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그, 그게…….”
카인이 말을 못 하고 있자 아이젠이 기다리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우물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
“…….”
“평생 기혈을 막은 채로 살고 싶어? 빨리 말해!”
아이젠이 소리를 지르자 카인은 당황해서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 이름은 모릅니다. 몇 해 전에 가문 밖을 산책하고 있는데 머리가 산발인 빼빼 마른 키 큰 남자가 방법을 알려 줬습니다. 단기간에 강해지고 싶다면 한번 시험해 보겠냐면서…….”
머리가 산발인 빼빼 마른 키 큰 남자? 아이젠은 빠르게 기억을 반추해 봤다. 가문 회의에서 그런 인상착의를 한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가문 밖을 산책하다 만났다고 했으니 그린우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얼굴은? 어떻게 생겼지?”
“얼굴은 가면 같은 걸 쓰고 있어서…….”
“무슨 가면.”
“도, 도깨비 가면 같은 거였는데… 아, 이마 쪽에 뿔이 두 개 달린 도깨비 가면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너에게 오러를 흘려 줬나?”
“아뇨, 직접 오러를 받은 것은 아니고 무슨 알약 같은 걸 받았습니다……. 먹으니까 힘이 샘솟았는데, 그게 설마 오러인 줄은 몰랐습니다.”
이마 쪽에 뿔이 두 개 달린 도깨비 가면. 그리고 오러를 담은 알약.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런 걸 본 적도 없고. 굳이 따지자면 천마신교가 한 짓거리가 이와 가장 비슷했지만, 설마하니 시공간을 뛰어넘어 천마신교 놈들이 이 땅에 강림한 것은 아닐 테니 그쪽 가능성은 접어 두기로 했다.
사실 아이젠이 카인을 이렇게 추궁할 필요는 없었다. 단기간에 강해지고자 사도(邪道)를 선택한 건 카인이었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니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스승님, 여기도 도강문 같은 놈이 있군요.’
으득―
그런 놈들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 바로 강철의 스승이었다. 강철은 허망하게 스승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이젠은 올바르지 않은 길을 택하는 사람들만 보면 열불이 나서 통 참을 수가 없었다.
“앞으로 알약으로 받았다는 그 오러는 쓰지 마라. 3성이라고 했나? 지금은 3성일지 몰라도 몇 년 안에 네 몸과 단전을 녹여 버리고 말 거야.”
“그,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강해지고 싶으면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스스로 단련을 해. 알겠어?”
“예.”
“그리고.”
“예.”
“너 나한테 세게 한 대만 맞자.”
“예?”
하아― 아이젠이 주먹에 입김을 불었다.
그래, 카인의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지름길이 있는데 누군들 멀리 돌아가고 싶어 하겠나.
‘그래도 그냥 뭔가 씨게 한 대 때려야 이 분노가 풀릴 것 같다!’
그렇게 아이젠이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는 그 순간.
벌컥!
“아이젠 공자님, 이제 저를 따라오십…….”
사울 장로가 상급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본 광경은, 바닥에 토한 채 쓰러져 있는 생도, 그리고 아이젠에게 붙잡혀 있는 카인, 더해서 주먹을 높이 들어 올리고 있는 아이젠.
“…….”
아이젠은 사울의 얼굴을 바라보고 다음에 이어질 말을 생각해 봤다.
“공자니이이임!! 이 어린아이들을 이렇게 두들겨 패시다니?!! 이 일은 정식으로 가주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대충 예상한 대로 들어맞았다.
* * *
“커험, 그런 일이 있었군요.”
조금 전보다 한층 차분해진 얼굴로 사울 장로가 말했다. 그는 아까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 스스로가 민망한지 얼굴에 홍조를 띤 상태였다.
아이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범인의 인상착의가 꽤 뚜렷한 편이니까 혹시 이 도시에 그런 사람이 있는지 사람을 풀어 알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키가 크고 빼빼 마른 데다 산발 머리, 그리고 가장 큰 특징으로는 뿔이 두 개 달린 도깨비 가면.
사실 길을 가다가 보이면 누가 봐도 눈에 띌 만한 인상착의였다. 도시에서 그런 사람이 배회하고 있다간 바로 제국 경비대에 끌려갈 테니 실제론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예,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카인이 그런 일을 겪었었다니……. 제게는 일언반구도 없어 무슨 일인가 했었지요.”
사울은 카인이 사도에 빠졌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아챘던 모양이었다. 카인에게 오러 사용을 금지시켰다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하지만 아이젠처럼 직접 보고 겪은 게 아니다 보니 그 사도라는 게 무엇인지까지는 알아채지 못했던 모양.
“카인이 먹은 게 알약이라고 했으니 아마 피해자가 더 있을지도 몰라요. 자세히 조사해 보세요.”
“예. …그런데 공자님.”
“네?”
사울은 좀처럼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달싹였다.
공자님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울은 그렇게 물어보려다가 꾹 참았다.
“…….”
몇 달 전부터인가, 아이젠 공자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갑자기 체력 단련에 힘을 쓰질 않나, 하인들 사이에서는 성격도 좋아지고 호쾌해졌다는 소리마저 나오고 있었다. 개망나니 소리만 듣던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평이 아닌가.
“음.”
그러나 사울은 질문을 삼키기로 했다. 좀 변했으면 어떤가. 어쨌든 아이젠 공자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클라우디아 부인……. 당신의 아들이 점점 성장하고 있군요.’
사울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서 그는 그냥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싱거우시긴.”
아이젠은 앞을 보고 섰다.
이곳은 상급반이 아니었다. 상급반과 같은 복도 끝에 있는 별실이었다. 일전에 아이젠이 지하 감옥에 있었을 때 지냈던 독방과 비슷한 규모의 방 안.
그곳에는 아이젠과 사울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그래서, 이건 뭡니까?”
아이젠이 그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사실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과 유사한 형상을 한 목재 인형이었다.
30대 초반 여인의 모습을 한 목재 인형은, 현재 기술력으로 이 정도까지 인간의 형상을 구현하는 게 가능한 건가 싶을 만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들여다보면 당연히 인형이라는 걸 알 수 있지만 지나가면서 얼핏 스치듯이 보면 그냥 미인이겠거니 싶을 수준이었다.
사울이 설명을 위해 인형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곤 인형의 어깨 위에 손을 얹으며 마치 제품 설명을 하는 방문 판매원처럼 입을 놀렸다.
“이건 ‘우는 여인’이라는 무인(無人) 전투 병기로, 과거 탄탈리스 제국과 리타스나트 공화국의 ‘유령 전쟁’ 당시 전선에 투입될 뻔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실용화가 좌절된 인형입니다.”
“오호라. 무인이라면 알아서 움직인다는 소리겠네요?”
“예.”
“어떻게?”
싱긋. 사울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건 당장은 비밀입니다.”
‘당장은’?
아이젠이 궁금해하기에 앞서 사울이 말을 덧붙였다.
“상급반 생도들은 모두 한 번씩 이 우는 여인과 대련해 본 후에 제게 수련을 받습니다. 아이젠 공자님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이 나무 여자랑 한판 싸우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다 하는 거라면 나 혼자 특별 대우를 받을 수는 없지.”
아이젠은 대련복 허리에 묶인 검은 띠를 질끈 조였다. 그건 물론 조금 전 카인에게서 뺏은 물건이었다.
사울이 문을 열고 나가며 말했다.
“그럼 전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끝나면 부르십시오?”
“그래요.”
끼이이― 쿵.
문을 닫은 사울은 잠시 후 안에서 들릴 소음을 기대하며 생각했다.
‘검은 뿔 기사 학교의 상급반 생도들은 상급반에 입성하기 전 모두 한 번씩 우는 여인과 대련을 해 본다.’
후후. 사울은 교묘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이유는?’
쓰디쓴 패배감을 맛보기 위해. 전투에서 패배를 경험해 보는 것도 중요하니까. 사울 장로는 간악한 미소를 지었다.
우는 여인은 제국의 전쟁 영웅 다섯 가문의 기술을 최대한 본떠 그 몸에 주입해 둔 전투 병기였다. 너무 강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되어 아군조차 학을 떼기에 전선에 투입되지 못했던 병기. 전쟁 영웅 다섯 가문의 기술들을 편린이나마 쓸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우는 여인의 무서운 점이었다.
“과연 아이젠 공자님은 얼마나 버티실까.”
사울은 문 앞에 서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생도가 아닌 이상 아이젠은 우는 여인과 꼭 대련할 필요가 없었다. 사울이 아이젠과 우는 여인의 대련을 생각한 건 순전히 그 개인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아이젠 공자가 우는 여인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사울은 노인답지 않은 어린 호기심으로 그 결과가 궁금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결투를 붙일 수도 없다.’
하필이면 딱 이 시기에 아이젠 공자가 그간의 패악질을 멈추고 정신을 차리다니. 이건 무슨 우연인지.
사울은 가만히 기대해 보기로 했다. 전투가 끝난 후 아이젠 공자의 팔다리가 모두 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 *
삐걱―
우는 여인의 관절에 기름이 들어가는 소리가 났다. 아이젠은 우는 여인을 노려보는 한편 단전에 내공을 모았다.
“자, 얼른 한판 하고 끝내자.”
그 말이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번쩍! 우는 여인이 눈동자를 빛내더니 아이젠을 향해 돌진해 왔다.
그와 동시에 우는 여인의 가슴팍이 덜컥 열리며 안에 내장돼 있던 작은 무기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참철검가에 있는 병기이니 당연히 그 안에 있는 무기도 검일 줄 알았는데.
“창?”
쑤욱! 우는 여인이 제 몸 안에서 꺼내 든 것은 창이었다. 길이가 5척은 될 듯한 접이식 창이 길게 펼쳐지며 우는 여인의 손에 쥐였다.
키릭!
우는 여인이 입에서 소리를 냈다. 나무가 갈라지는 소리겠지만 그것이 우는 여인의 선전 포고처럼 들리는 아이젠이었다.
‘나를 얕보지 마!’
‘그러냐? 알았다.’
파앙!
우는 여인이 창을 내려쳤다. ‘찌른’ 것이 아니라.
아이젠은 팔 한쪽을 들어 올려 우는 여인의 창을 팔뚝으로 막아 냈다. 공격은 나무의 일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묵직했다.
파스스―
창에서 보랏빛 기운이 솟아올랐다. 평범한 창술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전쟁 영웅 중 하나인 체호프 후작가의 체호프 창술. 아이젠은 본 적 없는 창술이었다.
아이젠은 미지의 창술에 대해 무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박살(撲殺).’
퍼억!
반대쪽 손에 내공을 모아 쥐어 우는 여인의 창을 날렸다. 모르는 적은 일단 몸에서 떼어 놓고 봐야 했다.
그러나 우는 여인의 창은 날아가지 않았다. 우는 여인은 잠시 뒤로 밀려나는 듯했으나 손에서 창을 놓지는 않았다. 자세히 보니 창과 손이 조립되어 있었다.
‘갑자기 창술이라. 재밌는데?’
그렇게 아이젠이 다음 일격을 기대하는 그때, 우는 여인의 창을 쥔 손이 나무 쪼개지는 소릴 내며 불쑥 갈라져 열렸다.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속이 파인 대나무 같은 것. 그리고 대나무 안에서는.
푸화악!!
시뻘건 불이 뿜어져 나왔다.
“……?!”
마법인가?
본디 마법에 대해서는 아이젠 본신도 완전히 백지 상태인지라 아이젠은 별안간 눈앞으로 날아드는 불꽃에 깜짝 놀라 뒤로 펄쩍 뛰고 말았다.
불꽃은 위력이 약해 위협적이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나무가 타지도 않고 제 몸에서 불을 뿜는다는 건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