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화요일
화요일.
바로 북한산 차원 균열로 직행하려던 현오준 팀의 발목을 붙잡는 사건이 발생했다.
“권우언 팀이 정상화될 때까지 차원 균열 돌입 작전에 대한 허가는 내줄 수 없다고 합니다.”
간신히 분노를 참아내며 현오준은 팀원들에게 말했다.
“권우언 팀장하고는 연락해 보셨습니까?”
“네. A급 팀원 둘이 중태… 전치 8주라고 합니다.”
최재철의 질문에 현오준은 어두운 낯빛으로 대답했다.
“전치 8주요? 두 달 가까이 되지 않나요?”
“네. 이사회는 사실상 저희를 그 기간 동안 묶어놓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재철의 입장에서야 충분히 다 예견된 상황이었다. 어제 권우언 본인에게서 전화로 들은 이야기도 있었으니, 이 정도 견제는 그래도 가벼운 축에 들었다.
‘문제는 견제가 이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지만.’
권우언의 말을 빌리자면 현오준 팀 전원이 축출될 수도 있었다.
그 이전에 오연화에게는 최재철에게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회유를 시도할 가능성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시도는 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과는 달리 차원 균열 너머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뜨지 않았군요.”
현오준의 입장에서는 여론을 몰아서 윗선을 움직여 볼 생각도 있었던 듯하지만, 기사가 안 떠서야 여론이고 뭐고 형성될 여지가 없다.
“아마도 통제가 된 탓이겠죠.”
최재철이 말했다. ‘아마도’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지만 확신에 가까운 어투였다.
이것 또한 어제 권우언과의 통화에서 얻어낼 수 있었던 가설 중 하나였다. 권우언의 아버지인 권지력 이사의 파벌이 정말로 언론을 장악할 수 있다면 다른 파벌의 언론 접촉을 막아낼 수 있었으리라.
“제가…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오연화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어제 권우언 팀장의 연락을 받았어요. 자기 팀에 오지 않겠냐고……. 만약 오지 않으면 지금 팀을 박살 내버리겠다고…….”
오연화는 거기까지 말하고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S급 랭커라지만 아직 미성년자인 그녀에게는 꽤 심적인 부담을 주는 위협이었을 것이다.
“연화야.”
최재철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 두드렸다.
“나한테도 그 전화는 왔어.”
“네? 선생님한테도요? 그럼…….”
오연화가 구문효와 이지희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한텐 안 왔습니다, 사저.”
“나한테도 안 왔어.”
두 사람의 대답을 들은 오연화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그럼 우리 둘한테만 온 거네요?”
“야…….”
오연화의 반응 탓에 어째 좀 긴장감이 풀어지는 분위기였지만, 현오준만은 달랐다. 그의 표정은 심각해져 있었다.
“템퍼링이라니… 권우언 팀장이 도를 넘어섰군요.”
“그보다는 팀을 박살 내겠다는 협박을 신경 쓰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
최재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보고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원래는 바로 말씀드려야 하는 건데, 아침부터…….”
“네, 이런 사안이 있었죠. 현재 진행형이고 말입니다.”
현오준도 쓴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이게 다 연결이 되는 거고……. 오연화 씨의 말대로라면 이대로 팀이 묶여 있다가 저성과자로 몰려서 해고당할 수도 있겠군요.”
그 쓴웃음조차 금방 사라지고, 심각함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저들의 시나리오대로 일이 흘러가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잠깐의 침묵 끝에 최재철이 입을 열었다.
“좋은 아이디어라도?”
“네, 뭐. 그리 좋은 아이디어는 아닙니다만.”
그의 두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저도 그렇고, 연화도 그렇고 저희 팀은 두 번이나 협박을 당했습니다. 그럼 저희도 협박 한 번 정도는 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
최재철의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권우언을 잡아왔습니다.”
납치였다.
“협박이 아니잖습니까…….”
현오준이 머리가 아파진 듯 자신의 관자놀이를 스스로 꾹꾹 눌러대었다.
“아뇨, 협박은 이제부터 할 겁니다.”
“이제부터?!”
권우언이 놀랐다. 권우언이 놀라는 걸 보고 현오준도 놀랐다.
“아니, 권우언 팀장. 당신이 왜 놀라죠? 협박당해서 끌려온 거 아닙니까?”
“전 그냥 최재철 씨가 같이 어딜 좀 가자고 해서 온 겁니다만…….”
권우언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제 전화로는 적이니 뭐니 실컷 떠든 주제에, 같이 좀 가자고 하니 권우언은 홀랑 따라왔다. 어째 순진한 어린아이를 납치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상대가 순진한 게 이쪽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예, 권우언 팀장. 전 당신이 저와 어딜 좀 같이 가주셨으면 해서 모셔온 겁니다.”
최재철의 말에 권우언은 조금 전보다 두려운 기색을 띤 표정으로 되물었다.
“거기가 어디죠?”
“차원 균열의 너머로.”
최재철의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안 됩니다, 안 돼요! 그런 독단적인 작전 수행은 이사회에서 막을 겁니다.”
권우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쳤다.
“아뇨, 권우언 팀장. 저희가 받은 지시는 권우언 팀이 정상화될 때까지만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권우언 팀의 정상화는 권우언 팀장에게 달려 있죠.”
그렇게 말한 건 현오준이었다. 이미 그는 공범자가 될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뭐, 사실 팀이란 팀장 하나만 있어도 성립하는 법이니까요. 정상화되었다고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 대답은 이미 들었다고 쳐드리죠. 고문이고 협박이고 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미리 입을 맞춘 것도 상의를 한 것도 아닌데 현오준은 자기 역할을 참 잘 수행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회에 의해 저희 팀은 당신 팀과 동행이 의무화되어 있으므로 이제부터 권우언씨는 저희와 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권우언에게 최후의 선고가 떨어졌다. 물론 그 권고를 거부할 여지가 권우언에게는 없었다.
*
“이래도 되는 건가요? 사실상 명령 불복종 같은데.”
“여긴 군대가 아닙니다, 이지희 씨. 회사죠. 성과를 내면 대부분 용서됩니다.”
이지희의 질문에 대한 현오준의 대답은 지나치게 희망적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원칙적으로야 회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단체니, 그 목적이 충족되면 내부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게 맞기는 했다. 그렇다고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움직여서 얻은 성과에 좋은 평가를 내려주는 높으신 분은 드물다. 더욱이 수직적인 성향이 강한 한국에서야 더욱 그렇다.
하지만 파벌을 나누기 좋아하는 사내의 일부 윗선들에 의해 현오준 팀이 적대 파벌에 속한 걸로 인지되어 버린 이상, 그들의 TA에서의 장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그렇다고 현오준 팀이 정말로 그 예의 ‘적대 파벌’에 속한 것도 아니니 지원을 바랄 수도 없었다.
기본적으로 윗사람들이란 아래에서의 변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게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사항이라면 더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눈감아’주지만, 아니라면 강경하게 제압하려고 든다.
현오준 팀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성과가 없어야 할 팀이 급속히 성과를 내고 두각을 드러내자, 견제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서 현오준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은 두 가지다. 망치를 맞고 찌그러지던가, 아니면 더 큰 성과를 내고 더욱 더 두각을 드러내서 못 대신 쐐기가 되던가.
현오준의 대답은 후자였다.
‘괜찮은 선택이지.’
최재철은 생각했다.
‘사실은 한 가지 선택지가 더 있지만.’
그건 퇴사다. 이 팀 자체를 데리고 나가서 새로운 회사를 꾸려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미래도 그리 밝지는 않았다. TA에게 있어서는 내부의 적이 외부의 적으로 된 것일 뿐일 테니. TA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의 지지자들조차 적으로 돌릴 위험성이 있었다.
결국 어느 쪽이든 실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했다. 이참에 권지력 이사의 파벌에 숙이고 들어가든, 반대 파벌에 지지를 요청하든, 이 회사를 박치고 나가든.
어차피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으면 현오준은 낙동강 오리알이다. 팀원들만 빼앗기고 내쫓긴 후, 차원 균열 너머의 탐사에 대한 업적은 권우언에게 고스란히 넘겨주게 되리라.
‘참, 순둥이인 줄 알았는데 할 땐 또 한단 말이지.’
별로 안 좋았던 첫 인상과 비교해 보면 최재철 속에서 현오준의 인상은 꽤 많이 변했다.
“이건 무력 시위입니다!”
권우언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뭐,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권우언 팀장.”
현오준이 대꾸했다.
“당신은 저를 적이라고 말했잖습니까? 그럼 지금 저희에게 사로잡혀 있는 당신은 포로입니다. 포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일일이 알려드려야 합니까?”
권우언은 현오준의 말뜻을 대충이나마 알아먹었는지 순순히 닥쳤다.
그들은 지금 현오준의 개인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사회의 정식 승인을 받은 작전인 건 여전히 아니었기 때문에 헬기 사용 허가도 받을 수 없었다. 아니, 허가를 받으려는 시도조차 막힐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니 유구언 팀의 협조도 요구할 수 없었다. 화력지원 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번 작전은 전부 현오준 팀 단독으로 진행해야 했다. 그나마 권우언이라는 ‘인질’이 있고 현오준의 행동이 빨라서 방해라도 받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물론 그런 악조건들은 지금의 현오준 팀에게는 전혀 장해가 되지 않는다.
북한산 차원 균열을 지키는 방위 부대와의 협력은 쉬웠다. 애초에 TA는 자사의 인력으로 경비 부대를 설치한 것이 아니라 한국군과 연계해서 주변 통제와 혹시나 모를 어보미네이션 출현에 대한 경계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작전 명령서를 들고 온 방위 부대는 통행 허가를 쉽게 내주었다. 평소에는 헬기 타고 오던 인간들이 왜 오늘따라 차량으로 왔느냐는 농담 같은 질문이 날아오긴 했지만, 현오준이 의연히 대처했다.
“노는 헬기가 없어서요.”
자주 있는 일이다. 그들은 철조망을 통과해 차원 균열 영역으로 들어섰다.
“자, 옷들 갈아입으시죠. 여성들은 차 안에서, 남자는 밖이군요.”
“저도 그 웃긴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하는 겁니까?”
현오준의 지시에 권우언의 입술이 댓 발처럼 나왔다.
“차원 균열 안에 한 번 갔다 오신 분이 어리석은 질문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대답해 드리죠. 예, 그렇습니다. 안 갈아입으면 때릴 겁니다.”
“그런 어린애 같은 협박이……! 큭!!”
말은 그렇게 하면서 권우언은 순순히 갈아입었다.
“저한테 칼도 주시는 겁니까, 현오준 팀장?”
“그럼요, 물론이죠. 그게 뭐 어렵겠습니까? 그 칼로 절 찔러도 제 살갗 한 장 못 벗겨낼 테니, 제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실 좀 과장된 소리긴 했지만, 권우언은 그 말을 듣고 찍소리 못 했다. 오히려 어제보다 현오준에 대한 말투가 많이 공손해진 게 재미있기까지 했다.
“자, 그럼 갑시다!”
무장을 마친 현오준 팀은 헬필드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이 정도의 대인원이 발소리도 안 죽이고 들어가는 거다. 반응이 없을 리는 없었다. 리자드독 몇 마리와 크로코리안 몇 마리가 튀어나왔다. 물론 그게 문제는 되지 않았다.
“들어가죠!”
“히, 히익!!”
차원 균열을 바로 앞에 둔 권우언은 이상한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손목은 이미 현오준에게 잡힌 뒤였다.
차원 균열을 들어서자마자 일어나는 현상, 어보미네이션 웨이브!
“이럴 줄 알았어!”
권우언은 비명을 질렀지만 1분 후에 어보미네이션 웨이브는 정리되어 있었다.
“여러 번 자주 와서 그런지 어보미네이션의 숫자가 많이 줄었군요.”
“저희 모습을 기억하고 내빼는 놈들도 많아졌고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현오준과 최재철을 권우언은 이상한 괴물 보듯 했다.
“당신들, 뭐야?”
“어벤저입니다만.”
“네, 어벤저.”
자신의 질문에 당연한 대답을 하는 두 사람을 본 권우언은 답답한 듯 말했다.
“그건 나도, 저도 그래요!”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이 어보미네이션 시체들이나 밖으로 옮기시죠.”
현오준이 답답한 듯 지시했다.
“전 당신의 팀원이 아닙니다!”
“공헌도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당신 공헌도를 보고해 줄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현오준의 말에 권우언은 입을 다물고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나름 귀여운 구석이 있네, 저 사람.’
최재철은 픽 웃으며 생각했다.
*
“여기가……!”
권우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인해 커졌다.
“틈새 차원입니다.”
현오준이 말했다. 그들 일행은 이미 확보한 길을 통해 차원 균열의 출구로 나와 틈새 차원에 도달해 있었다.
“뭐, 보고로는 이미 올라가 있고 권우언 팀장도 그 보고서를 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팀장급인 제게 보고서를 볼 권한 같은 건 없습니다만.”
“하지만 보셨잖습니까?”
“…….”
권우언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 공간에 대해서는 저희도 ‘본 것’뿐입니다. 아무런 증거물을 가져오지 못했죠. 그리고 이제부터 그걸 가지러 갈 겁니다.”
“그게 뭐죠?”
“그거야 저도 모르죠.”
현오준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문 권우언에게 현오준은 이어 말했다.
“뭔가 대단한 걸 가져가지 않으면 당신을 억지로 납치해서 여기까지 온 게 범죄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죠.”
“뭔가 대단한 게 필요하단 소립니까?”
“그렇죠!”
“그게 뭔지는 댁도 모르고?”
“네!”
현오준은 권우언이 그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댁’이 되었음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현오준의 눈동자는 이미 모험심으로 인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10대 초반의 소년도 아니고.’
최재철은 피식 웃었다.
“그럼 가볼까요?”
*
장비라고 해도 대단한 걸 챙겨온 건 아니다. 여전히 급조된 레펠 장비와 밧줄, 부싯돌이나 철제 바늘 같은 전근대적 기술로 만들어진 생존용 키트, 그리고 5일치의 물과 건조 식량.
그래도 현대 기술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슨 군장처럼 개인당 30㎏의 짐을 여기까지 질질 끌고 오는 건 꽤 귀찮았다. 신체 강화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이야 별문제 없이 옮길 수 있었지만, 문제는 체구도 작고 신체 강화 능력도 서툰 오연화와… 권우언이었다.
“권우언 팀장, 힘듭니까?”
권우언은 헉헉거리며 대답하질 못했다. 동굴 안에서는 그래도 잘 버틴다 싶더니만, 이 밀림에 내려온 뒤로 영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그도 그럴 만했다. 다른 사람들도 미묘하게 느끼고는 있겠지만 이 밀림 지대는 지구보다 중력이 약간 높다.
“쉬자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적당히 쉴 만한 곳을 찾기가 힘들군요.”
달려드는 닭머리뱀의 머리를 날려 버리며 현오준이 말했다.
닭머리뱀이란 말 그대로 닭의 머리를 한 뱀을 가리킨다. 이 밀림 지대에서 끊임없이 출현하고 있는 마수로, 보기에는 웃겨 보이고 크기도 그렇게 위협적이지 않지만 중력을 무시하고 날아다니는지라 기상천외한 각도에서 기습을 가해온다.
게다가 물리면 특이한 독이 몸에 퍼져서 지능이 떨어진다. 닭머리뱀 무리에게 공격당한 사냥감은 점점 멍청해지다가 백치가 되어 산 채로 뜯어 먹힌다.
실제로 현오준 팀도 감지 능력이 특별난 오연화와 최재철이 없었더라면 몇 명은 죽었을 것이다. 그들은 닭머리뱀의 기습을 전부 간파하고 오연화가 염동력 손아귀로 잡아채거나 최재철이 목을 잘라 버리고 있었다.
오연화의 그 공적을 높게 사서 다른 팀원들이 오연화의 물을 조금씩 나눠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오연화는 생각보다 멀쩡했지만, 권우언은 그렇지 않았다.
이 사람은 지금 그냥 짐짝이었다.
“제가 온다고 그런 것도 아니잖습니까!”
참다못한 권우언이 그렇게 소릴 빽 질렀다.
“앗, 바보!”
오연화가 그를 탓했다. 아니나 다를까, 권우언의 외침에 반응해 대량의 닭머리뱀이 수풀에서 뛰쳐나왔다.
“한 번 쓰겠습니다!”
이지희가 나섰다. 그녀를 중심으로 뇌전이 확 퍼져 나가 달려드는 닭머리뱀들을 다 태워 버렸다. ‘꼬꼬댁!’ 하는 비명이 애처롭다.
“그나마 이 녀석들은 목숨이 하나뿐이라 다행이로군요. 하지만 왜죠?”
현오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뒤늦은 의문이었다.
최재철은 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 이 닭머리뱀은 다른 거대 어보미네이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대 어보미네이션이 이 ‘차원 세포’의 ‘보스’이다.
차원 세포라는 건 차원의 최소 단위이다. 이미 안정된 ‘늙은’ 다른 차원이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개념이다. 늙은 차원의 모든 세포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구별되지 않고 균질한 성질을 지니니, 그냥 하나의 차원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틈새 차원에서는 다르다. 불과 수백 미터 단위로 전혀 다른 환경이 자리 잡은 이유가 세포마다 다른 차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포 하나하나가 각각의 차원이나 다름없고, 세포마다 보이지 않는 격벽으로 막혀 있다.
틈새 차원의 모험은 이 차원 세포를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자신의 차원과 연결된 차원 균열 주변의 차원 세포를 안정화시키면서 새로운 차원 균열이 열릴 가능성을 줄이고, 나아가 점령에 따른 ‘보상’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설명을 지금 팀원들에게 할 필요는 최재철도 느끼지 못했다. 이런 걸 알려주려면 그의 비밀도 함께 알려줘야 하는데, 이 자리에는 권우언이 있으니까.
“권우언 팀장, 너무 경솔한 행동은 저지르지 마십시오. 당신도 아실 거 아닙니까, 차원 균열 주변에서의 행동 원칙을.”
“죄, 죄송합니다.”
현오준의 말에 권우언은 사죄를 했다. 한숨을 내쉰 현오준은 그의 짐에서 물통을 빼었다.
“필요한 만큼 마시세요.”
권우언이 목을 축이고 나자, 현오준은 그 하루치의 물을 버렸다.
“가장 무거운 것이 물의 무게이니 하나만 버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알고 있습니다. 물을 나눠주지는 않으실 거라는 거죠?”
권우언이 적대적인 시선으로 현오준을 노려보며 말했다.
밀림에서는 식수를 얻는 것이 의외로 힘들다. 눈에 보이는 물은 많지만 그것들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시면 이상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물에 독이 섞여 있을 수도 있다. 그것도 데이터가 없는 외계의 정글이다. 위험도는 더욱 높았다.
가져온 물이 다 떨어진다는 것은 생명줄이 하나 사라진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야 아무리 불리한 상황이더라도 적대적인 시선으로 볼 법도 했다.
“움직이죠.”
“어디로 말입니까?”
“아까부터 닭대가리의 출현이 잦아지고 있어요. 그쪽으로 갈 겁니다.”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하죠. 하지만 거기에 뭔가 있을 겁니다.”
현오준과 권우언의 대화를 들으며, 최재철은 현오준이 날카롭다고 생각했다. 그의 예상이 맞았기 때문이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희에게는 성과가 필요합니다, 권우언 팀장.”
현오준의 그 말을 듣고서야 권우언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지축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뭔가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오는 소리였다.
최재철은 즉시 칼을 빼어 들었다. 다른 팀원들도 그를 따라 칼을 뽑았다.
빽빽한 밀림의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거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인의 모습은 기괴했다. 일단 인간형의 모습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머리가 지나치게 비대했고, 동체는 짧았으며, 팔은 얇고 짧았다. 다리에 와서는 다시 비대해져 쿵쿵 지축을 울리던 것이 그 발임을 짐작하게 하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모두 닭머리뱀이었다는 점이다.
“메두사!”
현오준이 반사적으로 외쳤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가 틀렸다.
[나는 그따위 웃긴 이름의 주인이 아니다, 이방인.]
거인이 말했다. 거인에게는 입이 없었으므로 말했다는 표현은 그다지 적절하지 못했다. 그의 언어는 목소리가 아닌 방식으로 현오준 팀에게 울려 퍼졌다.
[나는 이 차원 세포의 주인, 톨름이다.]
“주인이라고……?!”
톨름의 대답에 현오준은 충격을 받은 듯 그 말을 되뇌었다. 대답은 곧 돌아왔다.
[그렇다. 이방인, 나는 내 소개를 했다. 이번에는 자네들이 소개를 할 차례로군.]
“그럴 필요는 없다.”
최재철이 나섰다. 이 거인과 대화를 계속하는 건 그리 좋지 않다. 겉보기에는 웃겨 보이는 이 거인은 사실은 꽤 위협적인 상대다. 더 이상 숨길 것도 없이 이 거인이야말로 닭머리뱀의 주인이자 이 차원 세포의 보스다.
“최재철 씨?”
권우언이 놀라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걸 들은 톨름이 희희낙락했다.
[네 이름은 최재철이로군?]
최재철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빼어 든 칼을 그대로 톨름을 향해 휘둘렀다. 차원력 커터가 한껏 실린 그의 철검이 톨름의 비대한 다리를 찍어 내렸다.
“샤아아아앗!!”
톨름의 머리에 난 닭머리뱀들이 동시에 고통의 비명을 질렀다. 소름 돋는 뱀 무리의 비명을 무시하고, 최재철이 외쳤다.
“쳐!!”
그 외침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현오준이었다. 그는 즉시 톨름에게 달려들어 최재철이 공격하지 않은 쪽의 다리를 칼로 쳤다.
“샤샤샷!!”
톨름의 머리에서 닭머리뱀들이 뿜어져 나와 최재철과 현오준을 덮쳤다. 그러나 그 닭머리뱀의 무리는 이지희가 내뿜은 뇌전에 지져져 별 활약을 못 했다.
그 사이에 최재철의 일 검이 한 번 더 작렬해 비대한 다리를 잘라내 버리고 말았다. 결국 톨름의 몸은 더 이상 그 자리에 버텨 서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이 대화도 모르는 야만 차원 놈들이!!]
“닥쳐라!!”
최재철은 일언지하에 톨름의 말을 자르고 무너진 톨름의 몸에 단박에 뛰어올라 목을 쳐냈다. 톨름의 목이 지면에 떨어지자 수백 마리의 닭머리뱀이 한꺼번에 와르륵 그 머리에서 빠져나와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
본능적으로 혐오감을 느낀 오연화가 그 광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안 끝났어!!”
최재철이 외치며 톨름의 몸에서 뛰어내렸다. 많은 피해를 입었던 톨름의 몸이 원래 상태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한 번 목숨을 잃었던 탓에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목숨이 세 개인 어보미네이션의 특성을 톨름도 갖고 있다는 증거였다.
[최재철! 저주받아라!!]
톨름은 되살아나자마자 그렇게 외쳤다. 저주의 눈빛이 최재철을 향했다. 그의 몸이 돌처럼 굳기 시작했다.
“선생님!!”
오연화가 비명을 외쳤다.
“후.”
하지만 최재철은 짧게 웃으며 톨름을 가리켰다. 오연화는 본능적으로 어벤저 스킬을 사용했다. 염동력으로 칼을 들어서 톨름의 목을 마구 내려치기 시작했다.
“연계할게!”
이지희가 외쳤다. 오연화가 칼을 톨름의 목에 아예 꽂아버리자, 낙뢰가 그 위로 떨어졌다. 철검이 피뢰침처럼 뇌전을 인도해 톨름의 내부에 타격을 주었다.
“아직 안 죽었어!”
“한 번 더!!”
오연화의 외침에 이지희는 필사적으로 온몸에서 차원력을 그러모아 전력을 다한 뇌전을 꽂았다. 쾅!
“잘했다!”
저주에서 풀려난 최재철이 두 제자를 칭찬했다. 톨름이 한 번 더 죽어 저주가 소용없어진 덕분이었다.
“선생님!”
“스승님!!”
“마지막 한 번이다!!”
최재철은 톨름 쪽을 가리켰다. 그의 말대로 톨름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마지막 생명이었다.
[기다리게! 기다려 주게!!]
톨름은 외쳤다. 하지만 이미 구문효가 그의 목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점멸로.
그의 칼이 빛으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처먹어라!!”
구문효의 빛으로 물든 검이 톨름의 목에 박혔다. 칼을 그 자리에 둔 채 지면에 착지한 구문효 대신, 이번에는 현오준이 뛰어올랐다. 구문효가 박아둔 칼에 현오준이 킥을 처박자, 칼은 깊숙하게 꽂혀 톨름의 목을 반쯤 잘랐다.
“나 없이도 잘 하는군.”
최재철이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구문효가 쏘아낸 빛의 칼날이 톨름의 목을 마저 잘라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톨름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만으로 쿵, 하고 지축이 울렸다. 그러니 그 동체가 지면에 쓰러질 때는 어땠겠는가.
“히이익!”
권우언이 지진을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어떻게 처치하는데 성공했군요.”
현오준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선생님?”
“그래. 이 녀석이 죽어서 저주는 풀린 모양이야.”
걱정스러운 듯 묻는 오연화에게 최재철이 대답했다.
“설마 이름을 물어오는 타입의 어보미네이션일 줄이야……. 방금 전에 최재철 씨의 이름을 부르면서 저주를 걸었죠?”
“대화를 하면서 저희 모두의 이름을 알아내는 게 목적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시체가 되어 나뒹굴고 있는 이 상급 어보미네이션의 이름은 뱀머리칼 거인. 이 개체는 스스로를 톨름이라 자칭했지만, 톨름이란 건 상대의 이름을 알아내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에 불과하다.
언어가 아닌 정신파로 말을 걸어오기 때문에 무시하기는 어렵고, 한정적인 조건의 독심술까지 사용하기에 이름을 들키지 않기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적개심으로 마음을 채워 뱀머리칼 거인의 독심술을 방해하고, 이름을 들키기 전에 쓰러뜨리는 것. 그리고 최재철은 그 방법을 실행했다.
비록 권우언이 최재철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그는 저주를 받긴 했지만, 다른 팀원들은 이름을 들키지 않아 비교적 쉽게 쓰러뜨릴 수 있었다.
‘사실 저주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지만.’
아무리 최재철이 이제 A급 어벤저라지만 상급 어보미네이션의 저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하는 건 지나치게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그래서야 팀원들에게 뱀머리칼 거인의 특성을 알려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놈이 이 차원 세포의 주인이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소리죠?”
구문효가 말했다.
“허풍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겠죠. 어쨌든 차원 세포라는 개념만큼은 머리에 담아두도록 하죠.”
현오준이 구문효의 말을 받았다. 적절한 반응이었다.
“어쨌든 아까 그 톨름이라는 놈이 닭 머리를 한 뱀들을 움직이고 있던 건 확실한 것 같군요. 이놈을 죽이자마자 뱀들의 습격이 멈췄어요.”
그동안 간헐적으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던 뱀들의 기습 시도는 뱀머리칼 거인의 죽음 이후 딱 끊겼다.
‘이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어서 오십시오, 이 땅의 새 주인이시여.]
최재철의 예상대로 기이한 목소리가 들렸다.
[옛 주인을 쓰러뜨린 분은 이 땅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뭐지?”
구문효가 혼란스러운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한 장소에 왕이 많으면 혼란을 초래하지요.]
목소리에 악의가 조금 찼다.
[자아, 여러분 가운데서 진정한 왕을 선출해 주십시오.]
그 악의가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목소리는 말했다.
[서로 죽이십시오. 살아남은 분이 진짜 왕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최재철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강한 자.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을 혼자 죽일 수 있는 이.
다른 이들에게서 최재철은 그렇게 인식되고 있었다.
“후.”
최재철은 웃었다.
“거절한다.”
그리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자 마법은 깨어졌다. 마치 절대적인,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법칙처럼 느껴졌던 목소리의 위압감이 그저 의미를 전달할 뿐인 정신파로 변했다.
이 자리에서는 최재철과 오연화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술수에 걸려 있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들이 조금 우스웠다.
[어째서? 왕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순수한 의문이었다.
“동료들을 죽여서까지 얻어야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칭호는 아니지.”
최재철은 대답했다.
[당신을 이 차원 세포의 새 주인으로 인정합니다.]
목소리가 말했다. 마치 최재철의 인격에 감복해서 주인으로 인정한 것 같은 분위기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목소리도 땅의 주인이라는 자리가 비어 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에 타협한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모습을 드러내라.”
최재철의 말에,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알겠습니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허공에서 반짝거리는 빛의 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한 덩어리로 뭉쳐져 어떤 존재가 되었다.
그 겉모습은 전형적인 요정의 모습이었다. 키는 15㎝ 정도. 얼굴은 인간 소녀처럼 귀엽지만 몸매는 성인 여성의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등에는 곤충 날개 4장을 매달고 포르르 날아오르고 있다.
“귀여워라!”
이지희가 말했다. 최재철이 보기에도 귀여웠다.
‘뭐, 겉모습뿐이지.’
저 모습은 여기 있는 여섯 명의 인간에게 최대한 호의를 얻고 경계심을 누그러뜨릴 만한 모습을 취한 것에 불과하다. ‘톨름’이 여기의 주인이었을 때는 다른 모습이었으리라.
저것의 정체는 이 차원 세포의 의지였다. 말하자면 이 공간의 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신이라기엔 너무나도 연약하고 작은 존재라 좀 안 어울리지 않지만, 주어진 역할은 일단 그렇다.
관리자, 규칙을 만들고 운용하는 자.
[왕이시여, 존함을 알려주소서.]
관리자라고는 해도 그 힘은 약하고 한정적이다. 관리자의 힘은 차원 세포의 힘에 따라 결정되고, 이 차원 세포의 ‘격’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최재철은 강제성이 있는 ‘규칙’을 거부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거부하지 못했다면?’
그랬다면 규칙은 적어도 이 차원 세포 안에서는 절대적인 강제력을 가지게 되었을 터였다. 그리고 현오준 팀은 그 규칙에 따라 여기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킬링 게임을 벌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니 더 이상 저 요정의 모습을 한 차원 세포 관리자가 귀여워 보일 수는 없었다.
“내 이름은 최재철.”
[예, 알겠…….]
“그리고 이쪽은 현오준 팀장님, 저쪽에 젊은 여자가 이지희, 젊은 남자가 구문효, 어린 여자가 오연화다.”
[네… 예?]
“이렇게 현오준 팀이지. 이 땅의 왕인 ‘톨름’은 우리 다섯이서 쓰러뜨렸다. 그러니 왕의 자격이 있다면 다섯 명 전원에게 있지 않을까?”
최재철의 말에 요정은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오직 최재철만을 왕으로 섬길 셈이었는데, 정작 그 장본인인 최재철이 이렇게 나오니 난처한 모양이었다. 그야 그렇다. 섬기는 입장에서야 섬기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안 좋은 게 보통이니까.
[안 됩니다. 왕은 한 명이여만 합니다.]
요정은 다시 한 번 ‘규칙’을 발동했지만 최재철은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규칙’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확인한 요정은 곤란한 듯 침묵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최재철 님을 왕으로 모시고, 다른 네 분은 ‘왕의 친구’로 모시겠습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요정의 ‘규칙’을 무시할 수 있는 건 최재철뿐이다. 하지만 최재철로 인해 다른 사람들도 규칙에 따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요정으로서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어졌다.
“그렇게 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최재철의 인가를 얻은 요정은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요정이 지구의 예법을 취하는 게 놀랄 일은 아니다. 애초에 요정의 모습을 취한 것 자체가 최재철 일행에게 ‘맞춘’ 것이다. 외모도 바꾸는데 예법이야 어련할까.
“오, 우와.”
구문효가 탄성을 토해내었다. ‘왕의 친구’ 자격을 얻어 이 차원 세포의 지배권을 얻은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보다 훨씬 빨리 원하는 것을 얻었군.’
틈새 차원의 차원력은 강하다. 농도뿐만 아니라 그 속성도 강하다. 그래서 틈새 차원에 온 어벤저들은 이 차원력을 흡수해서 강해질 수 있다. 어벤저 스킬의 기초가 되는 차원력 자체의 증강뿐만 아니라, 새로운 스킬을 깨닫기에도 좋은 장소다.
그렇다고 여기서 숨만 쉬어도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지나치게 강한 차원력은 인간에게, 생명에게는 독이다.
이 틈새 차원에서 가장 흔한 최하급 어보미네이션인 리자드독이 지구의 개와 이계의 도마뱀이 합쳐진 결과물이다. 어보미네이션이 저렇게 변이해 버린 이유 중 하나가 이 차원력 때문이기도 했다.
인간이라고 여기서 도마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아니, 변이만 일어나면 다행이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 죽는 게 나은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고. 산 채로 그 자리에서 허물어져 흐물흐물한 푸딩 덩어리가 될 수도 있는 게 바로 이 틈새 차원이라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이 차원력을 흡수해서 강해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다.
‘그중에서 가장 편한 게… 차원 세포의 주인이 되는 것이지.’
이제 이 차원 세포는 현오준 팀의 것이다. 여길 기반으로 삼아 안전하게 차원력을 흡수해서 강해질 수도 있고, 다른 차원 세포를 침략해서 세력을 늘려 나갈 수도 있다. 물론 여기의 주인이 되었으므로 개발 권한도 이들의 것이다.
물론 요정은 현오준 팀으로 하여금 다른 차원 세포 세력의 침략으로부터 방어를 하고 나아가 세력을 늘려주길 바라고 있겠지만, 그 바람을 반드시 들어줄 필요는 없다.
“저… 최재철 씨?”
권우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 계셨습니까? 권우언 씨. 싸울 때 아무것도 안 하시길래 집에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최재철이 그를 비꼬았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저에게는 ‘왕의 친구’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만은 닫지 않았다. 그럴 염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왕의 권한’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본능적으로 느끼기라도 한 듯 뻔뻔하게 나온 것 같았다.
“당신이 제 이름을 말하는 바람에 저는 톨름에게 저주를 당하고 말았지요.”
최재철은 그렇게 한 마디를 더했다. 그제야 권우언은 겨우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안내인이 생겼으니 이 차원 세포의 탐사는 한결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겠군요.”
최재철은 현오준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 네, 최재철 씨. 그 말씀대로입니다.”
현오준이 정신을 차린 듯 뒤늦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요정 씨,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이름입니까? 그 요정이라는 게 제 이름인가요?]
“설마 이름이 없는 건가요?”
[네. 절 요정이라고 부르시겠다면…….]
“아, 아니! 지금 예쁜 이름 붙여줄게요!”
요정과 그런 대화를 하고 있던 이지희가 문득 최재철을 돌아보았다.
“어떤 이름이 좋을까요? 스승님.”
“그냥 요정이면 되지 않아?”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재철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안 돼요.”
“그럼 피터팬이라고 하든가.”
“걘 남자애잖아요.”
“그럼 웬디!”
오연화가 끼어들었다. 그녀의 말에 이지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보통 여기선 팅커벨을 떠올리지 않니?”
“난 팅커벨 싫어해서.”
“아, 하긴, 좀 재수 없지.”
오연화와 이지희의 대화는 뭔가 좀 다른 곳으로 새고 있었다.
“그럼 웬디로 하지.”
그래서 최재철이 끼어들어 대화를 끝내 버렸다.
[웬디……. 그게 제 새 이름인가요?]
“자, 그럼 웬디. 안내를 부탁해.”
최재철은 웃으며 말했다.
*
진현우였던 존재는 점점 진현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어를 습득했다. 그리고 다른 기억과 지식들도 조금씩 습득하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으로써 다른 어보미네이션을 포식할 때마다 그는 진현우로서의 기억과 자아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가 진현우에 가까워진다 한들, 그가 처음에 어보미네이션으로서 얻은 근력이나 차원력이 퇴화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다른 어보미네이션을 포식할 때마다 존재로서는 처음보다, 원본보다 강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능력이었다. 처음으로 계약을 맺어 얻은 어보미네이션으로서의 능력.
원래대로라면 일어날 리 없었던 일이었다. 그저 진현우라는 육체의 절반, 고깃덩이였던 그가 진현우로 부활하는 일은 지구상의 그 어떤 기술을 동원하더라도 불가능했다.
그런데 몇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 그는 지금 자신이 진현우라는 확신을 갖고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진현우의 자택.
카드 키는 없지만 비밀번호는 기억하고 있다.
‘아니, 기억이 생겼지.’
그에게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다. 어보미네이션을 맨손으로 붙잡아 산 채로 포식하는 자신은 상식적으로 인간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진현우라고 생각했다.
그는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오직 그만의 집이었다. 이 집의 소유권은 그에게 있었다. 정확히는 ‘인간 진현우’에게.
아버지 진가충과 새 어머니 유곽희가 별거하면서 진현우에게도 따로 집이 주어졌다. 아무리 별거라지만 진가충은 진현우를 유곽희와 둘만 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과 둘이 살 생각도 없었고.
“아버지는 날 싫어했지.”
그런 기억이 자동적으로 떠올랐다. 이유까지는 잘 기억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어보미네이션 몇 마리를 더 포식해야 할 것 같았다.
“아무렴 어때.”
중요한 기억은 아닐 것이다. 지금 당장 달려 나가 어보미네이션을 찾아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지금 상태는 엉망진창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씻고도 싶었고, 어쨌든 몇 시간이라도 좀 푹 쉴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