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그래서, 그럼 열쇠 조각을 가지고 있는 건 누구지?”
“그걸 내가 알려 주겠냐? 이 병신!”
“병신은 말이 좀 심하잖아, 병신 같은 새끼야.”
103이 반발심에 침을 퉤 뱉었지만 아이젠은 고개만 슬쩍 돌려 피했다.
아이젠은 사위를 둘러보며 감옥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오랜만의 신참에 흥분한 녀석, 아이젠이 그린우드의 핏줄이란 사실에 분노하는 녀석, 누가 오든 말든 별 관심 없는 녀석. 죄수들의 모습도 참 가지각색이었다.
아이젠은 열쇠 꾸러미를 슥 들어 보이며 말했다.
“잠깐 다들 주목.”
그러자 죄수들의 이목이 아이젠에게 집중됐다.
“나쁘지 않은 제안을 하나 할까. 열쇠 조각을 가진 죄수 세 명은 내게 그걸 바쳐라. 그럼 이 열쇠 꾸러미로 문을 따 줄게.”
“너 바보냐? 이 지하 감옥에서 탈옥한다고 해도 어차피 잡히는 건 순식간이야!”
103이 대표로 외치자 아이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누가 탈옥하래? 그냥 열어 준다고. 갇혀 있는 거 답답하지도 않아, 다들?”
“…….”
하나같이 한 덩치 하는 놈들만 모여 있는 곳이었다. 비좁은 잠자리가 만족스러운 죄수는 없을 테다.
저마다 열쇠 꾸러미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하나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나타났다. 아이젠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이동했다. 수형 번호 096이 그를 맞이했다.
096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여리여리한 체형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갇혀 있는 방 안에서는 왕 노릇을 하고 있는 듯했다.
“수형 번호 096?”
“그래, 수형 번호 125.”
“아이젠이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는데.”
“그럼 너도 날 도미니크라고 불러.”
수형 번호 096, 도미니크는 너스레를 떨며 혓바닥으로 제 입술을 핥았다.
그는 창살에 어깨를 기대 몸을 붙이더니 품에서 열쇠 조각을 꺼냈다. 마치 퍼즐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네가 찾는 건 이거다.”
“그냥 줬으면 좋겠지만…….”
“내가 천사라면 그러겠지.”
도미니크가 한탄하듯 웃었다.
“나는 2년 전 테오발트 가주를 암살하려다가 이곳에 잡혀 들어왔다. 종신형이지. 듣자 하니 너도 여기 두 번 수감됐다던데, 초면인걸?”
“두 번 다 어릴 때 일이라서. 철없을 때 얘기지.”
지금도 나이는 어리지만.
도미니크가 말을 받았다.
“그래? 어쨌든 종신형을 받았다 해도 이런 비좁아 터진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는 건 사양이다.”
“공감해. 나도 있어 봤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난 그린우드의 핏줄에 불만이 많단 말씀이야.”
순간 도미니크의 얼굴이 험악하게 변했다.
“문을 열어라. 나와 싸워서 이기면 열쇠 조각을 주지. 대신 네가 지면 내 방에서 내 수발을 좀 들어 줘야겠다.”
“수발?”
“순진한 척하기는. 삐쩍 곯아서 사내구실이나 제대로 하겠냐, 너?”
도미니크가 허리를 흔들어 보이며 아이젠을 조롱했다. 그러자 주변 죄수들도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다.
아이젠은 피식 웃었다. 다짜고짜 결투 제안이라?
아이젠은 아직 무혈신공을 조금도 운기하지 못했고, 또 결사신권은 초식만 머릿속에 남아 있을 뿐 제대로 쓸 수 없는 몸이었다. 하지만 이런 제안을 피할 그가 아니었다.
“직관적이어서 좋네. 알았어.”
아이젠은 열쇠 꾸러미에서 맞는 열쇠를 찾아 도미니크가 갇힌 방 문을 열어 주었다.
철컹!
도미니크는 방을 나서며 안에 있는 죄수들에게 말했다.
“그걸 가져와.”
그러자 죄수들이 도미니크에게 무언가를 가져다줬다. 그건 길이가 3척 정도 되는 나무 봉이었다.
‘이 지하 감옥 안에서 어떻게 저런 걸 구했지?’
아이젠이 의문을 가지는 사이 도미니크가 봉을 받아 든 후 문을 닫았다.
끼익― 쿵!
도미니크는 뻐근했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이 복도로 나오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2년 전에 갇혔다며? 그럼 2년 됐겠지.”
“그래, 2년 만이다. 그린우드 가문 핏줄의 얼굴을 보는 것도 2년 만이고.”
도미니크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이젠 폰 그린우드. 소문으로는 첩의 자식이라지?”
나 참.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자꾸 어머니를 들먹여.
“그래, 첩의 자식이야.”
“과연 서자라도 그린우드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있나 어디 한번 볼까?”
“그래라.”
“내가 한창 날릴 때 별명이 뭐였는지 알아?”
“모르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어차피 알려 줄 거지?”
“…‘마창술사 도미니크’였다. 날 꺼내 놓은 걸 후회하지 마라!”
팟!
도미니크가 아이젠을 향해 펄쩍 뛰어들었다. 그리고 봉 끝으로 아이젠의 이마를 가격했다.
그러나 아이젠은 그 작은 봉 끝을 손으로 덥석 잡았다.
‘구속구 때문에 손을 움직이는 게 불편하군.’
물론 그건 도미니크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도미니크는 제한된 손동작으로 봉을 이리저리 회전시켰다. 그러다가 한순간 봉을 높이 쳐들어 아이젠을 향해 내려쳤다. 옆으로 살짝 몸을 틀어 봉을 피한 아이젠은 도미니크를 향해 몸을 수평으로 던졌고.
퍽!
스쳐 지나가는 사이 도미니크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큭!”
후드득. 핏방울이 복도를 수놓았다. 고개를 든 도미니크의 코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새끼, 그린우드가 왜 주먹질을 하는 거야! 그린우드는 ‘참철검가’, 검술 가문이잖아!”
아이젠은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섰다.
“내가 여기 들어온 이유가 주먹을 써서야.”
“크크크. 크크크크. 그래? 재밌네. 이 정도는 해야 그린우드지!”
도미니크는 애써 웃으며 아이젠에게 달려들었다.
아이젠의 입가에선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놈은 데릭처럼 사정 봐줘 가며 상대할 필요 없겠지.
‘오랜만에 제대로 해 보는 대련인걸.’
자, 싸워 보자.
팟!
도미니크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아이젠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봉 끝이 한순간 쑥 앞으로 날아들었다.
‘빠른데? 제법.’
그러나 아이젠은 봉을 흘리고 그대로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결사신권, 박살(撲殺).’
빠직!
“크윽?!”
아이젠의 주먹에 오른쪽 뺨을 그대로 내어 준 도미니크는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나고 말았다. 맞은 부위가 안에서부터 출혈이 터진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고 있었다.
“이 새끼! 으윽!”
도미니크는 고성을 뱉은 후 비틀거리더니 이내 덜컥 무릎을 꿇었다.
아이젠은 구속구에 구속된 제 주먹을 바라보았다.
‘역시 약해.’
‘박살(撲殺)’은 결사신권의 가장 기초적인 기술이었다. 주먹으로 상대에게 외상을 입히며, 그 반동으로 몸 안에 있는 장기들까지 모두 휘저어 놓는 권법.
하지만 무혈신공이 바탕이 되어 있지 않고 아이젠의 몸 또한 허약하기 짝이 없다 보니 도미니크에게 치명타를 입히지는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도미니크는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일어났다.
“오오~”
“저 그린우드 새끼, 삐쩍 곯아서는 제법 터프한데?!”
“하지만 도미니크도 마찬가지야!”
“역시 마창술사라는 명성은 어디 안 간다 이건가?!”
죄수들이 휘파람까지 불어 가며 도미니크에게 호응을 보냈다.
아이젠은 까딱하면 또 부러질 뻔한 제 주먹을 만지작거리며 도미니크에게 다가섰다.
“몸이 꽤 단단한데?”
“네 주먹도 보기보다는. 크으, X발. 그 얇은 팔뚝으로 잘도 날 때렸겠다.”
도미니크가 다시 한번 제한된 손동작으로 봉을 휘휘 돌렸다. 그러더니 한순간 봉을 멈춰 세웠다.
“이젠 사정 안 봐준다, 이 새끼야!”
부웅!
봉이 가로로 붕 휘둘렸다. 아이젠은 허리를 살짝 숙여 날아드는 봉을 피했다.
“걸렸다, 이 자식!”
순간 봉이 하늘 높이 치솟는가 싶더니.
쐐액!
마치 땅이 푹 꺼진 것처럼 아이젠을 향해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