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조촐한 식사가 시작됐다. 그린우드의 하인들이 원탁에 음식들을 가져다 놓았다. 원탁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장로들에게도 먹을 것이 전달되자 가주 테오발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가문 회의를 소집한 이유를 다들 알 테지.”
아이젠은 몰랐지만, 손 들고 모른다고 할 수는 없으니 가만있었다.
테오발트가 말을 이었다.
“소가주전의 날짜가 정해졌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한 달 후로.”
웅성웅성.
그 말에 장로들과 하인들의 분위기가 산만해졌다.
“알겠지만 소가주전에 나이 제한은 따로 없다. 게오르크부터 에밀까지, 그린우드의 직계라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단 뜻이지.”
소가주전. 그게 한 달 뒤인가.
그린우드 가문은 첫째가 다음 대의 가주가 되는 일반적인 귀족 가문과는 조금 달랐다. 그린우드에서는 소가주전을 통해 다음 대 가주가 될 자를 선발했다. 소가주전에 참가하는 것은 가문의 직계와 방계 둘 다. 달리 말하자면 직계와 방계의 위치가 바뀔 수도 있는 유일한 대전!
그러나.
‘언제 끝나지.’
아이젠에겐 흥미 밖의 일이었다. 그는 오로지 강해지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 소가주전은 귀찮은 행사일 뿐이었으니까.
테오발트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나는 이곳에 있는 모두를 소가주전에 내보낼 생각은 없다. 방계들 앞에서 괜히 직계 망신을 시킬 순 없으니. 하나면 족해.”
그러자 게오르크가 지그시 눈을 감고 앉은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짊어진 과업이 크지만 반드시 이뤄 내 보겠습니다, 가주님.”
“음.”
그렇군. 아이젠은 그 광경을 보고 깨달았다.
‘누구든 참여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게오르크만을 소가주전에 출전시킬 생각인 건가.’
다음 소가주로 점쳐지는 자, 역대 그린우드의 핏줄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존재. 그것이 바로 첫째 공자 게오르크. 게오르크 이외의 다른 자식들은 구태여 소가주전에 내보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가주 테오발트가 바네사를 보고 물었다.
“바네사, 네 생각은 어떻지?”
“가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한스. 너는?”
“가, 가주님께서 뜻하신 바가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가주 테오발트의 눈이 바네사와 한스를 거쳐 아이젠에게로 돌아갔다.
“아이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이젠은 질문에 대답하기 전, 뒤쪽에 서 있는 모니카의 기척을 느꼈다.
무조건 알겠다고 하라는 게 이런 의미였나. 그래, 뭐… 알았다.
“가주님의 뜻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넌 검을 쥘 수 없으니까.”
“예. 그렇습니다.”
사실이지. 부정할 필요도 없었다.
“듣자 하니 감옥에서 주먹을 썼다던데……. 그게 사실일 리도 없겠지만,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너를 소가주전에 내보내는 건 직계 망신 아니겠느냐.”
응?
아이젠은 순간적으로 의문과 반발심이 들었다.
“주먹을 쓰는 게 왜 망신이지? 맨주먹으론 자신 없으니까 칼을 드는 거 아닌가?”
그 순간 장내가 고요로 물들었다.
‘이런, 나도 모르게 크게 말했네.’
근데 뭐 틀린 말도 아니잖아.
아이젠이 지하 감옥에 끌려간 이유도 주먹 때문이었다. 온갖 패악질을 부려도 상관없지만, 주먹만은 써선 안 되기 때문에. 그것이 그린우드 가문의 제1 규율.
그런데 그건 아이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규율이었다. 주먹이 뭐가 어때서? 검보다 더 멋있구만.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한 가운데, 한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놈, 아이젠! 검을 쥐지도 못하는 망나니 주제에 감히 가주님 말에 토를 다는 거냐?! 그 주먹 때문에 감옥까지 갔다 온 게 너다!”
“공자님이 먼저 욕하셔서 때린 거잖습니까.”
“크, 크흠! 어허, 이 자식! 그냥 가주님 말씀이 맞는다고 하면 될 것을!”
“그냥 맞는다는 대답을 들을 거면 뭐 하러 질문을 합니까? 말 나온 김에 여쭤보겠습니다. 주먹을 쓰는 것이 직계의 망신입니까? 왜요?”
잠자코 있던 테오발트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스릉―
콱!!
제 검을 뽑아 원탁의 정중앙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
“헉!”
“가주! 이게 무슨!”
“저, 저런!”
천 년 역사의 강철 원탁에 검을 꽂다니?
장로들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참철검가의 뜻을 모르느냐, 아이젠? 강철조차 자르고 베는 것은 오로지 검뿐이다. 전장에서 적의 갑옷과 투구를 찢는 최강의 무기라는 게지. 주먹으로는 뭘 할 수가 있지? 네놈은 기껏해야 그 주먹으로 사람이나 패고 다니지 않느냐?”
테오발트의 물음에 아이젠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니카가 뒤에서 당황하는 게 느껴졌지만, 아이젠으로서도 지금 이 자리에서 쉽사리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주먹으로 뭘 할 수가 있냐고?’
그건 아이젠, 아니, 투신 이강철로서는 참을 수 없는 폄하의 말이었다.
이전 생에서 천마 도강문과 싸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도강문은 신살검이라는 절세의 검으로 아이젠과 싸웠지만, 결국 그 신살검조차 두 동강 내 버린 것이 바로 아이젠의 주먹이었다.
‘그런데 검이 주먹보다 위라니. 그건 선을 넘는 발언이지.’
모두의 눈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아이젠은 느꼈다. 하지만 이런 데서 꼬리를 말고 물러날 그가 아니었다.
건방져 보일지라도 실력 행사 좀 해 보실까.
‘박살(撲殺)!’
아이젠은 주먹을 높이 들어.
콰앙!!
강철 원탁을 향해 쏜살처럼 내려쳤다.
쩌적―
그러자 원탁이 여섯 갈래로 쪼개지며 박살 났다.
“……?!”
“아닛?!”
“주, 주먹으로!”
아이젠의 형제들이 자리에서 물러섰다. 장로들 중에도 놀라 벌떡 일어나는 자들이 있었다.
“주먹으로 강철 원탁을?!”
“처, 천 년의 역사가……!”
“저럴 수가! 저건 말도 안 되는 일이오!”
“감히 그린우드 가문 내에서 주먹을 쓰다니!”
“시조를 무시하는 행위요!”
“아이젠 공자에게 엄벌을 내려야 합니다!”
그들의 말을 테오발트는 손을 한 번 뻗는 것만으로 제지했다. 좌중이 다시 조용해지자 테오발트가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아이젠. 감히 내 앞에서 주먹을 쓰다니……. 대답 여하에 따라 네놈을 다시 지하 감옥에 처넣을 수도 있다.”
“그냥 보여 드린 겁니다.”
아이젠은 과거 투신이라 불리기도 했지만, 그의 또 다른 이명으로는 쇄금이란 것이 있었다. 쇄금이란 곧 금강석조차 깨부순다는 뜻.
참철? 겨우 강철을 베는 정도로 검이 최강의 무기라고 한단 말이야?
“제 주먹이 검 못지않게 강한데, 굳이 검을 쥘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권이나 검이나 그게 그거다. 아이젠은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구성원 모두가 검을 쓰는 참철검가인, 그린우드의 회의장에서.
아이젠은 가주 테오발트를 꼿꼿이 쳐다보고 말했다.
“못 미더우시면 가주님께서 시험해 주시겠습니까?”
이토록 오만한 발언이라니!
결사신권은 2성부터는 실전을 통해서만 강해지는 권법. 그리고,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강화의 상승 폭은 더욱 커진다.
‘이제 쉐인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어.’
쉐인과의 실전으로 올라설 수 있는 경지는 애저녁에 달성했다. 이젠 더 강한 실전 상대가 필요한 때. 그게 바로 가주 테오발트이기를 바라는 아이젠이었다.
훗.
아이젠은 순간 테오발트가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바라봤을 때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져 있었다.
‘착각인가?’
그때 한스도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벌떡 일어나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