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 * *
영설산 인근 눈 언덕. 하인 두 명의 인도에 따라 말에 탄 채 눈밭 위를 지나던 바네사는 오랜만에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소가주전이라니.’
몇 년 전, 아니, 몇 주 전만 해도 바네사는 소가주전에 대해선 꿈도 꾸지 않았다. 그야 당연했다. 누가 봐도 첫째 공자인 게오르크의 우승이 자명하기도 했고, 더불어 그녀는 여인이었으니까. 어리석게 도전했다가 망신을 당할 바에야 그냥 조용히 가문의 온실 속 화초로 자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달 전 아이젠이 바네사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그래서 바네사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자신이 어리고 비겁하기만 했던 아이젠에게서 조언을 받아 영설산까지 오게 될 줄은 설마하니 꿈에도 몰랐던 바네사였다.
‘후훗.’
재밌는 일이었다. 우승이야 당연히 게오르크가 하겠지만, 어쩌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바네사였다. 어찌 됐든 그녀 스스로도 그린우드 직계의 둘째 공자니까.
“다들 잠깐 멈추자.”
바네사는 손을 들어 하인들을 멈춰 세운 뒤 말에서 내려 지도를 살폈다.
“지도에 따르면… 이 근처 어딘가에 만년한철이 매장된 광산이 있을 거야.”
“예, 공자님.”
“오늘은 여기서 천막을 칠까. 다들 조금만 고생하자?”
“예!”
그렇게 하인들이 천막을 치는 사이, 바네사는 멀찌감치 떨어져 챙겨 온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다가.
‘응?’
서릿바람의 방향이 잠시 뒤틀리는 것을 피부로 느끼곤 곧장 참철검을 빼 들었다.
챙!
그녀의 검이 공중에서 무언가와 부딪쳤다.
“바, 바네사 공자님!”
“괜찮아. 다들 물러서 있어.”
바네사는 자신의 검과 맞닿아 있는 것의 형체를 확인하느라 시간을 다소 허비했다.
그건 미세한 정도의 각도로 날이 꺾인 쿠크리 나이프였다. 쿠크리 나이프를 들고 있는 것은 얼굴 왼쪽이 일그러진,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오호라. 지금까지 중 내 습격을 막아 낸 건 네가 처음이야.”
지금까지 중? 마치 바네사 이외에 다른 누군가도 다수 습격을 했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습격이 모두 성공했다는 것처럼도 들렸다.
“누구시죠? 돈을 노리는 거라면 그냥 드릴 테니…….”
“얘기가 빨라서 좋군. 하지만 돈은 필요 없다. 난 공물을 원해.”
“공물?”
다짜고짜 이상한 걸 요구한다 싶었지만, 애초에 다짜고짜 쿠크리 나이프부터 휘둘렀으니 남자의 사고방식이 정상은 아니리라 판단하는 바네사였다.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 원하죠? 원하는 걸 말하면 줄게요. 그 대신 얌전히 떠나 준다면.”
“어금니.”
“뭐라고요?”
“어금니를 내놔. 두 쪽 다.”
그제야 바네사는 남자의 바지 주머니 근처에서 달랑거리는 열쇠고리를 발견했다. 열쇠고리에는 사람의 어금니로 보이는 것이 빼곡히 꿰여 있었다.
‘뭐지? 정신 이상자인가?’
그때 하인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고, 공자님! 저 사람 블렌하임이에요! 수배서에서 얼굴을 봤어요!”
“블렌하임이라면…….”
소문으로는 들었다. 귀족들의 멱을 따고 다닌다는 신출귀몰한 귀신. 하필 이런 산속에서 현상 수배범을 만날 줄은 몰랐던 바네사였다.
“…어금니는 드릴 수 없겠는데요?”
바네사는 검을 쥔 손에 오러를 흘려 넣었다.
블렌하임은 씨익 웃으며 쿠크리 나이프를 쥐지 않은 손으로 휘파람을 휘익 불었다.
우르르르―
그러자 사박사박 서릿발을 밟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얼핏 헤아리기를 그 수가 족히 이십은 넘을 것 같았다.
“괜찮아, 어금니 안 줘도. 뺏어 가면 되니까. 애초에 살려 보낼 생각도 없었고. 너희 다.”
‘…제길.’
이런 재난 상황 속에서 도적 떼에게 습격을 당하다니.
바네사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고자 머리를 굴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녀는 우선 시간을 벌기 위해 입을 열었다.
“블렌하임, 당신이 원하는 게 귀족인 나의 목이라면… 내 하인들은 죄가 없으니 보내 주세요.”
“공자님!”
“다들 조용히 해. 살 사람은 살아야지.”
“하지만 저희가 어떻게 감히 공자님을 버리고 간단 말입니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블렌하임이 갑자기 콧방귀를 뀌더니 깔깔 웃었다.
“푸하핫! 뭐냐. 귀족과 노예 사이에 끈끈한 우정이라도 있는 건가? 웃기지도 않는 위선을 떠는군.”
“하인들은 보내 주세요. 블렌하임 씨는 귀족의 목만 자른다고 들었어요.”
“소문이 와전됐나 본데, 난 차별 없는 평등주의자라서 말이다.”
블렌하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귀족은 물론이고, 그들 옆에서 알랑방귀를 뀌는 노예들도! 내겐 모두 처형 대상이다. 감히 내가 너 따위 것을 대가로 누군가를 곱게 살려서 보내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라!”
쑤욱!
콱!
“……?!”
바네사의 목이 붙잡혔다. 어느샌가 다가온 블렌하임의 손이 그녀의 목을 잡아챈 것이었다. 너무 빨라서 바네사는 미처 그 모습을 보지도 못했다.
“큭!”
“멍청한 년 같으니. 이 영설산에 온 것을 후회해라. 설마 여자 주제에 그 몸으로 소가주전에서 이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거냐?”
이곳 영설산에서 소가주전 예선이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지?
“이럴 때 보면 귀족들은 참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명체란 말씀이야. 자, 이제 그만 어금니 내놔!”
그렇게 블렌하임의 손이 바네사의 입 안을 향해 덤벼들어 올 때.
츠팟!
“윽?!”
바네사는 팔을 안으로 굽혀 참철검을 꺾어서는 블렌하임의 손등을 베었다.
후드득― 블렌하임의 피가 눈밭을 붉게 물들였다.
“여자라고 얕보면 곤란한데?”
바네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X발 년이! 곱게 죽여 주려 했더니 감히 공격을 해?! 네년은 그냥 죽이지 않겠다. 네가 보는 앞에서 네 하인들을 모조리 참살한 후 죽여 달라고 빌 때까지 괴롭혀 주지!!”
“휴우.”
바네사는 블렌하임의 도발을 무시하고 심호흡했다. 숨결을 다스리며 2성 연풍의 오러를 참철검에 실었다.
‘오늘의 운세는…….’
그러면서 그녀는 오러 점을 쳤다. 아이젠의 오러 점은 봐 줬지만 자신의 운세는 아직 점치지 않은 바네사였다.
‘난 오늘 죽지 않아.’
오러 점의 결과 바네사는 오늘 죽지 않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만약 오러 점이 백 퍼센트의 적중률을 자랑한다면 바네사는 오늘 죽지 않을 것이었다.
현재 바네사의 참철검술 경지는, 지난 한 달간 아이젠과 대련을 거치며 3성 상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참철검술은 3성 상위부터 사용자의 고유한 단련법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간의 성과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야.”
바네사는 3성 상위를 달성하면서 몇 가지 잡기를 연마했다. 오늘이 바로 그걸 시험해 볼 첫 기회.
바네사의 눈동자는 어느새 그 언젠가처럼 뱀같이 날카롭게 변모해 있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블렌하임을 향해 참철검을 휘둘렀다.
쐐액―!
* * *
“헉, 헉…….”
눈나무 숲 사이로 몸을 숨기며 달리던 길버트는 헐떡거리는 숨을 참기가 힘들었다. 하필이면 알약을 통해 몸집도 비대하게 키운 상태라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허억!”
어느새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아이젠의 인영을 보며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이젠은 썩은 동태처럼 죽은 눈빛으로 길버트를 ‘내려다봤다’. 분명 길버트가 아이젠보다 훨씬 키가 큰데도.
“왜 도망치지?”
“허억, 허억. 너, 너 대체 뭐야. 사람 맞아?!”
“묻는 말에나 대답해. 그걸 내버려 두고 왜 혼자 도망치지?”
“그거라니…….”
길버트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치다 발치에 걸리는 무언가 위로 우당탕 넘어졌다. 그것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버린 그의 동료 메르헨이었다.
“으, 으아아악!”
“왜 그렇게 놀라나. 남의 목숨을 해치려면 자기 목숨도 거둬질 수 있다는 생각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흐, 흐으윽……. 이, 이건 말도 안 돼…….”
메르헨의 시체가 대체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이제 와 말이지만 길버트와 메르헨은 쌍둥이처럼 짝을 이뤄 싸우는 데에 특화된 하나의 ‘팀’이었다. 그러나 아이젠을 얕봤기 때문일까. 괜히 따로따로 덤비다가 메르헨이 먼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둘이서 덤볐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둘이서 덤볐다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생각하나?”
“……?!”
생각을 읽혔다? 아니, 그냥 독심술에 불과한가? 알 수 없었다. 길버트는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깨비에라도 홀린 건지 뭔지, 불과 몇 분 전 아이젠이 보여 줬던 모습은 인간의 그것이라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형상이었다.
“나를 주, 죽일 거냐?”
“네 동료가 혼자 쓸쓸할 거 아니냐.”
“난… 난 그냥 우리 대장님께 너를 데려오라는 임무를 하달받았을 뿐이야.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여!”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다고 얌전히 말했어야지. 독화살을 쏜 건 너희 실수였다. 내가 독을 좀 싫어해서 말이야.”
팟!
길버트가 눈을 깜빡하자 아이젠은 어느새 길버트의 코앞에 서 있었다. 길버트는 넘어진 자세 그대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온몸이 밀랍에 싸인 것처럼 굳어 버린 것 같았다.
쉬이이…….
결국, 길버트는 오줌을 지리고 말았다.
“사, 살려 주십시오…….”
“걱정 마라. 당장은 살려 둘 테니까.”
아이젠은 고요히 손을 뻗었다. 얼굴 옆까지 그의 손이 다가왔음에도 길버트는 미동조차 못 했다.
아이젠은 길버트의 품 안에서 알약이 담긴 작은 통을 꺼내 쥐었다. 그 안에 담긴 것들은 검은색 알약이었다. 자세히 보니 알약마다 미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AMOS]
“아모스. 이게 이 알약의 이름인가?”
“그, 그렇습니다…….”
“어디서 났지?”
“저도 모릅니다. 저희 대장이 어디서 얻어 온 걸 배급할 뿐이라서…….”
“그럼 넌 아는 게 없단 말이네. 이제 필요 없어졌다. 죽어.”
“자, 잠깐만요!!”
멈칫― 아이젠의 손이 길버트의 목까지 갔다가 멈췄다. 길버트가 조금이라도 늦게 외쳤다면 그의 목은 이미 눈밭 위에 나뒹굴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길버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지? 할 말 있으면 빨리해.”
“저는, 저는 잘은 모르지만, 저희 대장도 누군가에게서 이 알약을 대량으로 구매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구매해? 그럼 판매책이 있다는 소린데.”
“예. 잘은 모르지만 빼빼 마르고 무슨 가면 같은 걸 썼다고…….”
인상착의가 카인이 말한 그놈이었다.
아이젠은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 길버트에게 그 뒷면을 내밀었다. 그리고 박살편으로 길버트의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잘랐다.
싹둑!
“끄아아아아악!!”
“네가 알고 있는 걸 전부 써라. 그동안은 살려 둘 테니까. 손이 멈추면 죽는다.”
“으, 으흐윽…….”
길버트에겐 아파하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피가 질질 흐르는 새끼손가락의 절단면으로, 지도 뒷면에 자신이 아는 정보를 모조리 적기 시작했다.
길버트는 글자를 최대한 천천히 적었다. 뇌 속에 있는 정보를 최대한 끄집어냈다. 조금이라도, 몇 초라도 더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나 길버트의 손이 멈추는 데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다 적었나 보군. 좀 볼까?”
“아, 아닙니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제발…….”
팟. 아이젠은 길버트에게서 지도를 뺏어 들고 내용을 읽었다. 덜덜 떨면서 쓴 글이라 알아보기 쉽지 않았지만 대충 내용은 파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