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구문효
일요일에는 푹 쉴 참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할 셈이었다.
김인수는 요 일주일 사이 밤낮 없이 활동했다. 낮에는 TA 소속의 A급 어벤저 최재철로서, 밤에는 강철 가면의 괴한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아무리 대마법사라지만 인간인 이상 일주일 내내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하루 정도는 쉬어줘야 했다.
아침 뉴스를 보고 난 후, 계란 요리로 요기를 한 그는 그대로 이불 속에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푹 잤다. 오전 11시가 넘어가도 그는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요일의 정오가 소리 없이 찾아왔다.
문득 전화기가 울렸다. 정확히는 어벤저 전용 단말기의 전화기 기능이 울리고 있었다. 그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 손만을 뻗어 단말기를 집었다.
“…여보세요.”
잠에 취한 상태에서도 최재철의 목소리를 낼 생각을 한 건 다행이었다. 사실 생각보다 먼저 기술이 나간 거긴 하지만, 어쨌든.
-아, 형!
전화기 너머에서 들린 목소리는 구문효의 것이었다.
“웬일이냐, 이 새벽에.”
-새벽이요? 아뇨, 정오인데요.
“아, 그래?”
-주무시고 계셨어요?
“어.”
잠에 취한 목소리로, 그는 대강대강 대답했다.
“그런데 왜?”
-아, 아니에요. 끊을게요. 계속 주무세요.
“빨리 말해.”
-…모르는 게 있어서요. 신체 강화 능력에 대해서…….
최재철은 눈을 번쩍 떴다. 상반신을 번쩍 일으킨 그는 전화기를 다시 제대로 잡았다.
“구문효.”
-네, 형.
“오늘은 일요일이다. 쉬는 날이지.”
-네, 형.
“그런데 넌 모르는 게 있어서 나한테 연락을 했다.”
-죄송해요.
“넌 역시 훌륭하다.”
-…네?
“그래, 역시 교육에서 중요한 건 예습, 복습이지. 쉬는 날임에도 너는 네 어벤저 스킬에 대해서 점검하고 다듬은 거로군. 그리고 나한테 배운 것도 복습했고.”
-아, 네. 그야…….
“아주 좋다.”
-…형?
“모르는 것에 대해 포기하거나 그냥 넘어가지 않고 내게 전화를 건 것도 좋다. 마음에 들어. 교육생으로써 당연히 해야 할 것임에도 이걸 실제로 하는 인간은 대단히 드물어.”
-아니, 저기…….
“모르는 게 뭐냐?”
-그게, 직접 봐주셔야…….
“내 집에 와라. 좌표를 찍어주지.”
최재철은 말했다. 잠은 이미 훅 달아난 지 오래였다.
“교육해 주마.”
그의 두 눈동자는 교육열로 불타고 있었다.
*
“이 낡은 빌라에 이런 공간이 있었군요?”
구문효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가 지금 있는 장소는 어제 최재철이 빌라의 3층까지 벽과 천장을 싹 터서 넓어진 공간이었다. 여기에 그를 데려온 건 물론 최재철이었다.
이 공간은 원래 공방으로 쓰기 위해서 개조했지만, 아직 설비 같은 건 들여오지 않은 상태였다. 최재철을 비롯한 현오준 팀은 차원 균열 안에서 하급 어보미네이션의 해골만 가져온 상태라 최재철의 명의로 공방을 운영하기에는 아직 좀 애매했다.
사실은 공방을 꾸미기 귀찮아서 뒤로 미룬 것뿐이지만 실제로 급할 게 없기도 했다.
“일요일인데 회사의 체육관을 쓰기도 좀 그렇잖아?”
그래서 최재철은 오늘 이 공간을 체육관 대용으로 쓸 생각이었다. 매트 같은 건 없지만 어벤저한테 그런 게 필요하겠는가. 아니, 필요 없다.
“자, 그래서 궁금한 게 뭐지?”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구문효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곧장 차원력을 끌어내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압!”
그가 기합을 발하자, 갑자기 차원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은은하게 황금빛의 아우라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합!”
마지막 기합성을 외치자, 그 황금빛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 섬광이 걷힌 후에도 그의 몸은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전신 구석구석에 차원력이 맴돌고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했는데 이렇게 됐어요. 저 어떻게 된 거죠?”
그 상태를 유지한 채, 구문효는 불안한 듯 말했다. 그런 그에게 최재철이 달려들었다.
“너 이 귀여운 녀석!”
“으악?! 형, 왜 이래요?!”
구문효는 비명을 질렀지만 최재철은 아랑곳 않고 그에게 헤드록을 걸고 머리를 마구 헝클어주었다.
금요일만 해도 구문효는 신체 강화 능력을 아예 사용하지 못했다. 최재철이 들러붙어서 가르쳤지만 감을 잡지 못하는 표정에 속이 터졌다.
그런데 이틀 후인 오늘, 이렇게 멋지게 능력을 익혀 오다니.
그냥 어느 순간 작은 깨달음을 얻어 이렇게 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고민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니까.
“너는 정말로 가르칠 보람이 있는 녀석이로구나, 구문효!”
“저 잘한 건가요?”
“네 질문에 대답해 주마. 아니, 잘한 거냐는 질문 말고 그전 질문. 어째서 네 몸이 그렇게 번쩍번쩍 빛나느냐에 대한 해답이다.”
최재철의 말을 들은 구문효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반응을 본 최재철은 흐뭇하게 웃으며 헤드록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구문효, 네 고유 속성은 빛이다. 그러니 네게 있어서 능력이나 스킬은 빛의 이미지를 띠는 경우가 많지. 그러니 신체 강화를 위해서 차원력을 근육으로 돌릴 때, 완전히 근력 강화로 전환되지 않은 잔여 차원력이 빛으로 바뀐 거야. 네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제어한 거지.”
“안 좋은 건가요?”
다시 걱정스러운 빛이 얼굴에 드러나는 구문효를 보며, 최재철은 일부러 심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효율은 안 좋기는 하지. 잔여 차원력이 제대로 치환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애초에 차원력을 100% 원하는 힘으로 치환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게다가 지금 네 상태는 굉장히 안정되어 있어. 차원력이 고루 분배되어 있다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로군.”
최재철은 불안해하는 구문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지금 라이센스를 조정 받으면 A급이 나올걸?”
“정말이요?”
구문효가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래, 그러니까…….”
최재철은 구문효에게서 떨어져 1.5m의 거리를 벌렸다. 구문효는 영문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남자 놈인 주제에 역시 귀여웠다. 뭐, 그런 건 지금은 상관없었다.
“나랑 대련 한 번만 뛰자.”
“히익?!”
*
최재철은 곧장 구문효에게 하이킥을 날렸다. 1.5m 벌어진 거리에서 순식간에 접근한 일격이었다. 평범한 인간이 맞으면 그대로 목이 날아갈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구문효는 피했다.
그의 특기 중 하나인 ‘점멸’이다. 순간적으로 몸을 빛처럼 바꾸어 몇 미터 밖으로 도피하는 능력. 훌륭한 능력이지만 연속 사용이 불가능한 게 단점이다.
“몸으로 피해! 이거 훈련이라고!”
“맞으면 죽잖아요!!”
기겁을 하며 빛의 화살을 날려대는 구문효를 보며 최재철은 혀를 한 번 찼다. 하긴, 오늘 신체 강화 능력을 새로 각성한 지 얼마 안 됐을 테니 실감이 안 날 만도 했다.
‘실감나게 만들어줘야겠군.’
최재철은 빛의 화살을 가볍게 피하며 바람처럼 휙 날아 구문효의 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면에다 쾅 하고 박았다.
“아, 아파요!”
“그래, 아프지? 멀쩡하다는 증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보라고.”
평범한 인간이 맞았다면 머리가 두부처럼 뭉개질 위력이었지만, 두부처럼 뭉개진 건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구문효는 뭉개진 바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
“넌 제대로 하고 있어. 안 죽어, 걱정 마. 대련이라니까?”
최재철이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자, 다시 간다?”
“으아아아아?!”
최재철의 미들 킥이 구문효의 허리에 파고들었다. 힘 조절을 했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구문효의 동체가 두 조각으로 나뉠 수도 있었다.
“흐아아악! 아파, 아파!!”
“맞으면 안 죽는다고 했지, 안 아프다고는 안 했다! 막거나 피해!! 막는 부위에 차원력을 집중시키고!”
맞아가며 배우는 것! 다소 거칠지만 신체 강화 능력을 익히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드물다. 상대가 남자이기도 하겠다, 최재철은 속 편하게 팔다리를 휘둘러 댔다.
그의 일격, 일격은 일반인이 맞으면 그대로 죽어버릴 위력이지만, 구문효는 잘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크고 작은 생채기가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슬쩍슬쩍 몰래몰래 트롤 고문관의 반지를 써가며 구문효의 상처를 없애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이게 다 제자를 사랑해서 하는 짓이지!’
겉보기에는 그냥 아프게 때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그가 내지르는 펀치에는 차원력이 담겨 있어서 더욱 아팠다.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맞은 부위의 차원력을 활성화시키는 효과가 붙어 있기도 하다.
그가 이지희의 차원 능력을 처음 끌어낼 때 썼었던 터치와 비슷하지만 훨씬 더 거칠고 아프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내놈한테 부드럽게 대해줄 이유가 없지!’
퍽, 퍽, 때릴 때마다 구문효는 억, 억, 소리를 질렀지만 무릎을 꿇지도, 그만하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도 이 대련의 진의에 대해 깨달은 모양이었다.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매력적인 남자다!’
최재철의 눈빛도 날카로워졌다. 그의 공격도 한결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기쁘게도 구문효의 움직임도 조금은 더 날카로워졌다.
몇 번의 공방 끝에 구문효도 다소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최재철의 잽이 작렬한 구문효의 십자 가드 위에 더 진한 빛이 맺혔다. 방어 부위에 제대로 차원력을 집중시켰다는 증거였다. 이 구문효라는 남자, 역시 성장성이 뛰어나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다!’
연타를 치려던 왼손을 굳이 거두어 페이크를 한 번 치고 방어가 약한 배에다 라이트 블로를 처박으며 최재철은 통쾌하게 웃어대었다.
“하하하! 정말 좋구나!!”
“우우욱! 사람을 패면서 좋아하다니, 형, 변태 같아요!!”
“반격해라! 언제까지 방어만 할 거냐! 그러니까 페이크에 속아서 얻어맞는 거야!”
“아, 형! 진짜!!”
구문효는 소극적으로나마 견제를 내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건드리면 저렇게 반응한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학생이란 말인가.
‘가르치는 게 너무너무 재밌다!’
오늘 내로 이 남자를 완전한 A급으로 만들어놓겠다. 최재철의 가슴 속에서 그런 야망이 피어올랐다.
*
최재철은 주먹을 뻗는 걸 멈췄다.
“어때?”
그는 인자한 목소리로 쓰러진 구문효에게 말을 걸었다.
“좀 느껴져?”
“…감사, …감사합니다, …사부님.”
구문효는 띄엄띄엄 말했다. 그가 최재철을 이르는 호칭은 자동적으로 사부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신도 이번 대련에서 스스로가 무엇을 얻었는지 잘 아는 눈치였다.
“나야말로.”
최재철이 대꾸했다.
“고맙다, 문효야. 너와 같은 제자를 들인 것도 내겐 천운이야.”
구문효의 몸은 더 이상 빛나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의 신체 강화 능력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 반대였다. 쓸데없이 빛을 내느라 소모되던 차원력이 이제는 온전히 근력 강화로 치환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설마 세 시간 만에 깨달음을 얻을 줄이야. 넌 정말 훌륭한 재능을 갖고 있구나. 뭐, 그런 줄 알고는 있었다만.”
구문효는 세 시간 동안 최재철에게 맞았다. 물론 구문효가 맞기만 한 건 아니고, 그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회피하고, 반격하고, 견제하고, 방어했다.
최재철은 구문효가 방어하느라 차원력을 집중시킨 곳은 피하고, 비교적 방어가 약해진 곳만 때렸다. 그랬더니 구문효의 몸이 먼저 깨달았다. 차원력의 집중을 빛으로 적에게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래서 빛을 내는 걸 멈췄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쉽게 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구문효에게 있어서 자신의 능력은 곧 빛이었다. 차원력을 움직일 때마다 빛이 나는 건, 오른손잡이가 오른손으로 수저를 드는 것과 똑같다. 더 익숙하고 편하고 잘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이 버릇을 지우는 건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로 교정하는 것과 똑같다.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했더라도 무의식중에 오른손으로 수저를 집고 만다. 그런 버릇까지 싹 없애는 것과 같다.
하지만 그는 해냈다.
불과 세 시간 만에.
“역시 내 보는 눈이 틀리지는 않았군. 넌 마법사가 될 수 있어.”
“마법사……?”
구문효는 완전히 지쳐서 풀려 버린 시선을 들어 최재철을 보았다.
“그래. 몇 가지 스킬만 간신히 사용하는 능력자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스킬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마법사. 네겐 그런 재능이 있어.”
“그거… 좋네요…….”
“그렇지?”
최재철은 픽 웃었다.
구문효는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아무리 상처를 트롤 고문관의 반지로 계속 없애주었다고 한들 고통은 끊임없이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게다가 몸을 움직이면서 동시에 차원력을 운용한다. 자신의 버릇을 고치는 걸 계속 의식하면서. 불과 세 시간이라고는 해도 엄청난 체력과 정신력의 손실이 빚어졌으리라.
그대로 잠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최재철은 구문효를 들쳐 업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제자다. 콘크리트 바닥에 그를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푹 자라.”
구문효를 자신의 방으로 끌고 올라와 이불 위에 눕힌 후, 최재철도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원래 하루 종일 쉴 생각이었던 일요일이었다. 그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인 편이니, 피곤이 느껴질 법도 했다.
“나도 샤워하고 낮잠이나 좀 자야겠다.”
기지개를 쭉 편 후 새로 산 세탁기에 땀에 젖은 속옷을 던져 넣고, 그는 마지막 한 장 남은 새 속옷과 수건을 집었다.
“속옷하고 수건도 더 사야겠군.”
일단 푹 자고 저녁 느지막하게 한 번 나가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
최재철이 자고 있는 동안에 전화가 왔던 것 같다.
-선생님, 저희 놀러가도 돼요?
“맘대로 해.”
대충 대답하고, 그는 전화를 끊고 그냥 다시 잤다.
어벤저 두 명이 그의 빌라에 접근하는 기척도 느꼈다. 그게 이지희와 오연화임을 안 그는 다시 그냥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아무튼 더 자야겠다. 그런 의지의 발현이었다.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꺄아아아아악!”
오연화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최재철은 간신히 눈을 떴다.
“뭐야?”
“서, 선생님! 어째 제 유혹이 통하지 않는다 했더니……. 그런 취향이셨어요?!”
“응?”
최재철은 따끈따끈한 구문효를 끌어안고 자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거의 속옷 차림인 상태였고. 확실히 다른 사람이 보면 오해도 할 만한 상황이었다. 최재철은 구문효를 차냈다. 그 충격에 구문효도 잠에서 깬 듯 눈을 문질렀다.
“아니,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 그보다 유혹이라니.”
어린애한테 발정한다고 오해받는 게 더 사회적으로 타격이 클 것 같다. 여기서는 차라리 그냥 부정하지 말아볼까. 그런 생각을 한 최재철은 변명하려다 말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니에요, 연화 씨!”
하지만 구문효는 다른 생각인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부정했다.
“연화 씨라고 부르지 말아요! 더러워!!”
“더럽?!”
구문효는 충격을 받은 듯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불쌍한 것.
“그래, 문효야. 연화 씨라고 부르면 어떻게 하냐.”
“사부님마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구문효의 얼굴 표정은 울먹울먹한 게 지금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너도 이제 내 제자가 되었으니, 사저라고 불러야지. 항렬로는 연화가 너보다 위니까.”
“아.”
구문효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오연화가 소리를 빽 질렀지만 최재철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좋은 기회다. 이 김에 확실히 해두자꾸나. 문효야, 사저에게 예를 올려라.”
“예, 사부님!!”
구문효는 자세를 바로 하고 오연화의 앞에서 양손을 모아 그대로 절했다.
“이 구문효, 사저께 예를 올립니다!!”
자신의 앞에서 절을 하는 구문효를 보며, 오연화는 분노로 낯빛을 붉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오연화에게 최재철은 태연히 지시했다.
“뭐 하냐, 연화야. 네 사제다. 예를 받아줘야지.”
“그런 게 아니라요, 선생님!”
오연화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물론 최재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사형제지간이니 피를 나눈 형제처럼 지내도록 하여라.”
“사부님, 그럼 전 사저와 결혼을 못 하는 겁니까?”
“미성년자를 상대로 무슨 개소리냐, 문효야. 이 사부는 널 그렇게 키우지 않았단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그리고 마침내 오연화는 폭발했다.
*
“그런데 지희는 어디 갔어?”
폭발한 오연화를 제압한 최재철은 그녀를 달래듯 목 뒤를 긁어주며 물었다. 오연화는 그의 손길에 만족스러운 듯 가르릉 거렸다. 무슨 고양이 귀신이라도 씌었나.
“요리 재료 사러 갔어요. 선생님께 직접 만든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하던데요?”
“흠, 그렇군. 그런데 연화야, 지희는 요리 잘 하니?”
“글쎄요?”
헤실헤실 웃으며 별생각 없는 듯 오연화는 대답했다.
“안녕하세요, 스승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지희가 방 안에 들어왔다.
“어, 문효 씨도 계시네요.”
“잘 왔다, 지희야. 자, 문효야, 또 다른 사저께 예를 올려야지.”
“아, 네! 사부님!! 이 구문효, 사저께 예를 올립니다.”
구문효는 넙죽 이지희에게 절을 했다. 이지희는 당황한 듯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이지희의 반응을 즐기던 최재철은 그녀가 든 장바구니를 빼앗아들었다.
“어라, 왜 이렇게 무거워? 뭘 이렇게 많이 샀어?”
“냉장고 어제 사셨잖아요. 저녁 만드는 김에 밑반찬 좀 해서 넣어드릴까 해서.”
“요즘 식재료 가격도 비싼데 이런 걸 다. 얼마 들었어?”
“돈 같은 건 괜찮아요, 스승님 덕에 A급 라이센스를 따서 싸게 샀으니까.”
이지희는 쑥스러운 듯 헤헤 웃었다.
“A급…….”
이지희가 별생각 없이 뱉은 말에 구문효가 뜨끔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을 들은 최재철은 피식 웃었다.
“넌 이미 A급이야. 사부 말 못 믿어? 당장 내일 회사 가서 라이센스 갱신해 봐라.”
“아, 예. 사부.”
구문효는 머쓱하니 웃었다.
“그럼 저, 싱크대 좀 빌려도 될까요?”
“아,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이지희가 그렇게 묻자 구문효가 얼른 일어서며 말했다.
“저도 요리에는 자신이 좀 있어요. 자취도 오래 했고.”
“그래요? 저도 자취는 오래 했는데.”
“편하게 반말 쓰십시오, 사저.”
구문효가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지희의 살짝 견제가 섞인 말투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기색이었다. 그런 구문효의 반응에 오히려 이지희 쪽이 당황하고 말았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즐기던 최재철은 문득 한 마디 던졌다.
“그래, 지희야. 문효는 이제 네 사제야. 형제처럼 지내려무나.”
“형제 같은 거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건 잘 모르겠는데요.”
이지희가 보기 드물게 툴툴거렸다.
*
요리는 맛있었다.
이지희는 재미없게도 무난한 요리 실력이었지만, 의외로 굉장했던 건 구문효 쪽이었다.
“져, 졌어……!”
이지희는 구문효가 만든 감자조림을 맛보더니 부들부들 떨며 패배를 인정했다.
“저기, 선생님, 요리 잘 하는 여자를 좋아하세요?”
뚱하니 앉아 있던 오연화가 문득 그런 질문을 최재철에게 던져왔다.
“요리 잘 하는 남자는 좋아하지. 문효야, 우리 집에서 살래?”
“그런 류의 농담은 제발 참아주시죠, 사부님.”
구문효는 질색했다. 하긴 남자치고는 여리여리한 몸에 예쁘장한 편인 얼굴, 그리고 이 요리실력. 이런 종류의 농담을 질색할 만도 했다. 아마 자주 들었을 테니까.
“미안하다, 문효야.”
“아, 아니. 사과하실 일은 아닌데요!”
최재철이 정색하고 사과하자, 이번엔 구문효쪽이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럼 우리 집에서 살래?”
“사부님…….”
느물느물하게 다시 말한 최재철에게 구문효가 쓴웃음으로 반응했다. 최재철은 곧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야. 그래, 이제 이런 농담은 그만두도록 하지.”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까부터 눈빛이 따가워서요.”
잘 보니 오연화와 이지희가 칼날같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구문효를 노려보고 있었다. 최재철은 껄껄 웃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
“응?”
오연화가 문득 진지한 눈빛을 최재철에게 던지고 있었다.
“저 사람, 갑자기 어벤저 오라가 커졌는데요.”
“어벤저 오라? 아, 차원력 말이로군. 그래, 맞아.”
최재철은 자랑스러운 듯 구문효를 바라보았다. 구문효가 움찔 놀랐다.
“아까 A급 운운도 그렇고… 뭔가 하셨죠?”
“뭔가 했냐고 물으면… 했지!”
“저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이상한 오해를 살 우려가…….”
구문효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끼어들었다.
“그보다 연화야, 네 사제를 저 사람이라고 부르면 안 돼.”
“그, 그럼 뭐라고 부르는데요?”
오연화가 다소 당황한 듯 되물었다.
“좀 더 따뜻하게 불러주렴.”
“그러니까 그게 뭔데요.”
“동생, 이라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구문효가 석상처럼 굳었다. 구문효 쪽은 좀 나은 편이었다. 오연화는 모래라도 입에 물고 있는 표정으로 최재철을 바라보았다.
“저, 제가 왜 저보다 나이 많은 남자한테 동생이라고 불러야 하는데요!”
“그야 사제니까.”
오연화의 항변에 최재철은 뚱하니 대답했다.
“사형제 사이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이제 네가 누나야. 사저니까.”
“누, 누나…….”
구문효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렸다.
“히이이이익! 꺄아아아악!”
그리고 그 소릴 듣고 만 오연화가 비명을 질렀다.
“사부님, 지금 생각난 건데 저 줄곧 누나가 갖고 싶었어요. 외동이거든요.”
“응, 외동 같더라. 그래도 연화가 싫어하니까 그냥 사저라고 불러라.”
“네, 사부님.”
구문효는 다소곳하게 대답했다. 그것만으로도 오연화는 질색했지만 최재철은 그냥 못 본 척 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첫 인상이 어떻게 박혔기에 이렇게까지 오연화가 구문효를 질색하는지는 모르지만 이제 두 사람은 팀인데다 사형제이기까지 하니 더 친해질 필요가 있었다.
애초에 정말로 아예 구문효가 너무 싫어서 연을 끊을 생각이었다면 오연화는 진작 현오준 팀을 나갔을 것이다. S급 랭커로서 그럴 수 있는 권한도 있었으니.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건 어쨌든 여지는 남아 있다는 의미다. 그럼 적어도 같은 팀의 멤버로서의 친분은 쌓아줬으면 했다.
차원 균열을 통과해 틈새 차원으로 가려면 그 정도 연대감은 필요하니까.
“저, 그래서 스승님은 문효 씨에게 뭘 하신 건가요?”
이지희가 끼어들었다.
“어? 수련. 정확히는 대련. 더 정확히는 그냥 내가 얘 팼어.”
“스승님께 맞으면 차원력이 오르나요?”
이지희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게 대단히 위험해 보인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때려 달라고 할 것 같은 기세다. 취향이 이상한 게 아니라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탓이겠지. 최재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 너한테는 별로 효과가 없지. 문효는 아직 신체 강화 능력을 제대로 못 다루는 상태여서 맞아가며 배우는 게 굉장히 효과적이었지만, 넌 이미 능력적으로 완성을 해버렸으니까.”
“아… 아쉽네요.”
정말로 아쉬워하는 표정이었다. 쉽게 강해질 기회를 놓쳐서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최재철은 그렇게 믿었다.
“좋아, 말 나온 김에.”
최재철은 일어서며 구문효에게 말했다.
“문효야, 네 사저들에게 수련의 성과를 보여줘라.”
“예, 사부.”
구문효는 바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
“이 빌라에 이런 곳이…….”
“이 공간은 선생님 건가요?”
최재철이 만든 텅 빈 공방의 모습에 순수하게 놀라기만 하는 이지희와 달리, 오연화는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기에 최재철은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다.
“그래. 사실 이 빌라 한 동이 전부 내 소유야.”
“어쩐지!”
오연화는 분한 듯 땅바닥을 찼다.
“제가 이 빌라 사려고 보니까 매물로 나와 있지도 않더라고요. 방을 구하려고 해도 없고!”
“아, 역시 시도는 해본 거로구나.”
오연화의 말을 들은 이지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문효야!”
“예, 사부님!”
문효가 포권을 하며 자세를 잡았다.
‘저런 건 어디서 본 건지.’
최재철은 그의 행동을 보며 피식 웃었다.
“저, 그런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뭘 그런 걸 묻고 있냐.”
최재철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덤벼.”
*
최재철과 대련한 대가로 구문효는 두 사저, 이지희와 오연화에게 그럭저럭 인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사실 구문효에게 데몬스트레이션을 시킨 목적이 둘에게 그를 인정시키는 것이었으니, 그 목적은 다행히도 제대로 달성된 셈이었다.
“그런데 문효야, 어쩌다가 연화랑 저렇게 사이가 나빠지게 된 거야?”
구문효의 두 사저를 먼저 집까지 데려다 준 후, 차에는 구문효와 최재철만이 남았다. 운전하는 것은 구문효였고, 차도 그의 차다. 10년 간 다른 세계에 있던 최재철은 구문효가 모는 차의 차종까지는 몰랐지만, 그럭저럭 고급차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 그게…….”
구문효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었다.
“제 잘못이에요.”
“네 잘못이라고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니?”
“그게… 이야기가 길어지는데.”
“술이 필요한 이야기냐?”
거기까지 말한 최재철은 문득 구문효의 술주정이 심하다는 현오준의 증언을 기억해 냈다. 하지만 굳이 이미 뱉은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네.”
그리고 술자리를 피할 수 없는 대답이 돌아오고 말았다.
최재철과 구문효는 최재철의 집으로 돌아왔다. 술 몇 병과 안주거리를 사다 방바닥에 펼쳐놓고, 서로의 잔을 채웠다.
두 잔을 마신 후에나 구문효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동생이 있었어요.”
최재철은 잠자코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구문효는 한 번 한숨을 내쉬고, 잔을 비워 버렸다. 최재철이 그 잔을 다시 채워주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음… 걔는 절 여장시키는 걸 좋아했죠. 화장까지 포함해서요. 별로 칭찬해 주고 싶은 취미는 아니었지만, 걔는 우리 집에서 공주님이었고 전 기르는 개와 비슷한 포지션이라서 반항 같은 걸 할 수는 없었죠.”
구문효는 안주로 사온 새우맛 스낵을 바스락거렸다. 집어 올리지는 않았다. 그 손짓이 문득 멎었다.
“절 예쁘게 꾸며놓고는 자기보다 예쁘다며 깔깔 웃는 애였어요. 성격이 안 좋은 애였죠. 전 걜 싫어했어요.”
결국 안주 없이 구문효는 마저 잔을 비웠다. 최재철이 그 잔을 다시 채웠다.
“헤헤, 많이 마시게 되네요. 전 걜 너무 싫어해서 제정신으로는 걔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어요.”
이번에는 한 번에 잔을 비우지는 않았다. 최재철도 첨잔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도 마셨다. 내일 출근을 생각하면 과음은 금물이지만 그럴 기분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의 결말을 그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수학여행이었어요.”
구문효는 뜬금없이 말했다.
“전 며칠이라도 걔한테서 해방되는 걸 기뻐했죠. 걔도 말했어요, 금방 돌아와서 다시 괴롭혀주겠다고. 아주 나쁜 년이었죠. 성질 비틀어진 년. 그런데…….”
그는 반쯤 비운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잔 안을 채운 술이 회오리쳤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수학여행이라는 학창시절의 이벤트는 어른이 된 후에는 보통 추억거리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것뿐. 나쁜 기억은 풍화되어 깎여 나가고, 아름다움만이 남았기에 그렇게 기억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깎여 나가야 할 일이 영원히 잊히지 않는 일로 남고 말았다.
이계에 있던 최재철은 몰랐지만 꽤나 큰 참사였다. 지금까지도 수학여행이라는 제도가 아예 폐지되어 버릴 정도로.
4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인류가 어느 정도 차원 균열의 위협에서 벗어나 자원의 화수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 WF 주도로 차원 균열 견학을 수학여행 코스로 잡는 경우가 많아졌다. 차원 균열의 인식을 더 좋게 바꾸기 위한 시도였겠지만, 결과적으로 좋지 않았다.
구문효의 동생은 이 코스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렇다고 차원 균열에서 뛰쳐나온 어보미네이션에 의해 학생들이 참살당했다는 것은 아니다. 숙소 주변에 설치된 CCTV에는 어보미네이션의 침입이 찍혀 있지 않았다.
어보미네이션은 학생들이 묵고 있던 숙소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 어보미네이션이 교사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학생을 참살한 후에나 상황은 수습되었다.
“전 걔가 돌아오지 않길 바랐어요.”
구문효의 잔이 그의 눈물로 채워졌다.
“그 소원이 이뤄진 거죠.”
그는 눈물을 닦았다.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닦았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연화 씨랑… 사저랑 왜 그렇게 사이가 나빠진 건지 물으셨죠.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상한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그는 자신의 눈물이 섞인 잔을 비워냈다.
“제 동생 이름이 연화였어요, 구연화.”
최재철은 구문효의 잔을 채워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스스로 병을 들었다.
“전 동생을 그렇게 싫어했는데 연화 씨를 볼 때마다 제 동생을 떠올리고 말았어요. 얼굴이 닮은 것도 아니고, 나이가 비슷한 것도 아닌데…….”
술병을 든 구문효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술이 반쯤은 바닥에 흘렀다. 간신히 술잔을 채운 구문효는 더 못 참겠다는 듯 즉시 그 잔을 비웠다.
“연화 씨는 그런 제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그럴 테죠. 실제로……. 그런 눈빛을 기분 좋게 받을 사람은 없겠죠.”
씁쓸한 목소리로 구문효는 말했다.
“그러니까 제 잘못입니다. 제 잘못…….”
거기까지 말한 구문효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폭발이라도 한 듯 갑자기 엉엉거리며 울부짖는 그의 모습을 보며, 최재철은 뭔가를 떠올렸다.
“넌 술 마시면 우는구나.”
현오준이 말한 구문효의 술버릇이란 건 이거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구문효가 울다 지쳐 잠든 후에, 최재철은 노트북을 이용해 이것저것 찾아보았다. 구문효의 이야기에서 언뜻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는 곧 밝혀졌다.
지구인들은, 적어도 한국인들은 인간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
최재철, 김인수에게 있어서는 상식과도 같은 것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조차 모른다는 건 꽤 충격으로 다가왔다. 정보화 사회에 접어든 지 꽤 시간이 지난 이 한국에서, 이런 기본적인 정보조차 모를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기에 알아볼 생각도 못 하고 있었다.
인터넷에 그런 제보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지나가다가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하는 걸 보고 도망쳤다거나, 그런 이야기를 친구한테 들었다거나, 그런 글이 종종 올라왔다.
하지만 하나같이 질 나쁜 괴담 취급이다.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사람들은 즉각 비난당했다.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는 건 차라리 다행이고, 유언비어 유포로 신고당할 수도 있었다.
오연화가 ‘우리 아빠가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했어요’ 같은 이야기를 자신에게 큰 맘 먹고 털어놓았다는 것도, 최재철은 뒤늦게 깨달았다.
최재철이 진실을 모르고 있었더라면, 정말로 평범한 한국인 최재철이었더라면, 오연화를 정신병자로 취급할 수도 있었다. 그런 리스크를 안고도 오연화는 털어놓은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정부.’
한국 정부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실제로 알려지면 엄청난 여파를 몰고 올 테니까. 극심한 사회 혼란이 야기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어떤 정부라도 이런 정보는 숨기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걸 정말 숨길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직접 그 광경을 본 사람이 몇이나 있다. 게다가 인터넷이라는 통제가 거의 불가능한 매체가 있는데 그게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현실을 보면 한국인들은 정말로 모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의 증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증인들을 비난하기 바쁘다.
‘아, 오히려 인터넷이라서.’
최재철은 번뜩 생각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모든 이야기를 믿을 정도로 순진한 인간은 이제 몇 남지도 않았다. 이 정보의 바다에 얼마나 많은 거짓 정보와 헛소문이 퍼져 다녔는가. 몇 번 당해본 사람이라면 인터넷의 정보는 한 번쯤은 의심하게 마련이다. 일종의 학습 효과다.
‘사람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다’는 증언은 그 어떤 공신력도 가질 수 없는 개인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신문도, 뉴스도, 하다못해 각 개인이 편집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에서도 그 증언을 남겨두지 않는다.
더욱이 그 증언은 너무나도 두렵고 끔찍한 것이라, 도저히 믿고 싶을 수가 없는 부류의 것이다. 내가 어보미네이션이 될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건 고문에 가까운 짓이었다. 사람은 보통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경향이 있는데 그런 경향이 여기에서도 작용한 것이리라.
어차피 증거 하나만 나오면 다 뒤집힐 여론이리라.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게 마련이니까. 아무리 믿고 싶지 않은 것이라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 진실의 폭력성이다.
하지만 아직 뒤집히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믿을 만한 증거가 나오지 않았거나 잘 통제되고 숨겨진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런 시대다. 사진을 찍어도 합성했다고 할 수 있고, 영상을 찍어도 조작됐다고 할 수 있다. 증거로써 가치가 있으려면 많은 사람이 목격하고 다양한 시점의 촬영이 필요하다.
인간이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할 수 있다는 명제조차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 최하급 계약마에 대해서도 알려져 있을 리 없다. 계약마의 제안을 들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매뉴얼이 나와 있지 않았다. 어벤저 네트워크에조차 말이다!
모든 어벤저가 계약마와의 계약으로 어벤저로 각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약으로 각성하는 어벤저의 숫자는 지구에서도 결코 적은 수는 아니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보가 덮인 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정부와 언론은 물론이고 이 어벤저 네트워크조차 정보 통제에 협력적이었던 탓이었으리라.
모든 공범이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멍청하긴…….”
결국 이러한 정보의 통제는 피해를 늘릴 뿐이다. 차원 균열 주변에 출현하는 계약마의 존재를 알리고 그 대응 방법을 알리면, 계약마와 접촉해 어보미네이션이 되는 사례보다는 어벤저로 각성하는 경우의 숫자가 훨씬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걸 숨김으로써 결국 어보미네이션의 숫자를 늘리는 데 정부나 언론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터진 참사 중 하나가 바로 구문효의 동생이 희생당한 북양여고 수학여행 참사였다. 만약 최하급 계약마의 존재가 알려져 있었더라면 차원 균열 견학이라는 미친 기획을 짜지 않았을 테니까.
생존자가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대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찾아봐도 자세한 내막을 다루는 기사 한 줄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냥 어보미네이션이 숙소 안에서 갑자기 나타나서 전교생을 모두 참살했다는 것 정도였다.
이 정도의 참사에도 정부 기관이나 언론의 원인 조사나 취재가 지나치게 미흡했다. 그렇기에 최재철은 오히려 확신할 수 있었다.
학교 학생들 중 누군가가 어보미네이션으로 변한 탓에 이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진실을 묻어놓기 위해 조사를 일부러 미흡하게 하고, 나아가 아예 정보 관제까지 걸어버렸으리라. 어쩌면 WF의 압력도 더해졌을지도 모른다.
‘뭐, 모르는 건 모르는 거고.’
최재철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했다. 이런 참사가 이미 터졌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진실을 모른다. 즉, 이런 참사는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다.
무지한 건 죄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약점이다. 그렇다고 그저 무지했을 뿐이라는 이유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역시 가슴 아프다.
그렇다면 최재철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정부를 적으로 돌리고 억지로 진실을 부르짖어 봐야 언론은 그를 외면할 거고, 유언비어 유포로 피소당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부르짖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힘이 필요하다.’
결론은 그것이었다.
그냥 차원 능력, 어벤저 스킬로는 부족하다. 권력과 금력과 유명세가 필요하다. 권력으로 입을 막고자 하는 자들을 도리어 무릎 꿇려야 하고, 금력으로 언론을 틀어쥐어야 하고,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 유명세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지 않는 진실을 믿게 만들 수 있다.
“하, 결론이 늘 같군.”
복수든, 뭐든 뭘 하려고 해도 힘이 필요하다. 야만적인 세상이다. 21세기가 되었어도 인류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최재철은 노트북을 덮었다.
*
진현우였던 존재는 맨홀 뚜껑을 열고 나왔다.
하수구에 몸을 숨기고 있던 탓에 온몸에서 기분 나쁜 냄새가 났다. 불쾌한 듯 킁킁거리던 그는 문득 중얼거렸다.
“씻어야겠군.”
그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스스로 깜짝 놀랐다.
언어능력이 설치되지 않았음에도 그는 지금 한국어로 말했다. 그는 자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자신이 언어를 가지지 못한 상태였던 건 자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 언어능력이 생겨났음에 놀랐다.
하지만 놀란 것도 잠시였다. 그는 곧 적응했다.
“씻어야겠어.”
그렇게 혼잣말을 한 그는 기분이 좋아져서 콧노래를 불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뭔가 얻은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게 기뻤다.
“씻어야겠어.”
자신이 말을 할 줄 안다는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같은 혼잣말을 반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씻으러… 가야지.”
신이 난 그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