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벌컥― 모니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련님, 방금 갓 짜낸 따뜻한 우유 대령입니다.”
“우유? 웬?”
“많이 먹고 키 쑥쑥 크셔야죠!”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가 아니라 어린애 맞구나.”
열여섯 살이면 어린애지. 아이젠은 군말 없이 우유를 들이켰다. 그러고는 입가에 묻은 우유를 닦아 내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소가주전에 나가기 전에 대련 상대가 되어 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네?”
“아니,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신경 꺼.”
“네에…….”
모니카는 빈 우유 잔을 받아 들고 방 밖으로 나가려다가 돌연 뒤로 돌아 아이젠을 보았다.
“도련님, 혹시 수련이 필요하신 거라면… 학교에 가 보시는 건 어떠세요?”
학교? 아, 그러고 보니 아이젠도 기억이 났다. 그린우드 부지에는 법정, 지하 감옥을 넘어 학교까지 있었다. 학교라고 해 봤자 분명 기사 학교겠지만.
“평기사가 될 새싹들을 양성하는 학교인데요, 가문에 충성 서약을 한 예비 기사들이 거기서 배움을 받아요.”
“누가 가르치는데?”
“아까 도련님도 보신 분이에요. 사울 장로님이라고, 제일 키 크셨던 장로님 기억하세요?”
아, 그 사람. 회의장에서 장로 중 유일하게 아이젠의 편을 들어 줬던 사람이었다.
“…그분이 꽤 강한 편이신가?”
“겉모습은 유순해 보이셔도, 실제로는 파생검술의 달인이세요. 물론 도련님은 예비 기사가 아니시니까 사울 장로님께 직접 수련을 받으실 순 없겠지만…….”
“그으래?”
사람을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더니. 하긴 아이젠 자신도 전성기 때에 비하면 아직 젓가락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때 모니카가 갑자기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표정을 굳혔다.
“…잠깐만요, 도련님. 아까 뭐라고 하셨어요? 수련이 아니라 대련 상대가 되어 줄 사람이 필요하시다고요?”
“…….”
“서, 설마, 사울 장로님께 일대일 대련을 부탁할 생각은 아니시죠?”
“크흠. 에이, 설마.”
“그렇죠? 제가 오해한 거죠?”
“당연하지.”
아이젠은 대련을 ‘부탁’할 생각은 없었다.
‘강요할 생각이지.’
* * *
검은 뿔 기사 학교는 그린우드 가문 내 목 좋은 부지에 있는 기사 후보생들의 학원이었다. 후보생들은 이곳에서 수련을 받고, 나아가 제국 기사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면 정식으로 그린우드 가문을 모시는 기사단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다만 아직은 ‘후보생’ 신분이다 보니 구성원 모두가 멀쩡한 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는 없었는데.
“하아, X발. 또 기초 훈련이야?”
후보생 콜트도 그중 하나였다. 콜트는 기사 학교 초급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실력자였지만, 성격이 나빠 인망이 약했다.
“허구한 날 그놈의 기초, 기초. 진짜 지겨워 죽겠네, X발.”
좀 있다 있을 기초 훈련이 짜증 났는지 그는 기사 학교 정문 앞에서 욕설을 찍찍 해대고 있었다. 콜트의 근처에 있던 다른 초급반 후보생들이 콜트에게 말했다.
“콜트, 그래도 그렇게 욕을 하는 건 좀…….”
“그래. 안에 가주님도 계신데. 혹시라도 귀에 들어가면 어쩌려고.”
웬일인지 오늘은 기사 학교에 그린우드의 가주 테오발트가 방문했다. 아마 기사 학교 선생인 사울 장로와 나눌 말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덕분에 초급반 생도들은 잠시 학교 밖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사울 장로와 테오발트 공작을 위해 초급반의 수련실을 비워 줘야 했으므로. 정확히는 사울 장로가 초급반 생도들에게 정문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한 것이지만 말이다. 대충 그 숫자가 서른 명 정도인지라 정문 앞이 북적북적했다.
콜트는 바닥에 침을 카악 뱉으며 대꾸했다.
“야, X발, 그럼 내가 욕도 하면 안 되냐? 기사학교에 욕하지 말란 규정 있어?”
“어, 없긴 하지만…….”
“그럼 입 좀 닥쳐, 개새끼들아. 너희만 조용히 하면 내가 입으로 똥을 쌌는지 걸레를 물었는지 어떻게 알아. 안 그래?”
“알았어…….”
“아~ 재미없어. X발, 이럴 줄 알았으면 기사 같은 건 하겠다고 안 하는 건데.”
그 순간이었다. 멀리 길목에, 누군가가 기사 학교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콜트는 흠칫 놀라서 일어나려 했으나 그 누군가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다시 불량한 자세로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저 집쥐 공자가 여긴 웬일이지?”
이쪽으로 오는 것은 그린우드의 넷째, 아이젠이었다. 그 옆에 있는 건 아이젠을 모시는 하녀인 모니카.
마침내 아이젠이 기사 학교 정문까지 다가와 서자 서 있던 후보생 중 한 명이 물었다.
“아이젠 도련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사울 장로님 안에 계시나?”
“계시긴 합니다만… 이곳은 가주님과 기사 후보생들 이외엔 출입이 불가한데요.”
“뭐야, 그런 규정이 있었어?”
아이젠이 모니카를 돌아보자 모니카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저, 저도 한 번도 와 본 적은 없어서…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는데.”
그사이 후보 생도들은 아이젠의 몸을 찬찬히 살폈다.
“어? 뭐지?”
“아이젠 도련님… 맞아? 다른 사람 아니지?”
“도련님 맞아.”
“아니, 몸이 왜 저렇게 커지셨지?”
이곳에 있는 생도들은 어디까지나 후보생 신분이라서, 가문 회의에도 참석 권한이 없었다. 때문에 기사 생도들이 아이젠의 모습을 본 것은 최소 3개월 전이었다.
3개월 전까지만 해도 말라깽이에 불과했던 아이젠의 몸이 저렇게 커졌다니. 생도들은 아연실색할 따름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무슨 엄청난 훈련이라도 받으신 거 아니야?”
“나, 나도 훈련 좀 시켜 달라고 말씀드려 볼까?”
“관둬, 멍청아. 도련님 성격 잊었어? 미친개가 따로 없다고.”
“그 망나니가 어떻게 저런 몸을 갖게 된 거야?”
그런 수군거림을 듣고 있던 콜트는 괜히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X발, 저 몸이 어디가 좋다는 거야. 그냥 마른 가지에 질긴 고기 좀 갖다 붙인 것 같구만.’
아이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그냥 사울 장로님께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내가 왔다고 말 좀 전해 주지?”
“규정이 그런지라……. 죄송합니다.”
“흠. 누가 만든 규정인진 몰라도 참 이상하네. 그린우드 부지 안에 직계인 내가 못 밟는 땅도 있나?”
“아이, X발. 안 된다는데 왜 행패야.”
그 말을 뱉은 것은 콜트였다. 흠칫, 서 있던 후보 생도들 대부분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이젠은 순간 자기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한 말이야, 지금? 설마. 아니지?”
제정신이 박혔으면 설마, 아니겠지?
“아, 들리셨습니까? 혼잣말이었는데.”
끙차. 콜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콜트의 자세는 한껏 삐딱하기 그지없었다.
“도련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콜트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지는 않아, 콜트.”
“도련님, 망나니짓은 본인 하수인들한테나 하세요, 예? 괜히 학교까지 와서 후보생들한테 난리 피우지 말고.”
“네 이놈! 도련님께 무슨 말버릇이냐? 무엄하다!”
모니카의 일갈에도 콜트는 조금도 쪼그라드는 기색이 없었다.
아이젠은 콜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자식은 목숨이 두 개라도 되나?’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자신한테 이렇게 뻗댈 수가 있나? 그는 정식 기사도 아니고 그냥 기사 후보 생도일 뿐이었다. 아이젠은 기사들이 모시는 그린우드 가문의 직계 공자고. 뭐 어디 든든한 뒷배라도 있는 건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콜트가 말을 이었다.
“얘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데릭 기사님을 날려 버린 장본인이시라면서요? 덕분에 그쪽 줄 잡고 있던 저는 완전히 나가리 됐습니다?”
아, 그런 거였나. 데릭 밑에 있던 따까리였나 보다.
‘그래, 그럼 날 안 좋게 볼 만도 하지.’
“어차피 비겁한 꼼수라도 써서 이긴 게 뻔할 텐데, 겨우 그깟 일로 데릭 기사님이 직을 내려놓게 되다니요. 참 어이가 없어서.”
“‘어이가 없어서’는 반말인데.”
아이젠이 콜트의 가까이로 붙어 섰다. 콜트가 아이젠보다 머리 반 개 정도 더 커서 아이젠이 올려다봐야 하는 처지였다.
“말 까지 마라, 콜트. 난 예의 없는 놈들을 제일 싫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