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파멸
김인수가 포탈을 열어 온 곳은 다름 아닌 조상평의 은신처였다. 조상평은 열린 포탈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거기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나오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르덴이시여!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요즘 조상평의 은신처를 유곽희와 만날 때마다 쓰고 있어서 꽤 자주 보는데도 불구하고 조상평은 아직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보는 게 감격스러운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별일 없나?”
“오르덴의 가호 아래 모든 것이 평안합니다.”
“이제부터는 그렇게 되진 않을 거야.”
김인수는 다소 가학적으로 말했다.
“방금 내가 진가염을 죽이고 오는 길이거든.”
“오르덴께서 옳은 일을 행하셨군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걸 보니, 이 조상평이라는 인간도 첫 인상과는 꽤 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자네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협력자로서 WF에게 다시 쫓기게 될지도 몰라. 그걸 뿌리칠 수 있을 정도로 자네들이 강해졌는지 모르겠군. 어때?”
“저희는 그저 매일매일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건 꽤 괜찮은 대답이었다.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지도 않았고 비굴하지도 않았다. 정말로 최선을 다했기에 자신이 섬긴다고 공언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내가 죽인 건 겨우 진가염 하나일 뿐이야. 다른 진가염이 곧 나올 테지.”
그렇기에 김인수는 조상평에게 더 많은 걸 밝힐 생각이 들었다.
“예? 그게 무슨…….”
조상평은 어리둥절해했다. 정상적인 반응이었다.
“WF가 인간 복제 기술을 갖췄단 이야기일세. 그것만 갖춘 것도 아니었고 말일세. 자네가 생각하던 것보다 강적일지도 몰라.”
“인간 복제…….”
조상평은 전혀 몰랐던 듯, 충격이라도 받은 것같이 김인수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김인수에겐 그런 그를 위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 가짜 가면은 이제 벽에서 떼게! 대신 이걸 받아두게. 자네들 몫의 가면이야.”
“오, 오오!”
조상평은 떨리는 손으로 김인수가 내민 강철 가면을 받아들었다.
“이걸 쓴 동안은 자네들의 정체는 숨겨질 걸세. 조금 더 쉽게 도망칠 수 있을 거야.”
“영광입니다!”
조상평은 바닥에 납작 엎드리며 대답했다.
“대신이라고 하기엔 좀 뭐 하지만, 이것도 좀 받아두게.”
김인수는 차원 금고에서 목이 부러진 유곽희를 꺼냈다. 축 늘어져 있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유곽희의 목에 차원력을 불어넣고 부러진 목뼈를 다시 맞춘 후, 김인수는 유곽희를 조상평에게 떠넘겼다.
“아가임이 회수하러 올 거야. 만약의 경우에 그러라고 해두었으니. 그가 찾아오면 이 여자를 넘겨주게.”
“알겠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시여. 이 여성도 저희에게 있어선 은인 중 하나입니다. 반드시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토록 하겠습니다.”
조상평의 대답에 만족한 김인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여 주고 조상평의 은신처에서 나왔다. 몸을 숨기기에는 썩 괜찮은 장소지만, 김인수는 여기 머물 생각이 없었다. 행선지를 한 번 더 꼬아둘 생각이었다.
*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벗고 최재철의 모습으로 취했다. 그는 그 상태로 파주의 대형 의류 직판장에서 팬티 두 장을 산 후 버스를 타고 최재철의 자택으로 돌아왔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후, 최재철은 차원 금고에 저장해 두었던 동료들을 꺼냈다. 가면을 쓴 채 전투태세를 취하며 주변을 경계하는 현오준을 비롯한 길드원들이 조금쯤은 유쾌하게 보였지만, 최재철은 별로 웃을 기분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선생님?”
가장 먼저 가면을 벗으며 입을 연 오연화가 질문했다.
“암살에는 성공했어.”
그렇게 대답한 최재철을 바라보며, 현오준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렇습니까? 저희가 나설 필요도 없이 해결된 거면 좋은 것 아닙니까?”
최재철은 TV를 틀었다. TV에는 죽었을 터인 진가염이 나와서 뭔가를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진가염이 떠들고 있는 내용은 인간의 어보미네이션화에 대한 것이었다. 어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다큐멘터리의 제작은 어느새 WF가 감수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의 해설과 질의응답을 위해 특별 좌담회가 긴급 편성되었다고 한다.
“암살에는 성공했지만, 작전 목적을 이루는 데는 실패했거든요.”
진가염을 암살함으로써 WF의 경계 태세에 구멍을 뚫고 그 혼란을 틈타 차원 균열을 닫는다. 그것이 이번 작전의 목적이었다. 진가염의 죽음은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진가염은 처음부터 두 명이었던 겁니다. 아니,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았지만, 낮다고는 봤다. 그야 처음부터 복제품을 만들어두는 게 편리하긴 하다. 하지만 그만큼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인간 복제는 꺼려지는 법이다.
누가 자신의 역할을 다른 누군가가 언제든 대신할 수 있다는 걸 유쾌하게 받아들이겠는가? 권력자일수록 그런 걸 싫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불과 두 시간 전에 죽은 진가염이 지금은 TV 생방송에 나오고 있는 걸 보니, 진가염은 그 불쾌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진가염이 변태가 아닌 이상은 다른 누군가의 지시가 있었기에 한 짓일 터였다. 그리고 그 다른 누군가는 진가규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진가염이 굳이 지금 TV에 출연하고 있는 것도 WF 측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속셈을 간파했기 때문이리라. 명령 체계는 무너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보다 더 좋은 것도 드물 것이다.
[WF는 한국 사회와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진가염이 소리 높여 외치고 있었다. 듣기에는 좋지만, 바로 어제 일어날 뻔했던 시위에 대한 이야기인 게 분명했다.
열이 확 올라왔다.
“잠깐, 저거 생방송이지?”
“위에 라이브라고 붙어 있는 걸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이지희가 대답했다.
“잠깐 다녀올게.”
“어디로요?”
“저기.”
최재철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쓰면서 말했다. 그의 손가락 끝은 TV 화면을 가리키고 있었다.
*
계획에는 없었다. 다소 즉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최소한도의 준비조차 안 하고 갈 수는 없었다. 김인수가 포탈을 열고 온 장소는 추경준의 은신처였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혹시 남는 옷 있나?”
“있습니다만…….”
“흠, 쇼핑은 하고 사는 모양이로군. 뭐, 좋아. 그걸 좀 빌려주게.”
“상관은 없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이놈한테 입힐 옷이 필요해.”
김인수는 차원 금고에 잘 보관해 두었던 진가염의 머리를 꺼냈다. 그러자 그 머리를 기점으로 순식간에 몸이 재생되었다.
“우왓!”
추경준은 놀라서 되살아난 진가염의 얼굴에다 주먹을 휘둘렀다. 퍽! 진가염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반응은 이해하네만, 지금은 그만두게. 그보다 나와 어딜 함께 좀 가줘야겠어.”
“어디 말입니까?”
“방송국. 아, 그 전에 이놈에게 옷을 먼저 좀 입혀야겠군.”
되살아난 진가염은 알몸이었다. 원래 입고 있던 옷은 그의 시체가 입고 있으니 당연했다.
“자네는… 추경준인가? 살아 있었군. 그런데 지금 자네가 날 때린 건가?”
진가염은 아직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건지 추경준을 바라보며 그런 소릴 하고 있었다.
“상황 파악도 못 하는 소리는 그만 떠들고 옷이나 입게.”
김인수는 진가염의 머리를 붙잡고 명령했다. 그의 철가면을 보고나서야 진가염은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제야 좀 눈치챈 듯, 말없이 주섬주섬 추경준이 던져준 옷을 집어 입기 시작했다.
“자, 그럼 가지.”
“예, 에스파다 도 오르덴.”
김인수는 진가염을 붙들고 초시공의 팔찌로 포탈을 열었다. 추경준에게 미리 말한 대로, 그들이 향한 곳은 방송국이었다.
*
방송국에 간다고 해도, 초시공의 팔찌로 포탈을 열 수 있는 장소는 한정되어 있었다. 가본 적이 있는 곳이나, 아는 사람이 있는 곳.
아는 사람이라고는 해도 그냥 얼굴과 이름만 아는 정도로는 안 되고, 그 사람을 직접 만나 ‘존재를 인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등록 코드 같은 것이 있고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대충 들어맞는다.
사실 김인수는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방송국에다 바로 포탈을 열 수는 없다. 원래대로라면 말이다.
“그런데 바로 저기, 딱 한 사람 있지.”
TV 화면을 가리키며, 김인수는 말했다. 다행히 방송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진가염은 아직도 뭐라고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시청자 질문에 대답하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 질문이란 게 미리 협의한 내용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자, 그럼 갈까?”
TV 화면에 진가염으로부터 5m 떨어진 지점에 푸른색의 포탈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김인수가 연 것이었다. 뜻밖의 방송 사고에 진가염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김인수의 ‘아는 사람’이란 건 다름 아닌 진가염을 뜻한다. 손수 목까지 썰어준 사이인데 모르는 사람일 리는 없었다. 정확하게 따지자면 다른 개체겠지만, 복제 인간이니 ‘등록 코드’는 같았다. 포탈이 문제없이 열린 게 그 증거였다.
방송은 아직 중단되지 않았다. 김인수는 포탈을 통과했다.
이제 그는 TV 화면 안에 있다. 그렇게 보일 것이다.
*
“에스파다 도 오르덴!”
포탈을 통해 나온 김인수를 보자마자 진행자가 어찌나 놀랐는지 마이크도 안 끄고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시청자 여러분, 죄송합니다. 아, 죄송합니다. 예, 잠시만……. 마이크 좀, 아니, 그전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 씨?”
“네.”
“지금은 생방송 중입니다. 혹시… 출연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러려고 왔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행자는 감격한 듯 말했다. 그리고 스태프로부터 받은 마이크를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진가염이 날카로운 시선을 진행자에게 던졌지만, 진행자는 진가염 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시청자 여러분, 에스파다 도 오르덴 씨가 오셨습니다. 이분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드리자면…….”
“테러리스트에 살인자, 우리 회사에 심각한 해악을 끼친 악당이지.”
진행자의 말을 끊고 진가염이 말했다.
“질서의 검이오. 차원 질서를 지키기 위해 차원 균열을 닫고 다니는 존재지.”
진가염의 말을 받아서 김인수가 말했다.
“그래, 넌 우리 소유의 차원 균열을 닫았어. 그게 얼마나 큰 가치를 갖고 있는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머저리야.”
이미 진행자는 안중에도 없는 듯, 진가염이 나서서 말했다.
“저, 진가염씨? 생방송이니 표현을 조금…….”
“우리 회사가 저자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지 아는가? 자그마치 10조일세! 그것도 차원 균열의 가치만 따졌을 때의 이야기지, 경제 효과를 따져보면 훨씬 큰 피해를 봤네. 어지간한 나라의 국가 예산이 저자가 저지른 행위 때문에 날아갔어!! 그런데 나더러 표현을 자중하라고?”
진가염은 흥분해서 외쳤다. 그리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삿대질을 했다.
“저자는 악당이자 범죄자고, 이 나라에 큰 피해를 가져다준 매국노야! 뭐 하나? 얼른 저자를 체포하지 않고!”
“4년 전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입을 열었다.
“차원 균열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있었지. 기억하는가?”
스튜디오 안은 조용해졌다. 요 4년간, 그 일을 거론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 잊으려고 하는 일이었다. 위에서 잊으라고 강요하는 일이었다.
“다큐멘터리를 틀어줘서 고맙네, 진가염. 이제는 모두가 알게 되었지.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일이 차원 균열 주변에서 특히 빈번히 일어난다는 것 또한, 어제부로 밝혀지게 되었네.”
“저놈의 입을 막아!!”
진가염은 외쳤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스튜디오 안에 뛰어 들어왔다. 경찰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어벤저였다. 아마도 진가염의 경호원일 터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아예 생방송 현장에 뛰어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지 그리 수준이 높지는 않았다. 김인수는 허공에 손가락을 한 번 슥 긋는 것만으로 경호원들을 카메라가 비추는 곳 밖으로 몰아냈다. 염동력이었다.
진행자를 비롯한 방송 스태프들은 놀란 눈빛으로 김인수를 바라보았지만, 김인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계속할 뿐이었다.
“북양여고 수학여행 참사는 자연재해가 아닐세. WF에 의한 인재지. 사고가 아닌 사건일세.”
“무슨 근거로 그런 소리를!”
“그렇다면 4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차원 기술을 지닌 자네들이 ‘인간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다’는 것도 몰랐다고 말할 셈인가?”
진가염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망설임이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자네들은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수학여행지로 차원 균열 견학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획을 입안했고 실행했지. 목적이 뭔가? 아니, 그냥 돈을 버는 것이었겠지. 차원 균열 견학에 사용된 시설은 모두 WF의 소유였고, 그 많은 학생을 불러오는 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돈벌이가 되었을 테니 말이야.”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김인수는 계속 이어서 말했다.
“아무리 나라도 설마 어보미네이션을 고의로 발생시켰다고는 생각하진 않네.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자네들도 알고는 있었겠지만 말일세. 흠, 그래서 그 참사에서 발생된 어보미네이션 시체는 누가 챙겼지? 아, 자네들이었지. 돈 좀 벌었군그래.”
“카메라 꺼! 끄라고!!”
진가염은 카메라 감독에게 명령했지만 그는 홀린 듯 계속해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찍고 있었다. 마이크도 꺼지지 않았다. 이들 제작진은 분명 WF에 의해 제어되고 있었을 터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김인수는 마이크에다 대고 계속해서 말했다.
“자네가 지금껏 TV를 통해 떠든 것만큼 차원 균열은 안전한 존재가 아닐세. 그건 사람을 죽이지. 비단 북양여고 수학여행 참사를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야. 훨씬 더 많이 죽었지. 작년에 이 나라에서 실종된 사람 수만 다섯 자리일세. 다섯 자리. 말이 안 되는 수치지.”
“빨리 꺼! 마이크라도 꺼!!”
진가염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러나 꺼진 것은 오히려 진가염의 마이크였다.
이건 김인수도 예측하지 못한 전개였다. 김인수는 카메라가 꺼지자마자 진가염의 목을 날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방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진행자도, 스태프도, 그리고 담당 프로듀서조차도 전부 진가염에게 ‘반역’하고 있었다.
아니, 반역이라는 단어는 적절치 않다. 이 방송국은 물론 WF의 소유다. 하지만 이 방송국은 정규직을 해고하고 외주로 방송을 돌리고 있었다.
여기 스태프들도 WF 소속은 아니었다. 갑을의 관계는 있겠지만 원칙적으로는 평등한 계약관계다. 이들이 WF에 충성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래도 WF에게 잘 보여서 나쁠 건 없겠지만, 그보다는 시청률이라는 실적, 그리고 이 역사적인 방송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들어보겠다는 욕심, 약간의 덤으로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으리라.
김인수로서는 의외이기는 했지만 판은 깔렸다. 그렇다면 쇼를 계속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이게 그저 우연히 올해만 실종자가 많이 나왔다고 생각하지는 않게 됐겠지. 그리고 그 원인이 차원 균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네.”
“방송을 끝내!”
진가염은 꺼진 마이크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김인수는 상관하지 않았다.
“사람이야 언젠가 죽게 마련이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이 죽었어. 너무 많은 죽음은 차원의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그제야 김인수는 입에서 마이크를 떼어내었다. 그러자 진가염도 스태프들에게 방송을 끝내라는 종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는 김인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제 와서 정의의 화신 행세라도 할 셈인가?”
“아니, 나는 질서의 화신일세.”
김인수는 태연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닫은 만큼 자네들은 새로운 차원 균열을 열어젖혔지 않은가? 자네들은 자네들 나름대로 균형을 맞췄지.”
“잠깐만요. 새로운 차원 균열을 열었다고요?”
이제껏 잠자코 듣고 있던 진행자가 나서서 물었다.
“차원 균열은 자연 발생 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인위적으로 새 차원 균열을 열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요?”
“지금 들었지 않은가?”
“혹시 그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 같은 것 있습니까? 아니, 죄송합니다. 시청자 분들께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으신 분이 많을 것으로 사료되므로…….”
“근거라, 증인은 어떤가?”
김인수는 진행자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대신 차원 금고에서 사람을 하나 꺼냈다.
“추경준! 자네,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항복한 건가?”
진가염이 놀라 외쳤다.
“이자는 WF 소속이고, 차원 균열이 열리는 현장에 있는 걸 내가 잡아왔다네. 물론 열리다 만 차원 균열은 내가 닫았고.”
방금 김인수가 말한 내용을 진가염이 모를 리는 없었다. 이 이야기는 진가염에게 대고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생방송 시청자들에게 한 말이었다.
“추경준 씨? 방금 에스파다 도 오르덴 씨가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네, 맞습니다.”
진행자의 질문에 추경준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추경준! 이 배신자가!! 아니야, 사기야!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돈 받았냐?!”
“내가 WF보다 돈을 많이 갖고 있다면 이자를 매수할 수 있겠군.”
김인수는 코웃음 쳤다. WF는 한국의 재계 순위 1위였다. 한국 돈을 WF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집단은 이 세상에 없었다.
“애초에 한 달에 하나만 열려도 난리가 나는 차원 균열이 사람도 많은 경기도 지역에 한꺼번에 열 개나 발견된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걸 인위적으로 열 수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WF가 열어놓고 발견했다고 보고했다면 앞뒤가 맞아들지.”
타앙! 총성이 울렸다. 진가염이 쏜 것이다.
“히익!”
놀라서 비명을 지른 사람은 카메라 감독이었다. 카메라는 깨져서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렌즈를 정확히 쏜 걸 보니 진가염의 사격 솜씨도 꽤 쓸 만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 아까부터 그만두라고 했었지?”
진가염이 겨눈 권총의 총구가 이번에는 진행자를 향했다. 진행자는 그 자리에 굳어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그는 마이크를 들어 올렸다.
“진가염 씨, 카메라는 한 대뿐만이 아닙니다. 더불어 이건 생방송입니다. 아직도 방송은 송출되고 있습니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 진행자라는 양반이 바들바들 떨면서 한 말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 표정은 분명 겁에 질려 있었고 목소리에도 공포가 묻어나오고 있었지만 말한 내용은 꼿꼿하기 그지없었다.
“너 이 새끼… 죽고 싶냐!?”
진가염은 화가 머리끝까지 솟은 듯 총구를 들이대며 외쳤다. 그런 진가염의 외침에 대꾸한 건 진행자가 아니었다.
“흠, 생방송이라니 너무 참혹한 광경은 안 보여주는 게 좋겠군.”
김인수였다.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 몸은 이미 휙 날아 진가염의 손목을 꺾고 총을 빼앗아 자신의 품에 넣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나 제대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어… 억!”
일반인 시점에서는 그저 눈을 한 번 깜박였더니 진가염의 손에서 총은 없어져 있고 진가염은 고통에 신음하고 있더라, 이렇게만 보였을 것이다.
“총까지 꺼내 들어줘서 고맙네, 진가염. 내 이야기에 신빙성이 더해졌군. 사실 나와 이 추경준의 증언을 믿지 않는다면, 경기도의 차원 균열 이야기는 정황증거에 불과한 이야기였는데 말이야.”
“너… 너……!”
“까발리는 김에 하나 더 까발리도록 하지. 아직까지도 내가 WF의 엘리트 어벤저들에게 제압당하지 않은 게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저 검은 양복들도 어벤저인데, 저들로는 나를 막을 수 없었어. WF의 후계자라는 인간이 이 자리에 와 있는데 호위가 B급 어벤저들로 이뤄져 있다니.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지. 하지만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지금 내게 있어.”
김인수는 진가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진가염은 가짜다.”
“예?”
놀란 탓인지, 진행자의 목소리가 뒤집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 진가염도 가짜지.”
김인수는 차원 금고에서 자신이 사로잡았던 진가염을 꺼내어 세워놓으며 말했다.
“진가염이 나이에 비해 너무 젊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그게 WF의 차원 기술이 뛰어난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지. 그래, 맞아. WF의 차원 기술은 너무 뛰어나서, 이렇게 복제 인간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네.”
스튜디오는 경악에 사로잡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김인수의 염동력에 의해 이 자리에 접근조차 못하던 WF의 검은 양복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내가 복제 인간이라고?!”
그리고 경악에 휩싸인 건 진가염 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본인들도 몰랐던 모양인지,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뒤에 이어질 일은 김인수도 예상하고 있었다.
먼저 달려든 쪽은 김인수가 꺼내놓은 쪽의 진가염이었다. 그 진가염은 자신의 클론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신체 능력도 어벤저 스킬도 완전히 동일한 클론 진가염 둘이 엎치락뒤치락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었다.
두 클론은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굳게 믿고 있으며, 그렇다면 상대는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도 있는 가짜이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을 것이다.
물론 진실은 둘 다 가짜다.
김인수가 둘 다 가짜라고 확신한 건 이 스튜디오로 포탈을 열 수 있다는 걸 알아챘을 때였다. 둘 중 하나가 본체라면 김인수는 이 스튜디오의 좌표를 열 수 없었다. 어느 쪽이 본체든, 둘은 다른 존재라 ‘등록 코드’가 달랐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 둘의 ‘등록 코드’는 완전히 동일했다.
그게 가리키는 바는 둘이 동시대에, 같은 소체로 만들어진 완전히 같은 존재라는 것이었다. 진짜가 가짜와 함께 생산되지는 않았을 테니 결론은 둘 다 가짜란 의미밖에 안 된다.
‘유곽희도 몰랐을 테지. 내 원 참, 그럼 진짜는 어디 있는 거지?’
김인수는 혀를 찼다. 두 가짜 진가염이 서로 싸우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어쨌든 여기에 지나치게 오래 머무르고 있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럼 시청자 여러분, WF가 정말로 한국 사회와 인류 문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한번 다시 생각해 보시길.”
김인수는 들고 있던 마이크에다 대고 그렇게 마무리 멘트를 하고, 추경준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 가지.”
초시공의 팔찌는 새로운 포탈을 열었다.
막 스튜디오의 문을 발로 차 부수고 전투복으로 몸을 감싼 자들이 돌입해 오는 것이 보였다.
김인수는 그걸 끝까지 지켜보지는 않았다. 돌격 소총의 총구가 그가 있던 곳을 향했을 때, 포탈은 이미 닫히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모습은 없었다.
*
김인수는 포탈을 통해 추경준을 데리고 그의 은신처로 왔다. 장소의 기억을 지운 후, 그는 다시 자리를 옮겨 이번에는 조상평의 은신처로 향했다.
조상평의 은신처에는 조상평 일당 전원과 유곽희, 그리고 아가임이 있었다. 조상평 일당이 모조리 고개를 조아리는 가운데, 유곽희는 김인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TV 봤습니다.”
“설명할 게 줄어서 좋군.”
김인수는 내뱉듯 말했다.
“진짜 진가염의 위치는 자네도 모르겠지. 저걸 진짜로 알고 있었을 정도니. 역시 만만치 않은 놈들이야.”
쯧, 하고 한 번 혀를 찬 후 김인수는 뒤를 돌아 추경준을 보았다.
“당분간 이들과 함께 지내게. 가능하다면 이들에게 훈련을 해주는 것도 괜찮을 테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놈도 부탁하네.”
김인수는 차원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부상당한 서필지를 꺼내어 던졌다.
“아가임과 자네, 둘이라면 이놈한테 제압당하지는 않겠지. 상처를 치료해 주고 회유하게. 말을 안 들으면 죽여 버려도 돼. 결정권은 아가임, 자네에게 맡기지. 자네 후임이라 들었으니.”
“뜻대로 하죠.”
아가임의 대답을 들은 김인수는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조상평 일당을 쳐다보았다.
“식구가 늘어서 미안하네만 이들을 잘 부탁하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조상평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김인수는 조상평의 은신처를 나서서 초시공의 팔찌로 또 한 번 행선지를 꼰 후, 최재철의 자택으로 다시 돌아왔다.
*
최재철의 자택에는 아직 현오준 길드의 면면들이 남아 있었다. 여기 남아서 TV를 통해 김인수가 하는 걸 다 같이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중에서도 구문효가 펑펑 울고 있었다.
“사부님……!”
최재철이 돌아온 걸 본 구문효가 최재철에게 와락 안겼다.
“아니, 왜 울어?”
최재철은 그의 등을 두들겨 주며 위로했다.
우는 이유야 알고 있다. 이제껏 북양여고 수학여행 참사의 유가족들은 오히려 그들이 죄인인양 취급받았다. 그렇게 큰 참사였는데도 언론 등에서는 아예 언급조차 안 되고 있었다.
그런데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나와서 WF의 높으신 분을 상대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해준 셈이니, 감정이 끓어오를 법도 했다.
하지만 구문효는 이걸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최재철은 구문효에게 말했다.
“아직 아무것도 안 끝났어. 처벌받아야 할 놈들은 아직도 처벌받지 못했고, 적은 아직도 강해. 아 것도… 아무것도 안 끝났어.”
그렇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된다.
눈물이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같이 울먹거리고 있는 오연화와 이지희를 보면서, 최재철은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사실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진짜 진가염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WF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했다.
틈새 차원에서만 얻을 수 있는 소재와 아티팩트도 확보한 것이 분명한 이상, 김인수가 WF 상대로 일방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면도 이제는 별로 많지 않았다.
그에 비해 WF가 김인수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면은 많았다. 현대 과학 기술과 자본력, 그리고 권력과의 유착 관계. 지구에서의 영향력은 WF측이 훨씬 크다.
여기에 차원 기술과 현대 과학 기술을 융합한 WF의 기술력. 파멸철 가공 기술과 인간 복제 기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세뇌와 기억 이전은 물론이고 무능력자에게 차원 기술을 부여하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고, 그 외에도 그가 모르는 기술을 많이 갖고 있으리라.
결론적으로 지금 WF는 김인수 개인이 전력을 다한다고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김인수의 심장은 절망에 물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혼자서 못한다면 세력을 이루면 된다. 내 편을 늘리고 적을 고립시키면 된다. 그리고 오늘은 그걸 위한 첫 수를 두는 데 성공했다.
공권력과 언론은 무조건 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집단은 악이라 한들, 그에 속한 개인은 각자의 생각과 이념이 있다.
그렇다면 돌파구는 있다.
“콘크리트에 균열을 내주지. 그것만이 아니야. 아예 파괴해 버리겠어.”
그는 다시금 자신만만하게 웃어보였다.
*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군.”
진가염이 말했다. 말한 내용과 달리 그 목소리는 별로 어둡지 않았다. 차라리 가볍게 여긴다는 인상마저 준다.
물론 그는 진짜 진가염이었다. 가짜 진가염들은 지금 다시 연구소로 돌려보내져 재조정을 받는 중이었다.
“예, 전하.”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자가 말했다. 그의 이름은 두예지. S급 랭커 5위의 실력자였다.
“이래서야… 대선에서 질 상황도 염두에 둬야겠는데?”
그건 WF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상황일 터였다. 그럼에도 진가염은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음? 하하하, 그야…….”
두예지의 질문에 진가염은 헛웃음을 터뜨린 후 대답했다.
“쿠데타지.”
“그렇군요.”
두예지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래. 애초에 어벤저와 일반 시민이 똑같이 취급당하는 게 이상하지 않나? 말이 안 되지. 민주주의는 총 때문에 생명의 가치가 균일해졌기에 대두될 수 있었던 사상이야. 하지만 어벤저와 일반인은 달라. 중세시대의 기사 계급과 농민만큼의 차이가 있어. 어벤저 한 명이 일반시민 천 명을 죽일 수 있는데, 그 가치가 동일할 리가 있겠나?”
“당연히 같지 않습니다.”
두예지가 대답했다.
“물론이지. 지금까지는 개, 돼지들이 말을 잘 들었기에 살려둔 것이지만, 만약 말을 안 듣는 개, 돼지가 권력을 쥔다면 그걸 그냥 두고 볼 이유가 우리에게도 없어. 도살해야지. 계급제가 부활하기에 좋은 때가 오는 게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전하께오서 말씀하시는 바대로입니다.”
“그래, 그렇지.”
두예지의 대답이 마음에 든 듯, 진가염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폐하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진가염이 말한 황제 폐하란 물론 진가염의 아버지인 진가규를 가리킨다. 그의 물음에 두예지는 공손히 대답했다.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전하께오서 뜻하는 대로 하셔도 될 듯하옵니다.”
“그래, 알았다. 그럼 준비하라.”
쿠데타의 준비를. 어벤저라는 신인류가 등장했는데도 아직까지도 민주주의라는 구습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제정으로 되돌려 놓을 준비를.
“알겠습니다.”
두예지는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