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32화 (32/32)

32. 개척자

아프가니스탄의 차원 균열을 닫는 작업은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헬필드 바깥까지 기어 나온 어보미네이션들을 현대 병기로 일소하고 어벤저로 이루어진 부대를 헬필드로 투입해서 주변 정리를 마친 후, 최정예 부대로 차원 균열에 돌입해서 ‘보스’를 처치하는 일련의 작업은 다른 지역에서도 똑같이 해왔던 것이지만, 이 지역에서는 유독 피곤하고 힘들었다. 결국 김인수가 직접 나서야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김인수가 투입된 후로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아프가니스탄 지역의 차원 균열도 적절한 숫자로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차원 균열은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자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 어보미네이션 시체가 일종의 자원이 되어버린 이상, 여기 군벌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차원 균열 관리에 나서줄 것이다.

“이 정도면 됐겠군.”

김인수는 한숨을 토해내며 말했다.

“이제 갈 수 있겠어.”

오래전부터 계획해 오던 일을 실행할 때가 왔다. 김인수의 혼잣말이 지닌 숨은 뜻을 알아차린 이지희, 오연화, 구문효가 그에게 의미심장한 시선을 던졌다.

*

김인수의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현오준도 이미 알고 있었다. 사실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의 내로라할 정재계 인물들은 자신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에스파다 도 오르덴, 김인수의 향방에 대해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재계에서 보자면, 현대의 자원이라 일컬을 수 있는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를 확보할 수 있는 김인수는 20세기 후반에 석유를 손에 쥔 중동왕국의 국왕과도 비견할 만했다. 한때 WF가 그랬듯,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재계 순위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정계 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울 사태 때 이름을 크게 올리고, 그 후로도 별다른 결점 없이 활약해 온 김인수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아직까지도 아주 좋았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졌다고 봐도 될 정도였다. 그 국민적 호감을 바탕으로 정당을 창당하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 누구도 정확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비단 한국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다. 강력한 어벤저는 국제 정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어중간한 재래식 병기로는 제압은커녕 도리어 반격을 두려워해야 할 신시대의 군사력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점만 두고 따지자면 지구라는 차원에서 김인수보다 강력한 어벤저는 없었다.

이렇게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상황에서 쓸데없는 포섭 시도나 견제,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김인수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확실히 밝힐 필요가 있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은 벗었지만, 김인수는 앞으로도 질서의 검으로써 움직이길 천명했다. 지구의 차원 질서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에는 틈새 차원으로 향할 것이라는 대답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불만을 살 만한 것도 아니었다.

김인수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최적의 답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지난 2년간, 김인수는 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차원 균열을 닫았다. 혹시나 자신들의 자원줄인 차원 균열마저 닫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각 국가도 이대로 두면 지구라는 차원이 붕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모든 차원 균열을 닫지는 않을 것이라는 회유를 받아들여 김인수와 그의 특수부대인 ‘어스름’에 협조했다.

그런 와중에도 마찰과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2년 동안의 세월에 대해 김인수는 군대를 다시 한 번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라고 회고했다.

어쨌든 지금에서야 다 지난 일이다. 김인수는 정해진 숫자의 차원 균열을 닫았고, 남은 차원 균열들은 각국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써 지구에서의 그의 일은 이제 끝났다. 그러니 이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틈새 차원의 개척을!

*

“저도 같이 갔으면 했는데요.”

현오준이 삐친 듯 말했다.

김인수는 웬디의 차원 세포로 연결된 차원 문 앞에 서 있었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의 뒤를 이지희, 오연화, 구문효가 따를 것이다. 현오준은 그들의 마중을 나온 것이다.

마중을 나왔음에도 아직 미련이 남은 건지, 아니면 좀 더 단순하게 자기 혼자 남겨지는 것이 불만인지 별로 좋은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지구에 남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건 알고 있지만 말이죠.”

김인수의 말에 현오준은 툴툴거렸다.

“결혼도 하셨잖습니까?”

요 2년 새, 어스름에 참가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현오준은 결혼까지 했다. 상대 여성은 기자로, 현오준이 회귀하기 전에 친밀한 관계였던 여성이라고 했다. 비록 그동안 복수에 집중하느라 연애 같은 건 신경도 쓰지 않았던 현오준이었지만, 원래부터 상성이 좋았던 건지 이번 생에서는 별 인연도 없었던 그녀와도 급속히 가까워져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그래서 하는 소리입니다.”

현오준은 웃으며 말했다. 아직 결혼 1년 차, 깨가 쏟아지는 게 당연하고 실제로도 그런 부부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만 아직도 미혼인 김인수를 배려라도 하는 건지, 현오준은 자주 이런 식으로 너스레를 떨었다.

“사람 손이 부족해지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바로 달려갈 테니까요.”

“뭐, 그런 일이 없길 바라죠.”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야 제수씨한테 한 소리 듣는 건 제가 될 테니까요.”

“좀 들으면 어때서!”

거기까지 말한 현오준은 픽 웃었다. 김인수도 후, 하고 한숨처럼 웃었다.

“이걸로 끝은 아니죠?”

“당연하죠. 연화가 못 버틸 겁니다.”

“왜 거기서 제 이름이 나오죠?”

뒤에 있던 오연화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야… 너 거기선 게임도 못 할 텐데.”

“됐어요. 알아요. 그만하죠.”

김인수가 시작하기도 전에 항복 선언을 하는 오연화를 보며, 이지희와 구문효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오연화가 째려보자마자 구문효는 바로 웃음을 그쳤지만, 그거야 늘 있는 일이었다.

요 2년 사이, 이지희와 오연화는 확실히 친해졌다. 이제는 무르아냐 특유의 강렬한 질투심은 많이 희석된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오연화가 김인수에게 필요 이상으로 친밀하게 대하면 이지희가 바로 날아오는 건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도 하리라.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네, 다음에 뵙죠. 오실 때 연락 주십쇼.”

김인수와 현오준은 다음 주에 다시 볼 사람들처럼 인사했다. 실제로 그들은 다음 주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김인수 일행은 지구를 떠났다.

*

웬디의 차원 세포로 향한 김인수와 그 일행은 곧장 정복 사업에 돌입했다.

틈새 차원의 정복 사업은 초반에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웬디의 차원 세포에 인접한 차원 세포들은 비교적 규모가 작고 통합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각개격파를 하는 형식으로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점령전을 벌여 김인수가 군주로 있는 차원 세포의 규모가 커지는 만큼, 전선도 점점 더 길어지고 넓어졌다. 반면 팀의 인원수는 적다보니 전선에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빈틈을 메우기 위해 김인수는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후방에 웬디가 만들어낸 차원 괴수들을 배치해 방어에 돌렸다.

그러나 이 방어가 뚫리는 경우도 있었다. 주변 차원 세포들이 경계한 끝에 연합을 하거나 동맹을 맺어 김인수가 상정한 것 이상의 군세로 침입을 해온 탓이었다.

결국 김인수 측이 구사하는 전략의 양상은 침략전에서 방어전으로 변화할 수 없었다. 찾아오는 적들을 맞아 싸워 격멸한 후 도망치는 적들을 따라 추격전을 벌여 쳐들어가 세포를 탈환하거나 적들의 세포를 점령하는 식의 수법이었다.

새로운 전략은 효과적으로 작용했으나 주도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된 만큼 점령 속도가 느려졌고, 적들도 반격을 우려해 쉽게 쳐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결국 지루한 대치전으로 양상이 바뀌어갔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지구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틈새 차원에 머무르는 시간도 길어지기 시작했다.

웬디가 생성한 차원 괴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4명밖에 되지 않는 어벤저가 자리를 비우면 그만큼 전력누출이 심해지니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보급도 겸해서 교대로 지구를 다녀오는 게 고작이었다.

이러는 사이에 세월은 훌쩍 갔다. 지구와 달리 밤낮이 뒤섞인 세계인 틈새 차원인지라 체감은 더욱 가지 않았다. 더욱이 젊은 차원력으로 가득 찬 이 틈새 차원에서 지구인은 잘 늙지도 않았다.

미성년자였던 오연화는 쑥쑥 커 성인 여성의 모습이 되어 있었지만, 이미 성인인 김인수와 이지희, 구문효는 신체 나이로는 한 살 정도 먹었을까 말까한 정도였다. 오연화가 자라지 않았다면 이렇게 세월이 많이 지났음을 알아차리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5년이라는 세월을 틈새 차원 개척에 쏟아, 김인수는 드디어 지구와 인접한 차원 세포들을 모조리 점령하는 것에 성공했다.

*

“이제 다 이뤘구나.”

김인수는 한탄과도 같이 말했다. 이 틈새 차원 전부를 손에 넣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 틈새 차원이 신생 차원이라 지구에 비해 작다고 한들, 여기의 수많은 차원세포들을 전부 점령하겠다는 건 세계 정복을 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망상이었다.

지금도 김인수가 점령한 차원 세포들은 지구와 인접한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포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 거대해져 버렸기에 다른 명칭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차원 가지라고 하죠.”

의견을 물었더니, 이지희가 그런 제안을 했다.

“차원 가지?”

“네. 세포는 모여서 생물의 지체가 되잖아요? 그런 지체 중 대표적인 것 하나가 나뭇가지죠. 그래서 차원 가지. 형태도 닮았겠다, 괜찮지 않아요?”

“그렇군.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게 김인수가 점령한 차원 세포의 연방체는 차원 가지로 명명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게 김인수 소유의 차원 가지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김인수와 대립하던 주변 차원 세포들의 연합과 동맹도 5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단일 군주가 군림하는 차원 가지로 성장해 있었다.

이미 지구 주변의 차원 세포들을 통합하여 지구화시킨 김인수는 세력이 커진 여타 차원 가지들과 대립할 명분이 없었다.

그저 일개 어보미네이션이었던 다른 차원 세포의 군주들도 차원 가지의 군주로 옹립된 것을 계기로 상위 존재로 진화해, 이성을 갖춘 교섭이 가능한 상대가 되어 있었다.

그런 차원 가지의 군주들과 김인수는 휴전협정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들은 흔쾌히 교섭에 임했다. 자신들이 양면 전쟁으로 전선을 길게 늘여놓고 지연작전을 통해 시간을 끌어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거지, 김인수가 마음먹고 적극적인 정벌 전쟁을 벌이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변 차원 가지와 김인수의 차원 가지 사이에 바다를 놓아 가름으로써, 조약은 효력을 발휘했다. 물론 지형을 뒤바꾸는 이 작업에는 많은 차원력이 소비되었지만 동맹과 연합이 상당부분을 부담했기 때문에 김인수와 웬디에게는 그리 큰 부담은 아니었다.

이로써 일단 전쟁이 끝났다. 연합과 동맹은 아직 서로 대립하고 있었고 김인수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진 이상 그들끼리의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지대했지만, 그거야 김인수가 알 바는 아니었다.

“차원 가지가 여럿이라면 우리를 자칭할 명칭이 따로 필요할 것 같은데요.”

오연화가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연합과 동맹이 이미 있으니, 제국 어때요?”

“제국은 싫어.”

김인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진가규를 죽인 지 10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진가규에 대한 반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연방이라고 하지.”

훗날 지구인들은 지구의 영연방이나 미합중국과 구별해 차원 연방이라 부르게 되는 곳의 이름이 이때 명명되었다.

에필로그

가족을 잃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조차 모자라, 아예 이계로 추방까지 당했다. 그러나 그는 돌아왔고,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내몬 원수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는 하려고 했던 모든 일을 해냈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사실 누구나 그렇다. 설령 원수에게 부모를 살해당하지 않는다 한들 결국 누구나 혼자가 된다. 보통은 부모를 먼저 보내게 마련이며, 형제나 자식과 헤어지는 일도 있게 마련이다.

시간의 흐름은 그리도 잔혹하다. 사람을 혼자 남기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것 같은, 거스를 수 없는 힘. 그 힘에 저항해 혼자가 되지 않는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

스스로 움직여서,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

*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지희가 김인수에게 물었다.

“어떻게라니?”

“모든 걸 다 이루셨잖아요.”

“뭐, 이번 목표를 이뤘으면 다음 목표를 설정해야지.”

“그게 뭔데요?”

“아직 안 정했어.”

김인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까지 해낸 일에 대한 달성감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터였다.

그는 이계로 쫓겨났지만 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자신을 쫓아내고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진가규를 말살하는 데도 성공했다.

그런 데다 멸망을 앞둔 거나 다름없었던 지구라는 차원을 안정세로 돌려놓았고, 지구와 인접한 틈새 차원의 차원 세포도 점령해 연방도 일궈냈다.

지금은 연방의 세포들에 테라포밍을 실시하고 있다. 차원 균열이 열려 있는 지구에 안정성을 더하기 위한 방책이기는 하지만 다른 용도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지나치게 강한 차원력 때문에 어느 정도 이상의 능력이 되지 않는 어벤저가 아니라면 살아남기 힘든 환경이지만, 틈새 차원의 테라포밍이 진행되면 언젠간 여기도 지구인들이 와서 살 수 있는 땅이 될 것이다.

만약 지구에 운석이 와서 충돌하거나 하는 일이 생겨도, 인간이라는 종을 유지시키기 위한 보험까지도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었다.

김인수는 의무를 이행했고, 업적을 쌓았다.

하지만 그러던 와중에 그가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삶을 사는 법이었다.

“연방의 자원을 지구에 수출하면 거금을 손에 쥘 수 있겠지. 이건 내 오만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구인들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은 것 같으니 권력을 손에 쥘 수도 있을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한 김인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군.”

지금 지구는 차원 균열의 영향에서는 많이 벗어나 이제는 적어도 이전보다는 안전한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도 있게 되었건만. 아직까지도 고립주의에 빠져 각각의 국가들이 이권과 패권을 다투며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다.

20년 전의 SF소설에는 2020년쯤 되면 인류가 하나의 국가로 번영하리라는 이상향을 그려놓고 있었지만, 2030년이 넘어간 지금도 인류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런 지구에 뛰어들어 뭘 해보리라는 생각은 영 들지 않았다.

지금은 어엿한 대기업의 회장님이 된 현오준도 바쁜 와중에 휴가를 내서 이쪽에 피신해 와서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김인수에게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정계에 진출한 유곽희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휴가랍시고 여기 와서 전선에 투입되어 차원 능력을 마구 휘두르며 스트레스가 확 풀린다고 말할 땐 약간 그녀의 인성에 대해 의심도 들었다.

그만큼 쌓인 게 많은 것이리라. 외교와 교섭에 유혹 같은 능력을 쓸 것도 아닐 테니, 여기에서와는 전혀 다른 기술과 능력이 필요할 것이고. 숨 쉬는 것처럼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그들에게는 갑갑하고 답답한 일상이기도 하리라.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사는 것도 나름의 맛이 있기는 하겠지만, 김인수는 그게 자신의 취향은 아니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테죠!”

마치 김인수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것 같이, 이지희가 깔깔대며 웃었다.

“이미 이 열두 개의 강이 흐르고 다섯 개의 산맥이 가로지르는 차원 연방의 주인이신데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스승님의 것인데, 이제 와서 지구의 금과 권력이 탐나는 게 더 이상하죠! 지금 지구로 돌아가 봐야 번잡스럽기만 할걸요?”

“어, 그건 그렇네.”

영토의 넓이로만 따지자면 이미 김인수는 러시아만큼의 국토를 일궈냈다. 웬디 혼자서는 도저히 운영이 안 되서 차원 가지를 몇 개로 분할해서 분봉까지 했으니 명실상부한 황제나 다름없었다. 본인이 싫어서 여길 제국이라 칭하지 않았을 뿐, 그는 여기에서 이미 진가규가 이룬 것 이상을 이뤘다.

아니, 김인수는 이미 황제 이상이다. 막대한 차원력이 휘몰아치는 틈새 차원의 특성상, 마음만 먹고 대가만 치르면 물리법칙조차 뒤틀 수 있으니 가히 신의 영역에 근접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이미 여기서 이만큼을 이뤘는데 왜 지구로 돌아가 다시 밑바닥부터 쌓아올리겠는가?

김인수가 자신의 말에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지희는 다시 크게 웃었다. 그게 조금 약이 올라서, 김인수는 반격을 해보기로 했다.

“그럼 넌 뭘 하고 싶은데?”

“제가 하고 싶은 건 10년 전부터… 이지희로서 살기 전부터 정해져 있어요.”

웃음을 그치고, 이지희가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저기, 스승님.”

“왜?”

“이 연방에 주민이 너무 적은 것 같지 않아요?”

“주민?”

“네.”

이지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 괴수들 말고요.”

“흠… 그래? 그럼 지구에서 어벤저들을 좀 데려와 볼까? 어차피 이대로는 테라포밍이 너무 늦어져서 정착 사업도 실시해야 하니.”

“저한테 더 좋은 생각이 있어요.”

이지희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아이를 낳죠. 그것도 많이.”

“아이?”

“네!”

이지희가 눈을 반짝거렸다.

“연화 보셨잖아요. 이 틈새 차원에서는 사람의 성장이 빨라져요. 저도 조금 더 빨리 여기 들어왔으면 좋았을 텐데. 걔 가슴 커진 거 보셨어요?”

“넌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어쨌든! 그렇다면 여기에서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들도 엄청나게 빨리 자랄 거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죠. 금방 이 차원 가지의 인구가 불어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들은 누가 낳지?”

“그……! 건…….”

이지희가 뭔가 의욕에 차서 말하려다가,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에 입을 다물고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풀이 죽어 고개를 숙이더니, 면목 없는 듯 헤헤 웃었다.

“연화요?”

“연화?”

“…네.”

조금 전까지의 들뜬 표정은 어딜 간 건지, 이지희의 표정은 진지했다.

“연화는 스승님을 좋아해요.”

“알아.”

“이제 더 이상 아이도 아니죠.”

“알고 있어.”

“그렇다면… 그럼 더 이상 거부하실 수도 없으시겠네요.”

“…….”

이지희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찬찬히 들어보기 위해, 김인수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 아이는 좋은 아이예요. 착한 아이죠. …스승님하고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요.”

“지희야.”

“저는!”

이지희는 김인수의 말을 막으려는 듯, 소리치듯 말했다.

“연화를 죽이려고 했었어요. 연화가 제게서 스승님을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건…….”

“제가 생각한 게 아니라고 변명하는 건 간단하죠. 그래요, 그건 무르아냐의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무르아냐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그건 제 생각이었던 거죠. 이지희로서의 저도 마음 속 어딘가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는 연화에게 살의를 품을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이지희의 목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한계였다.

“저는 벌을 받아야 해요. …저는 스승님과 어울리지 않아요. 그런 행복한 결말은 제 이야기의 결말로… 악역의 결말로 어울리지 않아요.”

뚝뚝 끊어지는 이지희의 말 사이의 빈자리를 눈물이, 울음을 참는 숨소리가 메웠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김인수는 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만하구나, 이지희.”

“…네?”

김인수의 말이 너무나도 의외였던 듯, 이지희는 눈물이 뚝뚝 흐르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예전부터 나는 무르아냐의 마음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어.”

“아…….”

이지희의 눈동자가 충격의 빛으로 물들어갔다. 이미 한 번 거절당했다고 한들, 다시 한 번 거절당하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도 가슴 아픈 일인 모양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무르아냐였고, 지금의 그녀는 이지희임에도 불구하고도.

그러나 김인수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럴 여유도 없었고, 다른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지만. 그런 이유만은 아니야. 무르아냐가 인간이 아니란 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지. 제자를 여자로 보기 힘들었다는 이유도 아니야. 내가 무르아냐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야.”

“바로, 이런……?”

“그래, 이야기의 결말을 자기 마음대로 정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 오만함이 영 마음에 안 들었단 말이야. 자신의 출신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멋대로 리셋하려고 하질 않나, 이번엔 멋대로 자신을 악역으로 만들질 않나.”

“……!”

이지희는 면목 없는 듯 김인수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이지희의 턱에 손을 대어, 김인수는 억지로 자신과 시선을 맞췄다. 그의 평소와는 다른 태도에, 이지희는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며 김인수는 후 하고 웃었다.

“이지희는 그렇지 않았지.”

“네?”

“나는 이전부터 이지희라는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랑과는 거리가 조금 있을지도 모르는 감정이라고 스스로 판단했었지.”

“스, 스승님.”

이지희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넌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네, 예?!”

“네게 더 가르칠 게 없기 때문이다. 나를 더 이상 스승이라고 부르지 마라.”

“그, 럼…….”

울먹거리는 이지희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김인수는 가학적으로 미소 지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조금 전엔 잘도 오만한 소릴 그 입으로 지껄였겠다. 대담한 발언도 하고 말이야.”

“스, 아니, 저…….”

“네가 내 제자가 아니게 되었다 한들, 난 널 놓아줄 마음이 없어.”

“어… 저…….”

“내 것이 되어라. 이지희.”

“……!”

이지희의 얼굴이 진홍으로 확 물들었다. 그리고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자신의 턱을 짚은 김인수의 손을 확 치우며, 이지희는 소리를 빽 질렀다.

“너, 무, 해요……! 너무해요, 스승님……!!”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그럼 뭐라고 불러요!!”

“네 멋대로 불러봐.”

“…아저씨…….”

“…그거 말고.”

이지희가 수줍게 웃었다.

“서방님, 할게요.”

김인수는 후 웃었다.

“그렇게 해.”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이를 백 명이나 낳는 건 너무한 거 아니에요?”

오연화가 질린 듯 말했다.

김인수가 이지희를 선택한 후, 그녀는 구문효와 함께 틈새 차원을 떠나 지구로 돌아가 있었다.

1년 후에는 청첩장이 날아왔다. 구문효가 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오연화의 마음을 사로잡아 결혼에까지 골인해 버린 것이다. 아마도 구문효가 직접 만든 파르페가 둘 사이에 꽤 큰 역할을 했을 거라고 김인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연화가 구문효와 결혼식을 올린 후 1년 동안 소식 없이 지구에서 잘 살다가, 자신의 결혼기념일이랍시고 불쑥 찾아온 게 지금이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오연화가 보고 있는 광경이 이것이었다.

김인수와 이지희 사이에서 난 아이들.

일백 명.

“나는 내가 암탉이 된 기분이었어.”

이지희가 어딘지 모를 먼 곳을 바라보며 덧없이 말했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애를 낳은 거나 다름없으니, 이지희의 암탉이라는 비유는 의외로 맞아드는 면이 없지 않았다.

물론 이건 그녀가 원한 것이긴 했다. 아주 많은 아이들을 낳아 이 텅 빈 공간을 채우는 것. 그래도 아무리 원한 바라 한들, 고충은 고충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인수는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틈새 차원의 젊은 차원력 때문일 거야. 뭐, 나도 여기서 애를 낳아본 적은 그전까지 없었으니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거지만. 여기선 하루 만에 바로바로 애가 나오더라고. 게다가 다들 어벤저의 소양을 갖고 있지.”

대신 김인수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리고 2년 만에 이렇게 크고요?”

“아니, 1년 만이야.”

입에 손가락을 물고 오연화를 올려다보고 있는 예순여섯 번째 아들을 가리키며, 김인수는 말했다. 지구인 기준으로는 다섯 살 정도는 되어 보이지만, 사실 아직 만으로 한 살이다.

“너희 애도 여기 두면 바로바로 클걸?”

“히익?!”

오연화의 반응에, 김인수는 크게 웃었다.

“어쨌든 왜 지구에 못 돌아오나 했더니, 이걸 보고나서 납득이 갔어요. 그야 이 정도로 애들을 많이 키우고 있으면 정신없어서 못 올 만도 하네요.”

“응……. 뭐, 사실 그렇게까지 손이 많이 가는 아이들은 아니지만. 금방금방 크는데다, 다들 튼튼해. 웬디도 도와주고 있고.”

이지희는 면목 없는 듯 말했다.

“그래도 일단 숫자가 있다 보니……. 집들이 못 가서 미안해.”

“결혼식에는 왔지만요.”

“그거야, 뭐…….”

“내가 좋아했던 남자를 데리고. 무신경하게.”

“하하하하.”

마른 웃음을 짓고 있는 이지희를 흘겨보며, 오연화가 문득 말했다.

“행복해요?”

“응.”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그럼 됐어요.”

오연화는 홀가분한 듯 대꾸했다.

*

가족을 잃었던 남자가 여기 있다. 그가 입었던 상처는 결코 회복되지 않고, 언제든 다시 벌어져 잃어버렸던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입은 상처는 앞으로도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겠지만, 그 상처로 인한 고통을 잊는 것은 가능하리라. 시간이 갖는 가장 강력한 잔혹함은 망각이다. 고통을 완전히 잊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기억은 켜켜이 쌓이고, 과거의 상처보다 현재와 미래의 행복이 더 선명한 법이다.

과거의 불행을 현재와 미래의 행복으로 덮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답은 ‘그렇다’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오래도록 행복할 것이다. 그가 새로이 맞이한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리라.

귀환해서 복수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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