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가 넷째는 역대급 무공천재-51화 (51/201)

51화

* * *

길버트는 지난 세월의 기억을 주마등처럼 떠올렸다. 그간 살아온 날이 길다고는 볼 수 없었지만, 어찌 됐든 자신이 지금 이곳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메르헨도 죽었고, 피터도 전투 불능 상태가 됐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바로 나. 심지어 아이젠의 동료라는 여인에게 화살을 쏴 맞혀 중태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길버트 자신이었다. 남을 해쳐 놓고 자신만 몸성히 돌아가길 원한다면……. 그래, 그건 그릇된 생각이겠지.

‘건드려선 안 됐는데.’

아이젠이 이렇게 강자인 줄은 몰랐다. 알았으면 손도 안 댔지! 어쩌자고 활을 쐈을까? 대체 어쩌자고? 상대가 나보다 강자일 가능성을 왜 배제했지?

꿀꺽. 길버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앞에는 아이젠이 싸늘한 얼굴로 서 있었다.

‘부, 부디 아프지 않게…….’

아이젠의 폭약 같은 주먹을 보면 그런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어 보였지만, 길버트가 지금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그것뿐이었다.

성큼성큼―

길버트는 아이젠이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분명 눈밭 위를 밟고 있을 텐데 발 구르는 소리가 당차기 그지없었다.

질끈! 길버트가 입술을 깨무는 그때.

탁.

“아야.”

길버트는 이마에 딱밤을 맞고 눈을 떴다. 아이젠이 그와 눈을 맞추기 위해 꿇어앉아 있었다.

“뭐 하냐?”

“예, 예?”

아이젠은 조금 전 자신이 피터를 밀어 떨어뜨렸던 구덩이 쪽을 힐끔 가리켰다.

“건져 올려.”

* * *

“콜록, 콜록!”

피터는 입 안에 눈덩이를 머금은 채 깨어났다. 뭐지? 지옥인가? 지옥의 날씨는 원래 이렇게 추운 건가?

그러나 곧 불쑥 눈앞에 나타난 아이젠의 얼굴을 보고 그는 화들짝 놀랐다.

“으, 윽!”

“누워 있어. 허리가 박살이 났네.”

아이젠의 말대로 피터는 더 이상 허리를 일으킬 수 없었다. 허리가 완전히 두 동강 났다고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좋게 말할 방법이 없을 듯했다.

피터는 자신의 하반신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겠는가? 피터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다가 아이젠에게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너에게만은 꼭 복수하고 싶었는데.”

그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건 다름 아닌 아이젠. 블렌하임의 밑에서 그의 권법을 배우며, 또 아모스를 얻어 섭취하며 보다 더 강해지는 것만을 꿈꿨던 피터였다.

그러나 이제 와 돌이켜 보면, 정말로 그게 아이젠 때문이었나?

‘아니. 사실은 나 스스로 한 짓이야.’

모든 선택은 피터 자신이 한 일이었다. 그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이젠은 아모스를 복용하고도 이길 수 없었다. 그 정도로 강했다. 그렇기에 피터는 허탈한 미소만 지을 따름이었다.

“완패다, 아이젠. 내가 졌다.”

“그건 당연한 거고.”

아이젠은 잠시 사이를 두곤 이마를 긁적였다. 그는 입을 어물어물하다 이윽고 입을 열었다.

“피터. 과거에 내가 네게 했던 일들, 거기에 대해선 난 너에게 사과할 수 없어. 미안하지 않으니까.”

“그래…….”

그래서 대련한 것이었다. 피터 또한 아이젠에게 허울뿐인 사과를 받았다면 오히려 더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차라리 한번 대련한 게 나았다. 차라리 한번 깨져 버린 게 나았다. 피터는 아이젠의 상대조차 되지 못했다.

“하지만.”

아이젠은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너를 이 꼴로 만든 건 나다.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하다. 사과하고 싶어.”

“…….”

아이젠의 깔끔한 사과. 아이젠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잘못한 건 잘못한 것. 사과할 일에 대해선 용서를 구해야 한다.

하지만 피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의 가치관은 조금 전 일로 많이 달라져 버렸으니까.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다, 아이젠. 모든 선택은 내가 한 거다. 네가 계기가 됐을지언정 내 삶에 네가 책임이 있는 건 아니야.”

“…그래도 미안.”

“괜찮아. 허리 부러뜨린 사람한테 할 말도 아니고.”

피식― 피터는 자신이 하고도 웃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젠도 맞받아 웃어 주었다.

“자, 그건 그렇고.”

아이젠은 화두를 바꾸고자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그는 피터의 품 안에서 아모스가 든 작은 약병을 꺼내 들었다.

“이제 물어볼까. 이 알약에 담긴 힘은 대체 뭐지?”

아이젠이 생각할 적에, 아모스의 원리는 천마신교 도강문이 이용한 원리와 똑같았다. 어떤 강자가 자신의 내공을 상대방에게 부여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그 상대방의 몸을 녹아내리게 하고, 종국에는 생명마저 앗아 가는 금기 중의 금기였다. 이곳에서도 누군가가 도강문과 같은 짓을 벌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스승님.’

아이젠, 아니, 이강철은 그 정체가 궁금했다. 자신의 스승을 농락하고 모욕했던 천마신교의 교도들처럼, 스스로의 것이 아닌 힘에 취한 얼간이들이 있다면.

뿌득―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둘 생각이 없는 아이젠이었다.

여기까지는 감성.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생각도 하고 있는 아이젠이었다.

‘아모스의 힘을 갖춘 녀석들이 만약 어떤 단체를 형성하고 있는 거라면.’

그렇다면 아이젠의 결사신권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그들만 한 상대가 없을 것이었다.

아이젠은 지금 소가주전에 참여하고 있지만, 소가주전에서 아무리 대단한 상대들을 만난다고 한들 그들과 삶과 죽음을 두고 다투는 생사결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었다.

아이젠이 결사신권의 경지를 상승시키기 위해 원하는 것은 실전. 그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혈투였다.

‘피터, 길버트 같은 놈들이 많다면, 그들은 모두 내 경험치야.’

아이젠은 그 배후를 캐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피터는 아이젠의 물음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할 말을 고르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이미 허리까지 부러진 마당에 뭘 더 숨기겠냐는 얼굴로 해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나 묻지, 아이젠. 만약 아모스의 힘에 대해 알아낸다면… 어쩔 셈인 거지?”

“글쎄, 어쩌지? 아, 방금 정했다. 다 파괴할 거다.”

“이유는?”

우두둑―

아이젠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움켜쥐어, 그 안에 든 알약을 모두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가루가 된 아모스들이 새하얀 눈밭 위에 먼지처럼 내려앉았다.

“기분 나쁘니까.”

힘을 가진 자는 책임감도 함께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아모스는 책임 없는 쾌락만을 동반하는 마약일 뿐. 주먹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이강철에게 이보다 기분 나쁜 일이 어디 있을까?

심지어 아모스는 그의 스승, 그리고 절친했던 친구 도유진을 앗아 간 것과 동급인 물질이었다. 아이젠으로서는 성정이 뒤틀려 가만 놔둘 수가 없었다.

피터는 아이젠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 주지. 아모스의 주인은…….”

그때였다.

쉬익!

아이젠의 뒤에서 웬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아이젠을 향해 소리쳤다.

“어둠의 사슬!”

철커덩― 스르릉, 스르릉, 스르릉! 철커덕!

무언가가 눈밭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더니 아이젠의 몸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그것은 사슬. 짙은 보랏빛 기운을 내뿜는 사슬이었다.

콰득!

덕분에 아이젠은 꿈쩍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동시에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 피터 위에 올라탔다.

“스, 스퀴드?! 여긴 어떻……!”

피터가 스퀴드의 이름을 부르자마자 스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오른손 주먹을 피터의 얼굴에 먹여 줬다.

퍽!

그 한 방으로 피터는 입을 다물었지만 스퀴드는 기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아니면 확인 사살을 하기 위함인지 계속해서 피터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퍽! 퍽! 퍽! 퍽! 퍽!

원시적인 폭력 행위가 끝난 뒤. 피터의 얼굴은 곤죽이 되어 있었고, 그는 누운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스퀴드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우. 피터 자식, 비밀을 밝히면 분명 죽은 목숨이라고 했는데, 학습 능력이 없군.”

그러자 아이젠에게 사슬을 걸었던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는 스퀴드보다는 덩치가 많이 작은 편에 속했다.

“그, 그러게 말이야. 호, 혼자 상대하겠다더니, 처참하게 발렸잖아?”

“그러니까. 그러게 애초에 셋이 가자고 했을 때 말 듣지. 제리, 이쪽으로 와.”

스퀴드가 제리를 부르자 제리는 총총걸음으로 스퀴드 쪽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면서 아이젠의 눈치를 보는 것은 덤이었다.

“…….”

상황이 급변했음에도 아이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자신을 묶고 있는 사슬이 점점 더 강하게 몸을 옥죄어 왔음에도, 아이젠의 눈빛에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스퀴드가 굵은 팔뚝을 들어 손으로 아이젠을 가리켰다.

“호오, 이놈 봐라? 꼼짝도 못 하게 됐는데도 놀라는 기색이 없네?”

“그, 그런 척하는 거겠지. 시, 실제로는 다, 당황했을걸?”

“…….”

아이젠은 그들의 말을 받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내려앉고 있음을 두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다.

“스, 스퀴드 님! 제리 님!”

한편 이 모든 광경을 먼발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길버트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스퀴드와 제리에게 다가왔다.

“저, 저를 구하러 와 주셨군요!”

길버트는 스퀴드와 제리를 알고 있었다. 비록 대화는 한 번도 섞어 본 적 없었지만, 두 사람 다 블렌하임의 직속이었다.

‘살인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호송되는 와중 호송 마차의 교도관들을 모두 죽이고 탈옥했다는 스퀴드! 자신을 괴롭히던 학우를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찔러 죽였다는 제리!’

두 사람 모두 흉악범이었다. 그리고 블렌하임에 의해 구원된 자들이기도 했다.

‘이 두 분만 있다면 나도 살아 돌아갈 수 있어!’

길버트가 희망에 차 부풀어 오른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볼 때, 스퀴드는 초면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뭐야, 넌. 누구지?”

“아, 저는 길버트라고 합니다! 블렌하임 대장의 밑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아. 아아~ 그, 메르헨이랑 한 짝이던?”

“예! 맞습니다!”

자신을 알아봐 주다니!

길버트는 감격해서 스퀴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스퀴드는 양팔을 활짝 벌려 길버트를 안아 줄 것처럼 반겼다.

그러나 길버트의 희망이 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우두둑! 꽈드드득! 뿌드드득!

길버트는 등뼈와 갈비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느꼈다. 스퀴드가 그를 껴안은 채 뼈가 부서질 정도로 힘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길버트와 메르헨. 너희 둘에게 주어진 명령은 분명 아이젠을 데려오라는 것이었을 텐데?”

“커흑, 커헉, 살려 주……!”

“명령을 듣지 못하는 장기말은 필요 없다. 죽어.”

“제발 살려 주아아악!!”

으드드드득!!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불쾌한 소리와 함께 길버트의 몸이 바닥에 으스러져 내렸다. 그는 몇 번 꿈틀대는가 싶더니 이내 움직임을 멈추고 말았다.

스퀴드는 길버트의 뒤에 서 있던 아이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 미안. 너한테 집중해야 하는데 한눈팔았네. 용서해.”

“…….”

“대충 얘기는 들었지? 우리 대장이 널 보고 싶어 한다. 따라와 줘야겠는데? 거부한다면 강제로 데려가겠어.”

“가, 강, 강제로, 데려갈 거야. 흐흐흐흐.”

스퀴드와 제리의 대화를 마치 만담처럼 듣고 있던 아이젠은 그제야 고개를 양쪽으로 저으며 목을 풀었다.

“하아.”

아이젠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 올랐다. 눈빛도 강렬한 사자처럼 깊게 물들었다.

“이 새끼들이 왜 아까부터 찔끔찔끔 한두 놈씩 찾아오고 지랄들이야. 잠도 못 자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