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지하 감옥에서의 3개월 】
“이것들아! 식사 왔다! 다들 배식 준비…….”
여러 명의 하녀를 데리고 피스풀 지하 감옥에 들어선 하수인은 크게 당황했다.
“흐, 흐아아악! 이게 뭐야?!”
바닥이 온통 피로 범벅되어 있고, 죄수들이 각자의 방을 놔두고 여기저기 죽은 건지 산 건지도 모르게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에는 자신의 동료 하수인도 기절해 있는 것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끄으으…….”
그때 근처에서 누가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수인은 그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가물가물했지만 하수인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바로 쉐인이었다.
“아니, 넌 독방에 있어야 할 놈이잖아?!”
분명 위험도 1급으로 배정되어 5년간 독방살이를 한 놈이, 뜬금없이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도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순간 쉐인이 하수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끄으어어…….”
“뭐, 뭔데?!”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뒤에 있던 하녀의 말에 하수인은 쉐인에게 귀를 기울였다.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거냐? 어디 말해 봐.”
“브으으아…….”
“그래, 뭐라고?”
“바아압…….”
“뭐?”
“밥 좀……. 배고파 죽겠어…….”
“…….”
하수인은 머리가 아찔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죄수 중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개중에는 상처가 꽤 큰 죄수도 있었지만 대부분 경상으로 마무리되어 다행이었다. 하수인은 하녀들을 시켜 그들을 치료하고, 가지고 온 딱딱한 빵과 우유를 배식했다.
그동안 쉐인과 대화하던 하수인은 믿지 못할 말을 듣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아이젠 도련님이 지금 독방에 갇혀 계신단 말이냐?”
쉐인은 불편한 양손으로 빵을 낑낑 삼켰다. 1급 위험 분자이니만큼 쉐인의 양손에 구속구를 새로 더 채워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쉐인은 아이젠에게 당한 박살지 때문에 당분간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우물우물, 긍렇당닝깡. 꿀꺽! 날 이 꼴로 만들고 자기가 저 안에 들어갔어. 빵 하나 더 먹어도 돼?”
그는 전의를 상실한 상태라 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아니, 대체 왜 독방에 들어가셨는데?!”
“그야 나도 모르지. 문 열고 물어보든가.”
“그래. 그래야겠다. 독방 열쇠는 어딨지?”
“아이젠이 안에 가지고 들어갔는데.”
“…….”
하수인은 제 머리를 탁 쳤다. 저 독방은 특수 열쇠를 이용하지 않는 한 웬만해선 열 수 없었다. 그런데 그 열쇠를 아이젠 도련님이 가지고 들어갔다고?
“독방은 일단 들어가면 혼자의 힘으로는 나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워. 그 두꺼운 철문은 안에선 열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으니까. 하면 대체 어떻게 나오시려고……?”
하수인은 이 일을 보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자칫했다간 자신의 모가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라 신중해질 수밖에 없는 그였다.
* * *
중원 무림, 이강철 16세.
이강철은 호숫가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하고 손에 쥐어 보았다. 그건 널빤지처럼 얇고 편편한 돌이었다.
강철은 돌 위에 다른 돌을 슥슥 그어 무슨 낙서 같은 것을 그렸다. 그리고 그것을 호수 위에 던져 물수제비를 뜨려 했다.
강철이 자세를 잡는 그때였다.
“강철이 이놈! 또 수련 안 하고 놀고 있는 게냐?”
이크. 이강철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스승님의 호통 소리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강철의 앞에 선 그의 스승, 이화도는 주먹으로 강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넌 대체 언제 철들 거냐? 한 달 전 무혈신공을 알려 달라고 온 놈은 너야, 이 녀석아!”
이화도는 무림인치고는 이례적으로 장수하여 팔순을 넘긴 나이였지만 하얗게 센 머리와 길게 늘어뜨린 수염을 제외하면 아직도 정정해 보였다.
강철은 툴툴거리며 돌을 뒤로 숨겼다.
“하지만 한 달 내내 매일같이 가부좌만 틀고 앉았잖아요. 그런데도 몸에 내공이 쌓이는 기분은 조금도 안 들고. 무혈신공 이거 사기 아니에요?”
“사기라니! 무혈신공은 이 내가 일생을 다 바쳐 만든 천하지존의 내가기공―”
“그 설명 듣는 것도 지겨워 죽겠어요! 가부좌는 하나도 멋이 없단 말이에요. 애들이 자꾸 놀립니다!”
“넌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무공 배우냐?”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무술 좀 알려 주세요! 스승님이 무신이면 뭐 합니까? 제자가 주변에서 팔푼이 취급 받는데!”
무신(武神), 그 장엄한 별호는 이화도의 것이었다. 모든 무에 통달했다고 평가받았던 이화도는 현재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은거하고 있었다.
이화도가 다시 한번 강철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 아픕니다! 머리 다 깨지겠네.”
“이놈 강철아, 사도를 추구해선 안 된다. 어떤 일이든 정공법이 정답이란 말이야. 단기간에 무술을 깨우치려고 하면 주화입마에 빠질 뿐이다. 마교 놈들처럼 되고 싶은 게냐?”
“그건! 아니지만…….”
강철의 입이 댓 발 나오자 이화도는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웃었다.
“철이야, 이제 며칠만 더 하면 된다. 무혈신공의 운기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시간은 꼬박 한 달 정도거든.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네 몸에도 내공이란 게 쌓일 게다.”
철이. 이강철은 스승이 자신을 그렇게 부를 때 좋았다. 그를 철이라고 부르는 것은 스승 이화도뿐이었다. 다른 곳에서 강철은 항상 팔푼이, 반편이라고 불렸으니까.
강철이 무공을 배우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주변 평판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피붙이라곤 없는 그에게, 세상은 가혹했으므로.
“정말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됩니까?”
“아, 그럼!”
이강철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강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승을 사기꾼 노인네 취급 했던 것이 죄송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뒤에 숨기고 있던 돌을 꺼내 스승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냐?”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이놈이! 누가 돌을 선물로 줘?”
“그냥 돌이 아니에요. 꼭 스승님 같지 않습니까?”
“이게 어딜 봐서 나란 말이냐?”
“여길 보세요.”
강철이 돌에 그린 낙서를 가리켰다. 그게 정말이지 꼭 스승 이화도와 비슷하게 생기긴 했다.
“이거 제가 그린 겁니다?”
“호오. 너 손재주가 꽤 좋구나?”
“그럼요, 누구 제잔데요.”
“철이야.”
“네, 스승님.”
“아까 이거로 물수제비 던지려던 거 다 봤다.”
“…….”
강철은 슬그머니 이화도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이내 반대 방향을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이화도가 그의 뒤를 벌 떼같이 쫓았다.
“철이 이놈! 나를 호수 물에 담가 버리고 싶은 거냐!”
“용서해 주세요, 스승님!!”
그게 두 사람의 즐거운 한때였다.
5년 후, 이화도는 산에 들이닥친 천마신교에 의해 온몸의 뼈가 분쇄되고 만다.
본래 천마신교는 근처에 있던 다른 문파를 무너뜨리러 온 것이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이화도가 불행히도 괜히 화를 입었다. 하필이면 그때 마침 산에 없었던 이강철은 뒤늦게 다 죽어 가는 스승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승님!!”
“철이야…….”
“누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마교… 천마신교 놈들이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무신 이화도의 최후라기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이미 아흔이 다 되어 가는 그이기에, 아무리 무신이라도 다수의 강자들을 상대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이강철은 분노에 차서 바닥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왜 하필 내가 없을 때 이런 일이! 젠장!”
“철이야, 난 이미 늦었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유언인 듯하니 잘 듣거라…….”
“스승님……!”
이강철은 이화도의 마지막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철이야, 네게 부탁이 있단다. 너의 주먹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너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게는 무리예요. 저 같은 팔푼이가 무슨 평화를 가져와요! 그건 무신인 스승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고요! 정신 차리고 좀 일어나 보세요, 제발!!”
이강철이 울부짖자 이화도는 빙긋 웃었다. 그러더니 품 안에 최후까지 감춰 뒀던 무언가를 꺼내 강철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건 판판한 돌이었다. 5년 전 강철이 스승에게 주었던 바로 그 돌.
“이건……! 이걸 아직까지 가지고 계셨어요?”
“철이야… 기뻤단다. 겨우 5년뿐이었지만, 나에겐 너무나 값진 5년이었어. 너를 제자로 가르칠 수 있어서 참으로 기뻤다…….”
이화도의 눈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화도의 얼굴에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미소였다.
“너 자신을 믿어라. 그럼 세상에 못 이룰 것이 없을 테니.”
그렇게 무신 이화도라는 불꽃이 꺼졌다. 절망하는 이강철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만이 흘러내렸다.
깊은 밤, 산속에는 짐승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 *
‘쯧.’
독방 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이젠이 긴 명상 중 떠올린 것은 옛 스승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