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승리 선언
유곽희의 주선으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기자회견이 열리게 되었다. 유연학은 이미 실각했지만 유곽희의 영향력은 아직 사회 전반에 미치는 모양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가면을 벗는다는데 기자회견을 마다할 언론 따위는 없었다. 이건 유곽희에게 빚을 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빚을 지우는 상황인 게 맞았다.
그거야 뭐 어쨌든, 김인수는 오랜만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쓰고 사람들 앞에 나서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기자들만 모아놓고 간단하게 인터뷰나 할까 했었는데 유곽희가 판을 크게 벌렸다. 위치는 시청 앞 광장에 TV 생중계는 물론, 헬기까지 떴다. 기자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도 모여들어 장관을 연출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위상이 김인수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는 걸 잘 나타내는 방증이었다.
“연설까지 할 수 있게 될 줄은 몰랐는데.”
김인수는 그냥 가면만 벗고 퇴장할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마이크가 주르륵 달려 있는 단상을 보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는 게 오히려 실례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준비된 연설문도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가 가면을 쓴 채로 간이 대기실에서 나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갑자기 우레와 같은 환호성이 터졌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사람들의 환호성은 어느새 구호가 되어, 다함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름을 외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이크가 있다 한들 그 환호성 앞에서는 모두 묻혀 버리고 말 터였기에, 단상 앞에 선 김인수는 환호성이 잦아들기까지 잠자코 기다려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에스파다 도 오르덴입니다.”
소란이 좀 멎은 후 김인수가 그렇게 말하자 다시 와아아아, 하는 환호성이 터졌다.
“이 정도로 환영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인수는 잠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그저 이 가면을 벗고…….”
김인수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웅성거림이 커졌기에, 김인수는 잠시 말을 멈추어야 했다.
“…여러분 앞에 제 본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이렇게 질질 끌 일도 아니었다.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에 손을 대었다.
그때였다.
타앙, 하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저격이었다. 그것도 파멸탄을 사용한, 어벤저를 상대로 이보다 더 효과적일 수 없는 총격이었다. 혹시나 위력이 부족하면 어쩌나 싶었는지, 대물저격총까지 동원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후.”
그 총탄을 들여다보며, 김인수는 흥미로운 듯 웃었다.
“꺄아아아악!!”
한 타이밍 늦은 비명 소리가 시청 앞 광장을 내달렸다. 총성에 놀란 것이리라.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 저격을 실행한 암살자는 지금 허공에 둥실둥실 떠서 버둥거리며 김인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으니까.
김인수가 발동한 염동력 손아귀에 붙잡혀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염동력자가 아니라면 그 손아귀가 보이지 않을 테니 그냥 허공을 날아오는 것처럼 보이리라.
“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가면을 벗는 자리에서 저격을 당해 목숨을 잃고 역사의 뒷면으로 사라지길 바라는 자들이 있군. 하기야 그게 더 극적이기는 하겠지.”
김인수는 냉소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는 것은 간단하다. 분명히 김인수의 미간을 노렸을 총탄은 허공을 갈랐다. 그가 그냥 버릇처럼 발동시키고 있는 시야 왜곡 능력 덕이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었다.
“하나 미안하네만 나는 여기서 그런 식으로 내 이야기를 끝낼 생각은 없네.”
김인수는 날아온 암살자를 자신 앞에 무릎 꿇렸다. 암살자의 검은 복면을 벗겨내자, 그 맨얼굴이 드러났다.
진가규였다.
그 얼굴은 아직 앳되어 20대처럼 보였지만, 그래서 진현우와도 닮아보였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 아닌 진가규였다. 이미 진가규의 30대 시절 얼굴을 한 번 본 김인수는 그가 진가규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가는 걸 감상하며, 김인수는 웃었다.
“가짜로군.”
진짜 진가규와는 ‘등록 코드’가 달랐다. 더군다나 진짜 진가규가 일선에 나와서 직접 저격 총을 들고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기껏해야 예비로 만들어둔 클론 정도겠지.
분석 스킬을 대놓고 써도 막아내질 못할 정도로 능력도 별 볼 일 없었고, 분석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김인수가 사용하고 있던 시야 왜곡 스킬도 간파 못 한 시점에서 이미 확정적이긴 했지만 말이다.
WF가 국영화 순서를 밟으면서 숨겨져 있던 비밀 연구소도 해체되고 그 산물도 풀려난 탓에, 이 클론 진가규도 기어 나온 것이리라. 배후가 있기야 하겠지만, 제대로 된 배후라면 저격총 하나 달랑 들려놓고 클론에게 직접 저격하라고 시키지도 않을 터였다.
이미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한 탓에 상황이 잘못되면 그냥 죽고 다시 시작하는 게 버릇이 된 진짜 진가규의 습성을 생각하면, 진가규 본인이 직접 이 클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진가염이 만약의 경우에 꼭두각시로 내세우기 위해 만들었다는 게 훨씬 말이 되었다.
“아니야! 난 진짜 진가규다!”
김인수의 지적을 들은 클론 진가규는 격분하며 외쳤다. 실로 어린애 같은 반응이었다. 정신면에서 조정이 덜 끝난 것일지도 모른다. 클론 진가염들은 좀 더 완성도가 높았다.
김인수는 그 클론을 향해 코웃음을 한 번 쳐주고는 차갑게 고했다.
“그렇다면 진가규의 죗값도 네가 치러야 하겠군.”
김인수의 일침을 들은 진가규 클론의 표정이 그 자리에서 굳어져 버렸다.
김인수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서필지와 아가임에게 절망으로 인해 축 늘어진 진가규를 넘겨주었다. 이미 진짜 진가규의 목을 직접 친 김인수의 입장에서, 진가규의 클론 정도는 복수의 대상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아마도 유곽희는 이 클론에게 볼일이 있을 터였다.
그런 귀찮은 뒤처리는 유곽희에게 맡기기로 하고, 김인수는 다시 단상에 올랐다.
“제 소개를 하도록 하죠. 이번에는 정식으로.”
김인수는 가면을 벗었다. 김인수의 얼굴이 대중들 앞에, 카메라 앞에 드러났다. 사람들의 눈이 모조리 자신에게 향한 것을 느끼며, 김인수는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이름은 김인수. 본래 지구인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로 근근이 살아가다가, 사소한 이유로 진가규의 눈에 뜨여 실험체가 되고 말았습니다.”
후, 하고 김인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기를 기다린 뒤에나, 그는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10년 전에 이미 차원 균열을 여는 능력을 갖고 있었던 진가규는 절 억지로 차원 균열 안에 밀어 넣었죠. 저는 10년 동안 틈새 차원에서 어찌어찌 살아남아 힘을 키웠고, 이렇게 지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WF를 무너뜨린 건 복수심 때문이었습니까?”
앞줄에 앉아 있던 기자 한 명이 큰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면 거짓말이 되겠군요. 하지만 그들이 이 차원에, 이 나라에 한 짓은 모두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악으로 인해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무너뜨린 것은 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입니다.”
김인수는 강한 어조로 웅변했다.
“WF는 너무나 거대했고 강력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무너뜨릴 생각마저 들지 않을 정도로 공고했죠. 그 앞에서 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다른 차원에서도 해왔던 일을 하는 것 정도였습니다. 차원의 질서를 지키는 것. 차원 균열을 닫는 것. 그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었고, 그래서 전 그걸 했을 뿐입니다.”
김인수의 목소리에 열기가 더해졌다.
“그러나 WF의 후원을 받지 않은 새로운 대통령을 뽑은 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서울 사태라 부르는 그 시위에 목숨을 걸고 나와 청와대까지 행진한 것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의 힘이 없었더라면 WF는 결코 무너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김인수를 보는 시선도 뜨거워졌다. 김인수는 그들의 시선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입술은 움직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우리가 뽑은 대통령은 저들의 손에 의해 살해당하고 말았고, 이 나라에는 아직 저들의 영향력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제국이 도래하는 것을 막고 공화국을 지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서 저는 감히 선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우리는! 승리했습니다. 악의 도래를 막고, 질서를 지켰습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환호성이 광장을 메웠다.
아직 한국은 답답한 상태였다.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얻은 게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답해 주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없었다.
그 대답을 김인수가 한 것이다. 스스로는 체감하기 힘들, 누군가가 말해줘야 비로소 실감이 날 대답을.
“이 위대한 승리 앞에 저 개인의 사소한 복수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여러분께 감사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김인수는 사람들 앞에 깊이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
김인수는 사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경찰이나 검찰, 판사들에게 도움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애초에 그가 어떻게 가족을 잃었는가. 권력과 금력 앞에서 복종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언론도 마찬가지이고, 대중들도 마찬가지이다. 언론은 진실을 전하는 대신 돈이 되는 뉴스를 전했고, 그런 언론의 선동 앞에 대중들은 놀아났다. 아무도 김인수 일가의 불행에 주목해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진가규는 그리도 쉽게 김인수의 납치라는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계에서 돌아온 김인수는 자신의 이름을 숨겼다. 모두가 적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만, 누구나 자신의 적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최재철에게서 이름과 얼굴을 빌리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쓰고 활동했다. 그리고 확실히 자신의 편이 되어줄 사람들을 찾았다.
이지희, 현오준, 오연화, 구문효.
그들은 분명 김인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이 없었더라면 결코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힘만을 빌려서 복수에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틀렸다.
유곽희와의 접촉은 김인수가 예상할 수도 없었고 의도할 수도 없었던 변수였다. 그리고 그 변수는 그에게 크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유곽희에 의한 WF 내부에서의 내응조차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저들의 호응이었다.
김인수가 가장 믿지 않았던 사람들. 한국 사람들, 대중들!
여론은 힘 있는 자들의 의도대로 휘둘리고 좌지우지된다고 생각했다. 김인수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제까지 그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백히 드러난 악의 앞에서 사람들은 일어났다.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이들이 우군이 되어주었다. 심지어 목숨까지 걸고!
그렇기에 김인수는 적들을 끝까지 몰아붙이고, 진가규의 목을 베어 넘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합니다.”
그렇게 재차 감사의 말을 전하는 김인수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상은 결코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남자를 향해, 세상은 환호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