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아이젠의 뒤에 있는 것은 말 위에 탄 한스와 그를 수행하는 두 하수인이었다. 한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아이젠 쪽으로 다가왔다.
“후후. 겁먹고 꽁무니를 뺄 줄 알았더니, 정말로 왔구나, 아이젠.”
“꽁무니요? 제가요? 설마요.”
“흥! 설마 정말로 네깟 놈이 소가주전에서 우승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소가주 자리는 누가 뭐래도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의 것이다! 아이젠 너 같은 창부 핏줄이 가문을 잇는다면 망신이야, 망신!”
이건 또 어디서 뭘 주워듣고 온 거야.
당연한 말이지만 아이젠의 어머니는 창부가 아니었다. 신분이 높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젠트리 출신일진대. 가짜 뉴스에 속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왜 그렇게 고깝게 보는 거지? 이 형님에게 대들기라도 할 셈이냐? 위아래도 없는 서자 녀석.”
그 말을 듣고 아이젠은 한스를 한 대 때려 줄까 싶었지만, 벌써부터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겠다 싶기도 해 주먹을 거뒀다.
“한스 공자님. 소가주 자리가 어차피 게오르크 공자님 거라면, 공자님은 굳이 왜 소가주전에 참가하시는 건데요?”
“하! 그야 당연히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을 보좌하기 위해서지! 생각 안 하고 멍청한 소리부터 내뱉는 건 여전하구나, 아이젠! 말을 할 때는 머리를 좀 거쳐서 하란 말이다. 알아들어?”
아니, 그냥 한 대 때리고 말까? 기절하면 입은 조용해질 거 아냐.
얜 근데 진짜 기억 상실이 맞나 보다. 한 달 하고 좀 전에 나한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벌써 휘발되어 사라지고 없는 게 아닌 이상 이런 개같은 말투를 유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네……. 힘내세요.”
더 상대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해 아이젠은 말 머리를 돌렸다. 한스는 더 따지고 들려 했지만 운전 미숙으로 말이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고 말았다.
“으악, 빨리 고삐를 잡아! 너희가 안 잡으니까 말이 딴 데로 새잖아!”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이젠으로서는 밑에 있는 부하들이 참 안됐다 싶었다.
뒤이어 게오르크와 바네사도 각자의 말에 탄 채 대저택 입구 앞에 모였다.
바네사가 미소 띤 얼굴로 아이젠에게 다가섰다.
“아이젠.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네?”
“그러게요, 둘째 공자님.”
“어때. 떨리진 않니?”
“글쎄요. 일단은 아닌데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손 좀 줘 봐.”
또 시작이군.
아이젠은 귀찮다는 걸 티 내며 한숨을 푹푹 쉬었지만 바네사는 내민 손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릴없이 아이젠은 오른손을 내밀었다.
“오러를 써 보렴.”
“예, 예.”
아이젠은 바네사의 요구대로 오른손 손바닥 위에 내공을 흘려 넣었다. 바네사는 그 위에 제 손을 올려 눈을 감고 내공의 흐름을 파악했다.
“흐음. 오늘따라 오러가 영 불안불안한걸?”
“그럴 리가.”
“평소보다 따뜻함이 적고 반대로 차가운 감이 과해. 북해 초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거야. 긴장 늦추지 말고, 항상 태세를 가다듬는 걸 잊지 마.”
“알겠어요.”
이걸 일명 ‘오러 점’이라 한다고 했다. 사람의 오러는 날마다, 또 기분마다 다른 속성을 내는데 그럴 때 그 오러의 흐름을 느끼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점치는 것이었다. 아이젠의 생각에는 당연히 사이비였지만, 바네사는 꽤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그만 좀 놓으시죠.”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게오르크가 몰래 제 말과 함께 다가왔다.
“아니, 두 사람, 언제 이렇게 친해졌지?”
“친해지다뇨. 남매지간에 안부 인사를 주고받을 뿐인걸요.”
“하하.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던 두 사람이 이렇게 친해지다니. 가주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분명 기뻐하실 거다.”
가주가? 그럴 리가.
아이젠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 무감정해 보이는 냉혈한은 소가주전에서 한 사람만 남기고 다 죽어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것 같았다.
“어떠냐, 아이젠. 영설산까지 가는 길이 멀고 험한데, 이 형과 함께 가겠느냐?”
“대단히 영광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1초라도 고민 좀 해 보고 답하지 그러느냐.”
“고민해 봤는데 사양하겠습니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당신이랑 동행하라고? 미쳤냐?
‘당신이 내 독살 기도의 주범일지도 모르는데.’
물론 아이젠은 독 따위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누군가와 동행하는 것이 귀찮을 뿐.
“음? 아이젠, 넌 하수인을 한 마리만 데려가려는 거냐?”
한 ‘마리’. 이따금 튀어나오는 게오르크의 이런 인간 멸시적인 표현은 언뜻 너그러워 보이는 그의 성정이 실제로는 심연에 도사리는 괴물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독살 미수 후보로 가장 유력한 건 역시 이 게오르크 첫째 공자였다.
아이젠은 태연한 척 말했다.
“네, 뭐.”
“여정이 험난할 텐데.”
“괜찮습니다. 둘이나 데려가면 번거롭기도 하고.”
“하하, 그래?”
사실 아이젠은 모니카도 데려갈 생각이 없었는데, 모니카가 소가주전에서 결사코 그를 수행해야겠다기에 어쩔 수 없이 허락하고 말았다.
‘가는 길도 험난한데 왜 따라오겠다는 거야.’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대저택의 시곗바늘이 정오를 가리켰다.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바네사는 아이젠에게 간단한 인사말을 남긴 뒤 가장 먼저 말을 몰아 사라졌다.
“흥. 저런 머저리랑 같이 소가주전에 참가해야 한다니, 정말 수치스럽군.”
그 뒤를 따라 한스가 중얼거리며 급하게 사라졌고, 게오르크는 별다른 말 없이 떠나갔다.
모니카와 단둘이 남은 아이젠은 천천히 말의 고삐를 잡았다. 굳이 빨리 갈 필요도 없었거니와, 늦게 출발한 또 다른 이유로는…….
“제이슨.”
쉭!
아이젠의 눈앞에 검은 형상이 떨어졌다. 갑자기 나타난 제이슨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자 모니카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누, 누구……!”
“걱정 마, 모니카. 내 사람이다.”
“도, 도련님의 사람이요?”
“제이슨.”
“예, 공자님.”
아이젠은 독살 미수범에게 제이슨을 붙이고자 했다. 제이슨은 흑기사. 제대로 마음먹는다면 아이젠조차 제이슨의 미행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자님.”
“그래, 잘 지냈고?”
“예.”
제이슨은 은근히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아이젠이 물었다.
“제이슨. 네 주인을 발고할 순 없어도, 네 주인의 뒤에 붙어 다니는 건 가능하겠지?”
“……! 그렇습니다.”
“들키지 않게 추격해라. 그리고 네 주인이 혼자 은밀히 남는 상황이 오면 내게 돌아와 보고해.”
“어쩌시려는 겁니까?”
“어쩌긴.”
나한테 시비 건 놈을 살려 둘 리가 있겠냐?
“이 기회에 대가리를 부숴 놔야지.”
“…알겠습니다. 그동안 무탈하시길.”
쉭! 제이슨이 다시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
‘난 쉽게 용서해 주는 대인배가 아니라서 말이야.’
모니카가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아이젠을 쳐다봤으나, 아이젠은 해사하게 눈웃음만 지으며 모니카를 쳐다보았다.
“자, 이제 출발해 볼까, 모니카?”
* * *
달가닥달가닥.
아이젠이 지난 이틀 내내 말을 몰며 한 생각은, 말이란 상당히 편한 이동 수단이란 것이었다. 말의 옆구리에 늘어뜨린 등자로 발을 간단하게 고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 덕분에 아이젠은 허벅지에 힘을 줄 필요가 없어 힘이 분산되는 일 없이 말에 탄 채로 내공 수련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후우.”
아이젠은 무혈신공의 호흡을 순환하듯 들이마시고 내뱉길 반복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말 위에서 거의 정지한 것처럼 앉아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 도련님…….”
그런데 그 무혈신공이 방금 깨졌다. 모니카가 말을 걸어서.
아이젠은 호흡을 멈췄다. 그런 후 이마에 핏줄을 세우고 뒤에 앉아 있는 모니카를 돌아봤다. 쓸데없는 걸로 말을 건 거면 진짜 패 버릴 테다.
“또 무슨 일이지, 모니카?”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말 위에 타는 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어찌 감히 도련님이 모시는 말에 같이 탄단 말이에요! 불경한 일이에요!”
모니카는 거의 울 것처럼 말했다.
사실이 그렇긴 했다. 주인이 말을 타면 하인은 걷는 것이 당연한 상식. 그러나 아이젠에게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말에 자리도 남는데 하인을 굳이 걷게 할 이유가 뭔데? 다리만 아프게.
아이젠은 모니카를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너 그 말 여섯 시간 전에도 했고, 스물여덟 시간 전에도 했고, 출발 전에도 했다. 내가 한 번만 더 말하면 떨구고 간다고 경고했어, 안 했어?”
“겨, 경고하시긴 했는데요……. 그나저나 그걸 다 세고 계셨어요?”
“안 세고 배겨? 진짜 그냥 바닥에 던져 버리고 가기 전에 지도나 잘 봐.”
직접 말을 모는 것은 아이젠이었지만, 영설산으로 가는 길은 모니카가 헤아리고 있었다. 길잡이 역할까지 했다간 아이젠은 무혈신공의 운공에 집중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감히 하인이…….”
“아, 닥쳐, 좀! 내가 그냥 마냥 조용히 있는 걸로 보여? 앉아서 말만 타고 가니까 한량 도련님이 또 넋 놓고 가는구나 싶지? 아니야. 난 앉아서도 계속 수련을 하고 있는 거고, 호흡을 통해 계속 운공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네가 정말로 나를 위하는 하수인이라면 내가 하는 행동을 의심하지 말고 믿고 따라와 줬으면 좋겠다. 어떻게 생각하니? 그렇게 해야겠지?”
“넵…….”
한 호흡에 여러 말을 뱉어 내는 아이젠의 모습에 결국 모니카는 입을 꾹 닫았다.
모니카는 여전히 눈앞의 도련님이 낯설었다. 그는 사람이 좋아진 것은 확실했다. 아닌 척하면서 결국에는 하인에 불과한 자신을 계속 위해 주고 있으니.
몇 달 전까지 보였던 그 망나니 같던 성향은 뒷간에다 쏟아 버렸는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피터의 몸에 칼로 상처를 냈던 때의 모습은 더 이상 보여 주지 않았다.
그래도 이렇게 말까지 같이 타는 건 모니카에겐 몹시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암만 생각해도 하인 된 자의 도리 같지 않았다. 그래서 모니카는 길잡이 역할이라도 제대로 해내고자 지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
그때 모니카의 콧잔등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그건 새하얀 진눈깨비였다.
“도련님.”
“어.”
아이젠도 손등에 떨어진 진눈깨비를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싸락눈이 솔솔 내리고 있었다. 말은 놀랐는지 히힝―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또다시 무혈신공의 운공이 깨졌다.
‘지하 감옥에 있을 때가 좋았어.’
적어도 거기엔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없었는데. 물론 지하 감옥 안에만 있으면 실전 수련치를 쌓는 방법이 극히 제한되니 나온 게 당연히 더 좋지만 말이다.
‘생사경(生死境).’
언제쯤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무혈신공 3성 상위에 다다랐어도 불안감은 이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젠은 새하얀 눈을 보며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자. 지금 수준으로도 충분히 앞서가고 있는 거니까.”
“네? 도련님, 뭐라고 하셨어요?”
“너 귀가 왜 이렇게 좋아?”
혼잣말로 한 건데 모니카는 참 잘도 주워들었다.
모니카는 제 가슴을 팡팡 쳤다.
“그야 도련님을 모시는 하인이니까요!”
“…소름 끼친다.”
“왜요…….”
“아냐. 그냥 헛소리한 거야. 한여름인데 눈이 다 오네?”
“네에. 북해에 가까워졌다는 뜻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