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 짐승 같은 녀석들 】
눈앞으로 날아드는 오러 검기. 제아무리 아이젠이라도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는 그것을 막아 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박살로 막아 내자니 숫자가 제법 많고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꾸욱!
그래서 아이젠은 단전에서 끌어낸 내공을 주먹에 꾹 눌러 담았다. 주먹에 담긴 내공은 그의 팔뚝과 어깨를 지나 삼각근과 가시 위근의 근섬유 사이로 스며들었다.
‘이 몸으로는 처음 써 보는걸.’
훗.
미소 지은 아이젠은 무혈신공 3성의 힘을 손등에 싣고 주먹을 휘둘렀다.
‘결사신권 3성, 권왕백무(拳王百舞: 권왕의 춤사위는 백을 넘는다).’
파앙―!
소리는 하나였다.
쉬익!
바람이 상급반을 스쳤다. 소리는 하나, 그러나 아이젠의 몸에서 나온 것은 ‘일격’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중 조금 전 아이젠의 몸에서 나온 공격을 전부 헤아릴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사울 정도밖에 없었다. 그것은 글자 그대로 ‘백 번의 권격’!
파스스스스스―!
아이젠의 권왕백무에 맞닿은 바네사의 오러 검기는, 그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뭐야?”
“바, 방금 봤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누구 본 사람?”
“오러 검기가…….”
“바네사 공자님이 실수하신 건가?”
“중간에 오러를 거두셨나 봐.”
“내가 제대로 봤어. 바네사 공자님이 중간에 오러 검기를 없애셨어.”
조금 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지 못하는 생도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중간에 오러 검기를 없앴다고? 그럴 리가 있나. 바네사는 그런 적이 없었다. 오러를 거둔다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으니까. 바네사는 멍청한 눈빛으로 아이젠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제야 어깨가 결린 게 풀렸는지 아이젠이 팔을 살살 돌리며 말했다.
“자, 마저 하실까요?”
그러나 바네사는 허망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졌어.”
허무한 패배 인정이었다. 덕분에 아이젠은 각 잡고 들고 있던 팔을 허망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다.
뭐야, 이대로 끝?
“아니… 왜 갑자기 불계패 선언을?”
“왜냐니? 대련에서 오러를 썼잖아. 규정 위반이야. 그니까 내가 졌어.”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오러를 쓰든 안 쓰든 아이젠에게는 어쨌든 다 같은 하나의 전투였다. 실제로 전쟁터에서 오러를 안 쓸 것도 아니면서 왜 대련에서는 오러를 쓰면 안 된다는 규정을 달아 둔 걸까? 괜히 번잡스럽게.
“오, 오늘 단체 수련의 승자는 아이젠 공자님이시다. 다들 박수.”
멀리 서 있던 사울의 외침 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에도 일말의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쓰러져 있던 상급반 생도들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저마다 손뼉을 쳤는데, 그 소리가 기어들어 갈 듯 작았다.
짝짝짝…….
‘쳇. 아쉽다.’
이렇게까지 하니 결국 아이젠도 결과에 승복할 수밖에 없었다.
바네사가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했다. 아이젠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의아한 마음을 품었다.
‘…….’
아이젠은 결국 아까부터 들었던 의문을 놓지 못하고 그녀에게 말을 던졌다.
“둘째 공자님.”
“말 걸지 말아 줄래? 갑자기 기분이 나빠져서.”
“…그럼 질문 하나만.”
하아. 바네사는 노골적으로 싫다는 눈빛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눈에서 뱀 같던 눈동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만 해.”
“왜 그 실력으로 소가주전에 참가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뭐?”
바네사는 스스로 검술 실력을 연마하기 위해 기사 학교에까지 등교하면서, 정작 가문에서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의지는 없다고 했다. 그건 전장에서 항상 상위 포식자로서 살아온 아이젠에겐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이었다.
뭔가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건가? 사실은 뒤에 숨어 비선 실세를 꿈꾸고 있다거나?
그러나 바네사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당연한 걸 왜 물어? 지금 놀리는 거니?”
“뭐가 당연하고 뭐가 놀리는 건데요?”
“난 여인이잖아. 여인이 어떻게 소가주전에 나가니?”
“……?”
아이젠은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곧 머릿속에 흐릿하게 자리해 있는 또 다른 정보를 통해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린우드 가문은 지난 천 년의 역사 동안 단 한 번도 여인 지도자를 배출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해 여인이 가주가 된 사례가 없었다. 하긴, 현재 시대상으로 보면 그게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지만 아이젠에게는 얘기가 달랐다. 그가 이강철로서 있던 중원 무림에서는 여인의 몸으로도 문파의 높은 직급까지 올라간 이들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그린우드에서는 여성에게도 ‘공자’라는 호칭을 붙이며 차별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젠으로서는 바네사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였다.
“이상한 말씀을 하시네요. 가주가 되는 데 남자 여자가 뭔 상관입니까?”
“뭔 상관이긴, 그야…….”
그 뒤로 할 말이 없어 바네사는 입을 닫았다. 뒷말은 아이젠이 대신 해 주었다.
“센 놈이 대장 먹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봤을 땐 한스보다는 훨씬 우위에 있으신 듯한데. 자신 있으면 나가 보세요, 소가주전.”
“…….”
바네사의 표정이 희미해졌다. 아이젠의 말투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것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뭔가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이었다.
“…센 놈이 대장을 먹는 게 당연한 거라고?”
방금 전 아이젠이 한 말을 똑같이 따라 하며, 바네사는 손톱을 씹었다. 입술 위에 손을 얹고 뭔가를 생각하던 바네사는 반 정도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 * *
오늘 기사 학교 상급반의 수업은 단체 수련으로 끝이 났다. 원래 다음 검술 수업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부상자가 많아 취소된 것이었다.
바네사는 기사 학교 사범실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문을 똑똑 두드려 노크했다. 명패에는 ‘사울’이라는 글귀가 박혀 있었다.
“들어오십시오.”
바네사는 문을 열고 들어가 경건한 표정으로 사울에게 인사했다. 앉아서 책을 읽고 있던 사울은 바네사가 찾아오자 놀란 눈치였다.
“바네사 공자님. 여긴 어쩐 일로……. 오늘 수업은 이미 끝났습니다만.”
“알아요. 따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 말씀이라는 것이 자못 진중하리라는 것을 눈치챈 사울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말씀하시지요.”
“가주님은 지금… 전선에 계시죠?”
가주 테오발트는 현재 리타스나트 공화국과의 교전을 위해 최전방으로 떠나 있었다. 사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럼, 가주님께 말 좀 전해 주시겠어요?”
“말이라면 어떤 말을……?”
바네사는 목소리에서 긴장을 감추고 말했다.
“소가주전에, 저도 나가고 싶어요.”
* * *
퍽!
평상복으로 갈아입던 아이젠은 갑자기 날아든 물건을 피하지 못했다. 정통으로 맞았지만 아프진 않았다. 날아든 물건이 천으로 만든 대련복이었기 때문이었다. 때깔이 고운 걸 보니 새 옷인 게 틀림없었다.
‘어떤 잡놈이.’
누가 던졌나 하고 날아온 쪽을 바라보니, 바네사가 그곳에 서 있었다.
“둘째 공자님?”
“…아이젠.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 말씀하세요.”
아이젠은 눈빛에 담긴 투기를 지웠다. 바네사가 바로 자신을 독살하려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부러 적을 방심시키고자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바네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한 달 뒤 소가주전까지… 할 일 없으면 내 대련 상대나 좀 해 줄래?”
아이젠은 잠시 멍하니 바네사를 쳐다보았다. 바네사는 본인이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시선을 피했다.
‘훗.’
절로 웃음이 나는 아이젠이었다. 이 기사 학교에서는 더 얻어 갈 게 없다고 생각해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건데.
아이젠은 바닥에 떨어진 대련복을 주워 들었다.
“그래요. 대신 오러를 쓰신다면요.”
“오러를?”
“그걸 안 쓰니 영 흥미가 안 나서.”
“대련에서는 오러를 쓰지 않는 게 원칙―”
“그 원칙 좀 어기자고요. 저희 그럴 수 있는 위치 아니에요?”
누가 개망나니 아니랄까 봐, 오만방자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가주가 정한 규율을 누구 멋대로 어기고 한단 말인가.
하지만 바네사로서도 납득이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
“…좋아. 그래. 그렇게 하자.”
* * *
그렇게 한 달 후. 마침내 소가주전 예선전의 날짜가 다가왔다.
‘결사신권, 결자해지.’
후욱!
아이젠은 품 안으로 스며드는 내공을 받아들였다. 그는 어느덧 3성 상위의 경지가 되어 있었다. 지난 한 달간 이뤄 낸 성과였다. 4성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에 아이젠은 침착하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벼운 흥분 상태가 되었다.
‘진도가 빨라.’
당연히 아이젠에겐 좋은 일이었다. 이 속도라면 생사경의 경지까지 만 걸음도 남지 않았을 터. 그게 뭐 빠른 거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전생에 비하면 같은 나이 때에 비해 확실히 빨랐다. 아이젠으로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도련님, 저 왔어요.”
아이젠이 돌아보니 모니카가 말의 고삐를 틀어쥔 채 서 있었다. 아이젠이 탈 말을 손수 데려온 것이었다. 근데…….
‘말 상태가 왜 이래, 이거?’
아이젠의 전마는 살이 뒤룩뒤룩 쪄 얼핏 보면 돼지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전마가 아니라 식용으로 키운 조랑말 느낌이랄까? 말이 맞긴 한 거지, 이거? 당나귀나 노새가 아니라?
모니카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러게 평소에 승마 연습 좀 해 두시지……. 너무 오랜 기간 방치한 바람에 살이 이만큼이나 쪘어요.”
하하. 왜 아닌가 했다. 그조차도 내 업보라는 거지?
자조하며 아이젠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래, 내가 잘못했네. 내가 아주 큰 잘못을 했어! 아이고!”
이곳은 그린우드 공작 가문 대저택의 입구. 오늘은 소가주전의 예선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소가주전 예선의 방식은 지극히 간단했다. 정해진 날짜에, 소가주전에 참가하기로 한 공자가 하수인 최대 둘만을 거느리고 북해 영설산이라는 곳으로 향하면 됐다.
북해에 있는 영설산은 그린우드 가문의 참철검을 제작하는 데 꼭 필요한 만년한철의 광산이 있는 곳. 그곳에서 꼭 자기가 쓸 만큼의 만년한철을 캐내 소가주전 본선이 열리는 땅 그노시스에 도달하면 끝이었다.
그 후 그노시스에 모인 직·방계가 경합을 벌여 소가주를 선발한다. 이보다 더 간단할 수가 없는 규칙이고, 이보다 더 위험할 수가 없는 규칙이었다.
‘영설산에는 만년설의 눈보라가 친다고 했던가?’
만년설, 즉 영원히 녹지 않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곳이 바로 영설산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돌입했다간 쉬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산. 실제로 그간의 소가주전에서 생명의 끈을 놓은 이가 적지 않다 했다.
물론 그 모든 위험 요소는.
‘신난다, 신나. 드디어 집 밖으로 나가 보는구만.’
그저 아이젠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데 일조할 뿐이었지만.
“아이젠! 인마, 내 말 안 들려! 날 무시하는 거냐!”
그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이젠은 말에 탄 채로 뒤를 돌아봤다. 이 몸으로 말을 타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전생에 많이 타 봤기에 그는 말 위에서 능숙하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이젠은 자신을 부른 상대를 향해 반갑게 인사말을 던졌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건강하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