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왜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이젠은 스승인 무신 이화도와 오래전 나눈 대화에서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도를 추구해선 안 돼. 정공법만이 정답.’
아이젠은 독방 중앙에 앉아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오로지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무혈신공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만 했다.
그걸 시작한 지가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날을 헤아리지 않았으므로 한 달이 되었는지 어쨌는지 알 방법은 없었으나, 아이젠은 몸으로 시간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었다.
“스읍― 후우…….”
무혈신공을 운공하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다. 눈을 감은 다음 코로 숨을 들이켠 뒤 입으로 뱉는다. 이것을 무한히 반복한다.
물론 그걸로 끝은 아니다. 배 속에 두 개의 큰 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위에 호흡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둘 중 큰 쪽의 길을 만드는 것을 대주천, 작은 쪽의 길을 만드는 것을 소주천이라 한다.
아이젠은 대주천과 소주천을 반복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제 몸이 완벽하게 병신은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도 수련의 성과를 담아낼 정도는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면서도 뭔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대체 뭐지? 심장에 있는 이 기묘한 기운은.’
심장 부근에서 아이젠은 특별히 이질적인 감각을 느꼈다. 기감을 통해 유심히 어루만지면 그제야 형체를 드러내는 기이한 기운이었다.
이건 대체 뭘까. 아이젠은 고민해 보기도 했지만 오래 생각한다고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니 지금은 그냥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정확히 한 달이 되었음을 짐작한 그 순간.
“…됐다.”
아이젠은 드디어 상념에서 깨어났다.
대주천의 원과 소주천의 원 사이, 작은 구슬이 생겨난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단전의 구슬. 아이젠은 그 구슬 안에 천천히 내공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휴우.”
길게 숨을 내뱉은 아이젠은 한 달간의 운공이 성공했다는 사실에 기쁨을 만끽했다.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야.’
이제 겨우 단전을 만들어 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아이젠에겐 아직 두 달이라는 시간이 더 남아 있었다.
“남은 두 달은 체력 단련과 운공을 번갈아 하면 되겠구만.”
아이젠은 하루 시간을 알차게 쓸 만한 계획표를 머릿속에 새겼다. 체력 단련 열 시간, 운공 열 시간, 나머지 네 시간은 취침.
“음, 완벽해.”
아이젠은 스스로 세운 계획표에 만족을 느끼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그는 지금 당장 체력 단련을 시작하려 했다.
“어우, 머리야.”
한 자세로 너무 오래 앉아 있었더니 머리가 띵해 아이젠은 잠시 비틀거렸다. 다리가 저릿저릿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감각들이 즐겁게만 느껴졌다.
“푸흐. 나 왜 이렇게 변태 같냐.”
이강철이 무혈신공을 처음 배운 나이는 16세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아이젠의 몸으로 무혈신공을 처음 운공한 나이도 열여섯 살. 비록 이강철 때는 하루가 멀다고 스승님의 눈을 피해 훈련을 게을리하던 그였지만.
“스승님, 저 이제 딴짓 안 합니다.”
오로지 생사경의 경지만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아이젠은 나태라는 단어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는 동안 아이젠의 몸은 더욱더 견고해져 갔고, 어느새 아이젠이 지하 감옥 독방에 갇힌 지도 두 달이 되었다.
* * *
제이슨은 그린우드 가문을 모시는 흑기사 중 하나였다.
흑기사란 간단히 말해 암살자.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는 평기사와 달리 암암리에 활동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렇다 보니 흑기사는 빛 아래서 활약하는 평기사들에게 언제나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실력 면에서 보자면 흑기사들의 평균 무예가 평기사들보다 출중하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어찌 됐든 평민 출신인 제이슨은 공작 가문을 모시는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비록 흑기사라고 해도, 나는 겨우 스물네 살에 이런 성과를 이뤘다.’
언젠가는 기사에게 주어지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인 ‘영기사(榮騎士)’까지 올라가리라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 제이슨이 앞에 선 누군가에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 아이젠의 독살 배후를 찾는 데 실패했다고?”
그의 물음에 제이슨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예, 공자님. 사울 장로님께서 가문의 가용 가능한 모든 인원을 동원해 찾으셨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가문의 인력이 동원됐는데도 아이젠의 암살 배후는 찾지 못했다. 공자님이라 불린 자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것 참 유감이네……. 그렇지 않아, 제이슨?”
“…….”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공자가 제이슨의 앞에 우뚝 다가섰다.
“기사 제이슨 코너. 그대의 주인으로서 명하겠다.”
“하명하소서!”
“가만, 그 전에, 아이젠이 피스풀 지하 감옥에 수감된 지 얼마나 됐더라?”
“오늘로 정확히 두 달째인 것으로 압니다.”
“두 달. 오래됐네. 이제 출감까지 한 달 남은 건가.”
“그렇습니다.”
“가서 싹을 잘라 줘라.”
“예? 그 말씀은…….”
제이슨의 고개가 올라갔다. 공자가 말했다.
“죽여 버리고 와. 그린우드 가문에 검도 못 쓰는 반편이는 필요 없다.”
* * *
그린우드의 흑기사, 제이슨 코너. 그는 정기적으로 밥을 주는 하수인으로 위장해 피스풀 지하 감옥에 들어가고자 했다.
“자, 여기.”
피스풀 지하 감옥 앞에 선 간신 수염의 하수인이 제이슨에게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그들 뒤에는 하녀들이 죄수들에게 밥을 전달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간신 수염 하수인이 말했다.
“이름이 제이슨이라고?”
제이슨은 흑기사라서 다른 하수인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존재였다. 그래서 직급이 꽤 높아 보이는 간신 수염도 제이슨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오늘 제이슨은 ‘신참 하수인’을 연기하기로 했다.
“예, 그렇습니다.”
“첫날부터 지하 감옥 배식 담당이라니. 운이 안 좋구만.”
“괜찮습니다. 제 일인걸요.”
“하하, 좋은 자세야. 요즘 젊은것들은 영 매가리가 없는데.”
제이슨이 열쇠 꾸러미를 허리춤에 차면서 답했다. 간신 수염이 제이슨의 허리춤에 달린 또 다른 물건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건?”
“아, 제 애검입니다.”
“풋, 노예가 애검을 다 가지고 있나? 하하.”
간신 수염이 비웃듯 폭소하자 하녀들도 얼굴을 가리며 웃었다.
제이슨은 그들을 보며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을 느꼈다.
‘멍청한 놈들. 내가 자기들과 같은 노예인 줄 아는군.’
제이슨의 검은 아이젠을 죽이기 위해 가져온 것이었다. 물론 노예라고 해도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는 있어야 하기에 지하 감옥에 무기를 반입하는 것이 허가되어 의심을 받는 일은 없었다. 노예는 가문의 자산이니까.
“그럼 들어갔다 오게. 알겠지만 죄수들에겐 정해진 배식만을 하고 나와야 해. 말을 섞는 것은 금지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수고……. 아, 잠깐.”
돌아가려던 간신 수염이 멈칫하더니 다시 제이슨을 돌아봤다.
“그런데 자네… 이상한 점이 있는데 말이야.”
“예?”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지……. 영 찜찜해서.”
꼴깍. 제이슨은 침을 삼켰다.
설마 자신이 흑기사라는 것을 눈치챘나?
슬그머니 애검 손잡이에 손을 올리는 그였다.
‘벨까? 지금?’
들켰다면 죽여야 했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