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토요일
토요일이다.
최재철은 TA 입사 이후 처음으로 맞는 주말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그냥 집에서 뒹굴면서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일주일은 꽤나 피곤하게 보냈다. 첫 날부터 시작해서 바로 어제까지 최재철로서는 그냥저냥 버틸 만한 일정이었지만, 김인수로서 보낸 야간 활동이 문제였다. 어제는 거의 밤을 새다시피 하면서 경북까지 다녀왔으니 말이다.
가급적이면 차원 능력으로 체력을 회복하는 건 피하기로 한 원칙 때문에 최재철은 꽤 지쳐 있었다. 이럴 땐 방바닥을 뒹굴며 편하게 쉬는 게 최고였다.
“냉장고도 못 샀군, 그러고 보니.”
이래저래 미루다 보니 필요한 가구나 가전도 들여놓질 못했다.
“에이, 저녁에나 가지.”
어차피 김인수의 다음 계책을 활성화시키기까지는 시간이 약간 필요하다. 오늘 하루는 그냥 철저하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거라고 그는 이미 결정했다.
그랬는데…….
최재철의 방으로 접근하는 인기척이 둘 있었다. 그것도 하나는 어벤저.
‘이 정도면 B급인가.’
B급이면 이제는 김인수는커녕 최재철에게도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수준의 어벤저였지만, 그래도 그는 가볍게 정신을 긴장시켰다. 능력자 간의 싸움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 방심이라는 격언도 있으니.
‘어벤저가 이런 싸구려 집에 웬일이지. B급 정도면 벌이가 꽤 괜찮을 텐데.’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어벤저와 다른 한 명은 최재철의 방을 향해 다가와 노크도, 인사도 없이 냅다 열쇠부터 밀어 넣고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여기가 방입니다. 뭐, 좀 낡긴 했지만 이 정도면 살 만하죠.”
처음 보는 아저씨가 또 다른 남자, 어벤저에게 그렇게 설명했다. 그리고 아직 이불에 누워 있던 최재철을 힐긋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한 마디 던졌다.
“총각, 방 좀 볼게.”
“아, 복덕방 아저씨?”
최재철은 그제야 아저씨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집 열쇠를 갖고 있는 것도 그렇고, 행동이나 말투가 딱 그랬다.
“요즘 누가 복덕방이라 그러나. 공인중개사라 하지.”
복덕방 아저씨는 말투는 기분 나쁜 듯 가시가 돋쳐 있었지만, 표정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낮게 잡아야 50대 후반의 아저씨는 최재철이 사용한 복덕방이라는 단어에 묘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런 복덕방 아저씨의 옆구리를 옆에 있던 어벤저가 찔렀다.
“아저씨, 뭐 하러 양해를 구해요. 어차피 곧 나갈 사람인데.”
“아, 그렇죠. 네. 방 한번 쭉 둘러보시죠.”
어벤저의 말투는 영 최재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 대는 20대 초반 정도일까, 딱 봐도 애송이였다. 겉보기가 사람을 전부 말해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곧 나갈 사람?”
“아, 들렸어요?”
분명 들으란 듯이 말해놓고도 젊은 어벤저는 뻔뻔하게 말했다.
“제가 이 건물을 이제 살 건데, 그렇게 되면 월세를 두 배로 올릴 거거든요. 전 주인아줌마의 이야기를 듣자하니 취직도 못 한 모양인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 아줌마가 당신 잘 봐달라고는 하던데, 제가 당신 사정을 일일이 봐줄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그럼 뭐, 나가셔야지.”
경우 없이 대놓고 시비를 거는 모습에 최재철은 살짝 짜증이 났다. 그가 상반신을 일으키자 젊은 어벤저가 재미있다는 듯 비꼬아댔다.
“화났어요? 덤비시게? 그런데 어쩌나.”
그는 어벤저 전용 단말기를 꺼내어 최재철 앞에 들이밀었다. 화면에서는 어벤저 라이센스가 띄워져 있었다. B급.
‘이름은 호일호. 재미있는 이름이네.’
최재철은 기왕 본 김에 호일호의 어벤저 등록 번호도 외워두었다. 일단 외워두면 나중에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젊은 나이에 어떻게 건물주가 될 수 있는지 이제 알겠죠? 꼬우면 님도 각성하든가!”
최재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 어벤저 호일호는 통쾌한 듯 웃었다. 복덕방 아저씨는 그런 호일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저기요, 복덕방 아저씨.”
최재철은 호일호를 무시하고 복덕방 아저씨를 불렀다.
“어? 아, 청년. 무슨 일인가?”
“이 건물, 얼만데요.”
“5억.”
호일호가 대신 대답했다.
“엄청 싸죠? 뭐, 당신한테는 거금이겠지만 나한테는 푼돈이거든! 왜 건물 가격이 이 따위냐? 이 빌라에서 어보미네이션이 날뛰는 참사가 일어나서 아무도 입주하려고 하지 않으니, 당연히 값도 똥값이 되지.”
들뜬 목소리로 호일호는 나불대었다.
“확실히 말해서 투자 가치는 제로에 가까운데 내가 왜 이걸 사려고 하느냐? 궁금하죠? 묻고 싶겠죠. 대답해 드리죠.”
바닥을 손바닥으로 탁, 치면서 그는 멋대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B급 어벤저거든! 그리고 내가 이 빌라에 살면? 어머나, 여기 B급 어벤저가 사니 어보미네이션이 나타나도 괜찮겠네!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들어와 살겠죠! 자, 어때요? B급 어벤저 하나로 똥 매물이 A급 매물이 되는 마법이 짠!”
자랑스럽게 설명을 끝마친 호일호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꼬우면 각성하든가!”
“저기요, 복덕방 아저씨.”
고맙게 설명을 들은 최재철은 복덕방 아저씨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 빌라, 나한테 파시죠.”
“엉?”
호일호가 눈을 크게 껌벅였다.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사겠다고 했다.”
“뭐라?”
“귀가 막혔나?”
“뭐, 뭐?!”
호일호는 분통이 터진 듯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덤벼오면 좋겠는데. 최재철은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호일호는 그에게 덤벼들지는 않았다.
최재철은 픽 웃고 복덕방 아저씨에게 물었다.
“근데 주인아줌마는 이 빌라 팔고 어쩌시겠대요?”
“시골 내려가서 농사를 지을 모양이던데. 요즘 그게 쉽나?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서 정말로 살 건가? 돈은 있고?”
“있으니까 사겠다고 한 거죠.”
“빚이라도 내시게?”
호일호가 끼어들었다. 비웃음과 함께.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모양이었다. 불쌍하게도.
“그럼 계약하시죠.”
복덕방 아저씨의 최재철을 향한 말투가 높임말로 바뀌었다. 아저씨의 머릿속에서 최재철이 그냥 나랑 상관없는 청년에서 거래 대상으로 승격된 순간이었다.
“어어엇, 잠깐! 잠깐!! 아저씨, 왜 이래요? 내가 먼저 왔잖아.”
호일호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런 호일호에게 복덕방 아저씨는 뚱하니 대꾸했다.
“계약을 먼저 하는 게 임자죠.”
“웃돈 드릴게요, 백만 원!”
“천만 원.”
옆에서 듣고 있던 최재철이 슥 말했다. 호일호가 화들짝 놀랐다.
“뭐?!”
“아주머니가 나한테 잘해주시긴 했으니까 그 정도 웃돈이야 얹어드릴 수 있죠.”
지금은 최재철의 모습을 취한 김인수가 아주머니의 인성에 대해 제대로 알 리 만무하지만, 월세를 밀려가면서도 쫓겨나지 않았던 걸 보니 그냥 그랬겠지 하고, 적당히 생각했다. 복덕방 아저씨와 이 호일호에게 잘 부탁한다고 언질도 준 걸 보니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리라.
“그럼 5억 천만 원인가?”
“그건 아니죠, 아저씨! 제가 깎고 깎아서 4억 5천만 원에 한 걸!!”
호일호의 말에 복덕방 아저씨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 말을 들은 최재철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호일호에게 감사를 표했다.
“고맙네, 청년. 4억 6천만 원으로 하죠.”
“어어, 어차피 어벤저가 아니면 제대로 굴릴 수도 없는 자산이라고! 당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르는 건 아니겠지?”
4억 6천백만 원으로 빌라값을 올릴 생각은 없는지, 호일호가 그렇게 짖어대었다.
“딱 좋은 타이밍이로군.”
최재철은 한 번 씨익 웃고, 주머니 속에서 어벤저 네트워크 단말기를 꺼냈다. 그걸 본 호일호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좋은 사업 아이디어 제공해 줘서 고맙네, 청년. 그런데 그런 걸 아무 데서나 떠드는 건 좀 아니지.”
최재철은 단말기를 조작해서 라이센스를 꺼냈다. 물론 라이센스 번호는 슬쩍 가렸다. 최재철의 라이센스를 확인한 호일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는 것이 최재철에게도 보였다.
“A급… 최재철……. 최재철!”
호일호가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벌떡 일어나더니, 그 자리에서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제가 몰라뵀습니다, 최재철 씨!!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엥?”
“TA에서 차원 균열 탐사에 성공하신 그 최재철 씨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TA의 차원 균열 탐사는 어벤저 네트워크는 물론이고 일반 인터넷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팀의 명단까지 공개가 되었다는 건 언뜻 들어서 알고는 있었는데, 그래도 호일호가 이렇게까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건 그에게도 의외였다.
“맞긴 맞는데…….”
“맞군요! 영광입니다! 악수 부탁드립니다!! 당신처럼 되는 게 제 꿈입니다! 최재철 씨, 존경합니다!! 저, 사인 받을 수 있을까요?”
호일호가 펜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그 펜을 뚱하니 바라보던 최재철은 큭큭 대며 웃었다.
그는 펜을 받지 않았다. 대신 팔찌를 내밀었다.
그 팔찌의 이름은 진홍왕의 유물. 최재철은 아티팩트의 효과를 활성화시켰다.
펜을 내민 호일호는 최재철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 건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를 보며 최재철은 입을 열었다.
“특이한 놈이로군.”
“네? 아, 그런 이야기를 자주 듣긴 하지만…….”
“응? 아니, 내가 말한 건 네 능력이야.”
호일호의 표정이 굳었다. 최재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필사 스킬이라니, 굉장히 희귀한 어벤저 스킬이로군. 군대에서 작전병을 하다 각성하기라도 했나 보지? 중대장 사인을 베껴 쓰다가 각성했나? 뭐, 어떤 식으로 각성했는지는 상관없지. 궁금하지도 않고. 대답하려고 들지 마. 네가 대답해야 할 질문의 답은 이게 아니야.”
최재철의 차가운 시선이 호일호에게 내리꽂혔다.
“내 사인을 훔쳐다 어디다 쓰려고 했지?”
“그, 그게 아니라…….”
“분석이라는 스킬이 있어. 상대의 능력과 스킬을 확인하는 스킬이지. 자기 스킬로 사기를 치고 다니려면 거기에 대해 카운터가 되는 스킬도 존재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변명하려던 호일호의 입이 다시 닫혔다.
다음 순간.
차원력을 담뿍 머금은 호일호의 펜촉 끝이 최재철의 미간을 노렸다. 기습을 해보려고 했던 것 같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최재철은 싱긋 웃었다.
최재철의 장저가 호일호의 단전을 때려 부쉈다.
“마음 같아선 고자로 만들어주고 싶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거 같아서 형벌을 한 단계 낮췄네. 뭐, 서울에는 형법이라는 게 있으니 말일세. 나에게는 죄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네에게 벌을 내리도록 하지.”
“무슨, 뭐가? 하나도 안 아픈데, …어?”
겉보기에 호일호에게는 아무런 외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자네의 차원 코일을 박살냈다.”
그리고 최재철은 호일호가 느끼고 있는 위화감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차원 코일이 뭐, 지?”
“자네도 방금 깨달았을 텐데. 그게 뭔지.”
“으어, 으아아아?”
호일호는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 비명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의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평소에 일상적으로 신체 강화 능력을 활성화시키고 다녔기에, 차원력의 소실이 일어나자 스킬에 익숙해져 있던 몸을 가눌 수 없게 된 것이다.
최재철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래, 자네는 어벤저 스킬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었네. 이제 어벤저가 아니다, 이 말일세.”
“하, 악.”
호일호는 억울한 눈으로 최재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에게 최재철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억울하면 다시 각성하든가.”
그와 동시에 진홍왕의 유물이 효과를 마쳤다.
“어?”
진홍왕의 유물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동안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호일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최재철 씨, 사인을… 어?”
진홍왕의 유물이 활성화되기 전의 기억에 따라 그는 최재철에게 펜을 내밀었다. 그 직후, 그는 자신이 필사 스킬은커녕, 기본적인 어벤저 스킬조차 활성화시킬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으아!”
“저 사람 갑자기 왜 저러는가?”
복덕방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또한 기억이 날아갔으니 영문을 모르는 게 당연했다.
“저도 몰라요. 아무튼 뭐, 펜을 빌려줬으니 기왕지사 이 펜으로 계약하도록 하죠.”
호일호의 손에 들린 펜을 최재철은 잡아채었다.
*
“뭐, 잘 됐군.”
세상이 좋아져서 부동산 거래가 상당히 간략화 된지라, 최재철은 그 자리에서 부동산 계약을 마쳤다. 계약을 마친 후 호일호와 복덕방 아저씨는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 호일호는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최재철도, 복덕방 아저씨도 상관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정식으로 이 낡은 빌라 전체가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
덕분에 통장의 잔고는 좀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어차피 이 빌라에 공방을 만들 생각을 하던 차였다. 다른 입주자도 없겠다, 이제 이 공간 전부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 건 정말 괜찮았다.
복덕방 아저씨에게서 받은 열쇠 다발을 보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생각해 보면 10년 전에 그렇게 되고 싶었던 건물주, 흔히 말하는 ‘건물주님’이 된 거다.
호일호의 말대로 입주민을 받으면 좋은 장사가 되겠지만, 최재철은 그럴 생각은 없었다. 복덕방 아저씨도 자길 통해서 입주민을 받지 않겠냐고 말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건물주님의 갑질을 할 기회는 없는 셈이지만,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어휴, 주말이라 좀 쉬려고 했는데 그것도 안 되겠네.”
비싼 돈 주고 산 빌라다, 이대로 내버려 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방을 만들고 이것저것 하려면 앞으로 할 일이 태산이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역시 기분은 좋았다.
*
어보미네이션 진현우.
아니, 사실 그는 자신의 이름도 몰랐다. 그러니 그를 진현우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이상했다. 그의 신체 중 진현우인 부분은 하반신 정도로, 그의 본질은 진현우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는 아무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형은 인간인 채, 진현우인 채 어보미네이션이 되어 버렸다. 그런 그는 일반적인 어보미네이션과는 달랐다.
“컹컹! 컹컹컹!!”
그는 자신을 향해 짖는 개를 빤히 바라보았다. 개는 심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강한 생물의 오라’가 개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어보미네이션인 그는 바로 그 개를 습격해 잡아먹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개를 공격하지 않았다.
“컹컹, 컹컹컹.”
대신 개를 따라 짖었다. 그런 어디서도 못 본 기이한 반응에 개는 완전히 쪼그라들어 짖는 걸 멈추더니,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컹.”
진현우였던 그 존재는 아쉬운 듯 개가 가버린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그는 고개를 돌렸다.
쾅!
그가 서 있던 지면이 충격으로 인해 움푹 패었다. 그리고 그 반작용으로 인해 그의 몸은 하늘로 던져지듯 날았다.
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던져진 곳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피투성이 속에서 정신없이 무언가를 먹고 있는 어보미네이션이 보였다.
리자드독. 최하급으로 분류되는 어보미네이션이다. 그리고 그의 목표물이기도 했다.
리자드독도 그의 접근을 눈치채고 먹이에서 입을 떼었다. 그리고 볼 것도 없다는 듯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한 번 착지한 후, 다시 한 번 지면을 찼을 때 그는 이미 리자드독을 추월하고 있었다. 오른손으로 리자드독의 오금을 붙잡고 그 머리를 땅에 처박아 으깬 그는 리자드독이 부활하기 전에 그 목덜미를 크게 물었다.
되살아난 리자드독은 버둥거렸지만 그의 힘이 훨씬 강했기에 벗어날 수 없었다. 리자드독은 산 채로 그에게 잡아먹히고 있었다.
으적으적.
온몸을 피투성이로 만든 채 결국 비늘 한 조각 남기지 않고 리자드독을 완전히 집어 삼킨 그는 마치 개처럼 몸을 털어대었다. 그리고 리자드독이 방금 전까지 먹고 있던 먹잇감을 보았다.
개였다. 이미 내장을 완전히 먹혀 절명한 상태인 그 개는 그와 면식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 그에게서 도망친 개였다.
“…….”
그는 개의 시체를 몇 초간 바라보았다.
타타타타. 멀리서 헬기 로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그는 본능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쳐야 했다. 이유 같은 건 몰랐다.
*
어느새 시각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한창 작업에 열중하던 최재철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은 그는 진동하는 어벤저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아, 선생님!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오연화였다.
-뭐 하세요?
“집 고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작업의 규모가 그냥 집 고친다는 말 치고는 꽤 크다는 차이점 정도는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1층부터 3층까지의 벽과 바닥, 천장을 다 터서 큰 공동을 만들고 있었다. 차원력 커터로 쓱삭쓱삭 썰어대는 다소 무식한 방식이었다. 철근 콘크리트는 그의 커터 앞에서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배선과 수도관 등이 도중에 걸려 터지기는 했지만 내용물이 흘러나오기 전에 인롱의 팔찌를 이용한 공간 절단 능력으로 막았다. 임시조치다. 나중에 실리콘이라도 부어둘 생각이었다.
어쨌든 그 결과, 3층 높이의 강당 같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이거 건축법 위반이려나.’
자신이 만들어낸 공간을 둘러보며, 최재철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왜?”
-아, 놀자고요.
용건 참 심플해서 좋았다.
“오늘은 좀 쉬려고 하는데.”
-지난주에는 지희 언니랑 놀았다면서요.
전화통 너머 오연화는 잔뜩 삐친 목소리로 항의했다.
-이번 주는 제 차례잖아요.
“아니, 그건 내가 정하는 거지.”
-그건 그렇긴 하지만…….
“작업을 마무리하고 내가 다시 연락하지.”
-아, 네!
확 밝아진 목소리로 오연화가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최재철은 픽 웃었다. S급이고 뭐고, 이런 것만 보면 그냥 어린애다.
*
약속 장소로 나가보니 이지희와 오연화가 함께 있었다.
“주말까지 회사 동료들과 함께라니.”
“아니, 제가 단순한 회사 동료는 아니죠.”
이지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죠.”
“선생과 학생 사이죠.”
오연화가 끼어들었다.
“미안하군. 놀자고 불러낸 건데.”
“아뇨, 쇼핑도 놀이니까요.”
최재철의 말에 오연화는 그에게 달려들어 손을 잡고는 싱글벙글 웃었다. 그걸 본 이지희는 망설이다가 큰마음이라도 먹은 듯 심호흡을 한 번 한 후에 최재철의 반대편 손을 잡았다. 최재철이 뿌리치지 않자 안심한 듯 배시시 웃는 모습이 뭐 귀엽기는 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지만, 최재철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 가자고. 그럼.”
“뭐부터 사면 돼요?”
“냉장고?”
최재철의 세간 장만을 위해 그들은 여기, 용산에 모였다.
서울의 전자제품 유통망은 WF가 거의 장악하고 있다고 들었고, 최재철은 WF에게 한 푼의 이득이라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재래식 시장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하지만 용산이 WF 유통망과의 경쟁으로 약해졌다 한들 착해진 건 아니다. 여긴 여전히 마굴이다.
오히려 약해졌기 때문에 호구의 주머니를 한 푼이라도 더 악착같이 긁어먹으려 든다. 이런 용산 상인들의 악랄함 때문에 더욱 사람들이 용산을 떠나 WF의 유통망을 이용하게 되는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이 악순환에 대해서는 여기 상인들도 잘 알고는 있다. 그럼에도 용산의 이미지를 조금 좋게 만드는 것보다는 자기 호주머니에 10만 원 더 꽂히는 걸 선호한다. 왜냐하면 당장 배가 고프기 때문에.
‘그런 속사정이야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이런 악순환으로 인해 이득을 보는 게 결국 WF라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쨌든 주말인지라 용산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 용산 전자 상가를 가로막고 선 거대한 백화점의 이용객이긴 하지만.
그 백화점을 뒤로하고 전자 상가로 향한 그들은 미리 인터넷으로 사전 조사를 해둔 가게로 향해 필요한 전자 제품들을 샀다.
어벤저 라이센스를 보여주면 재미있을 정도로 가격이 깎여나갔다. 면세혜택은 물론이고 본래 씌우려던 바가지까지 저절로 벗겨져 나가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너희 말이 맞았군.”
“그렇죠?”
어제 여자끼리만 가서 노트북을 샀을 때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어제 이야기는 전해들은 것뿐이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같은 일이 벌어지니 차라리 웃겼다.
사려고 했던 물건들을 다 사서 퀵 서비스로 쏘고, 그 물건을 받아서 설치하기 위해 이제 최재철도 집으로 가야 했다. 이대로 얼굴만 보고 헤어지기도 좀 뭣해서, 최재철은 평소라면 하지 않을 제안을 여자들에게 했다.
“너희도 올래?”
“가도 돼요?”
오연화의 반짝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최재철은 1초미만의 짧은 후회를 했다.
“와도 재밌는 건 없어.”
“그건 저희가 결정하는 거죠.”
이지희도 어째 덩달아 들떠 있었다.
*
최재철과 이지희, 오연화는 최재철의 집에 도착했다.
“여기가 스승님 집이로군요.”
“낡고, 좁고, 더럽지.”
최재철은 자신의 집에 대해 그렇게 평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저기, 선생님.”
오연화가 최재철의 소매 끝을 죽죽 당겼다.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요?”
“집까지 데려다 주마.”
최재철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실망한 오연화가 피이하고 삐친 척을 했다.
“여기 월세는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묻는 이지희의 표정은 진지했다.
“보통은 그런 거 묻는 거 실례라고……. 뭐, 상관없지만, 보증금 200에 월세 35.”
“엄청 싸네요?!”
“싼 거야?”
놀라는 이지희의 반응에 오연화가 어리둥절해했다. 부동산에 대한 기본지식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10대 소녀에게 그런 지식이 있는 게 더 이상하긴 하다.
“어보미네이션이 나왔었대.”
“아… 그래서.”
이지희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요, 선생님.”
오연화가 최재철의 소매를 당겼다.
“자꾸 소매 당기지 마. 소매 늘어날라. 그런데 왜?”
“이 빌라에 남는 방 있나요?”
“왜, 살게?”
“네!”
그런 오연화의 말에 이지희가 의외인 듯 눈을 깜박거렸다.
“넌 좋은 집 살면서 왜?”
“아무리 집이 좋고 넓어봐야 혼자 살면 별 의미가 없더라고.”
10대 여자애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오연화의 배경을 들어서 알고 있는 최재철의 입장에선 씁쓸하게 들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럼 지희랑 같이 사는 게 어때? 그렇게 외로우면. 뭐, 지희가 괜찮다면 말이지만.”
최재철의 제안에 오연화는 싫지는 않은 듯 이지희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나름 괜찮겠네요. 선생님도 같이 사는 거 어때요?”
“가, 같이…….”
이지희가 무슨 망상을 한 건지 뭔가 중얼거리기 시작했지만, 최재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늘 냉장고랑 뭐랑 다 샀는데 무슨 소리야.”
“하긴 그건 그렇네요. 환불하죠!”
“결론이 이상한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도중에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퀵으로 쏴두었던 전자 제품들이 도착했다. 기술자들이 설치를 시작했다.
“뭐, 차라도 대접해야 되는데 집이 영 어수선하네. 설치 끝나면 나가서 뭐라도 먹지. 이번에는 내가 살게.”
“아, 네!”
이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연화의 반응은 조금 색달랐다.
“뭐 먹을 건데요?”
“글쎄, 돈가스?”
“돈가스?”
“넌 생선 커틀릿?”
그렇게 저녁 메뉴에 대한 잡담을 하고 있노라니 설치가 끝났다. 모든 제품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걸 확인한 후, 토요일 오후 늦게까지 수고해 준 기술자들에게 적절한 금액의 팁을 주니 그들은 고맙게 받았다.
“나 어렸을 때는 이런 빌라에 살면 기사들도 막 무시하고 그랬는데.”
최재철은 옛날 생각에 잠겼다. 별로 좋은 추억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지만, 잠깐 피식거릴 에피소드 정도는 되었다.
“아마 어벤저인 거 듣고 와서 그럴 걸요.”
“아아, 그래서 그런가?”
오연화의 말에 최재철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됐다. 이제 밥 먹으러 가자.”
*
저녁은 파스타였다. 지난주에 이지희와 함께 갔던 집이었다. 오연화가 가자고 주장해서 가게 되었다. 셋이서 식사를 마치고 최재철은 여자들과 헤어진 후 냉장고에 넣을 반찬거리를 적당히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별로 쉬지도 못했군.”
계란을 냉장고에 넣으며, 최재철은 투덜거렸다.
이제 곧 밤이 온다. 묻어두었던 계책을 활성화시킬 때가 왔다.
“내일 해도 상관은 없지만.”
최재철의 오른팔에 낀 반지 운반자의 팔찌가 빛을 발했다.
“역시 난 인내심이 없어.”
픽 웃으며, 그는 집을 나섰다.
*
최재철은 은빛 실의 인도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의 그는 최재철이 아니다. 강철 가면을 쓴 괴한, 에스파다 도 오르덴으로서 김인수는 움직이고 있었다.
은빛 실의 끝은 조상평과 연결되어 있다. B급 어벤저이자 이지희를 납치하기 위해 WFF의 사장, 진가충의 명령으로 움직였던 그는 지금 다른 임무에 배정되어 있을 터였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이 WF에 거하게 선전 포고를 해버렸으니, 진가충이 어지간히 이지희에게 미쳐 버리지 않은 이상 병력을 허투로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마도 경기권의 차원 균열 방어에 돌려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김인수의 예상은 맞아들었다. 경기권이라는 예상만 조금 빗나가 조상평 일당은 지금 세종시의 남쪽에 위치한 차원 균열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자세하게 아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지금 김인수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사단 신병 교육 대대였던 장소에 뻐끔히 입을 연, 지금은 WF의 소유물인 차원 균열 앞에 그는 강철의 가면을 쓴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김인수를 막아서야 할 조상평 일당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엎드려 있었다.
조상평을 비롯한 B급 어벤저들은 자신들이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영문을 모를 터였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 깊숙한 곳에 새겨진 공포와 복종심은 그들이 스스로의 행동을 자신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
상대가 이지희가 아니지만 상관없었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 즉 김인수로부터 흘러나오는 차원력은 그가 자신들의 주인임을 무엇보다도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아니, 미친! 뭐 하는 짓들이에요?!”
총을 든 경비대장은 김인수와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어벤저들을 보고 어이가 없어 소리 질렀다. 이해가 안 갈 만도 했다. 차원력을 가지지 못한 일반인은 상대의 차원력도 감지하지 못하니까.
차라리 야생동물이라면 김인수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도망가겠지만, 생물로서의 본능이 많이 퇴화한 인간은 그러지 못한다.
경비대장의 외침에도 조상평 일당은 일어나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그냥 그 자리에 절을 하고만 있을 뿐이었다.
“하, 나 진짜. 야, 안 되겠다. 그냥 쏴라! 저것들까지 쏴버려!!”
경비대장은 그냥 어벤저들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임무를 수행하겠다면 적절한 선택이었다.
경비대원들은 훈련을 잘 받은 것인지 일사불란하게 대장의 명령에 따라 방금 전까지 아군이었던 어벤저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그러나 그 총구가 불을 뿜는 일은 없었다.
조상평이 가장 먼저 뛰어들어 경비대장의 총을 빼앗고 그를 제압했다. 다른 경비 부대원들도 같은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불과 다섯 명의 어벤저에게 30명의 경비대원이 총 한번 못 쏴보고 제압당했다.
원래대로라면 현대 병기가 어중간한 어벤저 스킬을 능가해야 하겠지만 상대가 기습을 가한 것도 있고 그들이 어중간한 어벤저가 아닌 탓도 컸다.
B급 어벤저는 결코 어디에나 널려 있는 흔한 존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김인수가 격을 뛰어넘은 존재일 뿐.
“후.”
김인수는 짧게 웃었다. 그 웃음을 받은 조상평 일당은 황송한 듯 다시 그에게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며 양손을 펼쳐보였다.
“그래, 잘 했다.”
“황, 황송, 하옵니다.”
김인수의 칭찬을 받은 조상평이 떠듬떠듬 말했다. 환희의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자네들은 WF에서 내쳐지게 되겠지. 어쩌면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르네. 그건 마음이 아프군. 그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김인수는 차원 금고에서 사람 머리만 한 상자를 하나 꺼냈다.
“받게. 자네들이 내게 바친 충성의 대가일세.”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상자의 내용물이 뭔지 확인하지도 않고, 조상평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상벌은 명확히 해야 하는 법이지.”
김인수는 다시 한 번 픽 웃고, 차원 균열 안으로 몸을 날렸다. 조상평은 감히 그 뒷모습을 바라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계속 엎드려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확인하게 될 상자 속을 가득 채운 내용물은 보석이었다. 현물 가치로 대략 100억 원에 해당할 그 보석들을 그들은 감히 팔아치우지 못하고 가보로 삼게 될 터였다.
*
김인수가 세종시의 차원 균열을 닫음으로써 진가충이 입은 피해는 지대했다.
세종시 차원 균열 자체의 가치는 그리 크지는 않다. 이게 닫혔다 한들, WF 본사가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문제는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덧셈, 뺄셈으로 간단히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
진가충이 직접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내어 재발 방지를 약속한 다음 날이니만큼, 그 역반응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일이 세 번이나 일어났다. 이제 사람들도 어느 정도 법칙성을 눈치챌 때가 됐다. 에스파다 도 오르덴의 이름까지는 퍼지지 않았어도 강철 가면을 쓴 괴한이 차원 균열을 닫고 돌아다니는 것 같다는 소문이 이미 정보꾼들 사이에서는 돌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닫힌 차원 균열은 오로지 WF의 차원 균열뿐, TA나 국가 소유의 차원 균열은 멀쩡했다. 강철 가면의 괴한이 WF에 원한을 가지고 이런 일을 벌인다는 소문이 퍼질 법도 했다.
소문 치고는 지나치게 황당한 소리라 원래대로라면 믿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닫힌 차원 균열의 숫자도 공식적으로는 아홉 개. 정보꾼들은 WF가 먼저 ‘발견’한 차원 균열도, 강철 가면에 의해 닫혔다는 소식도 이미 손에 넣었다. 합쳐서 열 개째.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아무리 황당한 소리라 한들, 실제로 소문대로 일이 움직이고 WF에 투자한 자기 돈에서 손해가 나자 믿고, 안 믿고는 둘째 치고 투자한 돈은 일단 뺄 수밖에 없다.
그나마 주말이라 주식 매매가 중지되어 그 피해가 수치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월요일이 오지 않길 바라는 개미 투자자들이 인터넷에 토해낸 불꽃같은 반응은 앞일을 익히 예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새로 산 TV가 굉장히 만족스럽군.”
최재철은 자택에 앉아 느긋하게 TV 뉴스를 감상하고 있었다. 본래 뉴스란 감상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지만, 지금 흘러나오는 뉴스는 그를 대단히 흡족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물론 강철 가면의 괴한 같은 뜬소문을 공중파에서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WF의 소유의 차원 균열이 닫혔다는 소식은 WF에서 검열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재미있는 뉴스도 있었다.
[진가충 사장, 급환으로 인한 입원.]
“하!”
이 소릴 듣고도 웃지 않을 수가 있을까. 대기업 회장들이 위기에 처할 때면 활용한다는 입원 카드를 고작 계열사 사장 따위가 쓰고 있는 걸 보면서 지어야 할 표정은 역시 웃는 표정이다. 적어도 WF에 원한을 가진 이라면 모두 웃을 것이다.
[급환으로 인해 업무 수행이 불가능해진 진가충 사장을 대신해 유연학 사장 대행이 업무를 대행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연학 사장 대행은 진가충 사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사장직을 수행했던 인물로…….]
이어지는 아나운서의 자세한 소식도 웃음을 자아냈다. 불과 며칠 전에 퇴임했던 유연학을 도로 앉혀서 사태를 수습하게 하다니.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 본인은 어디까지나 진지했지만, 그건 그의 직업의식에서 우러난 것일 터였다.
최재철은 기지개를 폈다. 아침 식사로는 어제 저녁에 사다 놓은 달걀을 부쳐 먹을 생각이었다.
아주 맛있을 것이다.
*
진가충은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 입원했다는 건 좋을 리 없는 여론을 식히기 위한 방편이었다. 자주 쓰이는 방편이기에 별로 효과는 없을 테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미 입원하는 사진은 찍어둔 터였다. 휠체어를 타고 다 죽어가는 낯빛으로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 진가충은 몰래 그의 자택으로 돌아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병원에서 조용히 누워 있는 게 좋지만, 답답해서 병실에 누워 있기가 싫다는 그의 의견 때문에 완전히 선팅된 리무진까지 동원해서 그를 빼내야 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죄 지은 사람처럼 숨어 다녀야 하는 건가!”
이를 득득 갈며, 진가충은 자신의 비서에게 화풀이를 했다.
그가 잘못한 거야 물론 많지만, 적어도 어제 일어난 일에 대한 그의 잘못은 지분이 그리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이번 일이 그의 책임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진가충은 그런 것까지 생각할 정도의 위인은 아니었다.
“참으십시오, 사장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끙!”
그는 신경질적으로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몸을 풀어야겠어. 적당한 여자를 데리고 오게.”
“적당한 여자 말입니까?”
“그래. 아무나 말고. 적당한 여자 말일세!”
비서는 곤혹스러운 듯 대답을 망설였다. 진가충이 말하는 ‘적당한’의 기준은 상당히 높았다. 적어도 현직 연예인 정도는 되어야 했다. 당연하지만 그 정도의 인물을 지금 당장 대령하기는 힘들었다.
“적당한 여자라면 난 어때?”
그때 집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를 들은 진가충의 움직임이 굳었다.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왜 여기 있지?”
그렇게 묻는 진가충의 시선은 비서를 향해 있었다. 비서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우리 집에 내가 못 있을 이유가 있나?”
“여긴 내 집이야.”
“내 집이기도 하지. 불만스러우면 이혼이라도 하던가.”
목소리의 주인인 여자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나이는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러나 진가충은 그녀가 두렵기라도 한 듯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이름은 유곽희. 진가충의 처였다. 지금 WFF의 사장 대리를 맡고 있는 유연학의 딸이기도 했다. 그리고 유연학은 진가충의 부친인 진가규의 심복이었고, 친구이기도 했다.
“…우린 별거 중 아니었나?”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데 집에 안 돌아와 볼 수가 없더라고.”
유곽희의 말에 시선을 피하고 있던 진가충은 슬그머니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날 놀리러 온 건가?”
“그것도 매력적인 선택이로군.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용건이 있어.”
“빨리 말해.”
“현우가 죽었다며?”
진가충은 시선을 비서에게 돌렸다. 비서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죽은 게 아니야. 행방불명된 거지.”
“행방불명된 셈 치는 거로군.”
“뭐, 그렇다고 해두지.”
아들이 죽었거나 행방불명되었다는데도 여자의 목소리는 밝기만 했다. 왜냐하면 유곽희는 진현우의 친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진현우와 비슷한 연배인 그녀는 진가충의 두 번째 처였다.
“죽은 걸로 해두지 그래. 그편이 내게 좋거든.”
눈을 가늘게 뜨며 유곽희는 말했다. 그 눈빛 속에는 야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진가충은 그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며 그녀에게 종용했다.
“용건을 말해.”
“별거 아니야.”
유곽희는 방 안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남아, 나오렴.”
“남?”
진가충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 진남. 이름은 남이지만 여자애다.
진가충과 유곽희 사이의 자식으로, 진가충의 둘째 딸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이라는 이름은 진가충 본인이 지었다. 그 이름의 의미는 간단했다. 한자로는 남녘 남을 쓰지만, 뜻은 순 한국어다. 혈육이 아닌 남이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지어주기에는 다소 가혹한 이름이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남이 못생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나이를 먹어 다소 얼굴이 무너졌지만 젊은 시절엔 남자답게 생긴 인상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진가충과 절세미인인 유곽희의 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진가충은 진남이 못생긴 게 가장 마음에 안 들었지만, 싫은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진남은 진가충과 전혀 닮지 않았다. 발가락조차 닮지 않았다.
유곽희에게 내연남이 있다는 건 진가충도 알고 있었다. 그 내연남을 몇 개월도 안 가서 쉼 없이 갈아치운다는 것도. 진가충이 남의 말을 할 처지는 아니다. 그가 끊임없이 미성년 여자애들을 불러다가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을 유곽희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략결혼에 가까운 관계였으니, 이 정도는 서로 감안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딸은 다르다. 그냥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딸에게 혈육의 정을 주라니, 그건 싫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남.
그 남의 이름을 지금 유곽희가 부른 것이다. 두 부부에게 있어서는 서로에게 역린이라 부를 수 있는 인물을.
진가충이 아무리 유곽희에게 약하다지만, 눈썹을 꿈틀거릴 정도의 일은 되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곧 변했다.
“예쁘게 컸구나.”
옛날엔 안 그랬는데. 진가충은 그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진남은 아름다워졌다.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건지, 진가충은 잘 알고 있었다. 현대 의학과 WF의 기술을 이용하면 이 정도는 가능하다. 엄청난 돈과 에너지, 그리고 진남 본인의 고통이 필요했겠지만 그 결과물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중학교의 교복으로 몸을 가리고는 있지만, 진가충의 눈에는 아주 잘 보였다.
이제 겨우 10대 중반의 한국인 소녀로는 보이지 않는 풍만한 가슴, 가녀린 팔다리와 대비되도록 단단히 단련된 등과 허리, 그리고 엉덩이의 근육.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단련된 몸이다.
“교육을 아주 잘 시켰군.”
진가충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할 유곽희가 아니었다.
“그렇지?”
유곽희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얼굴마저도 이지희와 똑 닮아 있었다. 대체 어디서 정보를 얻은 건지, 생각해 보면 가슴속이 서늘해질 만도 하련만. 반응은 가슴보다도 그의 중심에서 먼저 왔다.
진가충의 눈동자에서 욕망이 피어올랐다.
“당신 말이라면 뭐든지 들을 거야.”
은근한 유곽희의 말이 그의 마음을 더욱 동하게 만들었다.
“뭐든지?”
“그래. 당신의 후계자가 될 수만 있다면 …뭐든지.”
그 뭐든지에 어떤 행위가 포함되어 있는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나가 알고 있었다.
진남 본인조차도.
“당신 형님한테는 분명 자식이 없었지?”
“그래, 맞아.”
유곽희의 물음에 진가충은 대강 대답했다.
“그렇다면 후계자는…….”
“현우였지.”
원래는.
하지만 진현우는 죽었다. 되살린 ‘것’도 행방불명되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될까?
진가충은 그런 걸 생각하지는 않았다. 진현우는 어차피 전처의 자식이었고, 전처 또한 정략결혼이었다. 진가충은 전처에게 애정도, 애증도 없었다. 진현우는…….
‘응? 현우는?’
아들이었다. 그런데도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놀라울 정도로.
있을 때는 그저 귀찮은 존재였을 뿐이었다. 죽고 나니 오히려 시원스럽기까지 하다.
진가충의 아버지인 진가규는 딱 하나 있는 손자인 진현우를 꽤나 아껴서 무슨 말이든 다 들어주고는 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상하다. 처음부터 그랬나?’
그 ‘처음’이란 게 생각나질 않았다.
‘에잉, 아무렴 어때.’
진가충에게 있어서는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중요한 일은 지금부터 일어날 일이었다.
뭐든지.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란 말인가.
그 단어가 이미 그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놓은 터였다. 다른 생각은 안 날 정도로.
진가충은 입술을 핥았다.
*
진가충이 입술을 핥는 것을 본 유곽희가 입술을 핥았다. 욕망에 불타오를 때 나오는 부부의 공통된 습관이었다. 물론 지금은 진가충과 유곽희가 느끼는 욕망의 종류는 달랐지만, 그래도 유곽희는 나쁜 습관이라고 생각했다.
저 남자랑 같은 습관이라니.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자기혐오는 나중에나 하자.’
유곽희는 자랑스러운 ‘딸’의 머리를 사랑스러운 듯 쓸어주며 속삭였다.
“남아, 아빠한테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렴. 아빠 말 잘 듣고, 가르친 대로 잘 하려무나.”
유곽희의 속삭임은 진가충에게도 들렸다. 저 하반신밖에 없는 것 같은 남자가 군침을 삼키는 것 좀 보라지! 그녀는 톡하면 터질 것만 같은 비웃음을 삼키느라 애써야 했다.
“…네, 어머니.”
진남의 대답이 돌아왔다. ‘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이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를 훈련시킨 장본인인 유곽희의 눈에는 진남의 가슴속에 피어오르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손에 잡힐 듯 알았다.
유곽희에 대한 두려움과 진가충에 대한 혐오, 그리고…….
그녀 자신의 야망.
진남이 자신의 입술을 핥는 것이 보였다. 진가충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슬쩍. 하지만 유곽희에게는 보였다.
‘피도 섞이지 않은 계집애가 나를 따라 하는 걸까? 앙큼한 것.’
진남은 유곽희의 딸이 아니다. 정확하게는 ‘이’ 진남이 그녀의 딸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잘 해낸다면, 그녀는 진짜 진남이 될 터였다. 그렇게 약속해 두었다.
“넌 잘 해낼 거야.”
유곽희는 진남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그녀의 손길에 진남의 움직임이 움찔 굳는 것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귀여운 것.’
유곽희는 생각했다. 진남은 자신이 직접 교육했다. 저 남자의 심장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것 따윈 일도 아니리라.
“그럼 난 이만. 남이를 잘 부탁해.”
“그, 래. 잘 가.”
이미 진가충은 유곽희 쪽은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진남에게 박혀 있었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였다.
유곽희는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를 내며 진가충의 자택에서 나왔다. 이곳은 곧 욕망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는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런 꼴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 따위는 그녀에게 없었다.
그녀는 자택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일주일 정도는 푹 빠져 지내겠지.”
“딱 좋군요.”
리무진 앞좌석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계속 실실 웃고 있는 이 남자는 어벤저였다. 진가충의 심복인 S급 7위 랭커, ‘웃는 얼굴의 헌터’ 아가임이었다. 본래 진가충의 명령에 의해 파주 차원 균열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그가 명백히 근무시간인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어디로 갈까요?”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전 한낱 소유물이니, 주인님의 의향을 항상 물어야 합니다.”
아가임의 말에 유곽희가 흡족하게 웃었다.
“모략이 하나 성공했으니 다음 모략을 실행할 때까지는 쉴 시간이 필요해.”
“그럼 쉴 곳으로 모시죠.”
“그래.”
리무진이 출발했다.