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월요일
월요일.
최재철의 자택.
“머리가 아파요.”
구문효가 말했다.
“숙취야, 그거.”
최재철이 대답했다.
“아……. 아아.”
구문효는 뭔가 생각난 듯 머리를 들었지만, 곧 습격해 오는 두통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런 구문효를 보며 최재철은 혀를 찼다.
“하는 수 없군. 평소에는 별로 추천하지 않는 방법이지만, 오늘은 차원 균열에 돌입해야 하는 중요한 날이니 어쩔 수 없지. 문효야.”
“예, 사부님.”
“차원력을 전신에 회전시켜라. 몸의 온도를 올린다는 느낌으로.”
“알겠습니다.”
숙취로 인해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구문효는 이를 악물고 차원력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있는 건지 그의 온몸에서 땀이 송글송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좋아. 그만하면 됐다. 물을 마셔라.”
“예, 사부님.”
“그럼 다시 몸의 온도를 올려라.”
그제야 의도를 눈치 챈 구문효는 최재철의 말에 따라 땀을 내고 물을 마시는 것을 반복했다. 그렇게 강제적으로 몸 안의 불순물을 뽑아낸 구문효는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숙취가 거의 없어졌어요!”
“그래, 다행이네. 그럼 씻어라.”
불순물을 가득 포함한 구문효의 땀은 뭐라 말할 수 없는 퀴퀴한 악취를 내뿜고 있었다.
“예, 사부님. 헤헤…….”
구문효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런데 사부님, 이게 추천할 수 없는 방법인 이유는 뭔가요? 굉장히 좋은 방법 같은데.”
샤워를 하고 나온 구문효는 일단 질문부터 했다. 샤워하는 동안 계속 최재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런 구문효의 태도에 최재철은 흡족한 미소를 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걸 계속하면 몸이 차원력에 길들여져 버린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될 걸 쓸데없이 차원력을 소모해야 하는 상황이 늘어버리지.”
최재철의 설명에도 구문효는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좀 더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임무나 작전을 하면서 쓴 차원력을 어떻게 회복시켜야 할까?”
“별로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정답이다.”
“예?”
최재철의 대답이 의외였던 듯, 구문효의 목소리가 뒤집어졌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고도 최재철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설명했다.
“자연 회복이 가장 좋다. 그런 의미에서 별생각 할 필요가 없는 게 맞지.”
“아아…….”
구문효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최재철의 설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평소에 일상을 보내면서 차원력을 서서히 회복하는 것이 자연 회복이다. 그런데 일상 중에 쓰는 차원력이 더 늘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아!”
구문효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차원력은 계속 소모만 되겠군요!”
“그래. 그게 이런 방법을 너무 자주 쓰면 안 되는 이유야.”
최재철은 제자가 이해한 것이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스킬에 익숙해진 몸은 점점 약해져서 이윽고 스킬 없이는 제 컨디션을 찾기 힘들 정도가 되지.”
토요일에 최재철이 사는 이 빌라를 사러 왔던 B급 어벤저, 호일호가 좋은 예였다.
최재철이 그의 차원 코일을 때려 부수자 그는 그 자리에서 흐물흐물 무너져 내렸다. 평소부터 신체 강화 능력을 발동하고 다니고, 그에 의지하게 된 바람에 스킬 없이는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된 사례다.
“스킬에 너무 기대지 마라. 약해져 버리니까.”
그가 마법사 양성 기관인 ‘상아탑’의 교장일 때 매일 같이 입에 담은 격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함정에 빠지는 학생들은 정말 많았다.
“특히나 신체 강화계 어벤저가 자주 빠지는 함정이지. 너도 이제 신체 강화 능력을 쓸 수 있게 됐으니 염두에 둬라. 근력 훈련도 빼먹지 말고.”
“알겠습니다, 사부님!”
구문효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신체 강화 능력을 익혀도 신체 단련은 빼놓지 못하게 되는군요.”
“아니, 오히려 신체 강화 능력을 익혔기에 더욱 신체 단련에 힘써야 해. 단련된 육체에 차원 능력… 어벤저 스킬을 끼얹었을 때 진짜 강함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아, 그렇겠군요.”
구문효의 대답을 들은 최재철은 그제야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밥 먹고 출근하자. 아침 식사로 네 요리를 기대해도 될까?”
“적어도 방금 전에 배운 값은 할 겁니다, 사부님!”
구문효는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
최재철은 같은 계란 요리라도 하는 사람에 따라 맛이 정말로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만큼 구문효의 오믈렛은 훌륭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친 최재철은 구문효가 운전하는 차에 같이 탑승해 출근했다.
‘이거 너무 편하고 좋은데?’
맛있는 아침 식사만으로도 이미 만족스러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저절로 회사까지 모셔다주는 이런 서비스라니.
이제는 이런 소리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최재철은 진심으로 구문효에게 같이 살자고 제의해 보고 싶어졌다. 물론 약속한 건 약속한 거니 실제로 제의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 녀석은 내 제자지, 시종이 아니니까.’
자기 일은 자기가 해결한다. 이계에서 대마법사로 온갖 대우를 다 받으면서도 그는 이 원칙을 어기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자발적으로 한두 번 정도 이뤄지는 봉사를 거부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는 있었지만, 아예 돈을 주거나 권력을 이용해 자기 전담 요리사나 세탁부, 청소부 따윌 부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자기 일을 타인에게 떠넘기는 데서부터 타락이 시작된다. 최재철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사부님.”
“어, 그래.”
구문효가 열어주는 문으로 내리며, 최재철은 이게 꽤 강렬한 유혹이라고 생각했다.
*
“오늘은 저희 팀과 함께 사측이 꾸린 새로운 차원 균열 돌입 팀이 북한산 차원 균열로 돌입하게 됩니다.”
임무 브리핑을 시작한 현오준의 표정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야 그렇다. 원래 온전히 현오준 팀의 임무이자 성과가 되어야 할 두 번째 차원 균열 돌입을 다른 팀과 함께하게 되다니. 그것도 사흘 만에 급조된 팀이다. 아무리 각 개인의 능력이 높다고 해도 제대로 된 팀일 리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각 개인의 능력도 그렇게까지 높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두 명은 TA의 한국 지사 이사의 자식이었고, 나머지 셋은 그 둘의 경호원 같은 위치였다.
이사의 자식들은 모두 B랭크, 경호원들은 A급이다. 라이센스 랭크로 능력을 판단하는 건 별로 좋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역시 영 좋은 인상을 가지기는 힘든 구성이다.
“아… 스킬 구성은 어떻게 됩니까?”
최재철의 질문에 현오준은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비공개입니다.”
어이없는 답이 돌아왔다.
“…같이 작전하는 팀인데요?”
“같이 들어가긴 하지만 같은 팀은 아니라고 하던데요.”
맞는 말이긴 하다.
“스킬 구성도 모르면 연계도 안 될 텐데. 그냥 저희가 앞에 뚫어놓으면 뒤에 쫄래쫄래 따라 들어오기라도 할 셈인 건가요?”
“네.”
구문효의 비꼼 섞인 말에 현오준은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 대답은 예상 못 했는데.”
구문효가 얼빠진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그쪽에서 먼저 제안해 왔습니다. 현오준 팀이 먼저 들어가서 길을 뚫으면 뒤를 잇겠다고… 말입니다.”
이건 너무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지 않는가. 아니, 대놓고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사내정치에서 자네들을 압도할 수 있다’는 의지 표명이다.
현오준이 보기 드물게 분노에 떨고 있었다. 그야 이런 취급을 당하고도 화를 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최재철이 위로를 담아 그에게 한 마디 건넸다.
“외국계 회사라고 낙하산이 없는 건 아니군요.”
“뭐, 사람 사는 곳이니까요. 어쨌든 저희에게서 임무를 완전히 빼앗아가지는 않았다는 걸 다행이라고 여기죠.”
화를 내봐야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아는 모양인지 현오준은 금방 자신의 분노를 감춰냈다.
“오전 중에는 시간이 있습니다. 구문효 씨, 어벤저 라이센스 갱신을 원하신다면 오전 중에 해결해 두시죠. 저쪽 팀이 아직 출근을 안 해서요. 오후에 출발하자고 연락해 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폭거를 당하고도 태연히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게, 역시 현오준은 보기보다는 대단한 사람이었다.
*
구문효는 A급 판정을 받았다.
“축하합니다, 구문효 씨. 이로써 이제 저희 팀은 모두 A급 판정을 받게 되었군요.”
현오준이 그를 축하해 주었다.
“저기, 팀장님? 축하해 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표정이 무서운데요…….”
“무슨 마술을 쓰신 겁니까?”
“마술이요?”
“최재철 씨.”
현오준의 시선이 구문효로부터 슥 돌아 최재철을 향했다.
“오늘 구문효 씨 차를 타고 출근하셨죠? 주말 동안에 구문효 씨랑 같이 계신 겁니까?”
“저기, 팀장님……. 어째 그거 질투에 눈이 먼 여자애가 할 법한 대사인데요.”
“질투하고 있는 겁니다!”
구문효의 지적에 현오준은 간단히 긍정해 버렸다.
“왜 저도 부르지 않은 겁니까!”
“그거야, 팀장님을 주말에 불러 버리면 특근이 되어버리니까…….”
현오준의 기세에 압도당한 듯 구문효는 우물우물 변명조로 말했다.
“아…….”
구문효의 말을 들은 현오준은 손바닥으로 철썩 자신의 이마를 쳤다.
“이럴 바엔 그냥 최재철 씨에게 팀장 자리를 넘겨주는 게 낫겠습니다.”
“아니, 그래도 주말에 만나면 어차피 특근이 되는 건 똑같잖아요?”
“저만 못 만나느니 다 못 만나는 게 낫지 않습니까?”
현오준은 뚱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 농담은 여기까지로 하죠.”
“농담으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
“어쨌든!”
현오준은 구문효의 말을 끊었다.
“팀원 전원이 A급이라니. 게다가 S급 랭커까지 포함된 팀을 이끄는 건 세계에서 저뿐일 겁니다. 자랑스러움이 느껴지는 동시에 어깨가 무거워지는군요.”
“지금 와서 그러셔봤자 좀 늦은 거 같은데요.”
“그러니 오늘의 작전도 꼭 성공시키도록 합시다.”
느물거리는 구문효의 말은 무시하고 현오준은 그렇게 말을 맺었다.
*
“점심식사를 마친 후, 곧장 북한산 차원 균열로 출발하게 됩니다. 그러니 좀 불편하시더라도 미리 차원 균열 진입용 복장으로 환복하신 후 식사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현오준 팀은 단체로 중세 이전의 전사 복장으로 회사 식당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정도로 특이한 복장이다. 사람들 눈을 안 모을 수는 없었다. 아무리 알 건 다 아는 같은 업계 사람들이라지만, TA에도 아직 차원 균열 진입 팀은 사흘 전에 급조된 낙하산 팀을 제외하면 현오준 팀뿐이다.
그중에 유난히 이쪽을 쳐다보며 웃어대는 집단이 있었다. 서로 뭐라고 속삭이더니 왁자하게 폭소마저 터뜨린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현오준은 보기 드문 표정을 지었다. 이를 꽉 깨문 것이,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현오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 쪽으로 다가갔다.
“권우언 팀장님.”
“아, 현오준 팀장.”
현오준으로부터 권우언이라 불린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아는 척을 했다.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다소 촐랑대는 인상의 남자였다.
“식사 후에 바로 출발한다는 말씀을 듣고 팀원들에게 미리 준비를 시켰습니다만.”
아무래도 그들이 현오준 팀과 동행할 낙하산 팀인 모양이었다.
‘맙소사.’
최재철은 속으로만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을 비웃고 있는 그들은 기동 타격대가 입을 법한 방탄복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현오준 팀이 입고 있는 가죽 갑옷보다 편하고, 가볍고, 튼튼하고, 실용적일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군의 최신 장비로, 헬필드에서의 전투에 특화된 물건이었다. 대단히 기능적인 디자인이라, 솔직히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한번쯤 입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차원 균열 안에서는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헬필드용이지, 차원 균열 안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장비는 아니었다. 하지만 최재철은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입을 연 건 그 기동 타격대 복장을 한 남자, 권우언 팀장이었다.
“저희도 그 웃긴… 아니지, 멋진 복장을 착용해야 하는 건가요? 현오준 팀장.”
“굳이 착용하지 않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어지간하면 착용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현오준은 친절하게 대답했다.
“실력으로 커버하시겠다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요.”
“하하하! 하긴 그쪽은 C급에 B급 둘을 데리고 다니시니.”
그러다 문득 오연화의 눈치를 보다가, 금방 눈을 피했다.
“아, 아직 팀원 소개를 하지 못했군요. 소개시켜 드리죠. 이쪽이 저희 팀의 에이스인 오연화입니다. S급 15위의 랭커죠.”
“유명하신 분이니 모를 수가 없죠. 아하하……. 안녕하세요, 오연화 씨.”
권우언은 조심스럽게 웃으며 오연화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정작 소개를 받은 장본인인 오연화는 권우언을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픽 돌렸다. 권우언이 내민 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권우언은 오연화가 자신에게 별 흥미가 없다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기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쪽은 구문효 씨입니다.”
“아, 저랑 같은 B급?”
구문효를 소개받은 권우언은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만만해 보인 모양이었다.
“아뇨, 오늘 부로 A급이 되었습니다.”
“A급?”
권우언의 표정이 불쾌한 듯 일그러졌다.
“현오준 팀장, 너무한 거 아닙니까?”
“너무하다뇨?”
“저기 최재철이란 사람도 A급, 이지희라는 사람도 A급, 거기다 구문효 씨까지 오늘 부로 A급이라니. 장난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의외의 말에 현오준은 순간적으로 표정관리에 실패해, 한쪽 눈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곧 평정심을 되찾고 다시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장난이라니,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팀에 오연화 씨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팀원들의 어벤저 라이센스를 상향조정해서 신청하신 거 말입니다.”
상향조정. 단어는 그리 공격적이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단어가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명백했다.
“…제가 조작이라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불가능하지 않죠.”
권우언은 딱 잘라 말했다.
“C급으로 입사한 사람이 닷새 만에 A급이 되었다고 말해보세요. 누구든 같은 반응을 보일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금 우리 회사의 라이센스 관리팀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여기까지 오니 현오준도 더 이상 온건한 태도를 견지하지 못하고 목소리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권우언은 그런 현오준의 목소리를 듣고도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그야 의심할 만도 하죠. 그 팀은 우리 아버지 라인이 아니니까요! 우릴 엿 먹이기 위해 당신들의 조작에 동참했다고 하면 앞뒤가 깨끗하게 맞지 않습니까?”
“라인… 이라고요?”
현오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재철도 어이가 없어 웃지도 못했다. 라인이라니.
그러니까 이 도련님께서는 네가 우리 파벌이 아니니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겠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계신 거였다.
“팀장님.”
하도 어이없는 발언이라 아무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서 흥분한 기색의 권우언의 어깨에 뒤에 선 경호원 같은 남자가 손을 얹어 진정시켰다.
“…그래요.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긴 아니로군요. 하지만 현오준 팀장, 개수작이 언제까지고 통할 거라고 생각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권우언은 그렇게 짖고는, 가장 먼저 내빼듯 자리를 떠났다. 그도 자신이 수위를 넘긴 발언을 했음을 자각은 한 모양이었다. 권우언의 다른 팀원들도 그 뒤를 따랐다. 먹던 음식과 식기는 그 자리에 다 남긴 채였다.
“오늘 작전은 힘들어질 것 같군요.”
현오준이 한숨처럼 말했다.
*
현오준 팀은 권우언 팀과 북한산 차원 균열 앞에서 재회했다. 그 자리에는 유구언 팀도 있었다. 차원 균열 팀을 위해 균열 입구 주변의 어보미네이션을 소탕하는 임무를 맡은 그는 오늘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현오준 팀장님. 오늘도 날씨가 좋군요. 작전을 진행하기에 딱 좋은 날입니다. 오늘도 한번 바짝 벌어보도록 합시다.”
“아, 그래요. 유구언 팀장님,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현오준과 유구언이 서로 악수를 하는 사이, 권우언은 그 옆에서 두 팀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구언 팀장, 현오준 팀장과 같은 라인이었습니까?”
“전 제 실적 올려주는 사람 라인입니다, 권우언 팀장.”
권우언의 시비 거는 말투에 유구언은 느물느물한 말투로 대꾸했다.
“권우언 팀장께서 저희 팀 실적을 올려주신다면 전 언제든 라인을 바꿔 탈 수 있습니다. 뭐, 받아주신다면 말입니다만.”
“흥, 박쥐같은 족속이로군.”
“박쥐는 포유류입니다, 권우언 팀장. 동화 읽을 나이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권우언은 유구언의 되물음에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깨물었다.
“자, 그보다 일을 합시다! 지금은 업무 시간입니다. 디코이! 여의주씨!!”
“아, 예!”
유구언의 부름에 최재철의 입사 동기인 여의주가 달려왔다.
“준비하시죠.”
“알겠습니다!”
여의주는 경례를 한 번 착 붙이며 대답했다. TA에 들어온 첫 일주일간은 굴곡 있는 시간을 보내야 했던 그이지만, 지금은 표정이 좋아 보이는 게 자신의 임무에 만족하는 모양이었다.
“팀원들을 데리고 매복지로 가주십시오, 권우언 팀장. 이미 임무는 시작되었습니다.”
“흥! 말 안 해도 갈 거요!”
권우언은 유구언의 말에 등을 돌렸다. 그의 장비는 여전히 헬필드 전투용 장비로, 차원 균열 진입용 장비로는 갈아입지 않은 채였다. 그의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권우언 팀장님, 잠시만요.”
현오준이 그를 불러 세웠다.
“뭐요?”
이제는 대놓고 적대심을 표출하는 권우언에게 현오준은 최대한 우호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차원 균열 진입용 장비로 환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난 광대가 아니오, 현오준 팀장!”
권우언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신들에게 배정된 매복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현오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차피 저들과 엮일 건 당신이니 하는 말이지만, 현오준 팀장님.”
유구언이 느물대며 말했다.
“진심으로 동정합니다.”
“그거 고맙군요.”
현오준이 다시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
이미 현오준 팀이 균열 안에 돌입해 한바탕 휘저은 탓인지, 헬필드로 기어 나오는 어보미네이션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유구언은 신이 났다.
“인비지블 비스트를 이렇게 쉽게 처리할 줄이야. 역시 S급 랭커는 다르군요. 감사합니다, 오연화 씨. 당신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전멸했을지도 몰라요.”
인비지블 비스트는 중량보다 단가가 높은 편이다. 주로 차원 균열 안쪽에서 출몰하는 탓에 헬필드에서 보기엔 희귀하기도 희귀하지만, 그 완벽에 가까운 투명화 능력 덕에 연구실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진작 차원 균열 진입 작전을 한 WF는 이미 충분히 샘플을 확보해서 관련 기술을 몇 개 내놓았지만, TA는 여전히 연구 진척이 늦어서 속을 태우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인비지블 비스트를 두 개체나 잡았으니, 아무리 오연화의 힘을 빌린 탓에 공헌도를 나눠줘야 한들 신이 안 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차원 균열 바로 앞에서 이렇게 떠들어도 어보미네이션이 안 나오는 걸 보니 저희 임무는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이제 돌입하셔도 될 것 같군요.”
유구언의 그 소리를 듣고 나서야 권우언은 그의 팀원들과 함께 슬그머니 매복지에서 기어 나왔다. 그들도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오연화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그들의 모습이 조금쯤은 재미있게 보였다.
“그럼 사전에 브리핑한 대로, 저희 팀이 먼저 차원 균열에 돌입하도록 하겠습니다.”
현오준이 그렇게 말하자, 권우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희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저희를 견제하시는 겁니까?”
권우언이 눈을 치떴다. 유구언이 현오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젓는 유구언을 보며 현오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먼저 돌입하시죠.”
“흥!”
권우언은 코웃음을 한 번 치고, 팀원들을 끌고 먼저 차원 균열 안으로 돌입했다.
“그럼 저희는 5분 후에 돌입하겠습니다. 임무를 교환하는 형태로…….”
“그렇게 하시오!”
현오준은 진입하는 권우언의 등에다 대고 말했지만 권우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쳐 대답했다.
그리고 1분 후.
“으아아아악!!”
권우언이 비명을 지르며 가장 먼저 차원 균열에서 도망쳐 나왔다.
‘재미있을 정도로 예상대로로군.’
최재철은 웃지도 못했다. 이렇게까지 한심해 주면 웃을 마음도 안 들게 마련이다.
“히이이이익!”
권우언의 뒤를 따라, 다른 팀원 하나도 나왔다. 차원력을 보아 B급. 이 사람이 아마도 다른 또 하나의 낙하산일 터였다. 그리고 열을 셀 시간이 지나도 다른 팀원들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도 많이 무르군.’
최재철은 망설임 없이 차원 균열 안으로 몸을 던졌다.
“부탁합니다, 최재철 씨!”
피투성이가 된 권우언을 부축한 현오준이 그렇게 외쳤다. 명령 무시가 아님을 미리 못 박아두는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최재철은 차원 균열 안에 들어섰다.
예상대로 차원 균열 안에 들어온 인간을 가장 먼저 반겨주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보미네이션들이 차원 균열 생태계의 밑바닥으로 새로 들어온 인간들을 환영해 주는, 소위 말하는 어보미네이션 웨이브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그 수많은 어보미네이션을 상대로 세 명의 A급 어벤저가 두 주인의 퇴로를 확보해 주기 위해 지금도 처절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괜히 A급은 아닌 듯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었지만 이미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물러서!”
최재철이 벼락처럼 외치며 전면으로 튀어나갔다. 바로 세 A급 어벤저의 앞을 막아선 그는 철검을 빼어들어 달려드는 어보미네이션들을 사정없이 베어 넘겼다.
“이 틈에 얼른 퇴각하라!!”
“당신은?”
“어서!”
걸리적거리니까 얼른 빠지라고 하는 걸 못 알아들은 모양인지, 그들은 잠깐 얼쩡대다가 결국 등을 돌리고 먼저 바깥으로 나갔다.
그들이 다 나가고 목격자가 사라지자, 최재철은 더 이상 힘을 아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신 앞으로 모여든 모든 어보미네이들을 전부 다 염동력으로 쓸어 담고, 그대로 벽에 처박아 죽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끝!”
상황 종료. 벽면에 처발라진 어보미네이션 시체들이 마치 벽화처럼 보였다.
“후.”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을 잠깐 감상하던 최재철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차원 균열 바깥으로 나갔다.
멀쩡한 모습으로 나온 최재철을 권우언 팀의 면면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같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운 것을 보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런 최재철을 향해 달려드는 오연화.
“선생님!”
여기에 쐐기와도 같은 오연화의 외침.
권우언은 이렇게 인식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로 굉장한 능력자인 오연화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존재.
그게 최재철이라고.
‘이 녀석, 다 알고 했군.’
최재철은 오연화를 내려다보면서 싱긋 웃었다.
그녀는 자신이 보여준 능력이 권우언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충분히 이해하고, 자신이 최재철을 선생님이라고 불렀을 때 어떤 파급 효과가 생길 것인지 전부 예상하고 움직인 것이다.
아직 어리지만 눈치도 빠르고 머리도 비상하다. 거기다 강력한 능력까지. 아군이라면 이렇게나 든든할 수가 없는 인재이다.
결국 그는 오연화가 자신의 허리에 들러붙는 것을 용인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여기에 굳이 현오준이 이렇게 또 묻는다.
“다 정리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손발이 척척 맞아들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 그리고 지금은 웃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재철은 웃었다.
그 결과.
권우언은 지금 신이라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최재철을 보고 있었다.
*
권우언 팀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방어구와 무기는 모조리 파괴되었고, 중상자 3명에 경상자 2명이 발생했다. 그리고 중상자는 모조리 A급. 두 명은 능력으로 상처를 막고 어떻게든 버티고 있었지만, 중상자 중 한 명은 이미 중태에 빠져서 즉시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누가 봐도 도저히 더 이상 작전을 지속할 수 없는 피해였다.
“사망자가 발생하지 않은 게 기적적이로군요.”
현오준이 한숨처럼 말했다.
“…이게 다 제 탓이라는 겁니까?”
팀원들 중에서는 가장 멀쩡한 권우언이 눈을 치뜨며 반발했다.
“네.”
현오준은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자 권우언은 입을 딱 벌렸지만,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결국 현오준의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저희는 작전을 속행하겠습니다. 권우언 팀장은 비교적 멀쩡해 보이니 작전에 동행하시겠다면…….”
“아니요.”
의외로 권우언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팀원들을 챙겨야겠습니다. 이번에는 동행을 포기하도록 하죠.”
이를 득득 갈면서, 그렇게 말했다.
“현오준 팀장, 이번 일은 제 탓이 맞습니다. 인정하죠. 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각오해 두세요.”
뭐라고 평하기 애매한 소릴 남기고 권우언은 팀원들과 함께 헬기를 타고 후방으로 향했다.
“전 대체 뭘 각오해야 되는 거죠?”
권우언이 떠난 뒤에야 현오준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최재철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찾을 수 없었다.
*
그 날 현오준 팀의 첫 일은 최재철이 처치한 어보미네이션 시체를 밖으로 끌어다 내놓는 것이었다. 이거야 지난 목요일에도 한 번 했었던 작업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사흘 만에 정식으로 차원 균열 탐사가 재개되었다.
“사부님이 한 번 처리를 하셨는데 저렇게 또 모여들다니……. 저놈들은 어디서 저렇게 모여드는 걸까요?”
구문효가 통로 너머에서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어보미네이션 무리의 안광을 보며 투덜거렸다. 최재철은 그 답을 안다.
바깥이다.
이 동굴을 통해 나갈 수 있는 틈새 차원은 만만치 않은 곳이다. 목숨이 세 개씩 있는 어보미네이션이라도 살아남는 게 녹록치 않은 가혹한 환경이다.
그런 만큼 가치 있는 것도 많지만, 그건 인간에게나 보상이지 당장 살아남는 게 목적인 어보미네이션들에겐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생존 확률이 높은 이런 동굴에 모여드는 것이다.
물론 그런 지식을 지금 여기서 풀어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최재철은 간략하게 대꾸했다.
“그러게.”
거기서 구문효의 대화는 일단 끝났다. 현오준이 입을 열었다.
“자, 그럼 다시 진행해 보죠. 오른쪽이었나요? 최재철 씨.”
“맞습니다, 팀장님. 제가 앞장서죠.”
본래 대형대로 최재철은 가장 앞에 섰다. 현오준 일행이 오른쪽 통로로 다가서자 거기 있던 어보미네이션들이 달아나 그들에게 길을 터주었다. 머리는 나쁘지만 생존 본능은 기가 막힌 놈들이다. 덕분에 그들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중력이 바뀌는 구간까지 올 수 있었다.
“이쯤에서 빅 카멜레온이 덤벼들 때가 됐는데.”
구문효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현오준 일행을 피해 달아난 놈들이 변색 도마뱀 무리에게 걸려, 도마뱀들은 그것들을 사냥하고 포식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 개 있는 어보미네이션 목숨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듯, 도마뱀들은 자신들보다 약한 어보미네이션들을 산 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되살아나면 살까지 같이 재생될 테니 대단히 효율적인 섭식 방식이었지만, 옆에서 보기엔 그저 끔찍해 보일 뿐이었다.
“잘 봐둬.”
도마뱀들에게서 시선을 피하려는 제자들에게, 최재철은 말했다.
“우리도 저렇게 해야 할 수 있어.”
“…어보미네이션을 먹어야 한다고요?”
오연화가 끔찍해하며 되물었다.
“식량이 다 떨어진다면 그래야 할 수도 있지.”
최재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실제로 그는 이미 어보미네이션을 먹어본 경험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뭐든 먹어야 하는 법이고, 그 ‘뭐든’에 어보미네이션이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으……!”
하지만 이지희는 정말 싫은 듯 몸서리쳤다.
‘뭐, 싫은 걸 좋아하라고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어보미네이션을 먹는다고 딱히 더 좋을 것도 없다. 차원력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해당 개체의 차원 능력을 가져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지금 이 동굴 안에서 굳이 떠올릴 필요는 없는 경우의 수였다.
어쨌든 어보미네이션을 먹는다는 건 어지간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나 일어날 일이었다.
“그러니 배가 더 고파지기 전에 얼른 가자고.”
최재철은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에 레펠 장비가 없어서 진행하지 못했던, 수직으로 난 통로 앞에 도착했다.
“사실 금요일까지만 해도 레펠 장비가 꼭 필요했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최재철이 말했다.
“구문효를 포함에서 이제 모두 신체 능력 강화가 가능하니, 능력을 발동하고 그냥 뛰어내려도 될 것 같습니다.”
어지간하면 그냥 능력에 의존하지 않고 레펠 장비를 이용하자고 말할 최재철이었지만, 지난주 목요일에 대장간에 발주를 넣어 야근에, 주말특근까지 시켜가며 급하게 만든 이 장비들은 별로 신용이 가지 않았다. 만듦새만 보면 딱 급조된 장비다. 그야 좋은 게 쉽게 만들어질 리는 없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그러도록 하죠.”
현오준도 생각이 다르지는 않은지 딱히 반대를 표하지는 않았다.
“저, 선생님. 전 아직…….”
“넌 내가 안고 뛰어내리지, 뭐.”
오연화가 자신이 없는 듯 우물거렸지만, 최재철은 일축했다.
“그럼 연화랑 제가 먼저 뛰어내리겠습니다, 팀장님.”
“늘 궂은 일만 맡겨서 죄송하군요. 하지만 전 오연화 씨의 몸에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대담하질 못해서. 부탁합니다, 최재철 씨.”
“알겠습니다.”
오연화를 품에 안은 최재철은 통로를 향해 휙 뛰어내렸다. 별문제 없이 착지한 그는 오연화를 내려놓았다. 오연화는 최재철의 목을 안은 채 몇 초쯤 저항했지만, 결국은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통로 위에다 대고 손가락을 몇 번 퉁겨 신호하자, 다음 인원이 떨어져 내렸다. 이지희였다. 깨끗하게 착지해서 충격을 줄이는 모습이 과연 신체 능력에 자신이 있는 제자다웠다. 칭찬을 바라는 것 같은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기에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잘했어.”
다시 신호를 보내자 다음 인원이 떨어져 내렸다. 구문효였다. 마지막으로는 현오준이 뛰어내려 모든 인원이 별문제 없이 수직 통로를 통과했다.
“그런데 다시 올라갈 때는 어떻게 하죠?”
이지희가 뒤늦게 생각난 듯 그렇게 물었다.
“그냥 뛰어 올라가면 되지.”
“이 높이를요?”
태연하게 대답한 최재철에게 구문효가 놀라며 되물었다.
“뭐, 먼저 올라간 사람이 로프를 내려주면 되고.”
최재철이 그렇게 이어 말하자 그제야 이지희와 구문효가 안도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기야 그들의 능력으로는 아직 이 정도 높이를 단번에 뛰어오르는 건 힘들긴 할 터였다. 현오준이나 최재철 정도나 가능하겠지.
“그럼 다시 진행하죠.”
현오준은 다시 온몸의 아드레날린이 샘솟는 모양이었다. 본인은 냉정한 척을 하려는 모양이지만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번에 최재철이 말한 ‘바깥’에 대해 상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최재철이 다시 전면에 섰다.
현오준의 기대와 달리, 그들은 30분 정도 아무 일도 없이 그냥 걸어야 했다. 사람 걸으라고 만들어놓은 통로는 아닌지라 걷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았다. 체력이 가장 약한 오연화가 조금씩 지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최재철이 멈추고 주먹을 들어 올려 보였다. 정지 신호다. 갑자기 멈추느라 오연화가 이지희의 등에 얼굴을 박았다. 최재철은 그쪽을 보지는 않았다. 그는 어둠에 휩싸인 정면을 바라보았다. 꾸물꾸물 움직이는 것이 그의 눈에는 보였다.
“인비지블 비스트입니다.”
최재철이 현오준에게 보고했다.
투명 마수, 인비지블 비스트였다. 현오준 팀은 이미 겪어본 어보미네이션이었다. 그들이 처음 합을 맞춘 와우산 차원 균열에서의 훈련에서 잡아본 적이 있다. 방금 전에 유구언 팀이 오연화의 힘을 빌려 잡기도 했고.
하지만 이번에는 두 마리가 동시에 나타났다. 저 녀석들은 하급 어보미네이션과 달리 영악하고 기억력이 좋았다. 한 마리를 잡더라도 다른 한 마리를 놓치면 앞에서 무슨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지 모른다. 방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인비지블 비스트 놈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움직이고 있었지만, 저건 기만책이다. 녀석들은 이미 이쪽의 존재를 인지했다.
‘자, 이제 어쩐다?’
최재철은 적어도 팀원들 앞에서는 최재철의 능력만으로 사태를 헤쳐 나갈 생각이었으므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응할 생각이었다. 그나마 A급을 달았으니 더 강력한 능력을 보여줄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다.
“팀장님, 죄송합니다만 당분간 선봉을 부탁드립니다.”
“어쩌실 생각이죠?”
“저놈들의 퇴로를 막아 증원을 방지해 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후미는 이지희 씨가 맡아주셔야 하겠군요.”
“알겠습니다.”
현오준의 말에 이지희가 알아서 일행의 맨 뒤에 섰다. 척하면 척이니 일하기가 편하다.
최재철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전 동작 없이 곧장 튀어나갔다. 순간적으로 바람의 장막을 쳐 모습을 숨긴 덕택도 있었던지라, 인비지블 비스트 놈들은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배후를 잡힌 놈들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최재철은 먼저 반응해 뒤돌아서려는 놈을 꽝 차서 일행 쪽으로 날려 버리고, 다른 한 놈과는 일대일로 대치했다. 곧장 인비지블 비스트의 강맹한 촉수 공격이 날아들었다.
“후.”
최재철은 짧게 웃으며 양손에서 차원력 커터를 전개했다. 아무리 A급 어보미네이션의 촉수라 한들, 최재철의 차원력 커터를 버텨낼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공격할 때마다 촉수가 잘려 나가니, 인비지블 비스트는 상당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저벅저벅. 최재철은 인비지블 비스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압도당한 인비지블 비스트는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건지 날카로운 이빨을 벌려 최재철에게 달려들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상대가 최재철만 아니었다면.
“한 번.”
인비지블 비스트의 목이 잘려 나갔다. 촉수가 아닌 본체라 한들 차원력 커터에 잘리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되살아난 인비지블 비스트는 곧장 앞으로 뛰어 도망치려고 했지만,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동체의 앞부분뿐이었다. 뒷부분은 잘려 나가 있었다. 최재철이 인비지블 비스트의 동체를 반으로 쪼갰기 때문이었다.
“두 번.”
최재철은 나지막하게 선언했다. 인비지블 비스트는 한국어를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목숨이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음은 알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다시 도주를 꾀했지만 별의미는 없었다.
쭉 늘어난 차원력 커터에 의해 인비지블 비스트의 동체는 이번에는 좌우로 나뉘었다.
“끝났군.”
최재철은 후,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대로 인비지블 비스트는 이미 절명했다.
“저쪽도 잘 했겠지?”
훈련 첫날에는 현오준 팀을 그럭저럭 고생시켰던 인비지블 비스트지만, 성장한 그의 제자들은 손쉽게 처치할 수 있으리라고 최재철은 생각했다. 그렇기에 제자들 쪽으로 인비지블 비스트를 차준 것이다. 한 방 차줬을 때 목숨도 하나 날아갔을 거고, 제자들은 두 번만 죽이면 됐을 터였다.
“아, 선생님! 무사하셨네요!!”
어둠 너머에서 달려온 건 오연화였다. 이게 인비지블 비스트가 변장한 모습이었다면 재미있었겠지만 이 A급 어보미네이션에게 그런 능력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연화의 등 뒤에는 이미 죽어 나자빠진 인비지블 비스트의 시체가 보였다.
“날 도우러 온 거야?”
“혹시나 해서요. 역시나 였지만요.”
제자들이 이 괴물을 손쉽게 처치하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금방 처치하고 자신을 도우러 올 거라고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최재철은 약간 감동하고 말았다.
“그래, 잘했다.”
“저 혼자 한 건 아니지만요.”
오연화는 투덜거리듯 말했다.
“전 제가 다른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가 봐요.”
오연화의 말에 최재철은 픽 웃고 말았다.
“다시 노력할 마음이 들었니?”
“네… 뭐.”
“다행이네. 좋은 일이야.”
툴툴대는 제자에게 그렇게 속삭여 주며, 최재철은 다시 일행과 합류했다.
*
상당히 비싼 가격에 매매되는 인비지블 비스트의 시체지만 현오준은 이번에도 미련 없이 버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이걸 들고 움직일 수도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정이다.
“빅 카멜레온 놈들은 오늘 포식하는 날이로군.”
구문효가 투덜거렸다. 돈으로 환산해 보면 아깝다고 생각되는 게 정상이긴 하다.
“자, 다시 진행하죠. 최재철 씨,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팀장님.”
미련을 떨치고 그들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가는 동안에 인비지블 비스트와 더 조우했지만, 별 어려움 없이 처치했다.
그리고 다시 갈림길이 등장했다.
“갈림길도 갈림길이지만, 저 우글거리는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가 더 문제로군요.”
반대편 통로에 척 봐도 열 마리가 넘는 인비지블 비스트가 있었다. 변색 도마뱀과 달리 위협한다고 도망칠 놈들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부주의하게 먼저 덤벼올 놈들도 아니었다. 머리가 좋은 놈들이다. 지금까지 지나온 통로에 몇 마리씩 서 있었던 건 초병 격인 놈들이었다. 초병들이 도망쳐 오지도 못할 정도로 현오준 팀이 강력한 화력을 투사할 수 있는 상대라는 건 그들도 알아챘을 터였다.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와 현오준 팀 간의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대치 구도가 형성되었다.
무시하고 지나치면 등 뒤에서 습격해 올 터였다. 되돌아가려고 등을 내보여도 똑같으리라. 양측 모두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 지겹다. 그냥 달려들어서 다 죽여 버릴까?’
최재철이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갑자기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에 소란이 일었다. 현오준 팀에 등을 보이는 위험마저 감수하고, 그것들은 갑자기 내달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눈이 여러 개 달린 촉수를 쭉쭉 뻗어 무리에서 가장 뒤떨어진 인비지블 비스트를 휘감았다. 사로잡힌 인비지블 비스트는 끔찍한 비명 소릴 내었지만 무리의 다른 개체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빅 마우스!”
그 어보미네이션과 상대를 해보았던 오연화가 알아보고 이름을 외쳤다. 최재철은 이계에서 틈새의 눈이라 불렀던 상위 개체다.
사로잡은 인비지블 비스트의 촉수를 산 채로 뜯어내 으적으적 씹어 먹고 있던 빅 마우스의 수많은 시선 중 몇 개가 문득 현오준 일행을 향했다. 그리고 곧 더 많은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런……!”
구문효가 낭패한 듯 속삭였다. 승산이 없다고 느낀 모양이었다.
‘이 녀석은 아직도 자기 실력에 대해 자신이 없나?’
최재철은 긴장감도 없이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 현오준 팀은 빅 마우스를 별 피해도 받지 않고 여유 있게 죽이고도 남을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구문효의 긴장은 다른 이들에게도 번져서, 현오준마저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긴장하지 않고 있는 팀원은 오연화 정도였다.
“연화야.”
그래서 최재철은 오연화를 불렀다.
“네, 선생님.”
“가자.”
“네.”
연화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최재철 씨?”
“팀장님, 후방 지원을 부탁드립니다.”
빅 마우스는 인비지블 비스트의 천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천적을 처치해 주는 현오준 팀에게 호의를 가질 거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빈틈을 노려서 뒤를 덮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기에 후방 지원은 반드시 필요했다.
“알겠습니다.”
현오준의 대답도 받았겠다, 더 망설일 건 없었다.
“문효야, 지희야, 센 거 한 발씩 쏴줘라.”
“아, 네!”
“알았어요!!”
빛의 칼날과 뇌전다발이 빅 마우스를 향해 날았다. 빅 마우스는 놀라서 먹던 인비지블 비스트도 집어던지고 차원력을 집중해 방어막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빛의 칼날과 뇌전다발은 빅 마우스에게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접근할 수 있으면 그걸로 된 거니까.
“연화야!”
“네!!”
오연화의 염동력 손아귀가 빅 마우스의 촉수 세 개를 틀어쥐었다. 그리고 최재철도 양손에서 차원력 커터를 빼어들어 빅 마우스를 덮쳤다. 방어막을 펼치느라 빅 마우스의 반응은 다소 느렸다. 순식간에 두 개의 촉수가 잘려져 나갔다.
빅 마우스의 눈들이 경악에 잠겼지만 이미 늦었다. 다섯 개의 촉수 중 두 개가 잘려져 나가고, 다음 셋은 오연화에게 틀어쥐어져 있으니 빅 마우스에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이제 없었다.
“후.”
최재철은 짧게 웃으며, 오연화가 틀어쥔 세 개의 촉수를 마저 잘랐다. 이제 입만 남은 동체가 촉수 하나도 없이 그 자리에 나뒹굴었다.
“전보다 잘하는구나, 연화야.”
“한 번 상대해 본 적이니까요.”
칭찬 받은 게 기쁜 듯 웃으며, 오연화가 대답했다.
“팀장님, 끝났습니다.”
최재철은 후방으로 물러난 인비지블 비스트들을 상대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현오준과 다른 일행들을 불렀다.
어쨌든 빅 마우스를 순식간에 처치하는 것에 성공했으므로, 이제부터는 인비지블 비스트의 급습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 이유는 물론 저 어보미네이션들이 천적을 처치해 준 현오준 팀에게 감사해서가 아니다.
인비지블 비스트에게 있어서 빅 마우스는 아예 만난 순간 바로 도망쳐야 하는 자신들의 천적이다. 현오준 팀은 그런 자신들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천적을 일순간에 처치해 버렸다.
이로써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는 최재철과 오연화에게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도저히 덤벼들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큰 공포를.
그 증거로 최재철이 그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딛자, 인비지블 비스트들은 두어 걸음을 크게 물러났다. 공포의 전이가 제대로 되었음을 확인한 최재철은 현오준에게 설명했다.
“이제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는 우리에게 쉽게 덤비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저 빅 마우스가 들어온 통로 방향이 바깥입니다.”
저 빅 마우스는 본래 이 동굴에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바깥에서 도망쳐 온 인비지블 비스트 무리를 잡아먹기 위해 쫓아온 개체였다.
설명을 들은 현오준은 그제야 경계 태세를 풀었다.
“그럼 이제 앞으로 갈 수 있겠군요.”
현오준은 다행이라는 듯 말했다. 이 남자에게 있어선 돈이나 명예보다 이 차원 균열을 탐사하고자 하는 욕망이 더 큰 것 같았다. 그리고 최재철에겐 그 욕망을 채워줄 능력이 있었다.
“가시죠.”
일행은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인비지블 비스트들은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
그리고 그들은 드디어 당도했다.
틈새 차원, 차원과 차원 사이에 나타난 또 다른 차원에.
여기는 김인수가 당도했던 이계와는 다른 장소이다. 김인수가 파주의 차원 균열을 통과해 간 이계는 또 다른 오래된 차원이다.
원래 차원 균열의 입구는 오래된 차원, 출구는 틈새 차원으로 나 있는 게 일반적이다. 파주의 차원 균열이 특이했던 것으로, 입구와 또 다른 입구가 연결되어 있는 케이스였다.
하지만 여기는 다르다. 여기가 바로 그 ‘일반적인 차원 균열’로, 현오준 팀은 지금 틈새 차원으로 들어서는 출구에 서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새로운 차원은 오래된 차원들의 영향을 받아 심하게 일그러져 있다. 사막과 정글, 설원과 용암 지대가 불과 수백 미터 간격으로 뒤섞여 있는 광경은 언제 봐도 기괴했다.
여기에 몇 걸음 걸을 때마다 뒤바뀌는 낮과 밤, 여름과 겨울, 태양의 크기와 달의 숫자.,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습격해 오는 차원 마수들.
틈새 차원이 인접한 다른 다종다양한 차원의 영향을 받아 뒤섞여 일그러진 결과물이다. 차원 마수, 어보미네이션이 여러 종류의 생물이 뒤섞인 것처럼 생긴 이유이기도 하다.
정신적으로 연약한 인간이라면 이런 환경에 던져지면 금세 미쳐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이기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다.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은 지옥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가 바로 그 지옥이다.
틈새 차원의 광경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 굳어져 버린 팀원들을 보며, 최재철은 웃었다. 저들이 굳어져 버린 이유는 비단 눈앞에 펼쳐진 광경 때문만은 아니다.
제아무리 차원력을 시각화해서 보는 능력이 없더라도, 어벤저라면 이 세계의 본질을 놓칠 리 없다. 늙은 차원인 지구와는 달리, 이 어리고 젊은 차원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차원력을 그들은 지금 피부로 느끼고 있으리라.
“이건… 굉장하군요.”
현오준이 눈앞의 광경에 압도된 듯 몸을 떨며 말했다.
“여긴 다른 세계인 겁니까?”
“그렇게 보이는군요.”
최재철이 대답했다.
“여길 탐험하려면 며칠이 있어도 모자라겠어요.”
“지금 저희가 가진 장비로는 탐험하는 것도 좀 무리가 있겠죠.”
현오준의 말에 최재철이 돌려서 말했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곳은 높은 바위산의 절벽 위였다. 그렇기에 이 틈새 차원의 광경을 멀리까지 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건 다행이긴 했지만, 최재철의 말대로 장비 없이 여길 등반하거나 하강하는 것은 너무 위험도가 높았다.
그들이 가져온 레펠 장비를 신뢰할 수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겠지만 안타깝게도 급조된 장비로 낭떠러지를 공략하는 건 무리가 있었다.
물론 부족한 장비란 건 레펠 장비뿐만은 아니었다. 낭떠러지 아래는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사실 일반인이 정글에서 먹을 것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이 경우는 전문가라도 마찬가지다. 저 정글은 다른 세계의 정글이다. 지구의 전문지식이 통용되리라고 생각하긴 어려웠다.
즉, 며칠 치의 식량, 물, 그리고 정글용의 장비가 필요했다.
“여기서는 일단 돌아가서 이 세계의 존재를 보고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군요. 오랜 시간 동안 외부와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저희 팀이 전멸했다는 보고가 올라갈 수도 있겠고요. 지금은 여기서 돌아서는 게 맞는 판단 같습니다.”
현오준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의 발길은 좀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는 상황인 것이리라.
“자, 자.”
현오준은 눈을 꾹 감고 고개를 몇 번 흔든 후,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갑시다. 오늘은 이 공간… 이 세계의 존재를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합시다.”
“다시 올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와야지요.”
현오준은 강한 의지로 눈을 빛내며 최재철의 말을 긍정했다.
*
돌아오는 길은 더 간단했다.
인비지블 비스트들은 현오준 일행을 더 이상 노리지 않았으며, 그건 빅 카멜레온을 포함한 다른 어보미네이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됐다.
현오준 팀이 돌아오는 길에 남겨두었던 어보미네이션 시체는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다른 어보미네이션들이 포식한 것이리라. 빅 마우스의 촉수들도 먹어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빅 마우스의 본체는 남겨져 있었다. 본체마저 먹어치우면 빅 마우스가 부활할 테니, 다른 어보미네이션이 건드리지 않은 건 당연했다.
이번 탐사로 얻은 성과는 바로 이 빅 마우스의 본체였다. 이 정도로 강력하고 희귀한 어보미네이션을 생포한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럭저럭 보상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차원 균열에서 나와 보니 이미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사용할 수 없었던 데다 계속 어두컴컴한 동굴 안에서만 움직였기에 시간관념이 희미해져 있던 터여서 팀원들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냐며 놀랐다.
“오늘도 야근은 피할 수 없겠군요. 죄송합니다.”
현오준의 말에 팀원들은 다 함께 웃었다. 아주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아니, 왜 웃으시죠?”
“아뇨,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서요.”
당황한 현오준의 질문에 구문효가 대답했다.
“저희가 저기서 보고 온 게 워낙… 그렇잖아요.”
이지희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오늘도 야근인가요. 월요일부터 야근이라니, 이러면 게임은 언제 하죠?”
오연화가 투덜거렸다.
“앞으로는 게임하기 더 힘들어질 거야.”
“네?”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청천벽력이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 반응이 웃겨서 최재철은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이유를 말해주었다.
“이제부터 저 틈새 차원에 며칠이고 틀어박혀야 할 테니까.”
“틈새 차원! 차원 균열 끝에 틈새 차원이라. 괜찮은 명칭이로군요.”
최재철이 사용한 새로운 용어가 마음에 든 듯 현오준이 몇 번이나 틈새 차원, 틈새 차원하고 되뇌었다. 사실 최재철의 입장에선 그냥 깜박하고 부주의하게 입 밖에 낸 단어였지만, 이 정도야 뭐 별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
*
야근을 마치고 귀가 중인 최재철에게 전화가 왔다. 모르는 번호였다. 최재철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최재철 씨로군요?
최재철은 목소리의 주인을 금방 파악했다. 권우언이었다.
“맞습니다.”
-전 권우언입니다. 오늘 낮에도 뵈었죠?
“네. 다친 팀원들은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권우언의 태도는 의외로 깍듯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의도를 파악하기 쉬웠다.
“본론을 말씀하시죠.”
-최재철 씨, 저희 팀으로 오십시오.
더군다나 권우언은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당신이 대단한 인간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저희를 속이셨더군요.
“속여요?”
-첫 라이센스 평가 때 D급, 교육수료 후 C급, 그리고 지금은 A급. 그 성장성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서 저는 현오준 팀장이 절 속였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사실은 당신이 정부를 속였다는 걸 조금 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별로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요.”
-그거야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전 당신을 갖고 싶습니다.
사랑 고백같이 들릴 정도로, 권우언의 목소리는 열렬했다.
-지금의 연봉, 그 두 배를 약속해 드리겠습니다. 더불어 임무마다 공헌도 평가도 높게 쳐드릴 것 또한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걸 문서로 남길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통화를 녹음하셔도 상관없고요. 어떻습니까, 최재철 씨.
“죄송합니다, 권우언 팀장님.”
최재철은 딱 잘라 말했다. 권우언을 찼다. 그러나 권우언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지요.
그럼 지금까지 이야기한 건 서두 부분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런 말을 던질 새는 없었다. 권우언의 말은 빨랐다.
-곧 저희 라인이 TA의 한국 지사를 장악할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현오준 팀장은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내쳐지겠지요.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참고로 이 내용도 녹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완전무결한 자신감. 권우언의 목소리에선 그것이 묻어나고 있었다. 녹음한 통화 파일을 언론에 흘려봤자, 인터넷에 흘려봤자 전부 틀어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이 남자는 진가규와 같은 속성의 인간이다.’
최재철은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죄송합니다, 권우언 팀장님.”
-당신도 내쳐질 겁니다.
권우언은 그것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당신은 뛰어난 인간입니다. 하지만 회사는 당신의 유능함을 무시하고 내칠 겁니다. 아무리 회사 전체에 이득이 되는 인재라도 우리 라인에는 해가 되므로 내치게 될 겁니다. 저희 아버지는 그렇게 하실 겁니다.
권우언의 아버지, 권지력 이사는 이미 한국 지사를 장악하고 본사에까지 파이프를 연결했다. TA 본사에 있어서도 한국 지사는 상하 관계가 아니라 협력 관계에 가깝다. 권우언의 말은 현실로 이뤄질 공산이 높았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도 다섯의 인간을 한꺼번에 상대하지는 못합니다. 그리고 그 다섯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이 권력입니다. 그렇기에 권력이란 강한 것입니다. 지고의 힘이지요. 권력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최재철도 권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것과 맞서본 적도 있고, 그것에 휘둘려 본 적도 있다. 그 속성이란 놀라울 정도로 폭력적이어서, 급류를 탄 물살처럼 통제할 수 없다.
-최재철 씨, 권력에 따르십시오. 그럼 자연히 권력을 얻게 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권우언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최재철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권우언은 체념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 적입니다.
전화는 끊겼다. 실로 극단적인 인간이었다. 적이라니. 그럼 지금 권우언의 자택으로 쳐들어가 권우언과 그 아버지인 권지력의 목을 날려도 된단 말인가. 적이라는 단어는 쉽게 쓰는 게 아니다. 전쟁을 겪어본 인간이라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최재철은 픽 웃었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권우언과 권지력의 목을 치러 나설 생각은 아니었다. 그보단 흥미로군 가설이 하나 떠올랐다.
권우언은 최재철에게 자신과의 통화 내용을 녹음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만약 최재철이 이 통화 내용을 경쟁사인 WF에 전달하면 어쩌려고? 현오준과 최재철이 WF로 이적하면 어쩌려고 이러는 것일까?
답은 간단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모든 시도는 실패한다. 그런 1차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 권우언은 대처할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기에 권우언은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여기서 그 흥미로운 가설이라는 걸 꺼낼 수 있게 된다.
권지력과 권우언의 라인이 WF와 내통하고 있다.
WF가 장악한 언론을 TA가 또 장악할 수는 없다. TA가 내보내지 말라는 기사를 WF가 내보내라고 말한다면 적어도 몇몇 언론은 WF의 말을 따라 기사를 내보낼 테니까.
최소한도의 공조조차 취하지 않는다면 정보 통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권우언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단순한 허세일지도 모르지만, 그 가능성은 낮았다. 허세를 부려서 얻는 이득에 비해 위험이 너무 크다. 권우언이 친 허세는 그 위험이란 게 별로 없어야 칠 수 있는 허세였다.
“뭐, 내 생각보다 권우언이 더 멍청한 인간일 가능성도 있지.”
최재철은 막 피어오르려던 권우언에 대한 적개심을 일단 접어두고 일단은 더욱 신중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다. 완전히 증명되기 전까지는 진실이 아니다.
*
유곽희는 진가충의 처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증오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그녀는 본래 진현우의 약혼녀였다.
어차피 정략결혼이었다. 진현우에게 크게 연애 감정이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혼담을 멋대로 정해 버린 집안에 크게 악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진현우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당시에도 그녀는 꽤나 미녀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고, 진현우는 그녀의 그런 주변의 평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진현우는 그녀를 액세서리 개념으로 취급하며 대외적으로 약혼자인 걸 공표하고 다녔다.
진현우가 사실을 말하고 다니는 거야 별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좀 재미가 없었다. 정해진 인생의 철로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사춘기를 보내던 당시의 유곽희에게는 딱히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장난을 좀 쳤다.
처음에는 진현우를 무시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진현우는 그런 유곽희의 태도를 꽤나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뭘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진현우도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때였고, 단순히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 몰랐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 진현우의 반응이 재미있었던 유곽희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다른 남학생에게 고백을 했다. 누군지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냥 그럭저럭 잘 생기고 성적도 나쁘지 않고 운동도 좀 하던 무난한 남학생이었다. 무엇보다 진현우의 파벌에 속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했다. 진현우를 도발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란 뜻이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의 유곽희는 자신이 미녀라는 걸 자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대담하고 자신만만하게 굴었던 거였지만 그 남학생이 한 대답은 의외였다.
“싫어.”
짧지만 강렬한 대답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차였다는 것을 몇 분 후에나 자각할 수 있었다.
그가 그럭저럭 잘 생겼다는 건 거짓말이다. 그는 굉장한 미남이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는 상당히 공부를 잘했다.
운동도 좀 했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는 체육대회 때마다 가장 눈에 띄는 학생이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도 거짓말이다. 그의 이름은 김인규였다.
그녀에게 있어선 지금도 잊어버릴 수가 없는 이름이었다. 아니, 아마도 평생토록 잊어버리지 못할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녀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차인 후에 자각했다. 얼굴이 좀 잘생겼다거나, 성적이 나쁘지 않다거나, 운동 좀 한다거나 하는 건 전부 나중에 붙인 이유였다.
그녀는 그냥 그에게 반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김인규는 진현우의 열등감을 자극시키는 존재 중 하나였다. 김인규는 진현우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적어도 진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진현우도 김인규에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하자면 첫 눈에 반(反)했다.
진현우에게 있어서 김인규에게 내밀 수 있는 우위라곤 집안, 혈통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우위는 내밀어봤자 불명예밖에 안 된다는 것을 당시의 진현우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인규에게 진현우의 약혼자인 유곽희가 고백을 했다가 차였다.
이건 교내에서 굉장한 이슈가 되었다.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던 진현우가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자극이었다.
그렇게 모든 불행의 씨앗이 뿌려졌다.
가혹하고 음습한데다 끈질기기까지 한 일방적인 집단 괴롭힘이 1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처음에는 꼴좋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찬 남자가 고통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는 건 그녀에게 있어선 통쾌한 일일 수 있었다. 적어도 그녀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1년 동안 쌓이는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울분과 진현우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그만 좀 하면 안 돼?”
1년 만에 유곽희가 진현우에게 말을 걸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한 마디 한 거였다. 진현우는 유곽희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피식 웃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 날 김인규의 오른팔이 부러졌다.
일이 커졌다.
김인규의 부모님이 학교에 오셨다. 집단 괴롭힘의 주동자인 박기범, 김전훈, 오원추가 교무실에 끌려갔다. 박기범은 사흘 정학을 받았고, 학교 측은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날 오후, 김인규의 갈비뼈가 부러졌다. 박기범은 소년 법원에 섰다.
일은 폭풍처럼 커져만 갔다. 유씨 가문과 진씨 가문이 이 일을 알게 되었다.
특히 진씨 가문은 이 일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진현우가 모든 걸 다 털어놓았던 모양이었다. 일의 전말을 알게 된 진씨 가문은 즉각 약혼을 백지화시켰다.
유곽희는 속이 다 시원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모든 게 다 끝난 게 아니었다.
김인규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김인규가 목을 매었다.
죽었다.
그가.
그녀가 사랑한 첫 사랑의 남자가.
“나 때문에.”
그 일이 그녀의 인생에 처음으로 인 큰 파도였다.
*
그녀는 죽은 사람처럼 지냈다.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모든 게 자신 탓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그의 가족들을 불행에 빠뜨렸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때, 진씨 가문에서 연락이 왔다. 진가충이었다. 전화를 받은 그녀에게 진가충이 한 첫 마디가 이거였다.
“김인규의 아버지도 죽일 생각이야.”
대체 이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정략결혼은 깨져 두 가문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유곽희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런데 이 남자는 아들의 옛 약혼녀에게 전화를 해서 첫 마디로 ‘여보세요’도 아니고 곧장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말을 꺼냈다.
“그, 러, 지. 마세, 요.”
목소리는 심하게 떨렸고, 마음먹은 대로 잘 나오지도 않았다. 며칠 만에 입을 여는 건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딴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말했다. 부탁했다.
“우리 집으로 와.”
진가충은 명령했다. 유곽희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날, 유곽희에게는 진가충과 결혼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며칠 후, 김인규의 아버지가 죽었다.
유곽희는 진가충과 결혼해야 했다.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었다. 결혼한 후 며칠간은 기억에 없었다. 아니, 몇 주 정도였나. 그때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만이 기억에 묘하게 선명히 남아 있었다. 어떤 종류의 협박이 그녀의 아버지에게도 가해졌으리라고, 추측만 할 수 있었다. 그 협박이 뭔지는 지금도 모른다. 묻지 않았으므로.
진현우는 새 어머니가 된 유곽희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가 자신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적개심일까, 아니면 죄책감일까. 그런 건 알 필요도 없었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은 자신이 낳은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불행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 유곽희는 몇 년 동안이나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불행의 원인은 따로 있다. 그녀는 최근에야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유곽희는 눈을 떴다.
“복수를.”
눈을 뜨자마자, 마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김인규는 죽었다.
그의 부모도, 형제도 다 죽었다. 그의 복수를 해줄 사람은 이제 남지 않았다.
남은 건 오로지 유곽희, 자신뿐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해야 했다.
“복수를!”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복수를. 그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 때문에 죽고 만 아무 잘못 없는 남자를 위해서.
사랑했던 남자를 위해서.
그 어떤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고, 그녀는 성취해 낼 생각이었다.
“복수를!!”
*
권우언과의 통화를 마친 최재철은 반지 운반자의 팔찌를 꺼내들었다. 최재철에서 김인수로 돌아오는 것이 꽤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최근에는 최재철로 지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몇 분 후, 김인수는 지금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철가면을 쓴 채 서울 외곽에 나와 있었다.
오늘은 딱히 WF의 차원 균열을 닫기 위해 가면을 쓴 게 아니었다. 그는 중지에 낀 반지, 사자문의 열쇠를 이용해 그의 차원 금고를 열었다.
그가 용산에서 사로잡은 WF 소속의 A급 어벤저, 추경준이 차원 금고에서 튀어나왔다. 아니, 사실 지금의 추경준은 WF 소속인 것도 아니었다. 그는 사망자로 취급되었으니까.
지금까지 차원 금고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추경준은 그동안 시간이 하나도 가지 않은 것처럼 느낄 것이다. 영문을 모른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철가면을 쓴 남자, 에스파다 도 오르덴을 발견하고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계속하지, 추경준.”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 특유의 과장된 어조로 추경준의 이름을 불렀다.
“자네에 대한 설득을.”
*
“가장 먼저, 오늘은 월요일일세.”
“뭐라고?”
김인수의 말에 추경준은 놀라 눈을 희번덕거리며 떴다.
“뭐, 이미 예상은 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자네는 나의 차원 금고에 얼어붙어 있었네. 자네에게는 불과 몇 분 전처럼 느껴지겠지만, 그동안 벌써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지.”
추경준은 김인수의 말을 별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김인수는 굳이 지금 날짜와 시각에 대한 증명 같은 걸 할 마음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런 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 증명한다는 행위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필요한 말을 한다. 김인수는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요 사흘간 자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주지. 가장 먼저, 자네는 죽었네.”
“……!”
추경준은 놀라 김인수를 바라보았다. 이제야 좀 충격 요법이 듣는 것 같았다.
“서류상으로는 말일세. 자네가 소속되어 있던 WF에서 자네를 사망한 것으로 처리시켰거든.”
김인수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자네의 시체를 딱히 남겨둔 건 아니네만, 아무래도 실종으로 처리하는 것에는 부담이 된 모양이야. 자네의 가족들이 자네를 찾아다닐 테니 말일세. 그러다 쓸데없는 걸 들쑤시기라도 하면 귀찮아지니 아예 사망으로 처리하는 게 낫다고 결론을 내린 것 같군.”
“…….”
추경준은 김인수의 말에도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그야 그가 수행하던 임무가 임무다. 차원 균열을 열고 다니는 임무라니,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이보다 더 큰일도 없으리라.
“그리고 자네의 죽음은 근무지 무단이탈 중 사고사 당한 걸로 되어 있네.”
“근무지 무단이탈?”
“그래야 산재 대상에서 제외시킬 수 있거든.”
“하…….”
이 정도로도 놀라지는 않는군. 김인수는 생각했다. 추경준도 WF가 이럴 거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인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자네의 가족들은 빚더미에 올랐어.”
“그게 무슨 소리야?”
“자네가 실제로 하던 업무와는 상관없이 서류상 자네의 업무는 차원 균열을 지키는 것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이걸 거부하고 근무지 무단이탈을 하던 도중에 사고사 했으니 자네에게도 차원 균열이 닫힌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거지.”
그리고 차원 균열의 가격은 황당무계할 정도다. 그 책임 중 일부라 할지라도 평범한 인간이 정상적으로 벌 수 있는 금액은 아니다. 그 액수에 대해 추경준은 이미 상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추경준에게 김인수는 사실을 밝혔다.
“자네는 죽었으니, WF는 자네의 가족에게 그 책임 의무를 전가했어. 그 배상액은 3백억 원에 달하네.”
“그게 무슨 개 같은……!”
드디어 추경준의 입에서 욕설이 나왔다.
“믿어지지 않을 걸세. 사실 나도 처음 보곤 자네가 의심할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모두 사실일세.”
“가족에게 전화를 해야겠어.”
“오, 그거 좋지. 하지만 자네가 정말로 전화를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설명을 들은 뒤에나 하게나.”
“……!”
주머니에서 어벤저 전용 단말기를 꺼내려던 추경준의 동작이 멈췄다.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어.”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추경준은 괴로운 듯 고개를 흔들었다.
“모두 알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그가 전화를 해서 그의 생존을 알린다면 그의 가족은 모두 죽는다.
그것이 WF의 방식이니까.
추경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WF에게 그렇게 충성을 바치는 이유가 뭔가?”
“그저 그래야 하기 때문에.”
추경준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놀라울 정도로 곧은 남자. 상대가 어떻게 나오든 자신의 도리를 지킨다. 자신이 소속된 집단에 충성하고 명령에 따른다. 그것이 그릇된 명령이라도. 그렇기에 그는 차원 균열을 연다는 악행에 가담했다.
이보다 더 뒤틀린 곧음이 있을까.
그렇기에 김인수는 생각했다. 이 남자를 손에 넣으면 자신이 이 뒤틀림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거라고. 21세기에 도달해서는 이미 잊힌 가치를 아직도 지켜가는 이 남자의 곧음을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상대가 도리를 지키지 않는다고, 내가 먼저 도리를 어길 수는 없으니까.”
이어진 추경준의 말에, 김인수는 희망을 보았다.
“먼저? 그것 참 신경 쓰이는 단어로군. 그럼 WF가 먼저 도리를 어겼으니, 자네에게도 도리를 어길 기회가 주어진 것 아닌가?”
“…….”
추경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추경준, 자네는 죄인일세. 자네에게 도리를 지킨다는 말을 할 자격은 없네.”
추경준은 김인수의 시선을 피했다.
“그 말은 이미 들었소.”
그랬다. 이 말은 김인수가 지난번, 추경준을 막 사로잡은 직후에 그를 설득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때하고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자네가 이제까지 열어본 차원 균열이 몇 개지? 거기서 새어 나온 어보미네이션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 몇일까? 자네가 연 차원 균열에서 흘러나온 헬필드로 인해 재산 피해를 본 사람에 대해 떠올려 본 적이 있나?”
“그만!”
추경준은 괴로운 듯 고개를 휘저어대었다. 하지만 김인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악행을 저지른 자네가 도리에 대해 말한다니 실소를 금할 수 없군. 자네의 그 알량한 충성을 다하는 게 도리를 지킨다고는 할 수 없지. 도리를 다한다는 건 말일세,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걸 말하네.”
“지금 와서… 지금 와서 내게 뭘 어쩌란 말이오!”
추경준의 외침에도 김인수의 목소리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 질문을 이제 와서야 하는군. 지난번에는 하지 않았지.”
“내가 당신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걸로 내 잘못이 지워지기라도 한단 말이오? 아니면 나 때문에 고통 받는 가족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라도 한단 말이오?”
김인수는 실소했다.
“자네 본인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별일 아닌 듯 굴더니, 고작 가족들의 빚으로 자네가 고통스러워한다니 흥미롭군.”
“고작이라니!”
현대 사회에서 빚이란 결코 녹록치 않은 함정이다. 그건 김인수도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말했다.
“자네가 가족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네. 추경준, 자넨 죽었어.”
“……!”
“WF가 자넬 죽였지. 행정적으로 사망 처리가 된 추경준이라는 인간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네. 그러니 빚 또한 갚을 수 없지. 원래 자네의 빚이 될 터인 그 손해배상액은 이제 자네의 가족들이 물어야 할 빚이 되었네.”
김인수는 굳이 빚이라는 단어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그건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자동적으로 강조가 되는 단어다.
“당신은 뭡니까, 당신은 절 고문하려고 하는 겁니까?”
“내게 높임말을 쓰는군. 그렇다고 내가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신이 되는 건 아니야.”
김인수의 말에 추경준의 낯빛에 절망이 드리워졌다. 그 절망은 곧 분노로 치환되었다.
“이 모든 게 당신 때문이오!”
“아니, 자네는 언젠가 죽었을 걸세. 그리고 자네의 사인이 뭐가 되던 이 결과가 도달했을 걸세. 자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자네가 섬기던 주인이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추경준이 충성을 바친 대상은 사람이 아니다. 회사라는 이름의 시스템이다.
그리고 회사는 최대한 이익을 추구한다. 일개 사원의 충성도 따위는 수치로 환산되지 않는다. 그 시스템을 조종하는 주인이 그걸 환산해 준다면 또 모를까.
추경준은 마지막으로 자신과 통화한 상관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이름을 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움직였을지도 안다. 그가 진가규에게 어떤 충성을 바쳤든, 유연학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든 상관없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에게 패한 추경준의 처우는 결국 진가충이 결정했다.
결국 그의 충성심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았다.
“궤변이야!”
“그리고 현실일세.”
김인수는 추경준의 외침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 짙은 검음으로 덮었다.
“항상 법칙대로 세상이 움직이는 건 아니야. 회사라는 자산을 자식에게 넘겨주는 건 사실은 이상한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네는 WFF의 주인이 진가충이 될 걸 이미 알고 있었을 걸세. 그리고 그의 인성에 대해서도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었을 테지.”
WF와 WFF는 주식회사다. 회장이라는 개인이 사유재산으로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자식에게 상속할 수도 없다.
사실은 그렇지만 상식은 다르다. 결국 몇 개의 대기업이 혈통에 의해 대물림되어 내려오고 있는 게 한국 사회의 상식이다.
그리고 WFF의 주인은 실제로 진가충이 되었다. 유연학은 그저 몇 년간 이 회사를 맡아왔을 뿐이었다. 지금은 진가충은 입원한 것으로 되어 있고, 유연학이 대리직을 수행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회사의 주인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윽고 WF의 주인 또한 바뀌겠지. 진가규의 혈연들이 물려받게 될 것이다. 추경준이 WF를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문서로는 파악하고 있지만, 고마움은 그리 못 느끼는 이들이.
한신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아는가. 정도전이 어떻게 죽어나갔는지 아는가.
추경준은 알고 있었다. 토사구팽이란 고사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됐을 걸세. 내 말이 틀린가?”
추경준은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일어났을 일이었다. 설령 그가 살아 있었더라 하더라도. 그는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 작전 중에 죽든, 늙어서 더 이상 어벤저 역할을 수행하게 못하게 되었든, 쓸모가 없어진 시점에서 그는 숙청당했을 것이다.
“당신은 뭡니까. 날 회유하려던 게 아닙니까? 내게 이런 고통을 줘서 무엇을 얻습니까?”
“현실이 고통이라니 안타깝군. 내가 자네 앞에 늘어놓은 건 그저 현실일 뿐일세. 자네도 부정할 수 없는, 실제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늘어놓기만 했네.”
“그만하시오!”
추경준은 주먹으로 땅을 내려쳤다. 쿠등틍. 지면이 흔들렸다. 그러나 김인수의 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도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사흘 동안에 일어난 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끝났네. 질문이 있다면 듣겠네. 대답해 줄 수도 있지.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에 한해서라면 말일세.”
“…당신은 대체 뭡니까.”
장고 끝에 나온 질문이란 그것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 일어난 일이 아닌, 강철 가면을 쓴 괴한에 대한 질문. 어쩌면 추경준에게는 그것이 가장 궁금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러나 질문을 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이름은 에스파다 도 오르덴. 강철 가면을 쓴 남자지. 차원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암약하는 비밀 결사의 일원일세.”
그러므로 김인수가 대답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빨간 거짓말은 아니었다. 김인수의 제1 목적은 물론 진씨 일가에 대한 복수이지만 차원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움직이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리고 비밀 결사에 인원이 하나만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차원의 질서?”
“그래.”
“그게 뭐요?”
“본래 지구는 지구 자체로 완성된 행성이자 차원이지. 우주선 같은 걸로 지구 차원 밖으로 나가는 인간도 있지만, 차원에 큰 영향을 주는 건 아닐세. 하지만 이 차원의 질서가 크게 흔들리는 일이 요 몇 년 새 지구에 일어났네.”
거기까지 말한 김인수는 한 번 픽 웃었다.
“아니, 8년 전이라고 하는 편이 자네가 이해하기는 더 쉽겠군.”
“…차원, 균열…….”
“맞았어!”
김인수는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과장스럽게 박수를 쳤다.
“차원의 힘은 본래 일정량으로 정해져 있네. 질량보존의 법칙은 알고 있겠지? 똑같아. 차원 안에서 뭘 어떻게 지지고 볶아도 차원의 힘의 총량은 변함이 없지.”
“…….”
추경준은 두려움에 물든 시선을 더 이상 김인수에게 던지지 못했다. 이어질 말을 이미 예상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김인수는 그렇다고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하지만 차원 균열은 다르네. 외부 차원의 힘이 이 지구라는 행성에 쏟아져 내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네는 알고 있나?”
질문을 던졌다. 생각하기를 종용했다.
“…모르오.”
추경준은 이미 ‘생각했다’. 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추경준이 생각한 내용을 언어화해서 뱉어주는 것이 김인수의 역할이었다.
“요즘 화산 폭발이 잦아졌다고 생각하지 않나? 백두산의 분화는 많은 이를 충격에 빠뜨렸지. 한라산은 어떤가?”
“……!”
추경준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럼에도 김인수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지진은 어떤가? 한국은 본래 지진이 나지 않기로 유명했던 거 기억나나? 기억나지 않겠지. 그게 몇 년 전 일이라고. 그건 옛말이지. 아주 옛날이야기야.”
“…그만.”
“대구에 스콜이 내린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하! 비 안 오기로 유명한 대구에서 스콜이라니!! 내륙 한 가운데에서 말일세!!”
“그만하시오!”
김인수는 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자네의 질문에 대답했을 뿐일세. 자네를 고문하려는 의도 따위는 없었네.”
“그게 다 저 때문이라는 겁니까?”
“그렇다네.”
김인수는 대답했다.
“정확히는 자네가 가담했지.”
차원 균열의 생성에.
“아직까지도 도리 같은 소릴 할 생각이 드나? 차원질서를 지키는 내 입장에서 말하자면 자네는 바로 쳐 죽여도 이상하지 않을 악당일세!”
“그렇다면 절 죽이십시오! 이제까지 죽이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이런 말을 들은 자네를 지금 죽이면 자네는 납득하겠지. 난 죽을 죄를 졌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런 생각으로 죽는 건 자네에게는 좋은 일이겠지.”
김인수는 엄숙하게 말했다.
“그럴 순 없지.”
“……!”
추경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 표정은 곧 평온하게 변했다. 각오를 굳힌 표정이었다.
“제게 원하시는 게 뭡니까?”
“갚게.”
“무엇을?”
“자네가 지구라는 차원에 진 빚을.”
김인수의 손에서 또 다른 강철 가면이 나왔다. 그건 마술과도 같은 장면이었지만 추경준은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이 정도로 놀라겠는가.
추경준은 가면을 받아들었다.
“자네를 설득할 수 있게 되어 기쁘네.”
김인수는 말했다.
“추경준은 죽었으니 이제 자넬 칭할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겠군. 이걸 쓸 땐 자네 자신을 아포스톨 도 오르덴이라 자칭하게.”
“질서의 사도입니까?”
“그렇다네.”
추경준은 빤히 강철의 가면을 내려보다가, 그걸 썼다. 썩 잘 어울려 보였다.
“이제 이걸 쓰고 당신처럼 차원 균열을 닫으면 되는 겁니까?”
“자네에겐 무리일세.”
추경준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졌다. 자존심이라도 상한 걸까? 김인수는 재미있는 듯 웃었다.
“빅 마우스를 혼자 처치할 수 있겠나?”
추경준의 입에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못한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는 빅 마우스를 처치한 적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빅 마우스라는 존재가 얼마나 강한지 몰랐을 테니까. 어쩌면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혼자 처치할 수 있다고.
하지만 빅 마우스와 맞상대를 해보고, 혼자서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최소한 한 명의 동료가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기다리게.”
김인수는 추경준에게 반지 하나를 내어주었다.
“자네에게는 은신처가 필요하겠지. 자네는 죽은 사람이니 말일세. 이 반지를 사용하면 작은 방 하나만큼의 공간이 자네에게 주어질 걸세.”
흠, 하고 잠깐 생각하던 김인수는 이윽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안에서 빅 마우스를 혼자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나오면 더 바랄 게 없겠군.”
*
추경준은 자신의 가족을 구할 방법에 대해 이미 생각했으리라.
300억이라는 부채를 해결하는 방법은 사실상 하나뿐이었다. 그건 파산 신고다. 하지만 WF가 추경준의 가족들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음을 그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추경준이 택할 방법도 한정된다.
WF를 친다.
WF의 세력을 약화시켜서 더 이상 행정기관이나 사법기관, 그리고 언론에 압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면 추경준의 가족들도 무거운 빚에 시달리지 않고 파산을 선택할 수 있으리라.
잘 하면 추경준의 부활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고.
추경준이 죽은 건 어디까지나 서류상의 일이다. 그의 고기와 피로 이루어진 육신은 살아 있다. 생존을 증명하기에 그보다 더 강한 증거가 있을까. WF의 압력에서만 벗어난다면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으리라.
그 정도는 추경준도 다 생각했을 것이다.
‘생각은 그렇지만 행동이 어떨지는 또 다르지.’
인간이란 건 모를 동물이라, 추경준은 마지막의 마지막에 WF의 편으로 굴러 들어갈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더 높긴 하지만, 어떤 변수든 항상 생각해 둘 필요가 있었다.
하기야 어떻게 굴러도 상관이야 없었다. 추경준은 아직 김인수의 계약 마수다. 그에게 얽어맨 계약의 사슬은 결코 녹록치 않다.
‘후.’
짧게 웃은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역시 차 같은 걸 살 필요는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