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개선
현오준 팀은 다이아 스틸 노천 광산을 발견했다.
다이아 스틸은 차원 균열에서나 소량 발견되는 희소금속인데, 그 귀한 광물이 말 그대로 그냥 산처럼 쌓여 있는 모습에 팀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대에는 지구에도 이런 식의 광산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없지만……. 사람들이 다 집어 갔으니까요.”
현오준이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광석을 주워갈 사람이 없으니, 노천 광산도 당연히 있겠죠.”
“웬디, 이것 좀 주워가도 돼?”
[이 차원 세포의 모든 것은 왕의 소유물입니다.]
웬디는 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야 웬디 입장에서는 좀 반짝일 뿐인 돌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 바가 아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권우언이 얼른 광석 하나를 집자, 불호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왕의 것입니다!]
웬디가 관리자로서 발한 ‘규칙’은 권우언에게는 제 효과를 발휘하는지, 권우언은 놀라 몸을 떨더니 얼른 광석을 다시 광산 위에 내려놓았다.
[인접한 다른 차원 세포에 더욱 가치 있는 광산이 존재합니다.]
웬디는 친절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옆에 가서 정복하고 오라는 의도가 담긴 말이었다. 만약 웬디의 ‘규칙’에 지배당하고 있었더라면 ‘퀘스트’로서 수행해야 했겠지만, 지금 다섯의 왕은 규칙 위에 존재하므로 퀘스트 또한 받지 않는다.
“정말로? 그럼 팀장님! 얼른 거기로 가죠!!”
하지만 욕망이란 때로는 명령보다도 강력한 강제성을 지니기도 한다. 구문효의 말에 최재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뇨, 구문효 씨. 그 일은 뒤로 미루죠. 저희는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현오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돌아가다니요?”
“이 노천 광산을 발견했으니까요.”
다이아 스틸 원석을 한 덩이 집어든 현오준은 권우언을 보고 말했다.
“이 원석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보고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권우언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을 터였다.
“아뇨, 팀장님. 여기에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런 현오준을 최재철이 막았다.
“그게 뭐죠?”
“강해지는 겁니다.”
지구보다 몇 배나 진한 차원력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의 수련은 현오준 팀의 면면들을 지구의 어벤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해지도록 만들 것이다. 여기에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이상, 이 기회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팀장님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이 공간의 진한 차원력……. 어벤저는 여기서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강해질 수 있습니다.”
“확실히…….”
현오준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물과 식량은 충분히 가져왔죠. 이 장소에서의 안전이 확보된 이상, 가능한 만큼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더군다나…….”
현오준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최재철 씨의 가르침을 받아보고 싶거든요. 여기서는 저도 팀장이니 뭐니 상관할 거 없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겠죠.”
권우언은 다소 불만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자신에게 발언권이 없는 걸 알고 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차원 세포에서 사흘간 체재하는 것은 그리 녹록한 일은 아니었다.
‘톨름’의 죽음은 인근 차원 세포 ‘주인’들에게 알려졌고, ‘퀘스트’를 받은 그들은 웬디의 차원 세포를 점령하기 위해 쳐들어왔다.
물론 그런 침략 행위를 당하고도 그냥 조용히 보내줄 최재철과 현오준 팀이 아니었다. 침략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이 본래 차지하고 있던 차원 세포는 현오준 팀이 점령했다.
[전 정말로 운이 좋군요!]
그런 현오준 팀의 활약에 웬디는 기뻐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정복 전쟁은 자신의 영역과 권한을 확대할 수 있는 수단이었으므로 기뻐할 만도 했다.
더군다나 침략자들의 시체는 분해되어 차원 세포를 이루는 차원력으로 환원되었으므로, 차원 세포의 관리자인 그녀의 ‘힘’도 강해졌다.
그걸 아는 최재철은 웬디에게 자신들이 처치한 침략자의 시체를 공짜로 넘기지는 않았다. 최재철은 웬디에게서 아티팩트를 뜯어내었다.
웬디 정도로 약한 관리자가 만들 수 있는 아티팩트 중 최재철에게 유용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최재철은 팀원들에게 유용한 아티팩트를 제작하도록 웬디에게 지시했다.
“저희만 이런 걸 받아도 될지 모르겠군요.”
현오준에게 주어진 아티팩트는 ‘저거너트의 벨트’. 피부를 경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허리띠였다. 신체 강화 능력만으로 신체의 내구도를 올리기는 어렵기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싸우는 그에게 잘 어울리는 아티팩트였다.
“팀장님을 제치고 제가 이 차원 세포의 왕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제 것은 뒤로 미루는 게 맞을 겁니다.”
일단은 그런 걸로 해두었다. 현오준이 납득할 만한 논리이기도 했고.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거죠?”
구문효에게 주어진 아티팩트는 ‘주시자의 안대’. 이걸 쓰고 있는 동안에는 투명체 간파와 약점 간파의 능력이 주어진다. 최재철은 그에게 시야 강화를 가르쳐 투명체 간파를 습득시키기보다는 그냥 아티팩트를 주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약점 간파는 덤이다.
“그야 활약에 따른 보상이지. 그런 걸 묻고 그러나.”
실제로 구문효의 팀 내 공헌도는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슈터로서는 물론이고 필요하면 전면에 나서서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록 신체 강화 능력은 이지희에 비해 떨어지지만 팀이 필요할 때 모자란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그의 능력은 큰 보탬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있어도 저희는 스승님보다 약한 거겠죠.”
이지희에게 주어진 아티팩트는 ‘시바의 투척 단검’. 이름이야 투척 단검이지만 그냥 손으로 잡고 휘둘러도 되고 당연히 던져도 된다.
이 투척 단검의 진면모는 어벤저 스킬을 거칠 때 드러난다. 방전 스킬을 투척 단검을 통해 발동하면 몇 배의 위력으로 증폭되며, 신체 능력 강화를 사용해 투척하면 가볍게 던져도 멋대로 가속해서 바위 정도는 손쉽게 부순다.
이지희의 능력인 방전 능력에 반응해서 투척 궤도를 바꿀 수도 있고 적에게 박아서 피뢰침처럼 뇌전을 체내로 흘려 넣는 데도 쓸 수 있다.
이미 이지희는 이 단검을 다루는 데 퍽 익숙해져 있어서 무슨 염동력으로 다루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궤도를 바꿔놓고 있었다. 그냥 앞으로 던졌다가 180도 궤적을 바꿔서 손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만들 정도였다.
“뭐, 그렇긴 하지.”
최재철은 그녀의 말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사실이 그런데 부정하는 것도 별 의미 없는 짓이다. 스승 노릇을 하고 있는데 제자 앞에서 겸양이 무슨 소용이랴.
“이래서야 S급 랭커니 뭐니 하는 것도 다 부질 없는 것 같네요.”
오연화에게 주어진 아티팩트는 ‘헤르메스의 부츠’. 간단히 말해서 비행 능력을 부여해 준다. 사실 그녀가 염동력을 다루는 데 더욱 익숙해진다면 스스로의 몸을 염동력으로 띄울 수도 있게 되지만, 최재철의 경험으론 그건 별로 효율적이지도 않았고 별 쓸모도 없었다.
비행에다 낭비할 집중점이 있다면 그냥 공격에 투자하는 게 더 낫다. 그런 점에선 이 아티팩트는 그녀에게 딱 맞았다.
“너도 여기서 더 강해졌잖아.”
최재철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연화는 여기서 염동력을 주입할 수 있는 집중점을 다섯 개로 늘렸다. 각각의 집중점에 주입할 수 있는 염동력의 출력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어서 최재철을 만족시킬 만한 성과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룰 수 있는 집중점이 많을수록 좋은 염동 능력자의 특성상 단순 계산으로도 50% 이상은 더 강해졌다.
“그렇긴 하지만요.”
그럼에도 오연화는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였다. 다른 팀원들도 이미 S급 랭커급의 강함을 갖췄다는 것을 그녀도 아는 것이다. 아직은 그녀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했다고는 하나, 그래도 본래 팀에서 절대적인 강자 역할을 하고 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조바심을 느낄 만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권우언. 그도 여기서 성장은 했다. 돌아가면 A급 판정 정도는 받을 수 있으리라. 막판에 이르러서는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고.
하지만 최재철은 그에게까지 아티팩트를 양보하지는 않았다. 대신 수십억 원 정도의 가치가 되는 다이아 스틸 광석을 그에게 주었다.
물론 이건 전략적인 계산이 깔린 보상이었다. 다이아 스틸이라는 레어 메탈을 어떤 식으로 처분하든, 그는 차원 균열 너머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이 광석을 지구에서 꺼내드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애초에 지구에서는 손에 넣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광석이니 말이다.
그리고 권우언과 권지력 이사는 이 수십억 원의 가치를 지닌 자산을 그냥 금고에만 넣어둘 성격의 인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사내의 파벌 간 암투에 몸을 던진 이유가 권력과 돈 때문일 텐데, 자신이 얻은 이 새로운 ‘힘’을 그냥 없었던 걸로 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아티팩트를 양보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최재철이 아무것도 얻어가지 않는 건 또 아니었다. 그가 웬디에게 요구한 아티팩트는 다름 아닌 열쇠였다.
어차피 지구로 돌아가면 차원 균열로의 진입권을 박탈당할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틈새 차원, 특히 웬디의 차원 세포로 돌아올 수단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이 ‘웬디의 열쇠’다.
어디서든 이 차원 세포로 돌아올 수 있는 이 아티팩트의 제작에는 웬디도 무보수로 임해주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도 차원 세포의 왕이 오래 자리를 비워서 좋을 게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이제야 돌아가는군요.”
현오준의 말에 권우언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얻은 게 있다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흘간이었으리라.
현오준 팀은 사흘 정도 웬디의 차원 세포에서 수련에 힘썼다. 가지고 온 것 중 절반 정도의 물과 식량을 소모한 셈이다. 앞으로는 열쇠를 통해 차원 세포로 돌아오면 되니 대량의 짐을 짊어지고 올 일도 이제 없을 터였다.
나중에야 열쇠를 통해 지구로 향하는 출구를 만들면 되지만, 지금은 어쨌든 알리바이 성립을 위해 나갈 때는 왔던 길로 되돌아 나가야 했다.
“나중에 다시 보자고, 웬디.”
[돌아오실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폐하.]
최재철의 말에 웬디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사도.
조상평은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본래 선배들이었던 그의 팀원들도 그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고, 팀원들은 신도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WF 소속의 어벤저였던 그들은 WFF의 현 사장 진가충의 명령으로 이지희를 납치하라는 임무를 받았다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만났다. 그리고 그의 충실한 신도가 되어 일전에는 WF를 배신하고 차원 균열을 닫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협력했다.
그것은 절대 후회할 일이 아니었다. 차원 질서를 수호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조상평은 목숨마저도 초개처럼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어떠한가.
“줄곧 당신들을 찾아다녔어요. 제 시간을 사흘이나 낭비시키다니. B급 치고는 상당한 실력이로군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조상평은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유곽희.
유연학 전 사장의 딸이자 진가충 현 사장의 부인.
그리고 그 옆에는 S급 랭커, ‘웃는 얼굴의 헌터’ 아가임이 서 있었다. 그 별명 그대로 웃는 얼굴로.
아가임이 헌터라는 별명을 얻게 된 건 말 그대로 사냥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사냥하는 건 여타 어벤저와 달리 어보미네이션이 아니다. 그의 사냥감은 다름 아닌 인간, 그중에서도 어벤저를 주로 사냥하고 다닌다.
지금 상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그들은 사냥당했다.
그들은 최대한 잘 숨어 다녔지만, 웃는 얼굴의 헌터를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다. 아니, B급 나부랭이들이 S급, 그것도 한 자릿수 랭커를 사흘이나 피해 다녔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상당한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일이었다.
‘그럼 뭐해.’
조상평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잡혔는데.’
세상에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 결과가 생과 사를 가를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열심히 싸워서 죽든, 대충 싸우다 죽든 그 결과가 똑같이 죽음이라면 과정은 별 의미가 없어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조상평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아직까지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고 구속당하지도, 제압당하지도 않은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 테지만, 저는 당신들을 잡으러 온 게 아니랍니다.”
그런데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과정이 좀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유곽희는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끌어 자신들의 유능함을 증명한 지난 사흘 동안의 고생은 결코 완전히 무의미한 건 아닌 셈이 된다.
“WF가 당신들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건 것은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WF는 당신들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릴 생각인 모양이더군요.”
유곽희의 이야기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투가 좀 이상했다. 마치 그녀 자신은 WF의 인간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CCTV에는 여러분이 침입자에게 협력하는 영상이 찍혀 있습니다.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증거가 남은 셈이지요.”
하긴 유곽희는 진가충의 처일 뿐, WF에는 어떤 직위도 권한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야 회사 중역의 가족인 것만으로 회사에 꽤 큰 영향력을 갖는 전통치고는 많이 기괴한 악습이 있긴 하지만, 정확하게 따지고 보자면 이상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닫힌 차원 균열의 가치 이상의 금액이 당신들에 대한 배상금으로 책정되어 있는 건 이상한 일이죠.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당신들이 WF의 적에게 협력했기 때문에 괘씸죄가 적용된 셈입니다만.”
그녀의 이어진 말에 조상평의 정신이 퍼뜩 들었다.
침입자.
WF의 적.
아니, 이런 단어는 포장에 불과하다. 조상평은 그를 가리키는 단어를 알고 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그 단어가 조상평으로 하여금 소인배에서 숭고한 목적의식을 지닌 질서의 사도로 변모시켰다.
“본론을 말씀하시죠.”
“제가 여러분에게 걸린 현상금과 배상금을 취소시켜 드릴 수 있어요.”
“그건 본론이 아니군요.”
조상평의 눈동자는 청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욕망으로 흐려질 영혼은 아니었다. 그는 질서의 수호자를 따르는 사도였기 때문에.
“철가면…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소개시켜 주십시오.”
유곽희의 눈동자는 탁했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인간의 눈동자였다. 그것은 야망이나 욕망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사로잡고 있는 망령의 정체는 무엇일까. 조상평은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분을 만나서 뭘 어쩌시려고요?”
“아마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과 제 목적은 일치합니다.”
그녀의 대답에 조상평은 코웃음 쳤다.
“그분의 숭고한 목적을 이해하고 계시기라도 한 것 같군요.”
“그래요. 제가 단어를 잘못 고른 것 같네요.”
유곽희는 짧게 웃었다.
“수단이 일치한다고 해야 하겠군요.”
“수단…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유곽희는 웃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형형히 불타고 있었다.
‘모를 여자다.’
조상평은 생각했다.
다시 봐도 굉장한 미녀다. 20대 후반이라고 들었지만, 10대 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앳됨을 간직하고 있었다. 철저한 관리가 뒷받침된 결과물일 터였다.
하지만 그 철저한 관리라는 게 ‘사랑받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인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다른 목적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목적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꽃의 연료일 터였다.
‘세상이라도 불태워 버릴 것 같군.’
조상평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상대는 자기보다 어린 여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게서는 자신을 압도하는 뭔가가 느껴졌다.
“죄송합니다만.”
조상평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저희는 그분의 연락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접점도 없지요. 그분께서 연락해 오시는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저희는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호호호, 하고 여자가 웃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었으니까요. 휴대폰부터 당신들의 헌터 네트워크 이력까지 싹싹 뒤졌는데도 정말로 그 어떤 접점도 없더군요.”
조상평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감각에 몸서리쳤다.
왜 이 여자를 그냥 미녀라고 생각했는가. 저 눈동자는 육식동물의 그것이 아니던가. 정체 모를 망집에 의해 흐려져 있다고는 한들, 눈앞의 상대는 자신보다 강한 생물이다.
포식자다!
헌터는, 사람 사냥꾼은 아가임만이 아니었다. 웃는 얼굴로 빙긋거리며 서 있기만 하는 저 남자는 그저 참관인에 불과하다.
조상평은 자신을 사로잡은 공포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아직 이 포식자는 자신들에게 이빨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직은 협상의 여지가 있다. 그런데 밑바닥을 보여서야 쓰겠는가.
“제가 당신들에게 원하는 건 간단해요. 만약 그를…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전해주세요. 제가 접촉하고 싶다고요. 대가는 그걸로 족해요.”
여자는 일어났다.
“당신들에게 걸린 현상 포고는 해제되었고, 당신들이 물어야 할 배상금도 없어졌어요. 그리고 지금 당장, 제가 당신들을 사냥하지 않았고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봅니다.”
어리석었다.
조상평은 통탄했다.
협상은 이미 끝나 있었다. 아니, 애초에 협상이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이쪽에서 상대에게 내밀 카드가 없는 이상, 게임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상대는 풀 하우스를 이미 내려놓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어리석은 짓이겠지만, 더 우려먹을 게 없는 상대에게 포커페이스를 굳이 유지시키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 대신이라고 하기는 좀 뭐 하지만, 더 이상 당신들은 WF 소속이 아닙니다. 범죄자도 아무것도 아닌 그냥 어벤저 신분이죠.”
“…그건 오히려 저희가 바라는 바였습니다만.”
“어라, 퇴직금도 안 나올 텐데요?”
“원래 계약직이라서.”
“아, 그랬죠.”
유곽희는 재미있는 농담이라는 듯 웃었다. 알고 한 발언인 게 분명했다.
“어쨌든 그렇게 된 거니, 잘 부탁드려요.”
여자는 그 말을 남기고 그들에게서 뒤돌아섰다. 웃는 얼굴의 헌터가 그 뒤를 따랐다.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 더 할 이야기는 없었다.
*
“S급 5위 랭커의 시간을 사흘이나 허비한 것치고는 어이없는 결과로군요.”
아가임이 말했다.
“뭐야, 불만이야?”
“제가 주인님께 어찌 감히 불만을 갖겠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리라고 믿을 뿐이지요.”
날카롭게 눈을 치뜬 유곽희에게 아가임은 공손히 허리를 숙여보였다.
“그래.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
이번 일로 쓴 카드는 많은데 얻은 카드는 없다.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공을 들이는 전략에는 포석이라는 게 깔리는 법이고, 강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항상 현명한 방법만을 택할 수도 없는 법이다. 때로는 어리석은 자의 도박수도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유곽희가 이번에 쓴 카드가 바로 그러한 카드가 될 것이다.
“다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가임의 말에 유곽희는 말없이 품속에서 가면 하나를 꺼냈다. 가면을 받아든 아가임은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은 채 혼잣말처럼 말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입니까.”
“아니, 그 가면을 똑같이 만들 수는 없었어.”
자세히 보면 가짜인 게 티가 난다. 지구의 기술로는 도저히 복제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원본은 숨구멍 하나 없이 꽉꽉 막혀 있다. 그런 걸 쓰고 어떻게 그렇게 날뛸 수 있을까.
아가임이 장소의 기억을 읽어낸 다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쓴 가면 밑의 얼굴을 투시하려고 했지만,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어벤저 스킬을 튕겨내는 기술이라도 적용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도, 즉 가면을 쓰고서도 어벤저 스킬로 바깥을 보는 건 불가능할 텐데도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잘도 날뛰고 다니고 있었다.
거기서 얻어낼 수 있는 결론.
에스파다 도 오르덴은 이계의 기술을 사용한다. 아마도 차원 균열을 넘어서 다음 세계까지 넘나든 인간일 것이다. 아예 이계의 인간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뭐 그런 건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정체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그가 그녀에게 쓸모가 있느냐, 아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느냐 였다. 그리고 이번 일은 그 중요한 건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아가임, 차원 균열을 닫아라.”
그것은 명백한 WF에 대한 배신 행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임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행하겠습니다.”
*
상황은 얼추 최재철이 생각한 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현오준 팀이 권우언을 납치하고 차원 균열로 끌고 간 건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쳐졌다.
그 대신, 차원 균열 너머에 대한 보고서는 권우언의 것이 채택되었다.
어디서나 쉽게 일어나는 실적 가로채기다. 뭐, 어떤 의미에서는 거래라고 볼 수 있는 면도 있긴 있다.
현오준 팀을 아예 파묻어버리는 방법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서야 권우언이 가져온 다이아 스틸 원석의 출처가 애매해진다.
권우언이 혼자 차원 균열을 돌파하고 틈새 차원까지 가서 가져왔다는 시나리오는 대단히 영웅적인 대신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결국 현오준 팀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했다.
그래서 권우언이 집필한 보고서에는 현오준 팀의 실적도 실제보다는 축소된 형태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보복보다는 실리를 중시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보복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현오준은 팀장 자리의 직위 해제, 최재철과 오연화는 권우언 팀으로의 보직 변경, 이지희와 구문효는 각각 다른 팀에 배속되었다.
실질적으로는 현오준 팀의 해체를 뜻하는 회사 측의 이 노골적인 처분에 그들은 별로 분노하지도 않았다.
예상하던 바이기도 했고, 그에 대한 대응도 이미 이야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단히 유감스럽습니다.”
권우언이 직접 와서 유감을 표명한 건 다소 의외인 일이었다.
“당신들처럼 유능한 인재를 잃는 건 회사로써도 큰 손해인 일입니다만, 제 아버지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결국 자기 보신이 중요한지라 이런 선택을 강요하게 만드는군요.”
자기 파벌이 아닌 세력이 커지는 걸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다. 권지력 이사는 그렇게 판단했다. 그래서 현오준 팀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것을 선택했다.
“당신의 그 스스로가 나쁜 놈인 걸 부정하지 않는 면은 저는 좋아합니다.”
현오준이 보기 드물게 다소 비꼬듯 말했다. 그러나 그런 현오준의 말에도 권우언은 별로 기분 나빠 하지는 않았다.
“역시 퇴사하실 겁니까?”
“그렇게 되겠죠.”
어쩌면 어리석다는 말을 들을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기껏 대기업에 취직했는데 퇴직해서 길드 소속 신분으로 돌아가다니. 십중팔구는 바보 같다고 평가하리라.
하지만 구 현오준 팀원 다섯 명은 모두 같은 선택을 했다.
퇴사, 그리고 길드라는 형태로 팀을 유지하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권우언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그저 그냥 사이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것 밖에 더 됩니까? 그 잘난 S급의 어벤저 스킬을 어디다 쓸 겁니까?”
사회적인 인식으로는 어벤저만 되면 인생이 확 펴는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상위 1%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건 어벤저 업계도 똑같다.
한국의 차원 균열은 거의 대부분이 기업 소유이다. 나머지는 국가 소유이고. 길드 소속 어벤저가 빛깔만 좋은 개살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 소유의 차원 균열 헬필드에는 당연히 자사 소속 어벤저만 들여보낸다. 국가 소유의 차원 균열 헬필드에는 군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길드 소속 어벤저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정해진 곳이 없다. 운 좋게 기업이나 국가의 외주라도 받지 않는 이상, 길드 소속 어벤저가 끼어들 곳은 없다.
헬필드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는데 어디서 어보미네이션을 상대할 것인가? 헬필드 바깥에서는 현대 화기도 충분히 통하는데!
간혹 차원 균열과 관계없는 곳에서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나도, 이것마저 기업 소속의 특수부대가 특수 장비로 어보미네이션의 출현을 감지하고 헬기를 타고 날아와서 처치해 버린다.
기업이나 국가에서 주는 외주 업무를 받아먹지 않으면, 어벤저는 인식만큼 벌어먹지 못한다. 어벤저들의 주 수입원이 어보미네이션 시체의 거래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헬 필드에 출입하지 못하는 어벤저들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백수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 의미에서 권우언의 발언은 아주 타당했다.
다만 그가 모르는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최재철이 차원 세포로 직행하는 열쇠를 손에 넣었다는 것과 더 이상 TA가 소유한 북한산 차원 균열을 경유해 틈새 차원으로 갈 필요가 없다는 것. 물론 현오준 팀은 일부러 권우언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애초에 권지력 이사가 현오준 팀을 해체해 버리려고 한 이유가 다이아 스틸의 채광권을 손에 넣기 위한 것이었다. 그 막대한 이권을 자신들의 파벌인 권우언 팀을 움직여 흡수하기 위한 의도였다.
현오준 팀을 내쫓는다고는 해도 퇴사할 인원은 적을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기는 했을 것이다. 현오준 정도면 퇴사시키고 다른 인원을 흡수할 수 있다면 차원 균열 재탐사도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고 회사 전체의 입장에서도 출혈이 적을 테니까.
그런데 현오준 팀의 다섯 명은 보통이라면 생각할 수 없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 권지력과 권우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 만도 했다. 회사 입장에서도 출혈이 크고 다섯 명 모두 인생을 버리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오준 팀은 최재철이 왕의 권한을 가진 차원 세포에서 성장도 도모할 수 있고, 주변 차원 세포를 점령하고 희귀 어보미네이션을 사냥할 수도 있다. 여기에 다이아 스틸 광산이라는 안정적인 수입원까지 갖췄다.
사회적인 인식만 제외한다면 당연히 퇴사를 선택하는 게 더 이득인 상황이었다.
“좋지 않습니까? 어벤저 동호회 같고.”
현오준이 그런 걸 일일이 설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그저 그냥 쓴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권우언의 말을 받는 것으로 충분했다.
권우언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문득 명함을 내밀었다.
“제 사적인 전화번호입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권우언 팀장으로서는 별 도움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만, 저 권우언 개인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이었기에, 현오준도 옆에서 듣고 있던 최재철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희에게 적대 의식을 가진 게 아니었습니까?”
“그건 제 소속과 당신 소속이 적대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오준 팀장… 아니, 이제 그냥 형이라고 부를까요?”
“그건 됐습니다.”
현오준이 바로 손을 내저으니 권우언은 살짝 삐친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쨌든 틈새 차원이라는 곳에서의 당신들과 함께한 모험은 저한테는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뭐… 그것도 지나간 일이라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거겠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권우언은 다소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그의 표정은 변했다.
“어쨌든 그런 추억을 함께 남긴 사람들에게 저 개인적인 호의 정도는 표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권우언은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소탈한 미소를 보였다.
“귀하의 앞날에 무궁한 발전이 있길 빕니다.”
그런 말을 남기고, 권우언은 현오준 팀의 사무실을 나갔다.
“…권우언 팀장이 저런 사람인 줄은 몰랐네요.”
구문효가 말했다.
“그냥 재수 없는 금수저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오연화가 한 마디 더했다.
“그 말은 좀 심하지 않아? 뭐, 나도 동감이긴 하지만.”
이지희도 쓴웃음을 지으며 오연화의 말을 받았다.
“뭐, 저 사람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였듯 우리도 저 사람한테 개인적인 호의를 보일 기회가 한 번 정도는 오겠죠. 그런 식으로 생각해 둡시다.”
현오준이 그렇게 정리했다.
“자, 그럼…….”
현오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그 자신의 것을 포함한 다섯 장의 사직서가 들려 있었다.
“가볼까요?”
이 사직서를 제출하면 이제 그들은 더 이상 TA의 소속이 아니게 된다.
최재철로서도 김인수로서도 불과 열흘뿐이긴 했지만 처음으로 대기업 정규직 사원이라는 명함을 가져보았다. 남은 인상이란 그 정도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최재철이 말했다. 이미 이 팀의 중심은 최재철로 옮겨가 있었다. 그리고 본래 팀장의 입장이었을 현오준도 그것에 대해 별로 불쾌하게 여기거나 반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오히려 현오준 자신이 나서서 최재철의 부하라도 된 양 대답했다.
*
새로운 길드의 이름은 ‘현오준 길드’. 길드장은 현오준이다. 여기까지 와서 주목을 받는 걸 두려워하는 것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만약의 사태까지 대비하는 의미에서 최재철은 이번에도 그림자로 들어가는 걸 택했다.
“사실상의 길드장은 최재철 씨 아닌가요? 제가 귀찮은 일만 떠맡게 되는 것 같은데.”
현오준은 조금 투덜거렸지만 최재철의 의견을 수용했다.
다소 갑작스러운 길드의 설립이기에 길드 사무실은 아직 마련해 놓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임시로 최재철이 소유한 빌라 건물의 방 하나를 사무실로 쓰기로 하고, 공방용으로 치워놓은 곳을 훈련장으로 쓰기로 했다.
하기야 길드 중에는 사무실을 가진 경우가 더 드물 정도고 실질적인 훈련은 웬디의 차원 세포로 가서 할 테니 최재철이 크게 희생할 건 없었다. 그냥 모일 필요가 있을 때 적당히 정해진 장소를 제공한다는 측면이 강했다.
“사측에서 제공해 주던 가죽 갑옷이나 철검 같은 장비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건 약간 아쉽기는 하네요. 차원 균열 내부 전용 장비를 만들어주는 곳은 한정되어 있으니.”
“그쪽은 뭐… 따로 인맥을 터야겠지요.”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어서 만들어달라고 하는 건 간단하다. 돈을 주고 사오면 된다. 하지만 그 물건을 신뢰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대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광고하면서 실제로는 강철판을 떼다 만드는 경우도 있고, 그냥 옛 방식 대로 만든 건 맞는데 실전용으로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품질의 물건을 만드는 경우도 있다.
결국 진짜배기 가죽장이나 대장장이를 찾아다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장사를 하지 않고 정해진 곳에서만 수주를 받아다 한정 수량만 주문 제작 방식으로 생산을 한다. 옛날 방식대로 만드는 데는 손이 아주 많이 가고 생산성이 매우 떨어지니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정해진 곳’이 길드가 될 확률은 아주 낮다. 국가나 기업에서 아예 몇 년 치 생산량을 미리 주문해 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그냥 돈을 얹어다 주는 걸로는 부족하다.
적어도 아는 사이 정도는 되어야 국가나 기업의 납품 수량을 채우기 전에 짬을 내서 주문을 받아주기라도 해줄 것이다.
인맥을 뚫어야 한다는 최재철의 말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죠.”
오연화가 심드렁하니 한 마디 얹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야, 연화야, 앞으로의 일이 걱정이야?”
“아뇨. 전 지금 일이 걱정이에요.”
최재철의 물음에 오연화는 최재철을 쏘아보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요즘 저보다 다른 사람들하고 대화를 더 많이 하는 것 같아서요.”
“사저, 그거야 길드를 창설한 지 얼마 안 됐으니…….”
“사제는 빠져요!”
오연화와 구문효의 사이는 여전히 그다지 온화하지는 못하다. 그나마 사제라는 호칭을 써준다는 점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선생님, 저 진짜로 여기 들어와서 살면 안 돼요?”
오연화의 화제가 또 데굴데굴 바뀌었다.
“너, 이제 지희랑 같이 산다고 그러지 않았냐.”
혹시나 WF 측에서 또 납치하려는 시도가 이어질 수도 있어서, 최재철이 그렇게 조언했었다. 오연화 본인도 넓은 집에서 혼자 사는 걸 외로워하는 것도 같았고, 결국 두 사람 다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이번 퇴사를 계기로 나갈 돈도 아낄 겸 이지희가 오연화의 집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래도 여기 사는 게 더 낫죠. 뭐, 지희 언니도 같이 오면 되고요.”
오연화는 태연하게도 말했다.
“뭐?!”
갑작스럽게 뛴 불똥에 이지희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쵸, 언니?”
불똥을 던진 본인은 어디까지나 태연했다. 심지어 이지희를 놀려 먹는 게 재미있는 듯 빙글빙글 웃기까지 시작했다.
“안 돼.”
최재철은 딱 잘라 거절했다.
“직장이랑 집이랑 너무 가까우면 안 좋아.”
“선생님도 지금은 아예 사무실 옆에서 사시잖아요?”
“지금이야 돈 아끼려고 이러는 거지. 길드 업무가 궤도에 오르면 새 사무실을 구할 거야. 그렇죠? 길드장님?”
최재철은 현오준에게 화제를 돌렸다.
“길드장… 그거 저입니까? …그냥 최재철 씨가 해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와서 또 왜 그러십니까. 이미 정해진 거잖아요. 서류도 다 올렸는데.”
구문효가 싱긋거리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길드 등록 신청을 구청에다 이미 제출한 뒤였고, 그 서류에는 길드장의 이름으로 현오준의 이름 세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쨌든 오늘은 장비가 없으니 차원 세포로 향하긴 좀 그렇군요. 이대로 차원 세포로 가면 알몸이 되어버릴 테니, 최소한 천연 소재로 만든 옷이라도 장만해야겠어요.”
마침 최재철은 일주일 전에 정장을 주문해 둔 터였다. 장인이 한 땀 한 땀 직접 만드는 거라 쉽게 완성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완성품이 손에 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걸리리라.
“그럼 어쨌든 오늘은 이걸로 해산하도록 하죠.”
현오준의 말로 해산이 결정되었다.
“사저들, 제가 차로 모시겠습니다.”
구문효가 나섰다.
“필요 없어요.”
오연화가 거절했다.
“연화야, 타고 가라. 이 밤중에 여자애를 혼자 보낼 순 없잖니.”
“선생님이 데려다주세요.”
그렇게 오연화는 3분 정도 앙탈을 부렸지만 종국에는 순순히 구문효의 차를 타고 귀가했다. 물론 이지희도 함께였다. 지금 두 사람은 함께 살고 있으니 당연하다.
“자, 그럼.”
현오준이 말했다.
“드디어 우리 둘만 남았군요. 두근거리는데요?”
“그러게요.”
최재철은 웃으며 현오준의 농담을 받았다.
“이 날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생각해 보면 이상했다. 일이 너무 잘 풀렸다.
최재철은 C급 라이센스를 따고 며칠 지나지 않아 TA의 서류심사를 통과해, 현오준에게서 면접을 받아 TA에 입사했다. 그리고 바로 그 날, 현오준의 ‘접대’를 받았다.
그 다음 주 월요일, 첫 출근을 한 최재철은 현오준 팀에 참가했다. 거기에는 S급 랭커인 오연화와 S급이 되고도 남을 재능의 소유자인 구문효가 있었다.
그리고 다소 불미스럽게 퇴사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최재철은 현오준과 이지희를 포함해 최상급의 어벤저 인재를 얻을 수 있었다.
최재철에게 있어서는 최상의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TA 내부에서 위로 향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실적을 쌓고 정보를 얻은 후에 자기 팀을 꾸려 나오는 것이 그의 목적에는 좀 더 잘 부합하니까.
이렇게까지 마치 누가 미리 시나리오를 짠 것처럼 일이 잘 풀릴 수가 있을까?
아니, 일은 잘 풀릴 수 있다. 거기에는 우연이 작용할 요소가 있으니까.
하지만 현오준이라는 인물은 명백하게 이상하다.
자신보다 어린, 입사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신입 사원에게 팀의 주도권이 넘어갈 위기에 처해 있는데도 그냥 넘어갈 성인 남성은 드물다. 적어도 무기력하게나마 불쾌함이라도 느껴야 정상이다.
그러나 현오준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그것도 흔쾌히 팀의 주도권을 최재철에게 넘겨주었다. 다시 생각해 보면 그의 협조가 있었기에 일이 이렇게 잘 풀린 것이다.
현오준의 입장상 자신의 위치를 위협하는 최재철의 방해를 해도 모자랄 판에 협조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현오준 본인이 보살에 가까운 인격자라는 가설도 내놓을 수는 있겠지만, 최재철은 요 열흘간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가설은 참이 될 수 없다. 최재철이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현오준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최재철은 오늘 그걸 물어볼 셈이었다.
“비밀 이야기를 시작하죠.”
그런데 현오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당신의 비밀 하나를 알고 있습니다, 최재철 씨.”
현오준의 말을 들은 최재철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야 했다.
최재철의 비밀은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김인수의 존재다. 적의 뒤에서 기습적으로 비수를 꽂기 위해 지금껏 감춰온 그의 진정한 정체.
그걸 현오준이 알아채고 있다는 거라면…….
‘죽여야 할 수도 있겠군.’
최재철은 최악의 사태를 대비했다.
“아, 걱정하지 마시길. 그 비밀로 협박을 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지금껏 제가 당신을 제 팀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신다면, 제가 섣불리 당신을 적으로 돌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건 납득이 가는 논리였다. 여기까지 오기 위한 시나리오를 짠 게 현오준 본인이라면 모든 게 설명이 가능하다. 최재철은 가능성이 높은 가설 중 하나로 이미 그걸 떠올리고 있었고, 현오준 본인이 지금 그걸 긍정했다. 납득이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그 제 비밀이라는 게 뭐죠?”
최재철은 냉정을 되찾고 물었다.
“당신의 목적입니다, 최재철 씨.”
“목적이요?”
최재철에게 있어서 생의 목적이란 단 하나뿐이었다.
복수, 완전무결한 복수.
진가규를 완벽하게 짓밟아 없애는 것.
이걸 알고 있다고?
최재철은 현오준의 막 벌어지기 시작한 입술에 주목했다.
“WF에의 복수죠?”
현오준이 말한 대답은 완벽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진실에는 꽤 근접해 있었다.
최재철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을 보니 제가 정답을 말한 것 같군요.”
최재철의 날카로운 눈빛을 바라보며, 현오준은 오히려 안도하면서 말했다.
“이 세계의 당신도 저와 같은 목적을 품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현오준은 계속해서 말했다.
“저도 제 비밀 하나를 말씀드리도록 하죠. 그게 공평할 테니까요.”
의미심장한 3초간의 침묵 끝에 현오준은 마침내 입을 열고…….
“사실 저는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이렇게 말했다.
*
“저는 전생에 기자였습니다.”
현오준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전생이라는 단어에서 조금 오해가 발생할 수 있겠군요. 이번이 두 번째라는 말에서 예상은 하셨겠습니다만, 그 전생에서도 저는 현오준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 죽고, 다시 과거로 돌아왔죠. 그 과거가 지금, 그러니까 현재입니다만.”
“백 투 더 퓨처 같은 건가요?”
최재철은 20세기의 영화를 예로 들었다. 김인수의 나이라면 본 게 이상하지 않지만, 최재철이나 현오준의 경우라면 약간 고전 영화라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행히 현오준도 그 영화를 본 것인지, 턱에 손가락을 짚은 채 약간 생각하다 대답했다.
“뭐, 그렇다고 볼 수 있겠군요. 좀 다르긴 하지만요. 굳이 따지자면 터미네이터 쪽이 더 가까울 것 같군요.”
아무래도 현오준은 상당한 영화광이었던 모양인지, 또 다른 20세기의 영화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음… 이것도 좀 다른가. 두 작품 모두 미래의 자신이 직접 과거로 오는 거지만, 저 같은 경우는 미래의 기억을 가진 채 다시 어려진 케이스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 건지, 최재철은 대충 예상이 갔다. 하지만 그는 굳이 입을 벌리지 않고 이어질 현오준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전생에서 저는 최재철 씨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 인터뷰 내용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WF가 차원 균열을 열고 다니고 있다는 내용의 인터뷰였죠. 그리고 차원 균열이 이 지구라는 차원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도요.”
현오준의 목소리에서 열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특종이라고 생각했죠. 전 인터뷰 내용을 바로 기사화시킬 생각이었습니다. 딱히 정의감 때문이 아니라, 제가 기사로 주목받을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긴 합니다만.”
현오준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이 제 특종을 편집장이 막더라고요. 제 인생을 바꿔놓을 대특종인데! 뭐 물론, 지금 다시 생각하면 막을 만한 내용이기는 했습니다만, 당시의 저는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다시 통쾌함이 느껴지는지 현오준은 씨익 웃었다.
“그래서 기습적으로 기사를 냈고, 그 특종 단독 기사로 거대한 반향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단번에 유명 인사가 됐죠!”
그리고 WF의 심기를 상당히 거슬렀을 테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현오준의 표정은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 결과, 저는 납치당했습니다.”
표정과 달리 현오준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담담했다.
“그 사람들은 절 ‘공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온갖 고문을 다 당했죠. 그런데 그 고문이란 게 제게서 어떤 정보를 끌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절 괴롭히는 게 목적이었고, 절 궁지로 몰아붙이는 게 목적이었죠.”
마치 자기 일이 아닌 듯, 현오준은 태연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지금 다시 떠올리자면 그 사람들은 절 어보미네이션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들은 거길 공장이라고 불렸으니까……. 아마도 어보미네이션을 만들어내는 공장이었겠죠. 말하자면 어보미네이션 공장이라고나 할까요.”
그 이야기는 최재철에게도 다소 충격을 주었다.
지금의 지구에서는 인간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WF는 그 정보를 독점하고, 이용하려고 들었다.
그게 바로 어보미네이션 공장이라는 광기의 산물이었다.
사람을 어보미네이션으로 만든 후 죽여서 그 시체를 자원으로 사용한다. 상상은 해볼 법했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건 다르다.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환산하는, 인간성을 버린 인종에게나 가능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궁지에 몰린 저는 그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힘이 필요한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면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린다는 걸 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최재철 씨, 당신이 알려준 것이니까요. 그래서 전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현오준의 눈빛이 빛났다.
“날 과거로 보내 달라… 고 말이죠.”
그렇게 된 거였다. 최하급 계약마와의 계약으로 현오준은 과거로 돌아오는 것을 택했다. 아마도 ‘그’ 현오준은 시간을 되돌리기 위한 대가로 어보미네이션이 되어버리고 말았겠지. 그리고 WF에게 살해당해 어보미네이션 시체라는 ‘자원’이 되었을 것이다.
“…절 원망하거나 하지 않으셨습니까?”
최재철은 그렇게 되물었다.
“아마 ‘그’ 최재철도 당신이 그런 기사를 내보내면 WF가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당신과 그런 인터뷰를 했다는 건…….”
‘이전 세계’의 나는 당신을 내 복수를 위해 이용했어.
최재철은 그렇게 말을 맺지 못했다.
그리고 김인수는, 지금의 김인수도 그렇지만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복수가 우선이고, 그때도 그랬을 테니까.
그러나 최재철의 말을 들으며 현오준은 싱긋 웃었다.
“당시의 최재철 씨도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 상관없다고 대답했죠. 그때의 저는 기자였으니까요. 그렇게 행동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어쩌면 그때의 현오준이 가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욕구는 김인수의 복수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전 미래의 기억을 지닌 채 과거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제게 남은 것은 오직 기억뿐이고, 다른 능력은 모두 상실된 채더군요.”
그야 그렇다. 회귀란 건 그 본인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번 차원’의 기억을 ‘다음 차원’의 본인에게 쏴주는 것에 가깝다. 회귀를 했다고는 하나, 두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럽지만 제가 복싱과 태권도를 좀 했었는데 뒤돌려 차기도 제대로 못 하고 휘청거릴 땐 좀 암담했습니다. 이건 지식 쪽도 마찬가지라, 영어랑 중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다 잊어버렸더군요. 제가 가진 건 말 그대로 미래의 기억뿐이었습니다.”
그러니 회귀를 하게 되면 현오준처럼 당연히 어벤저 스킬은 물론이고 손에 익은 기술이나 공부한 지식마저도 모조리 상실된다.
그래도 현오준은 운이 좋은 편이다. 회귀에 대한 정보가 없는 인간 치고는 꽤 성공적으로 회귀한 편에 속한다.
지나치게 어린 상태로 회귀하게 되면 어린 아이의 미성숙한 뇌에 성인의 기억을 전부 저장하지도 못한다. 기억마저도 날아가는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 해도 상당히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알고 있는 저는 조금쯤은 다른 사람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서 어벤저 능력을 각성하고 신체 강화 능력을 단련해서 A급 어벤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TA에 입사하게 되었죠.”
그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다. 단순히 궁지에만 몰린다고 최하급 계약마가 슥 나타나는 건 아니니까. 그는 아마도 여러 번 생명의 위기를 넘겼을 터였다. 그것도 스스로 나서서.
하지만 그 이야기는 현오준은 하지 않았다. 대신 그가 말한 건 더욱 긍정적인 이야기였다.
현오준이 A급 어벤저가 되었을 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어벤저가 드물었고, 그만큼 대우도 좋았다고 한다. WF에서도 바로 러브콜을 받았다며 그는 웃었다.
“전생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냥 이대로 떵떵거리며 사는 건 어떨까 생각한 적도 있습니다.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WF에 대항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거든요.”
현오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런데 당신을 발견한 겁니다.”
그의 눈이 진지하게 빛났다.
“최재철 씨.”
그의 손가락이 최재철을 가리켰다.
“당신을.”
*
“사실 ‘지난 세계’와 ‘이번 세계’가 완전히 같지는 않더군요. 저 말고도 ‘회귀’한 사람이 있었는지, 변수는 꽤나 많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제 ‘미래’에 대한 기억은 그리 신뢰가 가지는 않을 겁니다.”
현오준은 정확하지 않은 기억에 의존해 주식에 투자했는데, 그걸로 큰 손해를 봤던 모양이었다. A사에서 개발되어야 했던 기술이 B사에서 몇 달 먼저 나와 버리거나 하는 일이 발생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동료들을 미리 제 팀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지난 세계’에서 당신은 이 팀을 만드는 데 3년 정도는 걸렸을 겁니다. ‘차원 너머’로 가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테고 말입니다.”
현오준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당신을 위해 이 팀을 미리 준비하는 건 가능했어도 정작 당신이 이번 세계에도 존재하는지, 그리고 당신의 목적이 똑같을지는 저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변수가 많았으니까요.”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리 찾아도 이 업계에서 최재철이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동명이인은 많이 찾아냈습니다만, 다들 어벤저도 아닌데다 무엇보다 WF에 원한이 있어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그야 현오준이 최재철을 찾아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김인수가 10년 만에 지구로 돌아오기 전까지 ‘어벤저 최재철’은 존재하지 않았다.
‘진짜 최재철’은 어보미네이션이 되어 존재를 잡아먹히는 대가로 자신을 궁지로 몬 인간들을 참살한 후 TA의 특수부대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후에야 ‘어벤저 최재철’이 지구에 등장하고, 그가 어벤저 네트워크에 이력서를 올렸고, 현오준은 그 이력서를 발견해서… 여차저차 해서 지금에 이른다.
그런 이야기였다.
“이번 생에서는 WF를 건드리지 않고 그냥 편하게 산다? 그랬을 수도 있겠죠. 그럴 생각이 제게도 있었습니다. 만약 WF가 너무나도 명백한 악이 아니었다면, 전 그냥 제가 새로 얻게 된 어드밴티지를 활용해서 부와 명예를 손에 쥘 수 있었을 겁니다.”
자신의 내면에 그런 욕망이 있었다는 것을 현오준은 다소 냉소적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WF는 명백히 이 차원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당들입니다. 이번 세계에서도 그렇다는 건 이미 확인했습니다. 저는 별로 정의의 사도 같은 건 아닙니다만, 악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그저 그것 자체로 상당히 불쾌한 일이더군요.”
진지하게 그렇게 말한 현오준은 문득 멋쩍은 듯 웃었다.
“…뭐, 그런 것보단 절 죽인 WF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긴 하지만요.”
현오준의 입가에서 다시 미소가 자취를 감췄다.
“어쩌면 헛된 짓일지도 모르지요. 살해당한 건 ‘지난 세계’의 저이고, 저는 아직 WF에게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복수하고 싶습니다. 전생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고, 그 날의 고통 또한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오준은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만약 복수할 방법이 없었더라면 전 포기했을지도 모르죠. WF는 여전히 강대하고,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수단을 발견했습니다.”
현오준의 시선이 최재철을 향했다.
“최재철 씨, 당신이 제게 있어서의 그 수단입니다. 사람을, 타인을 수단으로 삼는다는 건 그 사람에게 상당히 실례인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 수단과 방법을 가릴 생각이 그다지 없습니다.”
현오준의 눈빛은 형형히 불타고 있었다. 그 불길의 장작은 분명 복수심이었다.
*
현오준의 이야기는 최재철, 즉 김인수에게 있어서는 그저 확인 작업에 지나지 않았다. 유력한 가설 중 하나가 참인 것으로 밝혀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오준이 이런 이야기를 터놓고 해준 건 김인수에게 있어서도 기쁜 일이었다.
정말로 신뢰하지 않고서는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자칫 잘못하면 머리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더 나아가 자신을 이용하려 들 수도 있으니. 아무한테나 할 이야기는 아니다.
그만큼 현오준이 최재철을 신뢰했기에 이렇게 둘만 남을 기회를 노려 자신의 비밀을 밝힌 것이다. 이걸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위 말하는 ‘회귀자’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김인수가 거쳐 온 이계에서도 회귀를 해온 인물이 있지만, 그런 인물들의 영향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다.
그 이유는 현오준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났듯, 그들이 알고 있던 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회귀자가 현오준 단 한 명이고, 지구라는 차원이 안정되어 있었더라면 현오준은 혼자서 역사를 바꿔놓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회귀 전의 세계와 회귀 후의 세계는 ‘다른 차원’이다. 똑같아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그러니 인접한 다른 차원도 전혀 다르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주변 차원의 영향 또한 두 차원이 전혀 다르게 받는다.
지금 지구는 차원 균열로 인해 주변 차원의 영향을 받아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있는데, 회귀 전에는 일어났던 지진이 회귀 후에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아예 다른 곳에 화산이 터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자연재해는 인간의, 민족의, 나라의 미래를 크게 뒤바꾸어 놓는다. 결코 작은 변수가 될 수가 없다.
거기에 회귀자 다수가 서로가 서로의 변수가 되어 뒤엉켜 버리면, ‘미래를 알고 있다’는 장점은 ‘미래를 불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미래를 알고 있다는 확신 또한 회귀자들의 큰 빈틈 중 하나다. 현오준이 A라는 회사에 투자했다가 확 말아먹은 게 좋은 예다.
다른 회귀자가 회귀 전에서는 A에서 개발한 기술을 B라는 회사에 들고 가버렸다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탓에 현오준은 모아둔 돈을 거의 다 날려야 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확신을 못 해서 올인 정도는 하지 않았으리라. 적당히 분산투자로 위험을 줄였겠지만, 미래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과감한 투자를 하게 했고 큰 실패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한 번 그렇게 크게 데이고 나면, 이제 회귀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대로 세상에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소극적이 된다. 자신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회귀자도 그냥 일반인이다. 이런 사람들을 단지 그 사람들이 회귀했다는 이유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예외는 있다. 누군가에게서 원한을 산 자들은 그들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복수심을 가슴에 품은 자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한 번 크게 실패해 데였다고 한들, 복수를 위해서라면 회귀 전의 기억을 어떻게든 활용하려 들 것이다.
현오준이 그 좋은 예이다.
현오준도 ‘이 세계’의 WF가 자신이 ‘여전히’ 증오해야 할 대상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여러모로 조사를 한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 변수에 의해 바뀌어 버린 세상인지라, 자신의 원한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을 테니까.
만약 몇 가지 변수로 인해 이 세계의 WF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구원자로 뒤바뀌어 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현오준도 자신의 복수심을 묻어두고 개인의 영달을 마음껏 추구할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누구에게든 불행히도 WF는 이 세계에서도 정의의 적이다.
그렇다면 복수심을 묻어둘 이유 또한 없다.
“복수를!”
그렇게 외치며 김인수와 잔을 나누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부로, 새로운 현오준의 길드는 더 이상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목적의 조직이 아니게 되었다.
*
‘내가 왜 이지희에게 집착하게 되었을까.’
진가충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계기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냥 첫눈에 반했다, 면 끝날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첫눈에 반한 계기가 떠올라야 했다. 멀리서 얼굴이라도 봤든가, 그런 에피소드가.
떠오르질 않았다.
기억에 결손이 있다는 걸 처음 자각한 건 언제일까. 사실 오래전부터 자각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뭔가를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렇게 잊었다는 것조차 잊은 채 살아왔었다. 그런데 하필 요즘 따라 다시 떠오르는 게 많다.
언제부터일까.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등장한 후부터일까. 그 불쾌한 존재가 그의 기억 어딘가를 자극하여, 그 자신조차 잊고 있던 옛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기라도 한 건가.
‘정확하진 않군.’
차라리 진현우, 그 녀석이 행방불명된 이후가 더 딱 들어맞는다. 그 전처와 그 사이의 아들이 한 번 죽고, 다시 되살아나서, 또 행방불명된 게 그의 기억을 자극시키고 있다는 게 인간적으로는 더 와 닿는다.
그가 평범한 아버지였다면.
‘하, 웃기는군.’
그는 진현우에게 어떤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
걸리적거리는 녀석이었을 뿐이다. 보고 있자면 불쾌해지는 녀석.
그래서 내쫓았다. 진현우를 좋아하는 그의 아버지, 즉 진가규의 심기를 거슬리지 않기 위해 집과 돈을 안겨주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것도 아까웠다.
그냥 나가뒈졌으면.
그게 솔직한 생각이었다.
왜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까지 귀찮게 여기게 되었는지는 진가충은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떠올릴 필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잘 생각해 보니 유곽희와 결혼한 지는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었다.
그녀와의 사이에 진남이라는 딸을 낳았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진남의 이름은 진가충이 직접 붙였다.
‘아니, 진짜 내가 붙인 건가?’
진남이라는 이름의 어원은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네 이름은 진남이다’라고 하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는 과정이 조금도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진가충은 자신의 배 위에서 거칠게 움직이고 있는 이지희와 똑같은 얼굴의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쾌락은 그의 사고를 조금씩 마비시켜 간다.
그렇다. 그냥 즐기면 된다. 그런 생각이 그를 다시금 잠식한다.
진짜 진남은 10살 미만이여야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다시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 봐도 10살 미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진가충은 소녀의 출렁이는 가슴에 손을 뻗어 붙잡았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만지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기분이 나쁘다.
진가충은 소녀를 밀어젖혀 자신의 배 위에서 치웠다.
“…아빠?”
특별한 약에 취해 있음에도 이성이 약간은 남은 건지 소녀는 진가충을 올려다보며 그를 불렀다.
아빠라고.
‘그래, 내가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었지. 그게 더 흥분될 거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흥분이 식는다.
왜일까.
진가충은 진남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약을 먹인 지가 언제였지. 슬슬 정신을 차릴 때가 되긴 했다. 다시 약을 먹여야겠군. 진가충은 기계적으로 생각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온 일이다. 프로세스화되어 있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가 주사기를 들어 올리자, 진남의 얼굴에 황홀감이 깃들었다. 소녀는 스스로 팔을 내밀었다. 이미 그 팔에는 주사기 자국이 수없이 나 있었다.
역겨웠다.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해왔던 일인데, 역겹다고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껏 뭔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았다.
“안 돼!”
그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약이 든 주사기의 바늘을 자신에게 꽂았다.
“……! ……! ……!”
진가충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성이 휙 날아갔다. 약이 작용하는 동안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다. 그 말인즉슨,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곧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굳어져 버린 남자의 몸을 소녀가 붙잡아, 침대 위로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떠올릴 필요도, 깨달을 필요도 없는 시간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