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28화 (28/32)

28. 결정타

일주일도 안 되는 새에 연속적으로 터진 차원 균열과 WF에 대한 스캔들은 이미 거의 완전히 차원 균열 위주로 돌아가던 한국의 사회구조를 근본부터 뒤흔드는 것이었다.

실로 기이하게도, 이 일련의 사태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TA였다. 잘못한 것은 물론 WF였지만 이미 한국 사회에서 WF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WF가 사회 구조를 그렇게 바꾸어두었기 때문이다.

‘WF가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지난 10년간 격언처럼 읊어졌던 말이었다.

빛 아래에서든, 그림자 너머에서든 한국 사람들은 WF와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있어 ‘내가 악과 손잡고 있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건 도저히 쉽게 인정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냥, WF가 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차원 균열 산업’을 악으로 규정했고, 모든 공격은 비교적 중요도가 떨어지는 TA로 향했다. TA도 차원 균열에서 이득을 얻어내는 업체였으니, ‘사악한 기업’인 건 맞았다.

‘나에게는 WF가 필요하니, 나는 WF 대신 TA를 욕하겠다.’

참 어이없는 명제지만 실로 인간적인 명제이기도 했다. TA에 화풀이를 함으로써 자신은 정의의 편이라고 생각한 채 만족할 셈인 것 같았다. 이 점에 관해서는 언론도, 여론도, 공권력도 마찬가지였다.

TA가 외국계 기업이라는 점도 한몫해서, 이상한 민족주의가 발현된 면도 있었다. 아무리 WF가 잘못했다 한들 유일한 토종 차원 기술 기업인데 TA보단 낫지 않느냐, 이런 논리였다.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언론은 연일 TA에게 불리한 기사를 때려대었다. 정부도 마찬가지로, 가혹한 세무 조사를 TA에게만 실행했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TA도 앉아서 맞고만 있지는 않았다. 한국에서는 WF에 이은 2인자 역할에 충실했던 한국지사였지만, 그걸로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는 불이익만 거둔다면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TA는 바로 한국지사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서 TA가 없어지면 WF는 다방면에서 독점권을 갖게 된다. 문제는 한국에 독점 금지법이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원래대로라면 WF 편을 들어야 할 의회도 지금은 WF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WF는 TA 한국지사를 사들일 수 없었다. 잘못하면 엄청난 벌금을 물게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달리 TA 한국지사를 사들일 재벌이 한국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WF가 경쟁력을 갖출 만한 기업은 이미 대부분 다 찍어눌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차원 균열 관련 기업의 사회적 인식을 볼 때, 아무리 이 매물이 알짜라도 선뜻 매입할 만한 사람은 드물었다. TA가 해외 기업이라는 이유로 쳐 맞고 쫓겨나는 마당인데, 다른 해외 기업이 한국지사만 매입할 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A 한국지사는 성공적으로 매각되었다.

놀랍게도 그 상대는 일개 길드였다.

*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협상 테이블에 나온 건 다름 아닌 권지력 이사였다. 자신의 파벌로 TA의 한국지사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생각했더니만, 본사에서 매각을 결정해 버리다니. 이래서야 권지력 이사 입장에선 중간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을 받아도 무리는 아니었다.

“오래간만입니다, 권지력 이사님.”

게다가 자신이 협상해야 할 상대가 예전에 내쫓은 부하 직원이어서야, 더더욱 인생무상을 느낄 법도 했다. 방금 그에게 인사한 인물은 다름도 아닌 현오준이었다.

현오준은 불과 2개월 전에 TA 최초로 차원 균열을 탐사하고 그 너머의 틈새 차원이라는 새로운 차원의 존재까지 밝혀낸 실력자였다. 그 실력자가 자신의 파벌이 아니라는 점에 불안을 느낀 권지력은 꽤 무리를 해서 현오준과 그 팀을 쫓아냈었다.

권지력의 그런 결정에 사내에서도 꽤 반발이 있었지만, 반발하는 자들을 솎아내는 방식으로 그는 그의 사내 정치력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 수 있었다.

사내 실권을 꽉 잡고 사장마저도 자신의 발언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데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아부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노력의 결과가 이거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이 회사가 팔리면 난 본사로 돌아갈 걸세. 자네 밑에 들어가는 건 사양이야.”

권지력은 이죽거렸다. 물론 본사로 돌아가면 파벌 따위는 없이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했다. 어쩌면 이사직을 사임해야 할지도 몰랐고, 계약 연장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른다. 부평초 같은 인생이 싫어서 파벌이라는 뿌리를 만들어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다니.

“이게 다 진가염, 그놈 때문이야!”

“혼잣말 좀 자제해 주시죠. 그것도 맥락도 없이.”

현오준이 불쾌한 듯 말했다.

“본사로 돌아가시려면 실적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최대한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려고 애쓰실 줄 알았는데. 실망입니다.”

현오준의 말이 맞았다.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부하 직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사실상 한국 내에서 다른 매입자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이상 상대가 갑이라 생각하는 게 옳았다.

“죄송합니다, 현오준 사장님.”

권지력은 손바닥을 뒤집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뭐, 됐습니다. 그보다…….”

현오준은 자신의 뒤에 선 남자에게 눈짓을 했다. 그 남자의 이름을 권지력은 잘 기억해 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현오준의 눈짓을 받고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갑자기 번뜩 기억이 났다.

최재철. C급으로 입사해서 A급으로 퇴사해 나간, 어벤저 업계에서는 입지전적한 인물이었다.

‘이놈이 실권자였구나!’

권지력은 자신이 눈치 하나는 빠르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현오준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하다. 내가 이제부터 아양을 떨어서 환심을 사야하는 인물은 최재철이었어.’

물론 이걸 눈치챘다는 걸 알리면 최재철이 불쾌해할 것까지, 권지력은 재빠르게 눈치챘다.

“진가염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주시죠.”

현오준의 목소리를 듣고, 권지력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가 아는 걸 전부 말씀드리죠.”

권지력은 진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차피 한국에서 발을 빼야 하는데, 진가염과의 밀약을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저들은 진가염에게 원한이 있다. 권지력은 그것마저 눈치챘다. 아니, 저들이 별로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도 신호이리라.

그렇다면 차라리 1초라도 빨리 진가염을 배신하는 게 자신의 이득으로 직결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

대량의 다이아스틸을 현물 지급하는 조건으로 TA 한국지사를 사들인 것은 다름 아닌 현오준 길드였다.

TA 한국지사가 독립 회사가 되면서 사명을 OJ로 개명하고, 그 사장으로 취임한 현오준이 첫 취임사로 한 말은 이것이었다.

“앞으로 OJ는 이전까지의 TA나 WF와는 달리 차원 균열 폐쇄 전문 기업으로서 활약할 것입니다.”

그리고 OJ는 그 취임사대로 본래 TA의 소유였던 차원 균열을 하나둘씩 닫아가기 시작했다. 닫힌 차원 균열 주변에서의 실종 사건 발생률이 유의미하게 줄어들었고, OJ는 찬사를 받았다.

그렇다고 OJ가 이제는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생산하지 못하게 된 것도 아니었고, 차원 균열 폐쇄시에 발생하는 대량의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이 얻게 되면서 발전소도 정상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기업인 WF보다 외국기업인 TA가 더 싫어서 WF의 전기를 사다 쓰던 사람들도, 이제는 OJ의 전기를 사다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이건 전력 산업에서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제 WF는 유일한 차원 균열 전문 한국 토종 기업이 아니었다. WF가 망해도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아니, 이건 원래 그랬다. 뒤늦게나마 사람들은 깨달았다.

WF를 싫어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WF와 손을 끊어도 될 만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렇다면 과감하게 악과 손을 끊어야 하지 않겠는가. 외화 낭비란 변명도 이제는 안 통한다. 그런 논리로 무장한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치가들은 정치가들 나름대로 암투를 벌인 모양이지만, 김인수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이 일련의 사태 속에서 WF가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WF는 대선 직전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WF에 줄을 댄 정치가들마저 가라앉는 배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쓰는 형국이 자연히 빚어졌다.

*

대통령 선거가 시행되었다. 선거 열기는 전에 없이 뜨거웠다. 현 여당의 20년 독재를 끝내자는 문구가 대단히 선동적이었다.

곳곳에서 부정투표가 발각되었다. 유권자들이 자체적으로 감시한 결과물이었다.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 부정투표의 증거를 잡아낸 언론인이 선거법 위반으로 잡혀가고, 여론은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권은 바뀌었다. 20년 만에, 드디어.

이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믿었다.

*

“정치야 정치가의 일이지.”

최재철이 말했다. 그는 개표 방송을 보고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역할이 꽤 컸지만요.”

그 옆에는 현오준이 있었다.

“일주일 전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터뜨린 WF의 ‘어보미네이션 공장’이 여론에 꽤 큰 영향을 끼쳤을 테니.”

현오준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일이었으리라. 그는 ‘이전 생’에서 그 공장에서 죽었으니까.

“자화자찬하지 마시죠, 사장님.”

구문효가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공장 건을 터뜨린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는 현오준이었다. 최재철은 이번 일에서만큼은 전적으로 백업을 담당했다. 그 심정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손으로 원수의 심장에 칼을 꽂고자 하는 복수자의 심정을.

지나치리만큼 비인도적인 어보미네이션 제조 공장의 보도는 WF와 WF를 전적으로 지원했던 여당에게 마지막까지 충성하던 유권자마저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마지막 일격이라고 표현하기에 실로 걸맞은 일이었다.

“이 미래에 도달하지 못했죠. 지난번에는.”

그 언론 보도를 보면서, 현오준이 말했다.

“지금은 현재입니다. 현실이죠.”

“그랬었죠.”

최재철의 대꾸에, 현오준은 웃었다.

“가능했다면 제가 직접 이 기사를 쓰고 싶었습니다만, 뭐, 이 정도로 대리 만족이라도 하는 게 맞겠죠. …감사합니다, 최재철 씨. 당신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해낸 겁니다.”

최재철은 현오준의 말을 자르고 단언했다.

“제가 해낸 겁니까?”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그게 맞겠죠.”

줄곧 씌었던 것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현오준은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현오준이 최재철은, 아니, 김인수는 부러웠다.

그것도 일주일 전의 이야기다. 그 일주일 전의 일 덕분에, 야당은 최후의 최후까지 분열되었음에도 결국 승리를 거머쥐는 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여러 야당 중 단 한 당의 승리지만,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본인들에게는 중요할지 모르나, 그건 국민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걸로 모든 게 끝난 걸까요?”

“그럴 리 없지.”

구문효의 질문에 최재철은 날카로운 시선을 TV에 던졌다.

당선이 확정된 대통령 당선인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승리 선언을 하고 있었다. 완벽한 인물도 아니고 정의로운 인물도 아니다. 굳이 평하자면 다소 계산적이고 선동적인 인물이지만 상식적인 인물로, 그래도 그가 대통령 자리에 오르면 전보다는 좀 나아질 것 같기는 했다.

그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평화롭게 대통령 직위에 오를 수 있다면.

“자아,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김인수는 TV를 노려보았다. 대선 패배라는 성적표를 받아들었으니, WF도 이제는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평화롭거나 정의로운 것일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

“당신에게 줄을 대준 건 제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평할 수 있겠습니다, 현오준 사장님.”

유구언 팀장이 말했다. 원래 TA 소속이자 현오준의 입사 동기였던 그는 지금은 그대로 OJ로 와 여전히 팀장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팀도 그대로 이동해 왔고, 유구언 팀은 이전까지와는 달리 차원 균열 폐쇄 임무에 투입되고 있었다.

적당한 아티팩트 하나만 쥐어주니 중상급 어보미네이션까지 혼자서 솜씨 좋게 써걱써걱 썰어내는 걸 보며, 현오준은 유구언도 혹시 전생자가 아닌지 의심까지 했다. 그 정도로 검술이 훌륭했던 탓이다.

“뭐, 전생에 미야모토 무사시기라도 했어요?”

“왜 기분 나쁘게 왜놈 이름이 나옵니까? 차라리 척준경이었냐고 묻지 그래요?”

“…정말로 척준경이었어요?”

“아니, 그게 왜 또 그렇게 됩니까? 농담 아니었습니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지 껄껄 웃는 유구언이 참 인상적이었다.

“정말로 제 전생이 척준경이었으면 좋겠군요. 그럼 적어도 사람을 칼로 베는 걸 주저하진 않을 테니.”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까? WF가…….”

“그야,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되어 있으니까요.”

WF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대선 직전에도 여론 조작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는 ‘이제부터는 대선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므로’가 적절하다.

이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이상, 대선이 중요하지 않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대선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상대가 뭘 생각하는지 명약관화해진다.

적들은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셈이다.

즉, 쿠데타다.

“뭐, 그렇다고 선 채로 이 나라를 넘겨줄 생각은 없습니다. 높으신 분도 말씀하셨잖습니까, 성공한 쿠데타는 정의라고. 그런 정의, 전 용납 못 합니다. 제 손으로 실패시킬 겁니다.”

유구언은 듣기에 든든하게도 말했다. 그런 유구언에게 현오준이 바로 초를 쳤다.

“정확히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인데요.”

“에이, 그런 사소한 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잖습니까!”

얼굴이 붉어진 걸 보니 별로 상관없게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현오준은 굳이 또 지적하지는 않았다. 사기가 높은 건 좋은 일이다. 전투를 앞두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제 전생은 척준경이었으니까요.”

“아깐 아니라면서…….”

“농담을 하면 좀 웃으세요, 사장님.”

방탄복을 껴입으며 유구언은 웃었다.

*

“나도 싸울 거야.”

오연화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안 돼.”

이지희가 딱 잘라 거절했다.

“왜!”

“넌 미성년자잖아.”

이지희의 대답에 오연화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뭐, 미성년자면 싸우면 안 돼?”

“이제까지는 네가 너무 강하고 훌륭해서 어보미네이션과 싸울 때는 네 힘을 빌렸지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을 상대로 싸우는 데 네가 나서게 만들 수는 없어.”

이지희가 짐짓 최재철의 성대모사를 하며 말했다. 울먹거리던 오연화가 그걸 듣고 풉, 웃더니 농담처럼 덧붙였다.

“예쁘고 귀여워서가 빠졌어!”

“스승님은 그런 말씀하신 적 없어.”

이지희는 진지하게 대꾸했다.

“쳇, 좀 덧붙여주면 어디가 덧나?”

오연화는 툴툴거렸다.

“그래도 만약… 만약 언니가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오면 난 안 참을 거야. 참지 않고 나설 거야. 내 멋대로. 알겠지?”

“그것 참 고맙네요. 그럼 스승님은?”

“선생님이 위험할 정도면 내가 나서봤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잖아?”

“아, 그건 그렇네.”

그런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곤, 두 여자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거리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구문효가 질린 듯 물었다.

“사저들은 대단하시네요. 긴장도 안 되세요?”

“예, 사제. 전 전투에 참가도 못 하거든요! 긴장이 될 리가 없죠!!”

오연화가 한껏 비꼬며 말했다. 그러나 그 손아귀에 땀이 찬 건 여기 있는 모두가 목격했다. 자기가 직접 나서서 싸우는 것도 아닌데, 그녀가 그렇게도 긴장하는 이유 또한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사제는 위험해져도 구하러 안 갈 테니까 알아서 생존해!”

“알겠습니다요, 사저.”

오연화의 허세를 받아주며, 구문효는 웃으며 대답했다.

자신이 위험해졌을 때, 오연화가 반드시 구하러 올 것은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누나인 양, 다소 지나칠 정도로 구해주는 바람에 틈새 차원에 있을 때는 공헌도를 다 뺏겨서 혼자 아티팩트를 다 못 모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구문효는 그걸로 오연화를 싫다거나 짜증난다거나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총알의 비가 쏟아지든, 폭탄이 터지든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살아 돌아옵죠.”

“…그러도록 해!”

흥, 하고 고개를 팩 돌리는 오연화의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WF가 쿠데타를 벌이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이미 다 완료해 둔 터였다.

아무리 어벤저라 한들 전투기와 미사일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중요 방어 지점에는 일부러 차원 균열을 열어서 헬필드를 뿌려놓을 것이다. 그걸로 현대 병기는 핵무기를 포함해서 대부분 무효화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헬필드에서의 전투 양상은 어벤저 위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OJ의 어벤저 전투부대가 긴장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역시 아무 일도 없는 게 최고긴 한데.”

상황 본부에서 예상 지점에 설치해 놓은 감시 카메라들이 보내오는 영상을 보며 최재철은 중얼거렸다. 카메라가 꺼지면 헬필드가 열렸다는 뜻이니 바로 출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렇다. 아무 일도 없는 게 최고였다. 2개월 후, 완전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원리, 원칙대로 사회가 돌아가기만 한다면 WF는 저절로 몰락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몰락한 진씨 일가를 김인수가 복수의 이름으로 처형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

하지만 그렇게 끝나진 않을 터였다. 진가규도 바보는 아닐 거고, 진가염도 머저리는 아닐 테니까.

*

새벽 2시.

파주 차원 균열의 서울 진입로 방향에 설치해 둔 감시 카메라가 꺼졌다.

“사장님, 지휘 부탁드립니다.”

최재철은 바로 현오준에게 말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현오준이 퍼뜩 눈을 뜨며 물었다.

“최재철 씨는?”

“애들만 싸우게 내버려 둘 수 없죠. 제가 먼저 가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예.”

최재철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쓰고 초시공의 팔찌로 포탈을 열었다. 반지 운반자의 팔찌로 존재감을 숨긴 후에, 그는 열린 포탈을 통해 파주로 날았다.

본래 감시 카메라가 감시하고 있던 영역은 그냥 도로였는데, 지금 이곳에는 차원 균열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차원력이 뿜어져 나와 헬필드가 꾸역꾸역 주변을 침식하고 있었다. 그 차원 균열에서 조금 전에 막 기어 나온 걸로 보이는 빅 마우스가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존재감을 숨긴 최재철의 존재는 알아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최재철은 빅 마우스를 순식간에 살해하고 그 시체를 차원 균열 너머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차원 진동기를 찾아내 파괴했다. 뿜어져 나오던 차원력의 압력이 점진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변을 깨달았는지 북쪽, 즉 파주 차원 균열 방향에서 A급 이상으로 보이는 어벤저 몇 명이 접근했다. 처음에는 차원력의 움직임으로 그들의 동향을 관측했지만, 곧 그들의 모습이 최재철의 어벤저 스킬로 강화된 시야 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완전히 군인이었다. 그것도 전형적인 특수부대원으로, 방탄모와 방탄조끼로 몸을 감싸고 얼굴은 방독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

최재철은 직감적으로 인롱의 팔찌를 사용해 차원 단절을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차원 단절 면을 타고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이 가지 않는 무색무취한 입자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미친 새끼들!’

소름이 등을 타고 쫙 흘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독가스라니!’

아니, 그러고도 남을 놈들이라는 걸 최재철은 알고 있었다. 최재철은 자신의 생각이 얕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냥 교전 지역뿐만 아니라 사람 사는 곳, 특히 서울에다가도 화생방전을 벌이고도 남을 놈들이다!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독가스는 헬필드 안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을 테지만, 헬필드 바깥에는 큰 피해를 입힐 것이다.

WF 입장에서 독가스 살포는 차원 균열을 열어 헬필드를 펼쳐가며 진군한다는 전술과 결합되어, 독가스의 이점만 살리고 아군 피해는 거의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만한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가스의 정체는 마셔보기 전까지는 모른다. 일반 방독면으로 저 가스를 막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피부에 닿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최재철은 급히 차원 금고를 뒤져 전신 타이즈 한 장을 꺼냈다. 창왕의 가죽. 보기에는 좀 추하지만 입으면 우주로 나가도 멀쩡히 생존할 수 있는 성능의 손색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창왕의 가죽을 얼굴과 머리까지 완전히 뒤집어썼다. 이러면 공기까지 완전히 차단되어 숨도 못 쉬게 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숨은… 잠깐 참자!’

염동력을 이용해 순식간에 타이즈를 입은 최재철은 인롱의 팔찌로 쳐둔 차원 단절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저놈들의 방독면을 쓰면 될 테니까!’

일부러 실력을 숨긴 건 아닌 건지, 방독면을 쓴 WF측 어벤저들은 최재철의 접근에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최재철은 염동력으로 다섯 명 모두의 목을 동시에 비틀어 버렸다. 그들의 얼굴에 단단히 고정된 방독면 다섯 개를 모조리 떼어내 차원 금고에 넣은 후, 최재철은 조용히 기다렸다.

방독면이 벗겨진 WF측 어벤저의 노출된 얼굴 피부에 끔찍하게도 수포가 바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겨자가스인가?”

1차 세계대전 때도 쓰였던 고전적인 독가스다. 겨자가스란 명칭은 그냥 별명 같은 것으로, 피부에만 노출되어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독가스의 일종이다.

그는 육군 복무 중에 가장 싫었던 화생방 훈련 때 화생방교장에 앉아서 들었던 기억을 되살려냈다. 그가 알던 겨자가스와 달리 무색무취하고, 수포가 생기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WF가 따로 개량한 결과물일 터였다.

“겨자가스라면 빨리 응급처치를 하면 죽진 않겠지. 내가 그런 걸 해줄 의리는 없지만.”

적들의 증원 병력이 올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것보다 아군들에게 화생방전 대비를 시키는 게 시급했다.

최재철은 기절한 WF측 어벤저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독가스 영역 바깥으로 재빨리 벗어났다.

*

“독가스를 살포했다고요?”

현오준이 놀라 되물었다.

“예, 사장님. 이 방독면 좀 봐주십시오.”

최재철은 차원 금고에 넣어온 방독면 다섯 개를 와르르 쏟아냈다.

“독가스의 종류는 겨자가스류로 보이지만 속단하기엔 이릅니다. 평범한 방독면이라면 부대원들에게 얼른 방독면을 배급해 주시고, 특이한 방독면이라면 카피를 서둘러 주십시오.”

“최재철 씨는 어쩌실 겁니까?”

“놈들의 진군을 늦춰볼 생각입니다.”

방독면 하나를 집어 들고, 최재철은 말했다.

“적들의 진출로가 파주 하나는 아닐 겁니다. 최소한 양동을 노리겠죠. 저희가 대응해 온다는 걸 알아채면 단번에 움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징후가 보이면 가면을 통해서 연락해주십시오.”

헬필드 하에서는 현대 기술로 만들어진 통신 장비를 쓸 수 없기 때문에, 최재철은 자신이 나눠주었던 철가면들을 싹 회수해서 차원 기술로 이뤄진 통신 능력을 부가해 두었다. 이 가면을 통해서 휴대폰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을 터였다.

“알겠습니다.”

현오준의 대답을 들은 최재철은 다시금 포탈로 몸을 던졌다.

*

창왕의 가죽을 정장 아래에 받쳐 입고 정장 위에는 방탄복을 겹쳐 입은 후, 얼굴에는 방독면을 써서 화생방용 장비로 무장을 완료한 최재철은 다시 파주의 도로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파주 전역이 이미 독가스로 덮인 걸로 보였다. 이렇게까지 대대적으로 살포할 줄은 몰랐던 최재철은 이를 갈았다.

“큭! 시민들의 피난도… 시키지 않았겠지!!”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야 쿠데타다. 선전포고는커녕 경보 발령조차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사람이 얼마나 죽었을까. 새벽이라 다들 자고 있었을 테니, 피해는 더욱 커질 수도 있었다.

“너무나도 참기가 힘들군!!”

여기는 적지 한가운데라 할 수 있었고, 지금 최재철과 OJ는 적들의 전력 수준을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지나치게 시선을 끌면 아무리 최재철, 아니, 김인수라 해도 위험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수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숨기고자 할 수 없었다.

이대로 두면 어차피 사람이 죽는다. 그것도 많이, 지금까지 죽은 사람들보다 더 많이!

“내 목숨이 비싸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 목숨이 싸구려인 건 아니지!”

김인수의 손아귀 위에 검은 중력장이 자리 잡았다. 중력장은 조금씩 응축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작은 블랙홀이 되었다. 미니 블랙홀은 주변의 공기를 급격히 빨아들였다. 모래와 흙, 자갈들도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김인수는 블랙홀의 중력을 조절했다.

“이것만 해서는 아무리 빨아들여도 안 끝나. 독가스를 살포하는 놈들을 찾아야지.”

손아귀에 미니 블랙홀을 틀어쥔 채, 김인수는 달리기 시작했다.

블랙홀이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인 탓에 김인수가 있는 지점을 중심으로 저기압이 형성되고, 주변의 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구름은 적란운으로 변하고, 토네이도가 발생했다. 그 토네이도를 휘몰고, 김인수는 마침내 독가스를 살포하고 있는 기계 장치를 발견했다.

“저거 뭐야?!”

미니 블랙홀을 손에 든 채 방독면으로 얼굴을 가린 정장 차림의 남자를 처음 보면 누구나 그렇게 말할 법도 하다. 게다가 그 주변에는 토네이도가 휘몰아치고 번개까지 두르고 있으니, 담이 약한 사람이라면 보자마자 오줌을 지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적들은 오래 놀라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동소총을 들어 김인수에게 겨누었다.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적들은 즉시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타타!

“흥!”

김인수는 코웃음 치며 염동력으로 자신을 겨누고 있던 자동소총의 총구를 하늘로 향하게 만들었다. 희귀한 파멸철 총탄들이 허공을 향해 낭비되는 걸 보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들고 있던 블랙홀을 독가스 살포 장치를 향해 던졌다.

딱 보기만 해도 굉장히 안 좋은 느낌이 드는 블랙홀이 날아오자, 적들은 혼비백산해 거미 새끼처럼 흩어져 블랙홀을 피했다.

그들의 예감은 별로 틀리진 않았다. 블랙홀은 우지직 콰지직, 하는 소리를 내며 독가스 살포 장치를 집어삼켰다. 만약 인간이 거기 휘말렸다간 그냥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렸을 거란 상상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작은 금속성의 구슬 하나를 남긴 채 블랙홀이 소멸하자, 블랙홀에 의해 끌려왔던 구름들이 소나기를 쏴아, 하고 쏟아냈다. 사실 지금까지도 소나기는 내리고 있었지만 그 빗물들이 전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는데, 블랙홀이 없어지니 중력에 따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너희는 좀 맞아야겠다!”

김인수는 소낙비와 함께 쇄도했다. 놀란 적들이 반사적으로 자동소총을 치켜들었지만, 총알의 속도보다 김인수가 더 빨랐다. 모두에게 평등하게 명치에 한 방씩 주먹을 박아 넣어 기절시킨 김인수는 그들에게서 방독면과 자동소총을 빼앗아 무장을 해제시켰다.

“상당한 실력자인 모양이로군.”

목소리가 들렸다. 김인수는 그 방향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의 접근은 이미 몇 초 전에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뿐일까, 그 차원력 덩어리로 그가 누군지조차 알아챌 수 있었다.

“네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인가?”

진가염이었다. 얼굴은 방독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뒤틀렸지만 김인수는 알아볼 수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가염 중 하나였다. 가짜 클론 중 하나.

김인수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움직이기부터 했다. 다음 순간, 진가염의 머리는 잘려 김인수의 차원 금고에 들어가 있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맞군.”

“……!”

김인수는 놀라 뒤로 뛰었다. 분명 진가염의 머리를 잘랐는데, 그 머리가 다시 재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수법이 몇 번이고 통할 거라고 생각했나?”

“나한테 죽은 적이 있는 개체인가?”

“아니, 다른 개체에게서 옮겨 받은 기억이야.”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같은 목소리였다.

또 다른 진가염이었다.

“우리들은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지. 그래서 나 혼자서는 너에게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나 셋이서 널 이기겠다.”

세 번째의 진가염이 말했다.

“…너희가 그렇게 되기까지 너희들의 뇌를 연구자들이 얼마나 쪼물딱거렸을지, 솔직히 상상이 안 가는군.”

“우리끼리 서로 다투지 않는 게 신기한가? 하긴, 지난번엔 그런 우를 범하기는 했지.”

진가염 셋이서 동시에 김인수를 향해 자동소총을 겨누었다.

“별로 이상해할 건 없어. 그저 교훈을 얻은 것뿐이니까.”

“아, 그래?”

“그래. 그러니 이만 죽어라.”

김인수는 그들이 든 자동소총을 염동력으로 빼앗으려다 그만두었다. 총열 전체가 파멸철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었다. 클론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일반 병사보다는 좋은 무장이 주어진 듯했다.

“목이 잘려도 죽지 않는 초재생 능력에 파멸철 자동소총이라, 상대하느라 애 좀 먹겠군.”

김인수는 귀찮은 듯 내뱉었다. 파멸철 총탄이 이미 그를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김인수는 땅을 발로 한 번 쾅 밟자, 지면이 솟아올라 총탄을 막아내었다. 어벤저 스킬로는 파멸철은 못 막지만, 스킬로 인한 결과물은 막을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방어였다.

“어쨌든 개량한 초재생능 력에도 재생되는 기점이란 건 있겠지. 그걸 찾아볼까.”

차원 금고에서 단념검을 스윽 빼어들고, 김인수는 가장 앞에 선 진가염의 심장을 도려내었다. 거리는 20m 이상 떨어져 있었지만 단념검의 사정거리 안이었다.

“으억?!”

진가염의 비명 소리가 들렸지만, 단말마는 아니었다.

“심장은 아니었군. 그럼 다음은 간장을 실험해 볼까?”

“이런 미친!”

고통을 즐긴다던 진가염도 자기 내장을 꺼내 보이기는 싫었던지, 질겁하면서 김인수 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자동소총으로는 김인수의 엄폐물을 관통시킬 수 없어서 사격이 가능한 각도를 확보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김인수는 여유작작하게 단념검을 휘둘러 가장 앞에 선 진가염의 간장을 도려내었다.

“억!!”

“간장도 아니었군. 다음은… 에잇! 귀찮아!!”

사격 각도를 확보해 김인수의 육안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진가염이 좌우로 쩍 갈라졌다. 물론 초재생 능력으로 인해 곧 다시 합쳐졌지만, 김인수는 가학적인 미소를 띠었다.

“왼쪽이로군.”

“이 새끼가……!”

막 재생한 진가염이 자동소총을 들이대었지만, 그의 시야는 곧 다시 아스팔트와 흙으로 이뤄진 엄폐물에 의해 차단되었다.

“이번에는 위, 아래다!”

단념검은 이번에는 진가염을 허리를 기점으로 위아래로 써걱 잘라 버렸다. 시야는 엄폐물로 인해 가려져 있었지만 김인수는 육안으로만 시야를 확보하는 게 아니었으므로 별문제는 아니었다.

“아래라. 설마 불알이냐?”

“수류탄!”

엄폐물 너머로 수류탄이 휙 날아왔다. 염동력이 듣지 않는 걸로 보아 이것도 파멸철로 코팅한 수류탄인 것 같았다.

“거 참, 호화로운 무기들이로군!”

김인수는 염동력으로 자갈 하나를 집어다 던져 맞췄다. 수류탄은 되려 진가염들 쪽으로 날아갔다. 쾅! 위력도 일반적인 수류탄 이상인지 꽤나 화려한 폭음과 불꽃이 일었다.

그러나 적들은 피해를 입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김인수도 피해를 입힐 생각으로 튕겨낸 건 아니었다. 폭발에 조금이라도 놀라 빈틈을 노출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고, 그 목적은 달성되었다.

“왼쪽 신장.”

김인수는 단념검으로 자신의 배후로 돌아온 진가염의 왼쪽 신장을 도려내었다.

“우어억!”

“맞췄군!”

도려낸 신장을 덥석 붙잡아 차원 금고 안에 밀어 넣자, 그 진가염은 그 자리에 털썩 무너져 내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다른 두 놈은 눈치도 빠르게 벌써 도망치기 시작했다.

“야! 내 소총 놓고 가!!”

신체 강화 능력은 기껏해야 A급 정도인 진가염 클론들이 김인수를 따돌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어차피 단념검의 사거리를 벗어나지 않는 한 무의미한 도주이기도 했다.

진가염의 왼쪽 신장을 두 개 더 수집한 김인수는 그들이 갖고 있던 파멸철 자동소총 세 정과 수류탄 다섯 개를 회수했다.

“이놈들은 나에게 줄 아이템을 떨구러 왔나?”

김인수는 픽 웃었다.

[최재철씨, 큰일 났습니다!]

가면을 통해 현오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무슨 일입니까?”

[북한이 선전포고를 해왔습니다!]

*

북한의 초대 독재자, 정일은이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TV 카메라 앞에서. 그는 육성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후 선전포고를 했다.

“정일은이 죽은 지 50년도 더 됐는데! 저건 대체 뭡니까?”

“WF가 되살린 거겠죠. 아니, 정확히는 복제한 건가.”

현오준이 대신 경악해 줬기에, 최재철은 냉정한 척 분석할 수 있었다.

이미 북한 체제는 차원 균열에 의해 붕괴되었고, 어보미네이션이 지속적으로 기어 나와 국토 전역에 헬필드가 깔리는 현세의 지옥이 체현되고 있었다. 그 빈자리에 WF가 파고들어가 정일은의 방부 처리된 시체를 입수해 복제하고 꼭두각시 인형을 만들어 버린 것 같았다.

요 2개월간 대한민국에서는 조용하다 싶었더니, 북한에 틀어박혀서 이런 걸 준비해 뒀던 모양이었다.

파주에서 조우한 적 전력이 예상보다 많이 약하다 했는데, 그건 그냥 선발대 개념이라 그런 거였으리라.

“대놓고 독가스를 살포한 이유도 이제 좀 알겠군요. 북한 탓으로 돌려 버리면 만사 해결이니.”

만약 WF가 쿠데타에 성공하더라도 민간인을 상대로 독가스를 사용한 사실이 발각되면 그 후의 통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여기서 북한이라는 존재를 이용하는 건 아는 사람이 보기에는 눈 가리고 아웅에 불과했지만,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겐 잘 먹힐 변명이리라.

최재철이 예상한 대로 독가스를 풀어대며 차원 균열을 여는 ‘북한의 공작’은 경기도 북부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대한민국 육군과 OJ의 어벤저 팀이 지금도 교전 중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전황은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육군은 적들이 헬필드로 도망가 버리면 무용지물이 되고, 어벤저 팀이 공세를 취하기에는 전력이 부족합니다.”

“제가 가죠.”

최재철은 방독면을 다시 쓰며 말했다.

“몇 분 전에 얻은 전리품도 있습니다. 나눠줄 겸도 해서 전선들을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갈까요?”

“지휘부를 비워두면 안 됩니다. 지휘를 계속 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현오준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최재철은 초시공의 팔찌로 포탈을 열었다. 가장 먼저 가야할 곳은 전황이 가장 안 좋은 지역이었다.

*

“오, 캡틴!”

최재철이 포탈을 열고 오자마자 곧장 유구언이 그를 반겼다.

“상황은 어때요?”

“독가스 발생 장치는 육군 자주포가 파괴해 주었습니다만 적들은 헬필드 안에서 개인 화기를 든 채로 농성 중입니다.”

유구언이 이끄는 부대는 헬필드로부터 200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엄폐 중이었는데, 적들의 개인화기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한 선택인 것 같았다.

“어벤저가 접근하면 필드 밖으로 나와서 총을 쏘고, 육군이 접근하면 필드 안으로 도망가서 투석기로 바위를 던지는 식으로요. 그렇다고 저희가 후퇴하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 지루한 대치만 계속되고 있죠. 다른 데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투석기는 화약을 쓸 수 없는 헬필드 안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투사력을 지닌 병기 중 하나였다. 트레뷰셋이라면 사거리도 꽤 확보할 수 있고 정확성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어서 일제 사격을 가한다면 그냥 방어하는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현대 무기로도 대응하기 힘들 것이다. 날아오는 바위를 떨어뜨리겠다고 MD를 가동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럼 이쪽에서도 돌을 던져야겠군요.”

최재철은 그렇게 말하면서 집채만 한 바위 한 덩어리를 맨손으로 집었다.

“와오!”

유구언이 감탄성을 냈다. 그도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도 감탄성을 낸 이유는 최재철이 다음에 할 행동에 대해 이미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최재철은 바위를 휙 던졌다. 바위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적진으로 날아갔다. 정확히 적의 트레뷰셋을 노리고 날아가던 바위는 도중에 굉음을 내며 파괴되었다. 이미 바위가 헬필드 안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파괴되었으니, 능력에 의한 폭발일 터였다.

“적진에도 꽤 쓸 만한 능력자가 있는 모양이로군요.”

바위가 날아간 포물선으로 이쪽 위치를 특정했는지, 트레뷰셋으로 발사된 다섯 개의 바위 포탄이 꽤 정확하게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바위탄들은 지면에 닿지 않았다.

“뭐, 저라면 요격을 하진 않았겠지만요.”

염동력으로 인해 허공에 딱 멈춘 바위탄들은 곧 왔던 방향으로 도로 날아갔다. 두 개의 바위탄은 요격당해 공중에서 폭발했지만, 나머지 세 바위탄은 트레뷰셋에 적중했다.

“빙고!”

유구언은 신난 듯 외쳤다.

“역시 캡틴이로군요!”

그걸 들은 최재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별명으로 부르는 거 그만두라니까……. 뭐, 아무튼 좋습니다. 제가 앞장설 테니 따라오시죠. 돌격할 겁니다.”

“네? 돌격이요? 하지만 적의 전력이…….”

최재철의 말에 놀라며 망설이는 유구언에게 최재철은 일부러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둘밖에 요격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계산은 끝났습니다. 우릴 속이려고 일부러 투석기를 세 대나 파괴시키도록 내버려 두진 않았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캡틴! 여의주 씨, 권우언 씨! 들으셨죠? 캡틴께서 돌격하라고 하십니다!!”

유구언은 자신의 두 부장에게 통신 장치를 통해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영광입니다!”

두 사람의 대답이 들렸다. 최재철은 픽 웃었다. 인사권은 그냥 현오준한테 넘겨둔 터라 권우언이 어디 갔는지 궁금한데, 여기서 백의종군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럼 먼저 갑니다!”

최재철의 몸이 조금 전의 바위와 같은 궤도로 휙 날았다. 적의 폭발 능력자들이 최재철을 노리는 것이 보였다. 최재철은 손에 쥐고 왔던 돌멩이 두 개를 던졌다. 컥, 억! 두 놈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미안하지만 이것도 전쟁이라서!”

바람의 칼날을 집어던져 투석기부터 파괴한 후, 최재철은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적 어벤저들을 차례차례 패대기치기 시작했다.

파주 지역에서와 달리 적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적들은 반사적으로 자동소총을 들어 최재철을 겨누었지만, 여기는 헬필드다. 자동소총보다야 자갈 하나를 던지는 것이 더욱 위력적이었다.

“죽여! 숫자는 우리가 더 많아!!”

그나마 계급이 좀 높아 보이는 적 어벤저 하나가 그렇게 소릴 질렀다. 최재철은 즉시 그쪽으로 달려가 그놈의 멱살을 잡아다 머리를 지면에 박아버렸다. 그가 거꾸로 처박히자, 용기를 내어 접근하던 놈들이 움찔 멈췄다.

“캡틴의 뒤를 따라라!”

“와아아아아!!”

거기다 뒤이어 유구언 팀의 어벤저들이 헬필드로 치고 들어오자, 슬슬 사색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대로라면 어벤저들이 진입해 오기 전에 자동소총으로 응전했어야 했는데, 최재철에게 신경을 빼앗기는 바람에 골든타임을 놓쳤다.

적들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먼저 에이스들부터 잃은 데다 최재철은 이미 헬필드 영역 안에 있었기에 화기로는 제압할 수 없었고, 최재철의 뒤를 이어 OJ 측의 어벤저들이 소릴 지르며 몰려오니 암담하다고 느낄 법도 했다. 그러다 보니 도주하려는 놈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헬필드 바깥으로 나가려는 놈들을 놓치지 마라!”

순수하게 도주하려던 것이든 필드 밖으로 나가 자동소총으로 응전하려던 의도였든 상관없이 어쨌든 헬필드 안에서 모두 쓰러뜨려야 했다. 순수한 화력은 대한민국 육군이 우월하다 한들 적에게 화기 사용을 허용하면 아군의 손실이 더 커질 테니 말이다.

최재철부터가 앞장서서 도망치는 놈들을 꺼꾸러뜨리고 현오준이 그렇게 칭찬을 많이 했던 유구언이 기대를 만족시키는 활약을 해서, 결국 큰 피해 없이 헬필드의 점령에 성공했다.

“뒤처리는 부탁드리죠, 유구언 팀장님!”

아직도 경기도 곳곳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의 교전만 신경 쓰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맡겨만 주십쇼, 캡틴!”

유구언의 든든한 대답을 들은 최재철은 바로 다른 지역으로 향했다.

*

최재철이 현오준의 보고에 따라 전황이 안 좋은 지역부터 쭉 돌았다. 경기도 지역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나자, 이번에는 또 다른 급보가 현오준으로부터 날아왔다.

“북한 지역에 있던 어보미네이션들이 휴전선을 넘어 남침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놀라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이북의 어보미네이션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이야기는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은 최재철은 서둘러 휴전선으로 향했다.

그동안 휴전선 너머의 어보미네이션들이 조용했던 건 휴전선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너무 잘 싸워서 최하급이나 하급 어보미네이션은 도저히 방어선을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겁을 먹은 어보미네이션들은 한 번 크게 데인 후부터는 아예 휴전선으로는 접근도 안 했다.

그런데 그 어보미네이션들이 갑자기 휴전선을 넘어 남침해 오고 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떤 큰 변수가 없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변수 중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WF였다.

어보미네이션을 완전히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순히 압도적인 힘을 보여서 원하는 방향으로 도망치도록 몰수도 있지만, 이건 늑대가 사냥감을 모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제어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결국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정적이었다.

“아마도 어보미네이션 조련 스킬을 손에 넣었겠지.”

“그런 스킬도 있어요?”

최재철은 오연화와 함께 GOP에 나와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의 파도가 어느새 육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곳까지 몰려와 있었다.

현오준 팀에서 가장 강한 화력을 뿜어낼 수 있는 인원은 최재철을 제하면 여전히 오연화였다. 그래서 최재철도 이 최전방까지 그녀를 데려온 것이었다. 오연화더러 사람을 죽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꺼려졌지만, 어보미네이션이라면 다르다.

“그래. 고유 스킬이라서 첫 계약 때만 얻을 수 있는 스킬이지. 나도 못 익혔어.”

“선생님도 못 얻는 스킬이 있어요?”

오연화가 놀란 토끼 눈을 떴다.

“애초에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계약마한테 어보미네이션을 조련할 수 있는 스킬을 달라고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애초에 너무 비싼 스킬이라 자기 존재 하나만 바치는 것 갖고는 안 돼. 가족들도 바치는 정도는 되어야 하지.”

“가족…….”

오연화의 표정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러고 보니 그녀도 비슷한 방식으로 힘을 얻었다. 그녀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최재철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어 위로했다.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야, 연화야. 그보다 준비나 해둬.”

“네, 선생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설치해 둔 크레이모어는 이미 다 격발된 지 오래고, 지뢰 매설 지역도 어보미네이션 무리가 이미 몸으로 다 밟아 터뜨린 뒤였다.

후방의 야포 화력 지원과 함께 기관총 포대가 불을 뿜어서 진군해 오는 어보미네이션의 파도를 간신히 막아내고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지 알 수 없었다.

재래식 화력 갖고는 얼마 못 버틴다. 폭격기 폭격 정도는 필요했지만, 아직 공군은 조용했다. 지난 대재해 때 작전권은 다시 미군에 넘어갔으니, 미군이 아직 폭격 명령을 내리지 않은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아직 버틸 만한 건 사실이니, 미군의 결정 갖고 뭐라 하긴 그랬다.

“뭐, 그전까지는 우리가 어떻게든 해야겠지.”

어보미네이션들은 다른 어보미네이션들의 시체를 넘고 넘어 계속해서 진군해 오고 있었다. 기관총의 총열이 달아올라 잠깐 식히고 있는 사이에, 끊임없이 파도처럼 몰려오는 어보미네이션의 무리는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제정신으로 보고 있을 수 없을 터였다.

특히나 원래대로라면 다른 어보미네이션을 포식해야 할 빅 마우스가 촉수를 휘두르며 허공을 유영하고 있었고, 그 빅 마우스를 주식으로 하는 거대한 고래 형태의 어보미네이션인 눈 사냥꾼이 이 세상의 것으로는 들리지 않는 기이한 포효를 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지구에서는 보기도 힘들 저 거대한 상급, 최상급 어보미네이션들 때문에 현역병들이 공포에 사로잡히기 전에 놈들을 좀 뒤로 물러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염동력의 벽을 세우는 느낌으로……. 그래, 잘했다.”

오연화가 염동력의 벽으로 어보미네이션들을 막아 세워 한군데로 잘 몰아넣자, 최재철은 그 상공에 운석들을 불러내었다.

“메테오 스트라이크?!”

오연화가 놀라움 반, 기쁨 반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냥 운석군 소환이야. 그보다 왜 메테오라고 하니?”

최재철은 그렇게 잡담을 하면서 불러낸 운석들을 어보미네이션의 머리 위에 떨어뜨렸다. 콰콰콰쾅!! 비록 궤도상 폭격인 건 아니라 위력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쨌든 운석은 운석이다. 대폭발의 벽이 GOP 너머를 가득 메웠다.

“히이이이익!!”

달아오른 기관총의 총열을 갈던 기관총 사수가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열기와 폭음이 여기까지 미쳤으니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염동력으로 벽을 세워 기관총 사수를 보호해주면서, 최재철은 주의 깊게 폭발 너머를 지켜보았다.

어보미네이션들은 폭발의 여파로 삽시간에 세 개의 목숨을 낭비했지만, 진군을 멈추고 있지는 않았다. 그걸 본 최재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겁을 주려고 꽤 큰 스킬을 쓴 건데, 도망치지 않는군. 연화야, 안 좋은 소식이다. 저것들은 역시 조련당한 게 맞는 같다.”

최재철은 심각한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오연화가 따라서 심각한 목소리를 냈다. 그게 묘하게 귀여워서 이 상황에서도 최재철은 픽 웃고 말았다.

“이대로는 끝이 안 나. 저 어보미네이션들을 일일이 다 처리하고 있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소환사를 직접 쳐야 한다는 거로군요!”

“어, 응. 맞아. 그런데 왜 하필 소환사라 그러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저도 갈 거예요.”

대신 돌아온 건 고집으로 똘똘 뭉친 선언이었다. 최재철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래, 너 떼어놓고 가는 게 더 힘들 거 같다.”

최재철은 염동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띄워 올렸다. 오연화는 비행 능력을 부여하는 아티팩트인 헤르메스의 부츠를 사용했다.

“자, 가자.”

“네, 선생님!!”

그런 그들을 맞이하기라도 하듯, 거대한 어보미네이션이 폭염을 뚫고 나타났다. 눈 사냥꾼이었다.

크구거거거거거.

공기는 물론이고 차원마저 흔들린 것 같다는 착각마저 줄 정도로 엄청난 포효를 내지르며, 눈 사냥꾼이 허공에 뜬 최재철과 오연화를 노렸다.

“하, 저거 비싼데. 그래도 상처 없이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로군.”

최재철은 아쉬움에 혀를 한 번 차고 차원 금고에서 눈 사냥꾼 사냥용 아티팩트인 스타벅의 작살을 꺼내다 던졌다. 스타벅의 작살은 정확히 눈 사냥꾼의 심장으로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심장만을 파괴하도록 조심조심 죽였을 테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쾅!

거대한 폭발이 눈 사냥꾼을 휘감았다. 눈 사냥꾼은 그대로 한 번, 즉사했다. 물론 그래도 눈 사냥꾼에게는 다른 어보미네이션과 마찬가지로 두 개의 생명이 남아 있긴 하다.

“되살아나는 데 시간이 걸릴 거야. 무시하고 가자.”

“네, 선생님.”

오연화도 눈 사냥꾼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건 처음일 텐데도, 별로 겁먹은 기색도 없이 태연히 대꾸했다.

눈 사냥꾼을 쉽게 따돌리고, 두 사람은 빠른 속도로 휴전선을 넘어서 월북했다.

*

처음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눈 사냥꾼이나 빅 마우스 정도만 지나가다가 말고 충동적으로 최재철과 오연화를 노리는 정도였는데, 앞으로 나아갈수록 집단적이고 적극적으로 최재철과 오연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적이 우리가 온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빅 마우스의 촉수를 모조리 잘라 산 채로 지면에 내던지며 최재철이 말했다. 최재철이 하던 걸 똑같이 따라하던 오연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어쩌죠?”

“어쩌긴, 대놓고 가서 말살해야지.”

오연화 앞이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적의 능력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데다 그 적이 자신보다 강할 수도 있다는 점은 최재철에게도 부담이었다.

“일단 속도를 좀 올려야겠다, 연화야.”

“네?”

“이리로 와.”

“꺅!”

최재철은 오연화를 품에 안았다. 오연화의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장면은 녹화해 두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지만, 지금 상황이 그럴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를 안는 것이 목적인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꽉 잡아. 속도 올린다.”

“네? 꺄아아아악!”

오연화는 조금 전의 비명과는 전혀 다른 비명을 질렀다. 쾅쾅쾅쾅! 음속을 돌파하고 공기의 벽을 부숴가며 최재철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평소라면 소닉붐을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고 속도를 올렸겠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소닉붐을 발생시켜서 주변의 어보미네이션을 휘말아들도록 하고 있었다. 이러면 휴전선 쪽의 병사들에게 부담이 조금이라도 덜 갈 터였다.

그렇게 꽤 전진한 그들의 앞을 이번에는 어보미네이션으로 쌓아올린 벽이 막아섰다. 오히려 그 벽이 최재철에게 있어서는 자신감을 부여해 주었다.

“여기가 맞군!”

적은 날 두려워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적보다 강하다!

본래대로라면 야생 동물이나 할 사고 패턴이지만, 별다른 정보가 없을 때는 이런 직감에 의존하는 게 오히려 나은 경우가 많았다.

단념검을 빼어들까 하다가, 이제까지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쓰고 있을 때만 단념검을 빼어들었다는 것을 뒤늦게 생각해 낸 최재철은 이번에는 글라디우스 형태의 아티팩트를 꺼내들었다. 이 아티팩트의 이름은 만관검. 뭐든지 꿰뚫어 버리는 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보미네이션으로 이루어진 벽에다 만관검을 찔러 박자, 그 찌른 부위로부터 반경 5m쯤 되는 구멍이 뚫렸다. 어보미네이션들이 꾸물거리며 벽을 도로 막으려고 했지만, 이미 최재철과 오연화는 구멍을 통해 벽을 통과한 다음이었다.

벽을 통과하자마자, 최재철을 노리고 한 줄기의 굵은 광선이 날아들었다. 최재철은 익숙하게 궤도를 바꿔 그 광선을 피했다. 괜히 뒤에서 우글거리는 어보미네이션들만이 깔끔하게 소멸당했다.

“파멸의 빛이로군. 꽤 수준이 높은데?”

광선이 날아온 쪽을 보니 어벤저 한 무리가 모여 있었다. 숫자는 10명 정도. 그중 세 명이 기괴한 문양을 새긴 바위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집중하고 있었고, 나머지 일곱은 최재철을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저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놈들이 어보미네이션들을 조종하고 있을 터였다.

적들의 모습을 확인한 최재철은 혀를 쯧, 하고 찼다.

“의식 마법인가. 과연, 저런 방법이라도 써야 이 많은 어보미네이션을 다 제어하지.”

최재철이 여기까지 내려오는 동안 본 어보미네이션의 숫자만 해도 수만 마리는 족히 넘었다. 한 명의 어벤저가 제어할 수 있는 규모는 아니었다. 각 어벤저 한 명의 힘은 약하지만, 세 명의 힘을 모아 증폭하는 방식으로 이 거대한 이적과도 같은 현상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어보미네이션 조련이라는 희귀한 스킬을 가진 어벤저가 동시에 세 명이나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벤저들이라고 보는 게 차라리 타당했다.

저 바위도 그냥 평범한 바위가 아니라 차원 세포에서 가져온 아티팩트일 터였다. 차원 능력을 증폭시키는 기능이라도 붙어있는 것일 테고 말이다. 아니라면 이만큼의 대규모 군세를 제어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하지만 다른 놈들은 비교적 무난하군.”

능력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럴 필요성이 그다지 없었다. 최재철은 한 손으로는 슬쩍 오연화의 눈을 가리며 파멸의 빛을 날린 것으로 보이는 놈을 향해 만관검을 찔렀다. 거리는 100m 가량 떨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놈은 심장 부위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적 어벤저 집단이 동요하는 빛이 역력했다. 거리가 좁혀들 때까지 파멸의 빛으로 이쪽에 일방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겠지만, 그 믿음이 깨져서 당황하고 있는 것이리라.

“선생님, 뭐예요?”

“연화야, 저것들 좀 부탁해도 될까?”

벽을 쌓고 있었던 어보미네이션들이 최재철과 오연화를 노리고 뒤에서부터 달려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연화는 밝은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네!”

대답을 듣자마자 최재철은 쏜살 같이 앞으로 날았다. 적들도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숫자는 다섯. 전원은 일반적인 A급을 초월한 실력자였다. 저 적들이 당연하게 비행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이제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아마도 오연화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아티팩트를 사용한 것이리라.

최재철은 차원 금고에서 클론 진가염에게서 탈취한 자동소총을 꺼내들었다. 연발로 놓고 방아쇠를 당기자 드르르륵 기분 좋은 소음과 함께 총탄이 허공을 갈랐다.

적들은 코웃음을 치며 능력으로 방어막을 쳤다. 아직 이 소총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파멸철로 만들어진 총탄은 방어막 같은 건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무시하고 적들을 꿰뚫었다.

“끄아악!!”

세 놈이 피를 쏟으며 추락하는 걸 보고서야 적들은 최재철이 뭘 들고 있는지 깨달은 건지 황급히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속도로는 최재철을 따돌릴 수 없었다. 최재철은 쉽게 적들을 따라잡아 등에다 대고 파멸철 총탄을 선물해 줬다.

“너무 쉽군!”

이계에서도 미리 알고 대처를 하지 않으면 제 아무리 실력자라도 슬링으로 투척된 파멸철 원석을 맞고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물며 소총으로 발사된 총탄이야 말할 것도 없다. 만약 파멸철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지 못했더라면, 최재철이 저들 꼴이 났을 것이다.

괜히 S급 랭커는 아닌지라, 오연화는 떼거지로 몰려드는 중급 어보미네이션들을 너무나도 쉽게 처리하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들을 동원해도 최재철과 오연화를 처리할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적 어벤저들이 바위에서 일어나 황급히 내빼기 시작했다.

“파이어 인 더 홀!”

그런 적들을 향해 최재철은 파멸철 수류탄을 냅다 던져주었다. 따악! 가장 먼저 도망간 놈의 뒷통수에 쇳덩어리나 다름없는 수류탄이 작렬했다. 쾅! 뒤이은 폭발이 적들을 휘감았다. 폭발이야 그냥 평범한 폭발이지만 파멸철 파편은 능력으로 막히지 않아서 꽤 효과적일 터였다.

최재철은 자동소총의 조정간을 단발로 놓고 수류탄의 폭발에서도 살아남은 놈들을 하나씩 헤드샷으로 처리했다. 탕! 탕! 탕!!

“허, 군대에서 익힌 게 이럴 때 도움이 될 줄이야.”

적들을 다 처리하고 나자, 제어에서 풀려난 어보미네이션들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다. 그건 최재철이나 오연화에게는 그리 불리한 현상은 아니었다. 본성을 되찾은 놈들은 이제 더 이상 명확한 목표 설정 없이 대충 약한 놈부터 노려서 서로 잡아먹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최전방까지 전진한 놈들도 마찬가지 상태일 터였다.

“선생님!”

더 이상 어보미네이션들을 막아서고 있을 필요가 없어진 오연화가 최재철에게 돌아왔다.

“상황 종료. 이제 복귀하자, 연화야.”

그렇다. 상황 종료였다. 너무 쉬웠다. 너무 쉬운 게 기분이 나빴다.

“최대한 빨리 돌아가야겠어.”

“네? 상황 종료라면서요?”

오연화가 순진한 눈빛을 깜빡이는 걸 보며, 최재철은 픽 웃었다.

“난 내 손으로 진가규 목덜미를 틀어쥐기 전까지는 안심을 못하겠다.”

*

최재철이 예상했던 대로 WF의 공세는 아직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지금까지의 공세가 눈가림에 불과했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이 북한의 것으로 여겨지는 테러와 어보미네이션의 대공세에 대응하는데 집중하고 있을 때, WF의 가장 강력한 힘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가장 먼저 장악당한 곳은 육군 본부였다. WF는 육군 본부 앞에 차원 균열을 열어버리고 헬필드를 확산시킨 후, 어벤저 병력을 움직여 지휘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청와대가 점령당했다. 청와대 측에는 차원 균열이 열리지는 않았다. 임기가 2개월 남은 대통령은 마치 사전에 협의한 것처럼 쉽게 항복해 버렸다.

다음은 의회였다. 마침 의회에서는 북한 측의 갑작스러운 선전포고 때문에 긴급 임시 국회가 열리고 있었다. WF는 손쉽게 의원들을 제압하고, 저항하는 의원들은 어벤저 스킬을 사용해서 세뇌시켜 버렸다.

마지막으로 차기 대통령 당선자의 자택이 폭파당했다. 대통령 당선자는 즉사했다.

“지나치게 빨라요.”

현오준의 말이 맞았다.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건 최재철이 어보미네이션 조련 능력자들을 처치하기 위해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있었던 시간 동안이었다.

GOP에서의 대기시간을 합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2시간. OJ측도 WF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 나름 어벤저 부대를 배치해 두었고 수도 방위 사령부도 가동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OJ의 어벤저 부대와 대한민국의 최전선 실전부대가 가용 중인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빨랐다.

OJ의 어벤저 부대는 패퇴했고, 수도방위부대는 헬필드 때문에 별 역할을 못했다. 다른 곳보다 OJ가 적들의 쿠데타 성공 소식을 빨리 접할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패퇴한 어벤저들이 먼저 보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내부자의 내응이 있었겠죠.”

최재철이 대답했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대담하게 저지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그도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차기 대통령 당선자 쪽에게도 말입니까?”

“그야 그렇겠지요. 매수, 세뇌, 협박…….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WF는 어벤저가 아닌 일반인을 어벤저로 만들고 원하는 어벤저 스킬을 부여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졌다. 아직까지도 물증은 없지만, 정황증거는 충분했다.

돈으로 매수하는 게 통하지 않는 상대라도, 어벤저 스킬 부여를 미끼로 매수를 시도한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달라지지 않더라도 세뇌 능력을 부여한 어벤저로 세뇌해 버리면 그만이고.

매수보다는 세뇌가 싸게 먹히는 데도 불구하고 세뇌를 먼저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이유, 그것은 세뇌의 경우 매수와 달리 해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적들은 이쪽에 세뇌를 해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쿠데타를 허용해 버리고 말았군요. 이제 저쪽이 관군입니다.”

현오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나 다를까, 육군 본부에서 하달된 명령에 따라 대한민국 국군은 이미 전장에서 철수했다. 그나마 GOP의 어보미네이션들이 다시 북쪽으로 물러가서 한 번의 위기는 넘겼지만, 다음 상황부터는 OJ의 어벤저 부대로만 대응해야 했다.

국군이 적으로 돌아설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상, 상당히 골치가 아파진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습니다.”

최재철은 적대감을 담은 시선으로 TV를 쏘아보며 말했다.

“저는 저의 적을 처치할 뿐이니까요.”

아직 TV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나오고 있지 않았다. 북한의 선전포고조차 TV 전파를 타지 못했는데, 쿠데타 소식이 벌써 뉴스로 나올 리는 없었다.

하지만 적들은 곧 승리선언을 할 것이다. 최재철이 기다리고 있는 건 그것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그가 가장 기다려왔던 순간이기도 하다.

쿠데타의 성공을 자축하는 선언, 그것은 곧 저들이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고백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정의라는 이름으로 복수를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복수를.”

최재철은 말했다.

*

상황은 어느 정도 최재철이 예상한 대로 돌아갔다. 청와대로 기자들이 부름을 받았다. 카메라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진가규가 TV에 직접 나왔다.

진가규는 김인수를 차원 균열 안으로 밀어 넣을 때보다도 더욱 젊어진 모습이었다. 아무리 높게 잡아야 기껏해야 40대 정도로, 그의 모습은 도저히 손자까지 있는 노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국민 여러분, 본인은 진가규라 한다.”

마치 영주가, 왕이, 황제가 신민들에게 말하듯, 진가규는 좋게 말하면 예스럽고, 정확히 말하자면 시대착오적인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공화국은 국민 여러분에게 투표권을 하나씩 부여하지만, 이것이 중우정치로 번질 위험이 있음은 고래로부터 증명되어온 바이다. 어리석은 민중은 루이 16세를 죽여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들고, 나폴레옹을 황제로 옹립해서야 간신히 스스로를 지켰다. 어리석은 민중은 스스로 히틀러를 불러들여 통령으로 삼고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였다.”

진가규는 어리석은 민중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 발음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은 현인이라는 듯,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교훈이라도 주려는 듯, 그의 이야기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이 대한민국의 국민 여러분은 진정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다.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를 대통령으로 뽑아 올렸으니, 이 어찌 어리석지 않다고 할 수 있으랴. 어리석은 민중에게 스스로를 이끌 자를 뽑을 선택권을 준다는 것은 이렇게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게 실컷 민주주의를 폄하한 후, 진가규는 말투를 바꿨다.

“그와 반대로 위대한 왕의 통치 아래 국가와 신민은 얼마나 행복한가. 세종대왕 아래서 조선은 그리도 행복했으며, 징기스칸 아래서 몽골제국은 세계의 절반을 통치했으니. 보라, 위대한 자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영광이노라.”

진가규가 대중들을 칭하는 단어를 국민 여러분에서 신민으로 바꾸었다. 신민. 이 시점에서 진가규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어리석은 왕이 왕위에 오름은 국가의 재앙이나, 그것은 인간의 수명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 얼마나 위대한 왕이라 한들, 언젠가는 죽고 만다. 그 뒤를 이어서 어리석은 자가 그저 혈통이라는 알량한 끈에 기대어 군주의 직에 오르는 것은 그 본인에게도 재앙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진가충을 떠올린 이가 한둘은 아니리라. 그러나 진가규는 바로 이야기를 반대로 뒤집었다.

“하나 보라. 여러분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 진가규의 모습을. 본인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영생을 손에 넣었으니, 영원토록 위대하리라.”

진가규가 마지막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건 70대 노인의 얼굴으로였다. 하지만 40대의 그것으로 탈태한 지금의 진가규는 정말로 영생을 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발언은 자신의 손으로 민주주의를 살해하고 왕정복고를 꾀하겠다는 의미밖에 되지 않게 되었다. 더불어 그 왕정 국가 대한민국의 국왕은 자신이 하리라는 야심을 드러내는 발언이기도 했다.

“제국의 신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라. 본인은 대한제국의 부활을 여기서 선언하노라.”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진가규는 본인이 직접 황금 관을 들어 자신의 머리에 썼다.

그러자 누군가가 선창했다.

“대한제국 영원 황제이신 진가규 폐하!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소리는 그 자리에 집결한 이들에 의해 울려 퍼졌다.

*

한 편의 희극과도 같은 진가규의 연설을 들으며, 최재철이 느낀 건 차라리 희열이었다.

“이렇게까지 명백하게 악당이 되어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죠.”

현오준도 같은 생각인지, 번뜩이는 눈동자로 TV를 노려보고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복수심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행동 원리에, 타파해야 할 원수가 스스로 악임을 자인했다. 그렇다면 이들의 복수는 곧 정의가 된다. 복수자로서 어찌 희열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 우리나라는 제국이 된 건가요?”

조소 섞인 목소리로 현오준이 말했다.

“제국이 되려면 제후국이 필요할 텐데요.”

“북한을 제후국으로 삼겠죠.”

최재철의 말이 채 다 끝나기도 전에 TV의 화면이 바뀌었다. TV에는 북한의 지도자, 정일은이 나와 있었다.

“우리 북한은 진가규 황제 폐하의 즉위에 경하 말씀을 올리며, 무조건 항복을 선언합니다.”

정일은은 그렇게 무책임할 정도로 짤막하게 선언을 마쳤다. 이에 진가규는 정일은을 북한의 왕으로, 자신의 아들인 진가염은 남한의 왕으로 봉했다.

“제후국이 생겼군요.”

“하…….”

최재철의 말에 현오준이 허탈한 듯 웃었다. 이게 불과 1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미리 계획한 대로 진행해도 이것보단 느릴 터였다.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었을까요? 짠 거 아니냐는 의혹을 받을 텐데.”

“아마… 당신 때문일 겁니다, 최재철 씨.”

현오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이 저들의 예상보다 빨리 북한의 어보미네이션 침공을 막아내 버리는 바람에, 시나리오의 진행을 서둘러야 했겠지요. 원래대로라면 진가규의 군대가 직접 북한의 침공을 막아내고 항복을 받는 시나리오라도 짰겠지만, 그게 불가능해졌으니 아쉬운 대로 한 걸 겁니다.”

“시나리오라……. 하긴,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안 나오는군요.”

애초에 선전포고를 한 이유로 댄 게 차기 대통령 당선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니, 아예 말이 안 되는 시나리오도 아니었다.

하기야 북한의 선전포고 자체가 엠바고에 걸려 대중들에게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 50년도 전에 죽은 정일은이 TV에 얼굴을 비친 것 자체가 충격적으로 비칠 터였다.

여러 모로 21세기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너무나도 몰상식한 일이었지만,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면 저들의 뜻대로 모든 것이 굳어지리라. 이제까지 일어난 쿠데타가 모두 이렇게 일어났다.

군대도 의회도 모조리 적들에게 장악당한 이상, 반대할 만한 세력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국내에는 우리 정도겠죠.”

똥 씹은 얼굴로 현오준이 말했다. 그의 말 대로였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같은 외국들의 대응을 기다리고, 그들의 영향력을 빌릴 생각을 해선 안 됐다.

아니, WF가 그간 행사해 온 국제적 영향력을 미루어 볼 때, 중국이나 러시아가 신생 대한제국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가능성은 별로 낮지만은 않았다. 미국도 자국에 차원 균열이 열린 이후부터는 폐쇄주의를 표방하고 있으니 그들의 움직임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모든 것이 굳어지기 전에 직접 나서야 했다. 그것이 지금 내릴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이었다.

“어벤저들을 모아주세요.”

최재철은 결의했다.

“이번에는 저도 갈 겁니다.”

최재철의 말에 현오준이 즉시 말했다.

“지휘는 당신이 하십시오, 최재철 씨.”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 뒤에 숨을 필요도 이제 없다. 최재철의 부모를 지키기 위해서라든가, 잡스러운 변명 따위는 때려치울 때가 되었다.

“…알겠습니다.”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

아직 해가 뜨기도 전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이 광화문에 집결해, 청와대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다. 진가규의 즉위식을 TV로 보고 격분한 사람들이 누군가가 선동하기도 전에 스스로의 의지로 모여 항의 집회를 시작한 것이었다.

TV 카메라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외신들도 몰려들었다. 대한민국에 갑자기 일어난 이 사태는 분명 좋은 특종이 되리라. 대한민국에서 이제까지 일어났던 두 차례의 쿠데타에서도 외신 기자들은 안전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제정 반대’, ‘물러나라, 진가규’ 등의 구호를 외치며 천천히 전진하던 그들의 앞을 탱크가 가로막았다.

“설마 발사하진 않겠지.”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발사!”

그 중얼거림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휘관이 우렁차게 외쳤다. 쾅! 탱크의 포가 불을 뿜었다.

“이 새끼들! 진짜로 쐈어!!”

군중들 사이로 공포가 들불처럼 번졌다. 스스로가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외신 기자들도 두려워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탱크에서 발사된 포탄은 아무도 죽이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 포탄을 맨손으로 받아냈기 때문이었다. 그 근력은 물리법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류의 것이었다. 즉, 남자의 정체는 어벤저였다.

“씨팔 놈들아!”

포탄을 받아낸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탱크를 향해 되던졌다. 쾅! 포탄을 정통으로 맞은 탱크가 폭발했다. 당장의 위협이 사라지자 군중의 공포는 곧장 분노로 치환되었다.

“죽여 버려! 없애 버려!!”

“와아아아아!!”

성난 군중들이 병사들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저들은 폭도다! 발사하라! 발사하라!!”

소총병들이 전열보병처럼 일자로 늘어서서 비무장 상태인 시민들을 상대로 일사불란하게 총격을 시작했다. 탱크의 포탄과 달리 그것들은 어벤저 한둘이 다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속수무책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개새끼들! 개새끼들아!!”

총을 맞아 오른팔에서 피를 흘리는 청년이 욕설을 퍼부어대었다. 그런 청년에게 최하급 계약마가 속삭였다.

[힘이 필요한가?]

“대가는 내 오른팔이다! 저놈들을 죽여 버릴 힘을 줘!!”

총을 맞아 죽기 직전에 이른 시민이 최하급 계약마와 계약을 맺어, 그 자리에서 어벤저가 되었다. 그 시민의 오른팔이 증발하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신 샐러맨더가 자리 잡았다. 샐러맨더가 입을 쩌억 벌리고 병사들을 향해 불꽃을 뿜어내었다.

“끄아아아악!”

“물러서지 마라! 저들은 폭도다! 나라를 위해 싸워라!!”

지휘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탕! 그 지휘관의 머리를 총탄이 꿰뚫었다. 어느새 어벤저 하나가 날아와 병사의 소총을 탈취해서 지휘관을 저격해 버린 것이다.

“병사들도 우리나라 청년들이야! 항복할 놈들은 항복해라!!”

지휘관을 저격한 어벤저가 고래고래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이 무색하게 병사들의 총구는 어벤저를 향했다.

“소대장님도 우리 전우였어, 이 개새끼야!”

“이… 제국의 개들이!!”

총구를 앞에 둔 어벤저는 이를 꽉 물며 눈을 감았다.

타앙!

*

“크… 큭큭큭.”

시민과 군대의 교전 상황을 커다란 디스플레이로 감상하고 있던 진가염의 입술 사이로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우민들과 재래식 군대가 교전 중입니다, 전하.”

“상황 보고가 늦군, 두예지 백작.”

문을 열고 들어온 두예지에게 진가염이 유쾌한 듯 말했다.

“이미 감상 중이셨군요.”

“그래, 내가 만든 영화잖나. 내가 봐줘야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은 진가염의 말대로 영화인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실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각본으로 쓴 건 진가염 본인이 맞았으니, 그의 말은 부분적으로 진실이었다.

“시위 따위로 뭔가 바꿀 수 있다고 믿다니, 민주주의 시민답군. 현실 인식이 늦어. 지금 이 나라는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인데 말이야.”

[시민을 쏘지 마라!]

스피커를 통해 누군가의 처절한 외침이 들렸다. 그러나 그 외침은 곧 총성에 묻혀 사라졌다. 시체 무더기 속에서 태어난 초인들이 거리를 내달리고 있었고, 병사들은 그들을 상대로 살아남기 위해 각개전투를 시작했다.

“내가 만든 작품이지만 참 걸작이지 않나? 혹자는 러시아 혁명 때처럼 군대가 시민의 편에 서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참 쓸데없는 걱정이었어.”

진가염은 잠시 키득거렸다.

“왜? 그때와 달리 지금은 어벤저라는 게 존재하거든. 이미 저들은 무력한 시민이 아니고, 어벤저 스킬이라는 이름의 무기를 든 전사들일세. 전사는 전사와 맞서 싸워야지. 안 그런가?”

“전하의 말씀대로입니다.”

두예지가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 전쟁의 끝은 어떻게 되리라 예상하십니까?”

“각성하지 못한 자는 죽고, 각성해서 살아남은 자들 중 우리 편은 폭도를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될 테지. 적들 중에서도 투항하는 자는 작위를 얻을 테고. 말하자면 어벤저의 대량생산일세. 뭐… 대량생산되는 건 어벤저만은 아닐 테지만 말일세.”

마침 화면에는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하고 만 병사의 모습이 비쳤다. 상황이 워낙 급박한지라, 계약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계약하지 못한 것이다. 그 광경을 보며 진가염은 싱글싱글 웃었다.

“어보미네이션 공장을 돌릴 필요가 없어서 참 좋군.”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 병사는 곧 다른 병사들에게 살해당해 시체가 되었다. 헬필드도 없는 환경에서 하급 어보미네이션은 그저 생명이 세 개일 뿐인 피식자에 불과했다.

스피커를 통해 고통스러운 비명이 들릴 때마다 진가염은 박수를 치며 껄껄 웃었다. 사람은 계속 죽어나가고 있었다. 병사들도, 어벤저들도 죽어나가고 있었다.

“여기에서 변수가 하나 나올 법도 한데 말이야.”

진가염은 문득 입을 열어 말했다.

“변수 말입니까?”

“그래. 이 상황을 뒤집어엎을 만한 변수라고는 하나 정도지.”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점점 비명 소리가 잦아들고, 진압 부대 측이 일방적으로 밀려 나가고 있었다. 후퇴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명백히 열세였다.

“드디어 나왔군.”

그럼에도 진가염의 입가에선 아직 미소가 걷히지 않았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어느새 상황은 그가 쓴 각본 속의 클라이막스로 치닫고 있었다.

*

“저를 어리석다고 하실 겁니까?”

“아뇨.”

최재철의 말에 현오준이 대답했다.

“당신이 옳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예에, 캡틴!]

가면의 통신 장비를 통해 유구언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무리 기습할 찬스를 놓쳤다고는 하지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냥 버리고 갈 순 없죠! 오히려 여기서 그냥 지나쳤다면 실망할 차였습니다!!]

[전 스승님이 어떤 선택을 하시든 지지할 겁니다.]

이지희가 이어 말했다.

“그렇군.”

최재철은 피식 웃었다.

“명령하시죠.”

현오준의 말에,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압 부대를 제압하라.”

[예스! 마이 캡틴!!]

OJ 부대의 오른쪽에서 유구언이 기다렸다는 듯이 총알처럼 튀어나가, 진압 부대의 소총을 칼로 깔끔하게 잘라내어 버렸다. 그 뒤를 여의주와 권우언이 이었다.

[우리도 지고 있을 수 없죠! 안 그래요? 사저!]

[그렇네요, 구문효 사제님.]

[그냥 반말 쓰시죠!]

오른쪽에서 구문효와 이지희가 튀어나가 진압 부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진압하기 시작했다. 참고로 반말 쓰라는 구문효의 말에 이지희는 2개월 전부터 지금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터였다.

휘하 어벤저 부대원들도 각자의 부대장들을 따라 진압 부대의 제압을 시작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다! 우리 편이 되어주었어!!”

시민들이 그들을 반기며 외쳤다.

“저도 당신들을 따르겠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오른팔이 샐러맨더의 형상이 되어버린 청년이 외쳤다. 그 청년에게 최재철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말했다.

“그렇다면 병사들을 죽이지 말게.”

“예?”

“저들도 우리 시민일세.”

“아… 알겠습니다.”

샐러맨더의 청년은 납득하지는 못한 것 같았지만, 일단 그 지시를 따르게 해줄 것 같았다. 최재철 본인조차 흥분한 시민을 자신의 말로 제어할 수 있을 거라고는 믿지 않았는데, 그나마 다행이었다.

*

진압 부대를 제압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았다. 최재철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제압당해 사로잡힌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제국 신민인가? 민주주의 시민인가?”

병사들 사이에서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제국? 신민? 무슨 말입니까?”

병사 중 한 명이 물었다. 최재철은 혀를 찼다.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나온 모양이로군. 하긴, 그럴 테지.”

“WF의 사장인 진가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황제로 즉위했어! 우린 그걸 반대하기 위해 시위하러 나온 거야!!”

답답해서 못 참겠다는 듯, 샐러맨더의 청년이 외쳤다. 그 외침에 제압당한 병사들의 표정에 충격이 번졌다.

“쉽게 믿지 못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사실일세.”

“아뇨, 에스파다 도 오르덴. 전 당신 말이라면 믿겠습니다.”

병사 중 하나가 말했다. 그 눈동자에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 대한 신뢰가 어려 있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전 민주주의 시민입니다.”

“제국의 개라는 소리가 뭔가 했네.”

다른 병사들도 그에 이어 말했다.

“저들을 풀어주게. 무장은 모두 해제시키고.”

“예? 하지만…….”

“정규군이 시위에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여론을 뒤흔들 수 있을 걸세.”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기자들이 다시 기어 나와 이쪽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몇몇은 이미 마이크를 꺼내들고 시위대를 상대로 인터뷰를 시도하고 있었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이쪽으로 달려오는 기자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샐러맨더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청와대로 가야지.”

현오준의 질문에 최재철은 한숨처럼 대답했다.

“우리 부대를 전면으로. 시민들을 지켜야 하니.”

최재철의 입장에서 본심을 토로하자면 시민들은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 싶은 참이지만, 이들이 쉽게 흩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시민들은 이미 너무 많은 피해를 냈다. 지금 살아남아 여기 선 자들은 동지들의 시체를 넘어온 자들이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도망치지 않은 자들이다.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돌아가기엔 그들은 이미 너무 먼 길을 와버렸다.

“알겠습니다.”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대한민국 제정화 반대 인터뷰는 TV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졌다. 외신과 인터넷을 통해 시위대를 향한 진압 부대의 발포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전국 각 도시에서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해외의 언론들도 비난으로 점철되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자칭 황제, 진가규는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추가적인 진압 부대를 파견하지도 않았다. 청와대까지 가는 길은 훤히 뚫려 있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이끄는 시위대는 어느새 청와대 앞에 도달해 있었다. 별 방해도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황제가 시민들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청와대 앞마당에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저 차원 균열이 황제의 뜻을 알리고 있었다.

WF 측에서 새로이 연 것이 틀림없는 그 차원 균열은 다른 차원 균열과 달리 유난히 거대했다. 그 차원 균열은 그 크기만큼이나 더 넓은 헬필드를 펼친 상태였다. 청와대 건물 전체를 감쌀 수 있을 정도였다.

설령 시위대 측이 군대와 합동해서 미사일을 날리더라도 차원 균열에서 펼쳐져 나온 헬필드로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WF가 만들어낸 어벤저 병력은 헬필드하에서라면 재래식 군대 또한 충분히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미국이 핵을 발사하더라도 벙커를 뚫기는커녕, 청와대 기왓장 몇 개 깨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이끄는 시위대는 바로 그 헬필드 바로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헬필드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여기까지 행진해 온 시민들도 거대한 차원 균열의 모습에 압도당한 듯했다. 그들이 헬필드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아무도 먼저 필드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본능적으로 그 위험에 대해 감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헬필드 안에서 갑자기 커다란 스크린이 떠올랐다. 현대 기술이 통하지 않는 헬필드 안이므로, 어벤저 스킬로 만들어진 것이리라는 유추는 충분히 가능했다. 하긴 일반적인 스크린은 허공에 그냥 둥실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 스크린에는 진가염의 모습이 떠올랐다.

[반란군 여러분, 여기까지 온 것을 환영하네.]

스피커를 통해 나온 것처럼 들리는 이 음성도 어벤저 스킬로 인한 것이리라. 이런 잡다한 스킬마저 보유하고 활용하는 면에서 오히려 WF 측의 여유를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 별 방해 없이 온 것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자가 있다면 눈치가 빠른 편에 속한다고 칭찬해 줘야겠군. 하지만 정말로 눈치가 빨랐다면 그 시위 대열에서 이미 이탈했어야 할 테니, 여러분은 진정으로 눈치가 빠르다고는 할 수 없겠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스크린에 비친 진가염이 침통한 듯 말하다, 돌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게 최고의 비명 소리를 선물해 주게나. 자네들의 고통은 내게 더없는 쾌락을 선사해 주겠지. 자아, 기대하겠네!]

진가염의 말이 끝나자마자, 군중의 등 뒤에서 폭음이 들렸다. 이제까지 시위대를 따라온 취재용 차량과 헬기가 파괴당하는 소리였다. WF의 마크를 당당하게 단 전투 헬기 2대가 로터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사람들을 향해 미니건을 돌렸다.

“히이이익!”

전투 헬기의 위압감이 군중에게는 곧장 공포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공포는 곧 현실이 되었다. 미니건이 불을 뿜었다! 타타타타타타!

“미친 새끼들!”

샐러맨더의 어벤저가 욕설을 내뱉으며 헬기를 향해 불을 내뿜었다. 헬기 한 대가 그 불길에 휘말려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헬필드로 들어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헬기를 향해 빛의 칼날을 뿜어내며 구문효가 군중들에게 외쳤다.

빛의 칼날은 전투 헬기의 로터 부분을 정확히 노렸다. 양력을 잃은 헬기는 더 이상 공중에 떠 있을 수 없기에 떨어졌다.

이미 헬기의 미니건으로 인해 서른 명 이상이 죽었다. 1초 남짓한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주변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숨어 있던 전투 헬기가 세 대 더 나타났고, 그 뒤를 탱크가 잇고 있었다.

군중은 공포에 질려 헬필드 안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탱크는 사격 가능한 각도를 확보하자마자 즉시 발포했다. 펑! 사람들의 등 뒤를 향해 포탄이 날았다. 그 포탄을 잡아 되던지기 위해 어벤저 한 명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 어벤저를 향해 헬기의 미니건이 조준되었다.

“끄아아악!!”

그 어벤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미니건에서 발사된 총탄 중에 파멸철로 만들어진 탄이 섞여 있었고, 거기에 심장이 꿰뚫려 죽고 만 것이다.

“문효야! 너도 물러나라!!”

최재철도 크게 놀라 외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미니건의 다음 목표는 샐러맨더의 어벤저와 구문효였다. 군중들의 앞에 서 있던 최재철을 비롯한 OJ의 어벤저 부대원들이 대처하기엔 시간이 몇 초 정도 부족했다.

그 순간, 공중에 떠 있던 헬기 세 대가 회오리에라도 휘말린 듯,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서로 충돌해 한꺼번에 추락했다. 그리고 그 추락 장소가 하필이면 탱크들이 진격하던 진로 방향이었다. 콰앙! 불길이 솟아올랐다.

“위험하면 날아온다고 했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연화였다. 그녀는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사저! 뒤에!!”

그런 그녀를 본 구문효가 외쳤다. 후방에 위치해서 참사에 휘말리지 않은 전차병이 기관총으로 그녀를 조준하고 있었다.

“흥!”

오연화는 아직도 폭발 중인 헬기를 들어 탱크를 향해 날려 보냈다. 기관총은 헬기를 열심히 쏴대었지만, 파멸철 총탄이 섞여 있다 한들 염동력으로 날아오는 헬기를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콰앙! 펑!! 연속적인 폭발로 인해 WF의 병력이 있던 곳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오오, 과연 S급 랭커로군. 상당한 실력이야. 군침이 도는군.]

스크린 속의 진가염이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네. 자아, 기자 여러분. 자네들은 헬필드 안에 있네. 그 말인즉슨, 자네들의 취재 기구는 이제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지금 열심히 마이크를 들이대고 있지만, 그런 건 전혀 녹음이 안 될 걸세.]

진가염은 야수처럼 웃었다.

[그리고 이제 자네들은 아무런 증거도 남기지 못한 채 깨끗하게 먹어치워질 걸세. 아무래도 일방적인 학살을 대중매체에 보여주긴 좀 그렇거든.]

진가염과 선언과 동시에, 앞쪽의 차원 균열에서도 온갖 어보미네이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어보미네이션 웨이브를 연상하게 만드는 엄청난 물량이었다.

“모두 물러나!”

최재철은 벼락처럼 외치며 앞으로 달려 나가 작은 블랙홀 하나를 생성해 앞으로 던졌다. 사람들을 빨아들이지 않기 위해 위력을 조절한 그 블랙홀은 중급 어보미네이션들까지는 문제없이 빨아들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의 것들이 문제였다.

그것들을 처리한다 한들, 상황은 그렇게 간단히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어보미네이션 웨이브의 끝에 거대한 인간 모습의 어보미네이션이 튀어나왔다.

인간 모습이라고는 하나, 팔은 넷이었고 머리는 둘, 다리 관절은 거꾸로 접혔고 허리 부분에는 척추가 노출되어 일곱 개의 관절로 굽혀지는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그 크기! 18m에 달하는 거체가 이족보행을 하는 광경은 그 자체만으로 장관이었으나, 그 자리에 있는 이들에게는 감탄할 만한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최재철은 그 어보미네이션의 모습을 보고 놀라 외쳤다.

“거신!”

최강의 어보미네이션 중 하나로 꼽히는 괴물로, 차원 세포의 주인들이 군주로 섬기는 위대한 존재였다. 물론 최재철이 상대했던 뱀 머리 사나이, 톨름도 차원 세포의 군주가 된 적이 있지만 그것과 이 거신은 비교조차 불허할 정도의 차이가 있다.

거신은 기본적으로 강한 근력과 차원력을 지니고, 생명력 또한 높아 심장을 찌르는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여기에 높은 지능과 다양한 고유 능력을 갖고 있고 그 고유 능력이 개체마다 달라서 대항하기 매우 까다로운 어보미네이션이다.

아니, 상아탑에서는 어지간하면 대항할 생각하지 말고 바로 도망치라고 교육하는 상대였다. 피해 없이 처치하기 위한 ‘매뉴얼’이란 게 거신에게는 없었다. 어중간한 어벤저 부대는 오히려 거신에게 공략당할 것이다.

[모두 죽여라!]

그 최강의 어보미네이션, 거신에게 진가염이 명령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거신은 그 명령을 따를 것처럼 보였다.

[고오오오오오오오!!]

거신은 마치 이성 없는 마수처럼 포효했다. 그 거신을 향해 최재철이 날았다.

“다른 놈들은 너희가 알아서 처리해!”

여기에서 거신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최재철이 아는 한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니, 최재철조차도 피해 없이 거신을 처치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버려야 했다.

펑!

거신의 눈앞에서 차원력이 폭발했다. 다른 스킬이나 아티팩트 등으로 변환되지 않은 순수한 차원력이 거신을 감쌌다. 말할 것도 없이 최재철이 일으킨 폭발이었다.

[끄어어어어어!!]

거신이 괴로운 듯 두 개의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괴로워하는 거신에게 최재철이 외쳤다.

“이름 있는 군주여야 할 그대가 타자의 명령을 받다니, 그게 무슨 일이오!”

[크어윽……! 내가… 어떻게 된 거였지?]

거신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두 개의 머리를 뒤흔들며 물었다. 방금 전에 최재철이 터뜨린 차원력 폭발로 인해 진가염의 정신 지배가 성공적으로 풀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신의 거체가 세로로 쩍 갈라졌다. 반으로 나뉜 거체 속에서 사람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최재철은 크게 놀라 단념검을 꺼내 그 그림자를 베었다. 단념검의 위력은 출중해서 거신의 상반신을 쪼개 버렸지만 그 안에서 나온 그림자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미친!”

최재철은 대경해서 물러났다. 그림자의 정체에 대해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파멸철로 만들어진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진가염이었다. 파멸철로 온몸을 뒤덮었으니, 단념검의 원격 베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뒈져라, 에스파다 도 오르덴!!”

진가염이 외치며 파멸철로 만든 검으로 최재철을 찌르려 들었다. 최재철은 단념검을 들어서 그 일격을 막았다. 단념검은 그 일격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고 종잇장처럼 찢겨 나갔다.

파멸철에는 어벤저 스킬이 통하지 않으니 순수한 강재의 강도로만 승부해야 했는데, 청동으로 만든 단념검은 파멸철 검보다 그 강도가 낮았다.

“큭!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최재철은 혀를 차며 망가진 단념검을 차원 금고 안에 집어넣었다.

“그게 네 목숨 값보다 비쌀까?”

진가염은 비웃으며 다시 한 번 파멸철 검을 휘둘러 왔다. 최재철은 한숨을 내쉬며 차원 금고 안에서 다른 물건을 꺼내들었다.

카앙! 진가염의 검격은 이번에도 막혔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물건이 파멸철 검에 의해 손상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파멸철 검이 구부러졌다.

“뭐야?!”

이번에는 진가염이 경악할 차례였다. 최재철이 꺼내든 물건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아티팩트도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건 볼링공만 한 파멸철 덩어리였다. 최재철은 그 가공되지도 않은 덩어리를 휘둘러 진가염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꽝!

“끄악!”

진가염은 최재철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지상으로 낙하했다. 쿵! 진가염이 처박히며 지면에는 작은 크레이터가 생겼다.

“넌 진가염 본인이냐? 아니면 스페셜 에디션 클론이냐? 등록 코드가 다른 걸로 보아 양산형 클론은 아닌 것 같은데.”

최재철은 지면에 착지하며 크레이터에서 기어 나오고 있는 진가염에게 물었다. 진가염이 죽기는커녕 별로 다치지 않은 모습에도 놀랄 건 없었다. 그가 입고 있는 물건은 그 정도의 물건이었으니.

[그건 스페셜 에디션일세, 에스파다 도 오르덴 공.]

“공?”

[그래, 에스파다 도 오르덴 공.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에게 건 세뇌를 풀다니 대단하군. 그 능력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자네에게도 공작위를 수여하지.]

대답은 스크린 쪽에서 들렸다.

아무래도 WF는 거신에게 자이언트 어보미네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인 모양이었다. 좀 지나치게 길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거야 최재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진가염의 말에 최재철은 픽 웃었다.

“공작위? 날 웃기려고 하는 소린가?”

[설마! 대한제국과 남한왕국은 공을 세운 어벤저들 모두에게 귀족 작위를 수여할 생각이라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자네라면 황제 폐하께서도 환영하실 거야.]

“대한제국, 남한왕국! 요 근래 내가 살아오면서 들은 농담 중 두 번째로 재미있는 농담이야.”

[실례가 안 된다면 첫 번째로 재미있는 농담이 뭔지 묻고 싶네만, 나중으로 미루지.]

막 되살아난 거신의 거체가 다시 한 번 쪼개졌다. 파멸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진가염의 스페셜 에디션 클론이 한 짓이었다. 지금 막 크레이터에서 기어 나온 개체가 한 짓이 아니라, 새로 나타난 개체가 한 짓이었다.

거신은 본래 이렇게 쉽게 처치당할 어보미네이션이 아니지만, 이들은 이 개체의 특성에 대해 전부 다 파악한 데다 기습까지 했다. 그것만 갖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S급의 신체강화 능력과 베기에 특화된 신체 개조, 물리력을 증폭시키는 종류의 어벤저 스킬이 갖춰져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었다.

최재철의 앞에 나타난 이 두 개체의 클론은 모두 그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게 온당할 것이다. …아니, 두 개체가 아니었다.

“자네의 뇌를 꺼내다가 분석해서 그 답을 직접 찾아보는 게 더 빠를 것 같으니 말이야.”

또 다른 개체가 말했다. 즉, 스페셜 에디션 클론은 모두 세 마리였다. 모두 파멸철 풀 플레이트 아머와 파멸철 검으로 무장한 초호화 사양이었다.

“…돈도 많군!”

“그게 우리의 장점이지.”

막 크레이터에서 기어 나온 개체가 대답했다. 이전에 상대한 바 있는 클론도 갖고 있던 초재생 능력을 갖고 있는지, 방금 전에 최재철의 일격으로 인해 분명 타격을 입었을 텐데도 지금은 멀쩡했다.

“상대하는 데 애 좀 먹겠군.”

최재철은 쯧, 하고 혀를 찼다. 하나하나를 상대하는 건 별문제가 아니지만, 셋을 동시에 상대하라면 역시 다소 버거운 점이 있었다.

이전에는 만단검으로 비교적 쉽게 처리했지만, 그 만단검까지 기습으로 잃은 데다 어차피 파멸철 풀 플레이트 아머 때문에 같은 방법으로 처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저들을 처치하려면 저들이 재생에 필요한 차원력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계속 패서 눕히는 수밖에 없다. 생각만 해도 신물이 나오는 작업이 될 터였다.

“죽어라, 에스파다 도 오르덴!”

혀를 차는 최재철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세 진가염 클론은 파멸철 검을 세우고 달려들었다.

“하아아압!”

그런데 기합성과 함께 사람 그림자 하나가 휙 날아와 가장 앞에서 달려오고 있던 클론 한 머리의 머리를 퍽 걷어차 거신의 시체 쪽으로 날려 버렸다. 이지희였다.

“여긴 저희한테 맡기시죠, 스승님.”

이지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잔챙이들은 다 처리한 듯, 상급 어보미네이션들의 시체가 주변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디서, 이 버러지가!”

다른 클론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며 이지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검은 이지희에게 닿지 않았다.

“버러지는 너고, 이 새끼야.”

그런 거친 소릴 한 건 예상 외로 현오준이었다. 그의 일격에 의해 막 달려든 진가염 클론도 조금 전의 개체와 마찬가지로 거신의 시체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저기, 현오준 사장님, 가능하다면 저놈들이 들고 있는 칼 한 자루만 빼앗아다 주시면 안 됩니까? 저거 탐나는데.”

유구언 팀장도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며 그런 소릴 했다.

“노력해 보죠.”

현오준이 전투태세를 취하며 대꾸했다.

자신의 부하들이 멋대로 나서는 걸 보며, 최재철은 잠깐 뒷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결정은 곧 내려졌다. 최재철은 이지희에게 자신이 들고 있던 파멸철 덩어리를 내밀었다.

“지희야, 이거 너 써라.”

“감사합니다, 스승님.”

이지희가 파멸철 덩어리를 받아들자,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러시죠.”

현오준이 대답했다.

“죽지 마쇼, 캡틴!”

“누가 할 소릴.”

유구언의 말에 최재철은 픽 웃었다.

“어디서 멋대로!”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최재철의 앞을 마지막 클론 한 마리가 막아섰다.

그 클론의 머리에 파멸철 덩어리가 끔찍하게 처박혔다. 그 오른팔은 순식간에 접근한 현오준에 의해 거꾸로 꺾이고, 오른손에 들고 있던 파멸철 검이 지면에 떨어졌다. 그 검을 집어든 유구언이 클론의 허리를 퍽 베었다. 파멸철 갑옷이 찢어지고 거기서 피가 확 튀었다.

“제자들의 성장이 괄목할 만하군.”

최재철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더 이상 그를 막아설 상대가 없었다. 마침 지금 막 되살아난 거신이 자신의 몸이 처박혀 있던 클론 두 마리를 땅에다 집어던지고 화풀이라도 하듯 쾅쾅 밟아대고 있었다.

그 거신을 뛰어넘으며 최재철은 외쳤다.

“마지막 목숨을 아끼시오! 이들은 당신의 약점을 알고 있소!!”

[그렇군! 이 은혜는 어떤 방식으로든 갚을 기회를 찾아보도록 하지!]

거신이 대답했다. 생각 외로 우호적인 반응이었다.

“그 균열을 닫고 돌아가시면 빚을 다 받은 것으로 하겠소!”

[알겠다!!]

거신은 자신이 나왔던 차원 균열로 돌아갔다. 그가 자신이 말한 대로 차원 균열을 닫을 수 있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런 건 지금 고민할 것이 아니었다.

청와대쪽에서 WF 측의 어벤저들이 개미 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거신의 세뇌가 풀리고 클론들조차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막지 못하자, 진가염이 이번에는 물량 작전으로 나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은 하책 중의 하책이었다.

“꿇어라!!”

최재철이 적들이 잔뜩 몰려오는 통로에다 중력 증가 스킬을 걸어버리니, 신체 강화 능력이 부족한 놈들은 그 자리에 엎어져 버렸다. 반면 그럭저럭 괜찮은 능력을 가진 자들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저항했지만, 그 상태로 전투를 행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름 실력이 있는 자들은 중력 지대를 빠져나오고 있었지만, 소수였다. 그 시점에서 이미 물량 작전은 의미를 잃었다. 최재철은 그 나름 실력자들을 한 놈 한 놈 주먹으로 상대해 쓰러뜨리고 중력 지대에 도로 집어던져 처박아 버렸다.

“이들에게는 스킬을 제대로 부여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최재철은 그렇게 빈정거렸다.

방금 그가 사용한 전술은 변수가 많은 어벤저 간의 전투에서 실력격차가 큰 다수의 상대를 제압하기에 괜찮은 수단이다.

신체 강화 능력은 일정 수준 이상 단련하기 힘든 능력이다. 최재철이 깐 중력 지대를 빠져나올 정도면 더 강한 상대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신체 강화 능력 이외의 변수에 해당하는 스킬이 그리 강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이렇게 쉽게 제압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이계에서 어벤저 간의 내전을 체험한 최재철의 경험에서 우러난 전술이라 할 수 있었다.

최재철은 차원 금고에서 만관검을 꺼내들어 청와대 본관 건물 벽에다 쾅하고 구멍을 뚫어버렸다.

“청와대를 점령하면 우리의 승리다!”

태생이 무력 쿠데타다. 중요 건물조차 방어하지 못하는 쿠데타 세력이 어떻게 성공을 자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청와대라는 건물은 어쨌든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자칭 대한제국이 이 건물을 점령당한다면 더 이상 제국이라 자칭할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여기에 진가염이나 진가규가 있든 없든, 그런 건 별로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여길 지키고 있으면 언젠가 찾아올 테니.

“물론 여기에 있어주는 게 내게는 더 고맙겠지만!”

벽을 뚫고 들어간 건물 안은 텅 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최재철은 지하에 자리 잡은 여러 차원력 덩어리들의 존재를 이미 확인했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벙커 정도로 최재철의 지각 능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하아아아압!!”

최재철은 차원력 덩어리들을 향해 만관검을 찔렀다. 쿵쿵쿵쿵쿵! 벙커 버스터가 두세 발쯤은 투하되더라도 충분히 버틸 벙커가 두부처럼 뚫렸다. 아무래도 이 벙커에까지 파멸철을 바를 시간적 여유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적들은 만관검의 일격을 피한 듯, 차원력 덩어리들은 멀쩡했다. 애초에 맞으리라고 예상한 적도 없었다.

최재철은 자신이 낸 구멍을 향해 휙 뛰어내렸다. 중력이 그의 몸을 끌어당겼다. 자유낙하 하던 그는 갑자기 몸을 확 틀었다. 그의 어깨가 있던 자리에 굵은 열선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대로 맞았더라면 상반신이 깨끗하게 날아가 버릴 위력의 열선이었다.

“흥!”

최재철은 차원금고에서 방패 하나를 꺼냈다. 다음 열선이 그를 노리고 날아왔다. 최재철은 방패로 그 열선을 막았다. 그러자 열선은 그 방패에 부딪혀 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끄악!!”

아래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열선을 쏜 적 어벤저가 되돌아간 자신의 공격에 맞아 피해를 입은 모양이었다. 최재철이 방금 꺼낸 방패는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라는 이름의 어벤저 스킬을 반사하는 기능을 가진 아티팩트였다.

최재철은 만관검을 두세 번 더 찔러 적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착지 시점에서 한꺼번에 공격을 가해오면 아무리 그라 한들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에, 혼란을 주려는 목적이었다.

지면에 착지하자마자 최재철은 데굴데굴 굴러서 적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헬필드에 의해 조명시설들이 모조리 무용지물이 되어 주변은 어두웠으나 그가 사물을 보는 데 빛은 별로 필요 없었다.

기습하려는 듯 슬금슬금 접근하려는 그림자가 있었다. 최재철은 곧장 적을 향해 몸을 던져 방패로 후려쳤다. 기습하려던 것이 도리어 기습당한 형국이 되어버린 적은 기겁해서 후방으로 점멸을 사용해 빠졌다. 거리를 두려는 목적이었겠지만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니었다. 최재철의 만관검은 근접 무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끄아아아악!”

결국 적은 만관검에 의해 하반신을 전부 잃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완전히 전투 불능 상태가 된 적을 향해 최재철은 저벅저벅 걸어갔다.

“여긴 너 하나뿐인가? 진가염과 진가규는 어디 있지?”

적은 최재철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그 자리에서 펑 터졌다. 자폭한 것이다. S급의 실력자임에도 소모품처럼 목숨을 잃었다.

“이 새끼들은 무슨 일제 강점기 때 놈들인가? 대한제국, 대한제국 해놓고.”

최재철은 이를 득득 갈면서 다른 차원력 덩어리를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최재철이 있는 장소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죽인 놈은 시간 벌이용으로 놔두고 다른 놈들은 도망가는 것 같았다.

“이놈들……!”

최재철은 도망가는 놈들을 향해 만관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 직후, 그는 뒤로 뛰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날카로운 검광이 빛났다.

“컥……!”

칼끝이 최재철의 목 피부를 자르고 스쳐지나갔다. 여전히 창왕의 가죽을 걸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죽조차 잘라낸 예리한 일격이었다. 부지불식간에 피가 배어났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조금 전, 최재철이 뒤로 뛴 건 순전히 직감 때문이었다. 그가 가진 스킬들 중 무엇 하나 공격자의 존재를 감지해낸 게 없었다. 그만큼 적의 은신이 완벽했다.

“도망치는 놈들 쪽이 미끼였을 줄이야……!”

최재철은 적을 노려보았다. 기습이 무위로 돌아가자, 적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제 이름은 두예지입니다. 국왕 전하께 백작위를 하사받았죠. 두예지 백작이라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두예지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보였지만, 그 안광만큼은 여전히 살기를 띠고 있었다.

“전하께오선 당신을 죽이면 제게 공작위를 하사하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하, 그래. 백작이라고. 날 죽이면 공작이라.”

최재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네겐 공작이라는 칭호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드라큘라가 백작이었지, 아마?”

최재철의 말에 두예지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분명 드라큘라의 어원이 되었던 블라디 공은 공작이었지. 하지만 넌 공작이 될 수 없어. 넌 드라큘라처럼 죽게 될 거다.”

최재철은 차원 금고에서 백은빛으로 번쩍이는 단검을 꺼냈다.

“끼에에에엑!!”

그 단검을 보자마자 두예지는 인간의 성대에서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비명을 질러대었다.

“이 단검은 블라디 공의 가시라는 이름의 아티팩트일세. 흡혈귀들을 죽이는 데 이만한 물건이 없지.”

최재철은 두예지를 향해 차갑게 내뱉었다. 두예지는 그런 최재철의 말을 알아들었는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패닉 상태에 빠져 블라디 공의 가시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은빛에서 멀어지려고 땅을 기어 다녔다.

“진가염이 흡혈귀의 약점에 대해 말해주지는 않던가?”

그렇게 말하며, 최재철은 두예지의 심장을 푹 찔렀다.

“끄야아아아아악!!”

두예지는 초월적인 고통과 공포에 휩싸여 단말마를 내질렀다. 단검에 꿰뚫리고 채 1초도 지나기 전에 그는 그 자리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너의 재를 십자로에 뿌릴 필요는 없겠지.”

두예지의 은신이 최재철의 어벤저 스킬에 걸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은신에 사용한 능력이 차원력을 이용한 스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예지가 은신에 사용한 능력은 어둠과 동화하는 능력. 본래 인간은 사용할 수 없는 능력이다. 차원력은 필요하지 않으며, ‘그 종족’은 태어났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그 종족’은 물론 흡혈귀를 뜻한다.

“처음부터 흡혈귀였는지, 진가염이 그를 흡혈귀로 만든 건지.”

최재철은 혀를 찼다.

이런 깊은 어둠 속에서 흡혈귀는 정말로 강력한 존재다. 완전히 어둠과 동화하는 능력을 사용하도록 내버려 두면 어중간한 어벤저 스킬로는 감지할 수 없고 타격을 입힐 수도 없다.

그런데 적은 일방적으로 공격이 가능하다. 더욱이 두예지는 창왕의 가죽을 잘라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을 할 수 있다.

이계에서 흡혈귀와 대결할 일이 있어서 블라디 공의 가시를 미리 마련해 둬서 망정이지, 그냥 상대했다면 시체가 되어 있는 건 어쩌면 최재철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블라디 공의 가시가 내뿜는 빛은 어둠과 동화한 존재에게 타격을 주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이다. 이 빛이 드라큘라 영화에서의 성수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최재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예지의 등장이 최재철에게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최재철이 WF를 위협적으로 평가하는 건 현대 기술과 차원 기술을 접목한 무기나 기술 등 때문인데, 헬필드가 펼쳐져 있는 지금 이 상황에서는 현대 기술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벤저 스킬에 자신이 있는 최재철이 더 유리하다.

그런데 인간을 흡혈귀 등의 어보미네이션이 아닌 다른 괴물로 만드는 기술이 WF 측에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흡혈귀만이면 블라디 공의 가시 덕에 아무런 문제가 안 되지만 다른 괴물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가정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여기까지 와서 만약의 일을 걱정하며 끙끙댈 것도 없지.”

최재철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다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른 흡혈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최재철은 그냥 블라디 공의 가시를 빼들고 그 빛에 의지하기로 했다. 어벤저 스킬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도 등장한 이상, 빛 없이 나아가는 건 그리 현명한 선택이 못 됐다.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를 다시 차원 금고에 밀어 넣고 왼손에는 블라디 공의 가시, 오른손에는 만관검을 들었다. 적으로 보이는 차원력 덩어리들은 최재철을 피해서 지상으로 다시 올라가고 있었다.

최재철은 만관검을 적들이 있는 방향으로 찌르려다 문득 그만두었다. 적들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하군.”

저들은 마치 자신을 유인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낀 최재철은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스킬로 판별할 수 없는 변수가 늘어난 이상, 차라리 직감에 몸을 맡기는 것이 낫겠다고 그는 판단했다.

다음 순간, 만관검이 허공을 내찔렀다. 내찌른 방향에서 뭐가 휙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회피행동이었다. 최재철은 지체 없이 다음 일격을 내찔렀다. 그것도 회피당했다. 최재철은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숨어 있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군.”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향해 최재철은 블라디 공의 가시를 휘둘렀다. 가시의 빛에 의해 숨겨져 있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가염이었다.

블라디 공의 가시의 빛을 크게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런데 그는 방금 전까지 어둠과 동화되어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중요하지.”

붉게 빛나는 눈과 흡혈귀의 어금니를 드러내어 보이며, 진가염은 웃었다.

진가염의 모습은 이미 인간의 그것과는 꽤나 동떨어져 있었다. 아니, ‘아직 인간의 모습이 남아 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다 나을 것이다. 얼굴과 목소리는 아직 진가염 본인의 것이었지만, 나머지 부위는 달랐다.

5m에 달한 거체에 달린 네 개의 팔, 거꾸로 꺾인 다리와 드러난 척추는 거신의 그것을 연상하게 했다. 등 부분에는 눈이 달린 여섯 개의 촉수가 각각 의지를 지닌 듯 꿈틀거리고 있었고, 드러난 가슴 부분에는 거대한 입이 존재감을 자랑하는 게 틈새의 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최재철은 혐오의 시선을 그에게 보내며 입을 열었다.

“대외적으로는 클론들을 활동시킨 건 그런 이유였나?”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하기야 뭐, 모습은 얼마든지 위장할 수 있으니 별 상관은 없네만. 자네 같은 자에게는 의미 없는 짓이겠군, 그래.”

가슴의 입을 한 번 쩌억 벌렸다가 닫으며, 진가염은 유쾌한 듯 말했다.

“자네 같은 자들을 다 죽여 버린 후에,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지면 이 아름다운 모습을 대중들 앞에 드러내 보일 셈이네.”

“아름답다고? 추하기만 한데.”

최재철의 비웃음 섞인 감상에, 진가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우리와 같은 진화된 자를 상대로 아무도 저항할 수 없음이 증명된 후라면, 모두 우리같이 되길 원할 걸세.”

“허, 지금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 앞에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추하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로군.”

“이전 세기의 가치관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하지 않게 만들 걸세.”

진가염의 눈빛이 살의에 물들었다.

“자네를 죽인 후에 말일세!”

진가염의 등에 달린 여섯 촉수가 쭉 늘어나 채찍처럼 최재철을 습격했다. 기습이었지만, 별의미는 없었다. 최재철은 즉시 반응해 칼을 휘둘러 자신을 노리고 날아든 촉수들을 잘라내었다.

여섯 개의 촉수를 다 잘라냈음에도 불구하고, 진가염은 다시 여섯 개의 촉수를 뻗어 공격을 가해왔다. 초재생능력으로 다 재생했기에 가능한 공격이었다.

이대로 촉수만 상대하다간 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의 스킬이 뭔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진가염의 간격 안에 접근할 수도 없었다. 분석 스킬을 뻗는 것도 위험했고, 적이 기만책을 쓸 가능성이 더 높았다.

진가염도 최재철과 같은 생각이기에 쉬이 접근하지 않는 것일 터였다. 결국 직접 맞부딪히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는 쪽은 최재철 쪽이었다.

만관검을 빼어들고, 최재철은 앞으로 뛰어나갔다.

“용감하군! 무모할 정도로!!”

진가염은 감탄하면서 네 개의 팔로 들고 있던 네 개의 아티팩트를 모조리 휘둘렀다. 그러자 불꽃과 뇌전과 냉기와 열선이 쏟아졌다.

“믿을 만한 구석이 있어서 그렇지.”

최재철은 미니 블랙홀을 꺼내어 진가염이 뿜어낸 각종 에너지들을 흡수했다. 그 블랙홀을 그대로 진가염에게 내던지자, 흡수한 에너지들이 폭발적으로 다시 쏟아져 나왔다.

“카아아아악!”

에너지의 폭발을 보면서도 진가염은 별로 당황하지 않고 가슴의 입을 쩌억 벌렸다. 그러자 그 입 안으로 에너지들이 빨려 들어갔다.

“퉤!”

다음 순간, 진가염은 침이라도 뱉듯 흡수했던 에너지들을 다시 최재철을 향해 발사했다. 그걸 예상하고 미리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를 꺼내어 들고 있던 최재철은 진가염이 쏜 투사체를 그대로 반사했다.

“이대론 끝이 안 나겠군.”

진가염은 반사된 투사체를 옆으로 휙 피하면서 촉수들을 내뻗어 최재철에게서 페르세우스의 가죽 방패를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그 촉수들은 또다시 최재철의 만관검에 의해 잘려 나갈 뿐이었다.

“시간을 끄는군?”

“뭐?”

진가염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단 한 순간 흔들렸다. 최재철은 진가염의 그런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떠본 것인데, 이번에도 그의 직감이 맞은 모양이었다.

“목적이 뭘까?”

“내게 묻는 건가?”

“아니, 그럴 리가. 물어보면 대답이라도 해줄 텐가?”

“그야 당연히, 대답해 줄 리가 만무하지!”

최재철은 공격을 멈추고 생각에 빠졌다.

“자네보다 자네 세력에서 더 중요한 인물이라면 오직 진가규뿐이지.”

“무엄하도다! 황제 폐하라 칭하지 못할까!!”

“그렇다면 자네가 시간을 끄는 건 진가규 때문이겠군?”

“틀렸다, 멍청아!!”

진가염은 그렇게 외치며 갑자기 최재철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을 끄는 것보다 최재철이 생각할 여유를 빼앗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시끄럽게 굴지 마, 생각 좀 하게.”

그런 진가염을 향해, 최재철은 인롱의 팔찌로 차원 단절을 걸어 차단했다.

“크아아아아!!”

그러자 놀랍게도 진가염은 여섯 개의 촉수에서 차원 커터를 전개해 차원단절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런 진가염의 행동에 최재철은 냉정하게 분석했다.

“과연, 틈새의 눈을 이식했다면 그런 것도 가능하겠지.”

“언제까지 여유를 부리고 있을지 한 번 지켜보마!”

그 순간, 청와대 일대를 뒤덮고 있던 헬필드가 사라졌다. 최재철에게 은혜를 갚는다고 했던 거신이 성공적으로 차원 균열을 닫은 것 같았다.

“됐다! 시간이 됐어!!”

그런데 이렇게 외친 건 진가염 쪽이었다.

“내가 뭘 기다리고 있는지 궁금해했었지? 이제 정답을 알려주마.”

진가염은 승리의 미소와 함께 말했다.

“너희 반란 세력이 청와대로 향해 올 것은 우리도 예상하던 바였다. 일반 시민이야 별 상관없다만, 어벤저들이 레지스탕스가 되어버리면 우리로서도 골치 아파지지. 그래서 우리는 일망타진을 계획했다!”

진가염의 반응으로 보아, 차원 균열이 닫힌 건 거신의 활약 덕분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차원 균열을 유지시키고 있던 보스 어보미네이션에게 자폭 명령이라도 내린 것이리라. 그 가설의 사실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진가염의 다음 수였다. 그리고 그는 곧 통신 장치를 꺼내들었다. 헬필드가 걷혔으므로 통신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제 됐다! 폭격을 개시하라!!”

진가염은 자신의 입으로 다음 수가 뭔지 직접 알려주었다.

“폭격?”

“그래, 폭격이다! 지대지미사일과 모든 야포로 너희 반란 세력이 모여든 이 청와대 주변 일대를 일제히 폭격할 거다!”

진가염은 비릿하게 웃었다.

“네 그 사랑스러운 S급 랭커 염동력자 말인데, 우리 회사 헬기와 탱크들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되더군. 하지만 말이야, 과연 폭격에도 견딜 수 있을까?”

“못 견딜 테지.”

염동력으로 만든 방어막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애초에 염동력은 방어막을 만들라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렇다고 오연화가 방어막을 치는 능력을 따로 익힌 것도 아니다. 현대병기로 집중적인 폭격을 당한다면, 아마도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지!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할 거다!! 초재생 능력을 갖춘 내 클론들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죽을 거야! 넌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한테 죽을 거고!!”

김인수의 대꾸가 만족스러웠는지, 진가염은 웃는 얼굴로 이죽거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폭격이 정말로 이루어진다면 꽤 절망적일 거야.”

최재철은 태연히 대꾸했다.

“뭐?”

최재철의 그런 대꾸에, 진가염은 어리둥절해했다. 그의 되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최재철은 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건드렸다.

“성공한 모양이로군, 유곽희.”

[아뇨, 아직 성공은 못 했는데요.]

최재철이 쓰고 있는 철가면 속의 통신 장치에서 그런 대답이 들렸다.

[아직 도망친 진가염을 잡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보고를 못 드렸는데.]

“그거 클론이야.”

[예?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진가염에게는 클론이 많았죠.]

최재철의 말에 유곽희는 다소 놀랐지만, 곧 평정을 되찾고 보고를 계속했다.

[어쨌든 청와대로의 폭격 지시는 막았습니다. 대신이라고 하긴 좀 뭐 하지만, 대한민국 육군은 지금 휴전선 부근에 우글거리는 어보미네이션들을 열심히 타격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라고 지시했거든요.]

“그래, 잘 했다.”

최재철은 유곽희를 치하했다.

“유곽희? 무슨 짓을 한 거지?!”

통신 장치를 통해 들려온 유곽희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진가염이 분노하며 물었다.

“유곽희에게는 육군본부를 탈환하라고 명령해 두었어.”

유곽희 대신 최재철이 대답해 주었다.

육군본부의 탈환은 유곽희 혼자서는 당연히 무리였겠지만, 최재철은 그녀에게 WF 소속이었던 어벤저들을 맡겼다. 아가임과 서필지만 해도 S급 랭커에, 추경준도 이미 S급 수준이었고 조상평 일파도 나름 강해져 있었다.

좀 넘치는 화력을 넘겨줬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육군본부는 진씨 일가에게 있어서도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거점이니, 저항이 거센 것도 납득은 갔다.

육군의 명령 체계 자체는 제대로 가동하고 있는 걸 보니, 유곽희는 그냥 무력으로 찍어 누른 게 아니라 회유당했던 육군 장성들을 유혹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아니라면 마지막 발악으로 뭐라도 했을 테니까. 계획보다 빨리 청와대 주변을 폭격한다든가. 그런 생각만 해도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유곽희가 제대로 일을 처리했다는 다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였다.

“아무리 우리 귀여운 S급 랭커 염동력자라고 해도 미사일 폭격은 견딜 수 없을 테니, 미리 대비를 했지. 그녀가 육군본부 점령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너희가 투입한 병력보다는 우리가 투입한 병력이 우세했나 보군.”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파악한 진가염은 입을 꾹 다물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고 있는 것도 길지만은 않았다.

“…상관없다!”

진가염은 포효하듯 외쳤다.

“지금 내가 지상으로 올라가 모조리 다 죽여 버리면 결과는 똑같아질 테니까!”

“똑똑하군.”

최재철은 진가염을 비웃으며 머리 위에 차원 단절을 걸어버렸다. 그 차원 단절을 보며 이번에는 진가염이 최재철을 비웃었다.

“이걸 내가 못 찢을 거 같나?”

“아니, 찢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최재철은 미니 블랙홀을 한 손에 틀어쥔 채 대꾸했다.

“찢을 여유가 있다면 말이야!”

진가염이 경악으로 인해 눈을 크게 떴다. 블랙홀이 방금 전과는 달리 강력한 중력을 발하며 진가염을 빨아들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아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그야 아까 전 건 위력을 조절했기 때문이지.”

손 위의 블랙홀을 진가염을 향해 던지며 최재철이 말했다.

“머리 위에 차원 단절도 안 걸고 블랙홀을 쓰면 지반이 무너져 내릴 거 아니냐.”

“이 정도로 날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진가염은 최재철이 던진 블랙홀을 향해 염동력을 집중하며 외쳤다. 역시 염동력도 사용할 수 있었던 건가,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 나도 그 블랙홀 하나 정도로 널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최재철이라고 무한한 차원력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블랙홀이라고는 하나 우주에 실존하는 그런 블랙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그런 걸 만들어버리면 지구가 파괴되고 말 것이다. 낼 수 있는 위력에는 한계가 있다.

자신의 몸에다 괴물을 이식한, 진가염 같은 강력한 생물을 블랙홀 하나로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최재철이 가진 수는 블랙홀뿐만이 아니었다.

최재철은 블라디 공의 가시에 차원력을 밀어 넣었다. 푸른빛이 가시에서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최재철은 블라드 공의 가시를 역수로 틀어쥐면서 진가염을 향해 달려 나갔다.

“무슨 짓을!”

“자기 몸에 괴물들을 이식한다, 생각해 볼 법하지. 그렇게 쉽게 강해질 방법이 더 있을까? 아니, 아마 없을 거야.”

진가염은 천천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블랙홀을 염동력으로 밀어내느라 바빴다. 최재철은 그렇게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 진가염의 등 쪽으로 돌아갔다.

“큭!”

틈새의 눈에서 이식한 촉수들에는 눈알이 달려 있기 때문에, 진가염은 자신의 등 뒤에서 최재철이 뭘 하는지 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재철은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차원력을 블라디 공의 가시에 밀어 넣어 빛을 섬광 수준으로 올렸다.

“끄악!”

진가염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을 들으며 최재철은 미소 지었다. 그는 도박에서 이겼다. 지금 이 전투의 결과가 확정됐다.

“하지만 쉽게 강해진 만큼 부작용도 생각해야만 하지!”

흡혈귀의 약점을 극복했다고 진가염 본인은 공언했지만, 그런 건 불가능하다.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도박에 적게 걸면 적게 따는 게 당연하다.

블라디 공의 가시가 발하는 빛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건, 진가염이 ‘적게 걸었기’ 때문이다. 단점을 적게 취하는 대신 장점을 적게 취했다. 안정성을 얻기 위해 그저 다른 괴물들의 인자를 섞어 넣어 묽게 만든 것에 불과하다. 그런 원리였다.

만관검의 관통 공격을 어둠과의 동화로 회피할 수 있음에도 굳이 회피행동을 취한 이유도 흡혈귀의 특성을 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두고 ‘약점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증거로, 블라디 공의 가시가 발하는 빛을 섬광 수준으로 올리자 진가염의 등에 난 틈새의 눈의 촉수가 오그라드는 것을 들 수 있다.

원래는 흡혈귀의 소체가 아닌 틈새의 눈 부분이 저렇게 오그라든다는 것은 저 촉수 부분에도 흡혈귀의 인자가 얇게 펴 발라져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죽일 수 있지!”

최재철은 5m를 점프해서 진가염의 거체 뒤에 들러붙었다. 진가염이 어떻게 저항하기도 전에 그의 뒷덜미에 블라디 공의 가시가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부분은 명확하게 진가염의 ‘흡혈귀 부분’이었다.

“끄아아아아악!! 커어어어어어어억!!”

진가염의 비명이 인간의 그것에서 괴물의 그것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블라디 공의 가시가 뿜는 빛을 직접 삼켜 버리고 만 진가염의 머리 부분이 재가 되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손상은 진가염의 온몸으로 전이되어 퍼져 나갔다. 그의 전신 구석구석에 균열이 갔다. 흡혈귀의 성분으로 이루어진 혈관 부분일 것이다.

“끄루루루룩……!”

성대가 소멸해 가슴 부분에 난 큰 입으로 비명을 마저 질러대고 있었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 차원력을 상당히 잃은 데다 머리까지 잃어 사고 능력을 상실한 진가염은 더 이상 염동력을 마음먹은 대로 운용할 수 없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염동력으로 틀어막고 있던 블랙홀이 진가염의 나머지 부분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아긇, 그르룩, 라하크!”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기이한 단말마와 함께, 진가염의 거체는 블랙홀 속에 완전히 끌려들어 갔다. 최재철은 블랙홀을 힘껏 제어했다.

결국 그 자리에는 작은 검은 구슬 하나가 남았다. 이것이 진가염의 시체였다. 그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최재철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허억, 헉, 하아……!”

차원력의 소모가 지나치게 극심했다. 도박도 많이 했고. 도박수 몇 개가 잘 통해서 망정이지, 만약 통하지 않았다면 위험해진 건 최재철 쪽이었으리라.

“이걸로 끝난 게 아니라는 게… 참!”

최재철은 이를 으드드득 갈았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에 억지로 기운을 돌리고, 최재철은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났다.

진가염이 시간을 끌고 있던 게 폭격을 기다리느라 그랬던 건 아닐 것이다. 다른 뭔가가 또 있다. 여기서 쉬고 있을 새는 없었다.

더군다나 마지막으로 남은 적은 단 하나.

그가 이제껏 이 삶을 끈질기게 이어온 이유이자 최후의 목표였다.

“진가규!”

그는 그 이름을 입 밖에 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길이 그의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불가사의한 힘이 영혼의 근저에서부터 휘몰아쳐 올라 그의 몸을, 정신을 다시 일으켰다. 그 힘의 이름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복수심이었다.

그는 정체를 숨기느라 자신의 차원력을 계속 잡아먹고 있던 반지 운반자의 팔찌에서 차원력을 거두었다. 그러자 최재철로서,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의 그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김인수가 남았다.

김인수는 똑바로 섰다.

심호흡을 한 번 한 후,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제 마지막 전투만이 남아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