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블렌하임 대장! 믿고 있었어요!”
제리가 웬일로 말도 더듬지 않고 감격에 차 말했다.
“멍청아, 피해!”
아이젠이 소리쳤다. 딱히 제리가 걱정되어서 외친 것은 아니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서 소리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멀뚱히 서 있는 제리가 멍청해 보여서 조언한 것일 뿐.
그러나 제리의 반응 속도는 느렸다.
퍽!
짧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제리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면, 그곳에 제리는 없었다. 제리는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자신이 뭐에 맞은 건지도 모르는 얼굴로 멍청하게 시야를 흐리고 있었다.
“어?”
쉬익!
올라간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제리는 땅으로 떨어졌다.
‘어, 어둠의 사슬!’
어떻게든 속도를 늦춰 보려 했으나 그조차도 무의미한 발악에 불과할 뿐.
투콱!
“꺼…어어…….”
눈 위에 거꾸로 꽂힌 제리는 잠시 후 숨을 거두었다.
제리를 치고 간 것은 블렌하임이었다. 정확히는 블렌하임의 어깨였다.
“후욱. 후욱! 후욱!!”
블렌하임이 하얀 입김을 내뿜었다. 그의 삼각근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있었다. 삼각근이 애초에 둥근 구형의 근육이라곤 하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나치게 원형의 생김새로 부풀어 있었다. 마치 대포알 같은 그 생김새에, 아이젠은 사신강림의 운공을 가속했다.
‘가만히는 못 당하지.’
블렌하임은 죽음을 각오하고 제 어금니를 삼켰다. 실제로 지금 그는 피아 식별도 제대로 못 하고 자신의 부하인 제리를 죽이고 말았다.
물론 아모스의 부작용을 감당하는 것은 약물 복용자 본인이어야 할 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나 역시 온 힘을 다해 주마.”
아이젠도 상대를 향해 최선의 강기를 보여 주기로 했다.
콰아아아아아!!
넘실거리는 연분홍빛 오러가 아이젠의 몸 위로 솟구쳐 올랐다. 허공을 집어삼킬 듯 솟아오르던 연분홍빛 오러를, 블렌하임은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싹!
그러다가 섬뜩한 기운을 느끼고 블렌하임이 아이젠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을 때.
“박살!”
콰앙!
그는 뒤통수에 둔중한 무언가가 와 닿는 느낌을 받았다.
기우뚱!
블렌하임은 크게 비틀거렸으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그의 허벅지가 어깨와 마찬가지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마침내 허벅지 근육이 섬유로 된 옷을 찢고, 그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욱!! 후욱!!”
코뼈가 부러진 탓에 안 그래도 숨을 쉬기 힘든데 아모스의 오러까지 몸을 지배하니 블렌하임의 호흡은 더욱 가빠졌다. 아이젠은 블렌하임에게 충고했다.
“운동은 숨 쉬는 것도 중요한데. 그렇게 호흡하면 근육 안 큰다.”
“후욱!!”
“다 내가 해 봐서 하는 말이니까 새겨들어, 이 새끼야!”
결사신권, 권왕백무!
아이젠의 손에서 백 발의 주먹이 총탄처럼 쏘아졌다. 블렌하임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주먹세례의 틈을 헤집어.
콱!
그 너머에 있는 아이젠의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어라.”
“후욱!!”
부웅!
블렌하임이 집어 던지자 아이젠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제리 때처럼. 그러나 아이젠이 제리처럼 쏜살같이 추락하는 일은 없었다.
츠팟!
블렌하임이 위로 떠올랐다. 그는 어깨에 더욱 단단히 힘을 주어, 아이젠을 분쇄시킬 작정으로 날아들었다. 아이젠은 본능적으로 양손을 교차했다.
퍼억!
아이젠은 허공에서 몇 차례 회전하는가 싶더니 둔탁한 소음을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정통으로 맞았는가?
“후욱?”
“아오, 깜짝 놀랐네.”
그렇다기엔 아이젠은 멀쩡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아이젠의 양손 검지는 부러져 있었다. 어째서인고 하니.
‘박살지를 먹여 줬거든.’
우두둑!
블렌하임의 오른쪽 어깨가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조금 전 아이젠을 치고 간 쪽 어깨였다.
“후욱?!”
꿀렁꿀렁―
블렌하임의 오른쪽 어깨에서는 검보랏빛으로 물든 진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러가 마침내 피까지 잠식해 버린 탓에 색이 갈변한 것이었다.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그 부분으로 바람이 새지.”
아이젠은 블렌하임의 어깨에 바늘을 찌른 것이었다.
비틀!
블렌하임은 잠시 오른팔의 힘을 잃고 주춤했으나.
“후욱, 후욱!”
이내 다시 자세를 잡고 일어났다. 아이젠은 다가올 또 다른 충격에 대비해 몸을 세웠다.
블렌하임은 왼쪽 어깨를 앞세워 아이젠에게 달려들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투학!!
마치 투석기 위에 올려놓은 돌처럼, 블렌하임은 눈 바닥을 지지대 삼아 아이젠에게 던져졌다. 아이젠은 놓치지 않고 블렌하임의 몸을 시야에 가뒀고.
‘박살지……?!’
박살지를 먹이려 했으나, 그 순간이었다.
쿠웅!
블렌하임이 도중에 한차례 발을 디뎠다. 그러자 블렌하임의 궤적이 바뀌었다. 기존의 궤적이 직선이었다면 이제 블렌하임은 완만한 곡선의 형태로 아이젠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젠의 박살지는 허무하게 빗나갔고.
“야, 잠까……!”
콰아아앙!!
블렌하임의 거체가 아이젠의 온몸을 강타했다.
아이젠은 이번엔 날아가지 않았다. 다만 맞은 자세 그대로, 힘에 이끌려 멀리 밀려났다. 아이젠은 전신에 힘을 주고 바닥에 발을 디뎌 멈춰 서려 했으나.
‘젠장, 보법이 부족해.’
아이젠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바로 시간이었다. 보법을 배우는 데 필요한 시간.
아이젠은 전생을 깨달은 이후부터 그간 결사신권을 단련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가 보법을 연마해 상대해야 할 정도의 강자는 없다는 판단을 했기에. 그러나 아이젠의 판단이 조금 틀렸다.
콰당!!
아이젠은 바닥에 넘어졌다. 그리고 벌떡 일어났다. 조금 아프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오만했다. 목롱보 말고 다른 보법도 연마해 둬야 했는데.”
“후욱?”
“너한테 한 말 맞아.”
설마하니 제 목숨까지 버려 가며 귀족 살해를 꿈꾸는 미친놈이 있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
깔끔하게 자신의 실착을 인정한 아이젠은, 사신강림의 운공을 다시 뼈에 새겼다.
“이제 끝내자.”
“후욱!”
블렌하임이 다시 어깨를 세웠다. 그리고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바닥을 지지대 삼아 허벅지에 힘을 줬다. 그러나.
턱.
“훅?!”
어느새 다가온 아이젠이 블렌하임의 허벅지에 발을 올려 막았다. 아이젠은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이 자식아. 아무리 내가 만만해 보이기로서니, 한 번 당한 공격을 계속 맞아 줄 만큼 멍청할 것 같냐?”
“후욱!!”
블렌하임은 허벅지에 더욱 힘을 불어넣어 움직이려 해 보았다. 그러나 아이젠은 손톱만큼도 꿈쩍하지 않았다. 마치 코끼리가 버티고 서 있는 것처럼.
“끝났다, 블렌하임.”
“크윽, 후우우욱!!”
블렌하임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파괴권의 진수를 왼손에 담았다. 그리고 아모스의 모든 진기를 끌어올려 아이젠에게 자신의 왼손을 뻗었다. 닿기만 해도 모든 것을 튕겨 내 버리는 블렌하임의 파괴권이 작렬했다!
…그랬어야 했다.
“……?!”
“어디 보자.”
블렌하임의 손이 멈췄다. 아이젠에게 잡혔기에.
분명 손의 크기 차이로만 보자면, 블렌하임 쪽이 서너 배는 더 컸다. 그러나 아이젠은 마치 감싸듯이 블렌하임의 손을 쥐었다. 파괴권이 아이젠을 날려 버려야 하는데, 아이젠은 어째선지 날아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도 그랬다. 아이젠이 손을 살포시 얹었을 뿐인데 블렌하임은 힘을 쓰지 못했다. 그때는 분명 힘의 분배가 어쩌고 했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힘의 분배도 완벽하니 저놈이 튕겨 나가야 하는데. 대체 왜 멀쩡하지?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튕겨 나가지 않을 정도로 강해서 그런 거다.”
“그윽……!”
“반응이 별로네? 궁금해하는 것 같길래 말해 준 건데.”
휘익!
아이젠이 블렌하임의 손을 잡아당기자, 블렌하임은 저항 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블렌하임의 몸에 담겨 있던 아모스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슬슬 효력이 다해 가는 탓이었다. 한 번 더 아모스를 복용한다면 더 큰 힘을 낼 수 있겠지만, 이제 블렌하임에게는 남아 있는 아모스가 없었다.
“크으윽!!”
아이젠이 다시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우고 블렌하임과 눈을 마주치자.
오싹.
블렌하임은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자, 그럼 내 영설산 등반을 방해한 대가를 치러 볼까?”
씨익 웃으며 말하는 아이젠의 모습에, 블렌하임은 제가 그에게 그 값을 미처 다 지불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마, 말도 안 돼……. 아모스의 힘을 각성한 내가!”
“그렇기 때문이다.”
블렌하임의 처절한 저항을 아이젠은 조소로 대응했다.
짜악!
“커헉!”
뭐에 맞았지?
블렌하임은 왼쪽 뺨이 얼얼하게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이젠은 그가 당황할 틈도 주지 않고 오른손을 쫙 펴 싸대기를 연속으로 날렸다.
짜악! 짜악! 짜악!
“커헉! 크헉! 으헉!”
“어딜, 마약, 따위로, 힘을, 키우고, 그러나, 어?”
짜악! 짜악!
블렌하임의 얼굴은 계속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이젠이 손바닥과 그의 뺨을 정확히 일치시켜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동네, 양아치, 쉐끼들도, 아니고, 몰려다니면서, 뭐? 귀족 사냥? 뒤질라고!”
“크헉, 커헉! 그, 그마아안!!”
아이젠은 블렌하임의 외침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싸대기를 날렸다.
쩌억!
마침내 얼굴뼈가 조각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블렌하임이 뒤로 철퍼덕 밀려나 넘어졌다. 그는 덜그럭거리며 주저앉은 턱을 부여잡고 그 틈새로 질질 흐르는 침을 맛보았다.
“크흑. 크흐흑. 가마두지 아게다, 아이제 포 그이우으!”
“뭐라는 거야. 똑바로 말해.”
“크윽!!”
척!
블렌하임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사박사박사박사박!
척! 척! 척! 척!
아이젠과 블렌하임을 구심점으로 원을 그리며 기척이 느껴졌다.
끼이이…….
아이젠은 민감한 두 귀로 시위가 당겨지는 소리를 들었다. 활을 든 궁수들이 아이젠을 둘러싸고 있는 것.
어느새 턱뼈를 맞춘 블렌하임이 웃었다.
“크크크. 내 수하들이 널 저격하고 있다. 내 손으로 없애 버리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겠군.”
“깜찍한 수를 써 놨잖아.”
“고슴도치로 만들어 주마, 아이젠 폰 그린우드!!”
블렌하임이 손을 떨궜다. 그러자.
투웅! 투웅! 투웅! 투웅!
사방에서 활이 쏘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도 여러 개. 방향도 여러 개. 수십 개 되는 화살을 아이젠이 모두 주먹으로 쳐 낼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 화살 하나하나에 맞았다간, 아무리 내공으로 몸을 감쌌다 해도 아이젠도 무사하지 못할 터. 하지만.
‘결사신권, 환교신권.’
어디까지나 ‘주먹으로’ 쳐 낼 수 없을 뿐이었다.
‘외공!’
투확!
아이젠의 몸에서 외공이 뿜어져 나왔다. 사방, 팔방, 아니, 그 이상의 모든 방향으로, 360도 원을 그리며 아이젠은 자신의 기력을 발산했다. 그러자 곧.
피익―
아이젠을 향해 날아오던 화살들이, 별안간 허공에서 힘을 잃고 바닥에 픽 박혔다. 아이젠의 기력이 마치 그물로 화살들을 감싸듯 그것들을 장력으로 당겼기 때문이었다.
블렌하임은 어이가 없었다.
“뭐, 뭐야.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블렌하임의 눈에는 마치 화살들이 갑자기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보였을 것이었다. 무생물에 불과한 화살이, 제 의지라도 갖고 있다는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