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런데 그건 어찌 물으시는지…….”
“음.”
모니카가 우물쭈물하며 물어보자 아이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곧 입을 열었다.
“모니카, 이건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하문하십시오, 도련님.”
“가문의 사람이… 그러니까 하인이 아니라 예를 들면 내가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하 감옥에 수감되나?”
“어음…….”
“한 번에 대답.”
“죄송합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선 이미 두 차례 수감되신 적이 있는데 왜 굳이 여쭤보시는 건지 궁금해서…….”
아, 그랬던가?
‘진짜 답이 없는 삶을 살았구나, 아이젠 폰 그린우드.’
오늘 하루에만도 여러 번 반성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젠에게는 기억이 안 나는 일이었다.
아이젠이 생각에 빠져 있는데 모니카가 아이젠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왜 그렇게 봐?”
“예? 아, 죄송합니다.”
“아니, 왜 보냐고.”
“그게…….”
모니카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도련님, 뭔가 어제랑 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이런, 티가 났나?
아이젠은 모른 체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냥 기억력이 좀 나쁠 뿐인데.”
“아뇨, 그 부분이 아니라, 뭔가… 늠름해지신 것 같습니다.”
늠름? 늠름이라. 이강철일 때도 여러 번 들어 봤던 말인지라 아이젠은 기분 좋다는 식의 내색은 안 했다.
“고마워.”
“예? 아, 아닙니다…….”
자, 그럼 자뻑은 여기까지.
아직 갈 길이 구만리였지만 아이젠은 그래도 실마리 하나는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혈신공을 수련하기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에 대한 실마리를 말이다.
‘깜빵 좀 들어가야겠다.’
가능하면 오늘 당장.
‘일단은 돌아가서 어떻게 하면 지하 감옥에 들어갈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젠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이젠의 방은 대저택의 2층 복도 끝 가장 깊은 곳에 있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제대로 닿지도 않는 공간. 현재 이 가문에서 아이젠의 입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저벅저벅―
아이젠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모니카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모니카, 구두를 신고 있는데 어떻게 소리를 안 내고 걸을 수 있지?”
특수한 보법이라도 배운 건가? 그렇다면 꽤나 수준이 높은 보법이었다. 중원 무림 남궁 세가의 보법도 이렇게까지 소리를 죽일 수는 없었는데.
설마 모니카에게 암살의 기재라도 있는 것인지? 그렇다면 아이젠도 위험할지 몰랐다. 모니카가 누군가가 심어 놓은 첩자라면 곤란해질 테니.
모니카는 잠시 말을 삼켰다가, 한 번에 좀 대답하라는 아이젠의 말을 되새기고 어벙한 얼굴로 답했다.
“그게, 도련님께서 소리 내면서 걸을 때마다 몸 안 보이는 곳에 상처를 하나씩 내겠다고 말씀하셔서…….”
“괜한 거 물어봤다……. 그냥 조용히 걷자.”
“넵!”
진짜 답이 없네, 아이젠 새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이젠은 2층 복도로 올랐다. 그리고 복도 끝 자신이 거주하는 방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방문 앞에 몇 개의 인영이 서 있었다. 모르는 얼굴의 남자 하나, 그리고 그 뒤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하녀 셋. 귀를 기울이니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릭 기사님, 아이젠 도련님께서 돌아오시거든 바로 부르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문 앞에서 이렇게 기다리시는 행동은…….”
“난 첫째 공자님의 명을 받아 이곳에 온 것이다. 네깟 년이 기사인 나를 쫓아내겠다는 거냐?”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아이젠 도련님께서 돌아오시면 저희가 경을 칠 터라…….”
“그건 너희 사정이지 내 사정이 아니다. 나는 기다릴 테니 그렇게 알아라.”
내용을 들으니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린우드의 첫째 공자가 아이젠을 부른 듯했다. 저 데릭이란 남자는 전달책이고.
‘첫째 공자라면…….’
아이젠의 머릿속에 있는 이름이었다.
게오르크 폰 그린우드. 아이젠보다는 한참 연상인 스물일곱 살이며, 이 그린우드 공작 가문의 다음 소가주로 유력한 후보.
마침내 데릭 쪽에서도 아이젠을 발견했는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것이 예절을 차린 인사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스치듯 본 데릭의 얼굴은 노골적으로 깔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
곧 아이젠과 데릭이 악수를 할 만큼 가까워졌다.
“도련님,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허가 없이 자리를 벗어나지 말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었을 텐데요?”
이게 첫마디?
‘이 새낀 뭐 이렇게 예의가 없어?’
물론 나이는 아이젠이 훨씬 어리겠지만, 어쨌든 아이젠은 귀족의 자제이고 이 데릭이란 자는 기사였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기사가 귀족의 공자를 대하는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박했다.
“잠시 집 구경을 좀 했을 뿐이다.”
“집 구경?”
…말이 짧네?
아이젠은 일단 참아 주기로 했다.
“그래, 집 구경. 내 집을 내가 둘러보는 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지?”
“‘내 집’이 아닐 텐데요? 테오발트 가주님의 집입니다.”
“어. 그 테오발트 가주님이 내 아버지야.”
“하아, 아버지라니.”
말이 또 짧네?
‘데릭이라고 했지?’
이 데릭이라는 자의 이름과 얼굴은 아이젠의 머릿속에 없었다. 다시 말해 아이젠에게 데릭은 별로 중요한 인물이 아니라는 뜻.
“생각이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아버지가 아니라 가주님이라고 하셔야죠. 가문에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만?”
아니, 근데 이 새끼가? 네가 뭔데 난리야, 인마. 내가 내 집에서 내 맘대로 떠들겠다는데. 싸가지 없네, 이거?
데릭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말씀드리겠습니다. 게오르크 첫째 공자님께서 아이젠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같이 가 주시죠. …큭큭큭.”
이젠 처웃고?
아이젠은 본디 참을성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이강철이었을 때부터 말이다.
“뭐가 웃기지?”
“아니, 큭큭, 그렇잖습니까. 도련님께서는 이 그린우드 가문의 넷째. 게다가 단전이 닫혀 있어 검을 배울 수조차 없는 몸. 그런데 내 집 타령이나 하고 있는 꼴이라니. 큭큭.”
이 새끼 보게?
‘아무리 내가 힘이 없는 순번이라고 해도 너 너무 말을 함부로 하는 거 아니냐?’
모니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불쑥 목소리를 올렸다.
“데릭 기사님! 도련님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예를 갖추십시오!”
그래, 말 잘한다, 모니카! 가라! 한마디 더 해!
데릭이 모니카를 향해 눈총을 쏘았다.
“지나치다고?”
짝―!
별안간 데릭이 모니카의 왼쪽 뺨을 날렸다. 모니카는 그 반동으로 풀썩 주저앉았다.
“으흑!”
“지나친 건 나를 대하는 네 태도다. 어디 감히 노예 주제에 기사에게 대드는 것이냐? 응?”
“……!”
“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지 못하겠나?! 네 목을 잘라 단죄해 주랴?!”
“죄, 죄송합니다……!”
모니카는 붉어진 뺨으로 사과했다. 꽤 아팠는지 눈에 눈물도 찔끔 맺혀 있었다.
아이젠은 그런 그녀를 보며 피가 식는 기분을 느꼈다.
‘…….’
모니카에게 무슨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16년 동안 봐 왔어도 그녀는 그저 하인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 데릭이란 놈이 아이젠 자신을 얕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건 그냥 보아 넘기기 어려웠다.
아이젠이 이강철이었을 때, 그는 권위 의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날 깔보는 놈들에게도 허허 웃어 줄 정도로 호구는 아니었는데.’
아이젠은 곧장 데릭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데릭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아이젠 도련님?”
“이게 뭐 하는 짓이냐는 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데릭 경.”
데릭이 팔을 탁 털자 아이젠의 손이 맥없이 그를 놓았다. 손가락이 어찌나 가는지 까딱하면 부러질 것 같았다.
“모니카는 나를 수행하는 하인이야.”
“그게 어쨌다는 겁니까? 하인이니 노예. 당연히 기사보다는 낮은 계급인데, 설마 노예를 때렸다고 뭐 훈계라도 하시려고요? 도련님 주제에?”
“나를 수행하는 하인이라는 건 달리 말하면 내 재산이란 소리지.”
아이젠이 데릭을 올려다봤다. 데릭의 키는 아이젠보다 머리 한 개 반 정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