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공과 사가 철저하시군요.”
아이젠은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시 사울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침 일찍 오라더니 생도들이 아무도 없네요? 늦을까 봐 일찍 나왔는데.”
“너무 일찍 나오셨습니다. 지금은 아침이 아니라 새벽인걸요. 새벽 네 시입니다.”
“아, 그런가. 그럼 저랑 대련 한판…….”
“좀 쉬고 계시지요, 공자님. 혹시 쉬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실 테지요?”
“…….”
사실 그것이 아이젠에겐 은근한 콤플렉스였다. 실제로 그는 너무 오랜 시간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었다. 지금도 결국 밤중에 좀이 쑤셔서 제대로 못 자고 잠을 설쳐 새벽같이 기사 학교로 나온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뭐, 제대로 한번 쉬어 볼까요?”
“보통은 그렇게 선언하면서 쉬지 않습니다, 공자님.”
“아이고, 삭신이야. 좀 쉬어야겠다.”
아이젠은 그대로 사울의 방을 나왔다. 그러곤 상급반이 있는 뒤뜰을 찾아갔다.
새벽이라 당연히 아무도 없는 상급반 땅바닥에, 아이젠은 하늘을 보고 팔베개를 해 누웠다.
“그래, 좀 한량같이도 살자. 누가 보면 싸움에만 미친 놈인 줄 알겠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아이젠은 그간 생사경의 경지만을 위해 달려왔다. 쉼 없이 달리면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었다. 가끔은 멈춰 서서 호흡도 고르고, 팔다리에 뭉친 근육도 풀어 주고 해야 하는 법. 그러지 않으면 사람이란 언젠가 반드시 나가떨어진다. 앞으로 다시 또 달리기 위해서 아이젠은 멈췄다.
“후.”
아이젠은 길게 한숨을 내쉬어 단전에 주었던 힘을 풀었다. 그러자 내공이 흐트러지며 형태를 잃었다. 곧 몸 여기저기로 내공이 흘러가는 길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잠깐 눈을 붙이길 몇 시간. 상급반 안으로 생도들이 걸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뭐야. 아이젠 도련님이시네.”
“하아. 진짜로 한 달 내내 나오시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며칠 하다 관두실걸.”
“하지만… 어제 우는 여인을 부수셨다는 말이 있던데.”
“우는 여인을? 말도 안 돼.”
“그거 어차피 다 부서지기 일보 직전이었잖아.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다들 조용히 해. 개망나니라는 칭호가 괜히 붙었겠냐? 그냥 심심하니까 생도들 괴롭히고 싶어서 온 사람이야. 다들 눈에 안 띄게 조심이나 하자구. 어제 해럴드 꼴 못 봤어?”
“야, 듣겠다.”
해럴드란 어제 상급반에서 아이젠의 어머니를 들먹이며 입을 놀렸다가 명치를 맞은 바로 그 생도였다. 그는 어제 그렇게 기절한 후 의사에게 실려 갔지만 오늘은 정신이 돌아와 다시 나왔는데, 주변에서 생도들이 자기 흉을 보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X발, X같게, 진짜. 저 집쥐 공자 때문에 이게 뭔 꼴이야.’
어제는 방심한 상태에서 급소를 맞은 탓에 곧바로 쓰러졌다. 대련이었다면 아이젠 따위는 별거 아니었을 텐데 일이 이렇게 되니 해럴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실제로 카인도 목검이 부러져서 패배를 인정한 거지, 아이젠에게 제대로 패배한 건 아니었잖은가?
‘오늘 전체 수련에서 본때를 보여 주지.’
해럴드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이젠은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자는 척을 했다. 사울 장로가 올 때까지는 생도들이 뭐라 떠들든 이대로 누워 있을 생각이었다.
‘누워서 쉬는 것도 생각보다 편하네.’
그래, 이게 얼마 만의 제대로 된 평화냐. 내가 이래 봬도 공작가 아들인데 편하게도 좀 살아 보자.
아이젠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
적막이 길게 흐르자 사울 장로가 온 건가 싶었는데.
“하. 아이젠이 왔다더니 진짜였네?”
웬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이건…….
“근데 넌 오자마자 하는 짓이 드러누워 있는 거니?”
일침 같은 지적에 아이젠은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마주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린우드 가문의 둘째 공자, 바네사 폰 그린우드였다.
“…둘째 공자님을 뵙습니다.”
바네사가 여긴 웬일이지? 아이젠의 인사에서 그런 기색이 느껴졌는지 바네사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받았다.
“하나도 안 반갑다는 듯한 말투네? 몰랐을까 봐 말해 주는데, 난 이미 1년 전부터 이 기사 학교에 다니고 있었어. 네가 후임이라는 소리야.”
“…왜요?”
“왜는 왜야? 여인이라도 검술 훈련을 게을리해선 안 되니까.”
아니, 그걸 물어본 게 아닌데.
아이젠의 물음에 담긴 근본적인 의문은 검술 훈련의 목적이 뭐냐는 거였다.
바네사는 소가주전에 나가지 않는다. 달리 누가 그러라고 정해 준 것도 아니고 스스로 나간다고 선언한 적이 없었다. 지난번 가문 회의 때 테오발트가 몇 차례나 물어봤음에도 바네사는 끝내 소가주전에 나가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웬 검술 훈련?’
더 묻고 싶었지만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데 혹시 실례가 되지는 않을까 싶어 아이젠은 말을 삼켰다.
“그러시군요. 한 수 배우겠습니다.”
“말해 두겠는데, 이 학교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 꺼져. 감히 상급반 정중앙에 대자로 뻗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이게 무슨 민폐야? 장난이나 치러 온 거라면 썩 나가라구.”
“죄송합니다.”
아이젠이 순순히 사과하자 바네사는 별일이라는 듯 눈을 치뜨면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신입이면 신입답게 뒤로 좀 물러서 있을래? 아이젠 폰 그린우드.”
바네사가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은 띠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네사는 선임인 모양이었다. 하긴, 아닌 편이 더 이상한 건가?
아이젠 역시 선임 생도의 상징인 검은 띠를 매고 있었지만, 그는 바네사의 지시에 군말 없이 뒤로 물러가 섰다. 지난번에야 바네사가 먼저 칼을 휘두르면서 시비를 걸었으니까 맞받아친 거지, 이런 상황에선 굳이 마찰을 빚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바네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설 때.
벌컥―
문이 열리며 사울 장로가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상급반 생도들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어제도 이렇게 인사했던가?
사울 장로는 지난번처럼 돌바닥 위에 서서 좌중을 훑어보았다.
“다들 빠짐없이 나왔군. 겁을 먹은 녀석은 없는 거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예!!”
겁? 겁을 먹어? 왜?
아이젠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니 사울 장로가 설명해 주겠다는 듯 다시 한번 좌중을 눈으로 훑었다.
“오늘은 예고했던 대로 단체 수련이 있는 날이다. 단체 수련이란 어제부로 아이젠 공자님이 더해져 총 스물두 명인 너희 모두가 대련복을 갖춰 입고 목검을 든 채 대련하는 것이다.”
사울 장로가 말한 것은 후대에는 배틀 로열이라고 부르는 방식의, 말하자면 개싸움이었다. 하지만 개싸움이야말로 전투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이젠은 알고 있었다.
‘추억이네. 옛날에 많이 해 봤지.’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이강철이던 시절 천마신교와 크게 한판 붙었을 때도 비슷한 방식의 전투였다. 물론 그때는 이강철 혼자 일천의 적을 상대했지만.
사울 장로는 딱히 아이젠에게 눈을 두지는 않고 말을 이었다.
“물론 목검이 아니라 맨손을 써도 상관은 없다. 어쨌든 가장 자신 있는 무기로 이 대련에서 승리하는 자에게는 다음 모의시험에서 이득을 주도록 하마.”
곧 아이젠을 제외한 스물한 명의 생도 전원이, 제 허리춤에 꽂힌 목검 손잡이를 꽉 쥐어 잡았다.
“그럼 거두절미하고 바로 시작해 볼까?”
사울 장로가 단체 수련의 시작을 알렸다.
쉬익!
상급반 생도들이 허리춤에서 목검을 뽑는 소리가 마치 하나처럼 들렸다. 모두는 검을 빼 들자마자 지체 없이 각자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생도에게 검을 휘둘렀다.
“으랴압!”
“으악!”
“억!”
“이야앗!”
“아악!!”
그 바람에 생도 몇몇이 나뒹구는 소리가 들렸다.
해럴드는 검을 뽑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숙여 구석으로 피해 무사할 수 있었다. 그는 목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을 향해 덤벼들려는 생도들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야, 야! 다른 애들부터 이기고 와!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라! 오면 대가리 깨 버린다!”
“해럴드! 뭐 하는 거야! 대련 중에 구석으로 기어들다니, 이 저열한 놈!”
“저열은 무슨! 전쟁터에서 적을 보고도 저열하다고 할 거냐? 그런 놈이 제일 빨리 죽어!”
그게 바로 해럴드의 인생철학이었다.
해럴드는 파생검술 실력으로만 보자면 그리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련 때마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상대 생도를 이겨 선임 생도의 상징인 검은 띠까지 따낼 수 있었다.
‘전장에서는 해럴드처럼 살아남는 방법도 있는 게다. 패한 아이는 결과에 승복하도록.’
어느 날 해럴드가 무려 세 시간 동안 도망 다니며 대련 상대를 지치게 만들어 이겼을 때, 사울 장로가 해 준 말이었다.
사울 장로는 전쟁 영웅 테오발트를 도와 유령 전쟁을 승리로 이끈 승전의 일등 공신. 그가 해 준 말 덕에 해럴드는 자신의 전투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싸우는 사람이 결국엔 이기는 거라고! 정직하게 싸운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하냐?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물론 사울 장로는 긍정적인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해럴드와 같은 적도 전쟁터에는 많다는 사실을 생도들에게 알려 줬을 뿐. 그러나 사울의 말을 제 입맛대로 해석한 해럴드는 목검 손잡이에 힘을 꽉 준 채 덤벼드는 생도들의 머리를 계속해서 후려갈겼다.
뻐억! 퍽!
“오지 말라고 했다!”
“아악! 이게 진짜!”
그때 한 생도가 열이 뻗쳤는지 해럴드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다.
해럴드는 사울 장로를 힐끔 바라봤다. 사울 장로는 지금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파생검술, 커버넌트 오러!’
그사이 해럴드는 목검에 오러를 종이 한 장 두께로 얇게 둘렀다. 그리고 저에게 덤벼드는 생도의 배에 목검을 쑤셔 넣었다.
퍽!
“끄윽?!”
해럴드의 일격에 맞은 생도는 시뻘게진 얼굴로 해럴드를 노려봤다.
“너 이 새끼……!”
“…뭐! 꼬우면 너도 오러 쓰든가!”
대련에서 오러를 쓰는 건 금지되어 있지만 해럴드는 들키지 않으면 장땡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렇게 그 생도를 쓰러뜨리고, 해럴드는 한숨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새 생도 절반 정도는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때 해럴드는 멀리 서 있는 카인의 등을 보았다. 카인의 등은 태산만큼이나 넓어 보였다. 카인이 평소 체력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인, 저 개자식.’
해럴드는 갑자기 배알이 뒤틀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아이젠에게 명치를 맞은 건, 다 저 카인 놈이 괜한 짓을 해서였으니까.
‘남의 오러를 빌려 썼다고 했던가? 그런 주제에 감히 검은 띠를 매고 나랑 맞먹으려 들어?’
물론 카인은 지금은 검은 띠를 매고 있지 않았으나, 어쨌든 카인이 한순간이라도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하니 해럴드는 박탈감을 참기가 힘들었다.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해럴드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카인의 등을 향해 걸었다. 카인은 앞에서 덤비는 생도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맛 좀 봐라!’
퍽!!
“으헉!”
해럴드는 카인의 목덜미를 목검으로 내려쳤다. 뒷덜미는 약점인 만큼 대련에서는 예의상 공격하지 않는 곳이었지만, 해럴드에겐 그런 거 없었다.
카인은 짧은 비명과 함께 철퍼덕 엎어져 기절했다.
“후후. 봤냐? 허접한 새끼.”
역시 카인은 내 상대가 안 돼. 해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으악!”
“꺼헉!”
“으윽, 너, 너무 아파!”
그때 멀리 들리는 소리에 해럴드는 고개를 돌렸다. 가만 보니 아이젠이 생도들을 두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흥. 집쥐 공자 주제에.’
그래, 꼴에 주먹깨나 쓰는 건 알겠다. 뭐 어디서 제대로 수련이라도 받았나 보지? 하지만 그래 봤자 가문의 도움을 받아 수련했을 거 아냐. 그린우드라는 뒷배가 없으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집쥐 공자 주제에 감히 이 검은 뿔 기사 학교 상급반을 얕봐?
‘어디 그 잘나신 주먹으로 내 목검도 부숴 보시지!’
지난번에 아이젠은 카인의 목검을 주먹으로 부쉈지만, 해럴드의 목검은 카인의 것과는 강도가 달랐다. 왜냐하면 해럴드는 사울 장로 몰래 목검 안에 철심을 박아 놨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카인을 단숨에 쓰러뜨린 것도 목검 안의 철심 덕분. 대련 때마다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녀석이었다.
해럴드는 이번에도 사울 장로의 눈치를 슬쩍 본 후 목검에 2성의 커버넌트 오러를 둘렀다.
부웅― 두꺼운 종이만큼의 오러가 해럴드의 목검에 둘렸다.
‘죽어라!’
그리고 아이젠에게 달려드는 순간.
턱!
그는 가볍게 목검을 붙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