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해서 복수한다-26화 (26/32)

26. 거래

[왕이시여, 오셨습니까. 왕의 친구 분들께도 안부 인사 올립니다. 별고 없으셨습니까?]

웬디는 오자마자 최재철 일행을 다소 과장스럽게 반겼다.

“보다시피. 넌?”

[그리 큰일은 없었습니다. 다만…….]

웬디는 일부러 말하기가 꺼려지는 척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무슨 일 있었어? 웬디!”

그리고 거기에 이지희가 걸려들었다.

[아, 아닙니다. 이런 일 때문에 왕의 친구 분께 힘을 빌릴 수는 없습니다.]

“아, 됐어. 얼른 말이나 해.”

최재철은 질린 듯 내뱉었다.

[웬디가 이 차원 세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자양분이 필요하답니다.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번영과 발전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지요.]

“그건 다음에.”

웬디는 말하자면 일종의 ‘퀘스트’를 주려고 한 거지만, 최재철은 딱 잘라 거절했다.

“뭐, 침략당하거나 그런 일은 없었지?”

[두 번 있었습니다만 모두 격퇴했습니다.]

웬디라고 무력이 없는 건 아니다. 이 차원 세포의 주인인데 무력이 없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녀가 최재철을 목이 빠져라 기다린 이유는 간단하다.

적자가 나기 때문이다.

어벤저들과 마찬가지로 차원 세포의 주인들도 차원력을 자원으로 권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가만히 있으면 차원력이 회복되는 어벤저들과 달리 차원 세포의 주인들은 자연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즉, 차원 세포의 주인이 적을 맞이해서 자신이 직접 싸우면 차원력을 계속 소모만 하게 되어, 결국 차원 세포가 약해지게 된다.

“그렇군. 잘 했다. 앞으로도 그런 식으로 잘 해주도록.”

그런 사정을 전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히 말했다.

[제가 직접 침략자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차원 세포의 차원력을 소모해야 하는데요.]

“알고 있어. 잘 했다.”

최재철은 설명을 시작하려는 웬디의 말을 사정없이 잘랐다.

‘차원 세포의 의지’인 웬디는 차원력과 영토에 관한 무한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이 녀석의 욕망을 채워주려면 이 틈새 차원을 모조리 점령해도 모자랄 지경일 터였다. 그러니 적당히 끊어주는 것도 필요했다.

“자, 그럼 훈련을 시작하지.”

웬디가 입을 닥쳤으므로, 이제 예정대로 훈련을 소화할 생각이었다.

본래 장비가 없어서 차원 세포에 오는 걸 뒤로 미뤘던 현오준 길드지만, 최재철이 자신의 정체 중 하나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인 걸 밝히면서 장비 또한 지원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렇게 차원 세포에 올 수 있게 되었다.

“WF 같은 세력을 상대하려면 힘을 많이 길러야 하겠죠. 더 열심히 할게요!”

어째 WF에 직접적인 복수에 대한 동기를 갖고 있지는 않은 이지희가 더욱 의욕에 차 있었다. 물론 그녀를 납치하려고 한 게 진가충이라고 말해주면 없던 동기도 생기겠지만, 별로 들어서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그녀가 배반할 것 같지도 않으니 말해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래, 좋아. 그럼 오늘은 지희부터 시작하지.”

대신 최재철은 쾌활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

그날 밤.

김인수는 오래간만에 박기범의 모습으로 나섰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유곽희와 협력하게 된 건 김인수에게도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특히나 WF의 내부정보에 있어서 유곽희는 지금까지 접촉해 온 그 어떤 인물보다도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하필 박기범의 모습을 오래간만에 취한 것도 유곽희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함정일 수도 있어.’

그런 생각이 김인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그런 결론 또한 동시에 내려졌다.

“일단 저지르고 보자고.”

그렇게 입 밖에 내놓고 나니 머릿속이 시원해졌다.

그가 지금 선 자리는 바로 진가충의 자택이었다.

“후.”

짧게 웃은 그는 담을 훌쩍 뛰어넘었다.

무슨 자신감인지 별다른 경비 시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아니, 그 자신감의 근거를 김인수는 유곽희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어벤저예요.”

유곽희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라이센스 랭크로 치면 A급에 해당하겠죠. 실제로 라이센스를 받지는 않았으니 별로 객관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어쨌든 평범한 어벤저들을 압도하고도 남을 능력을 갖추고 있죠.”

갖추고 있는 능력은 신체 특수 강화 능력으로, 평범한 신체 강화 능력 또한 사용할 수 있으며 거대화와 피부 경화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자신의 땀을 마약 성분이 있는 액체로 바꾸는 능력도 갖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절대로 진가충의 땀은 핥으시면 안 돼요.”

“나한테 폭언을 하고 싶으면 더 적절한 게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다고 한다.

다소 한쪽으로 치우쳐진 경향은 있지만, 숫자로만 세어 봐도 세 가지 이상의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으니 충분히 강력한 능력자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호위를 두는 데는 거의 무관심하다시피 하다는 점이었다.

물론 지금은 WF의 사정이 별로 안 좋다는 점 또한 영향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언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자신들의 차원 균열을 닫으러 올지 모르니, 방어 병력을 빼서 진가충의 호위를 두는 데도 무리가 있으리라.

그래서 김인수가 이렇게 직접 진가충을 암살하러 나설 수 있었다.

“사실 저는 진가충을 이미 한 번 죽였었어요.”

유곽희는 말했다.

“하지만 그는 되살아났죠. WF는 죽은 인간을 되살리는 기술을 이미 갖고 있었어요. 제 치기 어린 복수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고, 전 뼈아픈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그 뼈아픈 대가란 게 뭐지?”

“제 딸이죠.”

그녀의 어린 딸이 진가충을 되살리는 데 제물로 사용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김인수는 이 가는 소리가 철가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무진 애써야 했다.

‘어차피 진씨 일가는 모조리 죽일 셈이었지만.’

그의 복수를 위해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 녀석에게는 죽어야 할 이유가 넘치게 많아!’

김인수는 진가충의 자택 대문을 마치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은 것처럼 열고 들어갔다.

*

들어가자마자 진가충이 어느 방에 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저택의 한 방에서 지금이라도 절정에 이를 듯 끈적거리는 신음성과 후끈하게 달아오른 열기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 방의 문을 여니 분명 성인은 아닌 여자가 남자를 깔고 앉아 허리를 거칠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을 열고 들어간 김인수의 모습을 확인하고 그 자리에 굳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누구세요?!”

여자는 절정을 앞두고도 이성과 수치심이 남아 있긴 한 듯 손으로나마 자신의 가슴과 비부를 가리려 노력했다.

유곽희의 말과는 좀 다른 점이 있었다. 저 여자, 유곽희의 ‘가짜 딸’인 진남은 진가충의 마약에 취해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했었는데 정작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그 반대였다.

오히려 마약에 취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녀의 엉덩이 밑에 깔려 있는 남자가 진가충처럼 보였다.

“알 거 없어.”

김인수는 차갑게 대꾸했다. 진씨 일가의 일원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진씨 일가가 아닌 가짜 진남은 그의 복수와 아직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가짜 진남에게 관심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래도 이대로 남겨뒀다간 잘못하면 지금부터 일어날 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고, 잘해봐야 WF의 제물로 쓰일 테니 그냥 둘 순 없었다.

가짜 진남을 붙잡아다 차원 금고 속에 넣어버린 김인수는 마약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진가충을 내려다보았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입에서는 침과 거품을 흘리며 본능적으로 허리를 꿈틀대고 있는 진가충의 모습은 대단히 추하고 어떤 면에서는 안쓰러웠다.

“일어나라.”

김인수의 명령에 진가충은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났다. 그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마약의 영향은 간 곳 없고, 그의 두 눈은 이성을 되찾아 청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으으, 으아아아……!”

그러나 진가충은 마치 제정신을 되찾은 것이 괴로운 듯 비명을 질러대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떨리는 손으로 새로운 주사기를 찾는 그의 모습은 마약중독자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침내 새 주사기를 손에 쥐고, 그걸 자신의 팔에 찌르려 했다. 그러나 그는 행동을 끝내지 못했다.

파삭.

주사기가 그 자리에서 박살나 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박살 낸 것은 다름도 아닌 김인수였다.

“으으… 으으으……!”

그제야 진가충은 김인수를 노려보았다.

“누구냐…….”

“네 아들의 친구다.”

김인수는 도저히 아들의 친구처럼은 들리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그러자 진가충은 픽 웃었다.

“내 아들? 하하하……. 나한텐 아들 같은 건 없어.”

“그야 그렇겠지. 그냥 해본 말이었어.”

자조적으로 뱉어진 진가충의 말을 김인수는 차갑게 잘라내었다.

“네놈은 진가충이 아니지만, 진가충의 역할을 하는 이상 죽을 수밖에 없어.”

진가충의 눈빛이 흔들렸다.

“뭐야, 너…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네가 모르는 것까지 알고 있지.”

김인수는 식은 눈동자로 진가충을 내려다보았다.

“오히려 네가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군. 네 기억은 봉인되어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되찾았지? 아니, 되찾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군. 그 기억들은 처음부터 네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일 테니까.”

“나, 나도 몰라.”

진가충은 두려움에 찬 눈동자로 고개를 저었다.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기억들을… 나는 너무나도 많이 떠올렸어. 그게 두려워서 약을 먹었던 건데…….”

김인수는 이 방에서 예상외의 상황이 펼쳐져 있었던 이유를 알았다. 진가충이 본래 가짜 진남에게 주사할 예정이었던 마약을 자신에게 투여한 건 두려웠기 때문이리라.

“그래, 넌 창조물이다. 진가충의 역할을 수행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형이지.”

그래서 김인수는 아마도 그가 가장 깨닫기 두려워했을 것을 알려주었다. 예상대로 김인수의 말을 들은 진가충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인해 벌어졌다.

“넌 결코 진가충 본인이 될 수 없어.”

“너는! 넌 뭐야……. 뭐 하는 새끼야!”

진가충은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 진가충을 바라보며, 김인수는 코웃음 쳤다.

“네 아들의 친구였다… 고 말해봤자 이제는 믿지도 않겠지. 뭐, 애초에 진현우는 네 아들인 것도 아니니까.”

“하! 진현우도 죽었어!! 지금의 그놈은 나하고 똑같은 존재야! 되살아난 존재지!! 아니, 제대로 된 조정도 못 받았으니 나보다 열등한 존재로군! 그런 놈하고 친구라니… 네놈도 별 다를 바 없겠어?!”

“그래, 알아.”

진현우가 죽었다는 건 김인수도 알고 있었다. 그 자신이 직접 죽였으니 모를 리는 없다. 그리고 진현우가 되살아났다는 것 또한 유곽희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인수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진가충의 동공은 한껏 확장되었다.

“뭐라고?!”

“네놈이 갑자기 기억을 되찾기 시작한 이유가 진현우 때문일 거다. 같은 소체로 연결된 사이일 테니, 비슷한 존재끼리 영향을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 녀석이…….”

김인수의 말에 진가충은 짚이는 구석이 있는지,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후, 뭐 좋아. 쓸데없는 대화로 시간을 너무 낭비했군.”

김인수는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죽을 준비나 해둬라.”

“아아아아아!!”

진가충이 포효했다. 그와 동시의 그의 몸이 고무 인형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m가 넘는 거인이 된 진가충의 피부 빛이 붉은 빛으로 변했다. 경화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죽일 수 있으면 한 번 죽여 봐라, 병신아!!”

수박 한 통보다도 큰 주먹이 김인수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다음 순간, 빠각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어깻죽지부터 큰 균열이 생겨, 휘두르던 팔이 조각나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자, 봐라.”

김인수는 히죽 웃었다.

“이제 누가 병신이지?”

“뭐야? 뭐가…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지하지 못한 듯, 진가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잘려 나간 팔을 집어든 그는 그것을 원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다음 순간, 반대편 팔 또한 잘려 나갔다.

“아아?!”

진가충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그런 진가충을 보면서 김인수는 쯧 하고 혀를 찼다.

“통각을 잘라냈나. 재미없게.”

“너는… 당신은……!”

그제야 눈앞의 존재가 자신을 한없이 초월하는 강자임을 깨달은 듯, 진가충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뿜어져 나왔다.

“나, 나, 나, 나는 진가충이 아니야!”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그딴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당신에겐 날 죽일 이유가 없어!”

“없긴 왜 없어.”

김인수는 이빨을 드러내었다. 살의가 진가충을 닥치게 만들었다.

“네가 진가충의 자리에 올라서 한 짓만 따져도 넌 죽어 마땅해.”

“아아아아!”

진가충은 절망적으로, 그러나 마지막 발악인 듯 남아 있는 다리를 김인수에게 뻗었다.

“흥!”

김인수는 코웃음을 치며 그 킥을 자신의 킥으로 받아쳤다.

우두둑!

거목이 꺾이는 소리가 나며 꺾인 쪽은 말할 것도 없이 진가충의 다리였다.

“오오오오오오!”

“시끄러워, 멍청아.”

김인수는 이미 전의를 잃고 울부짖는 진가충의 단전에 장저를 때려 박았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진가충의 차원 코일이 빠개져 나갔다.

“어으억?!”

괴상한 외침과 함께 진가충의 몸이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쪼그라들었다. 근육질이던 사지는 말라비틀어져 나뭇가지처럼 변했다. 사지라고는 해도 팔 두 개와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가 왼쪽 다리 하나만 남긴 했지만 말이다. 평소에도 신체 강화 능력을 이용해 근육질인 척 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진가충은 온몸을 꿈틀거리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차원 코일을 파괴당해 모든 능력을 잃은 탓에 더 이상 고통을 스킬로 무마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킬의 힘으로 지혈해뒀을 터였던 상처 부위에서 피가 후드득거리는 소릴 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대로 그냥 둬도 진가충은 출혈로 인해 쇼크사할 것이다.

하지만 김인수는 그를 그냥 놔둘 생각이 별로 없었다. 트롤 고문관의 반지가 빛을 발했고, 진가충의 팔다리가 도로 붙었다.

“어, 어?!”

진가충은 놀라 자신의 몸을 둘러보았다.

“옷을 입어라, 진가충.”

김인수는 말했다.

“바깥으로 나갈 거다.”

“뭐?”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진가충의 어깻죽지가 날아갔다.

“끄아아아악!”

진가충의 입에서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난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아.”

“크후욱, 후욱, 흐윽, 흑…….”

눈물이 진가충의 뺨을 타고 흘렀다. 상처는 트롤 고문관의 반지에 의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고통은 여전히 신경을 자극하고 상처가 아문 자리는 벌레에 물리기라도 한 듯 가려울 것이다.

이윽고 진가충은 순순히 옷을 입었다. 신체 강화 능력을 잃은 탓에 지금의 몸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 비틀거렸지만, 아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따라와라.”

“어디로 갈 거지?”

“너한테는 질문할 권리가 없어. 목이 잘려 나가는 느낌을 산 채로 확인하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따라 나와.”

진가충은 자신에게는 스스로 죽을 권리조차 없다는 걸 이해한 듯,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

분노 다음에 찾아온 것은 공포였다.

‘지금 덤비면 내가 죽어,’

진현우는 생각했다. 진현우는 박기범이 자신을 죽일 때 보인 힘 또한 기억해 냈다. 아직 진현우는 박기범에게 도저히 대적할 수 없었다. 굳이 냉정을 되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심장이 터져 나가는 고통을 기억해 내면 저절로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더 강해져야 해.’

그것이 진현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이제까지는 진현우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다른 어보미네이션들을 사냥하고 다녔다면, 이제부터는 목적을 달리 해야 할 것 같았다.

더 강해지기 위해 사냥하고 포식한다. 다행히 진현우가 아무리 오리지널 진현우에 가까워진다 한들 그 존재의 본질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인간형 어보미네이션. 먹을수록 강해진다.

물론 이성 따위는 갖추지 않은 평범한 어보미네이션과 달리, 인간을 잡아먹는 것에는 저항감이 있다. 그래서 지천에 널려 있는 인간들은 건드리지 않고, 굳이 어보미네이션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인간 전문가들이 쓰고 있는 장비보다 더욱 민감하고 효과적인 진현우의 후각이 보다 빨리 어보미네이션의 발생을 탐지할 수 있기에 가능한 것이긴 했지만,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역시 빨리 강해지기 위해서는 인간을 먹어야 하나.’

본능적인 저항감이 있긴 했지만, 그건 평시의 도덕률일 뿐이다.

국가는 국민으로 이뤄진다. 더 많은 인간을 지닌 국가가 일반적으로는 더 강하다. 양과 질의 문제가 개입되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국가는 부강해지기 위해 더 많은 인구를 필요로 하고 그렇기에 법과 도덕으로 살인과 식인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진현우 또한 지금까지는 그런 도덕률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른 목적’이 생긴 이상, 그럴 필요가 있을까?

‘아, 도덕률은 벗어던진다고 해도, 법률이 남아 있지.’

인간들은 살인을 최악의 범죄로 친다. 그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면, 이번에는 그가 사냥당하고 말 것이다. 법으로 인해 심판 받게 될 터였다. 어쨌든 경찰과 군대를 적으로 돌리는 건 성가셨다. 그의 목적은 박기범을 죽이는 것뿐이다. 쓸데없이 적을 늘려서 좋을 건 없었다.

‘아니, 아니지.’

그러나 곧 진현우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사람을 죽여서 먹어도, 집안에서 무마해 줄 거야.’

그런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미 진현우는, 물론 엄밀히 따지면 그가 한 짓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적이 몇 번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거라면 역시 김인규와 그 가족들을 몰살시킨 거였다. 그렇게 하고도 그에게는 아무런 페널티가 돌아오지 않았다. 집안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좋아.’

진현우는 결정을 내렸다.

“사람을 먹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생각에 빠져 있느라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TV의 화면도 그제야 좀 보였다. TV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다.

“응? 지금이 뉴스를 하는 시간이 아닌데.”

애초에 진현우는 뉴스를 잘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채널을 돌릴까 하다가, 왼쪽 상단의 ‘긴급 뉴스’라는 글자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북한이 쳐들어오기라도 했나?”

자기 생각이 웃겨서 픽픽 대던 진현우의 얼굴은 곧 굳었다. TV 화면에서 나오고 있는 얼굴은 그의 눈에도 꽤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박기범과… 그의 아버지인 진가충이었다.

인상이 너무 바뀌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박기범이 그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사람은 분명 진가충이었다. 진현우가 아는 진가충은 근육질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비쩍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그 얼굴은 오히려 나이보다 늙어보였다.

아버지가 며칠 사이에 저렇게 늙으셨나, 하고 속 편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박기범, 저 새끼가 왜……!”

이를 득득 갈면서도, 그는 홀린 듯 TV 화면을 바라보았다.

*

진가충을 그냥 죽여 봤자 WF와 진씨 일가는 그를 대신할 다른 살아 있는 인형을 만들어낼 것일 터였다. 그러므로 진가충을 진짜로 죽이기 위해서는 그를 공개적으로 말살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김인수가 진가충을 보자마자 죽이지 않은 이유였다.

“흠, 아직까지는 함정인 것 같지는 않군.”

김인수는 픽 웃었다. 지금 그가 서 있는 장소는 TA 한국 지사 건물 옥상이었다.

김인수는 지금 박기범의 모습으로 칼을 빼들고 있었다. 그 칼은 진가충의 목에 겨누어져 있었고, 진가충 본인은 모든 걸 다 포기한 눈빛으로 김인수 옆에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둘러싸고 카메라와 취재진들이 주르륵 서 있었다.

유곽희는 약속한 대로 김인수, 정확히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요청했던 것들을 준비해 주었다. 경찰과 군대, 그리고 WF의 병력이 배제될 만한 장소에 정보 관제가 없는 생방송 카메라를 갖다 달라고 했더니 유곽희는 장소를 TA 한국 지사로 지정해 왔다.

유곽희의 입장에서는 이 자리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 대신 박기범이 서 있는 게 이상하게 여겨질 터였지만, 그녀의 입장 따위는 김인수가 알 바가 아니었다.

“준비 다 끝났습니까?”

인질극을 벌이는 범인 주제에 취재진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게 좀 웃기긴 했지만, 어쨌든 카메라 쪽에서도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생방송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연극을 시작할 시간이다.

“제 이름은 박기범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친구를 제 손으로 죽였습니다.”

김인수는 박기범의 목소리로 말했다. 정체불명의 젊은 남자가 WFF의 사장을 인질로 잡았다는 말만 듣고 온 취재진들이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저는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왜냐하면 법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김인수는 겨누고 있던 칼의 끝으로 진가충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남자처럼요.”

진가충이 히익, 하고 숨을 삼켰다.

“저는 이 남자의 아들이 명령했기 때문에 제 친구를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심판받지 못하도록 하고서 제게 은혜를 입히는 것처럼 잘난 척했죠……. 화가 난 저는 이 남자의 아들을 주먹으로 때렸고, 그러자 이 남자는 제 부모를 납치한 후 죽였습니다.”

김인수의 말은 진실이었다. 진현우를 되살리기 위해 활용된 제물 중에는 박기범의 부모도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진현우 부활 프로젝트의 책임자는 진가충이었다.

“이 남자는 제 부모를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이 남자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습니다. 언론은 또 어떻습니까? 이 남자가 재판을 받았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남자가 제 부모를 죽였다는 뉴스는요? 없을 겁니다!”

물론 김인수는 박기범의 부모가 죽든, 어쩌든 별 관계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격분할 연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냥 격분하면 되니까. 김인수에게는 화를 낼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유곽희의 말에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여기까지 온 주제에, 그의 가족의 죽음은 외면한 매스컴에게! 돈과 권력 아래 정의를 버리고 배를 드러내 보이며 복종한 이 나라의 행정기관과 사법기관에!!

“제가 정의는 아닙니다. 제가 선량하기만 한 피해자는 아닙니다. 저 또한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재판받고 누군가는 재판받지 않는, 실질적으로는 계급 사회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는…….”

김인수는 칼을 든 손을 치켜 올렸다. 칼날이 시퍼렇게 빛났다. 꺄악, 하고 기자들 중 누군가가 짧은 비명을 올렸다.

“다른 누군가가 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멈춰!!”

퍼억!

김인수는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진가충의 머리가 지면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그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끔찍한 광경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카메라맨은 카메라를 급히 돌렸다.

“멈추라고 했을 텐데! 박기범, 널 살인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권총의 총구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생각보다 시간을 좀 끈 모양이었다. 경찰들이 기어 올라와 있었다.

“후.”

김인수는 짧게 웃었다. 그를 고무탄 따위로 멈출 수는 없었다. 경찰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설령 실탄이 든 권총이라 한들, 어벤저들이 벌이는 범죄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법과 현실은 항상 괴리되어 있게 마련이다. 떨리는 총구를 보라. 저들은 김인수가 칼을 휘두르면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총을 겨눌 수 있기에 저들은 용감한 경찰들이라 평할 만했다.

그럼에도 김인수는 구역질을 참을 수 없었다. 그의 가족들이 하나씩 죽어나갈 때는 단 한 명의 용감한 경찰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나타났다. 왜일까? 아니, ‘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악은 항상 배후에 도사리는 법이다.

김인수는 경찰들에게 등을 내보인 채 뚜벅뚜벅 걸었다. 추락 방지 펜스를 훌쩍 뛰어넘자 가장 앞에 선 경찰이 무슨 생각인지 외쳤다.

“그만둬! 포기하지 마!!”

“뭘?”

“…정의를……!”

“하.”

너무나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아도취도 유분수지, 그게 할 말인가. 김인수는 대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냥 앞으로 한 걸음 걸었다. 그의 몸이 허공에 내던져졌다. 지면이 그를 사랑해 마지않듯 끌어당겼다.

퍼억.

지면에는 토마토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아니면 빨간 페인트를 담은 물 풍선이 터진 것 같은 자국이 남았다.

그렇게 박기범은 자살했다.

김인수가 그렇게 위장했다.

*

2시간 후, 조상평의 은신처.

“깜짝 놀랐습니다.”

유곽희가 처음 입 밖에 내놓은 감상이란 그것이었다.

“마음에 안 들었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철가면을 쓴 채로 김인수는 유곽희에게 물었다.

“사실… 박기범은 그런 식으로 포장될 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니까요.”

박기범에 대해서도 유곽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야 유곽희는 박기범과 동급생이었다. 김인규나 진현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렇군. 내 연극이 네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면 그건 유감스럽군.”

김인수의 입장에서 박기범에 대한 평은 유곽희의 의견과 대동소이했다. 박기범이라는 인간이 심판관이 될 자격은 없다. 진현우도 말했듯이, 박기범은 그저 자신에게 쥐여진 권력을 즐길 뿐인 인간이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미 죽은 사람이고, …이번 일을 저지르기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 박기범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냥 공개적으로 진가충을 처형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유곽희 본인이 해도 되었다. 그러나 유곽희가 WF 내에서 입지를 발휘할 수 있는 건 유연학의 딸이기만 해서인 건 아니었고, 진가충의 처라는 점도 많이 작용했다.

유곽희의 목적이 진가충을 죽이는 것이라면 직접 나서도 상관없지만, 그녀의 목적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진씨 가문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다면 역시 WF 내에서의 입지를 쉽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진가충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진가충의 대외적인 역할은 WFF의 사장이지만, 막후에서는 언론 장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 역할을 악용해서 아이돌 연습생들을 희롱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꽤 유능한 편이었으므로 ‘진씨 가문을 무너뜨린다’는 유곽희의 목적에는 꽤 큰 장벽이었다.

진남을 이용해 단기간 동안 빈틈을 만들 수는 있었지만, 오래 끌 수 있을 거라고는 유곽희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결국 유곽희는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진가충을 공개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여기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나서게 된 것이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입장에서는 사실 손해 보는 장사였지만, 김인수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진씨일가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그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니만큼, 그는 흔쾌히 유곽희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박기범의 얼굴과 목소리로 거사가 이뤄진 것은 유곽희의 계획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대외적으로 질서를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는 이미지 포장을 위해 김인수가 독단적으로 행한 것이다.

이걸 위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자신의 외형과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정보 또한 유곽희에게 보여준 셈이 되지만, 까 보이는 것이 별로 아까운 카드는 아니었다.

“아, 그렇지. 선물을 하나 가져왔어.”

김인수는 지금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는 차원 금고에서 가짜 진남을 꺼냈다. 이제껏 차원 금고에서 얼어붙어 있던 그녀는 알몸인 상태였다. 금고에서 천 쪼가리를 하나 꺼내 그녀에게 던져주며, 김인수는 유곽희에게 말했다.

“진가충과 함께 있더군. 처분은 네게 맡기지.”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일단 천 쪼가리로 몸부터 가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가짜 진남은 처분이라는 단어에 움찔 굳어버렸다.

“알겠습니다, 아가임.”

“예.”

유곽희의 옆에 시립해 있던 아가임은 가짜 진남을 데리고 방 밖에 나갔다.

“얼굴이 너와는 별로 닮지 않았더군. 저 얼굴로 네 딸 역할을 수행한 건가?”

“진가충의 취향에 맞춘 거니까요. 제 딸 역할은, 뭐… 부차적인 거였고요.”

김인수의 물음에 유곽희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실존 모델이라도 있는 건가?”

“네. 이지희라고, 안 팔리는 아이돌이 하나 있죠. 뭐, 그 아이가 안 팔린 건 진가충이 배후에서 사주했기 때문이지만요.”

역시 그랬던 거로군,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저 아이를 아예 이지희란 여자와 닮게 만들었을 정도면, 진가충이 꽤 오래전부터 그 이지희에게 집착했었던 모양이로군.”

“지금의… 방금 전에 죽은 진가충은 모르고 있겠지만, 이지희는 진가충에게는 형수에 해당하는 여자의 조카딸이에요. 진가충은 그 여자한테 꽤 심취해 있었죠.”

“흠, 형수에게 말인가.”

“네. 뭐… 그리 드문 일은 아니죠.”

유곽희는 망설이듯 잠깐 입술을 오므렸다가, 그냥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여자는 죽었어요. 꽤 오래전 이야기지요.”

“그렇군.”

“살해당했어요.”

김인수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유곽희에게 돌렸다. 철가면 아래라 눈동자의 움직임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기척 정도는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진가염에게요.”

어쨌든 유곽희는 태연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가장된 태연함이었다. 그녀의 새끼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김인수에게는 보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가염이 어떤 존재인지, 어느 정도는 드러내어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 이야기를 왜 내게 하지? 나더러 진가염도 죽이라는 건가?”

김인수는 속내를 숨긴 채 말했다.

“난 정의의 사도가 아니야. 질서의 검이지. 악을 저지른 자를 처벌하는 건 물론 좋은 일이지.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야.”

“알고 있어요.”

유곽희는 대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정의감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질서의 검으로서의 당신에게도 그를 죽여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고도 남아요.”

“그게 뭐지?”

“차원 균열을 열라고 지시한 것이 그이기 때문이죠.”

“진가충을 죽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같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김인수는 유곽희를 비웃으며 말했다.

“날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거든 말장난은 피하는 게 좋을 거야. 넌 이미 네 목적에 대해 내게 밝혔다는 걸 잊지 마.”

“…알겠습니다.”

다소 험악해진 분위기가 된 방 안으로 아가임이 다소 당혹해하며 들어왔다.

“진남은 어떻게 했어?”

“재워두었습니다.”

유곽희의 질문에 답하며, 아가임은 김인수의 눈치를 보았다.

“아, 그렇지. 준비해 둔 선물은 하나 더 있어.”

김인수는 아가임의 시선을 받으며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차원 금고에서 뭔가 하나를 더 꺼냈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김인수가 꺼낸 것… 사람을 본 유곽희는 경악했다.

“진현우!”

“유곽희?! 네가 왜 여기에……. 아니, 그보다 여기는 어디야?”

진현우가 외쳤다.

“알 필요 없다.”

김인수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진현우가 그 자리에 움찔하더니 그대로 굳어버렸다.

“왜…….”

“이유는 이 녀석에게 듣도록 하지.”

유곽희의 말을 끊어버리고, 김인수는 진현우의 등을 툭 쳤다.

“너 왜 왔냐?”

“당신, 께서 데려오신 것 아닙니까?”

말투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진현우는 김인수에게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정확히는 철가면을 쓴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존대한 것이지만 그거야 뭐, 아무렴 어떤가.

“여기에 왜 왔냐고 묻는 게 아니야. 거기에 왜 왔냐고 묻는 거다.”

대명사로 점철된 질문이었지만 진현우는 알아들은 듯했다.

하기야 이쪽에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하는 게 지금 진현우의 입장이었다.

못 본 사이 사람 모양의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린 진현우는 상대의 차원력에 대단히 민감했고, 철가면의 불청객인 김인수는 아낌없이 차원력을 내뿜고 있었다. 야수의 본능 때문에라도 진현우는 자신보다 틀림없이 강한 김인수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게 공손해져 있었다.

“저는 절 죽인 놈… 박기범이 TV에 나오기에 찾아왔습니다.”

김인수가 박기범의 최후를 투신자살로 위장하고 난 후, ‘이’ 진현우가 TA 한국 지사까지 찾아와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김인수는 그를 덥석 잡아서 바로 차원 금고에다 넣어서 여기까지 가져왔다. 진현우의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고 납치당한 셈이었다. 그러므로 진현우가 왜 거기서 얼쩡거리고 있었는지는 김인수도 지금 처음 듣는 거였다.

“호오, 박기범이 널 죽였느냐?”

“예…….”

“그런데 넌 지금 살아 있지 않느냐?”

“전 한 번 죽었습니다. 지금은…….”

“거짓말이로군.”

진현우의 얼굴이 긴장으로 팍 굳어졌다. ‘진짜 진현우’는 분노에 가득 찬 김인수를 눈앞에 두고도 이빨을 털기에 바빴는데, 지금과는 영 다른 게 재미있었다.

“넌 진현우가 아니야. 어보미네이션이지.”

“전 진현우입니다!”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진현우는 외쳤다.

“계약할 때 진현우가 되게 해달라고 했나 보지? 그런다고 네가 진현우가 되는 건 아니야. 진현우의 존재는 계약의 대가로 이미 소멸했고, 넌 그냥 진현우와 매우 닮은 어보미네이션일 뿐이다. WF의 발전소에 데려가면 아주 잘 타겠군그래.”

진현우의 표정은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술을 떼지 못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러나 김인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몇 명 잡아먹었냐.”

“예?”

“지금까지 몇 명 잡아먹어서 거기까지 인간에 가까워질 수 있는 거냐고 물었다. 이 괴물아.”

“전 아직 사람을 먹지는 않았습니다……!”

진현우는 억울한 듯 말했다.

“호오, 아직? 그럼 앞으로는 먹을 생각이 있다는 거로군?”

“……!”

이어지는 김인수의 흥미로워 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진현우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닙니다, 라고 말해라.”

“아, 아닙…….”

“거짓말 하면 뒤진다.”

“……!”

“하, 이 새끼, 진짜로 사람을 먹으려고 했군?”

김인수는 혀를 쯧쯧 찼다. 이 존재가 진현우가 아닌 건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심은 이 존재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전혀 누그러지지가 않았다. 그냥 죽이고 싶다. 그런 생각이 김인수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얜 내 선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인수는 유곽희에게 말했다.

“네게 주마. 멋대로 처분해.”

“감사합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유곽희는 정중하게 김인수에게 고개를 한 번 숙여보였다. 그리고 손날을 휙 휘둘렀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진현우의 머리가 방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내 선물을 너무 막 다루는군.”

김인수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진현우의 머리를 집어다가 그 목 위에 얹었다. 그러자 진현우는 부활했다.

“헉! 컥……!”

되살아난 진현우는 방금 전에 느낀 죽음에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다.

“정말로 어보미네이션이로군요.”

유곽희가 놀라며 말했다. 어보미네이션의 목숨은 셋이니, 한 번쯤은 죽여도 되살아난다. 정식으로 어벤저가 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유곽희도 어보미네이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갖추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했잖아. 설마 내 말을 못 믿어서 시험 삼아 죽여본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에요. 지금은 그냥 죽이고 싶어서 죽인 것뿐이에요.”

김인수의 질문에 대답하면서도, 유곽희는 여전히 넘실거리는 살기를 감추려고 들지 않았다.

“유곽… 희!”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마, 얼간이 도련님.”

유곽희는 냉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유곽희의 목소리에, 진현우는 다소 기세가 죽은 듯 시선을 피했다.

“너… 뭐야? 아버지를 죽였다고?”

“언제적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유곽희는 진현우를 비웃었다.

“너 때문에 진남이 끌려갔어!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제물로……!”

“그게 내 탓이라는 거야? 네가 진남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잖아!”

“그, 그건……. 난 진남보다 네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이 병신이!”

짜악! 유곽희가 진현우의 따귀를 후려쳤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진현우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진현우의 입술이 찢어지면서 부러진 이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래도 애 아빠라고 애를 맡겼더니만, 팔아치워?”

“애 아빠라고?!”

“그래, 진남은 네가 날 강간해서 낳은 자식이잖아! 이 병신, 병신 새끼가!”

쓰러진 진현우의 가슴을 유곽희는 발로 퍽퍽 밟았다. 그녀가 신은 힐 때문에 진현우의 가슴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나, 난……! 몰랐어!! 그냥 너와 아버지 자식이라고만……!!”

진현우를 피를 토하며 말했다.

“너 같은 새끼, 살아 있을 이유가 없어.”

유곽희는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진현우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그걸 땅에 내팽개치며 유곽희는 말했다.

“자결해라.”

“큭… 크흑……!”

진현우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 눈물의 원인은 고통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비수를 주워들었다.

“나는… 그래도 나는 널 사랑했어!”

그게 유언이기라도 한 양, 진현우는 그대로 지체 없이 자신의 목을 찔렀다. 비수가 그의 목에 파고들어 구멍을 내었고, 피가 팍 솟았다. 그럼에도 진현우는 바로 죽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고통 속에 뒹굴었다. 어보미네이션의 생명력이 그를 연명시키고 있었다.

“그래서 넌 김인규를 죽였지?”

진현우의 목에 꽂힌 비수의 손잡이를 붙잡으며, 유곽희는 말했다.

“줄곧 네게 이 말을 꼭 한번 해주고 싶었어. 현우야…….”

유곽희는 한숨을 한 번 푹 내쉰 후, 말했다.

“뒈져.”

유곽희가 비수를 잡고 오른쪽으로 힘차게 비틀자, 진현우의 목이 끊어져 나갔다. 그는 그대로 절명했다.

“그거 곧 되살아날 거야.”

김인수는 지적했다.

“아, 그렇군요. 이번이 마지막이로군요.”

오른손에는 비수, 왼손에는 진현우의 머리통을 든 채, 유곽희는 화사하게 웃었다.

“한 번 더 죽일 수 있겠군요.”

*

되살아난 진현우는 저항했다. 죽음의 고통을 한 번 더 느끼기는 싫었든지, 마지막 목숨은 역시 아까웠는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사랑한다던 말은 거짓이기라도 했듯, 손톱과 발톱, 이빨을 유곽희를 향해 상처 입은 야수처럼 죽일 듯이 휘둘러대었다.

저항하는 진현우는 아가임이 손쉽게 제압했다. 유곽희는 제압당한 진현우를 난자했다. 온몸의 힘줄을 다 끊어낸 후에나 아가임은 진현우를 놓아주었고, 유곽희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진현우의 목을 잘라 끝냈다.

그 시종일관을 지켜본 김인수는 한 줄 평을 남겼다.

“마음에 드는군.”

김인수는 굴러다니는 진현우의 머리를 툭 차서 시체의 목 부분에 얹었지만, 더 이상 진현우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세 개의 목숨을 다 잃으면 어보미네이션도 죽는다. 진현우도 그 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직접 ‘진짜’ 진현우를 죽일 수 없었던 건 역시 마음에 좀 남네요. 줄곧 죽이고 싶었는데…….”

진현우의 마지막 숨통을 끊은 후, 유곽희는 말했다.

“뭐, 그래도 가짜라도 이런 식으로라도 죽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선물 감사합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물론 ‘진짜’ 진현우를 죽인 건 김인수다. 그 건에 대해서 유곽희에게 미안하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혼자서 멋대로 김인규에게 반하고, 인규가 죽은 후 멋대로 복수를 결심한 유곽희는 기특하기는 하지만 복수를 양보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복수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친족인 김인수에게 우선권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직 자신이 김인수라는 걸 밝힐 생각이 없는 그는 그런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게 짤막하게 대꾸했을 뿐이었다.

“제 이런 행위를 마음에 든다고 표현하셨죠? 왜죠?”

유곽희는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보미네이션은 차원 너머의 존재다. 이 차원에 있어봐야 질서를 해칠 뿐이지. 처치하는 것이 맞다. 넌 옳은 일을 했어.”

김인수는 태연히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말했다.

“너는 차원 질서에 공헌했다. 그게 마음에 든다고 말한 거다.”

“그렇군요.”

유곽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맘에 들든, 안 들든 그런 건 별로 상관은 없어. 진남과 진현우는 그냥 내가 멋대로 준 선물이니 그에 대한 대가는 받지 않도록 하지. 하지만 진가충과 진가염에 대해서는 대가를 치러줘야겠어.”

“진가염… 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유곽희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진가충을 대신 죽여주는 대가로 넌 차원 균열을 하나 닫아주기로 했지. 뭐, 닫는 건 네가 아니라 저 남자였겠지만……. 진가염을 추가한 이상 조건을 더 달아야겠어.”

김인수는 되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말하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이 거래는 거의 일방적으로 김인수만 이득인 거래였기 때문이었다.

“차원 균열은 닫을 필요 없어. 그거야 내가 닫으면 되니까. 내가 훨씬 쉽고 간단하게 닫을 수 있으니 너희한테 맡기는 것보다야 효율이 좋지. 대신 너흰 내가 못 하는 걸 해줘야겠어.”

“그게 뭐죠?”

“언론이다. 정보 관제를 풀어줘야겠어.”

그냥 진가충을 죽여 없앴다고 정보 관제가 완전히 풀린 건 아니다. 진가충이 각 언론사에 먹여놓은 돈은 아직도 구실을 하고 있었으니까. 더욱이 진가충의 존재가 없어졌다 한들, 언론이 어떤 방향으로 구를지는 예상이 가능했다.

돈이 되는 쪽으로, 자극적인 쪽으로 굴러갈 터였다.

뇌물을 먹여 회유한다는 건 돈만 갖고 되는 건 아니다. 그 뇌물을 준 사실 자체를 족쇄로 만들어 약점으로 잡을 수 없으면 그냥 준 뇌물만 먹히고 끝날 뿐이다. 그렇기에 지구에서의 기반이 아직 미약한 김인수는 언론을 휘어잡을 수 없다.

하지만 유곽희는 다르다. 그녀의 아버지인 유연학이 있으니까. 진가충이 죽어버린 이상, WFF의 사장직은 대행직에 앉아 있던 유연학이 그대로 앉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리고 그 권력은 유곽희가 그저 유연학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용이 가능했다.

진가충이 죽음으로써 공백이 생긴 정보 관제를 유곽희가 그대로 꿰어 찰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오래는 가지 않을 것이다. WF에 부정적인 소식을 흘리는 이상, 본사와 진씨 가문에서 곧 진가충의 후임을 마련할 테니까. 그러니 유곽희는 공백으로 인한 잠시 동안의 혼란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유곽희는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미 계산이 섰기 때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일 터였다.

“어떤 걸 선전하면 될까요?”

“진실을.”

김인수는 말했다.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밝혀. 계약으로 어벤저가 될 수 있다는 것도 말이야. 계약을 잘못하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도, 계약마들이 나타나는 조건에 대해서도 되도록 상세하게.”

“…사회가 혼란에 빠져들 거예요. 질서와는 거리가 있지 않을까요?”

유곽희의 되물음에 김인수는 웃었다. 어차피 철가면 아래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겠지만, 웃긴 걸 일부러 웃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내가 지키는 건 차원 질서야. 사회의 질서와는 상관없어.”

김인수의 대답을 들은 유곽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이 차원은 너무 약해. 어벤저 숫자가 절대적으로 지나치게 적어. 왜 군대가 어보미네이션과 싸우고 있나? 군대로는 차원 균열을 못 닫아. 균형이 맞질 않다고.”

초기에 차원 균열 사태에 대응했던 미군들은 꽤 열심히 한 편이다. 하지만 지금 지구인들은 더 이상 차원 균열 너머로의 침공에 관심이 없다.

“장기적으로는 이대로 그냥 두면 지구 전체가 헬필드로 휩싸일 거고, 그렇게 되면 현대 기술은 모두 쇠퇴해서 지구에는 또 다시 암흑시대가 도래할 거다.”

“그런…….”

“내 말이 과장처럼 들리나?”

“…아뇨.”

한참 동안 생각하던 유곽희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헬필드가 줄어들지 않고 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런 날이 찾아오리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리라. 누군가가 차원 균열을 닫지 않는 이상, 당연한 거였다.

“그렇게 되면 엄청난 혼돈이 도래하겠군요.”

“그래, 엄청난 혼돈이 도래하겠지. 그냥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리는 것보다 훨씬 큰 혼돈이. 그래서 그깟 사회 질서보다 차원 질서가 중요하다고 하는 거야. 거시적으로 봐야지.”

“알겠습니다.”

유곽희는 김인수의 말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

세상은 진가충의 죽음으로 떠들썩했다.

다소 흥미롭게도 진가충이 죽자 WFF의 주가는 대폭 상승했으며, WF의 주가에도 다소 영향을 미쳤다. 적어도 투자자들은 유연학을 진가충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긴 진가충이 취임한 후에 보여준 행보를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더불어 박기범에 대한 내용도 대대적으로 다뤄졌다. 박기범의 부모가 박기범의 말대로 실종되었다는 것도 작게나마 보도가 나왔다. 하지만 그건 소수였고, 박기범은 용서할 수 없는 테러리스트이자 범죄자로 소개되었다. 이번에는 정보 관제가 들어가 있지 않았음을 감안한다면, 기본적으로는 자본의 편을 드는 언론의 속성이 잘 드러났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대중들에게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박기범이 생방송 카메라에다 대고 한 연설이 문제였다. 대통령 선거를 두 달 가량 남겨둔 시점에서 터진 ‘계급제’ 논란은 적어도 인터넷 정도는 뜨겁게 달궜다. 당연히 사람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는 높으신 분들과 일반인들의 선이 그였다.

그 와중에 박기범이 높으신 분들 중 하나의 목에다 식칼을 처박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건 김인수를 꽤 불쾌하게 만들었다.

-식칼을 들어라!

-식칼을 높으신 분들의 배때지에 처박아라!!

그것이 대중을 위험하게 달구고 있는 새로운 구호였다. 지나치게 폭력적인 구호가 아닌가 싶지만, 어디 계급투쟁이 폭력적이지 않았던 때가 있던가. 아직까지는 실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따지고 보자면 이미 박기범이 행동에 옮긴 직후인 터라 후속 사건을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한 경찰들의 조치는 인터넷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인터넷에 식칼 구호를 외치고 식칼 아이콘을 다는 트위터 유저들이 구속되기 시작했다. 대선을 앞둔 이런 때에 경찰의 과잉대응은 오히려 반감을 크게 일으켰다. 인터넷 여론은 오히려 더욱 과격해졌다.

-높으신 분들은 사람을 죽여도 괜찮고 우린 식칼만 입에 담아도 구속이냐!

이 한 문장이 계급제를 실체화시켰다. 차별은 실재한다고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 결국 트위터 사용자를 중심으로 시위 일정이 잡혔다. 이 와중에 경찰청장은 시위 참가자들을 모조리 구속하겠다는 트윗을 올리기도 해서 국제적인 비난을 듣기에 이르렀다.

이게 모두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추가로 폭탄이 떨어졌다.

인간의 어보미네이션화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TV 지상파로 방영되고 인터넷에도 무료로 공개되었다. 하루 만에 그런 게 뚝딱 만들어지냐면 물론 그럴 리는 없었다. 이미 방송사에서 제작했지만 방영이 반려되어 있던 영상물을 그냥 꺼내다 튼 것뿐이었다.

파장은 심대했다.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정말이야?”

“인터넷 괴담이 사실이었단 말이야?”

“어디 무서워서 사람 많은 데 가겠냐?”

편의점에 달걀을 사러만 가도 이런 대화가 들리기에 이르렀다.

-우리 시위를 방해하기 위한 경찰의 헛소문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런 트윗도 완전히 무색했다. 아주 오랫동안 창고 안에서 썩고 있던 다큐멘터리의 영상은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던 진실을 믿기 만들기에 충분한 내용이었다.

이제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계급투쟁보다도 나 자신의 안위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시위 같은 걸 참가하는 것보다는 집과 사무실에 틀어박히는 걸 택했다. 결국 아무도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시위는 무산되었다.

“이거면 됐어.”

김인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박기범의 행동으로 인해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일 건 예상한 바였다. 그게 백 명이든, 천 명이든 모이면 시위가 되고, 그게 폭력시위로 번질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그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2020년대의 서울은 어벤저가 존재한다. 그 폭력 시위에 어벤저가 가담한다고 가정하면, 반대쪽에서도 어벤저가 나올 것이 뻔했다. 판은 점점 커질 것이고, 내전으로까지 번질 가능성마저 있었다.

그리고 승리자는 지금 시점에서는 보나마나 더 많은 어벤저를 보유한 국가와 기업 측이 될 터였다. 어벤저 간의 폭력 사태로 번진 이상 시위라는 말은 통하지 않을 것이고, 국가의 무력 제압은 정당화될 것이다.

그 끝이 별로 좋지는 않으리라는 건 김인수 입장에서는 확신에 가까웠다.

그나마 이 나라에서는 아직까지는 민주주의가 통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이 민중에게는 더 나았다. ‘적’들이 최소한도의 약속마저 어기려고 할 때, 주먹을 쥐고 일어나도 늦지 않을 터였다.

“아니, 그냥 나 때문에 피가 흐르면 기분 나쁘니까.”

김인수는 픽 웃으면서 그런 혼잣말을 했다.

어쨌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시위로 인해 발산되지 않은 불쾌감은 남은 채일 것이다. 그걸 사람들이 어떻게 토해내느냐는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이다.

*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들 극단적으로 외출을 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파장이 있었는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한국 정부에게 항의를 한 모양이더군.”

“그런 다큐멘터리를 왜 틀었냐고요? 뭐, 그럴 만도 하죠.”

“미국은 어때?”

“침묵한 채예요.”

“뭐, 정의의 국가니 뭐니 평소부터 떠들고 있었으니 이런 걸로 항의하긴 힘들겠지.”

각국에선 한국에 외교적인 제스처를 취하긴 했지만, 어제 공개된 다큐멘터리로 인한 세계적인 파장은 사실 그리 크지는 않았다.

차원 균열 관련 기술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선진국인 한국이지만,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 WF지 코리아가 아니었다. 그것도 언론 수준이 OECD 기준으로 밑바닥에서 세는 게 더 빠른 2020년대의 한국 언론에서 떠드는 기사를 일일이 번역해서 커뮤니티에 돌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사는 이런 식으로 나왔다.

[한국, 자국 내 혼란을 막기 위해 페이크 다큐멘터리 제작, 방영]

이런 기사 제목이 월드 토픽으로 떠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정도였다.

그 예의 다큐멘터리의 영상이 가지는 설득력은 충분했지만, 외국인들에게 있어서도 이건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한국어 나레이션은 번역이나 통역되지 않았으며, 애초에 처음부터 페이크 다큐멘터리라는 인식을 가지고 봤으니 리얼하다며 박수 치고 웃고 끝났다.

아니, 그 다큐멘터리를 일부러 찾아서 보는 사람 자체가 드물었다. 인터넷에 공개되었다고는 하지만, 한국 한정 공개 영상이었고 외국에서 보려면 우회가 필요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랬던 건 아니다. 각국의 어벤저 네트워크는 시끌시끌했다. 음모론을 다루는 소형 커뮤니티도 간만에 불길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게 대다수는 아니었고, 그렇기에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거나 하지는 않았다.

“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도 출근했잖아?”

“출근길도 막혔죠. 버스에 사람도 꽉꽉 찼고요.”

설령 전쟁이 난다 한들 포탄이 서울에 떨어지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호구지책을 위해 출근길에 나선다. 쓸데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줄어들었을 뿐, 사람들의 일상까지 무너지지는 않았다.

“나는… 세상이 뭔가 더 확 바뀔 줄 알았어.”

“선배가 쓴 기사 한 줄로요?”

“비웃는 거냐, 너?”

“네.”

여자는 깔깔 웃었다. 그녀의 직업은 기자다. 대화 상대인 선배 또한 기자였다. 두 사람은 신문사 빌딩 아래에서 사람 없는 광화문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만약 그 어보미네이션 다큐멘터리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저곳은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모든 게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의 기사를 몇 번이고 도중에 커트하는 편집장도, 지금은 자신의 앞에서 웃고는 있지만 자기가 뭐만 쓰면 작작하라고 화내는 이 선배도.

‘뭐, 존경이야 하지만.’

어제 이 선배가 쓴 기사는 명문이었다. 다소 선동적이기는 했지만, 설득력이 있었고 힘이 있었다. 여자는 정말로 이 기사를 읽은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올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펜으로 세상을 바꾸는 건 프랑스 혁명이 마지막이었어요, 선배.”

“엄청 오래 전으로 돌아가네. 200년 전 아냐?”

“게다가 그 펜은 거짓말을 써댔죠. 앙투아네트가 불쌍해요.”

사실은 세상을 바꾸고 싶은 건 자신인 주제에 여자는 그런 소릴 했다.

“그래, 뭐, 그렇지.”

그래서 여자는 그렇게 쉽게 인정하는 선배한테 화가 났다. 하지만 화를 내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런 그녀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한숨을 푹 내쉬고 창문에서 등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돌아가서 일이나 하자고. 후속 기사를 써야 해.”

“후속 기사요?”

“그래, ‘섹시한 여자 연예인 TOP 10’ 후속 기사. 상위권 연예인들 시술 목록을 정리하고 은근슬쩍 WF 계열 피부과를 언급해 줘야지.”

“아, 하.”

여자의 입에서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선배가 쓰려고 하는 기사는 흔히 말하는 ‘스폰’ 기사였다. 기사를 쓰는 것만으로도 돈이 들어오는 기사. 이런 게 그들이 평소에 쓰는 기사였다.

축제는 끝났다. 이게 일상이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

세상에는 이렇게 파란이 일고 있었지만, 현오준 길드는 그 사실을 몰랐다. 요 사흘간 계속 웬디의 차원 세포에 틀어박혀 훈련 중이었으니 당연했다. 전파는 물론이고 유선전화조차 안 터지는 곳이니 TV고 뭐고 바깥세상의 소식을 아예 접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승님, 오셨어요?”

“아, 사흘만이로군요. 반갑습니다.”

오연화와 현오준이 최재철의 등장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반겼다. 최재철은 바깥에서 김인수, 정확히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활동하느라 이제껏 지구에 있었다. 그건 현오준 길드의 길드원들도 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동안, 최재철은 길드원들에게 어떤 과제를 내준 상태였다.

“아, 선생님! 보세요!!”

이지희가 확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신 장비를 모두 마련했어요!!”

이지희는 원래 갖고 있던 단검에 흉갑, 바지, 부츠, 장갑을 추가로 웬디로부터 구매했다. 물론 그 대가는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다.

최재철이 현오준 팀에게 요 사흘간 내린 훈련 내용이 바로 이것이었다. 웬디로부터 퀘스트를 받아서 장비 일체를 직접 마련할 것. 그리고 이지희는 최재철이 내준 과제를 모두 완수해내서 그런 건지 표정이 밝았다.

“그래, 잘 했다.”

“벌써 사흘이 지났었다니……. 먼저 다 한 사람들이 좀 도와줬으면 저도 됐을 텐데!”

구문효가 툴툴거렸다. 하는 말을 들어보니 그는 과제를 달성하는 데 실패한 모양이었다.

“선생님이 그러지 말라고 했었잖아, 사제.”

오연화가 키득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녀도 지정한 모든 장비를 구매하는 데 성공해서 다 장비하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구문효에게 하는 언행이 꽤나 격의 없어진 걸 보니 차원 세포에서의 공동생활 중 그럭저럭 친해지긴 한 모양이었다.

“과제 난이도 자체는 네가 제일 높았는데, 잘 해낸 것 같구나. 잘 했다, 연화야.”

“네, 헤헤.”

최재철의 칭찬에 오연화는 쑥스러워진 건지 뒷머리를 긁으며 웃었다.

“그래도 구문효 씨는 세 파트의 구입에 성공하셨잖습니까. 앞으로 한 파트만 더 구입하시면 됩니다. 그에 비해 저는…….”

현오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구문효를 위로했다. 그러자 구문효가 발끈했다.

“길드장님은 성공하셨잖아요!”

“그야 성공했습니다만.”

현오준은 태연히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놀리기 있어요?!”

“있습니다만.”

어쨌든 현오준도 과제달성에 성공한 듯 보였다. 결국 과제 달성에 실패한 건 구문효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재철은 후, 하고 한 번 웃은 후 차원 금고에서 저장해 두었던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꺼내 땅바닥에 던졌다.

“웬디, 문효에게도 약속한 물건을 내어주도록 해. 거스름돈은 가지고.”

[감사합니다, 폐하.]

웬디는 공손히 최재철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 직후, 구문효의 눈앞에 장갑이 한 벌 나타났다. 구문효가 그걸 얼른 받아들자, 최재철은 웃어보였다.

“그걸로 과제는 해결한 셈 쳐. 그보다는 함께 과제를 해나가면서 네 사저들과 친해지는 게 네 진짜 과제였는데 그건 해결된 모양이니, 됐어.”

“그런 거였어요?”

오연화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래. 이런 건 내가 친하게 지내라고 한다고 정말로 친하게 지내지는 건 아니니까.”

“하긴 그렇죠.”

오연화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나가시죠. 너무 오래 여기서만 있으면 그것도 나름 안 좋습니다.”

최재철이 현오준에게 그렇게 제안하자, 현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

최재철은 길드원들이 차원 세포에 있었던 동안 일어난 일들을 길드원들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김인수의 이야기는 빼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야기는 전부 이야기했다. 길드원들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복수를 실패했을 때의 변수를 생각하자면 되도록 신중하게 가는 것이 나았다.

“생각보다 큰일에 휘말린 거 같군요.”

현오준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훈련 중일 때 스승님은 실전 중이었다, 이거군요.”

“아니, 그거야 전부터 그랬지.”

오연화가 한쪽 뺨을 있는 대로 부풀리며 한 말에, 최재철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뭐든지요!”

오연화가 과하게 적극적으로 대답했다.

“아까도 말한 것 같지만, 나는 유곽희에게서 진가염의 암살 임무를 떠맡았어.”

오연화의 표정이 좀 굳었다. 암살 이야기가 나오니 역시 좀 꺼려지긴 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최재철도 미성년자인 그녀에게 사람 피를 묻힐 일은 가급적 피할 생각이긴 했다.

“오해하지 마. 암살은 나 혼자 할 거야. 도움을 줬으면 하는 부분은 다른 부분이야.”

“백업인가요?”

“그렇습니다, 길드장님.”

진가충과 달리 진가염은 경호에 꽤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야 진씨 가문의 적장자이자 WF의 후계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그 동생은 그냥 내팽개쳐져 있었던 걸 생각하면 역시 좀 미묘한 기분이 든다.

“유곽희에게서 들은 정보로는 그 경호 병력은 나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만약의 일이라는 게 있지. 그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줬으면 좋겠어.”

“과연, 저희가 지난 사흘간 파밍한 아이템이 방어력 위주였던 건 그런 이유였던 거로군요!”

“파밍? 농사? 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 그래, 맞아.”

최재철의 반응에 오연화는 ‘설마 이것도 모를 줄이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를 수도 있지. 최재철은 커흠, 하고 목소리를 한 번 다듬고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어쨌든 작전 개시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 있으니 마련해 둔 장비들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좀 가지는 게 좋을 거야. 지금까지 웬디의 차원 세포에서 활용을 해왔긴 했겠지만, 지구에서 사용하는 건 또 좀 다르니까 말이야.”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그는 차원 금고를 열어 또 다른 장비들을 꺼냈다.

“이것도 포함해서.”

그것들은 철가면들이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들.

“오, 이건…….”

현오준은 감격한 듯 가면을 받아들었다.

“이걸로 저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되는 건가요? 어린 시절에 울트라 맨 가면을 산 적이 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좀 다르군요!”

“굳이 말하자면 에스파다스 도 오르덴 아닙니까?”

구문효도 얼른 가면을 받아다 쓰며 말했다. 그가 가면을 쓰자 호리호리했던 그의 체격이 갑자기 건장해졌다.

“오! 어?”

“체격 변화와 목소리 변화 기능도 있어. 그걸 쓰고 있으면 정체를 들키진 않을 거야. 뭐… 벗겨져 버리면 그걸로 끝이지만.”

사실 조금 전에 웬디에게 또 다른 어보미네이션의 시체를 먹여서 체격 변화와 목소리 변조 기능도 덧붙여 두었다. 말하자면 김인수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아티팩트인 반지 운반자의 팔찌의 열화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와, 신기하네요!”

오연화도 가면을 썼다. 그러자 그녀의 키가 쭉 커지면서 가슴도 커졌다.

“우와?! 선생님, 이런 취향이셨어요?”

거울을 보면서 커진 자신의 가슴을 만지려고 애쓰면서 오연화가 평소와는 다른 섹시한 목소리로 놀리듯 말했다.

“그거 환상이라서 안 만져져. 그리고 그 가면은 네 무의식에서 네가 원하는 체격을 불러오는 거란다, 연화야.”

“윽?!”

철가면에 가려져 있긴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온통 붉어졌을 건 최재철에게도 훤히 보였다.

“음,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쓰기 좀 부끄러운데요.”

이지희도 철가면을 조심스럽게 받아들며 말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언니! 언니도 얼른 써!!”

“그래야 되나?”

“그래야 해!”

머뭇거리면서도 이지희도 결국 가면을 썼다.

“여자들은 결국 자기 가슴이 커지길 원하는군요.”

현오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야 아이돌이라면 이것만 있어도 꽤나 벌어들일 수 있으니까요, 하하…….”

철가면 너머로 이지희의 마른 목소리가 들렸다. 이젠 딱히 아이돌이 되고 싶지도 않은 주제에. 물론 최재철은 일일이 자신의 생각을 입 밖에 내는 타입의 남자는 아니었다.

“자, 그럼 가면을 쓴 채로 훈련을 시작하자.”

*

훈련 내용은 최재철 대 현오준, 오연화, 구문효, 이지희, 4 대 1의 대련이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밀린 4명이었지만, 각자의 아티팩트 활용에 익숙해지고 서로간의 스킬 연계에도 조밀해지기 시작하면서 점차 대등해지기 시작했다.

훈련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결국 마지막까지 최재철을 제압하지는 못했지만, 이로써 이제 이 4명은 합쳐놓으면 김인수 한 명 정도의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이런 팀이 WF에도 존재한다면? 이 걱정이 그동안 김인수가 대놓고 WF에 쳐들어가지 못한 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최재철과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암약한 이유였다.

일단 유곽희의 정보로는 WF에 현오준 길드 정도의 실력과 팀웍을 갖춘 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유곽희라고 WF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WF에게 있어서 외부인이니까.

그렇게 만약의 만약까지 대비한 결과물이 바로 아티팩트까지 장비한 현오준 길드였다. 욕심을 부리자면 더 철저하게 대비를 하고 싶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욕심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전력을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비한 셈이다.

‘더군다나 원래는 이 정도 전력도 필요 없으니까.’

유곽희와 약속한 시각은 오늘 저녁 시간쯤이었다. 진가염은 유곽희와 만날 것이고, 그 장소를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덮치는 형태가 된다. 두 사람의 만남은 비밀 회합에 가까운지라 WF에서도 이 회합에 대해 아는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고 유곽희는 말했다.

“그런데 만나서 뭘 하는 거야?”

“아마도 이번 일에 대한 문책을 받게 되겠죠.”

유곽희는 태연스레 대답했다.

“늦게 오시면 저 죽어 있을지도 몰라요.”

유곽희야 죽건 말건 김인수와는 크게 상관이 없지만, 진가염을 암살할 기회를 놓치는 건 아쉬웠다. 이번에 진가염을 암살해도 WF에서 다시 되살릴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은거해버린 진가규 대신 WF 그룹 전체를 이끌고 있는 진가염을 잠시라도 무대에서 퇴장시킬 수 있다면 김인수 입장에서는 WF에게 큰 타격을 입힐 꽤 괜찮은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가염을 죽인다는 행위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

진가규나 진현우와는 달리 진가염은 김인수의 가족들과 직접적인 악연은 없지만, 김인수는 모든 진씨 일가를 복수의 대상으로 설정했다. 그러므로 진가염을 죽인다는 것 자체가 김인수의 궁극적인 행동 원리인 복수에 포함되어 있다.

“자, 그럼 죽이러 갈까.”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가면을 썼다. 그가 움직인 시각은 예정된 시각과 딱 맞아떨어져 있었다. 현오준 길드의 길드원들은 차원 금고 속에 대기시킨 상태다. 모든 게 완벽했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

WF 소유의 고급 호텔 최상층 스위트 룸. 그곳이 약속 장소로 지정된 곳이었다. 물론 호텔에는 기본적으로 경비원이 있고 대기하는 가드맨들도 있지만, 그들이 어벤저가 아닌 이상 침입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존재감을 숨기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엘리베이터를 탈까, 계단을 오를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냥 엘리베이터에 탑승하기로 했다. 마침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다. 엘리베이터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물론 CCTV는 그의 모습을 비추지 못한다. 별 의미는 없었다.

목적한 최상층에 도달했다. 스위트룸은 최상층 전부였고, 그 문 앞을 두 명의 A급 어벤저가 지키고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는데 그 안에 아무도 없자 그들은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김인수가 자신의 아티팩트인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이용해 존재감을 숨긴 모습을 간파하지 못한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 둘은 김인수의 상대가 아니다. 김인수는 별 고민도 하지 않고 염동력으로 두 사람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려 그대로 경동맥을 압박해 실신시켰다.

그 직후, 그는 진홍왕의 유물에 차원력을 밀어 넣었다. 아티팩트가 효과를 발휘했다.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저 스위트 룸 안에 있었던 이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문은 잠겨 있었다. 어차피 선전포고는 진홍왕의 유물로 이미 한 터였다. 잠입할 생각은 이미 버렸다. 김인수는 바로 문을 박살 내었다.

호텔 방의 그리 넓지는 않은 현관에서 네 명의 어벤저가 김인수를 향해 뛰어왔다. 그들도 김인수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행동은 조금 더 나았다. 그들은 즉시 총을 빼들고 발사했다.

탕탕탕탕! 상대가 투명 능력자인 걸 간파하고 바로 사격에 나선 건 칭찬해 줄 만한 판단력이었다. 그게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행위였다는 것이 조금 아쉬울 정도로.

윽, 억, 악, 컥. 네 사람의 단말마와도 같은 외침이 스위트룸의 현관을 장식했다. 김인수가 염동력을 이용해 총알을 반사했기 때문이다. 그를 향해 날아왔던 총알들은 그대로 쏜 자들을 향해 되돌려졌다.

물론 A급이나 되는 이상, 총 좀 맞았다고 죽지는 않을 터였다. 경호원씩이나 하고 있다면 신체 강화 능력 정도는 갖추고 있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네 사람은 곧 자세를 다잡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총을 맞으면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군. 맞아본 적이 없어서.”

김인수는 짧게 웃으며 말했다. 휘리리릭하고 공기를 휘감으며 네 발의 총알이 다시 네 사람의 상처 부위에서 빠져나왔다.

“원스 모어?”

김인수는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놀라서 벽 뒤로 도망치기 바빴다. 하지만 그 행동은 의미가 없었다. 퍽, 퍽, 퍽, 퍽!

“같은 장소에 총알을 두 번 맞는 고통도 나는 모르네.”

김인수는 말했다. 끄으윽, 하고 고통의 신음이 대꾸 대신 나왔다. 그런 그들의 뒷통수를 염동력으로 가격해 완전히 기절시킨 후, 김인수는 뚜벅뚜벅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긴 복도가 현관 너머로 이어져 있었다.

훅, 하고 바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김인수는 앞으로 뛰었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장소에 섬뜩한 칼날이 떨어져 내렸다. 그가 이제껏 봐온 A급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는 차원력으로 보아, 칼날의 주인은 S급으로 보였다.

“오, 이제 더 이상 존재감을 숨기고 있을 필요는 없겠군.”

간파 능력자가 있는 이상, 은신에다 쓸데없이 차원력을 소모할 이유가 없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암습자는 눈을 크게 떴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게 나의 이름일세.”

쾅! 암습자는 벽에 처박혔다.

“조금은 기대했는데 이 정도 염동력에도 저항하지 못하는가.”

김인수는 실망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그대로 염동력을 더 강하게 주어 암습자의 몸으로 벽을 부수었다. 벽 너머에는 그가 목표로 하고 있던 인간과 그와 약속했던 인물이 있었다.

유곽희의 목을 힘껏 양손으로 조르고 있던 진가염은 쯧, 하고 한 번 혀를 차더니 그대로 유곽희를 집어던졌다. 유곽희의 몸이 한쪽 벽면에 쾅 부딪혔다.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졌다.

‘죽지는 않았군.’

김인수는 유곽희의 생존을 확인한 후 바로 신경을 껐다. 그녀에게 신경을 써주는 건 이 자리를 정리한 다음에 해도 충분했다.

“쓸모없는 것들. 침입자 하나 제대로 처리 못하나?”

“그들을 너무 탓하지 말게. 그들은 충분히 훌륭했어.”

김인수는 진가염에게 말하는 동시에 염동력 손아귀를 날렸다. 놀랍게도 진가염은 맨손으로 김인수의 염동력 손아귀를 붙잡았다.

“악수라도 하자는 건가?”

“높으신 분 같으니 내가 양손으로 잡아드려야겠군.”

김인수는 태연하게 염동력 손아귀를 하나 더 날려 진가염의 손을 붙잡았다. 진가염의 동공이 살짝 벌어졌다. 김인수가 오른손 검지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휙 한 번 긋자, 진가염이 오른쪽 벽에 던져져 처박혔다.

“크헉!”

“원스 모어?”

김인수가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서필지!”

“사람 이름이로군.”

김인수는 그렇게 대꾸하며 그대로 정면을 향해 점멸을 사용했다. 김인수가 서 있던 자리에 검은 양복으로 몸을 감싼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호오.’

김인수는 속으로 감탄사를 냈다. 지구에서 이 정도의 실력자를 본 건 처음이었다. S급 7위라던 아가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장을 사용하기에 충분한 상대로군.”

김인수는 차원 금고로부터 청동 검을 빼어들었다. 그가 지체 없이 청동 검을 허공에 휙 휘두르자, 10m 정도 떨어진 상태였음에도 서필지라 불린 남자의 어깻죽지가 퍽 베여 벌어져 피가 솟았다.

별로 검기 같은 걸 날린 건 아니었다. ‘베었다’라는 행위의 결과를 서필지가 서 있던 공간에 적용시킨 것뿐이었다.

이 청동 검의 이름은 단념검(斷念劍). 생각만으로 사람을 벤다는 심검(心劍)을 아티팩트로 구현화한 것이다.

“대단하군!”

김인수는 감탄했다.

사실 김인수는 서필지의 팔을 아예 잘라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서필지는 자신의 차원력으로 김인수의 스킬을 봉쇄해 냈다. 그래서 어깻죽지만 베였을 뿐, 팔은 떨어져 나가지 않은 것이다. 그의 이계 제자들 중에서도 이 정도까지 해낼 수 있는 자는 많지 않았다.

김인수가 서필지에게 신경이 쏠린 틈을 타 진가염이 품속에서 슬며시 총을 꺼내고 있었지만, 김인수는 그쪽을 보지도 않고 단념검을 휙 휘둘렀다. 그러자 진가염의 허리가 퍽 잘려 몸이 두 동강났다.

“끄아아아악!”

진가염의 비명 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적의 고통이 나의 행복. 복수란 이런 것이다.

“넌 보디가드 아닌가? 저자를 지켜야지.”

김인수는 서필지를 조롱했다. 그러자 서필지는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저분을 내가 지킬 필요는 없다.”

“뭐?”

의외의 대꾸에 김인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니, 시선을 돌릴 필요는 없었다. 약해지던 진가염의 생명력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그는 시선이 아닌 감각으로 알아채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선은 돌아갔다.

“나는 고통을 좋아하지.”

진가염이 말했다.

“물론 타인의 고통을 더 좋아하지만 말이야.”

타앙! 진가염이 든 총이 불을 뿜었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김인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진가염이 쏜 총의 총알을 염동력으로 잡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단념검을 휘둘러 총알을 튕겨낼 수밖에 없었다. 단념검으로도 총알은 잘리지 않았기에, 그냥 총알을 튕겨내는 것에 그쳤다. 그 탓에 귀한 청동 검에 상처가 나고 말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했다. 단념검의 재질은 청동이긴 하지만, 차원능력으로 단련된 특별한 검이다. 총알 정도로는 생채기도 나지 않아야 정상이다. 그런데도 단념검의 날이 상한 일어난 이유는 간단했다.

WF의 차원 기술이 김인수가 생각한 것보다 뛰어났다.

“우리가, WF가 어벤저를 그냥 돈과 권력으로만 부리는 줄 알았나? 아니, 우리보다 더 강한 자를 돈과 권력만으로 부릴 수는 없어.”

진가염은 이빨을 드러내어 보이며 웃었다. 총구는 여전히 김인수를 겨누고 있었다.

“언제든 그 목을 쳐 버릴 수 있는 수단 없이 명령하기는 힘든 법이네. 그리고 이 총이 바로 그 수단이지.”

김인수에게 겨누어진 총 안에 든 총알의 재질은 파멸철. 차원 능력이 통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금속이었다. 당연히 쉽게 얻어낼 수는 없는 재질로, 틈새 차원에서도 매우 희귀한 물질이었다.

지나치게 강도가 높아서 과학 기술보다는 차원 능력의 의존도가 높은 이계에서는 아예 가공이 불가능했기에, 그냥 나무 몽둥이에 박아서 둔기로 쓰거나 원석을 슬링으로 던지는 식의 원시적인 활용밖에 하지 못했다. 하지만 WF에서는 총알로까지 가공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진실은 둘.

WF는 틈새 차원까지의 탐사를 이미 꽤 깊은 곳까지 해냈고, 김인수가 있던 이계보다도 진보된 차원 균열 기술을 개발해 냈다.

김인수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소식이었다.

“흥!”

김인수는 단념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진가염의 총을 든 손이 잘려 나갔다.

“후하하하!”

방금 전까지 고통의 비명을 질러대고 있던 게 그냥 김인수를 방심시키기 위한 연기였던 거라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진가염은 웃어대었다. 힘줄이 잘려나가 움직일 수 없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총을 쥔 손의 검지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파멸철로 이뤄진 총알이 김인수를 노렸다.

“잠깐 당황했던 것뿐이야.”

김인수는 빛처럼 움직였다. 총알을 피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움직임은 더 컸다. 서필지는 김인수의 움직임에 반응한 건지 놀라서 시선을 돌렸지만, 진가염은 서필지 만큼의 실력은 갖추지 못한 듯 반응하지 못했다.

“권총 정도로 어벤저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내 원 참.”

진가염의 배후에 선 김인수는 단념검을 휙 휘둘러 진가염의 목을 잘라낸 후 그 머리를 차원 금고 안에 넣었다. 머리를 잃은 목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초재생 능력이라니, 꽤 골치 아픈 능력을 갖고 있군. 미리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면 애 좀 먹었을 거야.”

버둥거리던 진가염의 동체는 곧 움직임을 멈추고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죽은 것이다. 초재생 능력자는 다른 부분은 다 순식간에 재생해 낼 수 있어도, 머리만은 재생하지 못하기에 이런 결과가 빚어졌다.

하지만 지금 김인수가 진가염의 머리를 차원 금고에서 꺼내면 그 머리를 기준점으로 재생되어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직 완전히 죽였다고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어차피 김인수의 목적은 WF가 다시 진가염의 복제품을 만들어낼 때까지의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이었으니 상관은 없었다.

진가염의 시체에서 총을 꺼내 차원 금고에 넣은 후, 김인수는 어깻죽지가 잘린 서필지 쪽을 보았다. 신체 강화 능력으로 지혈을 해서 생명에 별 지장은 없어보였지만, 아직도 제대로 움직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큭… 죽여라.”

서필지는 목을 쭉 내밀어 뻗으며 말했다. 그걸 보며 김인수는 피식 웃었다.

“싫은데?”

“네놈이 날 죽이지 않아도 어차피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아, 그래? 그럼 자결하지그래. 난 널 그냥 버려두고 갈 거야.”

그러자 서필지는 잘리지 않은 쪽의 팔을 간신히 들어 엄지를 쭉 폈다. 차원력을 엄지에다 쏟는 바람에 상처 부위의 지혈이 풀려 피가 다시 조금씩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엄지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려 들 셈인 것으로 보였다.

김필지의 엄지손톱 끝이 목에 딱 닿은 순간, 김인수는 그 손을 붙잡았다.

“네가 진짜로 진씨 일가에 충성하는 거라면, 넌 스스로를 살리려고 했을 거다. 살아서 진가염을 되살리는 제물이 되었겠지.”

“……!”

“시간을 너무 오래 끌 수는 없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나 듣지.”

김인수는 서필지를 덥석 붙잡아서 차원 금고에 밀어 넣었다. 서필지는 별로 저항하지 않았다. 목이 부러진 채 벽에 처박혀 기절해 있던 유곽희도 회수한 후, 김인수는 한 번 주변을 살폈다.

“아가임은 여기 없는 모양이로군.”

벽 너머를 봐도 아가임으로 보이는 차원력 덩어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더 이상 여기 머물 이유가 없다. 암살에는 이미 성공했다. 몸을 뺄 타이밍이었다.

초시공의 팔찌로 연 포탈로 그는 몸을 던졌다. 돌아가면서 이 장소의 기억을 지워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소의 기억을 읽어내는 비전 능력을 쓸 줄 아는 차원 능력자가 온들,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