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 콩가루 집안 】
“……?!”
“뭐야, 이건?”
아이젠은 떨떠름한 얼굴로 해럴드를 쳐다봤다.
이런 급습이야 전선에서는 익숙한 것이니 놀랄 것도 없었다. 아이젠이 당황한 건 해럴드의 목검에서 느껴지는 묵직함 때문이었다. 무게로만 보자면 다른 목검들과 별반 다를 바 없지만… 은근하게 느껴지는 이 떨림은, 철의 강도였다.
“목검 안에 철심을 박았나?”
“……!”
해럴드가 놀라 아무 말도 못 하자 아이젠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아주 느닷없는 놈이네.”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철심이라니!”
“반응이 늦다, 이 새끼야.”
결사신권, 박살지!
파박!
아이젠은 곧바로 해럴드의 목검의 결을 따라 박살지를 먹였다. 물론 내공을 담은 것은 아니었다. 대련에서는 오러를 쓰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해럴드의 목검은 마치 송판 쪼개지듯 쩍 하고 갈라졌다.
“헉?!”
그 안에서 드러난 건 지름 1cm 정도의 철심 원통이었다.
“이래도 아니라고?”
“…이, 이건 승자의 방식입니다! 아이젠 도련님은 전쟁을 경험해 본 적이 없으셔서 모르시겠지만, 전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편법이라도 쓰지 않는 한 살아남기 힘든 법이라고요! 아시겠습니까?! 새겨들으십시오!”
편법? 그래, 중원 무림에도 그런 걸 쓰는 놈들이 분명 있었다. 그런 걸로 오래 살아남는 녀석도 적지 않았고. 하지만.
“야, 너 생각을 좀 해 봐라. 난 주먹을 써서 싸우는데, 편법이랑은 거리감이 좀 있어 보이지 않니? 네가 그런 말을 한들 내가 아 그렇구나, 할 것 같아?”
“…….”
“그래, 저열하게 싸우는 것도 난 인정한다. 그것도 하나의 싸움 방식이라고 봐.”
“그럼!”
“근데, 그럼 똑같은 방식으로 당할 각오도 해야 하는 거겠지?”
“…뭐라고요?”
“그게 승자의 방식이라고 했나?”
아이젠, 아니, 이강철이야말로 언제나 승자였다. 전장에서 패배해 본 경험 따윈 없는 사람. 그게 바로 아이젠이었다.
“진짜 승자의 방식을 알려 주마. 가슴에 새겨라. ‘철심으로 흥한 자, 철심으로 망한다’.”
“그게 무슨 소리―”
‘결사신권…….’
아이젠은 해럴드의 뒷말을 무시하고 주먹에 힘을 담았다. 그리고 손바닥을 쫙 펴서.
‘박살편(撲殺鞭)!’
손날로 목검의 철심 끝을 타격했다.
휘익―
아이젠의 손은 마치 채찍처럼 목검에 가 닿았고.
찰싹! 떠엉―!
그러자 마치 칼에 잘린 것처럼 철심이 떨어져 나왔다.
“아니?!”
해럴드는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손날로 저런 힘을? 숙달되지 않은 검사라면 참철검으로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아이젠은 아랑곳없이 공중에 붕 뜬 철심을 반대쪽 손으로 잡았다.
‘박살!’
그런 후 철심의 끝 쪽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철심은 지렛대의 원리로 반대쪽이 붕 떠서.
“허억?!”
콰앙!
해럴드의 턱을 정통으로 맞혔다.
끄드드득.
해럴드의 턱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뒤틀렸다. 해럴드는 자신의 턱으로 철심이 날아드는 걸 알았지만 도무지 막을 틈이 없었다.
“꺼, 꺼어억……!!”
해럴드는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는 핏물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턱을 맞은 거 맞지?
정상적인 힘으로 이런 위력을 낼 순 없었다. 아이젠은 대련의 규칙을 어기고 오러를 쓴 게 분명했다.
“커헉! 오, 오러르 쓰다니, 비거하시니다!!”
“말이 줄줄 샌다. 똑바로 말해. 잘 안 들리는데, 뭐라고?”
“가히 대려에서 오러르 쓰다니……. 으으으으!!”
정작 해럴드 그 자신도 오러를 쓴 처지였지만 본인이 저지른 잘못은 기억조차 못 하는 그였다.
“꺼, 어어어억.”
결국 해럴드는 회까닥 눈이 돌더니 그대로 뒤로 넘어가 쿵 땅바닥에 쓰러졌다.
아이젠은 그를 보며 소감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턱에도 철심을 박아야 할 거다. 승자의 방식이니 새겨들어.”
부웅―!
그 순간 아이젠은 뒤에서 날아드는 무언가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파앙!
그것은 바네사의 목검이었다. 바네사의 목검은 다른 생도들의 검처럼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바네사의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어머나. 정말 지하 감옥에서 뭐 기연이라도 얻어 나온 거니, 너?”
“저기 턱 빠진 놈도 그렇고… 여기서는 꼭 급습을 하라고 가르치나 봐요. 무방비한 적의 등을 노리는 건 재미가 없을 텐데요.”
아이젠이 은근히 사울 쪽을 보며 말했지만, 사울은 감흥 없이 눈을 돌렸다.
바네사가 말했다.
“전쟁을 재밌자고 하는 건 아니니까. 세상에 나라를 걸고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니? 싸워야만 하니까 싸우는 거지.”
“틀린 말은 아니군요.”
“주변을 둘러봐, 아이젠.”
그 말에 아이젠은 주변을 돌아봤다. 어느새 아이젠과 바네사를 제외한 모두가 바닥에 쓰러져 끙끙대고 있었다.
“끄응…….”
“아파…….”
“젠장, 바네사 공자님 너무 빨라. 눈으로 좇지도 못했어.”
“결국 남은 건 저 두 사람뿐인가?”
“젠장, 완전 그린우드 혈통빨이잖아. 반칙이야, 이건.”
‘혈통빨’이라. 말하기는 참 쉬웠다. 아이젠이 노력해서 이룬 성과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모든 것을 우수한 혈통 덕으로만 치부하려 하다니.
‘답도 없구만.’
상급반의 사고방식이 이따위라면 더 볼 것도 없었다. 생사경에 오르는 것이 목적인 아이젠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이곳에 한 달이나 있을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팟!
아이젠이 주변을 둘러보는 사이 바네사는 뱀처럼 검을 빼 아이젠과 거리를 벌렸다.
“진검이 아니라 아쉽네.”
“사랑하는 동생을 죽이기라도 하시려고요?”
“‘사랑하는’은 빼지?”
바네사의 눈동자가 뱀의 그것처럼 날을 세웠다. 그러다 그녀는 휴 한숨을 내쉬고 얼굴에 손을 올렸다.
“또 이러네. 미안. 흥분하면 눈부터 살아나는 타입이라서.”
“와, 무서워라.”
바네사는 눈동자를 원상 복구 시킨 후 다시 목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바네사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단체 수련에서 자신과 아이젠이 최후에 남는 것은 상정해 두지 않은 그녀였다.
‘카인 아니면 해럴드가 마지막에 남을 줄 알았는데.’
뭐 꽁무니라도 빼다가 끝까지 버틴 모양이지? 그것도 하나의 싸움 방식이니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단 훨씬 더 단련된 몸을 가진 듯한 아이젠이었다. 하지만 아이젠은 아이젠. 그린우드 직계의 졸작이자 수치일 뿐인 존재!
‘누나로서 교육을 좀 해 줄까?’
바네사는 훗 웃었다. 그런 한편 오랜 경험으로 쉽사리 경계를 풀진 않았다.
그녀는 목검을 몸에 바싹 붙여 들었다. 그 목검은 가녀린 바네사에게는 꽤나 둔중한 장비처럼 보였으나.
‘다르다.’
아이젠은 바네사에게서 연마된 투기를 느꼈다. 한스는 비교할 바도 못 되고, 게오르크에게도 견줄 수 있을 만큼의 빼어난 투기였다.
‘흠. 제법인데?’
바네사는 20대 초의 나이일 터. 그런 그녀가 이 정도의 노기를 뿜어낸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었다.
동시에 아이젠에게는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로는 혹시 이 둘째 공자가 바로 자신을 독살하려 했던 사람일까? 하는 생각. 둘째로는.
‘…왜 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소가주전에 나갈 생각을 안 하지?’
그때 바네사가 넌지시 말을 던져 왔다.
“아이젠 너, 그러고 보니 잊은 건 아니지?”
“잊어요?”
뭔 말인가 하고 잠자코 있으려니 바네사가 말을 받았다.
“다신 쓸데없는 짓 안 하겠습니다, 쥐 죽은 듯 있겠습니다, 거슬리지 않게 행동하겠습니다.”
무슨 말이지, 저게? 아. 생각났다.
‘내가 전생을 깨닫기 전, 바네사에게 약속했다던 것들.’
아이젠은 한숨을 푹 내쉬고 싶었으나 참았다. 그사이 바네사가 말했다.
“아이젠, 가문 회의에서 네가 내게 준 모욕을 잊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이것 참. 죄송하진 않습니다.”
“…뭐라고? 방금 죄송하단 말을 잘못한 거지?”
“아뇨. 죄송하지 않다고 했어요. 그때 했던 말 중에 뭐 하나 틀린 말이 없는 것 같은데요.”
“…….”
게오르크보다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한스보다 학식이 뛰어나지도 않고, 다섯째인 에밀보다 침착함도 없다. 그것이 가문 회의 전 아이젠이 바네사에게 했던 말들이었다. 바네사는 아닌 척하면서 마음 한편에 그 말들을 담아 두고 있었다.
“호. 호호호. 호호호호호호호.”
허허 웃는 것처럼 보였지만 바네사의 이마에는 분노의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날 화나게 만들려는 게 목적이라면 실패했어, 아이젠.”
“그럴 목적은 없었는데. 화나셨어요?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호호호호호호호.”
콰과과과과곽―!
그때 바네사가 번쩍 목검을 쳐들어 자신의 주변 땅바닥에 하나의 큰 원을 그려 냈다. 바네사가 그린 원은 지름이 3m 정도 되었는데, 그녀는 그 정중앙에 우뚝 섰다.
“아이젠. 난 너보다 다섯 살이나 많은 장녀로서 널 봐주고 돌볼 의무가 있단다.”
“…그래서요?”
“그린우드의 씨를 역대 가장 형편없게 받아들였다는 너와 내가 온전한 힘으로 맞붙는다면 형평성에 어긋나겠지?”
“그런가?”
“그래! 날 이 원 밖으로 나가게 해 봐. 그럼 네가 이기는 걸로 해 줄게.”
‘이기는 것이다’도 아니고 ‘이기는 걸로 해 줄게’라니. 헛웃음이 나왔지만 아이젠은 이런 이벤트를 싫어하진 않았다.
“그래요? 그럼 어디 그 김에 땅바닥이랑 입맞춤도 하게 만들어 드려 볼까요?”
* * *
꿈틀. 바네사의 입술이 뒤틀렸다. 고상한 척하려 해도 개망나니한테 저런 소릴 듣는 걸 좋아할 리 없는 바네사였다.
“저기 봐. 아이젠 도련님이랑 바네사 공자님이 정식 대련 제대로 붙으실 건가 봐.”
“제대로는 무슨. 바네사 공자님이 하신 말씀 못 들었어? 그냥 어린 동생 놀아 주시려는 거지, 뭐.”
“야, 아이젠 도련님도 얕보면 안 돼. 난 아이젠 도련님 주먹에 맞아 쓰러졌었다고.”
“그건 네가 약해서 그런 거고.”
“뭐? 이 새끼가.”
“그럼 아니냐? 상식적으로 생각을 좀 해. 아이젠 집쥐 공자가 바네사 둘째 공자님을 어떻게 이겨?”
“하긴, 그건 그렇지. 말이 되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생도들 중 정신이 말짱한 몇몇 놈들이 일어나 속닥거리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정식 대련이라.’
그러고 보니, 아이젠은 내공을 쓰지 않는 대련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는 여인 때는 제약 없이 내공을 마음껏 써 댔고, 사울 장로와의 대련 때도 사울 장로만 오러의 사용을 제한했을 뿐 그는 자유롭게 내공을 사용했으며, 카인 때 역시 오러의 사용을 전제한 대련이었으니까.
‘음.’
아이젠은 주먹에서 내공을 거두고 쥐었다 폈다 해 보았다. 단련된 근조직이 아이젠이 손짓할 때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손등 위에 힘껏 돋아난 핏줄은 어서 그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싶다는 듯 용솟음치고 있었다.
‘주먹에 내공을 담지 않고 싸워 본 게 얼마 만인지.’
아니, 생각해 보니 사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다. 처음 지하 감옥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내공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눈앞에서 검을 사선으로 들고 있는 바네사를 보며 아이젠은 고개를 털었다.
‘결사신권.’
아이젠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에 내공을 담을 뻔하다가 단전에 쥔 힘을 풀었다. 그리고 오롯이 주먹 근육에만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