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자업자득 】
길버트가 말하는 ‘대장’이란, 블렌하임이라는 용병단의 수괴. 얼굴 좌측에 큰 화상이 있어 알아보기 쉬울 거다. 블렌하임은 판매책으로부터 아모스를 대량으로 구입해 자신의 용병단에 배급하고 있다. 아모스를 먹으면 힘이 스무 배 이상 비약적으로 상승……. 이건 뭐 대충은 알고 있던 얘기고.
대강의 내용을 훑어 내린 아이젠은 마지막 문장에서 눈을 멈췄다.
[정보원으로부터 영설산에서 그린우드 공작 가문의 소가주전 예선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들었고, 블렌하임 대장은 그린우드 새싹들의 머리를 베기 위해 직접 이곳으로 왔다.]
피식.
아이젠은 헛웃음을 지었다.
“웃기는군. 결국 날 데려가려고 했던 것도, 그냥 날 죽이기 위해서였다는 거잖아.”
“그, 그게…….”
“이 정보원이라는 건 누구지?”
“아, 제가 이름을 안 적었군요! 종이를 주시면 제가 적겠습니다…….”
“꼼수 부리지 말고 말로 해. 누구길래 여기서 소가주전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웬만한 귀족도 모를 텐데.”
“그것이…….”
말을 질질 끄는 걸 보면 알 만했다. 길버트는 정보원의 이름을 모르는 것이었다.
살고자 저항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아이젠은 생각했다.
‘이것 참. 귀찮네.’
아이젠은 그냥 길버트를 보내 주기로 했다. 물론 저세상으로. 그래서 그가 손날을 높이 들어 올리는 그때였다.
“제, 제기랄!!”
길버트가 결국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이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귀찮게.”
“누, 누구 없어?! 누가 좀 살려 줘! 여기 사람 살려!! 이 X발!!”
길버트는 공포감에 젖은 목소리로 냅다 소리를 질렀다. 입으로 휘익휘익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애처롭다 싶을 만큼 처량한 휘파람 소리가 허공을 울려 가고, 길버트는 결국 다시 바닥에 철퍼덕 엎어졌다. 바로 그때였다.
“드디어 다시 만났구나, 아이젠 폰 그린우드!!”
쿠릉쿠릉―
어디선가 아이젠의 이름을 크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젠은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눈나무 숲 사이로 하나의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성큼성큼 아이젠을 향해 정면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그는 얼굴에 크게 베인 상처가 몇 개 나 있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크크큭. 아이젠! 날 기억하나?!”
“……?”
아이젠은 초면이라는 듯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길버트를 내려다봤다. 길버트의 얼굴은 한 줄기 희망을 본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오… 오오!! 저를 구하러 와 주셨군요!!”
감격에 겨운 길버트의 목소리. 그러나 아이젠은 여전히 그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한데 누구신지?”
“…뭐라고?!”
남자는 길버트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소리치더니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통을 벗어 깠다.
그의 온몸에는 칼에 베인 상처가 가득했다. 숫자를 미처 다 세지도 못할 만큼.
“용서 못 해. 용서 못 해!! 이걸 보고도 모른다는 소릴 하진 않겠지? 네가 한 짓이잖아!!”
“내가 언제……. 아.”
아이젠은 그가 생각났다. 정확히는 기억 저편에 자리한 일화가 떠올랐다. 아이젠이 무려 마흔두 개나 상처를 입혀서, 종국에는 가문에서 달아나 버렸다는 그 하수인.
“…혹시 피터 씨 되세요?”
또 업보가 돌아왔구만.
* * *
“보아하니 까먹고 있었나 보군.”
피터의 서슬 퍼런 물음에 아이젠은 말문이 턱 막혔다.
여기선 미안하다고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러나 아이젠은 그사이 피터가 타고 온 말에 시선을 빼앗겼다.
“…말이.”
“뭐?”
“좋은 말이네. 명마야.”
실제로 그랬다. 피터라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위엄 넘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얼핏 교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말을 보며 아이젠은 생각했다.
‘저걸로 모니카를 실어 보내야겠다.’
모니카는 해독하긴 했지만, 어쨌든 한번 독에 중독된 몸이므로 의원의 진찰을 받아야 마땅했다. 말이 없는 상황이라 모니카를 업고 북해 밖으로 나가야 하나 싶었는데, 말이 있다면 과정이 한결 수월할 것이었다.
한편 피터는 이마에 빡 핏줄이 돋았다.
“지금, 날 보고 하는 말이 고작 그거냐? 좋은 말이라고?”
“…….”
아이젠이 전생을 각성하기 전 저지른 가장 큰 업보가 있다면, 그건 바로 주변인들을 지나치게 막 대했다는 것이었다. 피터도 그 당사자 중 하나였다. 그의 몸에 나 있는 마흔두 개의 상처는 수술로도 덮을 수 없을 만큼 진했다.
피터는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자신의 오른쪽 뺨에 나 있는 베인 상처를 가리켰다.
“아이젠. 이 상처를 기억하나?”
“아니. 기억 안 나.”
아이젠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피터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괴롭혔는지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전생을 각성하기 전 아이젠에게 피터는 그냥 장난감이었을 테니까. 기억조차 제대로 할 필요 없을 만큼.
피터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네가… 네가 심심풀이로 벤 상처다. 내 몸에 이런 상처가 마흔한 개가 더 있어. 그런데, 그런데도! 너는 사과 한마디 없군.”
그냥 미안하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그러지 않았다. 철없을 때 한 잘못이니까? 그런 말로 잘못을 회피하기 위해서?
아니, 아니다. 피터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허울뿐인 사과를 해 봐야 피해자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뿐이었다.
“내가 너에게 뭘 바랐는지 아나? 사과 한마디다. 그땐 미안했다는, 진심이 담긴 사과 한마디. 난 오직 그걸 위해서 나 자신을 버리고 남의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내 삶보다 널 향한 복수를 선택한 거다! 그런데… 역시 괜한 기대였나 보군.”
아이젠은 힐끔, 바닥에 엎어져 있는 길버트를 쳐다봤다. 그는 이 대화를 따라갈 수 없는 듯 어리둥절해하는 얼굴이었다.
아이젠이 말했다.
“하나 묻지. 피터 너는 길버트가 말한 ‘대장’ 블렌하임과 한패냐?”
“그렇다. 자진해서 그의 밑으로 들어갔지.”
“피터. 난 네게 진심을 담아 사과할 수 없어. 미안하지 않으니까. 그 점에 대해선 미안하다.”
아이젠의 말에 피터는 분노를 씹어 삼키는 듯한 얼굴로 눈동자를 붉게 물들였다. 아이젠이 말을 이었다.
“대신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원하는 게 뭐지?”
“나와… 나와 정식으로 결투해라. 그건 진심으로 할 수 있겠지?”
“…그래.”
“자세를 잡아라, 아이젠.”
기꺼이.
아이젠은 크게 심호흡했다. 상대는 이강철이 아이젠의 몸에 들어온 이후 제일 격렬하게 진심을 담아 싸우길 바라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이젠도 그의 기대에 응해 줘야 했다. 어설프게 결투에 임하는 것은 적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전장에도 예우가 있다면 지금이 바로 그것을 지켜야 할 때였다.
‘무혈신공.’
휘오오오. 바람이 눈보라를 저으며 휘돌았다. 끈적한 바람에 이끌려 일대의 눈발이 잦아들었다.
아이젠은 바람에 몸을 얹고 결사신권의 자세를 잡았다. 사선으로 서서 오른발을 왼발보다 앞에 두고, 마찬가지로 오른손을 왼손보다 앞에 둔다. 두 주먹은 눈앞의 적을 최단 거리로 타격할 수 있는 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눈동자 색이 진해졌다. 피터는 자못 놀랐지만 티 내지 않았다.
‘뭐지? 이게… 아이젠?’
그가 마지막으로 본 아이젠은 젓가락 같은 사내였다. 그런데 지금의 아이젠은 온몸에 근육이 섬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눈 때문에 시야가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보라가 걷히며 그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록 몇 년 전 일이라곤 해도 아이젠의 뼈밖에 남지 않은 체형을 기억하고 있던 피터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난… 지금의 몸을 만드는 데 2년이나 걸렸는데.’
피터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아니다. 죽도록 노력했다! 하루에 운동을 네 시간씩 해서 몸을 만들었고, 블렌하임의 밑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그의 권법도 편린이나마 따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무색해 보일 만큼 아이젠의 몸은 놀라웠다. 주먹 쥔 손에 보이는 작은 근육 하나하나가 그의 체지방이 제로에 수렴함을 알리는 듯 고래고래 외치고 있었다. ‘너 같은 건 내 발끝에도 못 미쳐’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감히!’
뿌득! 피터는 이를 갈았다.
원래대로라면 그간 연마한 이 몸으로 그냥 찍어 누를 계획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피터는 옷 안주머니에서 흉악한 검은빛을 띠는 작은 알약을 꺼내 들었다. 아모스였다.
“이 알약만 있으면! 너 따위는 상대도 안 돼, 이 귀족가에서 태어난 게 전부인 새끼야!”
까득!
피터가 아모스를 씹어 삼켰다. 그러나 아이젠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는 그저, 눈앞의 피터를 싸늘하게 한기 어린 눈빛으로 깔볼 뿐이었다.
“네가 선택한 복수라는 게 고작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그런 일그러진 복수심에 응당한 대가를 치러 줄 생각은 없었다.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