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사울의 표정은 이내 다시 평온하게 돌아왔다. 그는 아이젠에게 넌지시 말했다.
“공자님.”
“네?”
“저도 나이가 꽤 들었고… 지금은 그냥 옆집 사는 아저씨처럼 보이는 걸 잘 압니다만, 그래도 제가 한때는 매일같이 전장에서 구르던 베테랑이었답니다.”
“그래요?”
물론 당연히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취미는 아이젠에게 없었다. 더군다나 사울은 저 호리호리한 몸에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아이젠은 그걸 알아볼 수 있었다. 단순 근량으로만 보자면 지하 감옥에서 3개월간 수련한 아이젠보다 빼어났다. 얕볼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목검으로 대련하는 건 자존심이 좀 상하는데.
“그런 제가 아이젠 도련님을 상대로 전심전력을 다한다면 곤란하실 테지요. 체스를 둘 때도 우위에 있는 자가 으레 흑을 잡는 법인데.”
사울은 품에서 손가락만 한 길이의 밀봉서를 꺼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할 수 없게 둘둘 말린 그것을 아이젠을 향해 내보였다. 아이젠이 고개를 갸웃하니 사울이 설명했다.
“제게서 이 밀봉서를 뺏어 가시면 승리하시는 겁니다. 이건 항상 제 오른쪽 주머니에 넣어 두겠습니다.”
그러더니 사울은 밀봉서를 정말로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아이젠이 팔짱을 끼고 말을 받았다.
“뭐, 시험인가요?”
“상급반 아이들이 치르는 모의시험입니다. 이 모의시험에서 제게서 밀봉서를 뺏은 아이들만이 비로소 기사 승급 시험에 도전할 수 있지요.”
“마치 훈련받는 것 같군요.”
새삼 옛날 일이 떠오르는 아이젠이었다. 스승님과도 이런 훈련을 많이 했더랬지.
사울이 회상하는 말투로 답했다.
“공자님, 저는 적국인 리타스나트 공화국과 싸우던 당시 적군들로부터 일당백의 악마라 불렸답니다. 최소한 이 정도로는 난이도를 조절해야 이치에 맞지 않겠습니까?”
“좀 유치한 별명이긴 하네요.”
“후후, 그렇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일당백이라. 아이젠은 그 별명을 곱씹으며 사울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예.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사울이 자세를 잡았다. 사울은 검 한 자루를 양손으로 쥐는 정통 검도 방식을 고수하는 검사였다.
사아아―
‘……!’
사울이 자세를 잡은 것, 단지 그뿐이었음에도 사울의 몸에서는 노기(老氣)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예기. 전생의 아이젠에게도 없었던, 백전노장에게서만 풍기는 아름다운 살심.
‘과연, 일당백의 악마다 이건가?’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별명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하지만.
‘나도 한때 일기당천이라 불렸던 몸이라.’
유치함에 있어서는 아이젠도 뒤지지 않았다. 천마신교 천의 무사를 단신으로 몽땅 쓰러뜨린 게 바로 아이젠이었다.
“그럼 갑니다.”
아이젠은 태세를 가다듬었다.
팟!
그가 발을 디뎠다. 수련장 바닥이 얕게 패며 그가 천장까지 펄쩍 뛰어올랐다. 마주 서 있던 사울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아이젠의 어린 치기를 받아칠 준비를 마쳤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우선은 가볍게 시험해 볼까?
콰앙!
아이젠의 주먹이 사울에게 가 닿았다. 사울은 목검 끝에 힘을 실어 아이젠의 주먹을 여유롭게 흘렸다. 마치 냇물에 몸을 실은 듯 아이젠의 주먹은 평온하게 흘러갔다.
‘흘렸어?’
이렇게 부드러운 흘리기는 처음 본다. 천마의 룡피금강불침도 아이젠의 주먹을 이렇게 흘려 내진 못했었다.
아이젠은 놀라긴 했지만, 당황하진 않았다.
‘박살지(撲殺指)!’
빠직!
아이젠은 그대로 손가락을 뻗어 사울의 목검에 박살지를 박아 넣었다.
파박―
“음?!”
투둑!
아이젠이 사울의 목검에 흘려 넣은 기공은 목검의 안쪽을 타고 흘러 사울의 손과 손목에까지 내상을 입혔다.
사울은 빠르게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손목이 시큰한 걸 보니 아이젠의 내공이 혈류를 강타한 모양이었다.
“끄응.”
“올겨울엔 고생 좀 하시겠는데요.”
“따뜻한 물에 찜질하면 곧 나을 겁니다.”
사울은 곧장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아이젠의 실력을 평가했다.
‘능란하시군.’
지난 3개월, 아이젠이 감옥 안에서 몸을 단련했다는 얘기까진 들었다. 그 단련 끝에 선택한 것이 검이 아니라 주먹이라는 데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는데, 이건 뭐, 주먹을 썩 잘 다루지 않는가? 자신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라니.
‘적당히 봐드리면서 하려고 했는데.’
대외적으로는 망나니다 서자다 하며 나쁜 말이 돌지만, 아무리 그래도 테오발트 가주의 아들이었다. 천만분의 일의 확률일지라도 소가주전에서 우승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아이젠 공자였다. 그래서 적당히 봐주면서 하려고 했건만.
‘좀 시험해 봐 드릴까?’
사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파생검술을 6성까지 달성한 수준급의 달인. 여기서 제힘을 모두 발휘했다간 아이젠은 재 가루가 되고 말 것이었다. 그러니 오러는 쓰지 않고 초식만을 다루기로 사울은 마음을 굳혔다.
‘파생검술 4성, 속동검격(速動劍擊)!’
츠팟―!
사울의 모습이 한순간 자취를 감췄다. 주위를 둘러봐도 사울은 보이지 않았다. 아이젠은 사울이 사라진 자리를 노려보았다.
‘사라졌지만 소리는 남았다. 그렇다는 건…….’
아이젠은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미약하지만 힘 있는 파열음이 연이어 아이젠의 고막을 향해 날아들었다. 음속을 돌파하며 움직이는 소리.
아이젠은 주먹을 뭉뚱그려 쥐고.
“결사신권, 교아(鮫牙)!”
가장 근처에서 소리가 들린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교아는 반드시 명중한다. 적이 그곳에 있든, 그곳에 없든.
파앙!
끼이이익―!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낸 사울이 목검을 사선으로 든 채 뒤로 밀려났다. 사울의 목검에서는 작게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목검으로 아이젠의 교아를 막아 낸 것이었다.
‘호오. 이런 힘이라니.’
사울은 감탄했다. 고작 열여섯에 불과한 아이젠의 몸에서는 역사(力士)의 기운이 흘러넘쳤다.
‘방금 그 공격은 뭐였지? 나를 추격하듯 달려들었지 않는가. 이 역시 권법이란 말인가?’
손바닥이 마치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울에게 덤볐다. 사울이 0.1초라도 목검을 늦게 바로 세웠다면 그의 얼굴엔 커다란 상처가 새겨졌을 것이었다.
“후후.”
사울이 가볍게 웃었다. 그러더니 놀라 제 입을 손으로 턱 막았다.
아이젠은 그런 사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사울 장로.”
“크흠. 예, 도련님.”
“이거 이제 보니까 아주 호전광이셨네요?”
이런, 가주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사울은 미소로 화답했다.
“오해입니다.”
“근데 왜 오러를 안 쓰시죠?”
“대련에서는 오러를 쓰지 않는 것이 규칙입니다.”
“그래요? 전 쓰고 있었는데.”
“괜찮습니다. 처음이시니 제가 핸디캡을 안고 가야지요.”
“…글쎄요. 제가 그런 배려를 받을 입장은 또 아니라서.”
그러자 이번엔 아이젠 쪽이 후후 웃는 것이었다.
“사울 장로도 오러를 쓰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아이젠은 단전에 힘을 줬다. 본디 아이젠은 승부욕이 남달랐기에, 대련의 규율이고 나발이고 사울이 오러를 쓰는 것을 구경해 보고 싶었다.
‘내공을 끌어올려 볼까!’
꾸욱― 아이젠의 단전에 내공이 쌓이고, 그 내공은 고스란히 아이젠의 주먹으로 옮겨 붙었다. 만약 내공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아이젠의 오른 주먹이 활활 불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아이젠은 보법을 이용해 사울에게 빠르게 달라붙었다.
“결사신권―”
사울은 아이젠의 주먹을 가볍게 목검으로 흘리려다가 순간 오싹한 감정을 느끼고 생각을 바꿨다. 이번 건 흘릴 수 없다. 동등한 힘으로 맞받아칠밖에.
‘파생검술 5성, 역근검격(力筋劍擊)!’
“박살(撲殺)!”
콰앙―!!
쿠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