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전생
이지희와 오연화는 집으로 돌아갔다. 구문효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사저들을 집까지 바래다주고, 그 본인도 자택으로 향했다.
오연화나 이지희가 몇 시간 전처럼 몰래 돌아와 사무실 문에다 귀를 대고 있지는 않았다. 오연화가 본인의 입으로 말했듯, 최재철은 그들의 접근을 사전에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재철이 인지하는 한, 지금 그들은 여기에 없었다. 이 사무실에는 현오준과 최재철, 단둘뿐이다.
“폐하, 이지희 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재철에게 그렇게 물은 건 현오준이었다. 그의 말에서 신경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폐하는 또 뭡니까?”
“이지희 씨는 스승님, 오연화 씨는 선생님, 구문효 씨는 사부님이라 부르잖습니까? 저도 뭔가 하나 특별한 호칭으로 최재철 씨를 부르고 싶어서요.”
“그렇게 따지면 웬디가 절 폐하라 부르니 그것도 좀 그렇군요. 아니, 그게 아니잖습니까.”
“하긴 그렇군요. 다른 걸 생각해 보죠.”
현오준은 소탈하게 웃었다. 이 화제를 더 질질 끌어봐야 득 될 것이 없음을 직감한 최재철은 본론으로 되돌아왔다.
“이지희를 어떻게 생각하냐고요? 그건 어떤 의미의 질문입니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는 아주 중요한 비밀입니다. 단순히 신문사에 팔아도 엄청난 보수를 기대할 수 있겠죠. 기자였던…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이 세계의 현오준’은 기자가 된 적이 아예 없지만, 최재철은 그 부분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게다가 현오준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신문사보다도 그 정보를 훨씬 더 비싸게 사줄 곳이 하나 있죠.”
WF. 그들의 적. 복수의 대상.
“그건 제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군요.”
“구문효 씨와 오연화 씨는 당신의 질문에 대해 대답했죠. 하지만 이지희 씨는 아닙니다.”
“지희가 배신이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건 정확하지 않군요. 단지…….”
다소 날카로워진 최재철의 반응에 현오준은 잠깐 대답을 저어했다. 최재철이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리자, 그는 포기한 듯 다시 입을 벌려 말했다.
“전의 세계에서는 이지희 씨는 당신의 팀이 아니었습니다.”
그제야 최재철은 현오준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챘다.
“이레귤러라는 겁니까?”
“제 입장에서 비춰봤을 땐 그렇죠.”
이건 회귀자들의 나쁜 습성이다. 자신이 모르는 것, 즉 ‘이전 세계’에서는 없었던 것을 극히 껄끄러워 한다. 하기야 변수가 많을수록 회귀자 본인의 메리트도 감소하는 법이니 이런 습성을 비난만은 할 수 없다.
하지만 최재철의 입장에서는, 그리고 그 외의 대다수 인간의 입장에서는 역시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 논리이다. 이전 세계든, 다음 세계든, 이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에게 있어서 ‘진짜 세계’는 지금의 이 세계뿐이다.
이전 세계에서는 내 친구가 아니었는데 이번 세계에선 친구라니 수상하다. 이런 논리에는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굳이 현오준에게 설교를 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이전 세계의 이지희는 어땠습니까?”
대신 그렇게 질문했다.
“이전 세계에서는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이전 세계의 저는 어벤저부 기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두각을 드러내는 어벤저라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닌 걸 보니 그냥 평범한 B급 어벤저였겠죠.”
“아뇨, 아마도 C급이었을 겁니다.”
최재철이 말했다.
“네? 어떤 근거로…….”
“이번 세계에서 그녀를 각성시킨 게 저라서 그렇습니다.”
거대한 재능을 갖고 있긴 했지만 그걸 몸 밖으로 꺼내는 방법을 몰랐던 이지희를 각성시킨 건 최재철이었다. 그게 최재철과 이지희의 첫 만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전 세계에서도 최재철 씨와 이지희 씨가 만났더라면 각성시켰을 텐데요?”
“아마도 그랬겠죠.”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세계와 지금 세계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습니다. 변수가 많죠. 그렇게 말씀하신 건 현오준 길드장님, 당신입니다.”
“분명 전 그렇게 말씀드렸죠.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현오준은 별 반박하지 않고 그렇게 동의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저는 그녀에게서 또 한 가지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이 일을 오늘에야 말씀드리는 이유가 그겁니다.”
“오늘 일이로군요.”
“맞습니다. 눈치채셨습니까?”
현오준이 말하고자 하는 건 최재철이 오늘 보여준 퍼포먼스에 대한 이지희의 반응이다. 그가 S급 랭커로 꼽히는 오연화를 상회하는 염동력을 사용했는데도 그녀는 너무나도 담백하게 받아들였다. 스승님이라면 그 정도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듯이 말이다.
“애초에 반응을 보려고 보여준 것이니까요.”
최재철도 이지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그와 접촉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지희는 처음부터 최재철에게 너무 호의적이었다. 그건 최재철이 그녀를 경계하고 의심하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하지만 오늘 일을 계기로 최재철은 어떤 결론을 이미 내려둔 상태였다.
“뭐, 그녀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지희는 신뢰할 수 있는 인재입니다.”
“알겠습니다.”
현오준은 더 캐묻지 않았다.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줄 알겠다, 그런 반응이었다.
*
이지희는 문득 오연화에게 말했다.
“비밀 하나 교환하기, 어때?”
“어떤 비밀?”
“아무거나.”
“아무거나? 흐음.”
오연화는 잠깐 생각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먼저.”
“나, 요즘 전생의 꿈을 꿔.”
“…….”
오연화는 모래 씹은 표정으로 이지희를 올려다보았다.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냐?”
“아니, 소설 쪽일걸.”
“어느 쪽이건.”
“그래서? 그게 비밀이야?”
“응.”
“아, 그럼 난 사실 왕족의 후예야.”
“앞에 ‘아, 그럼’이 붙은 게 불안한데, 정말이니?”
“당연히 뻥이지!”
오연화는 깔깔대며 웃었다.
“자, 이제 그만 자자.”
오연화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이지희가 그 자리에 누우니 오연화는 리모컨으로 방의 불을 껐다. 오연화는 헤헷, 하고 한 번 웃더니 꼬물꼬물 이지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게 요즘의 일상이었다.
“난 진짜인데…….”
“그만 주무세요.”
오연화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이미 많이 졸렸는지 하품을 늘어지게 하곤 이지희의 오른손을 들어다 자기 머리 위에 올렸다. 이지희는 그 작고 따끈따끈한 머리를 버릇처럼 몇 번 쓸어주다가, 그녀 본인도 곧 잠에 빠져들었다.
*
언제부터 이지희가 전생의 꿈을 꾸기 시작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최재철과 만난 직후부터’였다.
이지희에게 있어서 최재철과 처음 만나 손가락을 맞댄 순간은 ET가 지구인과 처음 손가락을 맞댄 순간과 빗댈 수 있을 정도로 의미 있었던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이후부터 이지희는 조금 이상해져서 최재철을 스승님이라고 부른다거나 하는 기행을 하게 된다. 그때의 일은 그녀 자신도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그러나 그녀는 그날 밤부터 꾸기 시작한 꿈으로 인해 왜 자신이 그런 기행을 벌였는지 조금씩 이해해 가기 시작했다.
‘네게는 재능이 있어.’
꿈속의 남자는 그녀에게 말했다.
‘넌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을 거다.’
그녀가 그날 경험한 일을 꿈속에서 똑같이 겪었다.
꿈속의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녀가 있던 곳은 지구가 아니었다.
꿈속의 그녀는 무르아냐라 불렸으며, 도시 엘프라 불리던 종족의 후예였다.
무르아냐가 살던 세계는 지구보다 훨씬 가혹했다.
대륙의 모든 땅에 소유주가 생긴 이래, 자기 소유의 숲을 갖지 못한 엘프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렇게 쫓겨나 도시의 하층민으로 자리 잡은 엘프의 일파가 바로 도시 엘프였다.
그런 천한 피를 타고 난 무르아냐는 심지어 고아였고, 노예이기까지 했다.
무르아냐의 주인은 그녀를 해가 뜨면 거지로 분장시켜 길거리로 내쫓았고, 해가 지면 그녀가 구걸해 받은 돈과 물건을 빼앗았다.
그래도 잠잘 곳이 있다는 건 다른 거지들에 비해 나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며 살아야 했던 힘겨운 하루하루였다.
운명의 날, 무르아냐는 그날도 구걸을 하러 거리로 나와 있었다. 거지들끼리도 영역 다툼이 심해, 무르아냐 같은 작고 약한 거지는 주위에 다른 거지가 없는지 노심초사하며 두리번거려야 했다.
제대로 체온 유지도 안 되는 넝마를 어떻게든 어깨 위로 끌어 올리며, 무르아냐는 돈 많아 보이는 행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결코 옷을 붙잡거나 해서는 안 된다. 옷을 더럽혔다고 맞아 죽을 수도 있었으니까. 경험으로 얻은 지혜였다.
닿지 않도록, 하지만 시선은 끌도록, 불쌍하게 보이도록.
그 남자와 손끝이 맞닿은 건 그때였다.
파지직, 하고 전기가 흘렀다.
“이름이 뭐냐.”
남자는 물었다.
“무르아냐…….”
“그래, 무르아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널 내 제자로 받겠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 맞잡으며, 남자는 선언했다.
“이제부터 날 스승님이라 부르려무나.”
첫날 밤 꾼 꿈은 거기까지였다. 잠에서 깨고 나서, 이지희는 가장 먼저 자신의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소녀보다는 깨끗하고 큰 손. 자신이 인간이고 지구에 있으며 이지희임을 확인한 후에,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로 꿈이 생생했던 탓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르아냐라고 착각할 정도로.
어째서 이런 꿈을 꾼 것일까. 물론 계기는 최재철과의 접촉이었다.
하지만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원인은 하나밖에 없지.”
그 원인이란 계약마와의 계약이었다.
*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그녀가 아직 아이돌이었을 때의 일이다. 이미 데뷔는 했지만 음반은 10장도 제대로 팔리지 않고, 행사에서도 관중을 10명도 모으지 못하던 시절의 일. 이미 꿈은 이뤘을 텐데, 그 꿈을 이룬 현실이 시궁창이던 시기의 일이었다.
“아무래도 스폰을 받아야겠어.”
그녀의 전소속사의 사장인 주승호가 먼저 지나가듯 말했다. 그리고 이후에 김현직 실장이 이지희를 따로 불러내 스폰이란 게 뭔지 좀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널 스폰해 주길 바라는 거물이 있다고도 언질이 나왔다.
이지희는 격노했다. 자신이 꿈 꾼 세계가 더럽혀진 것 같았다. 당연히 거절했다. 그때는 자신이 잘못되었다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절로 인해,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단번에 휙 뒤바뀐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야! 너 스폰 거절했다며?!”
같은 팀의 언니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상태로 그녀의 결정을 비난해 댔다.
너는 팀을 위해서 그 정도 희생도 못 하냐, 스폰 상대도 거물이라던데 네 앞길에도 좋지 않냐, 앞뒤 꽉 막힌 이기적인 년. 이기적인 년…….
착한 언니였다. 친한 언니였고, 따를 만한 언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신의 꿈을 더럽히는 말을 쏟아내고 있는 언니는 그녀가 알던 언니가 아니었다.
부조리한 비난을 받는 것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건, 눈치를 보던 같은 팀 동생들의 시선이었다. 그 시선은 언니의 말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를 표하고 있었다.
“그럼 언니가 하면 되잖아!”
결국 이지희는 더 참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다. 그 말은 해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 언니의 얼굴이 확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래, 내가 한다. 실장 오빠! 내가 할게요!!”
“넌 안 돼.”
김현직은 딱 잘라 말했다.
“하지 마.”
“아, 왜요!”
“넌 그분의 취향이 아니야.”
“…취향대로 맞춰드리면 되잖아요.”
“뭐?”
“성형이라도 하죠! 몸매 시술도 좀 하든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악했다. 김현직 실장도, 눈치를 보던 동생들도.
“그거 좋군!”
주승호 사장만이 손뼉을 짝 치며 좋아했다.
며칠 후, 돌아온 그 언니의 모습은 이지희와 똑 닮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사장의 손에 이끌려 그 예의 ‘스폰’이란 걸 받으러 갔다.
언니, 여승이 언니.
예뻤는데, 동경하던 언니였는데, 노래도 나보다 잘 부르고 춤도 잘 췄는데.
자신과 똑같은 얼굴로 떠난 그 언니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다.
“미안하지만 여승이는 솔로로 데뷔할 거야. 너희는……. 흠, 그래. 지희야, 어때? 생각은 좀 바뀌었니?”
더욱 참을 수 없었던 건 여승이가 갔음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던 주승호 사장의 압박이었다. 그리고 동생들의 시선……. 그녀는 더 이상 사무실에 얼굴을 비출 수 없었다.
이지희는 작은 방에 무릎을 끌어안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인 시간을 보냈다.
며칠을 그러고 있었을까.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힘을. 힘을 원하는가. 원한다면… 주겠다.]
“…힘을 공짜로 준다는 거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힘을 주겠다.]
“대가로 뭘 바쳐야 하는데? 내 정조?”
그녀의 입가에 자조가 걸렸다.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은 굳어지고 만다.
[네… 존재.]
“…영혼이라도 바치라는 거야? 악마야? 필요 없어!”
[대가는… 다른 것이라도 상관없다.]
“그럼 이런 것도 돼?”
아직까지도 그녀는 무대 위에서 반짝거리고 싶어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성공한 그녀의 우상이었던 이들은 모두 ‘스폰’을 받아서 그렇게 된 거라는 더러운 이야기를 듣고 말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꿈을 버리지 못한 채였다.
“내 옛 꿈을 줄게. 내 지금 꿈을 주는 대신… 나한테 새로운 꿈을 줘!”
[계약은 성립되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더 이상 아이돌이 되고 싶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그게 계약마와의 계약이었음을 이지희는 후일 최재철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알았다.
*
“아니, 꿈이란 게 그 꿈이 아니잖아.”
그 계약마는 정말로 악마였던지, 그녀의 소원을 뒤틀린 형태로 이뤄준 것 같았다. 새로운 장래 희망을 달라고 했더니, 밤에 꾸는 꿈을 준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생생한 꿈을 꾸게 된 거겠지.”
그 후에도 같은 꿈이 며칠째 이어졌다. 그것도 시간열 대로, 차례차례 무르아냐의 인생담이 이어졌다.
‘스승님’은 무르아냐의 주인에게서 그녀를 사들이고, 그녀는 모든 이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상아탑의 학생이 되었다.
그제야 그녀는 스승님의 정체가 상아탑의 교장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상아탑이라는 곳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돌아가는 곳으로, 외부 세계의 선입견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거지였고 노예 출신인데다 도시 엘프라는 사람들에게서 천시당하는 종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장이 직접 가르치는 무르아냐를 아무도 감히 무시하지 못했다.
무르아냐에게는 그에 합당한 재능이 정말로 있었다. 괜히 상아탑의 교장이 직접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설득할 수 있을 정도의 빛나는 재능이!
무르아냐는 스승의 가르침을 스펀지처럼 흡수했다. 그녀가 상아탑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인재가 되는 데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아탑을 졸업한 무르아냐는 차원 균열을 닫는 전문 조직인 어스름에 합류했다. 영웅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 어찌 영광스럽지 않을까!
스승과 함께 어스름에서 활동하던 무르아냐는 어른이 되었다. 그녀는 첫 발정기를 맞이하자마자 자신의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곧 깨닫게 되었다.
무르아냐는 스승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승에게 고백했다.
“안 돼, 무르아냐.”
그러나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 세계의 인간이 아니야.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갈 거야.”
“따라가겠어요.”
“허락 못 한다.”
스승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냉엄했다. 확실한 거절의 표현. 무르아냐는 자신의 마음이 스승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 내가 천한 도시 엘프라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무르아냐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상아탑만큼 편견이 없는 곳이 이 대륙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교장 본인이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로지 능력만으로 제자들을 평가하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것 또한 무르아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도시 엘프인데다 노예 출신이기까지 한 무르아냐가 상아탑 우수 졸업생에 뽑히고, 어스름에까지 합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잘못된 생각은 무르아냐를 몰아붙였고, 그녀의 정신은 가서는 안 될 영역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무르아냐는 차원 균열 너머의 틈새 차원까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넘어갔다. 그리고 차원 세포를 하나 점령했다. 그녀의 기량이라면 혼자서 차원 세포를 점령하는 것 정도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차원 세포의 새로운 군주가 된 무르아냐는 차원 세포의 주인이 내어주는 퀘스트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목적은 명쾌했다.
“계약을!”
차원 세포의 주인에게 차원 괴수의 시체를 내려놓으며, 무르아냐는 소원을 빌었다.
“나를 ‘지구인’으로 만들어줘!”
[오, 작고 귀여운 나의 군주여.]
차원 세포의 주인은 측은한 눈으로 무르아냐를 바라보았다.
[천의 시체를 가져온들 그건 불가능하단다.]
“어째서! 넌 신이잖아!”
[아니, 난 신이 아니야. 작은 군주여, 내가 신이라면 어째서 군주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고 섬기겠는가?]
“어떻게든 해봐! 어떻게든……!”
[오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방법이 있어?”
무르아냐의 눈동자가 희망에 찼다. 그러나 그 희망은 곧 꺾일 희망이었다.
[네 소원을 비틀린 형태로 이루는 것은 가능하단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네 존재를 파멸로 몰아넣을 거야. 넌 너 자신이 아니게 되고 말겠지. 널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 방법을 사용하길 저어하게 만드는구나. 나의 군주여, 포기하지 않겠는가?]
“…포기 못해.”
하늘색 눈동자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무르아냐는 말했다.
“그 방법으로라도 내 소원을 들어줘.”
[나의 군주여! 그 소원으로 인해 넌 죽게 될 거야. 넌 다음 생애에 지구인으로 태어나게 되겠지. 그리고 나는 차원 세포의 주인으로서 내 본성을 거부하지 못하고 남겨진 네 시체를 집어삼키고 말 터.]
차원 세포의 주인은 부드럽게 웃었다.
[하지만 군주여, 이것으로 충분한가? 아니, 그렇지 않아. 네 진실 된 소원을 말하거라. 나는 네 시체의 값을 치를 테니.]
“…원컨대.”
무르아냐는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부디 다음 생에서는 지구인으로서 스승님과 만날 수 있기를.”
그것이야말로 그녀의 진정한 소원이었다.
[오, 나의 작은 군주여. 계약은 이루어졌다. 다음 생에는 부디 행복하기를!]
*
이지희의 꿈은 이걸로 끝이다. 무르아냐의 이야기도 이걸로 끝이다.
최재철이 무르아냐의 ‘스승님’이냐고 물으면, 이지희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무르아냐의 눈으로 본 ‘스승님’과 이지희의 스승인 최재철은 너무나도 달랐다. 교육 방식은 통하는 면이 있었지만 역시 달랐다. 첫 인상은 좀 겹치는 면이 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이었다.
이지희가 무르아냐라면, 지구 어딘가에 있을 무르아냐의 스승을 찾아다녀야 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그쪽’ 차원 세포의 주인이 스승님과 만날 수 있도록 계약을 맺어주었으니, 잘 찾아다니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지희는 그럴 생각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무르아냐가 아니다. 그녀는 이지희였다. 20년 이상 이지희로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무르아냐로 살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지희에게는 그녀 나름대로 마음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이 마음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의 몸과 마음, 존재 그 자체를 바친 무르아냐의 결의는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이지희는 같은 상황이라면 자신도 ‘그 사람’을 위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도 나 자신이 더 중요한 거지.”
이지희는 문득 그런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언니?”
그녀의 혼잣말에 깜짝 놀란 오연화는 큰 눈동자를 깜박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 미안. 그냥 혼잣말이었어.”
두 사람은 아침 식사 중이었다. 어제는 오연화에게 아침 식사를 맡겼더니 컵라면을 끓여놔서, 앞으로는 식사 준비는 이지희가 하기로 했다. 하기야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지희가 얹혀사는 입장인데, 이 정도는 서비스해 줄 수 있었다.
“어제 말한 전생 이야기 말이야.”
“응? 아, 어, 그래.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이지희 본인은 지금 이 순간까지 잊고 있었던 이야기를 오연화는 다시 꺼내며 말했다.
“전생보다는 지금이 더 중요한 거 아닐까?”
오연화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진지했다. 나름 그녀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일 터였다. 이지희는 계란 조각이 붙은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며 대답했다.
“역시 그렇지?”
*
“…어리석은 녀석.”
김인수는 최재철의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에는 별로 믿겨지지 않았다.
이지희에게 무르아냐의 영혼이 깃들어져 있다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처음 낌새를 느낀 건 최재철이 이지희에게 처음 신체 강화 능력을 가르쳐 준 날의 일이다.
그날, 최재철은 김현직이 끌고 온 오만구를 비롯한 C급 어벤저들을 이지희더러 쓰러뜨려 보라고 했었다. 그리고 이지희는 멋지게 그가 낸 시험을 통과해 보였다.
무르아냐의 체술로.
잘 생각해 보면 지나칠 정도로 빠른 이지희의 능력 습득 속도도, 그녀가 간혹 보이는 부자연스러운 언행도 무르아냐의 존재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우연의 일치라는 게 있을 수 있지 않은가?
아니, 사실은 별로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믿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라는 게 거의 말이 안 되는 수준의 변명임에도, 그는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어제, 그녀와 주먹을 맞대며 최재철은 이지희 속에 존재하는 무르아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
무르아냐는 김인수가 상아탑의 교장이었을 시절 가장 아끼던 제자였다. 작고 귀엽고,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을 지닌 아이였다.
그 아이가 언제 그렇게 컸는지, 자기도 이제 어른이라고 애를 낳게 해달라고 찾아왔을 때는 천하의 상아탑 교장이자 어스름의 수장이라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은 말로 거절했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게 좋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무르아냐는 자살에 가까운 방식으로 죽었다. 김인수가 그녀의 흔적을 따라 차원 세포로 향했을 때, 그녀는 이미 시체조차 남기지 않은 방식으로 죽어 있었다.
무르아냐가 행방불명된 차원 세포에 김인수가 찾아가자, 차원 세포의 주인은 전의 군주였던 무르아냐가 가장 친근하게 느낄 형상으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즉, 주인의 모습은 김인수와 똑 닮아 있었다.
[오, 위대한 이시여. 당신의 제자는 제가 삼켰습니다.]
차원 세포의 주인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김인수는 이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곧장 알아챘다. 여기서 차원 세포의 주인에게 화풀이를 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계약 사항은 뭐지?”
김인수의 질문에 차원 세포의 주인은 공손히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대답했다.
[당신은 반드시 무르아냐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모습을 한 차원 세포의 주인이 말했다.
[제가 연결한 인연의 끈을 당신이 끊어내지 않는 한은…….]
“후.”
김인수는 짧게 웃었다.
“빨리 지구로 돌아가야겠군.”
[부디 그렇게 해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저 위안일 뿐이었다.
재회하게 될 사람은 무르아냐 본인이 아닐 것을 김인수도 잘 알고 있었다.
*
이지희는 이지희일 뿐이다. 무르아냐가 아니다.
차원을 넘나든다는 것은 그리도 어려운 일인 법이다. 존재 하나를 통째로 보낼 수는 없었다. 무르아냐의 파편을 이어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지희가 무르아냐 본인이 될 수는 없다.
앞으로도 김인수는, 최재철은 이지희를 이지희로 대할 것이다. 그녀를 향해 무르아냐의 이름을 꺼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간혹, 그녀의 눈동자 빛깔과 같은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무르아냐에 대해 떠올리는 일은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처럼.
*
“으, 죽는 줄 알았네.”
유곽희는 자신의 목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가염과의 대면은 이걸로 끝이었다.
진가염의 특이한 취향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이 정도로 괴롭혀도 죽지 않는 건 유곽희 정도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진가염에게 있어서도 유곽희는 꽤 희귀한 존재였고, 그래서 유곽희는 자신의 생존을 믿을 수 있었다.
“뭐,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긴 했지. 목이 두 번이나 부러졌었어.”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주인님.”
아가임이 그녀를 맞이하며 말했다.
“아니, 무사한 게 아니지. 목이 두 번이나 부러졌었다니까? 어휴, 죽는 줄 알았네.”
정작 그 당사자인 유곽희가 실실 웃으며 말하는데, 아가임이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정말로 죽을 뻔했던 건 사실이리라. 목이 두 번 부러졌던 것도 사실일 테고.
하지만 유곽희에게 그건 별거 아닌 일일 뿐이었다. 이번 일에 대한 대가를 이걸로 치렀다고 생각하면, 싸게 먹힌 셈이라고 그녀는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번 일은 그 일례일 뿐이다.
“그래서? 상황은 어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특별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가짜’ 오르덴이 언론을 탔는지 만 하루 이상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 별로 안 좋은데.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내 예상보다 훨씬 주의 깊고 의심 많은 성격인 것 같아. 쉽게 이용해 먹긴 힘들겠어?”
잠깐 생각하던 유곽희는 곧 이어 말했다.
“혹시나 우리의 뒤를 캐고 다니느라 시간을 허비했을지도 모르지. 조상평 쪽에 한번 연락이나 해보는 게 어때? 가능성은 낮아 보이지만 접촉했을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니까.”
“알겠습니다. 하지만 주인님.”
아가임은 곤란한 표정으로 유곽희를 바라보았다. 물론 여전히 웃음을 띤 표정이긴 했다. 유곽희는 그의 미소가 무너진 걸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왜? 얼른 전화해 봐.”
“전 조상평의 번호를 모릅니다.”
그제야 유곽희는 생각이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맞다. 연락처 남기지 말라고 했지. 그럼 직접 찾아가야겠군.”
“차량을 준비하겠습니다.”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아가임이 말했다.
“부탁해.”
*
유곽희는 조상평의 아지트에 도착했다.
“조상평은 있군요. 혼자 있습니다.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만.”
아가임의 말에 유곽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걸 왜 고민해? 저기 없으면 장소의 기억을 읽고 어디로 간 건지 추적하면 되지.”
“전 단지 주인님께서 왜 저들의 연락처라도 받아두지 않은 건지 탓한 겁니다만.”
“안 그래도 되니까.”
유곽희는 뚱하니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가보자. 은혜를 알면 차라도 한 잔 내주겠지.”
그리고 그런 유곽희의 기대는 철저하게 배신당했다.
“늦었군.”
아지트의 문을 열자, 그런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유곽희에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목소리이기도 했다. 유가임의 목소리를 이 목소리와 비슷하게 변조하기 위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육성으로, 직접 듣는 건 처음이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목소리를.
유곽희는 아가임을 노려보았다. 아가임은 분명 이 아지트 안에 조상평 밖에 없다고 했었다.
유곽희의 시선을 받은 아가임은 고개를 저었다. 반응을 보니, 그의 ‘헌터 아이’는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른 곳에 있으리라. 저 철가면을 쓴 남자, 에스파다 도 오르덴 쪽에 말이다. 저 남자가 어벤저들의 ‘오러’를 꿰뚫어보는 아가임의 ‘헌터 아이’를 속였다고 보는 게 합당한 결론일 터였다.
“범인은 항상 범행 장소로 돌아온다, 는 말은 이 경우에는 잘 맞지 않는 것 같군. 그래도 뭐, 비슷한 거겠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여유작작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지 않나?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절 가리키는 명칭입니까?”
아가임이 웃는 얼굴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되물었다.
“날 속일 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유곽희가 서둘러 말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다.
“제 이름은 유곽희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네게 물었다,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유곽희를 무시하고 말했다. 눈구멍 하나 없는 그 철가면 아래의 시선이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이 아가임을 향했음은 명백했다.
유곽희는 굴욕으로 인해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아가임입니다.”
아가임은 자기소개를 했다. 유곽희의 자기소개에 이어서. 어디까지나 유곽희가 이 대화에서 무시당하지 않았다는 걸 전제로 한 태도였다.
“S급 7위에 랭크되어 있지요.”
“호오, 그래? 그럼 이 나라에 너보다 강한 어벤저는 여섯 명밖에 없다는 뜻이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질문에 아가임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섯 명 안에 당신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걸 보니 그렇지는 않은 것 같군요.”
“그래? 네 눈에 지금 나는 B급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텐데.”
“물론 제 눈에는 당신이 조상평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아가임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대꾸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제 눈을 속일 수 있는 실력자…….”
“닥치고 꿇어.”
“욱?!”
아가임의 무릎이 풀렸다. 그의 웃는 얼굴이 드디어 무너졌다.
“큭……!”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던 아가임은 주먹을 땅에다 박아 간신히 저항했다. 옆에서 보기에는 엄청난 압력이 그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무릎은 아직 땅에 닿지 않았다.
그런 아가임을 보며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연 S급 7위라 이건가. 내 명령에 저항하다니. 나하고 격이 하나나 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군.”
“……!”
“아니, 꿇지는 않았지만 닥치기는 했군. 둘에서 셋 정도인가.”
“…둘… 인 것, 같군요……!”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아가임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반항했다.
“그래, 좋아. 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유쾌한 듯 인정했다.
“일어서라. 나와 같은 높이에 시선을 두는 것을 허하마.”
“허억! 하아……!”
한참 동안이나 목이 졸려 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아가임은 급히 숨을 들이켰다. 마라톤이라도 뛰고 온 것처럼 그의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네가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 행세했던 죄를 지금 것으로 용서했다. 하지만 이번뿐이다. 다음은 없어.”
“…이 능력으로 조상평 일당을 굴복시킨 겁니까?”
“그들이 내게 힘에 의해 굴복당한 것으로 보이던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그 조소가 섞인 되물음에 아가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후, 뭐, 좋아. 그들에게 무슨 용건이 있어서 여기에 찾아온 건지 한번 들어보도록 하지.”
“제가 찾아온 건 조상평 일당이 아니라 당신이에요, 에스파다 도 오르덴.”
유곽희가 그제야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러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그녀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질문하지 않았나? 대답하게,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녀는 제 주인입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아가임은 대답했다.
“저는 그녀의 명령을 따릅니다. 제게 의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 내 명령을 거부하느라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서 발버둥 치던 놈이 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니. 꽤나 재미있는 농담을 할 줄 아는군. 뭐 좋아. 그녀의 명령이 뭔지 내게 말해보게.”
“어린애 같은 전언 게임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녀를 존중해 주십시오.”
후, 하는 웃음소리가 가면 속에서 들렸다.
“내가 다시 한 번 네게 명령을 내리면 어떻게 될지 상상은 해봤나?”
“그런 상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꽤나 충성스럽군, 그래.”
바로 그 순간, 유곽희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부터 거대한 힘의 오러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어마어마한 압박감이 그녀를 습격했다.
아가임은 유곽희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리고 있는 것이 유곽희의 눈에도 보였다. ‘헌터 아이’를 가지고 있는 그가 그렇지 않은 그녀보다 더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훌륭한 충성심이로군.”
다음 순간, 압박감은 자취를 감췄다.
“어떤 능력이나 스킬, 아니면 인질이나 빚 따위 때문에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 아무래도 이 여자에게는 너로 하여금 충성을 바치게 만들 뭔가가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 말하던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흥미로운 듯 말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흠, 그게 성욕인 것 같지는 않군. 생존 본능은 성욕보다 강하니 말이야.”
“…….”
아가임은 농담처럼 나온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어진 말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런 아가임의 태도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픽 웃었다.
“뭐, 좋아. 네 충성심을 높이 사서 네 주인 또한 존중해 주도록 하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고개가 드디어 유곽희 쪽을 향했다.
“여자, 네 이름이 뭐지?”
*
‘재미있는 놈이로군.’
이게 별로 좋은 버릇은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다 도 오르덴, 즉 김인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 녀석, 갖고 싶은데?’
물론 여기에서 ‘이 녀석’이 가리키는 건 아가임이다. 그러나 김인수는 아가임에 대한 소유욕을 금방 접어두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가 아니니까. 지금 중요한 건…….
‘드디어 얼굴을 보게 되었군.’
유곽희.
소문이 자자한 그 여자다.
이 여자가 여기, 즉 조상평 일당의 아지트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한 김인수는 미리 입구에다 알람 비슷한 걸 설치해 두었다. A급 이상의 차원력을 지닌 사람이 지나치면 울리도록 설정해 두었다.
연락처 교환을 하지 않았다는 건 연락하기 위해선 직접 올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다시 올 것이다. 그런 그의 예상은 맞았다.
알람을 설치해 두고 온 지 이틀째. 최재철의 모습으로 계란을 사러 나와 있던 김인수는 이 알람이 울리자마자 얼른 집으로 돌아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모습을 취한 후 초시공의 팔찌를 이용해 조상평의 은신처로 서둘러 점프해야 했다.
조상평 일당을 다 내쫓고 조상평인 척 아지트에 태연히 앉아 있기까지 시간은 꽤 촉박했고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이렇게까지 해서 봐야 하는 여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다른 건 다 제외하고도 진가충의 아내다. 그녀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정보는 꽤 많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유곽희가 WF에 가진 감정이나 그녀 본인에 대한 평가를 위해서도 직접 얼굴을 한 번쯤은 보긴 해야 했다.
이 여자를 죽일 것인가, 살려둘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라도.
‘흠.’
겉보기에는 그냥 여자다. 다른 이들의 언급과는 달리 그렇게까지 미녀라는 인상도 없다. 물론 얼굴 자체는 이미 비전으로 본 터여서 새삼스러운 인상도 아니었지만.
‘역시 평소에는 유혹 같은 스킬을 쓰고 있는 건가.’
지금은 별로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유혹을 쓴 흔적도 없고 쓸 기미도 없다.
그녀 나름대로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는 수작 부리지 않고 대하겠다는 생각이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꽤 인정해 줄만 할 인물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방금 전에 유곽희와 아가임에게 끼얹은 건 죽음의 공포와 더불어 온갖 스킬을 해제시키는 효과가 붙어 있는 차원력 폭풍이었다. 딱히 스킬이나 능력이랄 건 아니고 그냥 차원력을 세게 뿜어내는 건데, 이걸 맞으면 어중간한 세뇌나 유혹 등 잡다한 스킬은 풀리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임은 유곽희의 앞을 막아섰다. S급 7위 랭커가 B급도 될까 말까한, 능력자로서는 애송이인 여자를 상대로.
‘뭐가 있긴 있겠지.’
그렇게 판단한 김인수는 유곽희에게 말했다.
“여자, 네 이름이 뭐지?”
“유곽희입니다.”
명백히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해 온 김인수에 대해 분노조차 떠올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굴욕을 견디는 기색도 없다. 그런데 비굴하다거나 하지도 않다.
‘재미있군.’
김인수는 가면 아래에서 웃었다.
“말해봐.”
“네?”
김인수의 말에 유곽희는 당황한 듯 빈틈을 보였다.
“말해보라고. 나하고 접촉하고 싶었다며? 그게 신체적 접촉을 말한 게 아닌 이상, 뭔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 같은 게 있어서 한 말이었겠지? 그걸 말해봐.”
“제게 협력해 주십시오.”
오, 나름 반응이 빠르다. 나쁘지 않다.
“거절한다.”
김인수는 즉시 거절했다. 고개를 끄덕일 이유가 없었다.
“돈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어.”
“그럼 뭐가 필요하시죠? 필요한 걸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질서.”
김인수는 대답했다.
“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WF에게 전달한 내용은 너희에게도 전달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저 가짜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날 흉내 낼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은 차원의 균형이 지켜지는 것. 즉, 질서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우선 순위에서 조금 밀리긴 하지만, 그는 최대한 차원 질서를 유지시켜 볼 셈이었다.
진씨 일가에 대한 복수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저희는 미력하나마 질서를 지불해 드릴 수 있습니다.”
유곽희가 제안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하지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보단 정보다.
“차원 균열을 더 닫겠다는 거냐? 그 대가로 내 협력을 얻겠다고?”
“그렇습니다.”
“내 협력을 받아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B22
유곽희는 조금 숨을 들이마셨다. 0.5초 정도 늦게 그 대답이 나왔다.
“복수입니다.”
“복수?”
“그렇습니다.”
“허, 사적인 복수 말인가? 그런 걸 위해 이 질서의 검을 빌리겠다는 거냐?”
“그렇습니다.”
변명 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그저 긍정, 긍정이 이어질 뿐이었다.
“일단 들어는 보지. 누구에 대한 복수 말이냐?”
“진씨 일가에 대한 복수입니다.”
유곽희는 거침이 없었다. 묻는 즉시 모든 걸 대답한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기가 막혔다. WF의 며느리인 그녀가 본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다니.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왜?”
“그들은 내 첫사랑을 죽였습니다.”
“지극히 사적이로군. 누구?”
유곽희는 여기서 처음으로 망설였다.
“그것이 중요합니까?”
“중요하고말고.”
김인수는 말했다. 그조차도 그녀가 다음에 할 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대답하겠습니다. 김인규라 합니다.”
김인규, 그의 동생.
그 이름을 사람의 입으로 들어보는 것이 얼마만일까. 그가 복수하고자 맹세한 자들은 사람이 아니니, 김인수는 10년 이상의 세월동안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 이름을 듣지 못한 셈이 된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유곽희의 그 부름을 듣고서야, 김인수는 자신이 그동안 침묵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서야 김인수는 겨우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죽었는가?”
“자살했습니다.”
“왜?”
“그들이 그의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김인수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그럼에도 유곽희의 말은 끝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그가 죽은 후 그의 아버지도 죽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형까지도 죽였습니다. 이제는 남은 이가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의 복수를 할 이도, 그의 아버지의 복수를 할 이도, 그의 형의 복수를 할 이도, 그리고 그의 복수를 할 이도!”
유곽희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가득 들어찼다. 그녀 본인조차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그러하다면 생면부지의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라도 나서서 그 피 값을 치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복수는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래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고대의 법률이다. 인간이 문명을 일으키기 전부터 존재해 왔던 법률.
분노의 법률이다!
그렇기에 그 법률은 야만적이고,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 질서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곽희는 복수를 이야기했다.
분노를 담아.
“그것은 질서와는 전혀 상관이 없군.”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말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께 질서를 지불하겠다고 말씀을 올린 겁니다.”
조금 전까지의 분노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유곽희는 태연히 말했다.
그녀는 완전히 잘못 짚었다. 만약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설득할 생각이라면 가장 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로 질서의 수호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결코 설득시킬 수 없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이야기하는 자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기 이전에 김인수였다. 철가면은 말 그대로 그저 가면일 뿐, 그 또한 복수귀였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잘못 짚은 이야기가 360도 회전해서 제대로 짚은 셈이 된 것이다.
“…과연.”
김인수는 아가임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미있는 여자로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렇게 대답한 아가임은 웃는 표정이었다.
*
“재미있는 여자지.”
진가염은 와인 잔 속의 와인을 빙글빙글 돌리며 혼잣말을 했다.
“괴롭혀도, 괴롭혀도 질리지 않는 여자는 흔하지 않단 말이야. 흠, 후후.”
붉은 와인을 들이키며 그는 코로 웃었다.
“그리고 멍청한 여자고.”
아직 와인이 남은 잔을 진가염은 바닥에 휙 집어던졌다. 얇은 유리잔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고, 와인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러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새로운 잔을 꺼내어 와인을 다시 따라 진가염에게 건넸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그의 이름은 서필지. S급 랭커 9위에 위치한 어벤저였다.
원래대로라면 그의 사수인 아가임과 함께 파주의 차원 균열을 지키고 서 있어야 하는 그가 여기 있는 이유는 보고를 위해서였다.
“유곽희 아가씨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의 접촉에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스킬 무효화 능력을 쓰는 바람에 더 이상의 도청은 불가능해졌습니다.”
서필지의 고유 능력은 도청. 아주 비밀스럽게 또 하나의 귀를 대상에게 달아놓을 수 있는 능력이다. S급 7위인 아가임이라 한들 그의 능력을 간파하지는 못했다. 그가 그런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기 있는 진가염 정도만 알고 있다.
아가임은 서필지가 신체 강화 능력자인 줄로만 안다. 자신보다 랭킹이 낮다는 점 때문에 방심한 탓도 있겠지만, 서필지가 S급 9위에 걸맞은 초월적인 신체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즉, 서필지의 도청 능력은 랭킹의 산정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실제로는 랭킹보다 더 강력한 어벤저란 의미다.
그렇기에 아가임은 자신이 진가충에게서 받은 명령을 무시하고 태업하고 있는 것부터 유곽희를 따르고 있다는 것까지 서필지에게, 그리고 진가염에게도 줄줄 새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서필지가 도청해 온 내용을 들은 진가염은 흐응,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철가면, 예상보다는 쓸 만한 인재인 모양이로군.”
“도청 건에 대해서는 아가씨와 아가임 선배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눈치를 챘을 수도 있습니다.”
“흠, 후후. 뭐, 상관없지.”
와인을 다시 한 모금 삼킨 후, 진가염은 그 와인 잔도 내팽개쳤다. 챙그랑.
“이 소리가 좋단 말이야. 이 비주얼도 말일세. 가히 예술적이지.”
서필지는 그런 진가염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새로운 와인 잔을 꺼내들어 채울 뿐이었다.
“묻게.”
진가염은 새로운 와인 잔을 받아 들며, 문득 말했다.
“왜 유곽희 아가씨를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겁니까?”
서필지는 마치 미리 정해진 대사를 읊듯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진가염은 흥겨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곽희라는 여자가 우리 가문에 원한을 가지고 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해. 진현우에게는 첫사랑의 남자를 살해당하고, 진가충에게는 정조를 빼앗겼지. 그리고 나한테는 어쨌든 그 배로 낳은 자기 자식을 빼앗겼어. 이런 짓을 당하고도 원한을 가지지 않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지.”
하하하하, 하고 한 번 웃은 뒤에나 진가염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원한을 품지 않은 것처럼, 도리어 자기 ‘가짜’ 자식인 진남에게 WF를 물려주도록 획책하는 것처럼 보이려는 노력이 가상하지 않나? 내 손바닥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보는 기분이야. 그것도 아주 실감나는!”
챙그랑. 또 한 번 와인 잔이 깨졌다.
“엔터테인먼트!”
새로운 와인 잔을 받아든 진가염은 한 번 와인으로 목을 축이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나는 온갖 사치와 향락을 즐겨왔네. 이제 와서 영화 따위로, 연극 따위로 날 만족시킬 수는 없지. 돈을 뿌리면 그걸 줍느라 여념이 없는 놈들한테는 질렸어. 누구나 설탕을 좋아하듯 아양과 아첨을 좋아하지만, 설탕에도 사람은 질리게 마련일세.”
다시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며 진가염은 말했다.
“그런 점에서 유곽희는 대단히 재미있는 관찰 대상이지. 아주 흥미로워.”
진가염의 손목이 문득 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 손에 쥐여진 잔의 움직임은 멈췄지만 와인은 그 잔 안에서 계속해서 물결치고 있었다.
그 잔을 진가염은 테이블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흥미롭다는 점에 있어서는 나의 조카인 현우도 참 흥미롭지.”
“진현우 도련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서필지는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그가 그러든, 말든 진가염은 계속해서 떠들었다.
“유곽희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자기 딸인 진남을 현우에게 맡겼거든. 뭐, 그 여자도 현우가 자기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을 테니, 나름 잘 돌봐주리라고 생각이라도 한 거려나?”
채워진 잔을 다시 들어 올리며 진가염은 큭큭큭 웃어대었다.
“하기야 뭐, 현우도 실제로 진남을 꽤 귀여워했던 모양이니 그렇게까지 틀린 판단은 아니었지.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던 모양이던데. 참 내, 그놈도 참 재미있는 놈이야.”
진가염은 와인 잔을 휙 집어던졌다.
“기억나나? 진가충이 죽었을 때 말이야.”
“작은 주인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죽은 놈은 네 작은 주인이 맞지.”
새 와인을 따르려는 서필지에게 손을 들어 멈추도록 한 뒤, 진가염은 말했다.
“그놈을 죽인 게 유곽희인 것도 기억하고 있나?”
“그렇습니다.”
“그래서 충이 놈을 되살리기 위해서 제물이 몇 마리 필요했는데, 내가 그중에 진남을 끼워 넣었거든.”
진가염은 큭큭 웃었다.
“현우, 그 녀석 반항을 하더라고. 할아버지한테 이르겠다나? 그래서 내가 말했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유곽희를 살릴 건지 진남을 살릴 건지 선택하라고.”
진가염의 목소리에 점점 더 흥이 돋았다.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지금 살아 있는 게 누군가로 대답은 정해져 있지 않나?”
“하지만 주인님, 제물은 굳이 진남이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서필지의 질문을 들은 진가염은 한 번 숨을 뚝 끊더니, 이윽고 씨익 웃었다.
“그렇지.”
그러더니 갑자기 낄낄 웃기 시작한다.
“그걸 나중에 가르쳐 줬더니 현우 녀석! 표정이! 아하하핫! 제 딴에는 사랑하는 여자를 살리기 위해 양녀를 포기한 거겠지! 사실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지를 아빠, 아빠하면서 따르던 양녀를 제 손으로 희생시킨 기분이 어땠냐고 물어보니까 나한테 덤비더라고!!”
웃음을 멈춘 진가염은 픽 웃었다.
“어디서 감히.”
서필지는 시가의 끝을 시가 커터로 잘라내고 있었다. 진가염이 손을 내밀자, 서필지는 잘라낸 시가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성냥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현우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죽었습니다.”
시가의 연기를 한껏 빨아들인 후, 진가염은 말했다.
“그거 말고.”
그 말을 예상했다는 듯, 서필지는 곧장 다음 대답을 이었다.
“시설에서 탈출했나 싶더니만, 지금은 진가충이 마련해 준 집으로 돌아가 있습니다.”
“그렇군.”
연기를 한 번 푹 내뿜은 후, 진가염이 재떨이 위에 시가를 올리자, 서필지는 작은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은 내버려 둬.”
위스키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진가염은 말했다.
“놔두면 쓸 일이 있겠지.”
마치 과자를 다 먹고 난 뒤 쓸모없어진 양철통을 어떻게 할지 말하듯.
*
같은 시각, 진현우.
“기억해 냈어……! 기억해 냈다고, 그 망할 자식!!”
그는 순조롭게 기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날 죽인… 범인!!”
그 범인의 이름은…….
“박기범! 이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식!! 너만은 내가 꼭 찾아내서 죽인다!!”
그의 두 눈동자는 분노의 불길로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