 내려가 의사에게 가라. 독 자체는 혈관을 돌고 있을 뿐이라 의사의 힘을 빌리면 얼마든지 빼낼 수 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탈락하겠지. 소가주전에서.”
“그렇다.”
선택의 순간이 왔다.
아이젠은 모니카를 살려야 했다. 모니카는 아이젠의 소가주전에 동행했기에 다친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살리는 것은 아이젠의 당연한 의무였다. 선택할 필요도 없었다. 그가 결심을 굳히고 내려가려는 때.
“괜찮…아요, 도련님.”
모니카가 정신을 차렸다. 아이젠이 말했다.
“너 안 괜찮아, 모니카. 내려가자.”
“괜찮아요. 저 때문에 도련님이 소가주전에서 기권하시면… 그거야말로 괜찮지 않아요, 도련님.”
모니카는 눈물짓고 있었다. 아이젠이 소가주전에서 떨어지게 되면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돌릴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은데도.
“모니카. 이대로면 넌 죽을 수도 있어. 이깟 소가주전 기권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야.”
“죽지 않아요. 그리고 도련님을 기권하게도 하지 않을 거예요.”
모니카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바닥에 손을 짚었다. 그녀의 손에 만져지는 게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블렌하임이 날려 버렸던 쿠크리 나이프.
모니카는 쿠크리 나이프의 손잡이를 부여잡고, 별안간 자신의 팔뚝을.
부욱!
그어 버렸다. 상처 부위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모니카! 이게 뭐 하는 짓……!”
“현명한데.”
아이젠이 블렌하임을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혈관에서 독이 돌고 있다는 말을 듣고 팔을 그었다. 여자의 팔을 봐라.”
“……! 독이…….”
모니카의 팔뚝에서는 피도 흐르고 있었지만, 검붉은색의 독도 함께 흘러나오고 있었다. 혈류를 따라 흐르다 몸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덕분에 모니카의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거봐요, 도련님. 저 멀쩡하다니까요…….”
“…그러네.”
“꼭, 소가주전에서 우승하셔야 해요, 도련님…….”
풀썩. 그러나 모니카는 곧 다시 정신을 잃었다. 피를 많이 흘려 빈혈 증상이 온 것이었다.
그녀는 쌕쌕 숨을 쉬고는 있었다. 아이젠은 급히 모니카가 맨 가방에서 금창약을 꺼냈다. 모니카가 금창약을 챙겨 왔다는 말을 기억해 낸 것이었다.
“휴우. 다행이다.”
아이젠은 모니카의 팔뚝에 금창약을 바르고 자신의 옷을 부욱 찢어 모니카의 팔뚝에 묶어 주었다. 덕분에 금세 피가 멎었고, 그때쯤 모니카의 얼굴은 완전히 혈색을 되찾았다.
블렌하임이 말했다.
“훌륭한 여인이군. 하수인으로 두기엔 아까울 정도야. 충성심이 대단해.”
“날 모시는 아이다. 대단한 건 당연하지.”
아이젠은 모니카를 안전하게 눈밭 위에 올려 두었다.
우승이라. 사실 거기까진 딱히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내 하수인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대를 어느 정도는 채워 줘야겠지.
아이젠은 블렌하임을 향해 걸어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깐의 이슈가 있었지만 이제, 다시 결정을 지을 순간이 왔다.
“요아힘은 어디서 만날 수 있다고?”
“너의 다음 목적지가 사막의 땅 그노시스라는 것을 안다. 그곳에 가면 싫어도 그분을 만나게 될 거다.”
영설산에서의 예선을 끝내고 그노시스로 가면, 그곳에 요아힘이 있다. 아모스의 중간 관리자가.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나, 귀족 사냥꾼.”
아이젠이 사형수에게 예를 갖추듯 최선의 친절을 베풀어 말했다. 블렌하임은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눈을 감았다. 아이젠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아이젠은 사신강림의 정수를 오른쪽 주먹에 담았다. 최소한 그를 고통스럽지 않게, 단 한 방에 보내 주고자 했다.
휘오오오!!
그렇게 아이젠의 손에 오러가 몰리는 그 순간.
쿠구구구…….
어디선가 땅울림이 들렸다. 눈 바닥이 진동했다. 아이젠은 이 땅울림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뭐지?’
예사 기운이 아니었다. 이것은 마물의 기운. 그것도…….
아이젠이 생각을 마치는 그 순간. 땅울림의 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르르르르릉!!”
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그것은 그런트. 보통의 그런트보다 덩치가 대여섯 배는 더 큰, 그런트들의 우두머리, ‘파파 그런트’였다. 파파 그런트는 허공에 붕 뜬 채로 아이젠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퍼억!
블렌하임의 머리를 짓밟아 터뜨리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르르르릉!!”
또다시 대기가 얼얼하게 울렸다. 파파 그런트의 발밑에 깔린 블렌하임에게, 아이젠이 시선을 던질 틈도 주지 않았다.
“그르르릉!!”
파파 그런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네가 내 자식들을 때려눕힌 장본인이냐?’
아이젠은 삐질 흐르는 땀과 함께 기쁜 마음을 느꼈다.
“…오냐, 나다. 한판 뜰까?”
수련치를 쌓는 과정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