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아이젠의 결사신권은 무혈신공에 바탕을 두어 만들어진 권법이지만 그렇다고 꼭 무혈신공을 필수적으로 사용해야만 쓸 수 있는 건 또 아니었다.
팟!
달려든 아이젠은 바네사의 원 안으로 들어갔다.
‘참철검술 2성, 연공난무!’
파사사삭!
그때 바네사의 목검이 아이젠을 찌를 것처럼 덤벼들었다. 일전에 카인에게서도 본 기술이었다. 다만 카인의 검이 마치 뱀 같았다면, 바네사의 것은 한번 먹이를 물면 놓지 않는 표범 같았다.
표범이 아이젠의 목덜미에 몸을 던졌다.
쿵!
아이젠은 표범의 이빨을 붙잡아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네사의 목검 쥔 손이 반동으로 꺾이며 그녀도 바닥에 엎어졌다. 아이젠은 즉각 그녀의 왼쪽 옆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파앙!
어느새 다시 검을 쥐어 든 바네사가 목검 끝으로 아이젠의 주먹을 막았다.
지잉― 지잉―
바네사의 목검과 아이젠의 손이 공명하듯 울렸다.
“저거 봐!”
“박빙이다.”
“박빙 같은 소리 하네! 네 눈은 장식이냐? 누가 봐도 아이젠 도련님이 밀리고 있잖아.”
“내 눈엔 비등비등한 것 같은데?”
실제로 바네사와 아이젠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비등비등한 힘으로 겨루고 있었다.
‘흐음.’
내공을 쓰지 않았으므로 보통 사람이라면 목검과 주먹이 맞부딪쳤을 때 손뼈가 결딴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 아이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무혈신공은 쓰고 있지 않았지만, 혈관 여기저기 그의 내가기공 수련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이젠의 근육은 다른 사람의 근육보다 높은 밀도로 뭉쳐 있었다. 만약 아이젠이 보통 사람과 같은 크기의 근육을 가졌다면 그의 몸집은 어마어마한 거구였을 것이었다.
턱! 슈웅!
아이젠은 바네사의 목검을 잡고 높이 들어 올렸다. 바네사의 몸은 가벼워 아이젠에게 목검째로 붕 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공중에 뜬 바네사는 영 당황한 눈치가 아니었다.
“멍청하긴. 칼날을 손으로 잡는 사람이 어딨니? 그래서 어디 손이 남아나겠어?”
“전 잡는데요.”
“가정 교육이 덜 됐나 보구나. 하긴, 알려 줄 사람이 없었겠지.”
바네사는 입술을 뒤틀었다.
“그럼 꽉 잡고 있어.”
바네사는 일부러 ‘들려 준’ 것이었다. 어느새 아이젠과 수직으로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힘을 풀어 검과 함께 아이젠에게 떨어져 내렸다.
‘참철검술 2성, 성락(星落: 별이 떨어지다)!’
콰앙―!
바네사의 일격은 묵직했으나 아이젠은 그것을 받아 내지 않았다. 재빨리 손을 놓아 원 밖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피한 것이었다.
“꽤 빠른데, 아이젠?”
그렇게 말하는 바네사는 사실 평정심의 저울이 흔들린 상태였다.
‘이거 대체 뭐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이젠은 그녀에게 빌빌 길 뿐인 어린 망나니 새끼에 불과했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동생. 심지어 다섯째인 에밀보다도 하급으로 쳐줬던 배다른 동생.
그런데 지금은 자신에게 송곳니를 겨누고 있지 않은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단련된 몸과 정신으로.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흠.”
한편 아이젠도 바네사와 마찬가지로 침착한 척했으나 이마에 핏줄이 돋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검을 상대로 회피하다니, 아무리 아이젠이 이제 겨우 3성에 이르렀다지만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바네사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비록 그 경지는 이제 겨우 3성 정도 되는 듯했지만, 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수준은 사울 못지않았다.
“검 좀 쓰시네요.”
“사과할 마음은 좀 들었고?”
“제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병이 있어서.”
“팔다리 어느 한 군데 박살 나는 것보단 혀에 가시가 돋는 게 낫지 않겠니?”
“밥 먹을 때 불편할걸요?”
팟!
아이젠은 다시 한번 바네사에게 달렸다. 이번엔 보법을 쓰지 않고 발을 굴러 달려, 대신 주먹에 좀 더 온전히 힘을 실었다.
‘결사신권, 박살!’
내공을 싣지 않은 아이젠의 주먹이 바네사의 명치를 향해 달려들 때, 바네사는 다시 한번 연공난무를 쓸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아이젠은 반대쪽 주먹을 뻗어 바네사의 목검을 향해 손을 펼쳤다.
“……!”
행여 아이젠에게 목검을 붙잡힐까 바네사는 목검을 살짝 뒤로 뺐고, 그 순간 아이젠이 뻗은 손은 잔상을 남기며 여러 갈래로 펼쳐져서는 바네사를 향해 한 뼘 더 뻗어 갔다.
‘아니?!’
바네사가 처음으로 당황하는 틈을 타, 아이젠은 그녀의 목검을 덥석 붙잡았다. 아이젠과 바네사의 손이 겹쳐 쥐어지자 바네사는 몸을 뒤로 뺄 수가 없었다.
아이젠은 아까부터 힘을 주고 있던 주먹을 바네사에게 내질렀다.
‘박살!’
“크읏!”
순간, 바네사는 몸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목검이 자유로워지는 감각을 느낀 바네사는 아이젠의 주먹을 피해 뒤로 펄쩍 뛰었다.
부웅!
덕분에 아이젠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바네사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땅바닥에 낙법으로 착지해 다시 자세를 잡았다.
“후후.”
그러나 바네사가 바라본 아이젠의 얼굴은 그녀를 한껏 얕보는 얼굴이었다.
“…왜 그렇게 보니?”
“둘째 공자님.”
“뭐.”
“나가셨는데요.”
그제야 바네사는 아이젠의 발밑에 있는 둥근 원을 바라봤다. 바네사는 그곳에 없었다.
“…….”
원 밖으로 나가게 만들면 이긴 것으로 해 준다는 건 다름 아닌 바네사가 내건 조건이었다.
바네사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으음.”
“걱정 마세요, 둘째 공자님.”
아이젠은 손을 털며 원 밖으로 나왔다.
그가 조금 전 바네사에게 사용했던 잔상 기술은 한창 무림에서 날고 구를 때 전장에서 습득한, 말하자면 잡기였다. 이화도의 무혈신공이나 아이젠의 결사신권과는 무관한 기술.
“이렇게 끝나는 건 저도 원치 않으니까.”
오늘 목표로 했던 수련치를 채우려면 아직 멀어서요.
조금 전 사용한 잡기는 단지 바네사를 원 밖으로 빼내기 위해 쓴 술수일 뿐. 이대로 대련을 끝내는 건 희망 사항에 없는 아이젠이었다.
바네사는 경계 자세를 풀고는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러니까, 일부러 날 원 밖으로 빼낸 거다? 내 귀엔 그렇게 들리는데?”
“그렇게 들리셔야 하는 거 맞는데. 그 안에만 계시려 하니까 제대로 대련이 안 되는 것 같아서.”
“호호. 호호호호호호.”
바네사가 또다시 기묘하게 웃었다. 무슨 변방 마녀의 웃음소리 같은 게 들을수록 기분이 거북해졌다. 두성으로 웃는 느낌이랄까? 머리가 울렸다.
바네사는 한순간 웃음을 뚝 그치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완전히 지워 냈다. 그리고 다시 목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나랑 정식 대련을 하고 싶은가 보구나. 아이젠 폰 그린우드, 사랑하는 썩을 동생아.”
아이젠은 신사처럼 한쪽 손을 내밀었다.
“네. 한 수 배워도 될까요?”
“한 수는 무슨. 사양하지 마. 두 수, 세 수도 알려 줄 테니까!”
팟!
그 순간 바네사의 모습이 목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사울 장로가 사용했던 그 기술과 같았다. 이 기술은 참철검술 4성을 달성해야 쓸 수 있는 속동검격. 아직 3성 정도의 경지에 불과한 바네사가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은 아니었다.
‘하지만 귀여운 동생이 제대로 한판 하고 싶다니, 보여 줘야지!’
비록 오러를 쓰지 않는 대련이지만, 바네사는 가진 바 역량을 모두 뽐낼 생각이었다.
아이젠은 사라진 그녀의 모습을 찾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 한순간 눈을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으면 무방비가 되잖니, 아이젠!’
전투 중에 눈을 감다니, 아무리 강하다고 해 봐야 역시 열여섯 살 어린아이에 불과해. 이제 겨우 사춘기를 지난 풋사과 같은 녀석!
바네사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요즘 애들은 근성이 없다니까. 역시 가정 교육이 덜 됐구나, 아이젠!’
바네사는 목검을 빙 둘러, 넓은 부채꼴 모양으로 쫙 펼쳐 뻗었다.
파앗―!
그러나.
턱!
아이젠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곡선의 목검 날 부분을 정확히 파악해 짚어 냈다. 바네사의 목검은 진행을 다 하지도 못하고 아이젠의 손에 쥐여 더 나아갈 힘을 잃었다.
‘박살!’
콰앙!!
“커헉!”
드디어 처음으로, 아이젠의 주먹이 바네사의 얼굴을 강타했다. 얼굴뼈가 함몰되는 듯한 둔탁한 감각을 느끼며 바네사는 뒷걸음쳐 물러났다. 보법 따윌 생각하며 움직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왼손으로 더듬더듬 얼굴을 쓸어 만졌다. 다행히 얼굴은 그 자리에 무사히 있었으나 왼쪽 광대를 기점으로 크게 터져 핏덩이가 뭉쳐 있었다.
“이……!”
바네사는 분노했으나 감정을 삼켰다. 전장에서는 침착한 자만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바네사는 알고 있었다.
‘참철검술, 연공난무!’
슈슈슈슉!
바네사는 다시 목검을 휘둘러 아이젠에게 검격을 쏟아부었다. 다시 또 표범처럼 날아든 바네사의 검은 목검임에도 마치 진검처럼 날을 세운 채였다.
아이젠은 날카롭게 달려드는 표범들의 얼굴을 여유롭게 쳐 냈다.
‘박살 연타.’
퍼버벅!
그러나 흩어지는 표범들의 잔상 사이에서 바네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격 뒤에 숨어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바네사의 기척을 아이젠은 느끼지 못했다.
‘오러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야.’
오러를 쓰지 않았기에 바네사가 아이젠의 시야에 걸리지 않았다. 오러를 쓰지 않는 게 전투에서 강점이 되기도 한다니.
‘참철검술 초식, 중단 베기!’
순간 바네사의 공격이 아이젠의 몸을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가를 듯 뻗어 들어왔다.
턱! 아이젠은 양손으로 바네사의 목검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팡 밀어뜨렸다.
“읏.”
바네사는 그 반동으로 뒤로 넘어질 것처럼 몸이 기우뚱했고, 쓰러지는 그녀의 얼굴 위로 다시금 아이젠의 주먹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박살!’
콰앙!
“크아악!”
바네사는 또다시 기나긴 고통에 휩싸였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래, 이젠 인정할 때가 됐다. 아이젠은 강해졌다.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진 게 분명했다. 바네사 자신보다 월등히 더!
‘이기기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마라!’
바네사는 주워들은 상식으로 전의를 다졌다. 그러나 그녀의 임전 태세가 활활 불타오르기도 전에.
“……?!”
아이젠은 어느새 바네사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실 거리로만 따지면 열 걸음 정도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바네사에게 아이젠의 모습은 팔척장신의 거구처럼 거대해 보였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또는 반사적으로.
‘참철검술 3성, 오러 검기!’
목검에 그린 오러를 둘러, 아이젠을 향해 선명히 날려 보냈다.
쉬이이익―!!
“앗!”
오러가 아이젠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갈 때, 그제야 바네사는 아차 싶었다. 아무리 아이젠이 꾸준히 단련해 왔다고 해도 연풍의 힘이 담긴 그린 오러를 정면으로 받아 낼 수는 없었다. 바네사가 날린 오러 검기에 맞닿았다간 아이젠은 두 동강이 날 것이다!
“피, 피해, 아이젠!”
바네사가 죄책감으로 그렇게 외칠 때, 아이젠은 이미 코앞까지 날아온 오러 검기를, 두 눈으로 똑똑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만있어 봐. 이거 오러 맞지?’
뭐야. 써도 되는 건가? 그럼 나도 내공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