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 계속되는 싸움 】
화이트 오크를 쓰러뜨리고 자못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블렌하임. 그는 오른손으로 쿠크리 나이프를 휙휙 회전시키며 아이젠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네가 아이젠 폰 그린우드인가?”
아이젠은 블렌하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그의 얼굴은 왼쪽 전체가 화상으로 물들어 있었다. 근육은 우락부락하지만 단순히 힘만을 뻥튀기한 게 아니라 지근과 속근이 일정한 비율로 섬세하게 그 전신에 들어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이젠은 블렌하임의 정체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네놈이 블렌하임이냐?”
아이젠의 영설산 등반을 방해한 장본인. 아이젠에게 길버트, 메르헨, 피터, 스퀴드, 제리를 보내 그를 끌고 가려 했던 자. 그것이 바로 블렌하임이었다.
블렌하임은 씨익 웃어 보였다.
“그렇다. 내 아이들에게 실례를 했다지?”
“실례는 그쪽 아이들이 하신 거고.”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칠 때.
- 으음.
화이트 오크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등에 크게 베인 상처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다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뭐야, 괜찮으세요? 아니, 괜찮냐? …말을 어떻게 해야 돼, 이거.”
- 편하게 해라.
화이트 오크는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와도 겨룬 적이 있을 정도의 강자. 아무리 기습을 당했다 한들, 날이 잘 드는 쿠크리 나이프에 베인 것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단 하나의 약점이 있다면.
- 나는 그린우드가 아닌 자와는 겨룰 수 없다.
그가 영설산의 소가주전 예선 시험관 역할을 맡으며 그린우드의 초대 가주에게 자청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린우드를 제외한 이들에게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 그래서 자신을 베어 넘긴 블렌하임에게도, 화이트 오크는 힘을 쓸 수 없었다.
- 그렇게 약속되어 있지.
“그럼 물러나 계세요.”
그 말을 끝으로 화이트 오크는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눈 속에 파묻히듯 그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젠은 모니카가 타고 있는 말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직 그 위에 묶여 있던 모니카가 콜록거리며 물었다.
“무, 무슨 일이에요, 도련님? 콜록.”
“별일 아니야.”
아이젠은 모니카의 기혈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모니카의 눈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조용히 잠들었다. 잠시 그녀를 기절시킨 것이었다.
아이젠은 모니카를 태우고 있는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인마. 어디 잘 숨어 있어. 모니카가 다치면 너도 죽는다.”
“히힝.”
달가닥― 달가닥―
말이 천천히 뒷걸음치며 아이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고 있던 블렌하임은 마침내 쿠크리 나이프를 움직이기를 멈추었다.
“방금 그 마물은 뭐였지? 대답해라.”
“네가 신경 쓸 바는 아니잖아.”
아이젠의 시선이 블렌하임의 왼쪽으로 향했다. 블렌하임은 오른손으로는 쿠크리 나이프를 들고 왼손으로는 다른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건 블렌하임과 덩치가 거의 비슷한 크기의 그런트였다. 그 그런트는 조금 전까지 아이젠이 이동 수단으로 이용했던 놈이기도 했다.
“내 마차에… 무슨 짓을 했군.”
블렌하임은 그 말을 무시하고 아이젠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아이젠과 마주 선 블렌하임의 몸집은 아이젠보다 약 세 배 이상 거대했다. 아이젠이 무혈신공과 결사신권으로 보통 사람에겐 거의 불가능한 정도로 몸을 섬세하게 가꿨다고 해도, 실제로 블렌하임의 근질은.
‘나와 비등하거나 그 이상이다.’
아이젠은 블렌하임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질 것 같단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블렌하임이 코웃음을 쳤다.
“겨우 이 정도 상대에게 겁을 먹다니…….”
아이젠은 블렌하임이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그 덩치에 가려진 제리가 서 있었다. 제리는 두려움에 벌벌 떨며 말했다.
“조, 조심하십시오, 블렌하임 대장. 저, 저, 저 녀석은 사신 같은 놈입니다.”
“웃기지 마라. 이런 꼬마 녀석이 사신이라면 나는 신이다.”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이젠이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으며 입을 열었다.
“일단 예의상 물어볼까.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건방지군. 꼬마야, 어른을 봤으면 인사부터 올려야 하는 게 귀족의 예의가 아니냐?”
“어른 아닌 것 같아서.”
“난 귀족들을 이 땅에서 지울 것이다. 그 귀족의 직계도, 방계도 모두 마찬가지지.”
블렌하임이 쿠크리 나이프를 곧게 세워 그 칼날을 아이젠에게 겨누었다.
“모두가 평등한 미래, 그것이 내가 바라는 세상이다. 그를 위한 초석이 되어라, 아이젠 폰 그린우드.”
평등. 좋은 말이다. 아이젠 역시 평등한 세상 자체에 나쁜 감정을 품고 있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긍정적인 입장에 가까웠다. 모두가 평등하다면 모두와 주먹을 겨룰 수 있는, 보다 발전 지향적인 세계가 될 테니까.
하지만, 아이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울 좋은 소리를 하는군.”
“뭐라?”
“블렌하임. 네가 하는 말은 그냥 어리광에 불과해.”
아이젠이 블렌하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이제 손을 뻗으면 언제든 블렌하임의 명치에 주먹을 먹일 수 있을 만한 거리. 그러나 아이젠은 주먹을 내밀진 않고, 대신 입을 열었다.
“평등을 이루기 위해 네가 하는 짓이 귀족의 살해라면… 그 뒤에 뭐가 남을 것 같지? 제국 땅에서 모든 귀족을 죽이면 신분이 사라질 것 같아?”
“…….”
“천만에. 피로 세워진 권좌는 또 다른 권력에 휩쓸릴 뿐이야.”
아이젠은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중원 무림, 언제든 정점이 바뀔 수 있었던 강자존의 원칙에 지배되던 세상.
물론 아이젠은 그런 세상이 좋았다. 그렇기에 그 자신이 투신이라 불리는 위치까지 오를 수 있었으니.
하지만 아이젠도 그보다 더한 강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언제든 정점의 아래로 내려설 수 있었다. 블렌하임은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세계 평화를 다른 사람을 죽임으로써 이루려 하다니, 네가 말해 놓고도 모순되는 것 같지 않아?”
“…닥쳐라, 이놈.”
블렌하임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귀족 따위가! 나의 원대한 꿈을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지!”
“이 새끼 웃기는 새끼네. 할 말 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하는 것 좀 보세요.”
“죽어라, 아이젠! 그리고 네놈의 어금니를 내놔!”
부웅!
마침내 블렌하임의 쿠크리 나이프가 크게 휘둘렸다.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을 정도의 큰 동작이었다. 아이젠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 가볍게 발을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음?!’
자세히 보니 그의 발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 아이젠은 멀리 서 있던 제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둠의 사슬!”
제리가 아이젠에게 어둠의 사슬을 걸어 묶은 것이었다.
마침내 칼날이 아이젠의 정수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지만, 아이젠은 당황하지 않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결사신권, 환교신권: 외공(外功)!’
파앙!
아이젠의 온몸에서 환교신권이 뿜어져 나왔다.
짜르릉― 그 탓에 어둠의 사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읏?!”
블렌하임도 반동에 밀려났다.
아이젠은 비틀거리는 블렌하임의 빈틈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결사신권, 박살!’
아이젠의 왼 주먹이 일직선으로 뻗어 블렌하임의 가슴과 배 사이를 향해.
콰아앙!!
정통으로 내리꽂혔다.
우두둑! 우두둑!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블렌하임이 멀리 튕겨 나갔다.
아이젠은 소리에 속지 않았다. 그는 빠르게 눈치챘다.
‘부러진 것은 블렌하임의 갈비뼈가 아니다. 내 왼손이야.’
그 말대로 아이젠의 왼손은 너덜거리고 있었다.
블렌하임의 몸은 단단했다. 상상 이상으로. 적어도 아이젠의 결사신권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아이젠이 아니었다.
‘결사신권―’
아이젠은 이번엔 오른손에 크게 힘을 주어, 아직 바닥에 미처 다 떨어지지 않은 블렌하임을 향해 주먹을 길게 뻗었다.
‘교아!’
투확!!
공중에 뜬 블렌하임의 몸이 마치 곰의 일격을 맞은 듯 크게 베였다.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는가 싶더니, 블렌하임이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쿵!
그러나 눈먼지가 일어나기도 잠시, 블렌하임은 태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몸에 묻은 눈을 툭툭 털어 냈다.
“다 한 건가?”
“아니?”
팟!
아이젠은 목롱보를 사용해 쏜살같이 블렌하임의 등 뒤로 이동했다. 그리고 아직 앞을 바라보고 있는 블렌하임의 등에 손을 얹어.
‘박살!’
박살을 먹였다.
우두두둑!!
블렌하임의 등뼈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이번 일격은 들어간 모양이었다.
“끄응……!”
블렌하임이 고통스럽게 등을 젖히더니 이내 오른손으로 쿠크리 나이프를 높이 들어.
“죽어라!”
아이젠에게 내려쳤다. 그건 검을 휘두른다기보다는 마치 몽둥이를 내리꽂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이젠은 왼손과 오른손을 교차해 블렌하임의 칼날을 받았다.
캉!
분명 아이젠의 양팔과 블렌하임의 쿠크리 나이프가 부딪친 것임에도, 마치 강철끼리 맞붙는 듯한 소리가 났다.
끼기긱―
잠깐의 대치 상황. 아이젠은 무릎을 굽힌 뒤 반동을 줘 팔을 뻗어 블렌하임을 밀어냈고.
“윽!”
블렌하임이 잠시 뒤뚱거리는 사이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도록, 오른손에 무혈신공의 진수를 세밀하게 담았다.
꽈아아아악!
주먹에서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날 때까지 힘을 끌어모은 아이젠은.
‘결사신권, 박살!!’
전심전력을 담은 한 방을 블렌하임에게 건넸다.
콰아아앙!!
우두둑!
이번에야말로 블렌하임의 갈비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을 받았는지 블렌하임이 오른손에서 쿠크리 나이프를 놓쳤다.
아니, 사실 놓친 게 아니었다. 블렌하임은 의도적으로 검을 놓은 것이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단 하나.
블렌하임은 오른손을 꽉 쥐었다. 아이젠의 결사신권처럼 한 방에 온 힘을 싣는 일격이었다. 그리고 그는 망치를 내려치듯 오른손을 떨어뜨렸다.
“파괴권!”
찰나의 순간, 아이젠은 이미 망가진 왼손을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왼 주먹을 뻗어 블렌하임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끄드득!
아이젠의 왼손 뼈가 완전히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가 뒤로 크게 밀려났다.
치이이이익!
눈밭임에도 발을 끌며 뒤로 물러나자 아이젠의 발치에서 마찰음이 들렸다. 거의 5m 넘게 뒤로 물러난 아이젠은 잠깐의 소강상태를 틈타 망가진 왼손을 어루만졌다.
“예전 생각 나네.”
아이젠은 문득 한스에게 처음 주먹을 휘둘렀던 때를 떠올렸다. 아직 결사신권은커녕 무혈신공의 원리도 익히지 않은 상황에서 휘두른 주먹이라, 겨우 한 번 때렸을 뿐임에도 새끼손가락이 달랑거렸었지.
지금은 그때보다 피해가 더 크지만, 아이젠은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두둑! 우두두둑!
아이젠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움켜쥐어 뒤틀린 뼈를 맞추었다. 그런다고 부러진 뼈가 다시 붙진 않겠지만, 어찌 됐든 형태는 유지할 수 있도록만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언제든 주먹을 다시 한번 휘두를 수 있도록.
“외곬이로구나, 네놈도.”
그런 아이젠에게서 동질감이라도 느꼈는지, 블렌하임이 조롱 조로 말했다.
아이젠은 그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