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복수의 끝
진가규는 눈을 떴다.
방금 전까지 진가규는 서른 살의 청년이었다. 인생의 목표는 입신양명. 집안의 도움 없이 자신의 힘으로 홀로 당당히 서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그 청년은 이제 없다. 잡아먹혔다.
이미 200년을 살아온 노회한 괴물이 고작 30년 밖에 안 된 자아를 집어삼켰다. 그 괴물이 30세 청년의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지금 여기에 서 있었다.
그것이 지금의 진가규였다.
“돌아… 왔구나!”
회심의 미소가 자연스레 그의 입가에 자리 잡았다.
그의 주관적인 인식으로는 방금 전, 그는 죽을 뻔했다.
아니, 사실 죽었었다. 그의 육체적 생명은 끊겨 있었다. 다만 ‘진짜로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데 성공했을 따름이다.
물론 그건 이제 다 ‘지난 세계’의 일이다. ‘지금 세계’의 그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으……. 죽는 건 몇 번을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군. 진짜 기분 나쁘네.”
자신이 스스로 찌른 심장 부위를 어루만지며, 진가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회귀에 성공했다.
비록 모든 소유물과 어벤저 스킬, 차원력은 놓고 와야 했지만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다. 다시 시작하면 될 일이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지난 세계에서 했던 실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
“이번에야말로 승리해 주마.”
이를 득득 갈며, 진가규는 말했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혼잣말이 지나쳤는지, 방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와 말했다. 그녀의 이름은 유연희. 친구인 유연학의 여동생이자 지금 진가규의 처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사이로, 10년의 연애 끝에 결혼에 성공했다.
“응? 아아.”
진가규는 웃었다.
유연희가 지금도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이용할 수 있었다. 이미 두 번, 그는 그녀의 감정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이번이 세 번째가 될 터였다.
그는 필통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에 푹 찔렀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여보!”
유연희가 놀라 그를 향해 달려왔다. 사랑하는 남편이 자해를 했다. 그것을 본 그녀는 지금 ‘궁지에 몰렸다’.
이럴 때 찾아오는 놈이 있다.
[힘을 원하는가.]
방금 전, 진가규는 회귀에 성공했다. 그것은 차원을 찢고 지난 세계와 지금 세계를 연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찢겨진 차원의 틈새를 타고 최하급 계약마 한 마리가 기어 나왔다. 그리고 유연희가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말을 건 것이다.
“여보… 나를 왕으로 만들어달라고 대답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진가규는 유연희에게 말했다. 유연희는 패닉에 잠겨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는 그냥 자신의 사랑하는 남편이 하라는 대로 대답했다.
“저 이를 왕으로 만들어줘요!”
[계약은 성립되었다.]
동시에 유연희의 존재가 계약마에 의해 삼켜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진가규는 미친 듯이 웃었다.
“좋아, 됐어! 힘이 솟아오른다! 하하하하!!”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린 옛 사랑의 모습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그의 앞에는 이제 찬란한 성공과 승리만이 남아 있을 텐데, 그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정복해 주지!”
야망이 불처럼 타올랐다.
“그래, 그렇군.”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진가규의 얼굴이 굳었다.
“이 세계에서도 너는 똑같은 선택을 하는군. 뭐,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그 목소리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의 주관적인 인식으로는 방금 전까지도 이야기를 나누던 상대의 목소리였다.
진가규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서 있었다.
“너, 너는……! 네가 여기 어떻게!”
그가 진가규처럼 회귀를 한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지난 세계’에서 ‘이번 세계’로 직접 건너온 것 같은, 별로 바뀌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어!!”
“그래, 원래대로라면 불가능해. 원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지난 세계와 이번 세계는 각기 다른 차원에 존재한다. 차원간의 이동은 대단히 한정되어 있고, 기본적으로는 차원 균열로 밖에 오갈 수 없다.
그리고 ‘이번 세계’에는 차원 균열이 ‘아직’ 없다. 지구의 차원 질서가 흐트러지고 차원 균열이 마구잡이로 열리는 원인이 진가규인데,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네가 여기로 왔잖아? 네가 여기 올 때의 균열을 비집고 들어왔지.”
남자가 답을 알려주었다. 답을 들은 진가규의 표정이 굳었다.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 파주의 차원 균열을 통해서 네가 점령한 차원 세포를 찾고, 그 차원 균열의 관리자를 포섭해서 네가 전이해 간 차원의 좌표를 알아냈지. 그리고 네가 회귀할 때 발생한 파동을 근거로 삼아서 간신히 여기에 올 수 있었어.”
남자는 뒷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곧 미소가 걸렸다.
“고생한 보람이 있네.”
미소가 점점 벌어져, 이가 보일 정도가 되었다. 드러난 그의 송곳니에서, 살의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 소개를 하지. 내 이름은 김인수. 내 어머니는 네가 교통사고를 위장해 죽였고, 내 아버지는 네가 차량 내 자살을 위장해 죽였다. 그 충격으로 내 동생은 자살했고, 일가에서 오직 나만 살아 남았어.”
남자, 김인수는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복수 같은 건 꿈도 못 꾸고 조용히 살아가던 나를 네가 납치했다. 넌 내게 이렇게 말했어. ‘혹시나 네가 성공이라도 하면 골치 아파지니 말이야’. 그리고 넌 날 차원 균열로 집어던졌다. 그 때만 해도 내가 이렇게 살아나올지는 몰랐을 테지만, 난 살아서 돌아왔다.”
김인수의 눈동자는 복수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오로지 네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진가규는 김인수의 의도를 알았다. 하필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혹시라도 만약 내가 널 놓치고 회귀를 허용한다면, 넌 다음 세계의 날 찾아 죽일 테지. 그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난 네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겠다.’
지난 세계에서 김인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이름을 밝히는 이유는 뭘까. 간단하다.
이제 여기에서 ‘혹시’와 ‘만약’은 없다.
완전한 승리를 확신한 선언이었다.
“넌 날 이미 죽였어!”
공포에 질린 채, 진가규가 외쳤다.
“아니, 넌 자살했어. 난 아직 널 죽이지 못했어.”
내쏘는 것 같은 김인수의 분노가 깃든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진가규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땅을 기었다.
“지금의 내가 뭘 했다는 거냐! 지금의 난 네 부모를 건드린 적도 없어!!”
“그 말은 맞아.”
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다.
김인수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 쓰기 전까지는.
“내 이름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 차원의 질서를 수호하는 존재다.”
그것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철가면이었다. 그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이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힌 널 처형하겠다.”
“으, 으아아아아아!!”
진가규의 절망이 깃든 절규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신살검이 번뜩였다.
퍽!
*
진가규의 목이 지면을 데구르르 굴렀다. 신살검으로 베었으므로 더 이상 그가 환생하거나 회귀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로써 진가규라는 존재는 완전히 끝났다.
김인수의 복수도 종결을 맞이했다.
“하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벗으며, 김인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실감이 나지도 않았다. 지난 10년 동안,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투자해서 맞이한 결말은 의외로 소탈했다. 세계가 하나 무너지거나 뭔가 폭발하거나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가규가 영원히 죽었다. 사람 하나의 몸에서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 결과만이 남았다.
김인수도 알고는 있었다. 이건 그렇게 단순한 업적은 아니었다.
자신이 방금 한 이 행위로 인해, 그는 자신의 지구와 지금 있는 이 지구, 두 개의 차원을 구했다.
진가규를 내버려 두었다면 어벤저만을 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사방에 차원 균열을 열어젖히고 이번에야말로 세계를 정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짓을 반복하다보면 차원 질서가 무너지고 틈새 차원의 차원력이 쏟아져 지구라는 차원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테니, 차원을 구했다는 표현은 그리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뭐, 속이 시원하거나 허무하거나. 그렇지는 않군.”
복수에 대해 다룬 작품은 많지만, 그런 작품들에서 흔히 보이는 허탈감이나 짜릿함은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이런 거구나, 하는 묘한 기분이 드는 정도였다.
느껴지는 건 달성감이 아니었다. 통쾌함이 아니었다. 복수에 성공해 내면 그런 느낌이겠지, 상상한 것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뭔가를 해냈을 때 느껴지는 감정들이다. 특별한 업적을 쌓았다든가, 강적으로부터 승리를 쟁취했다든가.
그런데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한 걸 했다.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 졸리니까 잠을 잤다. 그런, 1 다음에 2가 오는 것 같은 당연히 이뤄져야 할 일이 이뤄진 것뿐이라는 느낌이었다.
당했으니 되갚아줬다.
물론 배가 고파도 밥을 못 먹을 일도 있다. 졸려도 잠을 못 잘 일도 있다. 김인수는 이 복수를 달성하기 전까지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욕구가 지금 해소되었다.
다시 제로가 되었다.
그것이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다. 두 끼를 굶었다가 드디어 끼니를 때웠을 때, 사흘을 밤 샜다가 드디어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느낄 법한 그런 감정이었다.
“아, 그렇군.”
김인수는 그제야 자신이 지금 느끼는 기분을 정의해 냈다.
“나는 지금 만족한 거로군.”
그것이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이름이었다.
*
방금 전까지 진가규의 처였던 어보미네이션이 김인수의 눈치를 보다가, 진가규의 시체를 덥석 물고 방으로 질질 끌고 들어갔다. 김인수는 그 어보미네이션을 일단 내버려 두었다.
“최후의 만찬이로군.”
김인수가 저 어보미네이션을 그냥 내버려 둬도 여긴 헬필드도 없으니 경찰이 알아서 충분히 처리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쓸데없이 피해를 늘릴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는 그 자체만으로 이 차원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차원 질서를 위해서도 남겨둬서 좋을 게 없었다.
어보미네이션이 진가규의 시체를 다 먹길 기다린 후에, 김인수는 어보미네이션을 덥석 붙잡았다. 어보미네이션은 ‘깽’ 하는 소릴 냈지만 반항하지 않았다. 반항하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힘의 차이가 크다는 걸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그걸 그대로 들어서 그냥 차원 금고에 밀어 넣은 후, 김인수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에 그냥 머물면 부모님과도 만날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곧 픽 웃고 말았지만.
이 세계의 ‘부모님’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의 김인수의 부모일 뿐, 지금 여기 서 있는 김인수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타인이다.
더군다나 죽은 진가규가 30세 정도니, 김인수의 세계를 기준으로 40년에서 5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이 세계에서 김인수의 부모는 아직 어리거나 태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마저도 높았다.
그런 부모님을 만나서 뭘 어쩌겠단 말인가? 부모님이 지금의 김인수를 만나는 바람에 인생에 비틀림이 생긴다면?
말 그대로 다른 차원의 영향을 받아 존재 그 자체가 뒤틀려 버릴 위험마저 있었다.
만나볼 이유가 없었다. 만나서도 안 됐고.
“차원 질서를 지킨다는 놈이 나서서 차원 질서를 어지럽힐 이유가 없지.”
게다가 진가규가 회귀하기 위해 열었던 작은 차원의 비틀림은 곧 닫히고 말 것이다.
김인수가 있던 세계와 달리, 이 지구의 차원 질서는 아직 공고하다. 비틀림이 닫혀 버리면 돌아갈 방법도 사라지게 된다. 사실은 이러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그저 바란다면, 이 세계의 김인수는 행복하길.”
김인수는 짧게 기도하고, 초시공의 팔찌에 차원력을 밀어 넣었다.
*
포탈을 통과하자, 그곳은 웬디의 차원 세포였다.
“선생님!”
포탈에서 나오자마자 오연화가 김인수에게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웬일인지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아니, 왜 이래?”
영 평소답지 않은 오연화의 모습에 김인수가 사뭇 당황하며 묻자, 오연화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돌아오지 않으실 줄 알았어요.”
“금방 해결하고 돌아온다고 했잖아.”
“그렇지만…….”
말하기 그리 기껍지는 않은 듯, 오연화는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다 마음을 굳힌 듯,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에는 선생님의 부모님이 계시잖아요.”
“응.”
“저라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오연화도 부모를 잃었다. 그것도 어린아이일 때. 물론 지금도 어린아이지만, 지금보다도 더 어릴 때.
“후.”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김인수는 짧게 웃었다.
“네 입장이 되서 생각해 봐라. 넌 날 여기 두고 거기서 안 돌아오겠냐?”
“그야 전 돌아오죠.”
오연화는 별로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르죠.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는 만큼, 선생님이 절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입술을 쭉 내민 채, 어째선지 좀 삐친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김인수는 웃어버렸다.
“그건 그렇구나.”
그 대답에 오연화는 낙심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기, 선생님. 여긴 ‘나도 널 좋아한단다’라고 대답해 주셔야 맞거든요?”
“한국에는 아동청소년보호법이라는 게 있단다. 넌 네 선생을 범죄자로 만들 셈이니?”
“여긴 아직 한국이 아니거든요.”
“그건 그렇다만.”
김인수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이제 돌아가야지. 나의 세계로.”
그의 그런 말에 오연화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우리 세계죠!”
“그래, 우리 세계.”
*
끼니를 굶어가며 사흘 밤을 샜어도, 끼니를 때우고 잠을 좀 잔 후에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김인수가 할 일은 태산같이 남아 있었다. 진가규를 죽인 것은 말하자면 그동안 미뤄왔던 숙제를 해결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제 10년 묵은 여름방학 숙제를 해치웠어도 오늘은 오늘의 숙제를 또 해치워야 한다. 그게 인생이라는 것이다.
WF가 지구에 남긴 상처는 크고 깊었으나,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륙이 쪼개질 정도의 지진도 일어나지 않았지 않은가. 무한히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바다의 구멍도 지구에는 아직 뚫리지 않았다. 지구는 회생 가능하다. 그러나 노력을 기울여 치유하지 않으면 언젠간 되돌릴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 일하는 중이죠. 저만 왔어요. 칭찬해 주세요.”
김인수의 질문에 오연화는 잘난 척 하며 대답했다.
“다행이로군. 너 말고도 다들 일을 내팽개치고 왔더라면 걱정 좀 할 뻔했어.”
애초에 오연화도 여기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던 게 아니다. 단지 오연화는 어벤저 스킬 외에는 사무 능력이나 교섭 능력 등 다른 실무적인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전투 외의 업무를 많이 맡지 않았다. 그 덕에 다른 사람들에 비해 여유가 좀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김인수도 오연화가 웬디의 차원 세포에서 죽치고 있었던 걸 그다지 탓하지 않았다. 그녀가 괜히 사명감에 휩싸여 혼자 차원 균열을 헤매면서 닫고 다니는 것보다는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는 게 훨씬 나았다.
오연화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차원 균열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많이 생기는 공간이다. 혼자보다는 둘이 가는 게 낫다.
“상황은 어때?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없었어?”
“선생님이 자릴 비우신 시간은 5분 정도밖에 안 됐어요. 상황이 바뀔 만한 시간은 아니죠.”
“어, 그래? 나한테 유리한 가설이 들어맞았군.”
김인수도 다른 사람이 회귀한 차원으로 이동하는 건 처음이었던지라, 확신 같은 건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저쪽 차원에서 보낸 시간과 상관없이 포탈을 통과하는 시간인 5분만 소요될 거라고 가설을 세울 수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천년 뒤에 올 수도, 완전히 실패한 경우에는 아예 못 돌아올 수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가설이 참이라고 증명되었다. 이로써 인류의 지식은 한 단계 더 진보했다. 반복 실험을 통해 이론을 완전히 정립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김인수도 다른 목적도 없이 리스크를 짊어질 생각은 없었다.
“네. 제가 기다리고 있던 시간도 그 정도뿐이죠. 더 길었으면 감격적인 재회가 되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로군.”
“그렇죠, 뭐.”
오연화는 어째서인지 좀 아쉬운 듯 대답했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그 모습으로 계실 거예요?”
“그 모습? 아, 이 모습?”
김인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구 현오준 팀의 팀원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지구의 진가규를 처치하고 올라오면서 김인수로서의 얼굴을 공개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기에 본 모습을 공개한 거지만, 그를 계속 최재철인 줄 알았던 팀원들은 다소 어색해했다.
팀원들 중에서는 오연화가 특히 좀 낯설어했다. 구문효가 적응이 좀 빨랐던 편이고. 현오준은 지난 세계에서 김인수를 최재철의 모습으로 처음 만난 탓인지 익숙해지기 전까지 시간이 약간 필요한 듯했다.
김인수의 모습을 익숙해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지희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 다만 그녀의 경우는 문제가 있었다. 낯설어하지는 않았지만, 김인수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했다.
“나를 속였어!”
그런 소리까지 들었다. 하기야 무르아냐의 기억을 가진 이지희의 입장은 다소 난처할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다. 이지희는 그냥 최재철의 학생이 되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최재철이 사실은 무르아냐가 찾아다니던 김인수였으니.
그래서 김인수도 그녀가 휘두르는 주먹을 그냥 맞아주었던 거다. 그런데 주먹을 맞아주는 것까지는 감내할 수 있었지만, 그 뒤로 이지희가 김인수의 얼굴도 마주 보려고 하지 않는 건 김인수 입장에서도 좀 껄끄러웠다.
이제까지는 진가규를 잡아 죽여야 한다는 생각에 해결을 뒤로 미뤄두었지만, 앞으로도 이지희를 다시 볼 생각이라면 이 문제도 어떻게든 해결을 하긴 해야 했다.
“뭐… 그래도 이게 내 진짜 모습이니까.”
그렇다고 김인수는 최재철의 모습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최대한 빨리 자신의 정체가 김인수인 걸 알려야 했다.
김인수는 앞으로 눈에 띄는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그런 와중에 적을 만들 가능성은 대단히 높았다. 그러다 보면 최재철의 부모에게도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그런 민폐를 끼칠 수야 없었다.
‘최재철의 부모도 만나야겠군.’
김인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최재철의 죽음을 알리고, 진실에 대해서도 알려야 했다. 모르는 게 더 나은 진실도 있다지만, 이 문제는 그 경우에 속하지 않았다.
이제까지는 복수가 최우선 과제였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해야 할 과제는 비단 이것뿐만은 아니리라.
절로 한숨이 나올 법도 했지만, 오연화 앞인지라 참았다.
“아뇨, 양복 사이즈가 안 맞아서요.”
그런데 오연화가 의외의 발언을 했다. 그러고 보니 김인수가 입고 있는 양복은 맞춤 양복으로, 최재철의 몸에 완벽하게 맞춘 사이즈였다. 그런데 지금은 김인수의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양복도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양복도 새로 맞춰야겠군.”
“그때는 저도 데려가세요.”
오연화가 말했다.
“양복점에는 따라가지 못했잖아요.”
오연화는 김인수가 이지희와 함께 갔었던 장소를 전부 다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어떤 심리에서 비롯된 건지는 상아탑의 교장씩이나 한 김인수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어쨌든 오연화의 그런 제의를 굳이 거부할 이유도 없었기에, 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말하자면, 영화관에도 안 갔지.”
“영화관에도 가야죠.”
“그래, 그러자. 일을 다 처리한 다음에.”
“지희 언니도 같이요.”
오연화의 그 말은 좀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오연화가 이지희를 어떤 종류의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것 또한 감안하자면 더더욱 그랬다.
오연화 또한 김인수와 이지희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을 알고 있다. 그 갈등을 봉합하라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오연화는 이런 발언을 했다.
“…그래.”
그렇다면 김인수는 고개를 끄덕여야했다. 그것이 이치에 맞는 행동이리라.
*
김인수가 자릴 비웠던 건 고작 5분이었기 때문에, 상황이 그렇게 많이 바뀌지는 않았다.
물론 김인수 본인은 파주의 차원 균열을 통과해 진가규가 군주로 있던 차원 세포를 점령하고 관리자를 심문하느라 더 많은 신경을 쏟느라 시간을 많이 썼지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달받고 있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대한민국이 입은 피해는 막심했다.
일단 대통령이 죽었다. 진가규는 대통령을 사로잡고 항복을 받아 민주공화정을 끝낸 후, 쓸모가 없어진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대통령 당선인 또한 죽었다. 그는 WF의 쿠데타가 시작되자마자 암살당했다.
새롭게 선거를 해야 하는 비용은 이미 초래된 사회 혼란에 비하자면 별것도 아니다. 임시적으로 당선인의 러닝메이트가 부통령으로 취임해 대통령 업무를 대행하고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일 뿐이었다.
나라의 대표가 없기 때문에 행정과 외교가 완전히 멈춰 버렸다. 그나마 관료들이 멀쩡한 건 다행이어서, 현상 유지는 가능했지만 문제를 해결하거나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당연히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군부 쿠데타가 다시 일어나지 않은 건 이미 한 번의 쿠데타가 시민의 손에 의해 저지당한 걸 다들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야심이 큰 군 고위 간부라 하더라도 지금 속내를 드러내는 건 위험하리라 생각할 만도 했다.
대한제국 반대 시위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인명이 손실되었지만, 그만큼 어벤저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이들을 군대로 압도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폭격기로 서울을 초토화시켜 버릴 기세로 폭격이라도 하면 혹시 모를까.
당연하지만 폭격을 가하거나 항공모함을 동원할 정도의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일 만한 파벌은 한국군 내부의 어디에도 없었다. 여전히 전시 작전 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으므로, 차라리 미군이 대한민국을 점령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가능성이 더 높을 정도였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군대로 제압하기 껄끄럽다는 점에 있어선 다른 강대국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적인 비난도 비난이지만, 설령 점령한다 한들 한국인 어벤저들이 레지스탕스가 되어 저항한다 생각하면 한국이란 나라가 별로 먹음직스럽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혼돈 속에서 새롭게 힘을 얻은 어벤저들이 폭도로 변하지 않은 건 OJ가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간혹 사회혼란을 타 강도로 돌변한 소규모 길드가 나오기는 했지만, 곧 OJ에 의해 제압당했다.
어벤저들을 대량으로 고용해 체계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집단은 원래부터가 WF와 OJ 정도였고, WF가 국가 내란죄로 토벌되었으므로 이제는 OJ뿐이다. 그런 OJ를 상대로 소규모 길드나 각 개인 어벤저가 뭘 해보기는 사실상 힘들었다.
시선을 달리 해서 보자면 지금 쿠데타를 실행할 수 있는 집단 또한 OJ뿐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그 OJ가 사회질서를 되찾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으므로, 대한민국은 결정적으로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다.
“황제가 되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현오준이 농담기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이라면 황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저더러 진가규 같은 짓을 하라는 겁니까? 농담 치곤 질이 안 좋군요.”
“아, 죄송합니다. 그게 그렇게 되는군요.”
현오준은 바로 사과했다.
“하도 답답하니 이런 말이 나오는군요. 강력한 리더가 나와서 우리를 끌어주었으면……. 그런 생각이 요즘 자꾸 듭니다.”
“지금은 21세기입니다, 사장님. 20세기의… 19세기의 방식으로는 국가가 부강해지지 않습니다.”
“그야 그렇겠지요. 뭐, 제 실언은 그냥 이대로 잊어주십시오.”
WF의 세력은 국가 내란죄로 토벌 당했지만, 아직 지엽적인 조직이 남아있었고 그들 중 상당수는 진가염이나 진가충의 클론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WF를 지지하는 세력도 미약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진가염과 진가규가 보여준 젊음을 되찾는 능력, 특히나 진가규가 자신의 황제 즉위식 때 언급한 불멸의 능력을 탐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 중에는 자산가나 정치가가 많았으므로 더욱 골치가 아팠다.
그런 이들을 솎아내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초법적인 힘. 법과 도덕, 이치에 맞게 일을 처리하고자 하면 어쩌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숙제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현오준이 하고 있는 일이 바로 그런 일이었다. 초법적인 권한도 없이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을 의심하고 견제하는 것.
OJ의 사장일 뿐인 현오준에게는 수사권도 없을 뿐더러 재판권도 없었다. 그저 일신의 안위, 당사의 안위, 나아가 국가의 안위를 위해 견제하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도 했다.
“하기야, 올바른 방법이란 늘 귀찮더군요. 그 귀찮음 때문에 생긴 사고… 체르노빌 사고 같은 걸 생각하면 당연히 감수해야 하겠지요.”
현오준은 한숨을 푹 내쉬다가 문득 김인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김인수 씨는 저보다 나이가 많죠?”
“네.”
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재철과는 달리.”
“이젠 형님이라고 부르면 되겠군요.”
하도 골치가 아프다 보니 아예 다른 생각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김인수는 그런 현오준의 의도에 어울려주기로 마음먹었다.
“형님은 좀……. 안 그래도 무력 집단인데. 혹시나 도청이라도 당하면 괜히 오해받을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럼 아저씨라고 할까요?”
“아뇨, 아저씨한테 아저씨라고 불리면 그것도 좀. 그냥 모르는 아저씨를 부르는 거 같지 않습니까?”
“저 아직 아저씨는 아닌데요.”
“그럼 저도 아직 아저씨 아닙니다.”
해봤자 무의미한 그런 이야기를 넋두리처럼 떠들다가 현오준은 결론이라도 내듯 말했다.
“그럼 그냥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젠 구문효 씨도 이 호칭 안 쓰는 것 같던데.”
“…뭐, 그렇게 하시죠.”
더 거부해 봐야 좋은 게 나올 것 같지는 않았기에, 김인수는 체념한 듯 한숨처럼 대꾸했다.
*
김인수는 최재철의 부모를 찾았다.
최재철의 죽음에 대해 그의 부모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김인수는 고민을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 상세한 사항은 가려놓기로 했다.
‘최재철은 서울에서의 시위에 참가했다가 WF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조금 단순하지만, 그렇게 설명하기로 했다.
그날 시위에서는 많은 시민이 살해당했고, 어벤저도 많이 죽었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최재철이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길을 가다가 불량배를 만나서 협박을 당하다가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렸다.’
그런 설명보다는 훨씬 정상적이었다.
때로는 현실이 이야기보다도 황당무계한 법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필요한 법이다. 그것이 결국에는 기만일지라도, 김인수는 자신이 정의롭기 위해 진실을 털어놓는 것보다는 위선일지라도 지어낸 이야기를 늘어놓는 쪽을 선택했다.
“아드님은 정의로운 분이셨습니다.”
김인수는 최재철의 상사인 것으로 했다. 시위에도 함께 참가했지만, 그는 살아남고 최재철은 살아남지 못했다고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로 최재철의 부모가 그에게 원한을 품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되더라도 감내할 생각이었다.
“아드님 덕분에 우리나라는… 정의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단어를 고르다가, 김인수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최재철의 어머니가 울음을 터뜨린 건 바로 그 시점이었다.
정의가 다 무얼까. 그런 건 상관없다. 그저 내 가족이 살아있는 게 훨씬 나을 텐데. 최재철의 어머니가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인수는 생각한다.
나도 복수하고 싶지 않았다고.
애초에 복수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렇다면 자신은 그저 그냥 숨죽인 채 살았을 거라고, 설령 진가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계급제를 선포하고, 자신과도 같은 일반인들은 노예로 취급하더라도 그냥 입을 닫고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진가규의 연설을 듣고 분연히 일어난 시민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 것은 분명 정의감이었을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일어난 것이리라.
평범한 시민이 정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건 뭔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정의에 대해 생각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 악이 있기에, 사람은 비로소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
그렇기에 정의라는 단어는 불길하다. 쉬이 입에 올려서는 안 되는 단어이다.
김인수는 한숨을 참았다. 자신의 입에서 이미 튀어나간 실언을 되삼킬 수는 없다.
“아드님의 통장입니다.”
김인수는 100억 원이 든 최재철 명의의 통장을 내밀었다.
인생을 바꿀 만한 금액이다. 이 돈은 최재철의 가족을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들 가족이 생각 외로 현명하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곤 해도 김인수는 그들 가족을 위한답시고 이 통장의 돈을 빼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건 오만이다. 최재철의 부모가 어리석을 거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만큼 무례한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김인수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최재철의 명의로 된 통장에 든 돈이니 최재철의 것이다.
그렇게 말이다.
최재철의 어머니가 그 통장을 열어보고 놀라는 표정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기뻐하더라도, 이딴 거 필요 없으니 내 아들 내놓으라며 찢어버리더라도, 그 어느 쪽의 반응을 보이더라도 김인수의 속은 별로 편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김인수는 바로 인사를 하고 나오려고 했다.
“고맙습니다.”
최재철의 어머니의 그 말이 김인수의 뒤통수를 때렸다.
그 말의 의미를 곱씹을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감사한 의미가 무엇인지 되묻는 건 논외다. 이야기를 지어낸 것을 들켰다 한들, 바뀌는 건 없다. 아들을 먼저 보낸 어머니의 심정은 부모를 억울하게 보낸 아들의 마음보다 더 클까. 그런 걸 비교한들 아무 의미가 없다.
잠깐 멈췄던 걸음을 김인수는 다시 떼었다.
그들의 인연은 여기까지이리라.
*
최재철로 얻은 재산을 모두 최재철의 부모에게 증여해 버렸기에, 김인수는 졸지에 무일푼이 되어버렸다. 그는 지금 빈털터리다.
“집 팔았다면서요? 저희 집에 와서 살래요?”
아무리 그렇다고 오연화의 그런 제안에 쫄래쫄래 따라가 기둥서방이 되어버릴 김인수는 아니었다.
“그래서 제 집으로 오신 겁니까.”
“응.”
김인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말할 것도 없이 구문효였다.
“이틀 정도만 신세질게. 지금 호적상으로는 김인수는 행방불명된 채 사망 처리 된 인물이라서. 돈이 있어도 집을 못 사. 뭐, 지금은 내 호주머니에 한 푼도 없기도 하지만.”
“뭐, 물론 저야 좋지만요.”
김인수가 되어버린 그를 서먹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구문효는 사람 좋게 웃어보였다.
“뭐, 행정 처리가 다 끝나면 김인수로 완전히 부활하게 될 거야. 그럼 틈새 차원에서 가져온 황금을 환전할 수도 있게 될 테고, 집도 살 수 있게 될 테니. 그렇게 되면 너한테 이렇게 폐 끼질 일도 없게 되겠지.”
“그건 좀 아쉽네요. 그냥 여기서 평생 사셔도 되는데요.”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
김인수는 그렇게 대답하곤 구문효가 만들어 준 계란 볶음밥을 입안 가득히 퍼 넣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아예 이렇게 집에 찾아와 직접 대접을 받아보니 확실히 알았다. 구문효는 서비스가 너무 과했다. 이런 집에서 계속 얹혀살다간 순식간에 혼자선 집 문도 못 여는 인간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너랑 결혼할 여자가 부럽군.”
“그렇다고 저한테 청혼하시면 안 돼요. 받아버릴지도 모르니까.”
“너, 그런 농담 듣는 건 싫어하는 주제에 직접 하는 건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조심해.”
구문효는 하하 웃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웃는 얼굴에다 대고 정색하고 진담이라고 말해주는 것도 뭐해서, 김인수는 그냥 계란 볶음밥이나 마저 먹었다.
*
조상평의 은신처. 사실 이제 조상평 일당도 더 이상 은신을 할 필요도 없고 그들도 여기서 사는 것도 아니지만, 이 장소는 여전히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 유곽희의 약속 장소로 쓰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유곽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마 인규의 형님께서 살아계셨을 줄이야.”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가 김인수라는 건 유곽희에게는 지금 처음 밝히는 것이다. 딱히 밝힐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숨겨둘 이유도 없기에, 김인수는 그냥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고 그녀와 만나러 왔다.
“제 신세가 좀 웃기게 보였을지도 모르겠군요. 혼자서… 아무도 복수해 줄 사람이 없으니 나라도 복수해야 한다고 그렇게…….”
그렇게 말하는 유곽희의 얼굴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바늘로 찌르면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명확하게 하자면 유곽희는 김인규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인간이다. 과거에 같은 학교를 다녔을 뿐, 그리고 고백했다가 차였을 뿐인 인간.
그런 인간이 복수를 대리하고자 나섰다. 그것도 맹렬한 복수심에 불타서.
“아니, 나는 네게 고마운데? 네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일이 풀리지는 않았을 거야. 어쩌면 내가 복수하기까지 5년이고, 10년이고 걸렸을지도 모르지. 애초에 그 정도 세월은 감수할 각오로 시작한 거였는데, 네가 도와줘서 이렇게 쉽게 해낼 수 있었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네요.”
유곽희는 아직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그럼 진가규는 완전히 죽은 건가요?”
“그래, ‘다음 세계’에까지 넘어가서 완전히 죽였지.”
김인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몫은 남기지 않고 완전히, 내가 혼자서 깨끗하게 먹어치웠어. 이건 좀 미안하군.”
“그 ‘식은 음식’은 원래부터 당신이 드셔야 했던 거였어요. 제가 주제에 맞지 않게 나섰던 거였죠.”
그래도 아쉬운 듯, 짧은 한숨을 내쉰 후에 유곽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역시 진현우의 원본도 당신이 처리하셨던 거로군요. 그럼 박기범도?”
“온 날 바로 죽였지. 날 살인죄로 신고할 건가?”
“설마 그럴 리가요. 박기범은 진가충을 죽인 후 투신자살했는걸요.”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유곽희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렇게 따지면 저도 진가충을 죽였는걸요. 그리고… 사실 사죄드려야 할 일이.”
“응? 뭐지?”
“김전훈은 제가 죽였어요.”
“뭐?”
의외의 발언에 김인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김전훈은 김인규를 괴롭힌 4인 중 하나다. 김인수는 그를 온 몸의 뼈를 박살내기만 하고 살려두었는데, 그런 그를 유곽희가 죽였다니.
놀란 김인수의 시선을 유곽희는 민망한 듯 피했다.
“그냥… 박기범도 오원추도 진현우도 죽었는데 김전훈만 살아있다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충동적으로 그만. 제 입김이 닿는 WF계열의 병원에 입원해 있길래 의료사고를 위장해서 죽였죠.”
“그렇군.”
김인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몰랐다. 하기야 언론 보도도 유곽희가 막았을 거고, 그 뒤로 김인수 본인이 김전훈 문병을 갈 것도 아니었으니 알 도리가 없긴 했다.
“화 안 내시나요?”
김인수의 덤덤한 반응이 생각 외였던지, 유곽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난 그저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걸 피하고 싶었을 뿐이니. 차라리 고마워해야 맞겠군.”
“의외로군요.”
이번에는 유곽희가 눈을 휘둥그레 뜰 차례였다.
“저라면 돌아오자마자 전부 다 죽이고 시작했을 텐데.”
“뭐, 내 경우에는 정보도 부족했고. 괜히 주목받고 싶지 않았어. 김인규를 괴롭혔던 4인방을 차례차례 죽였다면, 김인규의 관계자가 돌아왔다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건 또 그렇겠군요.”
유곽희는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쨌든… 아버지를 복권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현오준 사장에게서 들었어요. 에스파다 도 오르덴께서 언질을 주지 않으셨다면 저희 아버지도 WF의 협력자로 처벌받았을지도 모른다고.”
“그건 내가 한 게 아니야. 그저… 처벌 대상자를 진가규에게서 작위를 받은 인간으로 한정한 것뿐이니까.”
진가규는 오로지 어벤저들에게만 작위를 내렸다. 그리고 유곽희의 부친인 유연학은 어벤저가 아니었다.
인위적으로 차원력과 어벤저 스킬을 부여하는 기술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적으로는 진가규의 친구라고 알려진 유연학이 이런 기술의 혜택에서 완전히 제외된 건 조금 의외였다.
어쨌든 유연학은 그런 혜택에서 완전히 배제된 덕에 국가 반역죄의 처벌 대상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네가 직접 네 어벤저 부대를 이끌고 육군 본부를 탈환해 준 공로도 있으니, 네 아버지가 진씨 일가의 편이라고 생각한 인간도 없어진 거지.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여론이 안 좋아지면 정부도 처벌을 할 수밖에 없어졌을지도 모르니, 네가 네 아버지를 네 손으로 살린 거라고 보는 게 옳을 거야.”
“그건 오르덴께서 명하신 바대로 행한 것뿐입니다만.”
“행동한 건 너잖아?”
만약 유곽희가 육본의 탈환에 실패하고 진가염의 의도대로 폭격이 이뤄졌더라면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터였다. 그렇다고 진가염이나 진가규의 운명이 바뀌지는 않았겠지만, 침몰하는 배에 휘말려드는 인간은 적을수록 좋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꽤 큰 공로를 세운 셈이다.
“뭐, 그래도 WFF는 국영화되는 건 못 막았지. 사실 난 막을 생각도 없었지만.”
유연학의 WFF는 물론, 다른 모든 WF 계열사는 국영화 절차를 밟았다.
진가규로부터 작위를 받지 않은 일반 사무직 직원들은 소속만 바뀌었을 뿐이라 업무가 동결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유연학은 여기에서 예외가 되었다. 아무리 처벌 대상에서 벗어났다고는 하지만 그는 WF의 간부직에 있었기에 퇴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도 은퇴하실 때가 되어서요. 어차피 계약직이기도 하시고.”
그에 대해서는 유곽희도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쌓아둔 재산도 많으니 여생은 편안히 보내시겠죠.”
“그렇군.”
“그보다 오르덴께서는 앞으로 어쩌실 건가요?”
유곽희의 입에서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나야말로 쌓아둔 재산이 많으니,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아뇨, 그거 말고.”
“그럼?”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요.”
유곽희의 시선은 진지했다.
“밝히실 건가요? 대중들에게.”
“딱히 그럴 필요가 있을까?”
김인수는 가볍게 생각했지만, 유곽희는 고개를 저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영향력은 커요. 정치가들이고 언론인들이고 절대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을 겁니다. 물론 그들이 진실을 캐낼 가능성은 낮지만, 오히려 그게 더 문제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름을 악용할 거다?”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 들 거예요. 상상력으로 가십을 만들어낸다든가……. 대역을 내세울 가능성도 크죠.”
“너처럼?”
“…네.”
유곽희는 김인수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당장 유곽희 본인이 아가임을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 분장시켜 활용한 적이 있었다.
“그 정도까지 할까?”
“하죠.”
유곽희는 단언했다.
“본인께선 자각이 없으실지 모르겠지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시민들을 지키며 싸우는 장면은 방송으로 다 나갔어요. 외신에까지 다 나갔죠. 아마 지금 대통령으로 출마하시면 당선이 유력할 정도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설마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생각이 없을까?”
“사람들이 냉정을 되찾는다면 다르겠지만, 뭔가에 취해 있을 때는 생각이 없어지게 마련이죠.”
유곽희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서 받은 자신의 철가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 이 가면에는 엄청난 가치가 있다는 걸 아셔야 해요. 당신은… 그 정도의 일을 하셨으니까요.”
거기까지 말한 유곽희는 문득 얼굴을 붉혔다.
“저기,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니, 갑자기 왜?”
“그냥요. 당신이라고 부르는 건 좀 너무… 무례한 것 같아서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유곽희의 얼굴은 더욱 붉어져 있었다.
“그러도록 해.”
“감사합니다.”
김인수의 대답에 유곽희는 뭐가 그렇게 감사한 건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말했다.
“어쨌든 알았어. 그냥 이대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를 어둠 속에 숨기는 건 별로 안 좋을 수도 있다는 거로군?”
“네. 오라버니… 에게도요.”
새로운 호칭이 아직 입에 맞지 않는지, 그녀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린 후에나 말을 이었다. 자기가 그렇게 불러도 되는지 물어본 주제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맥락도 없이 그런 소릴 했다.
“그 소릴 왜 지금 하지?”
“깜박했어요.”
유곽희는 줄곧 팬이었던 스타를 앞에 둔 10대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다.
*
이지희는 줄곧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 방이라는 게 자기보다 어린 오연화네 집의 방이었다는 점은 다소 자존심 상할 만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존심을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스승님이 날 속였어!
“아니야.”
-나와 다시 만나기가 싫었던 거야, 그래서 모르는 척을 했던 거지!
“아니야.”
-날 속인 채, 이용만 한 거야! 지난 세계에서처럼!!
“아니야!”
이지희는 눈을 떴다. 오늘도 꿈을 꾸었다. 무르아냐의 꿈이었다. 무르아냐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고, 이지희의 인격을 침식하고 있었다.
이지희가 이제껏 보내온 인생은 그다지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어릴 때 돌아가셨고, 이지희는 삼촌네에서 키워졌다. 삼촌은 이지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삼촌도 그녀의 부모가 남긴 유산이 탐이 나서 그녀를 떠맡긴 했지만, 그는 아이를 자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싫어했다.
그나마 이지희가 학대당하지 않은 건 그녀가 충분히 눈치가 빨랐고, 삼촌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둘의 동거는 두 사람 모두에게 불편했다.
그래서 이지희가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삼촌은 기뻐했다. 그녀를 숙소 딸린 양성소에다 떠맡기는 대신 비싼 수업료를 매달 내야했지만 삼촌은 기꺼이 부담했다. 그녀의 부모가 남긴 유산에 비하면, 그리 큰 부담도 아니었으리라.
양성소에서의 생활은 고되었지만 내일의 꿈이 있기에 견딜 수 있었다. 아이돌이 되는 그 날을 위해서 그녀는 그 나이 대 여자아이에게는 분명 가혹한 훈련과 다이어트를 명목삼은 빈약한 식단을 감내했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가 결정되었고 음반도 냈지만 그녀는 뜨지 못했다. 사장은 그녀에게 ‘스폰서’를 강요했고 그녀는 거절했다. 그걸로 끝났다.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쌓여진 고난은 그저 거품일 따름이었다.
이게 이지희가 보내온 과거이고, 일생이었다. 고통과 좌절의 세월이었다. 그렇게 20년을 보낸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법조차 잊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흑백으로 밖에 떠올릴 수 없는 이지희의 과거에 비해, 무르아냐의 꿈은 그녀가 보기엔 총천연색과도 같았다.
이지희와 달리 무르아냐는 성공했고 꿈을 이뤘다.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다듬어가 꽃피운 무르아냐는 영웅이 되었다.
무르아냐가 이루지 못한 거라고는 사랑 정도였다.
사랑…….
“스승님…….”
이지희에게 있어서 스승님은 최재철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무르아냐는 이미 사랑을 잃었지만, 이지희는 사랑을 하고 있다. 그녀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랬기에 이지희의 인격이 무르아냐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마저 조건이 동등해진다면, 그녀가 이지희로 남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은 이지희인 그녀는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매일매일 이지희의 인격은 갉아 먹히고 있었다. 아니, 갉아 먹힌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못하다. 그녀는 그저 무르아냐가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똑똑.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를 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언니?”
오연화였다. 이지희에게 있어서는 소중한 동료이자 동생, 친구였다. 동시에 연적이기도 했지만, 이지희 본인은 그 점을 별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르아냐는 오연화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적의를 숨기기 위해, 이지희는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당장 어벤저 스킬, 아니 차원 능력을 발휘해 문을 때려 부수고 오연화를 습격해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무르아냐로서의 그녀를 가라앉히기 위해 이지희는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밥 여기 두고 갈게.”
음식 그릇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후, 발걸음 소리는 멀어져 갔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자신이 나와서 음식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느라 오연화가 외출한다는 걸 이지희는 알고 있었다.
이지희는 문을 열었다. 그릇 위의 요리는 따끈따끈하게 김을 올리는 계란 볶음밥이었다.
“평소에는 라면만 먹는 주제에.”
오연화는 평소부터 라면을 달고 산다. 하지만 라면은 오래 두면 식고 불어서 맛이 없어지니 이지희를 위해 굳이 하지도 않았던 요리에 손을 댄 것이리라.
오연화에게 있어서도 자신은 연적일 텐데, 그녀는 이리도 그녀를 위해주고 있었다.
-저 여자는 적이야. 음식에는 독이 들었을 거야.
“아니야.”
-먹지 마.
“…….”
계란 볶음밥을 한 술 크게 뜬 이지희는 눈을 꽉 감았다. 정말로 독이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볶음밥에 독은 들지 않았지만, 맛은 평범하게 없었다. 하지만 어제 것보다는 맛있었다. 적어도 계란 껍질은 들어있지 않았으니까.
오연화가 요리를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도 나름 노력한 것이리라.
이지희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연하의 동거인은 사랑스러웠다. 아이돌 연습생 시절 함께 했던 언니와 동생들보다도, 오연화가 더욱 사랑스러웠다. ‘스승님’에 대한 마음조차 이지희를 지탱해주지 못하는 지금, 오연화만이 이지희를 지탱시켜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지희는 자신이 없었다.
*
-스승님은 모든 걸 알고 계셔. 내가 스승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내가 지구에 와서 이지희라는 인간이 된 것도……. 그런데도 모르는 척을 하는 이유가 뭘까?
-스승님에게는 내가 필요했어. 내 힘이. 복수를 하기 위해. 그건 기뻐. 하지만 필요한 건 내 힘뿐이었고, 내 마음은 부담이 됐던 거야.
-날 이용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한 거야. 내 힘만을 이용하기 위해. 내가 무르아냐란 걸 안다고 말하면 내 마음에 대답해야 하니까.
-나는 또 차였어……. 한 번 차여서, 죽어서 다시 태어났는데도 또 차였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무르아냐였다.
이지희의 기억은 남아 있다. 그녀의 인격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자신이 무르아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르아냐였다.
깊은 절망과 고독, 슬픔으로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나왔다.
-다시 한 번, 해볼까. 다시 한 번 차원 틈새로 넘어가서, 계약을…….
-아니, 무의미해. 다시 이용당할 뿐이야. 이용만 당할 뿐인 내 인생…….
-왜 이렇게 됐지?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무르아냐의 넋두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니, 이건 내 탓이 아니야.
그녀의 생각이 나아가던 방향이 바뀌었다.
-날 이용하려던 사람들이 나빠.
그녀의 가슴속을 휘저어놓고 있던 감정들 중에, 분노가 섞였다. 그러자 그녀의 가슴속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사장님이 나빠. 실장님이 나빠. 주인님이 나빠.
그녀의 기억은 이미 이지희의 것과 무르아냐의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는 이미 무르아냐였고, 더 이상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스승님이 나빠.
그리고 그녀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용할 대로 이용해 놓고, 그럴 필요가 없어지니까 날 버렸어!
그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가슴속을 점령하는 감정은 더 이상 슬픔이나 고독, 절망 따위가 아니었다.
-복수해 주겠어.
분노가 그녀의 주인이 되었다.
“복수를!”
무르아냐의 목소리가 작은 방에 울려 퍼졌다.
그 순간,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오연화가 돌아온 것 같았다. 무르아냐는 곧 숨을 죽였다.
‘저 꼬마 여자애는 스승님이 꽤나 아꼈었지. 그럼 일단 저 여자애부터 죽여야지.’
확실한 살의가 무르아냐의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살의를 숨길 수밖에 없어졌다. 오연화와 함께 들어온 다른 인기척을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인기척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하고 묵직한 차원력의 덩어리. 그것은 분명 그녀의 스승만이 가질 수 있는 규모의 차원력이었다.
‘이길 수 없어!’
도망쳐야 한다고, 무르아냐는 반사적으로 생각했다. 창문을 깨서 뛰어내리면 된다. 자신의 실력이라면 이 건물 옥상에서 떨어져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확신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억!”
그녀는 통유리로 된 창문에 부딪혀 튕겨 나온 후 나뒹굴었다. 고층 건물이라 특별히 강도가 높은 유리를 사용한 창이었지만, 그렇다고 신체 강화 능력을 익힌 그녀가 이 정도도 못 깰 리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도망, 도망쳐야해!’
그러나 도망칠 곳 따위는 없었다. 굳게 닫혀있을 터였던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어디 가려고 그러냐?”
그녀의 스승이었다.
“스, 스승님.”
창문을 깨지 못한 건 그녀의 스승이 차원 단절을 걸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체 강화 능력으로 근력과 내구력을 강화한다 한들 소용이 없을 만도 했다. 스승보다 차원력이 높지 않은 이상 스승이 만들어놓은 차원 단절을 깰 수야 없었다.
“가자.”
“어, 어디로요?”
“연화가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더구나.”
그녀의 스승은 그렇게 말했다. 방금 그녀가 창을 깨고 도망치려고 했던 걸 알면서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고 또 달콤했다.
*
-스승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무르아냐는 생각했다.
무르아냐는 김인수의 손에 끌려 나와 오연화와 함께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연적은 지금이라도 당장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지만, 스승님 앞에서 그런 짓을 할 수야 없었다.
아니, 사실 뭘 하더라도 스승님에 의해 막혀 버릴 가능성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연적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스승님이 막아서는 걸 실제로 보게 된다면, 무르아냐는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리고 말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스승님의 시선도 뭐라고 재잘거리는 연적에게 가 있었다. 그 연적에게 스승님이 시선을 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찌릿하고 아팠다.
역시 나는 아직도 스승님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복수하겠다는 마음은 어디론가 녹아 없어져 있었다. 이용당했다는 생각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아무래도 좋았다. 더 적극적으로 이용당하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틀어쥐고 있었다. 오히려 더 이상 이용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르아냐는 연적이 두렵고 지금이라도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내가 아니라 저 연적을 이용할 거라면, 그래서 내가 버려진다면, 난 지금이라도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다고 무르아냐는 생각하고 있었다.
“지희야.”
“네, 네!”
갑작스럽게 이름이 불린 탓에, 목소리가 뒤집어져 이상한 소릴 내고 말았다. 무르아냐는 얼굴을 붉히며 자신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큰 스승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지희라고 불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고 감히 여기서 나는 지희가 아니라 무르아냐라고 주장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스승님의 말씀은 절대적이었으니까.
이지희라면 꼭 그렇지만도 않았겠지만, 무르아냐에게는 그랬다.
“영화 재밌었냐?”
“아, 네……. 그야 뭐, 제가 좋아하는 영화니까요.”
그녀는 이미 여러 번 본 영화였다. 스승님과도 함께 본 적이 있었다.
여자애가 슈퍼 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건 이상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그녀는 이 영화를 좋아해서 10번 가까이도 보았다.
영화 속의 슈퍼 히어로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녀는 종종 생각하곤 했다.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는 자각은 있지만, 그런 생각이 들고 말고는 자신의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지금, 어벤저가 되어 있다. CG 없이 맨손으로 자동차도 부수고 손에서 전기도 내뿜는 존재가 되었다. 이걸 꿈을 이뤘다고 해야 할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의 진짜 꿈은, 그러니까 현실에서의 꿈은 아이돌이었지만 그건 계약마와의 계약으로 줘버렸으니 이젠 없다.
‘그래서 내가 어벤저가 된 건가?’
그녀는 잠깐 생각했다. 손에서 전기를 내뿜는 인간이 되는 ‘새로운 꿈’을 계약마가 이루어 준 것일까. 그녀 본인조차 한동안 잊고 있었던 꿈을.
‘앗.’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이 이지희로 돌아와 있음을 깨달았다. 지금의 그녀는 무르아냐가 아니었다. 잡아먹었을 터인 이지희의 인격은 어느새 부활해 있었다. 그저 영화 한 편 봤다고 이렇게 된 걸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녀는 놀라서 다시 김인수를 올려다보았다. 김인수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만큼은 최재철의 모습이었을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승님이 자신을 이지희라고 불러주었기 때문에 이지희가 부활한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얄팍하고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이것이 사실이었다.
“지희야, 연화야.”
“네?”
“아, 네!”
연적이 대답했기에, 그녀도 얼른 이어서 대답했다. 대답이 0.몇 초 늦고 말았다. 그래서 그녀는 풀이 죽었다. 그러나 풀이 죽을 시간도 얼마 없었다. 다음에 이어진 스승님의 말씀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계를 떠날 셈이다.”
“예?”
“네?”
이번만큼은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합쳐졌다.
“내 인생의 목적은 이제까지 복수였어. 오로지 복수뿐이었지. 가족들을 잃기 전에는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이 되는 게 꿈이었다만, 지금 와서 그 꿈을 꿀 수는 없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목표를 다시 설정할 필요를 느꼈어.”
“그게 왜 떠나는 게 되는 건가요?”
오연화의 목소리는 가시 돋쳐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디서 감히 스승님께, 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스승님이 떠나신다고?
-또?
-나를 두고?
“그 새로운 목표라는 게 틈새 차원 개척이야.”
“틈새 차원 개척이요?”
오연화가 흥미로운 듯 되물었다.
“그래. 이미 지구는 지나치게 틈새 차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 차원 균형을 위해서라면 그냥 차원 균열을 다 닫아버리는 게 이상적이지만, 지금 와서 그랬다간 지나치게 늙은 차원인 지구가 시들어 버릴 염려가 있거든.”
제자들을 이해시킬 만한 문구를 찾는 듯 입술을 몇 번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잠깐 생각에 빠져 있던 김인수는 곧 다시 설명을 재개했다.
“한 마디로 보톡스를 한 번 맞으면 계속해서 맞아야 하는 것과 같아. 젊은 틈새 차원의 차원력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진 지구에게 갑자기 차원력 공급을 끊어버리면 그동안 멈춰있던 노화가 한꺼번에 일어나서 세계 멸망을 앞당기게 될 거야.”
오연화가 이해했다는 듯 아, 하는 소릴 냈다. 그 소릴 들은 김인수는 기분 좋은 듯 후, 하고 웃었다. 그 미소를 이지희는 취한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미소가 무르아냐일 때부터 좋았다. 그리고 그 미소가 오연화의 반응 덕분에 나왔다는 사실에 질투했다.
“애초에 지구인들이 자원을 너무 마구 퍼다 썼어. 석탄이나 석유, 이런 것들이 모두 사실은 차원력 덩어리란 말이야. 이런 걸 다 태워 쓰니 지구가 빨리 늙지.”
“그랬어요?”
오연화는 화들짝 놀랐다. 이지희는 알고 있었으므로 놀라지 않았다. 그 사실에 이지희는 조금 우월감을 느꼈다. 화석 연료가 차원력 덩어리라는 건 상아탑에서는 초급반에서 배우는 내용이다. 물론 그건 김인수가 가르쳐 준 거였다.
“응. 그렇다고 석탄 씹어 먹거나 석유 퍼마시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지?”
“절 뭘로 보시는 거예요?”
오연화가 불퉁거렸다. 스승님은 한 번 픽 웃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물론 지금은 차원 균열이 지나치게 많이 열려 있으니 좀 닫아두긴 해야겠지만, 적당히 균형을 맞추고 난 후에는 지구와 근접한 틈새 차원들로 가볼 셈이야.”
김인수의 이어진 발언에, 이지희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지금은 스승님이 지구를 떠나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사소한 걸로 질투하거나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어보미네이션들의 출현을 낮추고 환경을 지구화시켜서 차원 균열들이 지구를 통해 열려 있어도 별 피해가 없도록 해보려고. 뭐, 일종의 테라포밍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까지 말하던 김인수는 문득 쑥스러운 듯 웃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지구를 위해 봉사하러 가는 것 같지만, 그냥 난 내 차원을 하나 갖고 싶을 뿐이야. 그게 지금 내 인생의 새로운 목표가 되는 셈이지.”
-그 목표를 위해 나를, 우리를 버릴 셈인가요?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서 감히, 누구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하겠는가.
오연화의 입에서라도 그 발언이 나와 주지 않을까, 이지희는 기대의 눈빛을 오연화에게 던졌지만, 오연화도 영 풀이 죽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침울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말은 의외로 스승님 쪽에서 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지희야, 연화야,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네?”
“예?”
이번에는 내가 먼저 대답했다, 라고 말할 정신 같은 건 없었다.
“이런 걸 어떻게 혼자서 하겠니. 아, 뭐 틈새 차원에 계속 머무르는 건 아니고 지구에 문 하나 열어놓고 왔다 갔다 하면서 할 거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하, 할게요!”
이지희가 외쳤다.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아아, 나는 또 이렇게 이용당하고 마는구나.
이지희는 생각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게 이렇게 기쁘다는 것을 그녀는 무르아냐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 저도 가야죠.”
오연화가 얄밉게 말했다.
“언니만 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게 얄미운데도, 오연화에 대한 적의와 살의 같은 건 이제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희는 버려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연화 때문에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절망도 고독도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니 슬픔도 느낄 필요가 없었다.
‘진짜 싸움은 틈새 차원으로 넘어간 후부터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수의 마음을 독차지하고자 하는 무르아냐의 욕망은 아직도 꺼지지 않은 채였다.
*
“언니는 어떻게 된 거죠?”
오연화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김인수와 이지희, 오연화가 아직 영화를 보러 가기 전의 일이었다.
오연화가 먼저 구문효의 집에 찾아오자, 구문효는 너무 좋아서 미쳐 날뛰는 수준으로 접대를 하려 했다. 그녀가 찾아온 게 구문효가 아니라 김인수라는 걸 알게 된 뒤로도 구문효의 반응은 별로 바뀌질 않았다.
구문효가 직접 만든 티라미스와 수제 아이스크림으로 구성된 초호화 파르페를 마지못한 척 야금야금 먹으며, 그녀는 김인수에게 이지희에 대해 상담했다.
이지희가 방에 혼자 틀어박히고, 가끔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고 말이다.
김인수는 이지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바로 알아챘다. 그건 김인수에게 있어서도 의외의 사태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지희가 무르아냐의 기억에 먹혀 버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김인수도 다른 전생자를 몇 명 만나봤지만, 이지희 같은 케이스는 드물었다. 그저 별것 없는 인생을 보낸 이들일지라도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에 잡아먹힌 이들은 하나같이 노예거나 그보다도 못한 일생을 보낸 이들뿐이었다. 현생이 정말로 참혹하지 않는 한, 전생의 인격이 현생의 인격을 덮어 쓰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그 전생이란 건 말 그대로 그저 기억, 데이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격도 아니고 영혼도 아니다. 그렇기에 전생의 기억은 의도도 가지지 않으며 다른 아무 의지도 없다.
그러니 현생을 사는 인간이 그 전생에 잡아먹히는 일은 본인이 그걸 의도하고 원하지 않는 한 일어나지 않는다.
아니, 전생에 잡아먹힌다는 표현도 명확하게 하자면 틀렸다. 그 본인이 전생의 인격을 ‘만들어낸다’는 것에 가깝다.
그런데 이지희가 그런 케이스에 해당되어 버렸을 줄이야.
“그 아이 본인이 자신의 인생이 노예보다도 못 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일이야.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 버리다니.”
“언니가 계약마와 계약할 때 내놓았던 게 잘못됐던 것일지도 몰라요.”
오연화가 말했다.
“언니는 옛 꿈을 줄 테니까 새 꿈을 달라고 했대요.”
그 말을 들은 김인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얼른 가자. 시간을 지체해선 안 돼.”
“네?”
아직 반이나 남은 특제 파르페에 미련이 담긴 시선을 잠깐 보냈지만, 오연화는 곧 눈을 들어 김인수를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는 이미 무르아냐가 되어버렸을 거다. 사태가 아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해.”
“무르아냐가 누군데요?”
오연화가 무르아냐라는 이름을 모르는 걸 보니, 이지희는 그녀에게 무르아냐에 대해서까지 시시콜콜 털어놓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기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지금은 일단 먼저 움직여야겠어.”
“네.”
오연화는 특제 파르페를 퍼먹던 스푼을 내려놓았다. 그건 아마도 그녀에게 있어선 큰 결단이었을 터였다.
*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의 영화관 데이트가 성사되었고, 김인수는 아무한테도 미리 말할 생각이 없었던 미래 청사진에 대해 이지희와 오연화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그 결과, 이지희는 어찌어찌 절반 정도나마 이지희인 채로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나머지 절반은 무르아냐의 것으로, 지금은 무르아냐의 신변에 일어난 일도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게 되었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다.
어쨌든 오연화가 밤에 자다가 이지희에게 목이 잘려 죽을 일은 사전에 방지했으니, 이 정도면 성공이라고 못할 건 아니리라.
정작 죽을 뻔했던 오연화는 자신이 어떤 위기를 무사히 넘겼는지 모르는 눈치지만, 세상에는 모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잔뜩 있고 이번 일도 그런 케이스에 속한다.
그러므로 김인수는 일단은 이번 일을 그냥 입 다물고 넘어가기로 했다.
“계약 조건으로 꿈을 넘기는 게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은 몰랐어요.”
대신 오연화는 다른 쪽이 더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지. 꿈이란 건 앞으로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요소니까.”
“앞으로의 정체성이요?”
“내 미래의 모습이 어땠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게 꿈이니, 사람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지. 그 꿈을 희생해서 이지희가 얻은 힘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지 않나? 처음부터 A급 어벤저의 차원력을 가지고 시작할 정도의 가치는 있어.”
이지희는 처음에는 더 낮은 등급으로 시작했지만, 그건 그녀가 차원력을 제대로 이끌어 내는 법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지희는 김인수가 그녀와 처음 교습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거대한 차원력을 몸속에 품고 있었다.
그것조차도 무르아냐와 그녀의 차원 세포 관리자가 맺은 계약의 산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지희 본인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사람의 꿈에는 그 정도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적어도 당사자의 정체성을 좌우할 정도의 힘은 있다. 어른이 되어 현실적으로 그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한 후라도, 그 꿈을 꾸었기에 나는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지희는 그것을 지불해 버렸다. 그렇기에 무르아냐의 기억, 무르아냐의 꿈에 그렇게도 쉽게 잠식되어 버린 것이다.
이지희가 계약으로 지불한 대가의 크기를 생각하면, 오히려 그녀가 이제까지 이지희라는 인격을 유지해 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나마 예전에 이지희가 직접 고른 영화를 김인수에게 함께 보자고 권했던 적이 있어서, 그 영화를 다시 한 번 보여줌으로써 위기를 한 번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전 앞으로 어떻게 하면 되죠?”
“뭘?”
“언니를 대할 때요.”
“지희랑 앞으로도 같이 살 생각이냐?”
“물론이죠.”
바뀌어 버린 이지희가 기분 나쁘니까 집에서 쫓아내야겠다는 말을 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는 걸 보면, 오연화에게 있어서도 이지희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이름을 불러.”
“이름을?”
“이름도 정체성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야. 언니라고만 부르지 말고 지희 언니라고 꼬박꼬박 불러줘. 그게 그 아이한테는 도움이 될 거다.”
“네!”
오연화는 굳은 결의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기특한 것. 김인수는 자기도 모르게 오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그래서 무르아냐가 누구죠? 나중에 말씀해 주시기로 하셨잖아요. 그게 그 나중인 것 같은데. 혹시 옛날 여자 친구라든가, 그런 건가요?”
이 말을 할 때의 오연화도 반드시 캐묻고 말겠다는 집요한 결의가 느껴졌다.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안 하는 게 나아보였다. 어차피 그냥 넘어갈 생각도 없긴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김인수는 오연화의 머리를 섣불리 쓰다듬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
오연화와 헤어져 구문효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구문효는 걱정스러운 듯 김인수에게 물었다.
“사저들은 괜찮은 건가요?”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잘 될 거야.”
잘 될 거란 말은 아직은 잘 안 됐다는 말이나 다름없지만, 구문효는 김인수의 말에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귀여운 녀석.”
김인수는 그런 구문효의 머리를 몇 번 쓸어주었다. 구문효는 잠자코 그의 손길을 받았다.
“아, 그렇지, 문효야.”
이미 이지희와 오연화에게는 말한 자신의 미래 청사진에 대해, 김인수는 구문효에게도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현오준 팀 중에서는 현오준만이 이야기를 못 듣는 셈이 되지만, 상관없었다. 현오준은 설령 따라온다고 나서더라도 거절할 셈이었으니까. 그는 지구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괜히 김인수가 본인 소유의 차원 세포에서 캐낸 광석으로 산 TA 한국 지사를 현오준 명의로 돌려둔 게 아니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는가. 받았으면 일을 해야지. 김인수도 물러터진 인격인 건 아닌지라 회사를 넘길 때 현오준에게는 이미 계약서까지 받아두었다.
“저만 두고 가시면 평생 원망할 겁니다, 사부님.”
구문효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얼추 예상대로였다. 원망이라는 단어까지 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거야 큰 문제가 아니었다. 어차피 그냥 두고 갈 생각 따위는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