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무혈신공, 결자해지.’
후우욱!
아이젠은 피터와 싸운 내공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양이 그리 많지 않아 마치 전채 요리만 먹고 본요리를 안 먹은 기분이었다.
“쯧.”
아쉽다. 아이젠은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 뻐근한 몸을 풀어 주었다.
스퀴드와 제리를 만났을 때 아이젠이 사용한 기술은 ‘사신강림’.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 한순간이지만 폭발적인 위력을 낼 수 있는 무혈신공 3성의 무공이었다.
일단 한번 사신강림을 사용하면, 몸을 회복하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짧은 시간 운용했을 뿐인데도 아이젠은 무산소 운동을 몇 시간 한 것 같은 피로를 느꼈다.
‘3성에 오르긴 했어도 아직 사신강림을 자유자재로 쓰기엔 곤란한 건가.’
아이젠은 문득 전생이 떠올랐다. 이강철로서 현경의 경지에 올랐을 때는 사신강림을 두 시진씩 운용해도 살짝 피곤한 정도에 불과했는데.
“아쉬워할 틈은 없다. 어찌 됐든 내 목표는 생사경이니까, 강해지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면 돼.”
“그릉?”
“너한테 한 말 아니야.”
“그릉.”
“아, 혼잣말이라고. 조용히 좀 걷지? 시끄럽게.”
그렇게 그런트와 말이 영설산을 올랐다.
‘뭐지?’
시간이 꽤 흘러 아이젠이 산중턱에 입성했을 때쯤, 아이젠은 영설산을 감싸고 있는 모종의 기운을 느꼈다. 그는 그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아이젠은 잠시 그런트에서 펄쩍 뛰어내렸다. 그가 눈밭에 발을 딛자 뒤에서 모니카가 콜록거리며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도련님?”
“응. 괜찮아.”
아이젠은 모니카를 안심시키고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존재에게 다가갔다.
그건 얼음이었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라, 거대한 얼음의 벽.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단단한 얼음벽이 산을 둘러싸듯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결계라도 된다는 양.
아이젠은 얼음벽 위에 손을 올려 봤다. 차갑다. 평범한 얼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정순하다.’
그것은 순도가 몹시 높은 얼음이었다. 짐작하건대 이곳 영설산의 눈을 녹인 뒤 다시 얼린 것 같았다.
설마하니 이런 얼음벽 결계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건 아닐 테고.
“…시험인가.”
이런 두께의 얼음벽을 일반인이 꿰뚫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참철검으로 벤다 해도 쉽사리 조각나진 않을 터.
“그린 오러를 배운 정도의 참철검술 수행자가 아니라면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거군?”
지도를 봐도 얼음벽이 길을 막고 있는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만년한철의 광산은 이 얼음벽을 지나쳐 더 높이까지 올라가야만 나왔다. 결국 이 얼음벽을 통과해야 했다. 부수고.
“후우.”
아이젠은 뻐근한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있는 모퉁이를 돌아가면 절벽이 나올 것이었다. 설마하니 절벽에까지 얼음벽이 있진 않을 테니까…….
“절벽 쪽으로 가면 얼음벽을 부수지 않고도 올라갈 수 있겠네.”
아이젠이 슬쩍 그런트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자 그런트는 설마 절벽을 오르라는 건가 싶어 크게 당황했다.
“그, 그릉?”
확실히 절벽을 통해 올라가면 얼음벽 따위 통과할 필요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 난 편법 별로 안 좋아하거든.”
정도가 있는데 사도를 추구하는 것은 아이젠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아이젠은 다시 얼음벽에 가까이 붙어 섰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하며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하아…….”
조금 전 사신강림을 사용한 몸인지라 몸이 성치는 않지만, 아이젠은 할 땐 하는 사람이었다.
“결사신권.”
아이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들어간 힘은 주먹에 자리해 있는 미세한 혈관 하나하나로 파고들어 갔다.
꽈드드득!
아이젠의 주먹에 핏줄이 돋아나고, 그 핏줄이 울긋불긋해져 마치 바늘로 콕 찌르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을 때.
번뜩!
아이젠의 눈빛이 먹이를 만난 초롱아귀의 그것처럼 보석같이 반짝였다.
“권왕백무: 관(貫)!”
츠팟!
주먹이 뻗어 나갔다.
권왕백무는 바네사와 대련할 적에 아이젠이 사용했던 기술. 그러나 아이젠이 지금 뻗은 주먹은 그때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권왕백무는 백 번의 주먹을 한 번에 뻗어 내는 것. 권왕백무 ‘관(貫)’은 그 백 번의 주먹을 다시 하나로 합치는 것. 즉 하나의 주먹에 백 번의 위력이 담기는 것! 그 단순한 주먹질이.
퍼엉!
얼음벽의 표면을 강타했다.
때린 것은 표면뿐. 그러나 외부를 통해 스며들어 간 아이젠의 내공은 얼음벽 전체를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쩌적― 쩌적―
얼음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미가 거미줄을 짜듯 뻗어 나가던 소리는.
콰과아아앙!
이윽고 얼음벽 한쪽을 무너뜨렸다. 얼음벽이 으스러지니 사람 백 명은 족히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이 뚫렸다.
“이야, 이거 두께 봐라. 이런 걸 통과하라고 하다니.”
양심도 없는 사람들 같으니.
얼음벽의 두께는 아이젠을 눕힌 길이보다 몇 배는 두꺼웠다. 10m? 20m? 아니, 그 이상.
“한스는 고생깨나 하겠는걸.”
아이젠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하며 그런트를 돌아보았다. 아이젠의 주먹에 놀랐는지 그런트는 만세 자세를 하고 있었다.
“그, 그르렁!”
“뭐라고? 대단하다고?”
“그릉! 그릉!”
아이젠이 그런트의 말을 알아들을 리야 없겠지만, 그런트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대단하다고. 한편으로는 이런 남자에게 홀로 덤벼들었던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기도 했다.
“그릉! 그릉!”
“응, 그렇게 아부해도 안 봐줄 거야.”
아이젠은 무너진 얼음벽을 보며 뿌듯해하다가 다시 그런트를 돌아보곤 싱긋 미소 지었다.
“등 대. 다시 업어 줘.”
* * *
아이젠 일행이 얼음벽의 뚫린 곳을 가로질러 가고 있을 시각. 흑기사 제이슨은 자신의 원래 주인의 등 뒤에서 잠행하고 있었다. 아이젠의 명령에 따라 그에게 따라붙은 것.
‘절대 들켜선 안 된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제이슨이 마음먹고 은신 능력을 제대로 수행하면 사울 장로 정도 되는 강자가 아닌 이상 그를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제이슨의 잠행 능력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적어도 그의 원래 주인이었던 공자를 속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
공자는 한마디도 않고 있었다. 그는 어느새 사막의 땅 그노시스에 입성했고, 그곳에서 자신의 형제를 만났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
“한스가 아니냐?”
게오르크와 한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가 탄 말을 이끌고 서로에게 다가섰다.
두 그린우드를 수행하는 하수인들은 그노시스의 갑작스러운 온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었지만 게오르크와 한스는 그린 오러, 즉 연풍의 오러를 다루기에 더위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벌써 오신 겁니까? 역시 대단하십니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
“하하, 아니야. 너야말로 대단하구나. 영설산의 그 ‘시련’을 통과했어. 기대 이상이다.”
게오르크의 말에 한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영설산의 시련. 예고되지 않았던 시련이기에 한스는 몹시 당황했더랬다.
“예. 하마터면 통과하지 못할 뻔했습니다.”
“그래도 이곳 그노시스까지 무사히 오지 않았느냐. 본선전도 잘 치를 수 있길 기대하마.”
“…예! 감사합니다!”
모처럼의 칭찬을 듣자 한스는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그는 그런 자신의 마음을 짐짓 감추기로 했다.
한스는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소가주전 본선은 그린우드의 직계와 방계가 그노시스에 모여 치르는 시험. 그런데 나머지 직계 두 사람, 그러니까 바네사와 아이젠이 보이지 않았다. 방계들 역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후. 아이젠 그 머저리는 보나 마나 영설산의 시련에서 탈락했겠지. 만약 바네사 누님까지 탈락한 거라면… 이거, 본선에서 게오르크 형님만 제치면 어쩌면 내가 우승자가 될 수 있을지도?’
여태까지 도착하지 않은 걸 보면 방계들도 별 볼 일 없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게 누구야. 직계들 아니야?”
두 사람을 향해 걸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주황색 머리에, 곁에서 수행하는 하수인도 하나 없이 단신으로 당당하게 게오르크와 한스의 앞에 선 남자.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그의 이름을 한스는 알고 있었다.
“프란츠 반 그린우드?”
“용케 날 기억하는군? 한스 ‘폰’ 그린우드.”
두 사람은 어릴 적 만난 적이 있었다. ‘대(大)가문 회의’에서 말이다.
한스는 꿀꺽 침을 삼키며 말에서 내렸다.
“너, 너… 정말 프란츠가 맞아?”
프란츠는 한스보다 일곱 살이나 연상이지만, 한스는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다. 프란츠는 그걸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럼 내가 프란츠지 누구겠어?”
한스가 보는 프란츠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일단 얼굴에 흉터가 적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옷 밖으로 드러난 몸 여기저기에도 칼날에 베인 듯한 상처가 많았다.
자신을 보고 있는 한스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프란츠가 훗 웃으며 말했다.
“왜, 상처가 너무 많아서 이상해? 그래도 귀족의 방계인 젠트리 계급인데?”
“크, 크흠. 왜 그런 거지?”
“훗. 우리 아버지, 아니, 3 방주(傍主)님 덕분이지.”
프란츠는 게오르크가 탄 말 쪽을 향해 걸어갔다. 게오르크는 말에서 내리지 않고 프란츠를 내려다보기만 했는데, 프란츠는 그에게 자기소개 또는 인사를 하기는커녕 비아냥대는 어조로 말을 이어 갔다.
“너희 직계처럼 온실 속 화초로 자란 건 아니라서 말이야. 이번 소가주전에서는 우리 3 방계가 우승을 차지할 거거든.”
“그걸 위해 온몸이 그 지경이 될 때까지 수련했단 말이냐?”
뒤에 서 있던 한스가 묻자 프란츠가 그를 돌아보았다.
“그것 말고 무슨 다른 이유가 있겠어?”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닌 건 너야, 한스. 아니, 직계 전체가 다.”
프란츠는 허리춤에 있는 자신의 검을 매만졌다. 그것 역시 직계의 것과 똑같은 ‘참철검’이었다.
“소가주전에서 우승하는 자가 다음 대의 가주가 된다. 즉, 향후 수십 년을 책임질 자리를 다투는 시험. 가문의 운명을 건 시험을 어떻게 그렇게 대충 준비할 수 있지?”
한스가 그 말에 뭐라 대꾸하기도 전.
찰캉!
프란츠가 참철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게오르크를 향해 칼을 횡으로 휘둘렀다.
“게, 게오르크 형님!”
한스가 뒤늦게 소리칠 때.
쐐애액!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곧게 울려 퍼졌다.
파앙!
그러나 칼날이 게오르크에게 가 닿는 일은 없었다. 프란츠가 중간에 검을 멈추었으므로.
“…큭큭. 뽑지조차 못한 겁니까?”
게오르크는 여전히 마상에서 태연한 얼굴로 프란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뽑지조차 않았다. 프란츠가 받아들이기에 그건 뽑지 않은 게 아니라, 뽑지 ‘못한’ 것이었다.
“직계의 첫째가 이 모양이라니. 아무래도 이번 소가주 자리는 역시 우리 3 방계가 가져가겠는걸.”
“무슨 헛소리지?”
게오르크가 처음으로 대꾸했다. 프란츠는 그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겼다. 그는 프란츠와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좀 더 아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도의 검 실력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
쩌적.
철이 갈라지는 소리. 그리고.
투둑!
부서지는 소리.
프란츠의 칼날이 잘렸다. 섬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