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진가규
진가염이 누군가를 위해서 시간을 번다면, 그 누군가는 진가규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상의 차원 균열은 이미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지하에는 여전히 헬필드가 펼쳐져 있었다.
만약 진가염의 의도대로 일제 폭격이 이뤄졌다면, 저 지하 헬필드의 안쪽을 제외하곤 이 일대가 초토화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저 헬필드가 지키고 있는 대상은 진가규 외의 다른 존재일 수가 없었다.
청와대의 지하에 자리 잡은 헬필드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지상까지 다 침식할 것이다. 본래 헬필드라는 건 틈새 차원의 차원력이 흘러나온 영역이고, 그 농도가 지나치게 진해지면 지구에 영향을 끼쳐 차원의 성질을 영원히 변화시켜 버릴 위험성이 있었다.
이제까지는 그 정도 규모의 차원 균열이 열린 적이 없었지만, 김인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지금 지하에 열리고 그 규모를 확대해 가는 차원 균열은 지구가 존재하는 차원에 절대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길 것이다.
“내 예상이 맞다면… 최대한 서둘러야 해!”
김인수의 예상대로라면 모든 게 다 이걸로 끝나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렇기에 김인수는 얼마 남지 않은 차원력을 태워가며 최대한 빨리 헬필드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
김인수는 목적지에 도달했다. 거대한 입을 쩌억 벌리고 선 차원 균열, 그리고 그 앞에 선 자는 김인수가 지구에 돌아와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자의 모습이었다.
“진가규!”
김인수는 원수의 이름을 외쳤다.
“응? 자넨 누군가? 여기엔 누구도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진가규는 김인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직급과 소속을 말하게.”
그런 뻔뻔한 요구에, 김인수는 화를 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널 황제라 부르지 않는 측의 인간이다.”
“그래? 그렇다면 넌 내 적인가?”
“그렇다. 난 네 적이다.”
“아, 그래?”
진가규는 허허 웃었다.
“그렇다면 축하하네. 자네 승리야.”
“뭐?”
의외의 말에 김인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진가규는 여전히 김인수 쪽을 보지 않았다.
“이번 세계에서의 승리를 자네에게 넘겨주겠다는 의미일세.”
“이번 세계?”
“그래.”
진가규는 김인수의 존재는 아랑곳하지 않고, 차원 균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번 세계에서는 대한제국의 황제까지 해봤군. 이번에는 꽤 성공적이었어. 다음번이 아주 기대가 돼.”
꿈이라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진가규는 말했다.
“다음번에는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아시아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꿈은 크게 가져야지. 다음은 세계 정복이라도 목표로 삼아볼까?”
분노가 김인수의 심장을 틀어쥐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냉정할 수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지?”
그 질문에 진가규는 비로소 김인수를 보았다.
“감이 좋군. 눈치도 빠르고. 마음에 들어.”
진가규는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자네는 누군가?”
“널 원수로 삼은 수많은 이 중 하나다.”
“그래, 날 원수로 삼은 이는 많지.”
크큭, 하고 진가규는 웃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건 자네가 처음일세.”
“그것 참 영광이로군.”
김인수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렇게도 귀여워했던 손자도 버리고, 적장자조차 변이시켜서 방패로 삼았지. 이미 인간성은 훼손되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만큼은 반복해 왔겠군.”
김인수는 진가규를 노려보았지만, 진가규는 그 시선을 태연히 받아넘기고 있었다.
“이번이 다섯 번째인가?”
“안타깝게 빗나갔군. 난 아직 네 번째일세. 다음이 다섯 번째가 되겠지.”
김인수의 물음을 듣고 고개를 젓던 진가규는 문득 미소를 지었다.
“아니, 전생까지 합치면 다섯 번째가 맞나?”
그렇게 말하곤 김인수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진가규는 흥미로운 듯 박수를 두 번 쳤다.
“놀라지 않는군? 혹여나 자네는 현인인가?”
“복수자다.”
“어벤저라.”
진가규는 유쾌하게 웃었다.
“어쨌거나 자네는 여기까지 온 내 첫 원수일세. 자네와는 이야기를 나눌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군. 어차피 이번 세계는 자네의 승리이니, 전리품으로 원하는 정보를 주도록 하지. 이것도 여흥일세.”
“여흥이라.”
김인수는 하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시선에는 살의가 도사렸다.
“나는 지금 당장에라도 네 목을 썰어 떨어뜨리고 싶은데.”
“그것도 괜찮겠지.”
진가규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여유작작했다.
“내 목을 베어 떨구고, 그걸로 모든 게 끝이 날 테지. 어차피 이 세계에 나는 더 이상 미련이란 없네. 마음대로 하게.”
진가규의 말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두 가지.
진가규의 ‘회귀’ 준비는 이미 끝났다. 그리고 그 트리거 중에는 ‘지금의’ 진가규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진가규의 목을 베는 것은 피하는 것이 나았다.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했지?”
“어리석은 짓?”
“왜 황제를 자칭했지?”
“이번에는 그게 목표였으니까. 그리고… 말하자면 전생의 목표이기도 했어. 그래, 일종의 집착이지. 자네 말대로 어리석은 짓이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 진가규의 목소리에 자학이나 자조의 빛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저 목표를 달성했다는 만족감과 유쾌함만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니까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기 전에는 입신양명이 목표였다네. 돈을 벌어서 자립하고 유명해지는 것.”
세상의 평범한 젊은이들이 가진 평범한 꿈. 그것이 진가규의 첫 꿈이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후에는 전생의 지식을 기반으로 입신양명에 성공했지. 뭐, 좀 꼼수를 쓰긴 했네만, 자네도 잘 알다시피 그 정도도 안 하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진가규는 첫 꿈을 이뤘다. 거기까지 떠올린 진가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말일세, 세상에는 개새끼들이 참 많더구먼. 돈과 권력의 힘으로 내가 만들어낸 것들을 날름 가져가 삼켜 버리려는 것들 말일세.”
“너 같은 놈들 말이로군.”
“그래! 나 같은 놈들!!”
김인수의 말에 진가규는 무릎을 탁 치며 웃었다.
“그래서 두 번째의 목표는 그놈들에게 복수하는 거였네. 하하하, 가장 통쾌했던 생이었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죽어나가는 놈들의 얼빠진 표정!”
자신의 복수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아직 잘못하지 않은 자’들을 진가규는 살해했다. 명백한 모순이고, 단순한 분풀이밖에 되지 않는 ‘악행’을 저질렀다.
거기서부터 진가규라는 인격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아니, 그의 인격은 ‘전생의 지식과 기술’이라는 ‘꼼수’를 이용해 ‘입신양명’에 성공한 시점에서 이미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때의 일그러짐은 아직 수선할 여지가 남은 반면, 두번째 생에서의 일그러짐으로 인해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 되었다.
“내 힘과 기술로 그 놈들을 몰락시키는 것에는 성공했네만, 내 이름은 세상에 살인자이자 악당으로 기록되더군.”
그야 살인과 악행을 저질렀으니, 당연한 귀결이었다. 하지만 그게 꽤나 불만스러웠는지, 진가규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세 번째의 목표는 완전한 승리였네. 나는 입신양명에 성공하고, 나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들을 몰락시키고, 나의 기업을 일으키고,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것에 성공했지.”
구원자라는 단어에 김인수는 반응했다.
“구원자? 무엇으로부터 세상을 구했지?”
“어보미네이션, 차원 균열.”
진가규는 날카롭게 웃었다.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내가 세운 기업, WF가 무엇을 먹고 자라났는지.”
어보미네이션의 시체, 어벤저들의 피, 민간인 희생자들의 죽음.
WF는 죽음을 먹고 자라났다.
“아, 물론 지난번의 지구에서 차원 균열을 처음 연 건 나일세. 어보미네이션들을 끌어낸 것도 나이고 말일세. 흠, 이번 지구도 마찬가지인 건 굳이 덧붙여 말할 필요가 없겠지.”
자랑스레 떠벌리는 진가규의 그 발언을 듣고도, 김인수는 별로 소름이 돋거나, 전율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예상한 바였기 때문이다. 김인수는 이미 이 진가규라는 인간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선택을 했는지 대충 짐작을 했다.
그리고 그 짐작이 맞았을 뿐이다.
“세상은 내가 만들어낸 차원 균열 탓에 위기에 처하고, 나로 인해 그 위기에서 구원받았지. 뭐, 완전한 승리를 위해 그 정도 연출은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김인수는 동의하지 않았다. 진가규도 굳이 동의를 바란 건 아닌 듯, 곧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어쨌든, 구원자인 날 모두가 날 찬양했네! 하지만… 그 끝은 암살이었지. 날 질투한 끝에 배반하고 내 등에 칼을 꼽은 게야.”
“누가?”
“내 아들!”
그 아들이란 물론 진가염을 가리킨다. 지난 생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때만 생각하면 다시 분노가 피어오르는 듯, 진가규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깃들었다.
“그 녀석은 내가 늙지 않는 것에 불안을 느낀 모양이야. 그놈의 입장에서는 내가 얼른 늙어죽고 자기한테 모든 재산과 권력을 물려줘야 되는데, 그러질 않으니 자연사가 아닌 방식으로 날 치울 필요를 느낀 거겠지. 뭐, 지난 일이긴 하네만…….”
거기까지 말하던 진가규는 뭔가 생각난 듯 갑자기 씨익 웃었다.
“내 생각에는 한고조도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네.”
“한나라의 초대군주 말인가?”
“그래. 그가 한신을 죽이고 소하를 살려둔 이유가 무얼까, 나는 자주 생각했지.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지 않은가? 한고조의 ‘지난 생’에서 한신은 배반했고 소하는 충성했겠지. 이것이 한신은 죽고 소하는 살아남은 이유일 걸세.”
“내가 죽이지 않았어도 진가염을 숙청했을 거란 소린가?”
“그렇지.”
진가규는 잔인하게 웃었다.
“이번 세계가 더 잘 풀렸다면 내가 내 손으로 직접 죽여야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자네가 수고해 주었군. 그건 고맙게 생각하네. 내 수고를 덜었어.”
진가염은 죽어 마땅한 자였다. 많은 악행을 쌓아올렸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적어도 진가규에게 있어서 이번 세계의 진가염은 그를 끝까지 믿고 충성하며 지키려고 했다. 진가규는 그런 자신의 친자를 죽인 자에게, 수고를 덜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세상의 법칙과 도덕률은 이미 안중에도 없는, 되돌릴 수 없이 일그러지고 망가진 인격. 지나간 세계와 이번 세계의 구별조차 하지 않는 모순 덩어리의 인식.
이미 구제의 여지가 없다. 앞으로 몇 번 회귀를 반복한들, 이 남자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애초에 망가졌다는 자각조차 못할 터였다.
김인수는 굳이 진가규의 잘못된 인식을 깨우치려 들지는 않았다.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아직 네 전생에 대해 듣지 않았군.”
대신 김인수는 말했다.
“넌 전생에 어떤 존재였지?”
“응? 하하, 새삼 말하려니 쑥스러운데. 지금에 비하자면 지나치게 왜소하고 미련한 존재라. 하기야 뭐, 쑥스러움 따위를 논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군. 현세에 미련을 둘 필요가 없는 초월자가 그런 것들에 연연할 이유가 없지.”
진가규는 헛기침을 한 번 한 후에나 대답했다.
“전생의 나는 사막의 제왕이라 자칭했네.”
그 대답을 들은 김인수는 눈을 크게 떴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일개 부족을 이끄는 족장에 불과했네만, 야망만큼은 커서 황제가 되고 싶어 했지. 그래도 그때 차원 균열을 열고 계약마와 계약하는 법을 배운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네.”
그 말을 들은 김인수는 유쾌해져 그 자리에서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왜 웃지?”
“아니, 우연이라는 게 웃겨서.”
사막의 제왕.
그 이름은 김인수가 이계에 가서 처음 만난 도마뱀 무리의 족장이었다. 차원 균열을 여는 능력은 있지만 닫을 수는 없는 얼간이 같은 존재였다. 그 ‘특별한 능력’을 이용해 자신이 세계의 지배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터무니없는 망상을 품고 있는 존재이기도 했고.
차원 균열을 닫는 방법을 터득한 김인수를 노예로 부리게 되면서, 사막의 제왕은 자신의 능력의 제어권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마자 그는 세상에 재앙을 퍼뜨리는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곧 주변인의 위기의식을 촉발시켰고, 결국 사막의 제왕은 가장 믿고 있던 참모에게 암살당해 죽고 말았다. 사막의 제왕을 죽인 후, 그 참모는 김인수를 차기 사막의 제왕으로 추대했다.
그 세력을 키워 어스름과 상아탑을 세우고, 그렇게 얻은 힘과 지식, 권력을 기반으로 김인수는 지구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진가규에게 복수를 하러 말이다.
이 아이러니를 보고 어찌 웃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김인수의 여정을 알 리 없는 진가규가 눈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우연?”
“사막의 제왕이라 자칭하는 얼간이를 죽인 적이 있거든.”
김인수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날카롭게 빛났다.
“물론 그놈은 네가 아닐 테지. 그게 너라면 인과율에 모순이 생겨 버릴 테니까.”
김인수를 이계로 보낸 것이 진가규 본인이니, 그 진가규의 전생인 사막의 제왕이 이계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래, 난 네게 죽은 적은 없어.”
진가규는 내심 불쾌한 듯 웃음기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마도 우연히 같은 칭호를 사용한 놈이거나… 설령 그게 내 전생의 존재였다 하더라도 내가 떠난 다음 다시 누군가에 의해 반복된 세계의 존재였을 테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진가규는 문득 다시 김인수를 주시하며 물었다.
“하지만 인과율에 모순이라니, 그 발언은 좀 신경 쓰이는군. 내가… 네게 뭘 했지?”
진가규는 자신이 김인수에게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자신의 손자를 위해, 아니, 손자도 아닌 그 친구를 위해 일가족의 양부모를 참살하고 형제들은 자살로 내몰거나 차원 균열로 던져 넣은 건 완전히 잊은 듯했다.
“내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했지.”
그렇게 말하곤, 김인수는 픽 웃었다.
“아니, 신경 꺼. 네가 원한을 산 인물이 어디 한둘이겠어? 그들 중에 여기까지 온 게 이번에는 나일뿐이야.”
이제까지 진가규가 죽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말 그대로 수없이 많을 것이다. 손주의 친구라는, 타인이나 다름없는 이를 위한답시고 생판 모르는 일가족을 참살했으니, 같은 식으로 참살한 일가족은 그야말로 셀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김인수도 그 사람들의 원한까지 짊어질 생각은 없다. 그건 너무 무겁다. 짊어질 것은 그 자신의 원한으로 족했다. 그의 부모와 동생을 위한 복수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다.
“내가 처음이라고 했나?”
“그래, 여기까지 온 건 자네가 처음이야.”
“그리고 내가 마지막이 되겠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여기까지다. 고갈되었던 차원력은 차원 균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풍부한 차원력으로 다시 채웠다. 진가규를 죽이기 위한 최소한도의 자원은 드디어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복수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죽어라, 진가규.”
김인수는 선언했다.
*
진가규는 김인수의 선언에 코웃음 쳤다.
“그래, 날 죽이게. 아까부터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의 복수심을 충족시키게.”
진가규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별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태 변화’였다. 그것은 수면 상태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눈을 뜨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조금은 성가시지만 지금은 바라마지 않는 차이가 있을 뿐.
그러나 진가규의 표정은 곧 굳었다.
눈앞의 남자가 빼어든 검. 그 검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아니, 불안감을 조장하는 건 그 검만은 아니었다.
눈앞의 남자로부터 피어오르는, 이제까지 본 적도 없는 기운.
자신을 향한 것이 명확한 살의.
그리고 마치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회심의 미소.
남자는 회귀에 대해 알고 있다. 이미 진가규는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가 되었음 또한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그런 사실은 이미 서로 눈치채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진가규도 자신을 죽이라고 남자를 조롱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칼을 뽑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남자는 칼을 뽑았다. 그 행동만으로도 진가규는 불안을 느꼈다.
전혀 의미가 없을 그 행동을 하필 지금에 와서 한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나.
‘의미가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날 죽일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죽여도 죽지 않는, 다시 살아나는 남자인 진가규를 ‘완전히’ 죽일 방법이 혹시나 이 남자에게는 있는 건가? 진가규는 그렇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는 건… 확인해야지!’
진가규는 열려진 차원 균열로부터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 하나를 꺼내었다.
진가염의 어보미네이션 지배 능력과 달리, 진가규가 창조해 낸 이 어보미네이션은 눈앞의 남자가 특기로 하는 어벤저 스킬 무효화로도 지배가 풀리지 않는다. 보통 피조물은 창조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게 마련이니까.
“죽여라.”
진가규의 명령에 따라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은 눈앞의 남자에게 살의를 드러내었다. 남자는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을 힐끗 보더니, 훌쩍 뛰어올라 그 심장에 검을 꽂았다.
[끄억!]
심장을 꿰뚫린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은 단말마를 지르더니,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다.
되살아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어보미네이션은 목숨이 세 개이게 마련이다. 지금 죽은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이라 한들 예외일 리는 없었다.
틈새 차원에 분포한 막대한 차원력의 축복을 받아 태어난 이차원 생명체가 지닌 선천적이고 공통적인 특질. 이 특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한, 어보미네이션은 설령 세포 하나하나가 가루가 된다 한들 반드시 다시 살아난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에게 심장을 찔린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은 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우선적으로 작동하는 어보미네이션의 특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냥 바로 죽었다.
이 현상이 가리키는 바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완벽하게 죽이는’ 능력을 갖고 있다.
진가규는 막연하게 느껴진 불안이 현실화되었음을 알았다.
그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되살아나는’ 능력은 어보미네이션이 가진 세 개의 목숨과 동일한 원리로 작동한다. 어보미네이션이 어벤저는 아니지만, 자원을 차원력으로 한다는 점에서 어벤저 스킬과 다를 바가 없다. 진가규의 것이 훨씬 복잡하고 특별하지만, 결국 성질은 같다.
눈앞에서 벌어진 현상이 가리키는 바는 실로 단순하다. 만약 이 남자에게 참살당한다면, 조금 전에 살해당한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과 마찬가지로 진가규도 ‘회귀’하지 못하고 바로 죽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다.
손에 식은땀이 배어나왔다.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긴장한 것이 얼마만이더라. 진가규는 쉽사리 떠올리지 못했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 그가 긴장 따위를 할 일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넌, …뭐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진가규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에서 새어 나간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니,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상상도 아니라 현실이라니!
“복수자.”
눈앞의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가규에게는 남자의 드러난 이가 야수의 그것처럼 보였다.
“말했을 텐데?”
진가규는 이미 여유를 잃었다. 그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이름을! …말하라!!”
“사냥을 할 때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의해야 한다, 고 가르침을 받았지.”
눈앞의 남자는 진가규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답을 했다.
“혹시라도 만약 내가 널 놓치고 ‘회귀’를 ‘허용’한다면, 넌 ‘다음 세계’의 날 찾아 죽일 테지. 그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난 네게 이름을 말해주지 않겠다.”
혹시라도. 만약. 눈앞의 남자는 그런 단어를 썼다. 그것은 진가규에게는 희망이었으나, 희망이란 걸 느끼는 것 자체가 진가규에게 있어서는 굴욕적이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뜻밖에 안 되니까.
“…아니.”
진가규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만약 같은 단어를 쓸 필요는 없다, 나의 적이여.”
목숨을 걸고 맞서 싸운다, 는 행위를 마지막으로 한 것이 언제일까. 진가규는 첫 생에서조차 그럴 필요가 없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전생의, 사막의 제왕 시절까지 가야 한다.
그렇기에 잊고 있었다. 아주 단순하고 확실한 방법을.
“내가 널 죽이면, 넌 더 이상 날 죽이지 못하게 될 테니까.”
진가규는 투쟁심을 드러내었다.
“그래, 그러면 돼.”
눈앞의 남자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대로라면 진가규가 지어야 할 미소를, 지금은 그가 짓고 있다.
아무런 준비 동작 없이, 남자의 몸이 진가규를 향해 날아왔다.
전투의 시작이다.
*
진가규는 눈앞에서 어보미네이션, 틈새의 눈을 만들어내 김인수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김인수는 ‘완전히 죽이는 검’, 신살검을 거둬들이고 염동력으로 틈새의 눈의 촉수들을 다 뽑아내 죽지 않도록 치워놓았다.
신살검은 다 좋지만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막대한 차원력을 소모한다. 김인수라 한들 앞으로 두 번 휘두르는 정도가 한계다. 그래서 진가규에게 이런 신살검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틈새의 눈은 다른 방법으로 치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거신이 허공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저자를 죽여라!”
[크구거거거거거거!!]
진가규의 명령을 받은 거신이 이성을 잃은 채 김인수를 향해 거대한 네 개의 팔을 휘둘러 댔다. 최상급 어보미네이션인 거신을 이렇게 쉽게 불러내는 걸 보면 진가규도 어중간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건 그렇고, 이 능력은 골치 아프군.’
거신의 공격을 피해내며 김인수는 혀를 찼다.
즉석에서 어보미네이션을 만들어내는 진가규의 능력은 아무래도 신살검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진가규를 죽이기 위해서는 벽처럼 막아선 어보미네이션들을 치워야 하는데, 주 무기를 사용하지 않은 채로 쓸어버려야 하니 애를 먹게 된다.
‘어보미네이션 창조라.’
어보미네이션 창조는 아무나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아니다. 최하급이나 하급 계약마를 통한 계약으로 얻는 건 턱도 없고, 차원 세포 관리자 정도는 되는 상대와 거래해야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차원 세포 관리자와의 거래는 계약할 때 얻은 고유 능력보다도 강한 능력을 얻는 정말 몇 안 되는 수단이다. 이 수단을 활용하려면 최소한 차원 세포 서넛 정도를 차지한 군주는 되어야 한다. 김인수는 이렇게 얻는 능력을 군주 능력이라고 불렀다.
즉, 명백히 군주 능력에 속하는 어보미네이션 창조 스킬을 들고 있는 진가규는 최소한 중급 군주급 능력을 갖고 있다는 소리가 된다. 그렇다면 당연히 아티팩트도 들고 있을 거고, 여타 군주 능력을 소지하고 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시간을 좀 더 끌 걸 그랬나?’
김인수는 회복된 차원력의 양을 가늠하며 순간적으로 약한 생각을 했지만, 금방 픽 웃고 잊어버렸다. 하기야 여기까지 와서 이 정도도 예상 못 한 건 아니다. 진가염도 거신과 합체한 상태에서 아티팩트 4개를 들고 싸웠다. 진가규는 그보다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죽여라, 죽여!”
진가규가 거신 뒤에서 발개진 얼굴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주인인 진가규가 그냥 죽이라고만 하니 거신은 다양한 차원 능력을 갖고 있다는 자신의 이점을 별로 못 살리고 그냥 육탄 공격만 감행하고 있었다. 좀 더 전투에 익숙하다면 저런 식으로 지휘하진 않을 텐데. 김인수에게는 다행히도 진가규는 직접 실전에 나서본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었다.
[크구가가가가각!!]
거신이 진가규의 명령에 따라 재차 공격을 가해왔다. 그걸 보며 김인수는 한 번 씨익 웃고 말했다.
“군주 능력은 너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고!”
“군주, 뭐?”
김인수는 진가규의 되물음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리에 쓴 금빛 관이 반짝 빛났다.
아티팩트, 솔로몬의 관. 어보미네이션을 지배하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다른 아티팩트와 달리 왕이 자신의 본 모습, 즉 김인수의 경우는 김인수 본인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만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왕보다 더 강한 어보미네이션은 지배할 수 없으며,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개체수에 한계가 있는 게 약점이지만, 덕지덕지 붙어있는 조건만 만족시키면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한다.
그 어보미네이션의 창조자조차도 지배권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로.
[크구그… 으으으으……!]
“뭐야, 왜 이래?”
거신이 더 이상 김인수를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복종이라도 하듯 무릎을 꿇자, 진가규는 당황하며 말했다.
“네 전력을 다해 저자를 제압하라.”
김인수의 명령을 받은 거신이 다시 일어나 진가규 쪽을 바라보았다. 거신의 염동력이 진가규를 습격했다.
“멍청한 놈!”
진가규는 진노하며 외쳤다. 그러자 거신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렇군. 어보미네이션 창조가 가능한 만큼, 소멸도 시킬 수 있는 건가. 사막의 제왕 시절보다는 나은 모양이로군.”
김인수는 흥미로운 듯 말했다.
“하지만 이제 내 앞을 가로막는 방해물은 없어졌어.”
신살검이 살의를 머금었다.
“이노오오오옴!!”
진가규가 노호성을 토해내었다. 그와 동시에 쿠구구구궁 하는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동시에 지면이 벽처럼 솟아올랐다.
“후.”
김인수는 짧게 웃고 만관검을 꺼내들었다. 왼손으로 휘두르는 데 별문제는 없었다. 만관검의 관통 능력은 간단하게 솟아오른 벽들을 뚫어버리고 진가규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 통로를 만들어내었다. 그 통로로 김인수가 몸을 던졌다.
“그렇게 쉽게 날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이번에는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인의 발이 짓밟듯, 김인수를 노리고 바위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김인수는 인롱의 팔찌를 이용해 차원의 격벽을 세워 바위들을 다시 천장으로 밀어 올렸다.
“죽는 건 네놈이다!!”
지면이 창처럼 날카롭게 변하며 김인수를 노리고 찔러대기 시작했지만, 그 공격도 김인수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자신의 몸 주변에 염동력 방벽을 두르고 고속으로 돌진해 오는 김인수를 막을 방법은 이제 없을 것 같았다.
“꿇어라!!”
진가규가 외쳤다. 쿵! 순간적으로 엄청난 중력이 김인수를 습격했다.
“흥!”
그러나 김인수는 코웃음 쳤다. 중력은 그 또한 다룰 줄 안다. 자신을 속박하는 중력을 간단하게 끊어버리고, 김인수는 드디어 진가규의 눈앞에 도달했다. 신살검이 진가규의 목을 노렸다.
그 순간, 진가규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걸렸구나! 멍청한 것!!”
그 자리에서 진가규의 모습이 모래가 되어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모래 속에서 날카로운 창이 솟아나왔다. 창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여 자동적으로 김인수의 심장을 찾아 찌르려고 했다.
“아티팩트!”
“그렇다! 오딘의 창, 궁니르다!! 끝까지 네 심장을 추적해 찌를 것이다!!”
몇 걸음 뒤에 선 진가규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그리고 이것도 받아라!!”
그렇게 외친 진가규는 품속에서 망치 하나를 꺼내더니 냅다 던졌다. 그러자 그 망치 또한 살아 있는 것처럼 김인수를 노렸다.
“묠니르다! 내가 북구신화 팬이라서 말이야, 세트로 장만해 놨지!!”
어차피 차원 세포 관리자와 거래해서 얻어낸 복제품이겠지만, 아티팩트인 만큼 원전의 성능대로 김인수를 공격해 왔다.
“쳇!”
김인수는 혀를 차며 일단 궁니르에게 신살검을 휘둘렀다. 쾅! 살아 있는 창인 궁니르는 신살검의 일격에 ‘죽어서’ 바로 침묵했다.
이 정도 급의 아티팩트는 완전히 죽이지 않는 이상, 파괴해도 그 파편들이 계속해서 습격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신살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궁니르를 파괴하느라 기껏 모아놓았던 차원력이 몸에서 쭉 빠져나가는 감각은 대단히 불쾌했지만 아직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두개골을 부수기 위해서 묠니르가 날아들고 있었으니까.
김인수는 왼손에 든 만관검을 차원 금고에 집어넣고,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를 대신 꺼내들고 날아오는 묠니르를 막으려 들었다. 궁니르와는 달리 묠니르에는 자동 추적 기능까지는 없었기 때문에, 목표를 타격하고 나면 돌아가는 기능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만약 저 아티팩트가 이름만 묠니르고 성격이 달랐다면 낭패를 볼 만한 도박이었다.
쿵! 쿠르릉!!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를 넘어서도 전달되는 묵직한 타격력과 함께, 묠니르의 번개가 번쩍거리며 주변을 지져대었다.
“큭!”
김인수는 이를 악물었다. 신체 강화 능력으로 대비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방패로 막았다 한들 팔이 부러질 위력이었다. 덕분에 방어에만도 차원력을 많이 낭비하고 말았다. 남은 차원력으로는 앞으로 신살검을 한 번 휘두르는 것이 한계일 터였다.
방패 너머에서 진가규가 돌아온 묠니르를 다시 손에 쥐고 차원력을 주입하는 것이 보였다.
‘저걸 다시 던지게 내버려 두면 안 돼!’
그렇게 생각한 김인수는 방패를 앞세우고 전면으로 돌진했다. 그가 돌진해 오는 것을 본 진가규는 묠니르를 그냥 직접 휘둘렀다. 김인수는 반사적으로 묠니르를 막았다.
꽈르릉!!
방패에 묠니르가 닿자마자, 이대로 버텨서면 안 되겠다고 직감한 김인수는 두 발을 지면에서 떼었다. 묠니르의 일격에 의해 김인수의 몸이 스테인리스 배트에 맞은 야구공처럼 멀리 날아갔다.
쾅!
“커헉!”
조금 전에 진가규가 세운 지면의 벽에 부딪혀, 김인수는 거친 숨을 토해내었다. 그걸 보며 진가규가 통쾌하게 웃어대었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그냥 수집품으로 모아뒀을 뿐인데 이렇게 쓸모가 있을 줄이야!! 역시 취미 생활은 해두는 게 답이로군!!”
“…그래, 맞아.”
김인수는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반응에 진가규가 퍼뜩 놀라 시선을 틀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허공에 둥실둥실 떠 있던 단검이 궤도를 휙 틀어서 진가규의 오른 손목을 잘라내었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묠니르가 텅 바닥에 떨어졌다.
“취미 생활은 해두는 게 답이지.”
진가규의 오른 손목을 잘라낸 단검의 이름은 블라디 공의 가시. 물론 저 아티팩트는 궁니르나 묠니르와는 달리 살아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김인수는 염동력으로 직접 조종하고 있었다.
김인수는 묠니르에 맞기 직전에 단검을 방패 뒤에 슬쩍 숨겼다가, 맞고 날아갈 때 슬쩍 허공에 놔두고 왔다. 일부러 과장되게 맞아줘서 시선을 끈 후 허공에 놔둔 단검을 염동력으로 움직여 기습한 결과가 이것이었다.
지구에 돌아와서 이지희와 주말에 만났을 때 본 영화의 장면을 따라했는데,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말 그대로 취미 생활이 득이 된 셈이다.
“다섯 번의 생애 중에 직접 싸운 적은 별로 없나보군? 진가규.”
김인수는 그렇게 비웃으면서 천천히 진가규를 향해 다가갔다.
입가에는 비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진가규에게 접근하는 김인수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진가규가 또 무슨 아티팩트를 꺼내들지 모르니 주의해야 했다.
신살검을 사용하기 위해 부족한 차원력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조금 전 묠니르의 공격을 막느라 또 상당한 차원력을 지출했으니, 다시 채울 시간을 벌 필요가 있었다.
“하아, 하아! 하아……!!”
피가 흐르는 오른 손목을 왼손으로 부여잡은 채, 진가규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는 원망의 빛이 어려 있었다.
“고통에도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저벅, 저벅. 진가규와의 거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헉, 허억!”
그만큼 진가규의 호흡도 가빠지고 있었다. 김인수에게는 아직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7초 정도… 인가.’
김인수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시간을 쟀다.
한 호흡 만에 뛰어들 수 있을 거리만큼 되었을 때, 김인수는 발걸음을 멈췄다.
“각오는… 됐나.”
“그래.”
몰아쉬던 호흡을 멈추고, 진가규는 대답했다.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욱!”
비명이 내달렸다. 진가규의 목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런!”
1초……. 단 1초였다. 김인수에게는 그 단 한 순간이 모자랐다. 신살검을 휘두르기 위해 필요한 차원력을 회복하는 시간. 그 작은 틈을 진가규는 파고들었다.
진가규의 심장에는 단검이 박혀 있었다. 심장에 단검 좀 쑤셔 박는다고 사람이 이렇게 단번에 죽지는 않는다. 즉사 능력이 달린 아티팩트였으리라.
결론은 이렇다.
김인수는 진가규의 자살을 용인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