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 *
장소를 옮겨, 아이젠과 한스의 결투 장소는 연무장이었다.
‘안은 생각보다 깔끔한데?’
아이젠은 연무장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이 연무장은 그린우드를 섬기는 기사단이 훈련터로 사용하는 곳. 한스의 특별 요청에 의해 두 사람을 수행하는 하수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연무장에 들어서지 않았다.
아이젠은 한스의 뒤를 따라 연무장에 발을 들이며 모니카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도련님, 제발 좀! 그냥 알았다고만 하시랬잖아요! 검이 어쩌고저쩌고, 왜 그런 실언을 하신 거예요!”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그게 그렇게 어려웠어요? 항상 하시던 거잖아요! 3개월 전부터 갑자기 성격이 왜 이렇게 뒤바뀌신 거예요?”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입에 달고 사셨던 분이 갑자기 왜 이렇게!”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도련님, 제 말 안 듣고 계시죠?”
“그래그래. 내가 다 잘못했어.”
아이젠은 모니카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몸의 혈도를 짚었다.
무혈신공은 이제 아이젠의 몸 곳곳에 퍼져 있었다. 단전에 자리한 내공이 몸 구석구석 스며들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이제 조금만 더 실전 경험을 쌓으면 아이젠은 3성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생사경까지는 아직도 한참 멀었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이젠은 왠지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차근차근 강해지는 게 이렇게 재밌는 일인 줄 전생에는 미처 몰랐다. 이강철이던 때엔 그저 강해지는 데만 급급했던 그였으니까. 근육을 단련하고, 내공을 연마하고, 권법을 수련하는 그 모든 과정이, 아이젠에게는 축복 같았다.
마침내 아이젠과 한스가 연무장 정중앙을 중심으로 열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섰다. 하수인들은 두 사람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다. 한스가 검을 뽑아 아이젠에게 겨눴다.
“아이젠, 내가 구태여 연무장에 아무도 들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이유를 아느냐?”
“글쎄요? 왠데요?”
“역시 멍청한 놈! 너 따위 팔푼이가 내 깊은 뜻을 알 리가 없지!”
저, 저 말본새 좀 봐라.
한스가 말을 이었다.
“네놈이 부끄러워질 것이 걱정되어서다! 주먹이나 검이나 거기서 거기니 뭐니 떠들던 네가 나에게 한 방에 나가떨어진다면 꼴이 우습잖아?”
“으응?”
이거 웃긴 놈일세. 3개월 전에 먼지 날 때까지 처맞은 건 기억이 안 나나?
한스도 아이젠이 그리 생각하는 걸 눈치챘는지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3개월 전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땐 내가 방심했으니까. 나는 한 달 전 참철검술 2성의 경지에 올랐지. 오러를 쓸 수 있게 됐다, 이 말이다.”
“이야, 정말 대단하십니다.”
“너도 그동안 체력 단련을 좀 한 것 같다만…….”
아이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한스의 시선에는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한스는 실제로 아이젠의 몸을 반쯤은 동경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몸이 저렇게 되지?’
한스도 귀족 자제치고는 제법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아이젠과 몸을 비교하자면 어린아이와 성인의 차이만큼이나 형편없었다.
‘부, 부럽다.’
하지만 한스는 고개를 좌우로 털어 잡생각을 치웠다.
“넌 그래 봤자 서자야, 서자! 첩의 자식이라고! 아무리 몸을 단련했다고 해도 참철검술 2성의 경지에 오른 정통 직계인 내게 비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예, 예.”
“잘 보고 배워라! 내게 가르침을 받는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2성이면 이미 아이젠도 본 바가 있었다. 그를 노렸던 흑기사 제이슨이 2성이었다. 별로 그렇게 강한 것 같진 않던데.
‘흐음. 직계는 뭐가 좀 다른가?’
그때 문득 일전에 게오르크에게 불려 갔을 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린우드의 핏줄이 아닌 자들이 배우는 검술은 참철검술의 파생에 불과하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직계가 쓰는 참철검술은 뭐가 좀 달라도 다르다는 뜻?
아이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한 수 배우겠습니다.”
“네 무기는…….”
“주먹입니다. 아시다시피.”
“…원칙적으로는 주먹을 쓰는 게 금기이지만, 가주님께서도 네 뜻을 존중하겠다 하셨으니 오늘 대련에서는 특별히 주먹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겠다. 어서 내게 감사의 예를 표해.”
거참, 감사하여라.
아이젠은 한마디 한마디에 딴죽을 걸기는 지쳐서 그냥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나저나.’
아이젠이 생각해 보니 제이슨에게서는 제대로 오러를 구경해 보지 못했다. 노란색 오러가 검의 형상을 하는 것까지만 봤지, 그게 어떤 위력을 지녔는지는 못 봤으니까.
‘갑자기 좀 궁금하네.’
지체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아이젠이 먼저 결투의 시작을 알렸다.
팟!
아이젠은 발을 앞으로 디뎌 한스에게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주저 없이 주먹을 뻗었다.
‘박살(撲殺).’
부웅! 한스의 검이 휘둘리는 것과 동시에.
쾅!
아이젠의 주먹과 한스의 참철검이 공중에서 부딪쳤다. 한스의 참철검에는 작은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오.’
제이슨 때는 검이 바로 부러졌었는데.
‘같은 참철검이라 해도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강도 차이가 있는 건가?’
오러를 검 위에 두를 테니 말이다.
츠팟!
아이젠은 바닥에 발이 닿자마자 다시 한스의 머리 위로 높이 뛰어올랐다.
“읏!”
한스가 뒤늦게 반응해 검을 위로 쳐올리는 사이.
‘결사신권, 교아(鮫牙)!’
아이젠의 다섯 손가락이 한스의 몸을 긁었다.
투확!!
교아는 결사신권 2성, 필중의 기술.
“하앗!”
츠파파파팟―!
그러나 한스는 빠르게 검을 휘둘러 교아를 전부 흘려보냈다.
아이젠이 다시 바닥에 발을 딛고 보자 한스는 온몸에 오러를 두르고 있었다. 그런데 제이슨 때와 색깔이 조금 달랐다. 제이슨 때는 오러가 노란색이었는데, 한스는 옅은 초록색에 가까웠다.
한스가 후후 웃었다.
“보이냐? 이게 바로 참철검술 2성의 경지, 그린 오러다!”
“이야.”
이름이 구리다. 근데 말하면 화내겠지?
아이젠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한스의 기척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곳 연무장은 사방이 막힌 공간. 어디서 바람이 부는 거지?’
한스가 설명해 주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이젠! 너는 검을 쥐지도 못하는 얼간이니 참철검술의 진가를 알지 못하겠지. 알려 주마! 참철검술과 파생검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참철검술은 바람의 힘을 다룬다는 것!”
바람이 한스의 검에 서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젠은 그 바람이 연둣빛 색임을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린 오러는 녹색 바람의 힘을 검에 두르는 연풍(軟風)의 오러. 어디 한번―”
한스가 아이젠에게 달려들었다.
“맛봐라!”
쾅! 한스가 바람을 두른 참철검을 휘둘러 왔지만 아이젠은 피하지 않고 주먹으로 검 끝을 막았다.
‘피했으면 베였어.’
연풍의 오러는 마치 결사신권의 교아와 비슷했다. 오러가 검을 휘돌며 도신의 공격 범위를 아득히 넓힌다. 그럼으로써 베지 못할 것도 베어 내고 만다. 이것이 바로 참철검술 2성의 경지.
“와하하! 어떠냐, 아이젠! 이게 바로 첩의 자식에 불과한 너와 정통 직계인 나의 차이다! 이제라도 무릎 꿇고 회의장에서 경거망동했던 걸 사죄한다면 봐주지!”
‘…….’
어떻냐고?
‘…별거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